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희는 그곳에 그들 세 사람, 그리고 청아 모녀까지 함께 살아도 충분할 정도로 큰 집 한 채를 마련했다.하지만 성연희와 심명은 필경 큰 가문의 후계자였으니 그녀처럼 줄곧 밖에서 떠돌아다닐 수는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 시간은 청아 두 모녀와 소희가 치카고에서 살았다.소희가 고개를 숙인 채 핸드폰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안 돌아가.""그럼 청아가 간 후에 우리 집으로 옮겨."심명이 물을 그녀에게 건네주고는 소파에 앉아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소희가 듣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나에게도 집이 있어.""하지만 네 집에는 너를 돌봐줄 사람이 없잖아. 그러니까 우리 집으로 가잔 말이야. 내가 24시간 너의 분부에만 따를게."심명이 실눈을 뜨고 유혹하듯 말했다."네가 어떤 무리한 요구를 하든, 내가 다 들어줄게. 날 불쌍히 여길 필요도 없어."소희가 알약을 입에 던지고 물을 한 모금 크게 마셨다. 그러고는 그를 상대하지도 않고 일어나 침실로 걸어갔다."나 낮잠 잘거야. 나갈 때 문 닫는 걸 잊지 말고."심명이 소리쳤다."그럼 꿈에서 내 제의를 잘 고려해 봐!"하지만 돌아온 건 '펑'하고 문 닫는 소리뿐이었다.심명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고는 약을 거두어들이고 물컵을 주방에 갖다 놓고서야 웃음을 머금은 채 떠났다.*그렇게 낮잠을 자고 다시 눈을 떴을 댄 오후 3시였다. 날은 언제 흐려졌는지 방안이 어두컴컴했다.소희는 머리를 비비며 일어나 베란다로 걸어갔다. 온 강성이 암흑으로 뒤덮여 있었고, 공기는 습한 냄새를 띠고 있었다. 방금이라도 비바람이 몰아칠 것 같았다.몸을 돌려 청아 찾으러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는데 마침 방 안 캐비닛에 놓인 핸드폰이 울렸다.그래서 다시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가 핸드폰을 들었다.낯선 번호였다."여보세요?""소희 씨!"핸드폰 맞은편에서 깜짝 놀란 소리가 들려왔다."제가 누군지 알아맞혀 봐요!"소희가 맑고 빛나는 눈으로 창밖의 음침한 날씨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소희가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밖에 비가 오고 있어 청아는 이씨 아주머니에게 오지 않아도 된다고 알렸다. 그러고는 직접 나서서 저녁을 준비했다.소희는 요요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옛날옛적에 세 마리의 아기돼지가 있었어요. 아기돼지들이 무럭무럭 자라 성인이 되니 어느 날 돼지 엄마가 말했어요. ‘너희들, 스스로 나가 너희들의 집을 지으렴!’"요요가 듣더니 바로 고개를 들어 말했다."요요는 엄마를 떠나지 않을래. 스스로 집을 짓지 않을래."소희가 아이의 작은 코를 살짝 꼬집었다."그래, 요요는 그럼 스스로 집을 짓지 마. 앞으로 소희 이모가 큰 집을 사줄게."요요가 소희의 품에 기대어 말했다."엄마, 소희 이모, 요요 이렇게 셋이서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고야~"아이의 앳되고 천진난만한 대답에 소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다 책장을 넘기면서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려는데 갑자기 핸드폰 화면이 밝아졌다.이정남의 메시지였다.[소희야, 이현이 자신 생일파티에 널 초대했어?]메시지를 확인한 소희의 눈동자에 순간 빛이 반짝였다. 그녀는 요요에게 먼저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놀라고 하고는 답장을 했다.[네, 제가 돌아왔다는 걸 알고 있더군요.]이정남이 바로 또 메시지를 보내왔다.[가지 마!]이에 소희가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왜요?]이번엔 5, 6분 정도 지나서야 이정남이 메시지를 보내왔다.[소희야, 이현이 새 남자친구를 사귀었거든? 그런데 상대가 누군지 알아?]그러다 소희가 대답도 전에 이정남이 곧 또 메시지를 보내왔다.[임구택.]소희의 눈빛이 순간 움츠러들었다. 화면에 나타난 이름을 본 순간, 추억들이 예고도 없이 마구 밀려왔다. 하지만 밀려온 추억들은 또 그렇게 아득히 먼 곳에서 있는 것 같았고, 마치 안개를 사이에 두고 물속의 환상을 보고있는 느낌이 들었다.놀라울 거 있나?아니. 함께 많은 곳을 드나들며 군중들의 부러움을 자아냈던 임씨 대표님과 인기 스타 이현의 세기의 사랑 이야기는 인터넷에서 이
