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방 VIP 룸.조백림이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오진수가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아래층에서 본 사람이 소희였나?”백림은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 “맞아, 임구택이 오늘 나올 수 있었던 건 여기에 소희가 있기 때문이지.”진수의 눈빛이 번뜩였다. “구택이 소희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거 확실해?”그러자 조백림이 눈을 치켜뜨고 물었다. “무슨 말이야, 소희가 구택이 몰래 여기에 온 줄 알았어?”“그래서 구택에게 말해야 할지 고민 중이야.”조백림은 잠시 생각한 후 고개를 저었다. “구택이 분명 알고 있을 거니까 입 다물고 있어.”“알겠어, 본 적 없는 걸로 하지.”“뭘 본 적 없는 걸로 하는데?”구택이 갑자기 다가와 그 두 사람의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미소 짓자 진수는 얼굴색이 변해 백림을 쳐다봤고 백림은 담배를 꺼내며 차분하게 말했다. “소희를 오랜만에 보지 못해서 구택이 언제 외출할 때 소희도 데리고 오면 좋겠다고 했어. 유정이도 소희를 자주 언급하거든.”구택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이해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소희 지금 넘버 나인에 있는데 봤어?”백림은 바로 말했다. “어, 구택이 넘버 나인에 오자고 한 건 소희가 여기 있기 때문이라고 아까 말하고 있었어. 너한테 말해야 할지 고민했는데 필요 없었네.”구택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희가 친구들과 작은 파티하고 있어. 어느 방으로 갔어?”“아래층 907호.”진수는 바로 대답하자 구택은 일어나며 말했다. “나 소희 좀 보러 갈게. 먼저 놀아.”“응 알았어.”구택이 떠난 후, 진수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말한대로 걱정할 필요가 없었네.”하지만 백림은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 “아니, 뭔가 이상해.”“뭐가 이상한데?”백림의 표정은 굳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구택은 계단을 내려와 907호로 직접 갔다.방 안에서 하영이 시계를 보며 웃었다. “이제 십분 정도 됐죠?”하지만 강솔이 손짓을 하며 해맑은 미소를 지
임구택이 들어간 뒤, 서빙 직원이 두 병의 와인을 들고 들어왔고 강솔이 웃으며 말했다. “역시 임구택 사장님, 클래스가 다르시네요.”그 두 병의 와인은 합해서 최소 십억은 됐었고 구택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소희 친구들은 곧 저의 친구니까, 작은 선물입니다. 그럼 모두 즐겁게 놀아요.”주예형이 일어나 구택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임구택 사장님! 저는 고리라 테크놀로지 그룹의 사장, 주예형이라고 합니다. 저희 회사가 곧 임씨 그룹과 협력을 시작할 예정인데 담당자가 귀사의 진우행 팀장이라 아직 만나지는 못했습니다.”임구택은 손을 잡으며 말했다. “진우행 팀장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주예형 사장님은 자수성가하신 능력 있는 분이시라고. 실리콘 밸리에서 여러 기술 연구 성과를 얻은 뒤 귀국한 지 얼마 안 돼 고리라 테크놀로지 그룹을 상장시켰다 하던데. 대단하시네요!”예형은 구택의 강한 카리스마에 기가 눌리지 않고 겸손하고 당당하게 말했다. “임씨 그룹 계열사 퀸텀소싱의 성과에는 아직 못 미치겠지만, 최선을 다해 협력하도록 하겠습니다.”구택은 미소를 지으며 소희에게 물었다. “게임 중이었어?”그러자 소희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남아서 같이 놀래?”“아니 조백림이랑 할 일이 좀 남아서. 끝나면 연락해, 같이 집에 가게.”구택은 고개를 저으며 따듯하게 말했다.“알겠어!” 소희가 대답하자 구택은 모두에게 인사하고 방을 떠났다.강솔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임구택 사장님의 카리스마 대단한 것 같아. 방금 말도 못 하겠더라고.”그러자 주예형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랜 기간 권위 있는 자리에 계셨으니,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기품이 있어.”“임구택 사장님이 보내주신 와인, 고마워요. 계속 게임할까요?”“물론이죠!” 하영이 웃으며 말하자 강솔이 예형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누가 두려워한다고 그래?”모두가 다시 게임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승패가 엇갈리며 희비가 교차하는 분위기는 굉장히 좋았다.소희가 화장실에 갈 때,
