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유전자 검사 결과가 진짜든 가짜든 상관 하지 않는다고 했다는 것은 김서진이 정말 김씨 가문의 핏줄이어도 거짓으로 만들려 하는 것이다. 이건 정말 혈연관계인 사람들끼리 치고받고 싸우겠다는 말이다.“가짜 유전자 검사 결과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이미 준비해 뒀거든요. 어머니는 그대로 읽기만 하시면 돼요.”그러면서 진작에 준비해 둔 가짜 검사 결과를 노부인의 손에 올려줬다.노부인은 아들이 전해준 가짜 검사 결과를 받아 몇 페이지를 읽어 보니 내용은 진짜 검사 결과 거의 비슷했다. 하지만 결과는 완전히 상반된 결과였다. 노부인은 아들을 한번 쳐다보더니 말했다.“정말 준비 한번 철저하게 했구나.”“어머니,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김승엽이 헛웃음을 두 번 삼키고는 이어서 말했다.“김서진 그 자식을 상대 하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어머니도 잘하시잖아요.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그의 손에서 내 것을 빼앗아 올 수 없을 거예요.”“네 것이라고 했어?”그의 말을 듣고 노부인이 갑자기 화를 냈다.“잘 생각해. 그건 너희 아버지의 것이야. 모두 다 너희 아버지가 일궈낸 것들이라고!”자기 남편이 회사를 만든 건 맞았지만 김서진이 회사를 지금만큼 키워낸 것도 틀리지 않았다. 노부인은 자기 아들을 편애하지만, 눈이 멀지는 않았다.언제나 자기 말을 잘 들어주던 어머니가 갑자기 화를 내니 김승엽은 깜짝 놀랐다. 그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너희네, 어머니 말씀이 다 맞아요. 다 아버지 것이에요. 그럼 내가 아버지의 아들로서 내 것이어야 할 물건을 받아 가겠다는 게 무슨 잘못이에요. 큰형이 저세상으로 가고 큰형이 아들에게 주는 건 틀리지 않았어요. 하지만 내가 아직 살아 있잖아요. 만약 내가 죽었다면 김서진에게 모든 걸 물려 주는 거 상관없어요. 그런데 내가 버젓이 살아있는데!”바로 이 부분이 김승엽이 가장 불만을 가진 부분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살아 있으면서도 아들에게 가업을 물려주지 않고 그를 뛰어넘어 바로 손자에게 가업을 물려줬다. 이
“거의 준비가 끝나 갑니다. 여기의 모든 것을 다 철수할 생각입니까?”“모두 철수해. 여기서 일하던 사람은 다 내보내. 우리가 섬에서 데려온 사람을 제외하고 한 명도 남기지 마!”그녀가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그녀가 어디를 가든 섬에서 데려온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그 자리에서 새로 뽑은 사람이었다.새로 뽑은 사람은 집 밖에서만 일하게 하고 절대로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해야만 그녀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 없게 된다.데일이 명령받고 나가서 일을 진행 시키려고 할 때 그녀가 다시 불러 세웠다.“잠깐, 그 계집애는?”“방에 있습니다.”“할 말 있으니, 여기로 오라고 해.”“네!”데일이 나가자, 우해영은 더 이상 가슴의 답답한 느낌을 억누를 수 없어 한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순간 목구멍에서 피비린내가 솟아 올라오더니 곧이어 피 한 모금을 토해냈다.그녀는 역시 심오한 무술은 몸에 무리가 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하루빨리 섬으로 돌아가 수련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우해민은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걷는 소리가 거의 없었다. 가볍고 조심스럽게 걷는 그녀를 다른 사람은 거의 발견하지 못했다.우해영의 방문이 살짝 열려 있지만 그래도 노크를 두 번 했다. 방 안에서 들어 오라는 소리가 들려서야 조심스럽게 들어갔다.“언니가 날 찾는다고 해서...”방에 들어서 자 우해영의 입가에 피가 묻은 모습이 보여 우해민이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언니, 왜그래...”“호들갑 떨지 마!”우해영은 언짢은 표정으로 그녀를 한번 쏘아보다 이어 말했다.“방에 들어왔으면 문을 닫았지!”위해 민은 곧바로 문을 닫고 언니 앞으로 다가갔다.“언니, 괜찮은 거야?”그녀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이 정도로 죽지 않아!”우해영은 손으로 입가의 핏자국을 쓱 닦고는 아무렇지 않다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그녀는 이전에 수도 없이 많은 상처를 입었었다. 이 정도는 그녀에게 있어서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단한 무
