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으로 돌아온 구택은 몸을 숙여 소희의 얼굴에 뽀뽀했다.“먼저 샤워하러 갈까?”소희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물었다.“나 여기서 자?”“그럼 어디서 자고 싶은데?”구택이 웃으며 물었다.“너희 집에 온 첫날인데 바로 너랑 같이 자면, 좀 그렇지 않아?”소희의 눈빛은 물처럼 맑았다.“자기야, 여기에 있는 사람들 우리 결혼한 거 다 알아!”구택은 웃으면서 소희의 손을 잡고 욕실로 갔다.“나 아직 당신 엄마랑 형수에게 인사하지 못했는데.”“했어.”“언제?”“네 잠옷을 가져다줄 때.”소희는 손목을 들어 구택에게 보여주었다.“당신 어머니가 준 팔찌.”“형수도 있던데.”구택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며느리한테 줄 팔찌도 받고 아직도 우리 어머니야?”소희는 시선을 깔고 말했다.“난 엄마라는 호칭이가 너무 낯설어, 적응할 시간을 좀 줘.”구택의 눈빛이 어두워졌고 가슴이 아파 났다. 그는 소희의 얼굴에 가볍게 입맞춤했다.“괜찮아, 호칭 정도쯤이야 바꾸고 싶을 때 바꿔. 평생 안 바꿔도 내가 엄마를 설득할게. 호칭은 중요하지 않아!”소희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호칭 바꿀 거야.”‘이렇게 날 잘 챙겨주는데 나도 제멋대로 할 순 없잖아?’한 시간 후.구택은 소희를 안고 욕실에서 나와 침실로 들어가지 않고 통창 쪽으로 걸어갔다.유리창은 하루 종일 햇볕을 받아 따뜻한 느낌을 주었지만, 소희는 몸 전체가 찌릿찌릿하고 떨렸다.“여기는 싫어.”어정이든 경원이든 높이가 높아서 밖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하지만 여기는 3층이었고 별장 마당에는 하인이 수시로 지나갔다.“안 보여.”구택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며 소희를 달래듯이 계속 키스를 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마치 밤하늘을 담은 것처럼 깊고 의미심장한 빛을 띠고 있었다. “믿어져? 나는 여기서 너와 유민이가 사격 훈련을 하고 있는 첫 날부터 이런 순간을 상상해 왔었어.”소희는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핑크빛이 도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그럼 처음 봤을 때 그 진지하
소희는 눈알을 굴리며 웃었다.“나쁘지 않아!”구택도 웃는 듯했다. 곧이어 구택은 몸을 돌리더니 소희의 몸을 누르고 키스했다.소희는 그를 너무 잘 알고 있었고 이대로 키스하면 어떤 일이 생길 것인지 충분히 상상이 갔다.“우리 달리기하러 가자!”구택은 눈살을 찌푸렸다.“나 겨우 4시간 잤는데?”소희의 귓가가 빨개지더니 입을 열었다.“그럼 계속 자든가!”“자고 있었는데 누가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어서 깨어났지.”소희는 몸을 돌려 그를 피했다.“난 좀 뛰어야겠어, 네가 가지 않으면 유림이를 불러서 같이 뛸 거야.”구택은 긴 팔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고 한참을 키스한 후에야 일어나 같이 조깅하러 갔다.그 별장 주변은 아름다운 가로수길이었고, 아침 공기는 특별히 시원했다. 가끔씩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은 마치 사람들의 마음을 맑게 만드는 듯했다두 사람은 뛰다가 쉬다가 별장에 돌아왔을 떈 날이 이미 다 밝았다.노정순은 아침부터 소희의 사이즈에 맞춰 옷 세 벌을 보내달라고 했다. 소희는 샤워한 후 옷을 갈아입고 구택의 가족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하룻밤을 거쳐 정순은 소희에게 더욱 친근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로 다가갔다. 우정숙이랑 임지언은 소희를 여동생처럼 대했고 유림이랑 유민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전부터 그녀를 가족으로 생각했다.너무 뜨거운 감정도 아니고 차가운 무관심도 아닌 태도는 소희에게 안락함을 선사했다.아침을 다 먹은 후 소희는 작별을 고하고 떠났다. 정순은 구택이랑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본가에 들어오지 않아도 되는데 주말마다 소희를 데리고 와야 해. 소희 보고 싶어서 그러니까.”구택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잊으셨어요? 매주 유민이 수업하러 오잖아요. 한번이 아니라 매주 두 번씩은 갈 것 같아요.”정순은 이제야 깨달은 듯 말했다.“나 정신 좀 봐.”“우리 먼저 가볼게요.”구택이 입을 열었고 소희도 뒤따라 구택의 가족들과 인사했다.별장을 떠난 후 소희는 팔찌를 벗어 구택에게 건네주었다.“출근할 때 액세