오늘 조금 많이 마신 소희는 차에 오르자마자 임구택의 어깨에 기댔고 구택은 소희의 머리를 쓰다듬고 미소 지으며 물었다. “오늘 기분이 좋아서 그렇게 많이 마신 거야, 아니면 기분이 안 좋아서야?”“임구택 사장님이 보내신 술이라 낭비할 수 없었죠.” 소희가 눈을 감은 채로 부드럽게 대답했다.“내가 그렇게 중요해?”“응, 당연하지!”구택은 칸막이를 올리고 소희의 턱을 잡아 소희의 입술에 키스했다. 구택의 키스는 조금 거칠고 급했기에 이미 어지러운 소희를 더욱 본인에게 의지하게 했고 키스가 끝나고 구택이 부드럽게 물었다. “진석 씨와 작은방에서 무슨 일 있었어?”소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진석 씨가…….”하지만 구택은 다시 소희의 입술을 막으며 소희를 의자에 눕혔다. “말하지 마, 그런 질문은 애초에 할 필요가 없었어.”소희는 구택의 눈을 바라보더니 머리를 돌려 구택에게 키스했다.……다음 날 아침, 소희는 조깅을 마치고 우청아의 집으로 아침 식사를 배달했다.예상대로 장시원이 문을 열었는데 금방 깨났는지 비몽사몽한 상태로 소희와 인사를 나눴다.구택이 소희 뒤에서 나타나며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이렇게 청아 집을 제집처럼 오는 게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나?”“난 너처럼 옆집을 사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아. 너나 그런 불필요한 수고를 하지.”시원이 싱겁다는 듯한 말투로 말하자 구택이 농담조로 말했다.“본인은 이런 경험이 많았나 봐?”“난 그저 좋은 마음으로 귀띔해 준 것뿐이야.”소희는 한 발 물러나 구택을 가리고는 웃으며 말했다. “시원 오빠, 저희 이제 갈게요!”“아침 고마워!”“아니에요!”문을 닫고, 시원이 아침 식사를 식탁에 놓자, 휴대폰이 갑자기 진동하여 흘끗 보더니 발코니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엄마!”“며칠 동안 집에 안 들어오고, 또 어디를 싸돌아 다니는거야?”불만스럽게 말하는 김화연과는 달리 시원은 넉살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침부터 화내지
“별일 아니에요!” 시원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먼저 밥부터 먹자.”……점심때, 소희가 이정남, 미나와 함께 식사하던 중 임유민의 전화를 받았다.“밥 먹었어요?” 유민이 물었다.“왜, 나한테 밥 사줄 거야?” 소희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설마 또 학교에 가서 너의 둘째 숙모 행세해달라고 하는 건 아니지?”“행세라뇨, 이제 그럴 필요 없지 않아요? 이제는 진짜 제 숙모 시잖아요.”유민이 말하자 소희는 웃으며 물었다. “그럼 무슨 일인데?”“소찬호랑 같이 금강시에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실래요?”“거기는 왜 가는 거야?” “찬호 누나, 소시연 알죠? 그 사람이 패션 디자인 리얼리티 쇼에 참가하고 있는데 지금 금강시에서 촬영 중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번 라운드에서 진 데다가 이번에 같이 콜라보 하는 연예인이 계속 압력을 주고 있다고 해요.”“아무래도 문제가 생겼는지 구체적인 건 모르겠는데 찬호랑 전화하면서 울어서 찬호가 마음이 안 놓이는지 누나 찾으러 간다는 거 나도 따라가려고 하는 중이에요.”유민이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하자 소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너희 둘이서 가는 거야?”“네, 같이 가실래요?”“오늘 수업 없어?”“오후에 체조 수업만 있어서 방금 조퇴하고 나와서 찬호 만나러 가는 중이요.”“어디서 만나는데?”소희가 묻자 유민이 주소를 말했다.“만나고 나서 거기서 기다려. 나도 같이 갈게.”“좋아요, 빨리 와요!”소희는 몇 마디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고 식사를 다 하지 못했지만 도시락통을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이정남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어디를 그리 급하게 가세요?”“아 일이 좀 생겨서요. 이지민 감독님 오셨나요?”소희는 이지민 감독에게 월차를 내려고 했다.“이지민 감독님 안 계세요. 주훈 부감독님이 계시니까 급하시면 먼저 가세요. 제가 주훈 부감독님한테 말해드릴게요.”정남이 서둘러 말했다.“좋아요!”소희는 오후 일정을 이정남에게 부탁하고 차를 타고 떠났다.유민과 찬호가 만나
금강시는 강성 동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거리는 차로 대략 한 시간 정도 가야 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시절 건축물들이 완벽하게 보존된 작은 마을이었다.백 년 전, 금강시는 해상과 수로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국내외 상인들이 이곳에 모여 방직업과 해상 운수업을 주로 하며 매우 번성했다.하지만 이후 부두가 강성으로 통합되고 철도가 부상하며 수로 교통이 쇠퇴하면서 금강시도 침체기를 맞았다.그러나 이곳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많은 건축물을 보존하고 있어, 현재 금강시는 유명한 관광지이자 영화 및 드라마 촬영지로 자리 잡았고 특히 국내 감독들이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을 촬영할 때 이곳을 선호했다.