소희가 이를 닦으며 택배 포장지를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덤덤하게 말했다."거기에 놓으면 돼."하지만 다 씻고 돌아왔을 때 택배는 이미 뜯겨져 있었고, 정교한 초청장 한 장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심명이 그녀에게 계란을 까주면서 물었다."너 진짜 이 여인의 생일파티에 가려고?""응, 어제 이미 약속했어."소희가 고개를 숙여 죽을 마시며 대답했다. 긴 속눈썹에는 채 닦지 않은 물방울이 묻어 있었다."가도 돼!"심명이 계란을 그녀의 손 옆에 있는 접시에 올려 놓았다. 그러고는 조소하듯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나도 너와 함께 갈거야.""이현이 너에게 초청장을 보내지도 않았잖아."소희가 덤덤하게 말했다.심명이 듣더니 바로 콧방귀를 뀌었다."네가 받았잖아. 가족도 못 데리고 가냐?""일 만들 생각은 하지도 마.""걱정마. 나 아무 짓도 안 해. 맹세할게!"심명이 실눈을 뜬 채 매혹적인 웃음을 드러냈다."조용히 너의 곁에서 투명 인간 역할만 할게."소희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역시 소희가 최고야!"심명이 몸을 일으켜 입술을 내민 채 소희의 얼굴에 뽀뽀를 하려고 했지만, 소희가 바로 막았다.이튿날, 이현의 생일파티 현장.이현은 현재 인기가 들끓고 있는 배우로 생일파티도 역시 주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현은 미리 개인 생일파티의 규모애 맞춰 준비하고 모든 기자의 취재를 사절했다. 초청한 손님도 연예계에서 그녀와 사이가 괜찮은 자들, 그리고 줄곧 그녀를 지지해 온 일부 팬들뿐이었다.저녁 무렵이 되자 심명이 소희 데리러 왔다.그런데 심명을 보자마자 소희가 두 눈을 크게 떴다. 흰색 셔츠, 파란색 체크 조끼에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청색 스포츠카 안에 앉아 있는 심명은 블록버스터를 찍고 있는 모델 같았다.소희가 의아해 하며 위아래로 그를 훑어보았다."너 설마 이현을 좋아하는 거 아니야? 오늘에 가서 고백하려고?"심명이 듣더니 화가 나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흰 티셔츠에
비길 데 없이 호화로운 7성급 호텔의 연회장, 화려한 인테리어, 신분이 존귀한 손님, 모든 것이 오늘의 생일파티를 고급적인 분위기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소희는 보면서 옅은 미소를 드러냈다. 이현이 마침내 원했던 인생을 얻었으니까.두 사람이 들어서자마자 소희는 이현을 발견했다.이현은 분홍색 드레스에, 머리에도 분홍색 다이아몬드가 박힌 왕관을 쓰고 있었다. 공주처럼 예쁘게 자신의 팬들과 웃고 있었다.그리고 이현도 곧 소희를 발견했다. 그 순간 그녀의 눈빛이 여러 번 변했지만 마지막에는 반가움과 기쁨만 남았다. 그녀는 치마를 들고 빠른 걸음으로 소희를 향해 걸어왔다."소희 씨!"매우 흥분한 듯 눈웃음을 짓고 있는 그녀는 깜찍 발랄하면서도 빛을 띄고 있었다."드디어 돌아왔네요. 지난 2년 동안 저 정말 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전혀 변하지 않았네. 여전히 그렇게 예뻐요. 아니다, 예전보다 더 예뻐졌네요!"소희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얼굴을 보며 옅게 웃었다."그래?"이때 옆에 있던 심명이 이현을 보더니 참지 못하고 콧방귀를 뀌었다.아주 소희와 똑같게 뜯어 고쳤네.그도 전에 이현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땐 눈이 확실히 소희와 약간 비슷했다. 그런데 지금 입과 코도 뜯어 고치고 나니 점점 소희를 닮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물론 소희의 만분의 1에도 못 미치지만."당연하죠!"이현은 심명의 냉소에 애교를 부리 듯 콧방귀를 뀌고는 소희의 손을 잡고 물었다."다시는 안 떠날 거죠?""아마도?"소희가 대답하며 자연스럽게 손을 뺐다.이현은 그제야 심명을 보며 깜찍하게 눈을 깜박였다."소희 씨, 이분은 소희 씨 남자친구?"소희가 대답도 하기 전에 심명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당연하죠. 남자친구도 아닌데 같이 왔을 리는 없죠?""축하해요, 소희 씨!"이현이 진지하고도 귀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연회장을 한번 둘러보고는 누군가를 향해 높은 소리로 말했다."구택 씨, 나 여기에 있어요!"소희도 소리에 고개를 들
소희의 허리를 감싼 심명의 손을 한번 쳐다보고는 임구택이 덤덤하게 말했다."심 대표가 이렇게 기뻐하는데, 잠시 후에 같이 술이나 한 잔 하시죠.”"당연하죠. 하지만 제가 술에 취하는 걸 소희는 좋아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한밤중에 저를 침대에서 걷어차 버릴까 봐 무섭기도 하고."심명이 아양을 떨 듯 소희를 바라보며 웃었다.듣고 있는 소희의 얼굴색은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손은 몰래 심명의 허리살을 꼬집고 힘껏 비틀었다."습!"심명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더욱 의미심장하게 웃었다."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어차피 다 아는 얼굴들인데 뭐."이에 임구택이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걱정마요, 소희는 침대에서 사람을 걷어차지 않습니다.""그래요?"심명이 듣더니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소희를 바라보았다."그럼 제가 소희를 너무 아끼는 탓에 새로 생긴 버릇이겠네요."