갑작스러운 그녀의 질문에 우해민은 잠시 멍해졌다.우해민은 두 눈을 깜빡이며 마치 누구를 말하는지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모른 척하기는. 고작 며칠 사이에 네가 그 남자를 잊었다는 거 안 믿어! 됐어! 그냥 물어보는 거뿐이야. 긴장하지 마!”우해영이 기분이 나쁘다는 듯 말했다.“아, 아니, 그게 아니라!”우해민이 연신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정말 언니가 누굴 말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어. 언니, 그 사람 못 잊은 거 인정해. 하지만 그 사람은 내 인생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야. 내가 예전에는 그 사람을 많이 좋아했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내가 만나봤던 남자는 그 사람 하나뿐이었고 게다가 여자를 홀리는 말만 하니 내가 홀랑 넘어가 버린 거야. 난... 난 잠시 매혹된 거뿐이야!”“언니가 욕한 게 다 맞아. 이 세상에서 내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언니뿐이야. 언니만이 내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 그 사람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야! 난... 이제 그 사람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우해영이 믿지 않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우해민이 급하게 변명했다.“정말?”그러자 우해영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정말이야!”우해민은 손을 들어 맹세하는 시늉을 했다. 잠시 생각하더니 한마디 더 붙였다.“언니, 믿지 못하겠으면 지금 당장 섬으로 돌아가서 다시는 그 사람 보지 않을게. 난 지금 오직 언니를 위해서만 살고 싶어!”한참 동안 그녀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다 결국 믿었는지 우해영이 웃으며 말했다.“그냥 물어본 거뿐이야.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네가 잘 알면 됐어. 넌 평생 다른 사람과 같을 수 없어. 결혼할 수도 아이를 낳을 수도 없어. 너는 네 이름으로 살 수가 없어. 하지만 이거 하나만 기억해. 네가 살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인 거야. 내가 아니었으면 넌 벌써 죽었어!”우해영은 반복해서 강조했다. 그녀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세뇌했다. 자신이 그녀를 남기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미 그 저주
회의 당일 모든 사람 앞에서 그는 김서진이 김씨 가문의 핏줄을 이은 사람이 아니라고 발표할 것이다. 이로써 그를 가주의 자리에서 쫓아내 버리고 김씨 가문에서 쫓아낼 것이다. 어머니에게 약속한 것은 나중에 김서진이 자기의 말을 얼마나 잘 들을지, 그리고 자기의 기분에 달렸다.다만, 어머니 쪽은 조금 불 안 했다. 그는 아예 집 밖을 나가지도 않고 집에서 지키고 있다. 혹시라도 김서진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어머니를 만나 설득한다면 자기가 했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까 봐 겁이 났다.방에 앉아 핸드폰을 놀다 우해영의 번호를 본 그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이 여자는 그에게 있어서 정말 악몽과도 같은 여자다. 그는 단 한 번도 어느 여자가 그렇게 험악하고 야만적인 것을 본 적이 없다.예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날, 그녀가 정신과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는 곧바로 알아차렸다. 김승엽은 우해영이 정신 분열 환자라고 확신했다.‘그러니까 성격이 부드러웠다 사나웠다고 하는 거지.’그녀에게 흥미를 느낄 때는 이런 그녀가 스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만약 정신에 문제가 있는 여자와 결혼했다간 자기에게 위험이 있는 건 둘째 치고 어쩌면 아이에게까지 영향이 갈까 두려웠다.하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는 우 씨 그룹이라는 방대한 재산은 마음이 흔들릴 만했다.오랜 시간 동안 무술이 대단하다는 소문이 그녀를 감싸고 있어 아무도 그녀가 정신병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발견하지 못했다. 우씨 가문의 아가씨가 정신이상 환자라니! 게다가 그렇게 대단한 무술까지 했는데 이런 사람을 사회에 나오게 만드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만약 이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면,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겠지?’김승엽은 눈을 굴리며 생각하다 우해영의 번호로 문자를 하나 보냈다.[난 당신의 비밀을 발견했어!][문자메시지 전송 실패]핸드폰에 뜬 글자를 보자 김승엽은 어리둥절했다.‘날 차단한 거야?’한껏 흥분된 마음으로 그녀에게 이걸 빌미로 돈이라도 조금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차단되었다는 소식에