‘여신의 옷장’ 프로그램은 지난번에는 고대로의 여행을 주제로 했으며, 이번에는 일제강점기 시절로 돌아가 당시 부자들의 멋을 보여주는 것이 주제였다.그래서 제작진은 촬영 장소로 금강시를 선택했다.세 사람이 금강시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2시가 다 되어갔다.소찬호가 소시연에게 전화를 걸자 시연은 찬호가 도착했다는 것을 알고는, 먼저 커피숍에 앉아 기다리라고 한 뒤 서둘러 그곳으로 왔다.시연이 커피숍에 도착했을 때, 찬호 혼자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놀라 당황해하며 말했다. “소희, 임유민, 너희는 왜 왔어?”소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찬호가 혼자 오려고 했는데, 나랑 유민이 모두 걱정되어서 같이 오기로 했어. 이왕 온 김에 구경도 하자고.”시연의 눈이 약간 부어 있었고, 울었던 흔적이 보였지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했다. “좋아, 나중에 소유 씨랑 담당자한테 휴가 신청하고, 오후에 너희랑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여기 경치 좋은 데 구경시켜 줄게!”애써 괜찮아 하는 시연에 찬호가 말했다.“누나, 숨길 필요 없어. 소희 누나한테 이미 다 말했어.”시연의 눈가가 빨갛게 변하며 자책하며 말했다. “소희야, 난 정말 무능력한 가봐. 너 볼 면목이 없어.”“난관에 봉착했다고 너 스스로 부정하지 마.” 소희가 시연에게 커피를
소찬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일곱 번이나 쫓겨난 거야?”소시연이 민망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찬호는 화가 나면서도 마음이 아팠지만 소희는 오히려 기뻐했다. 이전의 시연은 성격이 드세고 조급했으며, 즐거움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제 그녀가 자신의 작품을 위해 일곱 번이나 방문한 것을 보니, 성숙해지고 안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이렇게 꿋꿋하게 버티는 그녀라면, 앞으로 분명 성공할 것이었다.“가자, 함께 구성혁 씨를 만나러 가보자.” 소희가 미소 지으며 말하자 임유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들리는 바로는 꽤 까다로운 것 같은데, 정말 해결할 수 있을까요?”“한번 해보자. 여기 앉아서 막연히 추측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소희가 눈썹을 치켜 올렸지만 시연은 불편해했다. “안 가는 게 나을 거야. 그 사람은 말도 퉁명스럽게 하고 난처하게 할 거야. 괜히 가서 듣기 싫은 소리 듣는 거 보고 싶지도 않아.”“이미 온 김에, 한번 가보지? 머릿수가 많을수록 유리하니까, 어쩌면 우리가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소희가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말했다.“가요!” 유민이 자신의 가방을 메고, 냉정한 눈빛으로 말했다. “재단사 한 명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소희가 유민의 어깨를 두드리며 진지하게 말했다. “구성혁 씨 집에 가면 모든 걸 내 말대로 해야 해. 장난치지 마!”유민은 자신의 삼촌과 오랫동안 지냈고, 젊었을 때의 임구택을 많이 닮았다. 항상 고집스럽고 반항적인 기운이 감돌았다.“걱정 마세요!” 유민의 표정은 소년의 다부진 결심이 어린 표정이었고 이내 말했다. “여기에 계시는 동안 제가 하는 모든 걸 허락받고 할게요.”“그럼 가자!” 소희는 가방을 메고 커피숍 밖으로 나갔다.……구씨 수선집은 마을에서 유명한 금사강 강변에 위치해 있었다. 두 개의 입구가 있는 집이었는데 앞쪽 첫 번째 진입로는 거리에 접한 상가였고, 뒤쪽은 주거용이었다.구성혁의 경우, 성혁의 집안은 대부분 대를 이어 재단사로 활동
소시연이 소희와 다른 이들을 이끌고 왔을 때, 구씨 집 앞에서 벌어진 큰 소동을 보고 당황했다. 시연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몰라 어안이 벙벙했고 소유는 큰 모자를 쓴 채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시연 씨, 도대체 어디 갔어요? 우리는 파트너인데, 어디 가는지라도 말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당신이 도망간 줄 알았잖아!”소찬호는 소유의 태도가 나쁘다고 느끼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 누나가 잠시 사정이 있어서 못 온 건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당신이 누나를 샀습니까? 24시간 내내 당신 지키라고? 찾을 일이 있으면 전화하면 되지 않나요?”“당신은 누구야?” 소유는 당황하며 되묻자 시연이 서둘러 찬호 앞에 나서며 설명했다. “제 동생인데, 저를 보러 왔어요. 아직 어려서 말이 좀 거치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소유는 찬호의 교복을 보고는 콧방귀를 뀌었다. “학생이라 이번은 봐준다.”