소희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임구택과 이현 앞에서 화를 낼 수도 없는 일이라 화제를 돌리려고 가방에서 선물을 꺼내 이현에게 건네주었다."생일 축하해."선물을 받은 이현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전혀 가시지 않았다."소희 씨, 고마워요. 오늘의 디저트는 구택 씨가 미슐랭 3성급 셰프를 모셔 만든 것들이 거든요. 소희 씨 단 걸 좋아하니 많이 먹어요."소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이현이 남자의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들어 애교 부리듯 말했다."나 드레스 갈아입고 싶은데, 도와줘요.""그래."임구택이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소희와 심명에게 말했다."실례하겠습니다. 두 분은 편한대로 돌아다녀요.""그러죠."이현이 다시 남자와 함께 떠났다.고개를 들어 남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현의 밝은 두 눈에는 예전과 똑같은 숭배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리고 임구택은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미소를 옅게 머금고 있는 남자는 인내심 있고 다정해 보였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소희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2
그녀의 눈빛은 이미 모든 것을 설명했고, 그걸 보고 있는 심명은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즉시 말했다."관둬, 관둬. 이렇게 좋은 기회를 잡지 않았으니, 나중에 후회된다고 울어도 난 너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그러고는 손을 내려 다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심명은 소희를 데리고 곳곳을 돌아다니다 술 한 잔을 소희에게 건네주었다."오늘 저녁엔 취해도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무조건 안전하게 집까지 데려다 줄게."소희가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콧방귀를 뀌었다."네가 제일 위험해.""소희야, 너는 왜 모든 사람을 믿으면서 유독 나를 믿지 않는 거야!"심명이 불만스러워하며 말했다.이에 소희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대답했다."어쩔 수 없어. 내가 널 너무 잘 알아서.""진짜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해?"심명이 듣더니 바로 소희 곁에 바짝 붙어 매혹적인 목소리로 낮게 물었다."오늘 밤 더 철저히 알아보고 싶지 않아?"미소가 순간 굳어버린 소희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심명, 절교하고 싶으면 지금 당장 말해.""쳇, 시시해."심명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이용 가치가 있을 땐 내 허리를 마구 감싸더니, 이용 가치가 없으니까 바로 버리는 거야?"소희가 순간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누가 널 이용했어? 아니, 누가 널 감쌌다고 그래?"분명 그가 먼저 감쌌으면서."그냥 방금 내가 네 기를 살려줬는지 않았는지만 대답해 봐."심명이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소희는 순간 심명이 너무 유치한 것 같아 고개를 돌려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멀지 않은 곳에서 임구택은 몇몇 아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담소를 나누는 사이, 남자의 시선은 무심코 디저트 코너를 스쳐 지나 입을 오므린 채 미소를 머금고 있는 소녀의 얼굴에 떨어졌다. 그 순간 남자의 눈빛은 어두워졌고, 눈동자에는 차고 그윽한 빛이 스쳐지나갔다.연회장에 좀 더 있다가 소희는 이현과 작별하고 일찍 떠났다.임구택은 상업계 친구를 만나 이야기
심명은 소녀가 건물에 들어선 후에야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실의에 빠진 듯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다음날청아는 허홍연을 돌보러 병원에 갔고, 소희는 집에서 요요랑 놀고 있었다.그런데 정오가 다 되어갈 무렵, 요요가 갑자기 엄마를 찾으며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갈 수도 없어 소희는 요요와 함께 놀이터로 향했다.두 사람은 먼저 백화점 식당에서 밥을 먹고 바로 위층의 놀이터로 올라갔다.그리고 요요는 미끄럼틀을 타고 있었고, 소희는 밖에 앉아 요요를 보고 있었다. 옆에는 노인 몇 명이 더 앉아 있었는데 모두 아이를 데리고 놀러 온 듯 했다."저 아이가 아가씨 아이인겨? 아가씨 아직 학생인 것 같은디, 이렇게 일찍 결혼했어?"한 노인이 놀란 얼굴로 소희를 보며 물었다.이에 소희는 옅은 웃음만 보일뿐 따로 설명 하지는 않았다.