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주 부인은 씻고 아침을 먹은 후 정교한 화장을 했다. 그러고는 쇼핑하고 친구들과 모임을 할 계획이었다.최근 온 신경이 진가연의 일에 쏟아부어 친구들과 모임을 하지 못했던 그녀는 오늘은 기필코 그동안 하지 못했던 얘기들을 친구들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로 결심했다.그런 생각을 하며 신경을 써서 백을 고른 후 문밖으로 나가려던 순간,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며 밖에서 한 사람이 빠르게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다가오는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본 주 부인은 순간 기쁨이 가득한 표정으로 바뀌었다."효영아! 돌아왔구나!""응."짧게 대답을 한 주효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위층으로 올라갔다."효영아, 이번엔 연구소로 돌아가지 않는 거지? 집은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 거야?"주 부인은 주효영의 서두르는 모습에 익숙해져 계단을 올라가는 주효영을 따라갔다.하지만 주효영은 대답하지 않고 빠른 발걸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갔다."효영아, 얼마 전에 뉴스를 봤는데 그 연구소의 어느 교수님이 사고를 당했다고 들었어. 혹시 그 실험 아직도 하고 있는 거야? 아니면 그만둔 거야?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집에서 좀 쉬는 게 어때? 엄마가 보기엔 네가 많이 힘들어서 살이 더 빠진 거 같아!"주 부인은 주효영이 대답하든 하지 않든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말을 이어갔다.방에 들어온 주효영은 재빨리 책상으로 걸어가 책상 위의 물건은 쓱 보고는 순간 얼굴색이 변하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내 연필꽂이 어디 갔어?!""무슨 연필꽂이?"주 부인은 눈을 깜빡이며 알아듣지 못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연필꽂이! 내 책상 위에 두었던 연필꽂이 말이야!"주효영은 큰 소리로 화를 내며 테이블을 '탁' 쳤다.이러한 그녀의 태도에 주 부인은 충격을 받았고, 작게 중얼거렸다."모…몰라…….""왜 몰라!"주 부인의 대답에 더욱 화가 난 주효영은 테이블에 금이 갈 정도로 세게 두드리며 미친 듯이 테이블부터 찬장, 서랍, 심지어 뒤쪽의 책장까지 뒤져가며 연필꽂이를 찾았다."바로 여
"효영아, 엄마가 전에도 말했었잖아. 그 아이에게는 그저……."주 부인은 주효영의 마음속에 있는 분노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진정기에게 아첨하는 도구일 뿐이라고?"주효영이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 말은 정말 귀가 아프도록 들었어. 이것 말고는 다른 말은 할 줄 모르는 거야? 그리고 내 연필꽂이는 대체 어디로 간 거야!""난……"“나도 몰라.”주 부인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더 이상 자기의 딸에게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종일 집에 있는데도 모른다고?"주효영은 믿지 못하고 다시 주 부인에게 따져 물었다."또 내 방에 몰래 들어와서 청소한 거 아니야?""……"주효영이 방에 들어가지 말라는 말을 여러 번 했었지만, 종종 집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주 부인은 그렇게 그냥 둘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시간이 나면 여분의 열쇠를 가지고 들어가서 조금 청소하곤 했었다.그러나 연필꽂이는 본 적도 없고, 감히 던질 생각은커녕 그녀의 물건에 손도 대지 않았다."엄만 정말 너의 연필꽂이를 본 적도 없고, 버린 적도 없어!"주 부인이 어조를 낮추며 말했다."그 연필꽂이가 정말 마음에 들면 어떻게 생겼는지 엄마에게 말해줘. 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찾아보도록 할게. 정말 못 찾으면 똑같은 것을 주문 제작해 주면 될 거 아니야! ""엄마는 아무것도 몰라!"주효영의 눈빛에는 "너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라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주 부인은 막 입을 열어 반박하려던 찰나에 주효영이 이어서 하는 말을 들었다."최근에 내 방에 누가 또 들어왔었어? 아니면 우리 집에 온 적 있어?""음……"그녀의 물음에 주 부인은 조금 멍해졌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아무도 없었어! 최근에 친구들과 약속도 없었고, 네 아버지 말고는 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뿐인……"이렇게 말하다 주 부인이 무언가를 기억해 낸 듯 이어 말했다."아, 그래, 가연이가 한 번 왔었지. 하지만 네 방에는 들어가지