소희는 시연에게 말했다. “우리 먼저 들어가서 구성혁 씨를 만나죠.”“잠깐만, 당신 누구세요?” 소유가 소희를 흘겨보며 물었는데 사실 소유는 아까부터 소희에게 주목하고 있었다. 소희의 뛰어난 외모가 특히 눈에 띄었고, 태양 아래 소희의 피부는 흠집 하나 없이 하얗고 이목구비가 섬세했으며 심지어 스타보다 더 뛰어난 기품을 가지고 있었다.임유민은 소희를 보호하듯 소희 옆에 서며 차갑게 소유를 훑어봤다. “이 사람이 누구든 당신이 알 바는 아니지 않나요?”소유는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이 꼬맹이가!”유민의 얼굴이 굳어지며 소유에게 다가가려 하자 소유는 유민의 차가운 기세에 놀라 한 발짝 물러났다.“임유민!” 소희가 소리치자 유민은 자신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소유를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소희를 따라 구씨 수선집으로 갔다.소유는 화가 나 눈을 부라렸다. “도대체 어느 집 자식이길래, 저렇게 거만해!”구성혁 집 문 앞에서 소희가 다시 한번 막혔는데 소희를 막은 것은 안단희의 조수였다. 그녀는 소유보다 더 거만했다. “관광객이신가요? 우리
제작진들은 임유민과 같이 온 사람들이 만만치 않음을 알고, 주변에 모여든 행인과 관광객들을 의식하며 프로그램에 부정적인 영향을 우려해 서둘러 사과했다. 그들은 안단희의 조수를 제지하고 소희를 들여보냈다.단희의 조수는 이런 대우를 받은 적이 없어 분노하며 소희 일행의 뒷모습을 쏘아보더니 제작진에게 말했다. “감독님이 우리 단희와 소동을 구성혁 선생님을 설득하러 보냈어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들여보내 문제를 일으키면 책임은 여러분이 져야 할 겁니다!”그러자 제작진도 난처해하며 조수를 달랬다.한편, 소희 일행은 앞마당을 지나 뒷마당으로 걸어가자 단희와 소동을 만나게 되였다. 단희는 소희를 보고 잠시 멈칫했고 어딘가 익숙함을 느꼈고 이내 생각이 났다. 예전에 쉘은에서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노명성과 충돌이 있어 기억이 남아있었다.그런데 여기서 소희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눈을 깜박이며 모자를 조금 더 내려쓰고, 마치 소희를 보지 못한 척했지만 옆에 있던 소동은 소희에게 인사를 건넸다.“언니가 여기에 왜 있어요?” 소동이 놀랐다는 듯 묻고 이내 소시연을 바라보자 깨달았다. “언니가 시연이 도우러 온 건가요?”소희는 소동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계속 걸어가자 소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언니, 거기 가봤자 소용없을 거예요. 구성혁 선생님은 시연과 협력할 생각이 없으니까, 가도 문전 박대만 당할 거예요.”그러자 시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일에 신경 쓰지 말지?”소동은 순진한 척하며 말했다. “시연아, 나는 널 위해서 한 말인데, 감독님에게 다른 협력재단사를 찾아달라고 하는 게 나을 거야.”시연은 소동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소희를 따라갔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소동에게 어떤 표정이나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무시했다.소동은 속으로 이를 악물며 소시연과 그녀의 동생이 왜 소희를 저리 믿고 따르는 지 몰랐다.특히 시연은 예전에 문제가 많았지만, 소희의 영향으로 변화하여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그랬기에 소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
이날, 임유진은 티타임에 진소혜와 마주쳤다. 소혜는 입술을 다물고 웃으며 말했다.“팀장님, 구씨그룹의 총애를 받으니 우리 부서 실적도 쭉쭉 오르겠죠? 부서 직원들 대신 감사드려요, 팀장님.”유진은 커피를 받아 들고 나가려다, 소혜의 옆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 소혜 씨가 한 거라는 거 알아요. 이미 누가 나한테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소혜 씨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소혜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고, 고개를 돌려봤을 땐, 유진은 이미 자리를 떠나 있었다.오후 회의에서 유진은 이렇게 발표했다.“이번 평가 기간 동안 곽시양 씨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었어요. 따라서 정현준 씨의 직책을 승계하여 부서 부팀장으로 승진해요.”“인사팀에서 곧 공식 공지드릴 예정이에요.”유진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엔 놀라움이 번졌고, 시양 본인조차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부서 내에서도 존재감이 적었고, 입사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나 실적 모두 소혜에 비해 부족했기에, 시양이 발탁된 건 모두에게 의외였다.