요요는 신나 있었고 소희는 너무 심심했고, 그래서 소희는 게임이나 하려고 핸드폰을 꺼냈다.그런데 오랜만에 게임에 오르니 누군가가 그녀에게 요청을 걸어왔다.임유민이었다.그리고 곧 임유민의 음성 메시지가 떴다. 엄청 놀란 말투였다."소희 쌤, 정말 소희 쌤 맞아?"소희가 웃으며 대답했다."급도 높지 않은 게임 계정을 누가 훔쳐가기라도 했을까 봐?"임유민은 다소 흥분해 있었다."소희 쌤 돌아왔어? 언제 돌아온 거야?""며칠 안 됐어.""그럼 언제 만날 수 있어? 나랑 누나 지금 소희 쌤이 보고싶어 죽을 지경인데!"소희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요즘은 좀 바빠서 안 되고, 이제 시간이 되면 너희 둘에게 연락할게.""그래, 잊지마!""응. 먼저 게임이나 한 판 하자. 오랜만이라 좀 서투네. 네가 날 리드해 줘."임유민은 즉시 소찬호도 끌어들여 함께 게임을 시작했다.처음 소희가 온라인에 접속한 걸 봤을 때, 소찬호도 엄청 놀랐다. 하지만 임유민 앞에서 너무 많은 걸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아 참았다.그렇게 게임을 몇 판 하고 나니 요요가 다른 걸 하러 가자고 징징거렸다.소희는
소희도 그의 물음에 잠깐 멍해지더니 바로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그러자 장시원이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럼 다른 사람과 결혼했어요?"소희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제 아이가 아니라, 친구의 아이에요."대답하고 있는 소희의 표정은 어딘가 착잡해 보였고, 요요를 안고 있는 손에도 덩달아 힘이 들어갔다.사실 청아는 장시원에게 요요의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아했다. 그러니 그녀도 절대 말해서는 안 되는 거고.그런데 이렇게 공교롭게도 여기서 장시원을 만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장시원이 듣더니 아주 미세하게 한숨을 돌리고는 여자아이를 쳐다보았다. 아이의 얼굴을 보노라니 알 수 없는 친절한 느낌이 들었다."정말 예쁜 아이구나. 이름이 뭐야?""요요."소희가 대신 대답하고는 요요에게 말했다."아저씨라고 불러야지, 요요야."요요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장시원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두 손을 내밀었다."아저씨 안아줘!"소희가 순간 멍해졌다.요요는 낯선 성인 남성을 엄청 두려워하는 편이라 밖에서 모르는 남자를 만나게 되면 되도록 피해 다녔다. 그런데 지금 주동적으로 장시원에게 안기려 하다니. 소희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이것이 바로 부녀간의 텔레파시인가?’하지만 그것도 그럴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두 사람이지만 혈연이 그들을 얽매고 있었으니.장시원도 다소 의외였지만 즉시 손을 내밀어 요요를 품에 안았다.그러자 요요가 그의 어깨에 기대어 두 팔로 그의 목덜미를 안았다. 심지어 즐거운 나머지 발차기까지 했다.장시원은 처음으로 어린아이를 안는 거라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단아하게 웃으며 말했다."참 낯가림이 없는 아이네요."소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어디로 가는데요? 데려다 줄게요.""괜찮아요. 택시 타면 돼요."소희가 말하면서 손을 뻗어 요요를 안으려 했다."요요야, 우리 이제 집에 가야 해. 아저씨도 바빠."하지만 요요는 장시원의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
이날, 임유진은 티타임에 진소혜와 마주쳤다. 소혜는 입술을 다물고 웃으며 말했다.“팀장님, 구씨그룹의 총애를 받으니 우리 부서 실적도 쭉쭉 오르겠죠? 부서 직원들 대신 감사드려요, 팀장님.”유진은 커피를 받아 들고 나가려다, 소혜의 옆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 소혜 씨가 한 거라는 거 알아요. 이미 누가 나한테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소혜 씨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소혜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고, 고개를 돌려봤을 땐, 유진은 이미 자리를 떠나 있었다.오후 회의에서 유진은 이렇게 발표했다.“이번 평가 기간 동안 곽시양 씨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었어요. 따라서 정현준 씨의 직책을 승계하여 부서 부팀장으로 승진해요.”“인사팀에서 곧 공식 공지드릴 예정이에요.”유진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엔 놀라움이 번졌고, 시양 본인조차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부서 내에서도 존재감이 적었고, 입사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나 실적 모두 소혜에 비해 부족했기에, 시양이 발탁된 건 모두에게 의외였다.