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홍연이 듣더니 순간 기뻐하며 물었다.[그게 정말이에요?]“그럼 제가 이모님을 속이기라도 하겠습니까?”[어이쿠, 그럴 리가 있겠어요? 시원 군이 나선다면 정씨네 가족이 부탁한 일은 일도 아니죠. 고마워요, 시원 군.]“저한테 고마워하지 마시고 청아한테 고마워하세요. 전 오로지 청아의 체면을 봐서 도와드리겠다고 한 거니까.”[암요! 그럴 게요!]“그럼 저희 밥 먹고 있던 중이라, 이만 끊겠습니다.”기뻐하고 있는 허홍연과는 달이 장시원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그러고는 바로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청아에게 돌려주었다.“제 일에 끼어들지 마세요, 제가 정씨네 가족을 찾아가 사과하면 그만이니까.”“정씨네 가족이 억지 부리는 모습 못 봤어? 그러는 그들이 네 사과를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해?”장시원의 한심한 눈빛에 청아가 죄책감이 든 표정을 드러냈다.“그, 그래도 대표님에게까지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하온한테는 남편 역까지 부탁할 수 있으면서, 나랑은 이렇게 선 긋는 거야?”“저 엄마의 핍박에 이기지 못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대표님도 아시잖아요!”“네가 너무 바보 같아서 이용당한 거 아니고? 누구의 부탁은 들어줘야 하고. 누구의 부탁은 절대 들어줘서는 안 된다는 것도 구분 못해?”장시원의 뼈 때리는 질문에 난처해진 청아는 얼굴까지 빨개져 아무 말을 못했다.그리고 그러는 청아의 모습에 장시원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는 청아의 접시에 음식을 집어주었다.“일단 밥이나 먹어. 정씨네 가족의 부탁은 나에게 있어 어려운 것도 아니니 부담 가지지 말고, 신세 졌다고 생각하지도 말고.”“하지만 신세 진 건 사실이잖아요.”“너 나한테 진 신세가 적어?”“…….”“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갚아. 그리고 앞으로 나한테 신세 갚는다 생각하고 밥 해줄 때 내키지 않는 표정이나 짓지나 말고.”청아가 듣더니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저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은 적이 없는데요?”“그럼 나한테 밥 해주는 게 좋다는 거야?”“당연하죠!”장시원
장시원이 능글맞는 표정을 짓고 있는 배강을 힐끗 쳐다보고는 경고하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청아는 낯가죽이 얇으니까 이상한 농담하지 마.”“뭐야, 이렇게 감싸고 돈다고? 설마 진심?”배강이 의아해하며 장시원을 향해 묻자 장시원이 얼굴빛 한번 변하지 않은 채 덤덤하게 대답했다.“예전에 알고 지내던 친구야. 그러니까 걔 앞에서 입 조심해.”“친구?”배강이 듣더니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드러냈다.“네 손아귀에서 무사히 벗어났던 여자가 있었나? 내 기억으로는 새 한 마리라도 너한테 반하면 제대로 날지 못했던 것 같은데?”“제대로 날지 못하는 새면 병이 든 거 아니야?”장시원이 어처구니가 없어 냉소를 드러내며 대답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대답이 청아가 말대꾸할 때 사용하던 화법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 순간 웃음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정색하여 배강을 향해 물었다.“왜 날 찾은 건데?”“아, 도국 쪽에서 이틀 후에 사람을 보내겠대, 스마트 기술 향상에 관해 의논해 보고 싶다고.”업무 이야기에 배강도 장난기를 거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장시원의 물음에 대답했다.……화남병원정소연의 외삼촌이 무료 병실로 옮긴 후, 정씨네 가족은 또 한 번 병문안을 갔다.이에 외삼촌네 가족이 기뻐하며 연거푸 그들에게 감사를 표했다.“이틀은 더 기다려야 하는 줄 알았는데, 오후에 바로 병실을 옮겨줄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요. 소연의 미래의 매제 역시 대단한 사람이네요, 이렇게 어려운 일을 쉽게 해결해 주다니. 우리 뭐라도 사가서 감사를 표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체면이 제대로 선 정소연 아버지가 득의양양해서는 고개를 쳐들고 대답했다.“같은 가족끼리 감사는 무슨. 게다가 하 선생이 개인 관계를 써가며 이 일을 해결해준 거니까 절대 찾아가서는 안 되죠.”“맞네요. 그럼 이 신세는 우리가 기억했다가 언젠가 갚을 게요.”“하하하! 이렇게 사양하지 않아도 된다니까요.”외숙모의 대답에 정소연 아버지가 호탕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그리고 마침 약 바꾸러 왔다가 몇
