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요!”김서진은 기분이 좋은 듯 크게 웃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한소은이 화가 난 척을 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지금 그녀가 질투하는 모습을 보니 내심 기뻤다.그는 한소은이 가끔 이렇게 질투하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한다. 그렇지 않으면 온종일 작업실에서 화초 더미에 몰두하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면 자기보다 생명이 없는 마른 풀때기를 더 사랑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지난달에 진 부장 두 번 정도 만난 적 있었잖아요. 그때 자기의 딸에게 카톡을 보내는 걸 봤어요. 그래서 기억한 거예요.”장난은 장난이고 해명할 때는 엄숙한 표정을 지어야만 신빙성이 강하다.“여자가 이렇게 우중충한 프사를 하는 걸 거의 본 적이 없어서 인상이 깊었나 봐요.”한소은은 그를 한번 쓱 보고는 핸드폰에 뜬 진가연의 프사를 확인했다.확실히 그의 말대로 우중충한 프사를 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엔 회색 같기도 했다. 프사를 크게 키워서 보니 정말 우중충한 하늘이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한 하늘 아래 작은 강아지가 외롭게 꽃 한 송이를 지키고 있는 사진이었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왕따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한소은은 진가연에 대한 소문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진가연은 열일곱, 열여덟 되는 꽃다운 나이에 부잣집 아가씨다. 그런 그녀가 밝고 즐겁게 십 대 생활을 즐겨야 마땅한데 이런 프사는 정말 그녀와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진가연의 친구 추가 메시지는 쿨하게 단 세글자였다.이름도 아니고 인사말도 아닌 ————스커트였다.그녀는 아마 말을 돌려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한소은은 단번에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다.반면 옆에 있던 김서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스커트? 그게 무슨 뜻이에요?”“내가 그 아이의 스커트를 뺏어갔거든요.”한소은은 고개를 돌리며 느긋하게 말했다.“당신이…… 이 아이의 스커트를 뺏어 갔다고요?”그녀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김서진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빨리 무슨 일인지 알려달라는
‘쯧쯧, 이 남자가 달콤한 말을 하는 수준이 날이 다르게 발전하고 있어.’마음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한소은은 김서진이 이런 말을 하는 게 좋았다.김서진이 듣기 좋은 말로 기분을 좋게 했으니, 한소은은 그에게 상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뒤로 돌아 두 팔로 살며시 그의 목을 감고는 그윽한 두 눈으로 바라보았다.“남편이 이렇게 잘해주니 아내인 내가 철이 없어서는 안 되겠죠?”“응?”김서진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한소은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섹시하고 매혹적이었다.“진가연의 신분을 알고 있었으니, 당신이 난처할 만한 상황은 만들지 않았어요!”한소은은 바보가 아니다. 그 스커트를 강제적으로 구매했지만, 그 매장 직원이 예약을 확인하지도 않고 통쾌하게 결제한 걸 보면 분명 두 사람 사이에 불을 지피려는 속셈이다. 하지만, 한소은은 그 직원이 그렇게 쉽게 하고자 하는 일을 하게 두지는 않을 사람이다.“어유, 착하지!”김서진은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를 살짝 치고는 그녀를 안아 들고 바로 위층 안방으로 향했다.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한소은은 깜짝 놀라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말로는 뭐 하는 건지 물었지만 자기가 떨어질까 두려웠던 한소은은 두 팔로 김서진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시간이 늦었잖아요. 이제 쉴 시간이에요! 다른 건 내일 생각해요!”“하지만 아직 답장을…….”“방에 가서 답장해도 되잖아요!”한소은은 무슨 일을 하기 시작하면 끝을 보지 않는 한 멈출 줄 몰랐다. 남편인 그는 당연히 그녀를 돌볼 의무가 있다.————오후의 햇살이 따사로웠다.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뚫고 투명한 유리에 비치니 조금 따뜻함이 전해져 왔다.한소은은 느릿하게 잔에 담긴 우유를 저었다.‘쯧, 임신해서 커피를 못 마시는 건 정말 아쉬운 일이야.’얼마 지나지 않아서 검은색 차가 카페 앞에 서더니 거기서 여자아이 하나가 내려왔다.이런 날씨에도 자기를 꽁꽁 싼 여자아이는 바로 카페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고개를 들