임유진은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가 서인을 놀래켜 주려 했지만, 서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거기 서! 움직이지 마!”서인이 외치는 소리에 유진은 킥킥 웃으며 말했다.“뭐야, 자는 척했던 거였어요?”서인은 미간을 문지르며 손을 뻗어 담배를 찾았고 목소리는 금방 깨나서 그런지 허스키했다.“이 시간에는 웬일이야?”“오늘 수업이 일찍 끝났거든요.” 유진은 물병에 물을 받아 자기가 심은 장미에 물을 주었다.“내가 이미 줬어!” 서인이 담배를 한 모금 빨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이게 물을 주신 거라고요? 물을 들이부은 것 맡기는 일은 항상 대충 처리하시는 경향이 있으시네요.”“그게 물 주기라고요? 장마철은 둘째 치고 맡긴 일을 항상 대충 처리하시네요!” 유진이 재치 있게 말하며 계속해서 물을 주었고 반려견 야옹이에게도 사료를 먹였다. 야옹이는 유진을 보고 흥분하였는지 계속해서 유진이의 품에 뛰어들려고 했다.그런 야옹이가 귀여웠는지 유진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야옹이는 순종적이게 얌전히 앉아 꼬리를 흔들며 좋아했다.마당에 심어진 나무에 의해 생긴 그늘에 앉은 서인은, 유진이 야옹이가 놀아주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옆에는 만발한 장미가 피어 있었고, 유진의 사랑스러운 얼굴과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같았다.곧이어 서인은 시선을 돌려 의자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고 있자 유진이 다가가 다리로 서인을 살짝 찼다. “서인 할아버지, 일어나세요!”서인이 눈을 뜨고 말하자 유진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뭐라고 부르는 거야?”“하루 종일 여기 앉아서 햇볕을 쬐는 거 보면, 벌써 노인네처럼 퇴직 생활을 시작한 거 아니에요?”서인은 담배를 피우며 태평하게 웃었다. “그게 뭐가 나쁘지?”“당연히 나쁘죠! 젊은이답지 않게 활력이 전혀 없잖아요!”서인은 담뱃재를 털며 나른하게 웃었다. “나는 그리 젊지 않아!”“그럼 얼마나 늙으셨는데요?” 유진이 콧방귀를 뀌며 비아냥거리자 서인은 눈살을 찌푸렸다.“너 나한테 시비 걸려고 온 거
“본인이 말씀하시고는 잊으신 거예요?”임유진은 서인을 노려보며 되물었다.서인은 과거 자신이 유진에게 한 말이 떠오르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내가 소희를 좋아하든 말든 상관없어. 나는 그저 소희가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소희 언니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아요. 본인이 뭘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니까!”유진이 그의 휴대폰을 가져가며 말했다. “어쨌든 둘 사이에 끼어들지 마요!”“좋아, 소희한테 연락하지 않을 테니까 내 휴대폰 돌려줘.”“안 돌려줘요. 누가 알아요, 몰래 전화할지.” 유진은 휴대폰을 자신의 옷 주머니에 넣었다. “그럼 계속 햇볕 쬐세요. 저는 밖에 나가서 이문이랑 화투 놀 거니까.”서인은 그저 무력하게 유진이 자신의 휴대폰을 들고 뛰쳐나가는 걸 지켜봤다. 이문과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화투를 치고 있었고, 유진이 오자 자연스레 그녀의 자리를 내어주었다.이문은 입에 담배를 문 채 패를 섞으며 유진에게 물었다. “두 판 할래? 이기면 네 거, 지면 내 거!”오현빈이 곧바로 이문을 바라보며 엄숙하게 말했다. “큰형님이 유진이 화투 치는 걸 금지하셨으니까 쓸데없이 일 만들지 마!”이에 이문은 느긋한 표정을 거두고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내가 그걸 잊고 있었네!”“그 사람 말 듣지 말아요. 나 이거 하고 싶으니까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줘요!”유진이 궁금해하며 말했다.“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을 거야. 큰형님이 말했어. 누가 널 화투나 술 마시게 하면, 그 사람을 쫓아낼 거라고.” 현빈이 웃으며 유진을 일으켰다. “자, 편의점에 가서 내가 맛있는 것 사줄게!”유진은 불만이 가득해 콧방귀를 뀌었다.“나는 어린애가 아니에요!”“가자!” 현빈이 거의 강제적으로 유진을 끌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은 함께 나와 근처 편의점으로 가서 아이스크림과 탄산음료를 샀고 유진이 계산을 하려고 했지만 현빈이 제지하였다.이에 유진이 입을 열었다.“얼마 안 하는 건데 왜 이렇게 선을 그어서 구분해요?