순간 밀물 마냥 밀려오는 무력감에 청아는 더 말할 힘도 없었다.“알았어요. 저 곧 내려야 하니까 이만 끊을 게요.”허홍연은 그제야 청아 말투 속의 냉담함을 눈치채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그래. 하루 종일 출근하느라 피곤하지? 어서 돌아가 쉬어.]“네.”통화가 끝난 후, 청아는 드디어 다시 평정심을 되찾게 되었다.사실 청아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다만 마음이 점점 얼어가고 있을 뿐.……저녁에 조백림이 넘버 나인에서 파티를 주최했고, 장시원이 퇴근하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10시가 넘은 늦은 시간이었다.미리 도착한 친구들은 이미 술을 마시며 카드 놀이를 하고 있었다.장시원은 룸 안을 한번 둘러보고 홀로 소파에 앉아있는 임구택을 향해 직진했다.하지만 임구택은 다가오고 있는 장시원도 발견하지 못한 채 소파에 기대 열심히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이에 장시원이 눈썹을 올리고 임구택의 휴대폰 화면을 힐끗 쳐다보았다.휴대폰 속에는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었고,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커피 말고 또 뭘 만들어낼 수 있어?][뭘 가지고 싶은데?][흠, 딱히 가지고 싶은 건 없는데? 당신이 제일 아끼는 공주님을 보여줄 수 있어? 정말로 나보다 더 예쁜지 보고 싶어.][당연히 당신보다 더 예쁘지. 그 아이는 내 마음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로봇이야.][그렇게 말로만 해서 누가 믿어? 나도 한번 보여줘 봐.]……소희의 목소리였다.장시원은 궁금한 마음에 임구택 쪽으로 바짝 붙어 물었다.“뭘 보고 있는 거야?”임구택은 그제야 장시원을 발견하고 바로 화면이 아래로 향하게 휴대폰을 뒤집고는 차가운 눈동자로 그를 흘겨보며 물었다.“언제 온 거야?”“한참 됐어. 네가 그 동영상에 너무 집중하는 바람에 발견하지 못한 거고.”임구택이 듣더니 조용히 휴대폰 화면을 끄고 옆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인 후,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로 손에 든 라이터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장시원도 그의 손
레저룸에서 카드 놀이를 하고 있던 조백림은 연속 몇 판을 이겨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반대로 오진수 등은 연이어 우는 소리를 내며 불만을 토했다.그런데 이때 마침 웨이터가 술 가져다주러 들어왔고, 조백림이 웨이터를 향해 분부했다.“90년 산 강제로 두 병 가져다줘요, 내 이름으로 적고.”오진수 등은 그제야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드러냈다.“역시 백림이 제일 통이 크다니까.”그렇게 몇 사람이 웃고 떠들며 카드 놀이를 다시 시작하는데, 한 웨이터가 술을 들고 와서는 허리를 반쯤 구부리고 부드럽게 웃으며 조백림을 향해 말했다.“고객님, 고객님이 분부하셨던 90년 산 강제입니다, 한번 확인해 보시죠.”이에 조백림이 고개를 돌려 예쁘게 웃고 있는 웨이터를 쳐다보았다.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그리고 조백림의 시선에 이선이 부끄러운 척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애교가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백림 씨 저 기억 안 나세요? 저 이선이잖아요.”조백림은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는 표정을 드러냈다.‘유정의 연적.’사실 이선은 물론이고, 조백림은 유정마저 여러 날 째 보지 못했다.“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조백림이 맑은 눈동자에 웃음을 머금은 채 이선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이선이 일부러 고개를 갸웃거리며 깜찍한 말투로 대답했다.“저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요, 밤 타임만.”“그래? 정말 열심히 사네.”조백림이 덤덤하게 칭찬했다.이에 이선은 순간 얼굴이 빨개져 부끄러워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여자는 의지할 사람이 자신밖에 없잖아요. 특히 저처럼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지 못한 여자는 더더욱 노력해야 하는 거고.”“맞는 말이지.”조백림이 계속해서 오진수 등과 카드 놀이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백림 씨, 술을 지금 따라 드릴가요?”이선이 더욱 빨개진 얼굴로 조심스레 조백림의 의향을 물었고, 조백림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래, 지금 따. 내가 한잔 서비스로 줄게.”“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저희 손님의 술을 마실 수 없거든요.