소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팀장님, 부팀장 선발 기준이 뭔가요? 기준을 명확히 해주시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혜를 응시하며 말했다.“기준?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게 기준이라면 기준이겠죠”소혜는 눈을 크게 떴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시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시양 씨, 제 사무실로 잠깐 와요.”“네?”시양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유진을 따라갔다.유진이 회의실을 나서자, 안에서는 수군거림이 폭발했다. 최근 있었던 일로 인해 유진은 여전히 비난의 대상이었고, 그런 유진이 능력도 부족한 신입을 뛰어넘어 부팀장으로 발탁했다는 점에서 불만과 의문은 더 커졌다.현준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인사 결정은 사전 상의 없이 유진이 발표한 것이었고, 그 역시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소혜는 맞은편에 앉은 베
유진은 구은정의 표정을 보고,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는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고, 유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어제 술 마셨다던데, 괜찮아요?”은정은 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안 좋아 보이던데, 이제 술은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유진이 조용히 은정에게 당부했다.“응.”그 말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됐어요. 나 출근해야 해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그렇게 둘은 스쳐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조금 전 은정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급히 뛰쳐나왔다.그러나 복도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내가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 지금은 내 문제부터 정리해야 해. 괜히 그 사람한테 짐이 되어선 안 돼.’그날 오후, 은정은 늦게서야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법무팀에 최이석 관련 고소를 철회하라고 지시했다.마심호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 사람 같은 놈은 봐줄 이유가 없죠. 이번 기회에 서성 라인 애들도 좀 눌러놓는 게 나아요.”그러나 은정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그날 저녁, 은정은 늘 그랬듯 이경 아파트로 돌아왔다. 조용히 복도를 지나, 곧장 유진의 집 앞으로 갔다.문 비밀번호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은정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예전 그대로였고, 유진은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았다.그런데도 방 안은 왠지 썰렁했는데, 무언가 본질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은정은 그녀가 드라마를 자주 보던 소파에 앉았다.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정은 책상 위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녹음 안 했어요.”서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은정아, 이 일은 내가 밖에 알리지 않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최이석 일, 바로 고소 취하하고 다시는 들추지 마.”“그리고 스스로 구씨그룹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회사도, 강성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네 아버지에겐 그냥 말하면 돼. 죄책감 때문에 이 집에 더는 못 있겠다고. 이번엔 분명히 놔줄 거야.”“네가 떠날 땐, 내가 사람을 시켜서 돈도 챙겨줄게. 아버지한텐 그걸로도 충분히 체면 세워준 셈이 될 거야.”은정은 서선영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당신 딸을 희생해서까지 날 함정에 빠뜨린 이유가 최이석 때문이었네요.”서선영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곧바로 해명했다.“그 사람은 내 동생 밑에서 오래 일했어. 난 내 동생을 위해서 한 거야. 은정아, 지금 네가 분위기 바꿔서 빠져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내가 당신 말대로 안 하면요?”