뒤뜰에는 아무도 없자 임유진은 약간 놀라며 건물 안으로 향했다. 두 번째 층에 올라가고 서인의 방문 앞에 서자, 심문정이 서인의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한눈에 보였다. 문정은 문 쪽을 등지고 허리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그 자세는 마치 뭔가를 암시하고 있어 보였다.유진은 큰 숨을 들이켜고는 소리쳤다. “심문정 씨,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예요?”문정은 깜짝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고, 손에 들고 있던 것이 바닥에 떨어졌는데 그것은 유진이 심은 금잔화였다. 이제 막 두 송이가 피었는데, 문정이 모두 따 버린 것이었다. 유진은 달려가 꽃을 주워 들고 화를 내며 말했다. “내 꽃을 따버린 거야?’문정은 유진의 눈길을 피하며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 없이 밖으로 걸어 나갔다.“거기 서!”유진이 뒤쫓아 거실까지 나갔고 문정의 손목을 잡고 소리쳤다.“거기 서라고 했잖아!”“무슨 일이야?”서인이 욕실에서 나오며 두 사람을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봤고 유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방에 있었던 거야? 도대체 둘이 뭘 한거에요?”서인은 얼굴이 어두워지며 말했다. “유민아, 함부로 말하지 마!”문정은 눈을 크게 뜨고 억울한 척 말했다. “나는 그냥 서인 사장님께 탄산음료를 전해주러 온 거예요.”“탄산음료를 전해주러?” 유진은 비웃으며 말했다. “탄산음료를 침대에 누워서 전해주나요?”문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서인을 바라보았다. “제가 위로 올라갈 때 발목을 삐었어요. 그래서 잠깐 침대에 앉았는데 미안해요, 다음부터 주의할게요.”서인은 오해가 생길까 봐 진지한 얼굴로 유진을 나무랐다. “별일도 아닌 거로 소란스럽게 굴지 마.”“그럼 제 꽃은 어떻게 할 거예요?” 유진은 화가 나서 말했다. “누가 당신에게 내 꽃을 따라고 했어요?”“저는 뒤뜰에서 서인 사장님을 찾았는데, 사장님이 안 계시기도 하고 근데 마침 이 꽃이 예뻐 보여서 두 송이를 따버렸어요.” 문정은 입술을 깨물며 변명했다. “저는 이 꽃이 유민 씨가 심은 건
서인이 문을 닫고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임유진, 너 왜 그래? 심문정은 이문의 여자친구인데, 왜 그렇게 공격적으로 달려들어? 이문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유진은 눈을 내리깔고 말이 없었다.유진은 이문을 위해 문정을 가게에 오지 못하게 하려던 것이었고 그저 이문이 여자 때문에 서인과 관계가 틀어지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여자의 직감은 그 무엇보다 정확해서 유진은 문정은 분명 서인에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유진은 서인이 지금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저 유진이 일부러 끼어든다고 생각할 것이었다.서인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문정이 너의 꽃을 딴 것은 잘못이지만, 이미 딴 걸 어떡해? 게다가 그 꽃은 다시 피잖아. 내가 앞으로 너 대신 꽃에 열심히 물을 줄게!”유진이 그렇게 화난 건 장미 때문이 아니었기에 큰 소리로 말했다.“나는 심문정이 싫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가게에 오는 걸 원치 않아요!”서인은 문정을 그리 싫어하는 유진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싫은 거야?”유진은 입술을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두 송이 꽃 때문에 아직 화가 난 거라면, 내가 이문 대신 꽃값을 네게 물어줄게. 내 휴대폰 돌려주면, 지금 바로 네게 송금할게!”유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지금 돈이 필요해서 이런다고 생각해요?”서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유진을 바라봤다. “그럼 왜 그렇게 난리를 치는 거야?”유진의 눈가가 쓰라렸고, 화가 나고 실망한 눈으로 서인을 바라보며 깊은숨을 들이켜고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임유진!” 서인이 유진을 부르며 따라갔고 유진은 거실에서 멈춰 서서 서인의 휴대폰을 꺼내 그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너무 화가 나니까 앞으로 다시는 보고 싶지 않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빠르게 뛰어나갔고 서인은 유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서인은 유진이 왜 갑자기 그렇게 무리하게 행동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퇴근 시간에 임구택이 차를
