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소은의 말에 김서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할머니가 이미 돌아간 후여서 그도 할머니가 왜 갑자기 찾아온 것인지 잘 몰랐다.“할머니가 돌아가면서 토요일에 당신도 참석하라고 했다고요?”김서진이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그러자 한소은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말씀하셨지만 강요하지는 않았어요. 그저 만약 내가 당신과 함께 간다면 기뻐할 거라고 했어요. 왜요? 토요일 가족회의가 이상한가요?”“당신도 이상함을 느꼈어요?”김서진이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콧등을 스치고는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요!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그 사람들도 더 이상 꾸밀 수 있는 일이 없을 거예요.”“당신의 말대로라면 당신 작은아버지가 비적이 가짜라는 걸 눈치챘을 텐데 왜 아직 찾아오지 않는 거죠?”“자기가 훔쳐 간 물건인데 가짜였다는 걸 발견하고 따지러 온다면 도둑이 제 발 저린 거잖아요. 우리보다 작은아버지는 우해영에게 더 화가 났을 거예요.”결국은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우해영이 그를 이용해 눈속임했고, 그 사이 우해영이 ‘진짜’ 비적을 가져간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를 가차 없이 내다 버렸다. 우해영 그 여자는 확실히 매우 개략적인 사람이다.“그럼, 토요일에 나도 가는 거예요?잠시 고민하던 한소은이 김서진에게 물었다.“당신 생각은요? 가고 싶으면 못 갈 것도 없어요.”만약 한소은이 가겠다고 하면 김서진은 그녀를 잘 보호할 자신이 있다. 지금까지 그녀가 그런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돈과 권력을 두고 서로 다투는 추악한 몰골을 한 사람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기분 봐서요!”한소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웃어 보였다.그녀의 달콤한 미소를 보자 김서진은 하루 동안 쌓인 피로가 다 풀리는 듯했다. 김서진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그럼, 우리 예쁜 부인님, 오늘 기분이 어때요? 나와 함께 저녁 식사나 할래요?”“나는...”그녀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김서진이
“알았어.”우해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비서더러 나가라고 손짓했다.“그만 나가봐. 좀 쉬고 싶어.”비서가 눈치 있게 물러서자 우해민은 손을 사무실 내의 전화기에 갖다 댔다. 숫자 버튼을 살짝 눌렀지만, 수화기를 들지 않았다.그녀는 지금 핸드폰이 없다. 유일하게 그녀에게 허락된 핸드폰은 우해영이 수시로 그녀와 연락하고 지령을 내리는 데 사용했었고 집으로 돌아가면 그것마저도 언니가 뺏어가 버린다.우해민은 핸드폰에 어떤 앱도 깔 권리가 없다. 누군가의 전화번호를 저장하는 건 더더욱 허락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우해영의 그림자일 뿐이다. 언니의 그림자로써 친구를 만들어서도 자기만의 사교가 있어서도 안 되었다.그래서 우해민은 지금까지 주동적으로 김승엽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다만, 그의 전화번호는 진작에 머릿속 깊이 기억해 두고 있었다.핸드폰으로 그에게 몰래 전화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녀의 핸드폰에는 우해영이 설치한 도청 장치가 설치되어 있고, 그녀에게 있어서 그 핸드폰은 감시카메라와 다름이 없었다. 회사의 전화에도 녹음이 항시 되고 있었다.우해민은 잠시 고민하다 결국 전화기를 들었다. 그러고는 빠르게 자기가 기억했던 번호로 전화했다.한편, 전화가 울리자, 김승엽은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바쁘게 어디론가 향하던 참이라 그의 숨소리는 생각보다 거칠었다.“여보세요?”“김승엽 씨.”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그의 이름을 부르고 우해민은 입술을 꾹 닫았다.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자, 김승엽은 흠칫 놀라더니 이윽고 하하거리며 웃기 시작했다.“허, 우씨 가문 아가씨께서 내게 먼저 전화를 걸다니! 혹시 드디어 생각을 바꾼 건가? 역시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이 당신을 위해서라는 게 느껴 지지? 이제야 나와 손을 잡을 생각이 든 거야?”“무슨 일 때문에 회사에까지 전화한 거야?“우해민은 전화기를 꼭 쥐고 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되물었다.그러자 전화기 너머의 김승엽이 어리둥절했다. 핸드폰에 찍힌 전화번호를 확인하니 그녀가 회사에서 전화를