한소은은 검지 손가락을 입 앞에 대며 담담한 미소로 그녀를 진정시켰다.“진가 연 씨, 당신의 스커트가 나에게 있다는 건 누가 알려준 거야?”“……그건 알 거 없어요!”진가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어서 말했다.“남의 것을 빼앗았으면 쿨하게 인정해야 하는 게 아닌가요?”그러고는 흥 하는 코웃음과 함께 한마디 덧붙였다.“나는 당신이 자기 남편이 돈 몇 푼 있다고 위세를 부릴 줄 알았는데 결국은 그저 자기가 한 일을 인정하지도 못하는 겁쟁이였군요!”진가연의 조롱 섞인 말을 듣고도 한소은은 화를 내지 않고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한참이 지나서야 손에 쥐었던 티스푼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눈앞의 여자아이를 찬찬히 훑어보았다.진가연은 한소은보다 겨우 몇 살만 어렸지만, 그녀의 눈에는 그저 조금 통통한 어린아이처럼 보였다.“나도 진가연씨가 똑똑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쉽게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할 줄은 몰랐네.”그녀의 말에 진가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그게 무슨 말이에요?”“당신이 그 스커트를 예약한 걸 알면서도 내가 고집을 부려 사 갔다고 그 매장 직원이 이렇게 말했겠지? 내가 일부러 당신과 맞서려 한다고?”한소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진가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에서 자기의 말이 맞았다는 걸 알아차렸다.진가연은 입술을 오므리고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소은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여전히 경계하고 있었다.“진가연씨, 당신의 몸에 맞게 제작된 스커트라면 왜 안쪽에 두지 않고 내가 볼 수 있게 했을까?”한소은은 천천히 우유를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내가 매장에서 스커트를 사 간 건 맞아. 하지만 그건 매장 직원이 추천해 준 거야.”진가연은 바보가 아니다. 이렇게까지 말랬으니 진가연이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다.이런 일이 있다는 걸 들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에게 이런 일이 발생하니 불쾌할 수밖에 없다.그 매장 직원이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한소은은 자기가 그 스커트를 예약했다는 걸
스커트의 재질부터 자수, 끝맺음까지…… 아무리 자세히 봐도 자기가 예약한 그 스커트가 맞았다.“아직도 변명하는 거예요?”진가연은 스커트를 내려놓으며 화가 나서 말했다.‘정말 나를 바보로 아는 건가? 이건 분명히 내가 예약한 그 스커트잖아!’그러자 한소은은 스커트의 한 자락을 짚고 웃으며 말했다.“진가연씨, 급해하지 말고 자세히 봐봐. 이 스커트는 내가 그 매장에서 사 온 거야. 어쩌면 양식이나 스커트를 만든 재질이 비슷할 수도 있지만…… 확실히 당신의 것이 아니야.”“당신이 뭔데…….”“진가연씨의 스커트는 아직 매장에 있어!”한소은은 진가연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그녀의 말에 순간 진가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눈을 깜빡이며 알 듯 말 듯 한 표정을 지어냈다.“진가연씨, 당신이 스커트를 예약하면서 예약금을 냈었지?”“당연하죠!”예약금을 물지 않으면 예약했다고 할 수 없다. 게다가 그녀는 50%의 예약금을 냈고 자기의 몸매가 통통한 편이어서 스커트를 조금 크게 만들어 달라고 했었다.그 매장의 스커트는 예쁘기도 하고 작업 재료도 좋았다. 그녀와 같은 몸매는 원래 몸에 맞는 옷을 고르기 힘들기 때문에 몸매가 좋지 않은 부분을 가릴 수 있는 스커트를 찾는 것 어려운 일이다.그렇기 때문에 진가연의 그 매장의 단골이다.그래서 자신이 주문한 스커트를 사 갔다는 말을 듣고 화를 냈다.그 직원이 한소은이 그녀가 예약한 스커트라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사가겠다고 말했고, 또 뚱보가 예쁜 스커트를 사는 것은 그야말로 낭비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녀는 화를 참지 못하고 한소은을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만약 교양 있는 집안의 딸이 아녔다면 한소은을 보자마자 화부터 냈을 것이다.“그럼 맞아. 예약금을 냈으니 그 스커트는 당신의 것이야. 어떤 매장에서도 예약금을 낸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판매할 순 없어. 그러니 당신의 스커트는 분명 아직 매장에 있을 거야. 지금 내가 당신에게 준 건 그저 비슷한 스커트일 뿐이라는 거지!”한소은은 손가락으로 스커트를 툭툭