소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팀장님, 부팀장 선발 기준이 뭔가요? 기준을 명확히 해주시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혜를 응시하며 말했다.“기준?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게 기준이라면 기준이겠죠”소혜는 눈을 크게 떴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시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시양 씨, 제 사무실로 잠깐 와요.”“네?”시양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유진을 따라갔다.유진이 회의실을 나서자, 안에서는 수군거림이 폭발했다. 최근 있었던 일로 인해 유진은 여전히 비난의 대상이었고, 그런 유진이 능력도 부족한 신입을 뛰어넘어 부팀장으로 발탁했다는 점에서 불만과 의문은 더 커졌다.현준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인사 결정은 사전 상의 없이 유진이 발표한 것이었고, 그 역시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소혜는 맞은편에 앉은 베
유진은 구은정의 표정을 보고,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는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고, 유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어제 술 마셨다던데, 괜찮아요?”은정은 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안 좋아 보이던데, 이제 술은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유진이 조용히 은정에게 당부했다.“응.”그 말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됐어요. 나 출근해야 해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그렇게 둘은 스쳐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조금 전 은정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급히 뛰쳐나왔다.그러나 복도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내가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 지금은 내 문제부터 정리해야 해. 괜히 그 사람한테 짐이 되어선 안 돼.’그날 오후, 은정은 늦게서야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법무팀에 최이석 관련 고소를 철회하라고 지시했다.마심호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 사람 같은 놈은 봐줄 이유가 없죠. 이번 기회에 서성 라인 애들도 좀 눌러놓는 게 나아요.”그러나 은정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그날 저녁, 은정은 늘 그랬듯 이경 아파트로 돌아왔다. 조용히 복도를 지나, 곧장 유진의 집 앞으로 갔다.문 비밀번호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은정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예전 그대로였고, 유진은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았다.그런데도 방 안은 왠지 썰렁했는데, 무언가 본질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은정은 그녀가 드라마를 자주 보던 소파에 앉았다.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정은 책상 위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녹음 안 했어요.”서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은정아, 이 일은 내가 밖에 알리지 않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최이석 일, 바로 고소 취하하고 다시는 들추지 마.”“그리고 스스로 구씨그룹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회사도, 강성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네 아버지에겐 그냥 말하면 돼. 죄책감 때문에 이 집에 더는 못 있겠다고. 이번엔 분명히 놔줄 거야.”“네가 떠날 땐, 내가 사람을 시켜서 돈도 챙겨줄게. 아버지한텐 그걸로도 충분히 체면 세워준 셈이 될 거야.”은정은 서선영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당신 딸을 희생해서까지 날 함정에 빠뜨린 이유가 최이석 때문이었네요.”서선영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곧바로 해명했다.“그 사람은 내 동생 밑에서 오래 일했어. 난 내 동생을 위해서 한 거야. 