“당신과 그럴 시간 없어!”두 손으로 전화기를 꼭 쥐고 있던 우해민의 가슴이 떨렸다. ‘나도 당신을 만나고 싶지만…’우해민은 벌써 꽤 오랜 시간 그를 만나지 못했다. 매번 꿈에서 그와 행복하게 데이트하고, 그가 들려주는 달콤한 말과 그의 뜨거운 입술, 촉촉했던 키스들이 나오곤 했다. 꿈에서만 느끼다 잠에서 깨어나면 씁쓸함이 배가되어 다가왔다.김승엽이 목적으로 접근했다는 거, 그가 했던 말에 진심은 거의 없다는 거, 그런 말들은 자기가 아닌 언니에게 했다는 거 모두 다 알지만 그래도 그에게 속고 싶었다. 그의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자기가 있다고 믿고 싶었다.어려서부터 지금까지, 20년 넘게 우해민이 아닌 언니 우해영의 그림자로만 살아왔다. 하지만 김승엽은 그녀를 해민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주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로맨틱하게 프러포즈하고 평생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그날부터, 우해민은 욕심이 생겼고 기대가 생겼다. 처음으로 자기의 인생을 살고 싶었고 언젠가는 평범한 여자들처럼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하지만 언니 우해영이 모든 걸 망쳐버렸다!우해영은 가장 잔인한 말로 그녀에게 미래는 없다고 일깨워 주었다. 그녀가 바라는 행복은 영원히 없을 거라고, 그런 생각조차 가질 자격이 없다고 말했었다.심지어 김승엽이 그녀에게 준 프러포즈 반지마저도 망가뜨렸다.이걸 생각하니 우해민은 가슴이 무거워지며 숨결마저 굳어졌다.“시간이 없다고?”김승엽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그녀가 발뺌하는 것으로 생각했다.이 정도까지 말했고, 그녀도 조금 마음이 바뀐 거 같으니,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듯이 김승엽은 전화로 약속 시간을 정확하게 잡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변덕스러운 여자가 또 생각을 바꿀까 봐, 그는 이 일을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았다.“괜찮아, 당신 지금 회사에 있지? 내가 바로 당신 회사로 찾아갈게. 당신은 시간이 없지만 난 시간이 많거든. 우리 만나서 얘기 제대로 하자고.”“잠깐...”
김승엽이 망설이고 있는 사이 차 한 대가 들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분명 그의어머니를 태운 차였다.차가 완전히 멈춰 섰을 때, 김승엽은 빠른 걸음으로 차 옆으로 걸어가 차 문을 잡아당겼다.“어머니, 돌아오셨어요?”노부인은 고개를 들어 그를 한번 쳐다보았다.“너 설마 여기서 내가 돌아오길 기다린 거야?”“그럴 리가요. 마침 나가려던 길에 어머니가 돌아오시는 걸 봤을 뿐이에요.”김승엽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최근 며칠간, 집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않고 노부인을 지키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노부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집에 ‘감금’한 건 아니다.“그래, 정말 우연이구나!”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서 내려오려 하자 김승엽은 황급히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했다.“어머니, 어디 다녀오시던 길이예요?”그냥 나가서 좀 돌아보았지. 왜, 밖에 나가는 것도 네게 보고해야 하는 거야?”김승엽의 말에 노부인은 언짢다는 듯 그를 한번 쏘아보았다.“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에요! 그냥 어디 다녀오시는지 궁금해서 그래요. 나가고 싶으면 말씀하시지, 그랬어요. 제가 같이 가주었을 텐데!”그가 이렇게 말했지만, 듣는 노부인의 입장에서는 그가 비꼬아서 말한다고 생각했다.“네가?”노부인은 차에서 내리며 허리가 아픈지 한 손으로 허리를 두드렸다. 그러고는 웃으며 말했다.“네가 언제 나하고 쇼핑을 한 적 있다고. 몇 년이란 시간 동안, 이 엄마랑 쇼핑 한 번 안 해주고 인제 와서?”노부인의 말에 김승엽은 어색한 듯 웃어 보였다.김승엽은 나가서 놀기 좋아하는 사람이다. 항상 어머니에게 감언이설로 달래기만 했지 단 한 번도 어머니에게 정말 효도한 적은 없었다. 기껏해야 가끔 선물을 보내는 걸 효도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자기가 무슨 말을 하건, 어머니는 다 잘 들어 주었고, 어떤 선물을 사주어도 다 좋아했다. 가장 중요한 건 김승엽은 여자와 함께 쇼핑하는 걸 싫어했다.“어머니, 왜 그런 섭섭한 말씀 하세요. 저한테 서운한 거 있으신 거죠?”김승엽이