진가연은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알고 있다. 자기에게 예쁘다고 칭찬한다는 것은 분명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원래 한소은에게 조금 호감이 있었는데 그녀가 이런 말을 하자 조금의 호감도 없어졌다.진가연이 변덕스럽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한소은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민감한 사람은 바로 이러했다. 한마디 말이 그녀를 기쁘게 할 수도 있지만 한마디 말로 화나게 할 수도 있다.“아첨하려 하는 말이 아니야. 넌 정말 예뻐!”한소은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맞아, 너의 몸매가 좋지 않은 건 사실이야. 조금 비만인 거 같기도 해. 하지만 피부는 정말 좋아. 난 여자아이가 이렇게 하얗고 좋은 피부를 가진 걸 본 적이 거의 없어. 살만 조금 뺀다면 정말 이쁠 텐데 말이야.”그녀의 분석을 들으니, 근거가 있고 얼버무리는 것 같지 않다. 진가연의 눈에는 빛이 조금 나는 듯 했지만, 그 빛은 바로 사그라들었다.“하지만 난 살이 잘 빠지지 않는걸요.”오랜 시간 동안 진가연은 많은 방법을 시도해 보았다. 운동을 하든 음식을 적게 먹든 다른 다이어트 방법을 시도하든 살이 빠지지는 않았다.가장 심각했을 때, 배고픔에 기절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일하는 아주머니가 그녀를 발견해 병원으로 이송해서 무사할 수 있었다.이 일로 인해 그녀는 아빠에게 된통 크게 혼났다. 다이어트에 성공하면 좋은 거지만 건강이 최우선이라 여러 번 시도해도 살이 빠지지 않으니 진가연은 다이어트를 포기하게 되었다.그 후로부터 외출할 때마다 진가연은 자신을 꽁꽁 싸서 다른 사람을 보고 싶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자산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다.만약 이번에 스커트 소동이 아니었다면, 한소은이 여기서 만나자고 약속하지 않았다면 절대 나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다이어트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방법이 틀렸기 때문이야.”한소은은 진가연을 보다 갑자기 손을 내밀어 블루베리 케이크를 그녀의 앞으로 밀었다.“먹을래?”진가연은 놀란 두 눈으로 한소은을 바라보다 연신 고개를 저으며 당
입이 약간 달았다.솔직히 이 블루베리 케이크는 이전에 그녀가 먹었던 케이크만큼 달지 않았다. 요구르트 맛이 났고 생각보다 덜 달았다. 하지만 그녀처럼 오랫동안 디저트를 제대로 먹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별미였다!한 입 먹어보고는 통제할 수 없이 케이크를 입 속으로 마구 집어넣었다.그러나 한소은은 그녀의 손을 꾹 눌렀다. "잠깐만!"진가연은 고개를 들어 이해할 수 없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어냈다.지금 계속 먹지 못하게 하면 그녀는 바로 화를 낼 생각이었다."다 네 거야, 하지만 천천히 먹겠다고 약속해! 음식의 맛을 느끼면서 천천히 음미해. 케이크의 달콤함과 부드러움을 느끼면서…….”진가연은 지금껏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매번 그녀가 음식을 먹을 때면 부모님은 항상 많이 먹고 빨리 먹으라고 했고, 다이어트를 할 때는 그녀에게 가혹하게 이것도 먹지 못하게 하고 저것도 먹지 못하게 했다.아무도, 그녀가 천천히 음식의 맛을 음미하도록 진지하게 말 한 적이 없다.진가연은 한소은의 말을 듣고 천천히, 한 입 한 입 입에 넣었다. 요구르트가 혀끝에서 녹고, 혀끝의 맛이 뇌로 전달되는 것은 놀랍게도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문득 그녀는 케이크를 먹다 멈춰서 얼마 남지 않은 블루베리 케이크를 바라보며 멍하니 있었다.“왜?”진가연이 멈춘 것을 보고 한소은이 물었다.“맛이 없는 거야?”그러자 진가연이 고개를 저으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나는 지금까지 음식의 맛을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었어요. 음식은 지금까지 나에게 유혹이자 함정이자 적이었어요.”“음식은 나를 뚱뚱하게 만들고, 멈출 수 없게 만들고, 계속 먹게 유혹하고, 스스로 몸부림치게 하는 적이었어요. 난…….”말을 한 번에 내뱉던 진가연은 숨이 차서 말을 멈추었다.그러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포크를 내려놓고 침묵했다.“인간은 먹어야 살 수 있어. 네 몸이 소모하는 건 음식에서 얻는 영양이지. 음식은 네 적이 아니야.”한소은은 담담하게 말하며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