은정아, 지금 네가 분위기 바꿔서 빠져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내가 당신 말대로 안 하면요?”은정은 담배를 내뿜으며 한껏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어차피 난 이미 악명 높은 놈이 됐어. 하나쯤 더 얹혀도 그만이죠. 오히려 구은서는 이제 절대 부잣집 자제와의 결혼은 꿈도 못 꾸겠죠.”서선영의 얼굴은 날카롭고 차가웠다.“끝장을 보겠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은서는 동정받는 쪽이 될 거야.”서선영은 은정을 똑바로 노려봤다.“임유진하고 너, 꽤 가까운 사이잖아. 그 애는 나랑 너 때문에 몇 번이나 맞붙었지. 근데 만약 그 애가 네가 술에 취해 여동생을 건드린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그 아이 눈엔 네가 어떻게 보일까? 널 어떻게 생각할까? 넌 그걸 감당할 수 있어?”그 말에 은정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선영은 그 반응에 확신을 얻은 듯 미소를 지었다.“내 말대로 해. 열흘 안에 강성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안 그러면 임유진이든, 임씨 집안이든, 강성 전체가 너란 인간이 얼마나 추잡한 놈인지 알게 될 거야.”“널 사회적으로 매장 시킬거고, 임유진도 널 경멸하
은정은 격노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저는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이건 서선영 저 사람이 꾸민 함정이에요.”서선영은 엉엉 울면서 외쳤다.“내가 내 딸을 희생시켜서 너한테 함정을 판다고? 구은정,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알아.”“예전부터 나한테 편견이 있었지. 그래, 미우면 나한테 손찌검을 해. 왜 애먼 은서를 괴롭혀?!”“은서는 아직 시집도 안 갔어.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해? 이 소문이 밖에 나가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끝장이야!”은정은 오직 구은태만 바라보며 물었다.“저를 믿으세요?”구은태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때 갑자기 은서가 벽을 향해 몸을 던지듯 달려갔다. 죽을 각오로 내달리는 눈빛이었다.“은서야! 안 돼, 은서야!”서선영이 급히 은서를 껴안고 붙잡았고, 울음이 멎지 않았다.“은서야,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거기 누구 없어요! 얘 좀 붙잡아줘요!”서선영은 울먹이며 도우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도우미가 급히 달려와 은서를 붙들고 감싸 안았다.그중 평소 은서를 따르던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구은태 앞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회장님, 사실은 전에도 도련님께서 밤에 아가씨 방문을 두드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하지만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서, 보복당할까 봐 말씀 못 드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 도우미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제가 좀 더 일찍 말씀드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은정은 도우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애옹이가 은서에게 보내졌던 그날 밤, 은정은 술에 취해 돌아와 애옹이가 사라진 걸 알고 은서를 찾아갔다. 그때 이 도우미가 어두운 구석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은태는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죽을힘을 다해 몸을 던지려던 은서, 그리고 도우미의 일방적인 증언이 더해지자, 구은태는 은정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다시 근처에 있던 물
[말 좀 해봐요.][삼촌?]서선영이 천천히 2층에서 걸어 내려오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 장말숙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눈짓을 보냈다. 이에 장말숙 아주머니는 눈치를 채고 전화를 받아 들고 말했다.“유진 씨죠? 저희 도련님이 술에 취하셨어요.”유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네, 신세 좀 질게요. 잘 부탁드려요.]“네!”장말숙 아주머니는 괜히 말을 더했다가 실수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은정의 까만 눈동자가 서선영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이미 흐릿했다.서선영은 은정을 부축하듯 손을 내밀며,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은정아, 술 너무 많이 마셨잖아. 