주효영은 대답하지 않고 빠르게 걷기만 했다. 그러다 방금 귀가한 주현철과 정면으로 부딪칠 뻔했다."왜 이렇게 앞도 안 보고 가는 거야?"주현철의 얼굴은 언뜻 보기에도 기분이 좋지 않은 듯 어두웠다."주효영, 거기 멈춰!"주효영은 옆으로 흘깃 쳐다보더니 그를 무시하고 계속 걸어 나갔다."주효영! 아빠가 말하는데 이게 무슨 버릇이야? "주현철은 매우 화가 나서 그녀를 끌어당기려고 앞으로 나아갔지만 눈치 빠른 주 부인이 그를 말려 세웠다."당신 그만 해요. 두 사람 왜 그래요. 만나면 서로 싸우고, 일 년에 몇 번 밖에 볼 수 없는데!""이게 다 당신이 딸을 이렇게 버릇없이 키워서 그렇잖아!"주현철은 욕설을 퍼부었다. 주효영이 이미 멀리 가 차에 올라탄 것을 보고 더 이상 그녀를 좇아가려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주 부인에게 험한 말을 내뱉었다.“하나하나 다 내 등골 빼먹는 사람 같으니라고!”주 부인은 남편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지금 누구보고 하는 소리예요?""당신 딸하고 그 망할 진가연하고 썩을 놈의 진정기 그 자식 말이야!”주현철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소파에 무겁게 앉았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머리를 잡고 세게 문질러 엉망으로 만들었다.그를 바라보며 주 부인은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당황했다."당신 왜 그래요. 왜 갑자기 하지 않던 욕을 다하고…… 게다가 당신 매형까지……"주 부인은 잠시 멈칫하다 목소리를 낮추고 주위를 확인하고는 일하는 아주머니들을 다 내보냈다."왜 그래요? 감히 당신 매형을 욕하기까지 하고."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주현철이 감히 진정기기를 꾸짖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에 아무리 화가 나도 그저 몇 마디 투덜대기만 했지, 오늘처럼 이름까지 대며 욕을 한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욕해? 욕할 뿐만 아니라 때려버릴 거야! 이 늙은 자식이 나한테 더러운 장난을 치다니! 그래도 매형인데, 이 자식이 정말! 내 누나가 저승에서도 편히 있지 못할 거야!"그는 화난 목소리로 침을 뱉으며 진정
"만약 김씨 가문에게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면 왜 김씨 가문에게 그렇게 좋은 프로젝트를 준 거야! 왜 처남인 내게 주지 않고?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처남보다 더 친하단 말이야? 다 돈 때문이겠지! 다만,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돈을 주고받았는지 모를 뿐이야.”“그럼 그렇지! 제아무리 진정기라 해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렇게 청렴하고 깨끗할 수 있겠어! 이렇게 꽁꽁 숨기고 있었다니!”주현철은 말을 하면 할수록 더욱 불만이 많아졌고, 화가 나서 그 자리에서 확 일어났다."내가 그 자식에게 찾아가야겠어!"그가 막 떠나려던 순간 아내가 뒤따라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그녀를 막아 나섰다."뭐 하는 거야, 말리지 마! 오늘 당신이 말린다 해도 난 갈 거야! 가서 따져야겠어! 진정기 그 자식 선을 넘었어!”"내가 왜 당신을 말려요! 나도 같이 갈 거예요!"주 부인은 자기 가방을 챙기며 말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설명을 들어야 해요!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우리가 그 집의 얼마나 많은 일을 해주었는데!”“나는 가연이를 내 딸로 삼고 효영이가 질투 날 정도로 잘해줬어요! 그런데 고작 프로젝트 하나도 주지 않는다니! 우리가 무슨 과분한 걸 바란 것도 아니잖아요. 정말 너무했어요!”그녀는 오랜 세월 억눌려 있던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 나온 듯이 분개하며 말했다."가서 따져야 해요! 가연이의 병을 치료하려 내가 신의까지 모셔 왔는데! 내가 아니었으면 가연이 그 애는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데!”"그 자식, 가연이를 얼마나 예뻐하는 거 같지도 않더니만, 흥!"주현철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밖에서 여잘 만나고 있었잖아! 어쩌면 아들 하나 낳으려고 그랬을 수도 있지. 만약 정말 가연이를 아낀다면 독에 중독되었는데도 아직 조사한다는 말도 없고 가만히 있을 리 없어!”서둘러 남편을 따라 문밖으로 나가던 주 부인은 멈칫하다 남편을 쳐다보며 말했다."당신이 이렇게 말하니 그런 것도 같네요! 그럼, 그 사람이 몇 년 동안 가연이를 예뻐하는 척한 거예요?""그런