“당연하지. 동료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고용주와의 관계도 잘 처리해야 하는 거잖아. 예를 들어 고용주와 말다툼이 일어났을 시 최대한 빠른 시일내에 방법을 강구하여 화해해야 한다 거나? 안 그러면 고용주가 일부러 골탕 먹일 수도 있으니까.”임유민 말 속의 뜻을 눈치챈 소희가 바로 냉소를 드러냈다.“설마 나와 네 둘째 삼촌을 암시하는 건 아니겠지?”“뭐야, 너무 멍청한 건 아니잖아?”“싱겁긴. 내가 정말로 멍청했으면 네 선생님이 되었겠어?”“그래서 말 돌리지 말고, 둘째 삼촌이랑 계속 이렇게 서로 안 보고 지낼 거야?”“지금은 네 둘째 삼촌이 나한테 화를 내고 있는 거야.”“그럼 쌤이 뭘 잘못해서 둘째 삼촌을 화나게 했는지 반성해야지!”임유민의 질책에 소희가 정말로 자신의 잘못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러다 곧 분개한 표정으로 임유민을 노려보며 물었다.“그 사람이 네 둘째 삼촌이긴 하지만, 난 네 선생님이잖아. 너무 네 둘째 삼촌의 편만 드는 거 아니야?”“이번엔 쌤이 먼저 잘못했잖아! 난 공정하게 잘못이 없는 사람을 돕는 거야.”“내 잘못이라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 게다가 내가 주동적으로 화해한다고 해도 네 둘째 삼촌이 날 거들떠보지도 않을 걸?”“쳇!”임유민이 죽어도 믿지 않는다는 표정을 드러냈다.“쌤이 한번 주동적으로 화해하자고 해 봐, 둘째 삼촌이 틀림없이 바로 쌤을 용서할 거야.”“시간 됐어, 그 사람 얘기는 그만하고 수업이나 하자.”임유민이 타이를수록 이상하게 더욱 갑갑해진 소희는 손을 흔들며 화제를 끝내려 했고, 이에 임유민이 냉소를 드러내며 소희를 쳐다보았다.“외면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거 아니야.”책을 펼치던 소희의 손은 임유민의 말에 잠깐 멈추었다. 하지만 소희는 결국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강의를 시작했다.그렇게 첫 수업은 무사히 끝났고, 쉬는 시간에 임유민이 가방에서 시험지 몇 장을 꺼냈다.“자.”“뭐야, 월말 평가 성적이 벌써 나왔어?”소희가 시험지를 한 번 훑어보고는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네 둘째 삼촌이 바쁠 수도 있어, 그냥 방해하지 말고 수업하러나 가자.”소희가 포기하려 하자 조급해난 임유민은 바삐 앞으로 다가가 문을 세게 두드렸다.“둘째 삼촌! 둘째 삼촌! 소희 쌤이 볼 일이 있으시대요!”하지만 임유민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이에 임유민이 혹시나 해서 문 손잡이를 돌렸다.끼익-“쌤, 문이 열렸어!”임유민이 말하면서 바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고, 소희가 말리기엔 이미 늦었다.“둘째 삼촌!”“그만 불러, 집에 없을 거야.”소희의 말이 맞았다.방안 전체를 다 돌았지만 임구택의 그림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언제 나간 거지?”임유민이 머리를 긁적이며 또 옆방 서재로 갔다. 그러나 역시 아무도 없었다.‘뭐야, 내가 어떻게 소희 쌤을 설득했는데! 둘째 삼촌 너무 해!’벽에 기댄 채 실망한 표정으로 방안을 왔다갔다하는 임유민을 보며 소희는 지금의 자신도 실망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는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어떻게 만들어준 핑계인데, 쓰지도 못하고 낭비하게 생겼네?”소희의 말투는 덤덤했지만 임유민은 이상하게 그 속에서 실망의 정서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급히 하인을 찾아와 임구택의 행방을 물었고, 그제서야 임구택은 두 사람이 수업할 때 나갔다는 걸 알게 되었다.이에 소희가 바로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말했다.“체념됐지? 수업하러 가자.”“그럼 내일에 다시 한번 올라오자. 내가 둘째 삼촌보고 절대 외출하지 말라고 할 게.”“분명 볼 일이 있어 외출한 걸 거야, 그러니까 괜히 그 사람 시간 낭비하지 말고. 우리 일에 더는 신경 쓰지 마.”“그럼 둘이 빨리 화해나 하든가. 나도 우리 둘째 삼촌이 하루 종일 우울해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쳇, 역시 네 둘째 삼촌만 걱정하고 있었어.”“쌤도 당연히 걱정하고 있지.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쌤도 지금 기분이 안 좋잖아.”