집으로 돌아오는 노부인과 딱 마주치는 바람에 김승엽이 우 씨 그룹에 조금 늦게 도착했다. 회사 앞에 도착해 우해영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비서에게서 우해영이 벌써 갔다는 말을 전해 듣고 후회막심했다.하지만 우해영이 자기를 속였을까 봐, 그는 지하 주차장에서 한참이다 우씨 가문의 차가 아직 있는지 확인했다. 주차장에서 그녀의 차를 찾지 못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회사 밖에서 날이 깜깜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회사의 사람들이 거의 다 퇴근하고 나서도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하자 그제야 포기했다.‘정말 변덕스러운 여자야!’화가 잔뜩 난 김승엽과는 달리, 우해민의 마음은 괴로웠다.사실 그녀는 김승엽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그가 오지 않았고, 늦게 도착한다는 전화조차 없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그만 기다리다 결국에는 언니의 재촉하는 전화가 걸려 왔다. 우해민은 감히 더 지체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우해민은 그와 엇갈리지 않을까 하고 한사코 창밖을 내다보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실망한 얼굴도 집으로 돌아갔다.거실로 들어섰을 때 우해민은 본능적으로 분위기가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우해영의 앞으로 걸어가 말했다.“언니.”“이젠 겁이 없어진 모양이구나, 잠깐 나가게 했더니 감히 이렇게 늦게까지 있다 들어와? 이젠 집에도 안 들어오려 해?”우해영이 시계를 한번 보더니 화가 난 말투로 말했다.자기가 조금 오래 자다 일어나니 벌써 오후가 다 되었는데 우해민은 돌아오지 않았다.회사 일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이렇게 오랫동안 처리할 일들은 아니었다.‘흥, 밖이 그렇게도 좋은가? 돌아오는 것도 잊을 만큼?’“언니, 그런 게 아니야. 나 계속 회사에 있었어. 다른 데는 가지 않고 회사에서 업무만 처리했단 말이야. 못 믿겠으면 비서한테 물어봐. CCTV 돌려 봐도 되고!”우해민은 오후 내내 회사에서 단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우해영이 정말 CCTV를 확인한다 해도 두
사실 우해민이 이렇게 대답하는 게 가장 올바른 대답이라는 걸 우해영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전에 이와 비슷한 상황일 때 항상 이렇게 얼버무리는 식으로 대답했었다. 어떤 일들은 우해민이 잘 알지 못했고,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대답을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승낙하지도, 거절하지도 않고 나중에 우해영이 결정짓게 했다.하지만 이번의 상대는 김승엽이다. 우해영은 우해민이 사심을 품고, 그에 대한 감정을 아직도 버리지 못해서 그와 전화했다고 생각해 조금 반응이 컸을 뿐이다.“그래, 알았어. 다른 말은 없었지?”우해영은 소파에 편하게 앉았다. 지금 자기가 더 이상 화가 나지 않았다는 걸 알려주는 듯 했다.그녀의 말에 우해민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아참, 그 사람이 토요일에 가족회의가 있으니, 언니보고 참석하라고 했어. 그가 김씨 가문 가주의 자리를 어떻게 빼앗는지 직접보라면서...”“그 사람이 무슨 수로?”우해영은 보기 드물게 깔깔거리며 웃었다. 얼마나 웃었는지 눈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아직도 그런 헛된 꿈을 꾸고 있는거야?”“......”우해민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잠시 생각하던 우해영이 입을 열었다.“토요일, 가족회의? 재미있네. 김씨 가문의 가족회의에 나보고 참석하라고? 소문이라도 나면 어떡하려고?”“그럼... 언니 안 갈 거야?”우해민이 머뭇거리며 그녀를 떠보았다.“가야지, 당연히 가야지! 이렇게 재밌는 일이 생겼는데 왜 안가? 그 사람이 쪽팔리는 꼴을 보고 싶어서라도 가야지. 그리고 더욱 중요한 건, 그 남자와 한 번 더 싸워보고 기도 하고.”그녀는 지금 김서진과 한소은 부부에 대해 큰 흥미를 느끼고 있다. 이전에 그녀는 그 두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자기보다 강한 사람을 만나니 흥미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지금, 그녀는 김서진의 비적을 손에 넣었다. 비록 비적의 무술을 배운 시간이 길지 않지만, 자기의 무술 실력이 날이 다르게 발전하고 있음을 느꼈다. 우해영은 당장이라도 그 두 사람과
