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엽이 그녀의 손을 잡는 행동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입을 떡 벌릴 정도로 놀랐다. 우해영의 ‘악명’은 이미 소문이 자자했다.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남자보다도 몇백 배 더 강한 여자였다.사실 김승엽은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그녀가 화를 내지 않는다는 확신이 별로 없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그녀는 자기의 사람이라고 말했으니, 스킨십이라도 하지 않으면 어머니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둘째 치고, 다른 사람들도 두 사람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챌 것이다.우해민의 눈치를 살피느라 손에 땀이 흥건해진 김승엽은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 눈짓했다.‘오늘 중요한 날이니 제발 체면 좀 세워줘!’자기가 보낸 메시지를 알아차린 건지 마음이 바뀌어 정말 그와 손을 잡으려는 건지, 그녀는 손을 뿌리치지 않았고, 그를 내팽개치지도 않았다. 그저 그에게 손이 잡힌 채로 웃으며 말했다.“다들 개의치 않을지 모르겠네요.”“무슨 말이에요. 승엽이의 약혼녀라면 김씨 가문의 사람이기도 해요. 이런 자리에 참석했다고 뭐라 말할 사람이 없어요!”다들 의견이 없다고 말하니 김승엽은 더욱 자신만만해졌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한순간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우해민이 옆의 자리에 앉히고 그녀를 따라온 두 사람에게 내려가라고 지시했다.“너희 둘은 나가 있어!”그 두 사람은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꼼짝하지 않고 서서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이 모습에 김승엽은 화가 났다. 욕을 하고 싶었지만, 두 사람은 우해영의 수하였기 때문에 감히 뭐라 하지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는 그 둘을 째려보더니 허리를 숙여 우해민에게 말했다.“이건 우리 가문의 가족회의예요. 당신이 여기에 있는 건 괜찮지만, 이 두사람은...”그의 말에 우해민은 두 사람을 한번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너희둘은... 나가서 기다려! 회의가 끝나는 대로 나갈 테니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그녀의 말에 두 수행원은 잠시 머뭇거리다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익명 투표를 하는 것은 결과 발표 후 김서진이 뒤로 물러날 길을 없애려는 것이다. 그래도 작은아버지인데 한소은은 그가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할 줄은 몰랐다.김서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앞에 어떤 위기가 닥쳐오던,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이번에도 준비가 된 걸까?’한소은은 김서진이 김씨 가문의 핏줄이건 아니건 조금도 관심이 없다. 그녀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김서진이라는 사람이지,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은 혈연관계가 아니다. 그가 김씨 가문의 사람이든 아니든, 그녀는 여전히 그를 사랑할 것이고, 그를 믿을 것이고, 그에게 의지할 것이다.확고한 눈빛으로 김서진을 바라보면서 한소은은 손으로 배를 쓰다듬었다.익명 투표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투표 종이를 모두 걷어 들이고 김승엽이 말했다.“공평을 위해서 나와 서진이는 투표에 참석하지 않을게요. 이건 여러분의 의견이지 어느 한 사람의 의견이 아니니까요!”“동의해요.”김서진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그의 말에 김승엽은 고개를 돌려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지시했다.“가서 노부인 모셔 와.”“이번 일이 중요한 만큼, 김씨 가문의 가장 큰 어르신인 내 어머니가 자리를 지키셔야 공평해요. 어머니께서 몸이 좋지 않으셔서 쉬시게 했는데, 지금 모셔 올 타이밍인 거 같네요.”그의 옆에 선 사람이 투표를 집계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노부인이 오길 기다렸다.사실 많은 사람은 이미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일부 사람들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지켜보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앞으로 일어날 무시무시한 폭풍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었다.정말 그들의 생각대로 일이 발생하면 하늘이 변할 것이다.김씨 가문의 가주가 김 씨의 핏줄을 이은 사람이 아니고, 친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잡종이라는 추문이 퍼지게 되면, 전국에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다. 그것은 김씨 가문뿐만 아니라 회사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그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왜 이런 사달이 나게 되었
