그의 물음에 주효영은 조급해 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왜, 저한테 불을 붙이려고요? 잊었나 본데, 난 당신 직책과 달라요, 난 연구개발을 책임지고, 당신은 외부를 책임지고, 게다가 한소은이 당신의 오랜 친구라며, 아들과 친하는 거 아니었어요? 당신 책임지고 잡아오면 되겠네, 아닌가요?”“잘 아는 사이라서 내가 나서면 안 된다는 거예요.”눈을 가늘게 뜨고, 임상언은 눈앞의 이 요염하고 눈부신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예쁜 눈에는 계산적인 빛이 가득했다.“연구개발팀이라고요? 근데 뭘 연구해냈는데요, 지금까지 쓰는 거 다 이전 제품이잖아요. 사장이 원하는 그거 아직도 성공하지 못하였다면서요, 정말 당신 능력이 의심되네요.”“너…….”급소를 찔려 주효영의 안색이 일변하였다.그러나 임상언은 그녀의 안색을 무시하고 말을 계속했다.“오죽하면 사장님이 한소은을 잡아오게 했을까, 뭐…… 이쪽 실력은 확실히 당신보다 낫으니까 할 말은 없겠죠! 그 사람 곧 오게 될 텐데 시간 없어요! 정말 안 되면 버티지 말고 그냥 말해요, 우리도 대비할 수 있게,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는 좋잖아요.”주효영은 화를 내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내 능력, 사장님은 알아요, 내 성과 세계도 알아주는 거라고요, 당신이 여기서 뭐라고 말할 입장은 아닌 것 같네요! 한소은이 나보다 뛰어나다고, 그럼 잡아오던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지, 나와 한소은 누가 세계 최고인지 나도 궁금하니까!”“말은 잘 하네요, 상대하지 못할 가봐 두려워서 몰래 죽이려고도 했으면서.”“뭐라고요?!”“내가 무슨 말인지는 잘 알고 있을 텐데!”“임상언 너 말 똑바로 해!”“왜요, 뇌용량이 부족한가? 그때 한소은 차 사고, 정말 당신과 관계없는 일인가요?”“그건…….”“그만해!”남자는 그제서야 차가운 눈빛으로 입을 열어 그들의 싸움을 막았다.“같은 편인데 뭘 싸워!”“사장님…….”주효영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데 남자의 시선에 입술을 오므리고는 말을 삼켰다.“임상언 너도 여
“알겠습니다.”주효영은 아주 시원시원하게 대답해서 눈도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남자는 매우 만족하여 고개를 끄덕이며 눈빛도 많이 누그러졌다.“주효영, 너는 내가 왜 너를 가장 좋아하는지 알아?”“보스의 마음을 내가 어떻게 감히 짐작할 수 있겠어요?”주효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나는 너의 냉혈하고 무자비함이 좋아. 임상언처럼 우유부단한 그런 감정이 없어! 큰일을 하는 사람은 마음속에 어떤 인자함도 있어서는 안 돼. 애초에 그렇게 많은 우수한 대학원생 중에서, 나는 너를 선택했어. 바로 네가 충분히 냉혈하고 냉혹했기 때문이야.”주효영은 얼굴색도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보스 말씀이 맞아요.”“R7은 어떻게 되가는 거야?”남자가 말머리를 돌리더니 갑자기 물었다.“말 잘 듣고 있어요. 아직은 순조로워요.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렇게 빨리 새 기지로 옮길 수 없었을 거예요. 보스, 안심하세요. 모든 게 제 손에 잡혀 있어요.”그녀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주효영을 깊이 쳐다보던 남자는 손가락으로 다른 손의 손등을 살짝 짚었다.“전에 네가 R7의 약효를 통제할 수 없어서 계속 사용하지 않고 있다고 했던 거 같은데, 왜 지금 와서 사용한 거지? 이제는 통제할 수 있는 거야?”“통제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에요. 실제로 사용했을 때 효과가 얼마나 발휘될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현재로서는 효과가 만족스러워요. 모든 것이 우리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고 있어요. 당신도 보셨잖아요!”주효영이 대답했다.“좋아! 하지만 임상언의 말도 틀리지 않아, 가장 중요한 R10, 너는 지금까지 성공하지 못했어. 주효영, 내가 너에게 준 시간은 절대 적지 않아, 나의 인내심은 한계가 있어. 너에게 주어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어!”그는 차분한 어조로 위협이 아닌 가장 담담하게 물음을 물었다.그러나 주효영은 오히려 온몸이 휘청거리고 등에 소름이 돋아나는 것 같았다.그녀는 고개를 푹 떨궜다.“알고 있어요. 이미 속도를 높이고 있어요. 곧 성공할 것이라고