"효영이, 네가 왜 여기에 있어?"주 부인은 깜짝 놀라 빠르게 딸의 앞으로 달려갔다.그러자 주효영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엄마 아빠는 왜 여기로 온 거에요?”"당연히 일이 있어서 왔지! 넌?"주현철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물었다."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주효영은 주현철에게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진가연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물었다."내 연필꽂이 어디에다 뒀어?"진가연은 두 손을 벌리며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언니, 난 정말 언니가 말한 연필꽂이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겠고, 게다가 언니 연필꽂이로 내가 뭘 하겠어?""네가 그걸 가져가서 뭘 하려는 지는 모르겠고, 우리 엄마가 지난 이틀 동안 우리 집에 온 사람은 너뿐이라고 했어!"주효영은 냉정하게 말했다.갑자기 딸이 자기를 말하자 주 부인은 약간 어색하게 웃으며 진가연에게 말했다."가연아, 네 언니의 연필꽂이가 사라졌어. 효영이가 매우 중요한 것이래. 지난 이틀 동안 널 제외하고는 우리 집에 온 사람이 없었던 것도 맞아. 외숙모도 네가 가져갔다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혹시 네가 모르는 사이에 딸려 온 게 아닌가 해서…….”주 부인은 최대한 둘러 말했다. 만약 그녀가 가져갔다고 확신에 찬 말로 한다면 그건 도둑질했다는 것이 돼버린다. 모르는 사이에 딸려 왔다고 하면서 진가연의 체면도 살리고 물건을 내놓게 하려는 생각이었다.연필꽂이는 주효영의 방에 놓여 있었던 것인데 사실 모르는 사이에 딸려 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외숙모, 진짜 내가 가져간 게 아니에요. 그날 위층에 올라가지도 않았었는데 기억 안 나세요?”진가연은 자기가 한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며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가연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 어딘가 착오가 있을지도 몰라…… 그나저나 네 아버지는 언제 돌아오시니?"주 부인과 주현철의 모든 신경은 진정기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효영이 말한 연필꽂이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그 대화는 부드럽게 넘어갔다."우리 아빠는……
주 부인은 자신을 칭찬하며 진가연 앞에서 모두 자기의 공로라고 표현하고 싶었다.만약 자신이 아니었다면 진가연이 오늘 이렇게 살이 빠지지도 못했고 얼굴에 혈색이 돌 만큼 건강해지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걸 알게 하고 싶었다.어쨌든 진정기는 그들에게 큰 신세를 졌다! 프로젝트 건에 대한 설명이 있을 때까지는 끝날 수 없다!"그 약을 꾸준히 먹었다면 지금 이런 모습이 아니었겠지."주효영은 진가연을 곁눈으로 흘겨보고 차갑게 미소 지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러자 진가연이 주 부인의 손을 뿌리치고 몸을 곧게 펴더니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가 주효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지금의 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 거야? 신의가 내게 어떤 약을 처방했는지, 효과가 어때야 하는 건지 언니가 어떻게 알아? 혹시 언니도 의술을 할 줄 아는 거야?”옆에서 듣고 있던 주 부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멈칫하더니 해명했다."그래도 네 언니는 오랫동안 의학 공부를 했잖니, 기억 안 나?”"언니가 배운 건 서양의학이잖아요."진가연이 주 부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하지만 언니가 언제 한의학을 배웠고 이렇게 대단한 의술을 가지게 된 거죠?”"넌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공부도 제대로 안 했는데 뭘 알겠어?"주효영은 진가연과 대화할 때 조금도 그녀의 체면을 봐주려 하지 않았다.어렸을 때부터 주효영은 진가연과 친하지 않았다. 그래서 언니 동생 하는 그런 애틋한 감정이 없었다. 진가연도 어렸을 때부터 주효영이 자기를 싫어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왜 자기를 그토록 싫어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그때의 진가연은 지금처럼 살이 많이 쪄 몸매가 변한 상태는 아니었다. 어디를 가나 통통해서 귀엽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었다. 그 시절 그녀는 주효영과 놀고 싶었고 사촌 언니와 잘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주효영은 항상 차가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말투도 차가웠다.주효영이 계속 차갑게 대하자 진가연도 더 이상 주동적으로 그녀에게 달갑게 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효영아