투표 결과는 빠르게 집계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찬성과 반대의 비율이 매우 팽팽했지만, 찬성하는 사람이 좀 더 많았다.가문 내에서 김서진에 대해 의견이 있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가주라는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으로서 모두가 만족하게 할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이 기회를 노리고 그를 무너뜨리려는 작정이었다.결국, 두 표 차이로 김승엽이 원하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이것 봐, 어르신들과 장로들은 혈연에 대한 문제는 흐지부지해선 안 된다는 말에 찬성하고 있어. 김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이 집에 남아있어서도 안 되고 가문이 가져다주는 혜택과 부귀영화를 누릴 자격도 없다는 거지.”김승엽은 투표 종이를 손에 들고 자기가 승리했다는 표정을 지었다.꿈에 그리던 것을 곧 손에 넣을 수 있고, 잠시 후 김서진이 자기의 발밑에 무릎을 꿇으며 쫓아내지 말라고 울면서 빌 거라는 생각하니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그는 줄곧 높은 곳에서 자기를 내려다보았던 조카가 자기 앞에서 머리를 숙이는 상상을 하니 입가에 삐져나오는 웃음을 거의 참지 못하고 가슴이 벅찼다.이에 대해 김서진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이제 결과가 나왔으니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군지 발표해도 되지 않나?”더 이상 못 참겠는지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김승엽은 입꼬리를 치켜올리고 김서진을 뚫어지게 노려보더니 손가락을 들며 말했다.“그 사람은 바로...”“잠깐!”이때, 노부인이 방에서 걸어 나왔다. 김지영이 옆에서 노부인을 부축해 주고 있었지만, 노부인은 마음이 급했는지 빠른 걸음으로 비틀거리며 걸었다.어머니가 나오는 것을 보고 김승엽은 얼른 앞으로 나가 부축하면서 말했다.“어머니, 천천히 나오세요! 어머니 마음이 아픈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몸 생각하셔야죠!”“......”그의 말에 노부인은 그의 마음이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렸다.“이번 일은 그냥 없던 일로 하자.”노부인은 김승엽의 손을 꼭 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서진이가 한 말을
김승엽은 자기의 어머니가 중요한 순간에 말을 바꾸는 게 못마땅했다. 그가 이럴 것을 대비해 보험을 해 두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오늘 분명 어머니가 일을 그르쳤을 것이다.그러나 노부인은 그의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두 눈을 똑바로 뜨며 가문의 어르신과 장로들을 보며 말했다.“여러분, 이 늙은이가 오늘 이 자리에서 한마디 하겠습니다. 오늘 일은 더 이상 따지지 말았으면 합니다. 오늘 여기 모인 것은 오랜만에 서로 얼굴을 본다고 생각하고 승엽이가 말한 것은 그저 우스갯소리로 듣고 더 이상 따지지 맙시다!”노부인이 이렇게 말하니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노부인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일이 이렇게까지 발전했으니 한 두 마디로 따지지 말자고 해서 모른척할 수는 없는 일이다. 노부인이 이렇게 말하니 사람들은 더욱 궁금해졌다.모든 사람은 노부인이 진심으로 김서진을 보호하려는 것으로 생각했다.옆에서 잠자코 듣던 한소은도 조금 놀랐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노부인과 김서진의 사이는 지금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돈독하지는 않았다. 몇 개월 전만 해도 서로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며 싸우던 사이였다. 노부인이 무슨 충격을 받았길래 갑자기 김서진의 편을 들어주는 것인지 궁금해지기까지 했다.“그럴 순 없어요!”어머니의 말에 김승엽은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노부인의 앞을 가로막았다.“어머니! 더 이상 편들지 마세요! 맞아요. 어머니는 서진이를 친손자로 알고 지금까지 예뻐했어요. 하지만 지금 그가 김씨 가문의 핏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도 편을 들어주시면 안 됐죠! 돌아가신 큰형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겠어요? 어머니가 이 일을 모른 채 덮으시면 조상님들에게 무례를 범하는 거예요!”김승엽은 대놓고 김서진의 이름을 말했다. 이로써 모든 사람에게 김서진이 바로 자기가 말한 김씨 가문의 핏줄이 아닌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었다.대부분 사람이 이미 예상했지만, 직접 들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감히