“할아버지, 간식 드세요.”아이의 작은 목소리는 여리고 귀여웠다.원 어르신이 고개를 돌리자, 김준이 커다란 쟁반을 들고 있고 가사도우미는 그가 쟁반을 떨어뜨릴까 봐 조심스럽게 옆에서 지키고 있었다.분명히 어린 녀석이 너무 고집이 세서 꼭 자기가 들겠다고 떼를 쓴 것이다.가사 도우미는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으니, 옆에서 지키고 있을 수밖에 없다.“할아버지는 안 먹어. 우리 준이 먹어.”원 어르신은 입술을 치켜 올리며 웃었고 부드럽게 말했다.“할아버지 드세요!”김준은 원 어르신의 말을 듣지 않고 까치발을 들고 서서 쟁반을 열심히 들어 올렸다. 하지만 키가 아직 작은 그는 더 이상 높이 올릴 수 없었다.그 바람에 김준은 비틀거리며 곧 넘어질 것 같았다.원 어르신은 바삐 쟁반을 받쳐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를 건져 올렸다.“아이고, 이 놈아!”옆에서 가사 도우미가 빠르게 쟁반을 가져가니 원 어르신이 직접 아이를 품에 안았다. “할아버지 좀 쉬게 놔둬라!”“간식, 먹어요!”김준은 그의 품에 안겼지만, 여전히 가만히 있지 않고 과자를 집으려 했다.원 어르신은 어쩔 수 없이 손을 흔들어 가사 도우미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그러고는 쟁반 안에서 간식을 가져와 자기 입에 집어넣고 한 입 베어 물었다.그러자 녀석이 마침내 웃기 시작하며 기뻐서 손뼉을 쳤다.그 모습에 원 어르신도 따라서 웃었다.“이 녀석아, 역시 네가 나를 기쁘게 할 줄 아는구나!”“까르르…….”“아이고…….”원 어르신이 갑자기 긴 한숨을 내쉬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애초에, 그 녀석도 너처럼 내가 안 먹는데도 꼭 먹으라고 옆에서 애교를 부렸었는데. 하지만 그의 모든 행동이 모두 내 비위를 맞추려고 했다고 생각해서, 먹으라고 하면 할수록 안 먹었었지. 나중엔 급해서 울기까지 했지 뭐냐. ”말하면서 원 어르신은 웃기 시작했다.웃으면서 그의 입술의 웃음이 점점 굳어졌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자, 눈의 웃음기도 점차 옅어졌다.김준은 아직 그의 말 속의 뜻을 잘 이
원청경은 여러 해 동안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지금의 그는 지팡이를 짚고 휘청거리며 아들과 며느리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거실에 서서 앉지 않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훑어보다가 발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한 노인이 슬리퍼를 질질 끌며 느릿느릿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순간 원청경의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빠른 걸음으로 마중 나가 그의 손을 잡으려 했다. “청현아, 내 동생!”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서 앞으로 두 발짝도 못 나가고 그대로 넘어질 뻔했지만, 다행히 옆에서 그를 부축하고 있었다.옆의 원상철이 바삐 그를 진정시키면서 말했다.“아버지, 천천히 걸으세요.”“나이를 먹고도 이렇게 쉽게 흥분한다.”원청현은 원청경을 흘겨보며 눈살을 찌푸리며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그러고는 김준의 손을 잡고 느릿느릿하게 앉았다.하지만 입으로는 여전히 투덜거렸다.조그마한 아이를 보고 몇몇 사람들은 모두 의아해했다.특히 원청현이 두 눈으로 김준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며 참지 못하고 물었다.“청현아, 이 아이는…….”“당신과 무슨 상관이야!”원청현은 눈썹을 찌푸리며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나이도 많은 사람이 집에 얌전하게 있지 않고, 왜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우린 벌써 몇 십 년 동안 왕래를 하지 않았잖아. 먼 길 오기 귀찮지도 않나?”입으로는 싫다고 말하면서 그 두 사람을 째려보았다.“너희도 그래! 늙은이가 노망이 났다고 쳐도 너희도 노망이 나서 이 소란을 피우는 거야?”“둘째 삼촌! 제발 우리 철수를 살려주세요! 제발!”원철수의 엄마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원청현 앞에 무릎을 꿇고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다.“이게 뭐 하는 짓이야!”원청현은 뒤로 두발을 물러나더니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일어나, 빨리 일어나!”“청현아, 정말 어쩔 수 없으니까 이렇게 부탁하러 온 거야. 제발 우리 좀 도와줘!”원청경은 기침을 두 번 했다.앉아 있었지만, 두 손은 지팡이를 짚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그럼에도