은정은 담배를 내뿜으며 한껏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어차피 난 이미 악명 높은 놈이 됐어. 하나쯤 더 얹혀도 그만이죠. 오히려 구은서는 이제 절대 부잣집 자제와의 결혼은 꿈도 못 꾸겠죠.”서선영의 얼굴은 날카롭고 차가웠다.“끝장을 보겠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은서는 동정받는 쪽이 될 거야.”서선영은 은정을 똑바로 노려봤다.“임유진하고 너, 꽤 가까운 사이잖아. 그 애는 나랑 너 때문에 몇 번이나 맞붙었지. 근데 만약 그 애가 네가 술에 취해 여동생을 건드린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그 아이 눈엔 네가 어떻게 보일까? 널 어떻게 생각할까? 넌 그걸 감당할 수 있어?”그 말에 은정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선영은 그 반응에 확신을 얻은 듯 미소를 지었다.“내 말대로 해. 열흘 안에 강성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안 그러면 임유진이든, 임씨 집안이든, 강성 전체가 너란 인간이 얼마나 추잡한 놈인지 알게 될 거야.”“널 사회적으로 매장 시킬거고, 임유진도 널 경멸하
은정은 격노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저는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이건 서선영 저 사람이 꾸민 함정이에요.”서선영은 엉엉 울면서 외쳤다.“내가 내 딸을 희생시켜서 너한테 함정을 판다고? 구은정,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알아.”“예전부터 나한테 편견이 있었지. 그래, 미우면 나한테 손찌검을 해. 왜 애먼 은서를 괴롭혀?!”“은서는 아직 시집도 안 갔어.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해? 이 소문이 밖에 나가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끝장이야!”은정은 오직 구은태만 바라보며 물었다.“저를 믿으세요?”구은태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때 갑자기 은서가 벽을 향해 몸을 던지듯 달려갔다. 죽을 각오로 내달리는 눈빛이었다.“은서야! 안 돼, 은서야!”서선영이 급히 은서를 껴안고 붙잡았고, 울음이 멎지 않았다.“은서야,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거기 누구 없어요! 얘 좀 붙잡아줘요!”서선영은 울먹이며 도우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도우미가 급히 달려와 은서를 붙들고 감싸 안았다.그중 평소 은서를 따르던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구은태 앞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회장님, 사실은 전에도 도련님께서 밤에 아가씨 방문을 두드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하지만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서, 보복당할까 봐 말씀 못 드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 도우미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제가 좀 더 일찍 말씀드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은정은 도우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애옹이가 은서에게 보내졌던 그날 밤, 은정은 술에 취해 돌아와 애옹이가 사라진 걸 알고 은서를 찾아갔다. 그때 이 도우미가 어두운 구석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은태는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죽을힘을 다해 몸을 던지려던 은서, 그리고 도우미의 일방적인 증언이 더해지자, 구은태는 은정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다시 근처에 있던 물
[말 좀 해봐요.][삼촌?]서선영이 천천히 2층에서 걸어 내려오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 장말숙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눈짓을 보냈다. 이에 장말숙 아주머니는 눈치를 채고 전화를 받아 들고 말했다.“유진 씨죠? 저희 도련님이 술에 취하셨어요.”유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네, 신세 좀 질게요. 잘 부탁드려요.]“네!”장말숙 아주머니는 괜히 말을 더했다가 실수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은정의 까만 눈동자가 서선영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이미 흐릿했다.서선영은 은정을 부축하듯 손을 내밀며,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은정아, 술 너무 많이 마셨잖아. 