방으로 데려다줄게.”“으악!”날카로운 비명에 은정은 정신이 번쩍 들며 눈을 떴고, 날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옆에서는 구은서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옷가지로 몸을 허둥지둥 가리고 있었고, 얼굴은 절망감에 젖은 눈물로 가득했다. 그녀는 분노로 떨리는 눈으로 은정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서의 비명은 곧 서선영과 집 안 도우미들을 방으로 불러 모았다. 문이 열리고 방 안 풍경을 본 순간, 모두가 굳어버렸다.은정은 조금씩 의식을 되찾았고, 은서를 훑어보며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이불을 들추고 자신을 확인해 보니, 바지는 제대로 입고 있었지만 상의는 전혀 없었다.은정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이마를 짚으며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머리가 묵직하게 지끈거렸다.“엄마!”은서는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 울부짖었다.“은서야!”서선영이 달려와 은서를 안고, 옷을 덮어주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몰라요!”구은서는 서선영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했다.“밤에 오빠가 갑자기 방에 들어왔어요. 술에 취해서 저를 한 대 치더니 그다음은...”은서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드러난 어깨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짐승 같은 놈!”서선영은 벼락을 맞은 듯 충격에 빠져 온몸을 떨며 은정을 향해 소리
우정숙은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예전에 은정은 분명히 임유진은 내 스타일 아니라며 선을 그은 적이 있는데, 왜 지금 와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쫓고 있는 걸까?“넌 어떻게 생각해?”우정숙이 묻자, 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돌아왔어요.”그 말투가 생각보다 무거워, 우정숙은 분위기를 일부러 누그러뜨리며 웃었다.“이미 거절했는데도 냉정해져야 해?”유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어쨌든, 엄마는 이 일.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는 말하지 말아줘요. 그리고 삼촌한테도 되도록 비밀로 해주세요.”그 말에 우정숙은 딸의 속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갑자기 이렇게 서둘러 집에 돌아온 이유 혹시 일이 더 커질까 봐? 너희 할아버지가 구은정한테 가서 따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니야?”유진은 재빨리 대답했다.“누가 그 사람 걱정했대요? 밖에서 사는 게 질려서 온 거지, 그 사람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하지만 우정숙의 따뜻하고 조용한 눈빛은 유진의 진심을 꿰뚫고 있었다. 우정숙은 다만 조용히 숨을 내쉬며, 더는 묻지 않았다.그날 밤, 구은정은 외부 일정으로 접대를 나갔고,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좀 늦을 것 같아. 집에 들어가면 애옹이 좀 봐줘.]유진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저도 집에 왔어요. 아주머님께 부탁하세요.]은정은 유진이 하루 정도 집에서 자려는 줄로만 알고, 별 의심 없이 답했다.[알겠어.]밤 10시.은정은 아직 접대 자리에서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에 구은태가 보낸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은정아, 나 몸이 좀 안 좋다. 한번 집에 들러줄래?]은정은 미간을 찌푸렸다.[몸 안 좋으면 병원 가시죠.]그렇게 답장을 보냈지만, 더 이상의 응답은 없었다.술자리가 끝나고 나니 이미 자정 무렵이었다. 은정은 그래도 아버지를 확인하고자 구씨 저택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애옹이를 돌봐주던 장말숙 아주머니가 거실에서 그