전화기 너머에서 당황하고 있는 우해영은 둘째치고 김지영도 깜짝 놀랐다. 김지영이 멈칫하더니 그에게 물었다.“무슨 비밀?”그녀의 목소리가 크진 않았지만, 우해영은 무술을 배우는 사람이었기에 바로 김승엽 옆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당신 옆에 누가 있어?”김승엽은 고개를 돌려 김지영을 한번 보더니 쉿 하는 손짓과 함께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저리 가라고 손짓했다. 그러고는 자기의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잠갔다.그를 따라 들어가려던 김지영은 한 발짝 늦은 바람에 들어가지 못하고 방문 밖에서 자기의 핸드폰만 애타게 기다렸다.그러는 동시에 도대체 우해영이 어떤 비밀을 가졌는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귀를 방문 가까이 갖다 대며 엿들으려 했다.김승엽의 모습을 보니 마치 우해영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곧 결혼할 사이가 아닌가?문을 사이에 두고 좀처럼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김지영은 까치발을 하고 열심히 귀를 방문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방으로 들어간 김승엽은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 문에서 멀리 떨어진 후 한껏 낮춘 목소리로 말했다.“이젠 옆에 아무도 없으니, 본론부터 말하자고.”“본론?”전화기 너머에서 우해영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낯선 전화가 걸려 왔지만 김승엽의 전화인 줄 모르고 받았다.그의 전화번호를 차단했는데 이렇게 낯짝 두껍게 다른 사람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됐어. 쓸데없는 소리는 됐고. 난 당신이 날 대하는 태도가 왜 이리저리 변하는지 그 이유를 알았어. 걱정하지 마,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생각은 없어. 다만, 나와 손을 잡아야 해.”김승엽은 지금 이걸로 그녀를 위협하기 딱 좋은 시기라고 생각했다.큰일을 앞두고 이중 보험을 드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김서진 쪽은 이제 토요일에 열릴 회의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지만 그렇다고 일이 100% 잘될 거라는 보장이 없다. 그때처럼 비적을 훔친 일이 잘 끝난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실은 자기가 두 사람에게 이용당하고 농락당했
그녀가 원하는 게 또 뭐가 있었나? 그녀가 평생 원했던 것은 바로 각종 무술 비적이었다. 현재 김서진의 손에 있는 것은 이미 그녀가 얻었다. 그가 무엇을 그녀에게 줄 수 있겠는가?“왜, 아직도 네 손에 있는 게 진짜라고 믿어?”김승엽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날 우해영이 분명 자기의 말을 믿는 눈치였는데 집으로 돌아가고 왜 다시 믿지 않았는지 영문을 몰랐다.‘정말 그게 진짜라고 확신하는 건가? 아니면 운이 좋아서 진짜를 훔쳐 간 건가?’오해영은 오랜 시간 무술을 배워온 사람이다. 비적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한눈에 알아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만약 진짜 비적을 잃어버렸다면 김서진 쪽에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다. 분명 소란스럽게 비적을 찾거나 심지어는 자기를 찾아와야 정상적인 반응이다.“혹시 약 잘못 먹은 거야? 내 손에 있는 비적이 가짜일 리가 없잖아!”우해영이 비적을 이미 여러 번 뒤져 보았는데 아무리 보아도 가짜 같지 않았다. 그녀는 김승엽이 자기를 속이려 한다고 생각했다.그녀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김승엽은 자기의 생각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 없어 한마디 더 했다.“내 말을 믿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고! 난 김승엽이 얼마나 영악한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야. 내게 이러한 함정을 팠으면 당신에게도 똑같이 할 수 있어. 당신과 내가 손을 잡는 게 가장 알맞은 선택이란 말이야.”“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점차 인내심이 바닥이 난 우해영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용건이 뭔지 똑바로 말해.”“내 용건은 간단해! 전에 약속했던 거 처처럼, 난 우씨 그룹의 지분을 원해. 내가 김씨 가문 가주의 자리를 빼앗아 오게 되면 진짜 비적을 찾아서 줄게!”김승엽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웃기고 있네! 진짜는 내 손에 있다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리고, 네가 무슨 능력으로 김씨 가문 가주의 자리를 빼앗는다는 거지? 이도 저도 아닌 네가 무슨 수로?”그의 말을 듣고 우해영은 그