임유민의 말에 소희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흰색과 회색이 메인 컬러로 인테리어가 된 집은 단조로우면서도 또 의외로 고급져 보였다.소희가 사는 집과 대체로 같은 구조인 집.소희는 현관을 지나 바로 거실로 들어섰다.바닥에는 옅은 회색의 카펫이 깔려 있었고, 그 위를 걷고 있으니 발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거실에 들어선 소희는 한눈에 베란다에 서서 자신을 등진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게 되었다.검은색 셔츠에 검은색 양복바지 차림을 하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은 남다른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검은색 옷차림을 한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는데.’가뜩이나 평소에도 차갑고 냉담한 기질을 풍기고 있던 사람이 검은색 옷차림을 하고 있으니 왠지 더욱 차가워 보였다.한참 후, 통화가 끝난 남자가 휴대폰을 거두고 천천히 몸을 돌려 소희를 쳐다보았다.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만 남자의 눈동자는 그렇게 그윽하게 소희를 주시하고 있었다.그리고 그러는 남자를 똑같이 주시하고 있던 소희는 갑자기 알 수 없는 억울함이 밀려와 순간 눈시울이 빨개졌고, 눈물이 흘러나오기 전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이에 임구택이 바로 성큼성큼 쫓아가 뒤에서 소희를 품에 꼭 껴안았다. 그러다 소희가 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자 그는 소희와 함께 소파에 쓰러져서는 소희의 턱을 잡고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소희의 두 다리를 짓누른 채 도망갈 여지도 주지 않는 임구택의 키스는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고, 그대로 숨마저 빼앗겨 버린 소희는 임구택의 키스에 반응하며 공기를 조금씩 마시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너무 오랜만에 품에 안아보는 소희를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주시하고 있는 임구택의 눈빛은 점점 뜨거워졌고, 결국 소희를 들어 안아 침실로 걸어갔다.커튼이 자동적으로 닫치면서 방안은 순간 어둠 속에 빠졌다.그리고 어둠 속에서 더욱 선명해진 두 사람의 거친 숨 소리는 서로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전해져 전율을 일으켰다.……임구택은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끝도 없이 소희에게 그를 사랑한
“그래서 당신은?”임구택이 다시 한번 물었다.하지만 한참 기다려도 소희가 대답을 하지 않자 임구택이 순간 또 언짢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오래 생각할 일이야?”“아니, 내 답은 당신과 같아.”조느라 제때에 대답하지 못했던 소희는 화가 묻은 임구택의 어투에 그제야 눈을 반쯤 뜨고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임구택이 듣더니 바로 소희의 몸을 뒤집어 자신을 향하게 했다. 그러고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은 채 소희의 두 눈을 주시하며 진지하게 말했다.“당신이 심명에게 진 신세는 내가 대신 갚아 줄게. 하지만 나에게 속해야 하는 건 심명에게 털끝만큼이라도 나눠줘서는 안 돼.”“구택 씨……. 그동안 나랑 헤어지고 싶었던 적이 있었어?”“헤어지고 싶었던 적?”소희의 물음을 되뇌는 임구택의 입가에는 한기가 묻어 있었다.“당신 설마 날 포기할 생각이 있었던 거야?”“지금 내가 당신한테 묻고 있잖아.”“아니, 한 번도 없었어.”임구택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확고했다.그러면서 그는 소희의 얼굴에 살짝 입을 맞추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사실 당신을 찾아오지 않는 건 당신을 일부러 무시한 것도, 포기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야, 단지 당신이 나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였어. 