“그럼 어떻게 할 건데요? 우리 지금 사귀는 중인데 호텔에서 살아야 하나?”장시원이 여유롭게 웃으며 말하자 우청아는 눈을 내리깔고 답했다.“우리도 평범한 커플처럼 지내면 되잖아요.”시원은 청아를 바라보며 농담을 했다. “당신의 말은, 우리가 손을 잡고 시작해서, 2~3개월 후에 키스하고, 반년 후에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거야?”노골적인 시원의 질문에 청아는 얼굴이 붉어지며 화를 냈다. “당신은 그런 연애를 해본 적이 없겠죠. 패스트푸드 같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또 언제든지 관계를 끝낼 수 있을 테니까.”시원은 청아의 손을 잡으며 유쾌하게 말했다. “농담으로 한 말에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해?”청아도 자신의 반응이 지나치다고 느꼈는지 미안하다고 말하자 시원이 웃으며 말했다.“내가 예전에는 확실히 패스트푸드를 먹어서 이번에는 정식을 먹어볼까 하는데 너는 어때?”시원이 장난스레 묻자 청아의 얼굴은 붉어졌고, 입술을 깨물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임구택 오빠랑 소희가 돌아왔어요. 오늘 저녁에 우리 집에서 식사할 거니까 내일 다시 동거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요?” 시원이 차분하게 말하자 청아는 약간 놀라긴 했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소희가 돌아왔어요?” 시원은 청아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 “그렇게 행복해하면 나는 어쩌지? 당신 마음속에 내 자리는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싫어. 그 누구도 나보다 우선순위가 되는 건 싫다고.”청아는 자신의 마음속에 시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가 몇 번이나 선을 넘을 때마다 가만히 봐주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자, 집에 가요!” 시원이 청아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청아는 손을 빼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안 돼요.”퇴근 시간이라 회사에는 아직 많은 사람이 있었기에 조심하려는 청아였지만 시원은 약간 불쾌해하며 말했다.“내가 연애도 몰래몰래 해야 하는 거야?”그러자 청아는 일부러 옆으로 기울이며 말했다.“다들 악명 높은 사람이랑은 거리를 둬야
임구택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느긋하게 소파에 기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장시원은 구택이 일부러 그런 것임을 깨닫고 비웃으며 말했다. “자기 자식도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진짜 돌아온다 해도 걱정할 필요 없어.”시원은 우청아가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할 리가 없다고 믿었으며, 또 다시 그런 나쁜 남자를 좋아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구택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남을 비판하기 전에, 자신도 단점이 없는지 봐야 하지 않겠어?”시원은 구택을 쳐다보다가 갑자기 웃으며, 조금 진지하게 말했다. “나 진짜로 청아 좋아하는 것 같아.”시원은 이전에 여자친구를 사귀던 것이 매우 즉흥적이었다. 좋으면 만나고, 싫으면 헤어졌고, 어떤 경우에는 헤어진 후에도 친구로 남기도 했다. 하지만 청아와는 달랐는데 시원은 자신이 청아에게서 상처받고, 남녀 사이에 혐오감을 느껴서 복수하려고 했다고 생각했다. 청아를 얻은 후에는 감정이 사그라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시원은 오히려 청아에게 의존하게 되었고, 청아의 작은 집에서 무한한 매력을 느껴서, 매일 일을 마치고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그날 청아가 동거하지 않겠다고 말하자, 시원은 심지어 조금 당황했다.구택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그러자 시원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나도 너처럼 죽을 듯이 사랑하고 싶진 않아!”“그러니까 청아한테 잘 대해줘. 사랑하는 사람한테 잘 대해주는 건 결국 본인 스스로한테 잘 대해주는 거랑 같으니까!”구택의 말에 시원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경험에서 우러난 조언인가?”“물론이지!”……저녁, 소희와 구택이 떠난 후, 시원은 요요를 재우기 위해 이야기를 들려줬고, 청아는 샤워를 하러 갔다.요즘 요요를 재우는 일은 시원의 몫이 되었다. 요요는 시원에게 의지했고, 시원 역시 그 일을 즐겼다.샤워를 마친 청아가 잠옷을 들기 위해 손을 뻗었을 때, 시원이 청아의 뒤에서 껴안았
안토니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서인 형! 호텔 철거팀이 또 왔어요! 이번엔 포크레인까지 끌고 와서 우리 집을 당장 부수겠다고 해요!][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죠? 분명 철거하지 않기로 합의한 거 아니었어요? 우린 어떤 계약서에도 서명한 적 없고, 동의한 적도 없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 거죠?]서인의 얼굴이 굳어졌고, 눈빛은 차갑게 변했다.“지금 바로 갈 테니까 철거 인부들을 최대한 막아봐. 하지만 네 안전이 최우선이야. 가족들도 꼭 보호해야 해!”[네!]토니는 급히 대답했다.[일단 어떻게든 붙잡아 볼게요!]“반드시 조심해!”전화를 끊고 나서야 임유진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서인은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하자, 유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어제 확실히 협의 끝난 거 아니었어요? 