정현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죠? 임유진 건드리지 말랬잖아요. 왜 말을 안 들어요?”진소혜는 웃었다.“들었어요. 적이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없애버리라는 그 말, 정말 감명 깊었거든요. 곧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쫓겨날 거예요.”현준은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임유진은 쫓겨나지 않아요. 사장님이 반드시 지킬 거니까요.”현준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덧붙였다.“유진 씨, 그 정체가 간단하지 않아요. 사장님이 곤란한 일에 휘말릴 때마다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 애였다고요.”“이렇게 성급하게 나가면 결국 당하는 건 소헤 씨라고요.”소혜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것도 그 얼굴 덕 아니었을까요? 임유진이 무슨 대단한 집안 출신이라도 돼요?”현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 애, 성이 임이야.”소혜는 비웃었다.“강성에 임 씨 많은데요? 임씨라고 다 임씨 집안이예요?”“임유진이 정말 그 임씨 집안 사람이었으면, 이런 작은 곳에서 평사원으로 일할 일이 없죠.”강성에서도 가장 윗자리에 있는 집안, 그 임씨 집안 사람이라면 당연히 격이 달랐을 것이다.현준은 소혜를 바라보며, 무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소혜 씨, 소혜 씨는 너무 자만해요. 이제 막 졸업한 사람이잖아요. 세상이 어떤지 아직 몰라요.”“내가 경력은 부족하지만, 머리는 좋아요.”소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어요.”현준은 더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고, 소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이번 달 말이면,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질 거예요.”이메일은 해외 IP에서 발송된 것으로 확인되어, 추적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루머는 벌써 영업팀까지 퍼진 상황이었다.한때 유진이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걸 보고 감탄했던 동료들조차, 그녀가 정말 실력만으로 이룬 건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너무 젊은 나이에, 임씨 그룹 같은 대형 고객을 설득하고, 이미 다른 부서에서 거의 성
서선영은 유혹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거절하려는 듯하면서도 몸은 피하지 않았다.“안 돼. 나, 한 시간밖에 못 나와 있어.”“당신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최이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선영의 치마 지퍼를 내렸다.“밖에 사람 세워놨어. 아무도 안 들어와.”...오전, 임유진은 구씨그룹과의 계약을 마무리했다. 오후에는 회사 고위층 회의에 참석했고, 회의가 끝나고 마케팅부로 돌아왔을 때쯤, 팀 동료들의 시선이 평소와 달랐다.유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모두는 급히 예의를 갖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유진은 손에 든 자료를 들고 여진구를 찾아갔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진구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유진이 들어오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무슨 일 있었어요?”유진이 맑은 목소리로 묻자, 진구는 곧바로 말을 돌렸다.“아니야. 너 손에 든 거, 청원안 자료야? 나 좀 볼게.”하지만 유진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휴대폰, 보여줘요.”진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방금 보고 있던 건, 유진과 은정이 함께 있는 사진들이었다.둘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 그리고 둘이 함께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는 장면. 얼마 전 중식당에서 있었던 그날이었다.진구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누군가 이 사진들을 너희 팀 메일에 전체 전송했어. 내용은, 네가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게 구은정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어서라고.”유진은 이미 그 메일을 확인했었다. 메일에는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구씨 그룹 사장을 유혹했다는 식의 악의적이고 천박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업계 풍기를 망친다는 말까지, 표현이 거칠고 추했다. 유진은 이를 꽉 물었지만, 곧 침착하게 물었다.“발신 IP 추적할 수 있어요?”진구가 답했다.“지금 IT팀에서 추적 중이야. 내부 직원일 수도 있고, 유지그룹 쪽의 보복일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반드시 밝혀낼 거야.”“일단 외부로 확산은 안 됐고, 회사 내부 루머 수준이야. 이미 전체 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