혹여나 이 사건이 수습할 수 없게 되거나, 김서진이 정말 김씨 가문의 자식이 아니어서 족보에서 이름이 지워진다 해도 두 사람의 실력으로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그렇다면 더 이상 두려울 게 없다.그보다 그녀의 흥미를 불러일으킨 것은 ‘우해영’의 반응이었다.전에 호텔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발견한 것인데, 이 여자는 정말 완전히 다른 두 가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때로는 카리스마가 넘치고 내공이 대단하고, 때로는 내공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고분고분한 느낌이었다. 지금의 ‘우해영’도 조용하게 자리에 앉아 있기만 했다.‘우해영’이 이 정원으로 들어온 순간, 한소은은 그녀에게서 느꼈던 무술을 배운 사람의 기를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방금 수행원에게 하는 말을 들어봐도 기세가 전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나가달라고 부탁하는 듯 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어쩌면, 우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꼭꼭 숨기고 있는 비밀이 있을 수도.’분위기가 팽팽하게 굳어지자, 김승엽은 조급해하며 김지영에게 눈짓했다. 회의가 진행되기 전에 자기를 돕겠다고 약속했던 어머니가 갑자기 말을 바꾸었다. 누나마저도 변덕을 부려서는 안 된다. 반드시 어머니를 밀어붙여 가짜 유전자 검사 결과를 말하게 해야 한다!잠자코 있던 김지영이 그를 한번 보고는 입을 열었다.“엄마,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하고 싶지 않아도 말하셔야 해요. 게다가 승엽이가 이렇게 단호한데 오늘 엄마가 말하지 않아도 승엽이는 끝장을 볼 거예요. 차라리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밝히는 게 더 좋아요.”그녀는 김서진의 고모로서, 김승엽의 누나로서, 하는 말은 영향력이 없지 않아 있다. 게다가 그녀가 한 말은 틀리지도 않았다. 이번 일이 있고 나서 진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김서진이 가주의 자리에서 내려가지 않아도 마음속에 그에 대한 응어리가 남아 있을 것이다.“아이고...”노부인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유난히 밝은 햇빛이
“김승엽은 제 아들이 아닙니다!”김승엽은 웃는 얼굴로 어머니의 결과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김승엽은 그 자리에서 멍해졌다. 웃음은 그대로 얼굴에 굳어져 괴상한 표정을 지어냈고 두 눈은 크게 뜨고 그의 어머니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순간 자기가 잘못 들은 것으로 생각했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마치 폭탄이 터진 것처럼 조용해졌다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원래 그 사람들이 추측한 사람은 김서진이었다. 노부인이 김서진이 김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고 발표하길 기대했었다. 하지만 김승엽의 이름이 노부인의 입에서 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김승엽?! 그가 노부인의 아들이 아니라고?!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정원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수군대기 시작했다.김승엽이 노부인이 가장 아끼는 아들이라는 건 김씨 가문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전 회장님이 살아계실 때 노부인은 김승엽의 일로 전 회장님과 많이 다투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노부인은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김승엽이 자기의 아들이 아니라고 발표했다.이건... 하늘을 뒤집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어머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잘못 말씀하셨어요. 지금 김서진이 김씨 가문의 자식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었잖아요!”혼란 속에서 겨우 정신을 차린 김승엽이 급히 노부인을 향해 말했다.“어머니, 내가 아니라 김서진이라고요! 김승엽은 나고, 어머니 아들이잖아요! 어머니의 아들!”그는 자기의 코를 가리키며 입을 크게 벌리고 어머니가 잘 들을 수 있게 소리높이 말했다.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노부인에게 자기의 이름을 말해주었다.열심히 손짓하는 그를 보며, 오랫동안 가장 아꼈던 막내아들을 보며 마음이 괴로웠다.“승업아, 난 이걸 내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네가 기필코 말하라고 등을 떠밀었잖아. 네 말이 맞아. 김씨 가문에 다른 사람이 핏줄이 섞여서는 안 돼. 만약 내가 오늘 네 말대로 서진이를 모함해 그를 무너뜨렸으