방으로 데려다줄게.”“으악!”날카로운 비명에 은정은 정신이 번쩍 들며 눈을 떴고, 날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옆에서는 구은서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옷가지로 몸을 허둥지둥 가리고 있었고, 얼굴은 절망감에 젖은 눈물로 가득했다. 그녀는 분노로 떨리는 눈으로 은정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서의 비명은 곧 서선영과 집 안 도우미들을 방으로 불러 모았다. 문이 열리고 방 안 풍경을 본 순간, 모두가 굳어버렸다.은정은 조금씩 의식을 되찾았고, 은서를 훑어보며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이불을 들추고 자신을 확인해 보니, 바지는 제대로 입고 있었지만 상의는 전혀 없었다.은정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이마를 짚으며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머리가 묵직하게 지끈거렸다.“엄마!”은서는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 울부짖었다.“은서야!”서선영이 달려와 은서를 안고, 옷을 덮어주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몰라요!”구은서는 서선영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했다.“밤에 오빠가 갑자기 방에 들어왔어요. 술에 취해서 저를 한 대 치더니 그다음은...”은서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드러난 어깨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짐승 같은 놈!”서선영은 벼락을 맞은 듯 충격에 빠져 온몸을 떨며 은정을 향해 소리
우정숙은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예전에 은정은 분명히 임유진은 내 스타일 아니라며 선을 그은 적이 있는데, 왜 지금 와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쫓고 있는 걸까?“넌 어떻게 생각해?”우정숙이 묻자, 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돌아왔어요.”그 말투가 생각보다 무거워, 우정숙은 분위기를 일부러 누그러뜨리며 웃었다.“이미 거절했는데도 냉정해져야 해?”유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어쨌든, 엄마는 이 일.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는 말하지 말아줘요. 그리고 삼촌한테도 되도록 비밀로 해주세요.”그 말에 우정숙은 딸의 속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갑자기 이렇게 서둘러 집에 돌아온 이유 혹시 일이 더 커질까 봐? 너희 할아버지가 구은정한테 가서 따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니야?”유진은 재빨리 대답했다.“누가 그 사람 걱정했대요? 밖에서 사는 게 질려서 온 거지, 그 사람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하지만 우정숙의 따뜻하고 조용한 눈빛은 유진의 진심을 꿰뚫고 있었다. 우정숙은 다만 조용히 숨을 내쉬며, 더는 묻지 않았다.그날 밤, 구은정은 외부 일정으로 접대를 나갔고,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좀 늦을 것 같아. 집에 들어가면 애옹이 좀 봐줘.]유진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저도 집에 왔어요. 아주머님께 부탁하세요.]은정은 유진이 하루 정도 집에서 자려는 줄로만 알고, 별 의심 없이 답했다.[알겠어.]밤 10시.은정은 아직 접대 자리에서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에 구은태가 보낸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은정아, 나 몸이 좀 안 좋다. 한번 집에 들러줄래?]은정은 미간을 찌푸렸다.[몸 안 좋으면 병원 가시죠.]그렇게 답장을 보냈지만, 더 이상의 응답은 없었다.술자리가 끝나고 나니 이미 자정 무렵이었다. 은정은 그래도 아버지를 확인하고자 구씨 저택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애옹이를 돌봐주던 장말숙 아주머니가 거실에서 그