혹시 아래 직원들이 전달을 못 받은 거 아닐까요?”서인은 차 시동을 걸면서 오석준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그러나 신호가 길게 가더니 결국 연결되지 않았다.이에 곧바로 이한우에게 전화하자, 한우도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바로 형님한테 전화해 볼게. 안 받으면 직접 찾아갈게!]전화를 끊자마자 서인은 급히 차를 몰아 토니의 집으로 향했다. 차의 속도를 올려 빠르게 도착했을 때, 그곳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포크레인 한 대가 집 앞에 서 있었고, 토니의 아버지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그를 억지로 일으키려 하고 있었고, 토니와 다른 두 사람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윤석경은 철거 인부들에게 울며 애원했지만, 한 명이 그녀를 밀쳐버렸고, 이내 윤석경은 중심을 잃고 벽에 부딪칠 뻔했다.그 순간, 서인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토니의 아버지를 붙잡고 있던 사람 중 하나를 단숨에 발로 걷어찼다. 그리고 막 아버지를 부축하려던 순간, 유진이 소리쳤다.“조심해요!”서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재빠르게 몸을 틀어 뒤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상대의 손목을 잡아 꺾었다.
유진은 한눈에 서인의 잠든 모습을 훑어보았다. 거칠고 자유분방한 그의 잠든 모습조차도 심장을 뛰게 했다. 정말 사랑에 빠지면 상대가 제일 멋있어 보인다는 말이 딱 맞는 순간이었다.유진은 침대로 올라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리고 옆에 있는 자신의 최고 미남을 바라보며 말했다.“사장님, 나 이야기 듣고 싶어요!”서인은 살짝 눈꺼풀을 들어 유진을 곁눈질하며 말했다.“내 229명의 여자친구 이야기라도 들려줄까?”그 말에 유진은 눈을 부릅떴다.“말할 용기가 있으면, 난 들을 용기도 있어요!”“좋아.”서인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으며 회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첫 번째 여자는 나랑.”그러자 유진은 휙 하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머리까지 덮어버렸다. 서인은 마치 타조처럼 몸을 숨기는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서인은 손을 들어 조용히 불을 껐다.다음 날, 서인은 유진과 함께 흥성 주변의 명소를 둘러보았다. 유진은 하루 종일 신나게 놀았고,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월요일전과 같은 찻집에서 서인은 한우와 오전 10시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두 사람은 미리 10분 전에 도착해 기다렸다.서인은 유진에게 말차 케이크를 하나 주문해 주었고, 그녀는 속으로 조금 설렜다.‘지난번에 내가 이걸 좋아한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구나.’정확히 10시가 되자, 한우와 그가 부른 사람이 도착했다. 한우는 두 사람에게 소개를 건넸다.호텔 프로젝트의 공사 책임자는 오석준, 마흔이 갓 넘은 나이에 머리 위가 약간 벗겨졌고, 몸집이 풍채가 있었다. 늘어지는 듯한 눈꺼풀 사이로 날카롭고 계산적인 눈빛이 스쳤다.일행이 자리를 잡고 앉자, 한우가 오늘 만남의 목적을 간단히 설명했고, 서인도 안토니 가족의 상황을 차분히 이야기했다.한우는 이야기를 들은 뒤, 바로 전화를 걸어 토니 가족의 집이 있는 정확한 위치를 확인했다.그 후,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원래 안토니 씨 댁은 철거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어요.”“하지만 서인 사장님이 직접 나를 찾아왔
유진은 맑은 눈으로 서인을 바라보다가, 이내 애잔한 눈빛으로 변하며 말했다.“내가 멍청하고, 잘 몰라서 이렇게 남아서 당신과 함께 세상을 보고 배우려는 거잖아요. 내가 함부로 아무거나 따거나 건드리지 않을게요.”“약속할게요, 그래도 안 될까요?”서인은 유진의 애처로운 표정을 보며 결국 마음이 약해졌다.“그럼 네 일은 어떻게 할 건데?”“휴가 내야죠. 마침 프로젝트 하나 끝낸 참인데, 여진구 선배가 며칠 쉬라고 했어요.”유진은 덧붙였다.“걱정 안 해도 돼요. 저 그런 무책임한 사람 아니에요. 일에 지장 주지 않을 거예요.”서인은 잠시 고민했는데, 유진을 혼자 차 타고 돌아가게 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그러면 이틀 동안 나랑 같이 다니되, 혼자 돌아다니지는 마.”이에 유진은 환하게 웃었다.“걱정하지 마세요. 하루 24시간 내내 사장님이랑 붙어 있고 싶을 정도니까요.”서인은 할 말을 잃었고, 순간 유진이 일부러 자신을 흔드는 게 아닐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사랑스러운 말이 너무 자연스럽게 튀어나온다.그러나 유진의 맑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어쩌면 자신이 너무 깊이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두 사람은 마당에서 바람을 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유진은 의자에 편하게 몸을 묻고 앉아 서인에게 물었다.“이한우 씨한테서 연락이 왔어요?”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호텔 공사 담당자와 연락이 닿았어. 월요일에 만나서 이야기할 거야.”유진은 손으로 턱을 괴며 말했다. “그 사람이 안토니 씨 집을 허물지 않겠다고 동의하면 문제는 해결된 거네요.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 것 같아요.”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길 바랄 뿐이지.”유진은 미소를 지었다.“동의하지 않을 거면 굳이 만나려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서인은 문득 유진에게 물었다.“회사에서는 무슨 일 해?”그러자 유진의 눈빛이 반짝였다.“드디어 내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네요?”서인은 입을 꾹 다물고 약간 어색한 기색을 보이며 시선을 피했다.“그