“둘째 삼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원상철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당신은 어른이고, 철수도 당신을 할아버지라고 불렀어요. 당신이 우리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하는 걸 잘 알아요. 그래서 한 번도 감히 찾아오지도 못했죠. 친척의 덕을 보고 말고 하는 건 더욱 없었어요. 그런데 철수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잖아요!”원청현은 원상철을 보며 차갑게 웃다가 말했다.“말이 심하다고? 그 당시 네 아버지가 내게 했던 짓! 지금 고스란히 돌려주는 건데 무슨 잘못이 있다는 거야?”원상철은 어리둥절했다.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원청경은 눈을 드리우고 있었다. 겹겹이 쌓인 주름살이 그의 눈빛을 가로막았고, 그 순간 그의 표정을 알아볼 수 없었다.그러고는 깊게 한숨을 쉬며 원청경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청현아, 너는 여전히 나를 용서하지 않으려는 거야?”“이미 관계를 끊었으니 깨끗이 끊어야지, 용서하느냐 마느냐 하는 게 무슨 소용이야!”김준의 작고 귀엽고 순진한 얼굴을 보면서 원청현이 웃었다.다만 그의 눈빛은 너무 쓸쓸했다.김준도 원청현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어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하지만 할아버지의 눈은 슬퍼 보였고, 김준은 그것을 알아차렸다.김준은 원청현을 기쁘게 하려고 작은 손을 들어 그의 눈을 비볐다.어린아이는 요즘 할아버지가 너무 기분이 안 좋아서 말씀도 잘 안 하시고, 예전처럼 고함도 안 지르고, 멍하니 있을 때가 많다고 생각했다.나이는 어리지만 사람의 기분이 좋은 지 어떤 지는 알 수 있어서 요즘 김준은 아주 얌전하게 말을 잘 들었다.김준의 작은 손을 가볍게 잡고 원청현은 입꼬리를 올리며 그를 기쁘게 하려고 했다. 다만 웃는 것은 억지스러워 보였다.“그래, 그래!”원청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웠다.“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어!”“그는 돌아서서 문밖으로 걸어갔고, 원상철은 그를 부축하러 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아버지, 둘째 삼촌…….”원철수의 어머
원청경이 머리를 숙이자, 원상철과 그의 아내도 함께 머리를 숙였다.순간 온 집안에 ‘쾅쾅’ 거리며 절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김준은 왜 그들이 머리를 숙이는지 물어보고 싶어서 눈을 깜박였지만, 할아버지가 화가 난 모습을 보자 입을 오므리고 꾹 다물었다.“일어나, 모두 일어나! 일어나!”원청현은 울부짖었다.그의 소리가 너무 커서 모든 사람이 멍해져서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원청경, 원청경! 그래, 잘하는 짓이야!”그는 화가 나서 일어나서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나이를 먹고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네가 이러면 내가 너희들 부탁을 들어줄 거로 생각해?”“아니, 정말 부탁하는 거야! 어쩔 수 없었어! CCTV를 다 살펴봐도 철수의 행방을 찾을 수 없어. 그렇게 많은 날이 흘렀는데도 연락 한 통도 없었어! 철수 그 아이가 우릴 걱정시킬 일이 없었다는 걸 너도 알잖아. 아무리 그래도 집에 연락하지 않은 적은 없었어. 분명 사고가 났을 거야! 그리고 그 연구소도 지금은 폐기 상태야. 내가 알아봤더니 그 안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어. 다 어디론가 이사 가버렸단 말이다! 그 안에 있던 사람들도 없어졌어.”“안에 지하실도 있었어. 지하실은 모두 비어 있었지만, 보기에 마치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는 것 같아. 전에도 이 연구소의 교수님이 죽었는데, 이 실험실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 청현아, 몇 십 년 동안, 나는 너에게 부탁을 한 적이 없어. 네 마음속에, 나에 대한 원한이 있다는 걸 잘 알아. 하지만 이번에는! 철수를 찾아올 수만 있다면, 네 마음대로 해! 이 늙은 목숨을 달라고 해도 괜찮아!”“네 목숨은 필요 없어! 쓸모도 없는 목숨을 가져서 뭐 하라고!”원청현은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러고 나서 원청경을 노려보며 말했다.“일어나, 일어나서 말해!”“청현아.”“내가 안 찾는다고 하지도 않았잖아!”원청현은 화가 나서 말했다.이 말은 비록 말투는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들의 마음을 놓게 했다.이 말을 들은 원철수의 가족들은 모두 기뻐