정현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죠? 임유진 건드리지 말랬잖아요. 왜 말을 안 들어요?”진소혜는 웃었다.“들었어요. 적이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없애버리라는 그 말, 정말 감명 깊었거든요. 곧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쫓겨날 거예요.”현준은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임유진은 쫓겨나지 않아요. 사장님이 반드시 지킬 거니까요.”현준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덧붙였다.“유진 씨, 그 정체가 간단하지 않아요. 사장님이 곤란한 일에 휘말릴 때마다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 애였다고요.”“이렇게 성급하게 나가면 결국 당하는 건 소헤 씨라고요.”소혜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것도 그 얼굴 덕 아니었을까요? 임유진이 무슨 대단한 집안 출신이라도 돼요?”현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 애, 성이 임이야.”소혜는 비웃었다.“강성에 임 씨 많은데요? 임씨라고 다 임씨 집안이예요?”“임유진이 정말 그 임씨 집안 사람이었으면, 이런 작은 곳에서 평사원으로 일할 일이 없죠.”강성에서도 가장 윗자리에 있는 집안, 그 임씨 집안 사람이라면 당연히 격이 달랐을 것이다.현준은 소혜를 바라보며, 무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소혜 씨, 소혜 씨는 너무 자만해요. 이제 막 졸업한 사람이잖아요. 세상이 어떤지 아직 몰라요.”“내가 경력은 부족하지만, 머리는 좋아요.”소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어요.”현준은 더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고, 소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이번 달 말이면,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질 거예요.”이메일은 해외 IP에서 발송된 것으로 확인되어, 추적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루머는 벌써 영업팀까지 퍼진 상황이었다.한때 유진이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걸 보고 감탄했던 동료들조차, 그녀가 정말 실력만으로 이룬 건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너무 젊은 나이에, 임씨 그룹 같은 대형 고객을 설득하고, 이미 다른 부서에서 거의 성
서선영은 유혹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거절하려는 듯하면서도 몸은 피하지 않았다.“안 돼. 나, 한 시간밖에 못 나와 있어.”“당신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최이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선영의 치마 지퍼를 내렸다.“밖에 사람 세워놨어. 아무도 안 들어와.”...오전, 임유진은 구씨그룹과의 계약을 마무리했다. 오후에는 회사 고위층 회의에 참석했고, 회의가 끝나고 마케팅부로 돌아왔을 때쯤, 팀 동료들의 시선이 평소와 달랐다.유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모두는 급히 예의를 갖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유진은 손에 든 자료를 들고 여진구를 찾아갔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진구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유진이 들어오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무슨 일 있었어요?”유진이 맑은 목소리로 묻자, 진구는 곧바로 말을 돌렸다.“아니야. 너 손에 든 거, 청원안 자료야? 나 좀 볼게.”하지만 유진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휴대폰, 보여줘요.”진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방금 보고 있던 건, 유진과 은정이 함께 있는 사진들이었다.둘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 그리고 둘이 함께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는 장면. 얼마 전 중식당에서 있었던 그날이었다.진구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누군가 이 사진들을 너희 팀 메일에 전체 전송했어. 내용은, 네가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게 구은정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어서라고.”유진은 이미 그 메일을 확인했었다. 메일에는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구씨 그룹 사장을 유혹했다는 식의 악의적이고 천박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업계 풍기를 망친다는 말까지, 표현이 거칠고 추했다. 유진은 이를 꽉 물었지만, 곧 침착하게 물었다.“발신 IP 추적할 수 있어요?”진구가 답했다.“지금 IT팀에서 추적 중이야. 내부 직원일 수도 있고, 유지그룹 쪽의 보복일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반드시 밝혀낼 거야.”“일단 외부로 확산은 안 됐고, 회사 내부 루머 수준이야. 이미 전체 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