그 말에 서인은 코웃음을 치며 믿지 않는다는 듯이 옷장을 열어 옷을 꺼냈다. 그러면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나가 있어.”임유진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문을 열었다.“내가 훔쳐볼 것도 아니잖아요. 그 정도로 경솔하지 않아요. 보면 당당하게 보죠!”유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문을 밀어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서인은 유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임유진,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서인은 서둘러 샤워를 끝내고, 나와서 밖을 내다보았으나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이내 서인의 표정이 굳어졌고, 그는 곧장 발걸음을 옮기며 유진을 불렀다.“임유진!”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수영장 주변은 조용했고, 희미한 조명 아래로 물결만이 은은하게 일렁이고 있었다.검은색 철제 울타리 너머로 다른 객실의 정원이 보였지만, 어디에도 유진은 없었다. 서인의 목소리가 낮아졌고, 이번에는 조금 더 강한 어조로 유진의 이름을 불렀다.“임유진!”그때, 화악 물살을 가르며, 유진이 수면 위로 튀어나왔다. 촉촉한 얼굴에는 물방울이 반짝였고, 커다란 눈동자가 더욱 맑게 빛났다. 유진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눈앞에 있는 서인을 바라보았다.잔물결이 유진의 주변에서 별빛처럼 흩어졌다. 그녀는 마치 물에서 갓 피어난 연꽃처럼 수면 위에 떠 있었다.서인은 순간적으로 말이 막혔고, 유진은 그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수영하며 천천히 다가왔다.그리곤 눈앞에서 손가락을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왜 그래요? 놀랐어요?”서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렸다. 유진은 웃으며 수영장에서 나와 그를 따라가려 했지만, 나오자마자 재채기했다.그러자 서인은 한숨을 쉬고, 방으로 들어가 수건을 꺼내고는, 곧장 유진에게 다가가 수건을 둘러주며 나지막이 말했다.“옷 입은 채로 물에 들어가? 유진, 너 혹시 뇌를 물에 빠뜨린 거 아니야?”유진은 수건을 감싸 안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내가 옷을 안 입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안주설과 안토니를 힐끗 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사장님, 힘들지 않아요? 내려줄까요?”서인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두 시간은 거뜬해.”그 말에 유진은 깔깔 웃었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몸을 더욱 기대고, 탄탄한 팔뚝을 베개 삼아 살짝 눈을 감았다.따뜻한 햇살과 산속의 상쾌한 공기, 그리고 서인이 주는 안정감.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불안도 없었다.유진의 몸은 가볍고 부드러웠고, 땀방울이 살짝 맺힌 피부는 촉촉하고 서늘했다. 그리고 은은한 향이 서인의 코끝을 간질였다. 서인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걸음을 뗐다.그러나 그때, 유진이 몸을 조금 더 밀착시키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사장님, 정말 나를 좋아하지 않아요?”갑작스러운 말에 서인의 발걸음이 순간 멈췄다. 유진의 숨결이 서인의 목을 스쳤고, 목소리는 부드럽고도 깊었다.그러나 서인은 단호하게 말했다.“안 좋아해.”유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고, 그녀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래도 좋아요. 사장님이 나 말고 다른 사람도 안 좋아하면, 난 그걸로 괜찮아요.”유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인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은 어두웠고,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었다.“그만 말해.”유진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서인은 다시 묵묵히 걸었다.마침내 정상에 도착했을 때, 유진과 서인은 산 정상의 너른 바위 위에 앉아 경치를 바라보았다.잠시 후, 토니와 주설도 간신히 정상에 도착했다. 둘은 이미 땀범벅이었고,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반면, 서인과 유진은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 토니는 헉헉대며 엄지를 치켜세웠다.“서인 형, 진짜 대단해요!”주설은 다소 무안한 표정으로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산할 때는 토니와 주설이 더욱 느리게 걸었고, 결국 민박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토니의 부모