설마 아직도 당신에 대한 나의 진심을 의심하고 있는 거야?”“구택 씨,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상대방의 마음을 확신할 수 없게 되었어?”소희가 임구택의 품에 기대어 소리 없이 한숨을 쉬며 물었고, 임구택이 듣더니 묵묵히 소희를 더 꼭 껴안았다.“우리가 상대방을 너무 아껴서 그렇게 많은 문제들이 생겼던 거야.”임구택이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소희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한번 맞추고는 낮은 소리로 다시 말을 이어갔다.“앞으로 우리 다시는 헤어지자는 말도 하지 말고, 냉전도 하지 말고, 서로의 마음에 상처 주는 말도 하지 말자.”“응.”“소희야.”부드러운 입맞춤은 다시 뜨거운 키스로 변해가고 있었다.이에 소희가 놀라 숨을 들이마시며 임구택을
강아심은 그에게 대답하고 싶지 않아 시선을 돌리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이 살짝 빛났다. 아심은 가능한 시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귓가에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벽 구석에 깨진 도자기 조각이 보여. 우리가 어떻게든 가서 그걸 손에 넣어야 해.”깨진 도자기 조각은 절반이 먼지 속에 묻혀 있었고, 아마도 산에 올라온 사람들이 여기서 밥을 먹다 그릇을 깨뜨리고는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져놓은 것 같았다.여자의 숨결이 부드럽게 시언의 귀를 간질이며 퍼졌다. 아심의 부드러운 입술이 열렸다 닫히며 그의 귀밑 민감한 피부를 살짝 스쳤다. 시언은 몸이 순간 굳어졌다가 늦게서야 대답했다.“소용없어.”“뭐?” 아심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이 줄엔 합금 섬유가 섞여 있어. 칼로도 자를 수 없으니 도자기 조각으로는 더더욱 불가능해.”시언이 낮게 말하자, 아심은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낮게 속삭였다.“정말 당신을 특별대우해 주긴 하네요!”이번엔 시언이 이해하지 못했다.“응?”“아니, 그런 거지! 일부러 합금 줄까지 써서 묶어놨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분명 이런 대접 못 받을걸요!” 아심이 말하자, 시언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그녀가 자신을 칭찬하는 건지 비꼬는 건지 알 수 없었다.어느새 하늘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그들을 감시하던 사람들이 교대로 밖에 나갔다 돌아왔다. 마지막 교대 때는 가면을 쓴 남자가 부하들을 데리고 모두 오두막 안으로 들어왔다.텅 비었던 방은 순식간에 꽉 찼다. 용병들은 하나같이 덩치가 크고 험상궂은 인상에,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방 안 공기를 긴장감으로 가득 채웠다.시언과 아심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어 섰다. 시언은 벽에 몸을 대고 서서 손으로 아심의 등을 감싸며 가면 남자를 주시했다.가면을 쓴 남자는 남자는 방 한쪽의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다른 용병들은 방 안에 나무 장작을 모아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방금 비가 내린 터라 산속은 밤이 되면서 습기와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그
강아심은 용병에게 조하루네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용병은 냉랭하게 알겠다고 대답하며 기억해두었고, 하루가 망설이자 바로 그를 들어 어깨에 둘러메고 밖으로 걸어갔다. 이에 하루는 몸부림치며 울먹이며 외쳤다.“삼촌, 누나!”점점 그 목소리는 멀어져 갔다.아심은 목이 메었지만, 하루를 떠나보내는 것이 현재로선 최선의 선택임을 잘 알고 있었다.오두막 바깥에서는 시언에게 맞아 쓰러진 자들이 동료의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 부상이 심한 자들은 땅에 누워 쉬고, 가벼운 부상자들은 안으로 들어와 명령을 기다렸다.가면을 쓴 남자는 밖에 나가 전화를 걸고, 돌아와 자기 부하들에게 지시했다.“저들을 잘 지켜보고 있어. 윗선의 지시를 기다려.”“예!” 몇몇 용병들이 대답했다.