“그 말 못 들어 봤니? 새엄마가 있으면 새 아빠도 있다고! 전에 네 아빠가 널 얼마나 예뻐해도 새엄마가 들어오면 네가 편한 날이 있을 거 같아?”주 부인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진가연을 타일렀다.“게다가 그 여자가 무슨 심보로 너희 집에 들어오는지도 모르잖아! 분명 네 아빠의 권력과 돈을 보고 온 것일 거야! 네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대한다면 앞으로 혼자서 어떻게 감당하려고 해!”"맞아!"옆에 있던 주현철이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게다가 이렇게 신경도 안 쓰는 것처럼 말하면 죽은 네 엄마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우리 엄마가 돌아가신 지 20년이 넘었어요. 엄마가 하늘나라에 계신다면 아빠가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실 것 같아요. 그리고 ……"잠시 말을 머뭇거리다 진가연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외숙모와 외삼촌, 우리 아빠의 개인적인 일에 너무 간섭하는 거 아닌가요?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면 제가 아니라 아빠한테 가서 얘기하는 게 더 맞는 거 같네요.""그게 ……"주씨 부부는 서로를 바라보다 주 부인이 먼저 진가연의 팔을 잡아당겼다."바보 같은 계집애야. 네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네 아빠가 아직도 우리 말을 들을 거 같아? 우리는 너의 외숙모고, 외삼촌이야. 우리도 너를 위해 이렇게 말하는 거라고!""좋은 마음으로 말한 거 알아요. 그 점은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전 이제 혼자서도 살 수 있을 만큼 컸어요."진가연이 담담하게 말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주효영은 조바심이 났다.진정기가 다른 여자를 찾았는지. 진가연에게 새엄마가 생길지 아닌지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녀가 신경 쓰는 것은 오로지 연필꽂이 안에 있는 것뿐이었다."진가연,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내 물건은 대체 어디 있어?"그녀는 눈썹을 한껏 찌푸리며 조급하게 말했다."방금도 말했었잖아. 난 언니의 연필꽂이를 본 적도 없고, 언니 방에 들어가 본 적도 없어."진가연은 주효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주효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한번 켜고 말했다."그래, 네
"가연아!"그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더니 서류 가방을 소파에 버리고 몸을 숙인 채 긴장한 얼굴로 딸을 바라보았다.진가연의 이마에 상처를 입어서 피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눈을 반쯤 뜨고 자기의 아버지를 쳐다보았다."아빠…….""말하지 마. 병원에 가자!"진정기는 긴장하면서도 안쓰러운 표정이었다."언니……."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계단 위에 있는 주효영을 쳐다보았다.주효영은 원래 위층으로 올라가려 했는데 진정기의 목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계단 위에 서 있던 주효영은 아주 갑작스럽게 진가연한테 호명되었다.진정기는 진가연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몇 년 동안 보지 못했던 조카가 눈에 들어왔다.진정기의 눈빛에 주효영은 입술을 움직이며 말했다."고모부.""흥!"진정기는 콧방귀를 뀌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자기 딸을 안아 들려고 했다.하지만 너무 무거워서 그런지 그는 진가연을 안아 들지 못했다."아무도 없어?"그는 화를 내며 소리쳤다."아빠, 저 괜찮아요!"진가연은 몸부림을 치며 일어서려고 했다. 몸과 머리가 좀 아픈 것 외에는 그녀는 심하기 불편한 데 없었다."가만있어! 움직이지 말고!"진정기는 낮은 소리로 호통을 쳤다. 그러자 도우미들이 달려와 그녀를 들고 밖에 있는 차에 태웠다.진정기가 차에 탔을 때, 기사는 아주 눈치 빠르게 이미 운전석에 앉아있었다. 주 부인도 같이 차에 타려고 했다."형부, 제가 같이 가드릴게요."하지만 진정기는 이미 손으로 차 문을 막으며 차갑게 말했다."됐어!"차 문이 쾅 하고 닫혔다. 진정기는 갑자기 뭐가 생각났는지 옆에 지키고 서 있는 도우미에게 말했다."손님을 내보내. 그리고 대문을 잘 닫아둬. 쓸데없는 사람들을 함부로 들여보내지 말고!""네!"도우미는 바로 그 뜻을 이해하고 대답했다.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기사에게 말했다."출발해!"차에 타지 못한 주 부인은 그저 눈뜨고 차가 떠나는 걸 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표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