“그럼 우리 철수는…….”원철수의 어머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아들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그녀의 마음은 조금 안정이 되었지만, 원청현의 시체라는 말을 듣고 그녀의 심장은 견딜 수 없게 되었다.“진작에 사람을 보내서 찾고 있어. 소식이 있으면 너희에게 가장 먼저 알려줄게.” 원청현은 앉아서 찻잔을 들고 차를 한 모금 마셨고, 고개를 들어 그들이 모두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뭘 봐! 소식이 있으면 알려 주겠다고 했잖아!”“청현아, 고마워!”원청경은 감동하여 말했다.“나는 네가 우리 철수가 죽는 것을 눈 뜨고 보고만 있지 않을 거란걸 알고 있었어!”“둘째 삼촌, 정말 감사합니다!”원상철 역시 감격에 겨워 말했다.원청현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됐다, 됐어. 나한테 이런 수작 부리지 마. 나를 귀찮게 하지 않으면 다행이야. 이렇게 울고불고하는 꼴을 볼 수 없어서 그런 것뿐이지. 그리고 너! 이 나이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뭘 들볶는 거야! 만약 정말 여기서 잘못되기라도 하면 내 탓 하려고 그러는 거야?”“그 일에 대해서는 나도 다 생각이 있어!”원청경은 뿌듯해하며 말했다.“허튼 말 그만하고, 다음에 다시 오면 문 열어주지 않은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짜증 나, 짜증 나!”말을 마치고 원청현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축였다.원청경은 고개를 끄덕였다.“자, 그럼 우리는 이만 가지. 소식이 있으면 가능한 한 빨리, 가능한 한 빨리 우리에게 알려줘.”“알았어, 알았어, 잔소리도 많아!”원철수의 가족들은 긍정적인 대답을 받았다.비록 아직 원철수의 소식은 없지만, 원청현이 기꺼이 나서서 도와준다고 했고 게다가 이렇게 확실히 그들에게 아들이 아직 살아있다고 말하니 안심할 수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떠난 후, 원청현은 또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이번 일은 절대 간단하지 않다. 원철수가 정말 이 일에 연루되었다면 빠져나오기 어렵다.이 조직은 얽히고설킨 세력이 방대하
다시 한번 악몽에서 깨어난 원철수는 눈을 멍하니 뜨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이런 상황에 익숙해졌다.밤낮으로 반복하니, 그저 괴롭지도 않았다.사실 그는 지금 잠에 들었는지 악몽인지 아니면 깨어났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어쩌면, 깨어나야 현실일지도 모른다!결국 잠이 들면 꿈이라는 것을 알고, 깨어날 희망도 있지만 눈을 뜨면 끝없는 고문이 기다리고 있다.원철수는 임상언이 한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다만 되풀이하여 생각만 했을 뿐, 여전히 그를 믿어야 하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이틀을 기다렸는데도 이곳을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원철수는 설마 또 자기를 놀리는 것이 아닐지 하는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그런데 이렇게 자신을 놀리면 그에게 무슨 이익이 있는 걸까?왜 자기를 먹잇감처럼 놀리는 것일까?원철수가 깊은 생각에 잠겼을 때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평소와는 달리 이번에는 하이힐 소리가 들렸다.얼굴은 여전히 무감각했지만, 눈꺼풀은 움직였다.원철수에게 이 목소리는 가장 무서운 목소리였다.“원 신의.”여자의 목소리는 맑고 듣기 좋았으나 마치 지옥에서 온 것 같았다.원철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왜? 설마 약의 작용으로 귀가 먹었나? 아니면 신경이 마비되어 사람의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건가?”주효영은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원철수를 보며 차가운 눈빛으로 조롱하며 말했다.“…….”“도망가지 못하게 꼭 묶어서 출발해!”주효영은 얼굴을 비스듬하게 밖을 쳐다보며 누군가에게 말했다.순간 원철수의 귀가 움직였고 마침내 약간의 반응을 보였다.그의 마음은 왠지 모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출발? 출발!’‘정말 내가 생각하는 그것인가? 임상언이 내게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어? 정말 떠나는 거야? 그렇다면 내게 도망칠 기회가 있다는 거야!’흔들리는 마음은 누를 수 없었다. 원철수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의 표정을 통제했다.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도록 노력했다.그러나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곧 뛰쳐나올 것처럼 쿵쾅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