"아니, 아니야, 그 감정보고서는 가짜야, 가짜야!"옆으로 끌려간 김승엽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라 가문의 어르신들과 장로들이 돌려보고 있는 유전자 검사 결과를 노려보며 미친 듯이 말했다.“그 유전자 검사에는 너 하나의 결과만 적혀 있는 게 아니야. 나와 엄마, 엄마와 서진이, 나와 서진이, 그리고 너와 서진이까지...”노부인을 부축하고 있던 김지영이 입을 열었다.“우리 모두 혈연관계가 있다고 뜨는데 오직 너만 우리와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남이라고 결과에 적혀있어.”만약 노부인의 말이 그에게 있어서 벼락이 머리 위에 떨어진 느낌이라면, 김지영의 말은 그를 나락으로 밀어버린 느낌이었다.그는 김지영의 입술이 움직이는 모습만 보였고 많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당신들, 당신들 모두 한통속이야. 모두 날 속이려 하는 거야! 난 안 믿어! 단 한 글자도 안 믿어!”그러고는 어디서 힘이 생겼는지 갑자기 그를 붙잡고 있던 사람들의 손을 뿌리치고 노부인에게 덮쳤다. 그는 노부인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팔로 노부인의 다리를 꼭 감싸 안으며 애원하듯 말했다.“어머니,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어머니는 날 제일 예뻐했잖아요! 왜 이 사람들과 짜고 쳐서 날 속이려 하는 거예요? 혹시 위협당하셨어요? 혹시 김서진이 그렇게 말하라고 위협했어요? 어머니, 두려워하지 마시고 말해요! 여기 장로들도 계시고 어르신들도 계시니 서진이가 어머니를 어떻게 하지 못할 거예요!”그러고는 손가락으로 김서진을 가리키며 버럭 소리 질렀다.그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모든 게 다 자기를 해치려는 음모라고 생각했다. 오래전에 계획을 했고, 오늘을 기다리고 기다려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를 심연으로 떨어뜨리려 했다고 확신했다.“나도 이게 가짜였으면 좋겠어! 나도 내가 위협을 받아 거짓말을 하는 거였으면 좋겠어!”노부인은 천천히 허리를 숙으려 두 손으로 김승엽의 얼굴을 쓰다듬었다.“하지만 승엽아, 넌 정말 내 아들이 아니야.
노부인은 김승엽이 자기에게 이런 말을 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자기가 평생 아끼며 예뻐했던 아들이 이렇게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을 하니 지금 눈앞의 사람이 낯설어 보였다.“난 못 믿겠어! 아니 안 믿어!”김승엽은 그 감정 보고를 다른 사람의 손에서 뺏어와 한번 훑어보고는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러고는 더없이 냉정한 말투로 말했다."이 유전자 검사 결과 보고서는 가짜야. 나는 진작에 진짜 유전자 검사 결과 보고서를 보았어. 이것은 분명히 가짜야. 그리고 우리 어머니는 최근에 치매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어. 그녀의 말은 믿으면 안 돼. 그녀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 아니야. 그녀 자신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란 말이야!"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아주머니를 보며 말했다.“아주머니, 어서 어머니 모시고 방에 들어가 쉬게 하세요!”그러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고, 아무도 그의 말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마치 광대처럼 모든 사람의 비웃음을 받고 있다. 다들 그가 어떻게 자기를 속이는지 냉정한 눈빛으로 바라만 보았다.“아주머니!”아무도 움직이지 않자, 김승엽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그만해!”다른 사람이 입을 열기 전에 김지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아직도 다른 사람이 네 말을 믿어줄 거로 생각해?”“너, 너랑 김서진이랑 짜고 쳐서 날 무너뜨리려는 거지? 넌 진작이 이렇게 될 거라는걸 알았지? 너희들은 다 한통속이야! 지금 날 함정으로 밀어 넣은 거라고!”김승엽은 분노에 가득 찬 눈으로 김지영을 노려보았다.아침에 찾아갔을 때만 해도 그가 그녀에게 연신 자기의 편을 들어 달로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약속해 놓고 지금 와서 모두 그의 뒤통수를 쳤다.‘날 돕겠다고 약속했잖아! 왜 다들 김서진 편을 드는 건데? 왜!’이렇게 생각하자 그의 시선이 김서진에게 향했다. 김승엽은 노발대발하며 울부짖었다.“너지? 네가 그들에게 원하는 걸 주겠다고 약속해서 다들 너와 연기하게 만든 거지?! 말해!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다들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