“비밀은 무슨, 그런 거 없어! 그냥 겁주려고 했을 뿐이야!”그는 화가 나서 버럭 소리를 지르며 방으로 다시 돌아가 발로 문을 걷어찼다.문전박대를 당하자, 김지영은 입을 삐죽거렸다."쳇 잘난 척하기는!"김지영은 자기의 핸드폰을 한번 보았다. 얼마나 오래 통화를 했는지 핸드폰이 뜨거울 정도였다. 그녀는 우해영의 번호를 묵묵히 기억했다. 이 일이 재미가 있을 것 같다고 예상했다.몸을 돌리자마자 어머니가 복도 반대편에 서서 조용히 그들의 방향을 보며 서 있었다. 잠시 멍 해있던 김지영이 노부인에게로 걸어갔다.“엄마.”김지영이 작게 노부인을 불렀다.“무슨 소란이야?”노부인은 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정확히 무슨 일로 싸우는지는 듣지 못했다.“아니에요. 내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겠다고 해서. 엄마, 그 우해영이랑 승엽이... 아직 잘 만나고 있대요?”김지영이 조심스럽게 떠보았다.방금 김승엽의 태도를 보면 두 사람의 관계가 조금 틀어진 듯 했다. 약속하거나 협력할 만큼 사이가 그렇게 좋지는 않은 것 같았다.이 두 사람은 이전에도 그렇게 좋은 사이는 아니었다. 우해영 그 여자의 성격이 매우 이상하지만, 적어도 표면적인 조화는 있었다.하지만 방금의 상황을 보면, 마치 크게 한바탕 싸운 거 같았다.난데없는 물음에 노부인은 이상하게 생각했다."왜?"“아무것도 아니에요. 두 사람이 싸운 거 같아서요. 우해영이 승엽이 번호를 차단했나 봐요. 그래서 방금 내 전화로 전화한 거예요.”이건 그녀가 추측한 것이다. 방금 문에 귀를 대고 한참을 들었지만,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다만 두 사람이 싸우는 것 같았다.“그럴 리가!”그녀의 말에 노부인이 멈칫하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승엽이가 이틀 전에 두 사람이 협력 관계를 약속했다고 말했어."“협력? 무슨 협력이요?”중요한 내용을 바로 캐치하고 그녀는 즉시 노부인을 추궁했다.노부인은 바로 자기가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김승엽이 우해영과 무술 비적에 관해서는 자기만 알고 있으
“나가서 함부로 입 놀리지 마. 입단속 잘해!”어머니의 훈계를 듣고 김지영은 약간 억울함을 느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는 줄곧 동생을 편애했다. 솔직히 말하면 김승엽이 김서진에게 줄곧 눌려 있는 게 통쾌할 정도였다.그렇지 않으면 어머니는 정말 동생을 편애하다 못해 세상을 다 안겨줬을 것이다.“알았어요.”김지영이 툭툭거리며 대답했다.————우해영은 우해민이 있는 지하실로 왔다. 이른 아침인 시간이라 지하실에도 햇빛이 비춰들어 오고 있었다.우해민은 짐을 정리하느라 우해영이 온 줄도 몰랐다.사실 그녀는 정리할 물건이 별로 없었다. 단지 몇 벌의 간단한 옷에 지나지 않는다.그녀는 자기 옷이 거의 없었다. 두세 벌의 갈아입던 옷은 이미 하얗게 될 때까지 빨았다. 돈이 없어 못 하는 건 아니었다.우씨 가문은 그녀의 옷을 살 돈이 부족할 정도는 아니다. 단지, 필요가 없을 뿐이다!그렇다. 그녀처럼 자기의 신분으로 살 수도 없는 사람이 옷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놓고 날이 밝았을 때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그러는 사람이 옷이 필요할 리가 없다.만약 외출하려 한다면 거의 우해영의 신분을 대신하기 때문에 입는 것도 모두 그녀의 옷이다. 그럴 때만 그녀는 정교한 화장을 하고 우해영이 가지고 있는 예쁜 옷을 입고 나갈 수 있다.“흠...”뒤에서 갑자기 인기척이 들리자, 우해민은 깜짝 놀라 뒤로 돌아보았다.“언니! 언제 왔어?”“내가 할 일이라도 있어?”우해민은 정리하던 옷을 내려놓고 물었다.그녀의 순종하는 모습을 보고 우해영은 눈을 가늘게 떴다.“너 최근에 김승엽을 만난 적 있어?"우해민은 눈을 부릅뜨고 놀란 모습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즘 집에서 나가지도 않았어. 언니가 나가지 못하게 했잖아. 내가 어떻게 나갈 수 있겠어. 왜?”우해민은 어리둥절했다.“언니, 나는 정말 그 사람 생각하지 않았어. 제발 믿어줘. 완전히 잊었다고는 못하지만 이젠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아!”“정말이야?”“정말이야! 믿지 못하겠으면... 언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