“이거 소매 속에 숨기면 안 보일 거예요!”임유진은 서인의 손을 꽉 잡고, 손목에서 놓아주지 않았고, 끝까지 팔찌를 채우려 했다.이에 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티셔츠를 입고 있는데, 무슨 소매 속에 숨긴다는 거야?’그러나 유진은 자기 말에 모순이 있다는 걸 전혀 깨닫지 못하고, 손목에 팔찌를 걸어주려고 했다.“움직이지 마요!”서인은 손을 빼내려 하는 순간, 앞에서 안토니가 그를 불렀다. 그렇게 서인이 잠깐 시선을 돌린 사이 유진은 순식간에 서인의 손목에 팔찌를 걸었다. 그러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절대 빼면 안 돼요. 안 그러면, 계속 떠벌릴 거예요. 내가 사장님 좋아한다고!”둘은 한적한 산길 위에 서 있었다. 햇볕이 부드럽게 내리쬐며, 유진의 맑은 눈동자에 반짝거리는 빛을 담았다. 그 말은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그녀의 눈빛은 누구보다도 진지했다. 깊고 따뜻한 감정을 담은 채, 서인을 바라보고 있었다.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서인의 가슴을 깊숙이 파고들어,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 차가운 금속 팔찌가 손목 위에 얹혀 있었다. 그러나 순간, 그것이 뜨겁게 달궈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마치 그 감정이 그의 맥박을 타고 흘러드는 것처럼.서인은 아무 말 없이 방향을 돌려 토니에게 향했다. 유진은 그 뒤를 따라 걸으며, 손안에 남은 하나의 팔찌를 꼭 쥐었다.산길을 따라 걷다 보니, 길가에는 여러 노점이 늘어서 있었다.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기념품과 지역 특산물이 가득했다. 넷은 천천히 길을 걸으며, 이것저것 구경했다.그러나 한참 후, 길이 점점 가팔라지기 시작하자, 안주설과 토니는 숨을 헐떡이며 걸음을 늦추었다.“아 나 더 이상 못 걷겠어.”주설이 투정을 부리자, 토니는 다정하게 그녀를 업었다.“어릴 때부터 산길을 걸었으니까, 널 업고 정상까지 가는 것도 문제없어!”주설은 토니의 목에 팔을 두르며, 고개를 돌려 유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은근한 우월감이 스며들어 있었다.“우리, 원래 이래요.
유진은 서인이 돌아오는 것을 보자마자 환한 얼굴로 말했다.“사장님! 안토니가 우리를 산에 데려가 준대요!”토니도 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마을 뒷산 경치가 꽤 괜찮아요. 오후에 특별한 일정도 없으니까, 산책하면서 둘러보는 게 어떨까요?”서인은 유진이 잔뜩 들뜬 모습을 보자, 별다른 거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그렇게 토니의 안내에 따라 산길을 걸었다.약 10분 정도 걷자, 산으로 오르는 메인 길이 나왔다. 그곳에는 관광객들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네 사람은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걸었다.안주설은 토니의 팔을 꼭 끼고 있었고, 그 모습은 꽤 다정해 보였다. 멀리 보이는 산은 웅장하게 솟아 있었고, 정상 부근에는 하얀 눈이 덮여 있었다.산허리에는 옅은 안개가 감돌아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가까운 곳에는 거대한 바위가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었고, 울창한 숲이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신선한 공기가 폐 속까지 깊숙이 스며들며,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었다.유진은 감탄하며 말했다.“와, 정말 아름답네요!”서인은 유진을 힐끗 보며 말했다.“원래 이런 거 안 좋아하지 않았어?”애초에 유진은 이번 주말에 회사 워크숍이 있었지만, 가지 않겠다고 했었다. 집에서 쉬는 게 더 좋다고 했던 사람이, 여기 와서는 이렇게 들뜬 표정을 짓고 있었다.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서인을 올려다보았다.“그걸 아직도 모르겠어요? 여행이 즐거운 건,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가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예요.”서인은 걸음을 멈추고 유진을 바라보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참, 까다롭네.”이에 유진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반박했다.“이게 왜 까다로운 거예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감정인데!”그러나 서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다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유진은 잽싸게 그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그럼 사장님은 나랑 같이 산에 오는 게 좋아요, 아니면 모르는 사람들이랑 노는 게 좋아요?”서인은 잠시 걸음을 늦추더니, 진지하게