진가연은 몸을 돌려 밖으로 두 걸음 가다가 갑자기 다시 돌아서 한소은을 향해 말했다."참, 다음 주 내 생일파티에 당신과 김서진 씨를 초대할게요! 오실 거죠?”사실 한소은과 김서진은 이런 파티에 참석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녀는 마음을 바꾸었다.“당연하지!”그제야 진가연은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카페에서 나갔다.————한의약 연구소이곳에는 올해 금방 리모델링한 연구소가 하나 준비되어 있다. 이 연구소는 “리딩쇼”라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위해 특별히 준비된 연구소다.연구소 안에서는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모두 한껏 긴장한 표정을 하고 컴퓨터에 뜨는 수치를 유심히 지켜보며 조심스럽게 시험관에 약초 성분을 추출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모든 것이 일사불란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연구소 내의 공기가 마치 굳어버린 것처럼 조용하고, 컴퓨터가 작동되고 있는 미세한 소리와 시험관의 똑딱거리는 소리만 들렸다.실험용 테이블 위에는 총 세 개의 파이프가 놓여 있는데, 컴퓨터의 카운트다운이 0이 되면서 추출이 끝났다.그러나 모든 사람의 표정은 느슨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 긴장되어 있었다.최종 결과가 곧 나오게 되었지만, 누구도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나이가 많은 두 노인이 안경을 쓰고 테이블로 다가가 열심히 분석한 후에 시험지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 두 사람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고, 미간을 약간 찌푸린 것이 마치 시험지의 냄새를 다시 음미하는 것 같았다.그러나 잠시 후……“에취, 에취!”연신 재채기하던 두 사람은 연신 고개를 흔들며 표정이 어두워졌다.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 이번에도 실험이 실패했다는 걸 의미한다.“여전히 약초의 향기가 남아 있어요. 향료를 섞으니, 냄새가 더욱 강력해져서 이대론 완성품이라 말할 수도 없어요!”그중 한 노인이 시험지를 냅다 버리며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우리는 원래부터 향료에 대해 잘 알지 못해요. 사실 약초는 자기만의 독특한 특성이 있는데 서로 다른 냄새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죠?"연구소로 들어온 원철수가 다시 물었다.“그래도 전공으로 한의약을 배운 사람들인 데다가 이 업계에서 수십 년을 일한 사람들인데, 여자아이에 잡히다니! 당신들은 여자보다 못하는 걸 인정하는 거예요?”“원 선생님, 우리가 허망하게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한소은 씨는 이 방면에서 우리가 도달하지 못하는 능력이 있어요. 실험이 성공하지 못했을 때 우리도 무슨 이유인지 모르는데 오직 그녀만이 문제를 찾아낼 수 있었어요. 때로는 그녀의 한마디에, 결과가 크게 달라졌었어요."그중 한 연구원이 참지 못하고 한소은을 칭찬했다.사람은 모두 강한 사람을 존경한다. 한소은의 실력은 모두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러므로 더욱 그녀에게 승복했다. 그래서 그녀가 프로젝트에서 손을 뗀다고 했을 때 모두 의기소침했었다.“흥!”원철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실험에 계속 실패하는 건 당신들이 무능하기 때문이지 그 여자가 얼마나 대단한 게 아니에요! 실험이 실패하면 반복해서 하면 되고 데이터에 문제가 있으면 조절하면 되는데 당신들은 항상 게으름을 피울 생각만 하는 거죠!”“원 선생님, 그렇다면 지금 데이터는 어떻게 조절해야 할지 와서 좀 봐주세요. 우리는 무능한 사람이니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요.”그중 한 사람이 두 손을 벌리며 원철수에게 말했다. 그의 말투에는 불쾌함이 묻어나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모두 선발된 사람이다. 무능하다고 손가락질당하면 기분이 나쁠 것이다.“내가 보기엔 조절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데!”원철수는 실험용 테이블에 놓인 시험관을 쓱 보고 컴퓨터 화면을 한번 보고는 말했다.“약초에는 특유의 냄새가 있어요. 이건 약초를 대표하는 것인데 세속적이고 인위적인 향료를 융합하는 건 약초를 오염시키는 거예요! 근본적으로 향신료를 원재료에서 완전히 제거해야 맞는 거예요."원철수는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지금 그들이 하는 프로젝트를 부정했다.그의 말에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이없어했다.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