시간은 빠르게 흘러 토요일이 다가왔다. 이날, 김승엽은 일찍 일어났다. 그는 잘 다린 양복을 차려입고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도 잘 정리했다. 중요한 날인 만큼, 정성스럽게 향수도 뿌렸다. 오늘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날이 될 것이다. 오늘부터 그의 인생은 하나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가문 장로들은 그렇게 일찍 도착하지 않는다. 그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역시 어머니이다. 비록 어머니가 그를 돕기로 승낙했다고 하지만, 모든 것이 다 끝나기 전에는 여전히 안심할 수 없다.김승엽은 아침 일찍, 일부러 부엌에 가서 아침을 챙겨 어머니의 방문 앞에 직접 갖다 드리고 문을 두드렸다."무슨 일이야?"방안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금방 잠에서 깨어난 목소리가 아닌 걸 보니, 이른 시간임에도 노부인은 이미 깨어있었던 것 같다."어머니, 저예요. 아침을 드시라고요."노부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김승엽은 굽실거리며 말했다."아래층에 두어라, 이따 내가 내려가서 먹을게."그러자 노부인은 들어오라는 말 대신 이따 내려가겠다고 대답했다.“계단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기 힘드시잖아요. 게다가 제가 이미 아침을 방 앞까지 가져왔는걸요. 문 좀 열어주세요.”잠시 멈칫하다 어머니가 대답하지 않자 또 한마디 덧붙였다.“어머니에게 할 말도 있고요.”노부인의 방에서는 침묵이 흘렀다. 한참이 지나서야 노부인이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문 앞에서 차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어머니, 일단 들어갈까요?”김승엽은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쟁반을 들어 노부인의 방으로 들어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방안을 둘러보았다.노부인의 침실은 매우 컸다. 하지만 방안에는 물건을 많이 놓지 않았기에 텅 비어 보였다.문 앞에 서 있던 노부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방 안으로 들어와 화장대 앞에 앉아 얼굴에 스킨케어 제품을 발랐다.“난데없이 아침을 방까지 배달해 주다니, 내게 바라는 게 있는 거지?”김승엽은 하하 웃으며
“그래, 난 서진이의 친할머니야....”노부인은 머리카락을 빗던 손을 멈추고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막연한 눈빛으로 멍하니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나는 그 아이의 친할머니야...”“어머니,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난 어머니의 친아들이잖아요! 서진이의 작은아버지이기도 하고. 그런데도 그는 내의 사정을 조금도 봐주지 않았어요!”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김승엽이 바로 불쌍한 척 호소했다.“어머니, 난 지금 서진을 죽음으로 모는 게 아니에요. 서진이가 순순히 가주의 자리를 내놓으라고 하려는 거예요. 어머니는 항상 내가 김씨 가문 가주의 자리에 오르고, 김 씨 그룹을 손에 넣길 바라셨잖아요? 지금 우리는 혼란을 수습하는 거예요. 모든 걸 정상으로 되돌리는 거라고요!”“혼란을 수습한다라...”그의 말에 노부인은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혼란을 수습해야지.”드디어 마음을 정한 듯한 노부인의 모습에 김승엽은 그제야 한숨을 돌리고 가져온 아침을 노부인 앞으로 내밀었다.“어머니, 먼저 드세요. 시간이 아직 일러요. 조급해하지 마시고 천천히 드세요."“그래.”젓가락을 들고 그가 아직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자 노부인이 그에게 말했다.“다른 할 말이 있는 거니?”“어머니, 이번일, 혹시 누나에게 말했나요?”어머니의 말씀만으로도 충분한 증거가 될 수 있지만 김지영도 증언할 수 있다면 당연히 더욱 좋다.“지영이는 아직 몰라.”노부인은 고개를 숙이고 죽을 후후 불며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누나 불러올게요. 어머니가 상황설명 좀 해줘요. 괜히 회의에서 말이 헛나오면 어떻게요.”그러고는 일어서서 김지영을 부르러 가다가 다시 돌아서서 물었다."아참, 전에 누나가 그 감정보고서를 봤나요?"노부인은 눈도 들지 않고 느릿하게 죽을 한 모금을 마시며 대답했다.“그 유전자 검사 결과는 지영이가 가져온 거야. 그런데 그 애가 안 봤을 리가.”“그럼...”이 말에 김승엽은 흠칫 놀랐다. 어머니만 신경 쓰느라 자기의 누나가 이미 진짜 유전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