유진은 볼이 살짝 붉어진 채,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서인을 노려보았다.“설령 난초라 해도, 가장 흔한 종류잖아요! 어떻게 그게 100만원이나 해요? 역시 사장님, 돈이 많긴 많네요!”서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100만원, 네 월급에서 차감할 거니까.”그 말에 유진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한동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서인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가슴이 들썩일 정도로 웃었고, 눈가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원래라면, 유진은 자신이 바보 같아서 화가 났고, 서인이 계속 놀려서도 화가 났다. 그런데 이렇게 웃는 걸 보니, 그 모든 감정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나직이 말했다.“앞으로는 아무거나 함부로 건드리지 않을게요.”다시는 서인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서인은 웃음을 거두고, 유진을 조용히 바라보았다.사실 그녀가 잘못한 게 아니었다. 또한 서인은 유진을 성가신 존재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결국, 서인은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원래 그건 그냥 잡초였어.”그것을 귀한 보물로 만든 건, 사람들이었다. 처음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던 유진은, 이내 서서히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미소는 달콤하고, 보기 좋았다....점심때가 되자, 토니네 가족은 뒷마당에서 키운 닭을 요리하고, 지역 특산 음식을 만들어 서인과 유진을 대접했다. 소박한 가정식이었지만, 정성이 가득 담긴 음식이었다.유진은 원래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었지만, 전혀 까다롭게 굴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한 닭볶음과 깊은 맛이 우러난 닭국물을 맛보며 연신 감탄했다.“이거 정말 맛있어요! 닭고기가 너무 부드럽고, 국물도 진하고요!”윤석경은 놀라면서도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마음에 들면 많이 먹어요. 또 떠줄 테니까!”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유진의 그릇에 음식을 더 담아 주었고, 유진도 서인을 향해 젓가락을 내밀며 말했다.“맛있
서인은 안토니네 가족과 이야기를 나눈 지 채 30분도 되지 않아, 밖에서 누군가가 소리치는 소리를 들었다.“윤석경 씨, 잠깐 나와 보세요! 이 사람이 당신네 집 손님 맞나요?”서인은 순간 미간을 좁히며, 무언가를 예감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밖으로 향했다. 토니의 부모도 급히 그를 따라 나갔다. 밖에는 오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단정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머리는 곱슬머리로 말려 있었다. 여자는 토니네 가족을 보자마자, 곧장 손가락으로 한쪽에 서 있는 유진을 가리켰다.“이 사람이 당신네 손님 맞아요?”유진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제발 소리치지 마세요! 제가 돈 드린다고 했잖아요!”유진은 당장이라도 땅속에 숨고 싶은 심정이었고, 서인은 다가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죠?”박민란은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이 여자랑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지만, 내 난초를 뽑아서 토끼 먹이로 줬어요! 내 난초가 얼마나 비싼 줄 알아요?”“조금만 늦었어도 다 뽑혀 나갔을 거예요!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에요? 이건 엄연한 도둑질이라고요!”유진은 머리를 싸매고 싶었고, 작은 목소리로 서인에게 변명했다.“난초인 줄 몰랐어요. 그냥 잡초인 줄 알았어요.”유진은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부모님께 혼나는 아이처럼 위축되었다. 그러나 박민란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듯 쏘아붙였다.“변명하지 마요! 어쨌든 내 난초를 뽑은 건 사실이잖아요!”그때, 윤석경이 나서서 말했다.“우리 집에도 난초가 있으니까, 그걸로 대신 보상해 줄게요. 어린애한테 그렇게 큰소리칠 필요까지야 있나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요.”하지만 박민란은 완강했다.“안 돼요! 당신네 집 난초랑 내 난초는 품종이 달라요! 그러니 난 절대 못 받아요!”윤석경도 화가 났다.“똑같은 난초잖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박민란이 계속해서 억지를 부렸다.“내 난초는 특별히 돈 들여 키운 거예요. 이미 손님이 예약한 거라고요! 근데 이제 어쩌란 말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