가면 남자는 다시 밖으로 나갔고, 다른 용병들도 따라 나갔다. 오두막 안에는 두 명의 용병만이 남아 시언과 아심을 감시하고 있었다.잠시 후, 시언은 갑자기 아심을 들어 올려 돌며 옆에 있던 대나무 침대에 넘어졌다. 손발이 묶여 있어 힘 조절이 어려웠고, 그가 아심 위에 넘어지며 아심은 깜짝 놀랐다. 시언은 바로 몸을 뒤집어 아심이 자신의 위에 있도록 했다.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감시 중이던 용병들은 깜짝 놀라 총을 겨누었지만, 두 사람이 단순히 침대에 누워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자 천천히 총을 내렸다.아심은 약간 고개를 들어 아래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시언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두 사람이 줄에 묶여서 뻣뻣하게 서 있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이렇게 누워 있는 게 그나마 나아.”아심은 미간을 찌푸렸다.“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요?”그러자 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이보다 더 위험한 상황도 겪어봤어. 걱정하지 마, 난 쉽게 죽지 않아. 내가 살아 있는 한 너도 절대 죽지 않을 거야.”아심은 그들을 감시하는 용병들을 한 번 흘깃 보고 나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하려는 걸까?”“잘 모르겠어. 하지만 나를 바로 죽여 노도를
시언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노도를 위해 복수하러 온 건가?”가면을 쓴 남자가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변성기를 사용한 탓에 그 웃음소리는 거칠고 듣기 거북했다. 마치 산속에서 이빨을 드러낸 야수가 내는 소리 같았다.“진언이 설마 노도의 죽음을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하진 않겠지?”남자가 손짓하자, 바로 누군가가 하루를 그 앞으로 끌고 왔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하루의 목을 쓰다듬으며 냉소를 지었다.“이게 진언의 아들인가?”“아니!” 시언이 차갑게 응수했다.“보기엔 아닌 것 같지만, 진언은 무고한 아이가 본인 앞에서 죽는 걸 원하지 않겠지?”가면을 쓴 남자가 무심하게 말했다. 하루는 겁에 질려 얼굴이 창백해지고 온몸이 떨렸다. 하루는 고개를 돌려 시언을 바라보며 극도의 공포에 휩싸여 있었지만, 도움을 청하거나 가면 남자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는 않았다.이때 아심이 차갑게 말했다.“그 아이는 마을에 사는 평범한 농가의 아이야. 내가 인질이 될 테니 그를 풀어주고 집으로 돌려보내.”가면을 쓴 남자가 시언을 보며 물었다.“진언의 생각은 어때?”시언은 들고 있던 총을 내던졌다.“우리 조직에는 조직만의 규칙이 있어. 여성이나 아이를 인질로 잡는 건 가장 비열한 용병들만 하는 짓이야.”“너희들이 원하는 건 나니까 나를 마음대로 처리해. 하지만 여자와 아이는 산 아래로 보내.”아심이 시언을 보며 고개를 가볍게 젓자, 시언은 그녀를 바라보며 낮고 깊은 눈빛을 보냈다.“내 말을 들어.”아심은 주먹을 꽉 쥐었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때, 가면을 쓴 남자가 거칠게 웃음을 터뜨렸다.“그 아이는 풀어줄 수 있어. 하지만 이 여자는 안 돼. 이름은 넘버세븐. 진언의 곁에 있었던 사람이지? 내가 틀리지 않았군!”시언은 눈을 가늘게 뜨며 가면 남자를 노려봤다. 그의 시선은 차갑게 얼어붙었다.“그럼 아이부터 풀어줘!”“서두르지 마. 그 아이가 내 손 안에 없으면, 이 사람들로는 진언을 막아낼 수 없어. 내가 그 정도는 알고
강아심이 몸을 드러내는 순간, 밖에 있던 사람들이 안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창문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었고, 두 개의 창문을 지키기에 역부족이었던 아심은 결국 한 사람과 몸싸움을 벌이게 되었다.아심은 자신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가능한 한 빠르고 강력하게 상대의 약점을 노려 공격했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창문을 통해 밀려들었고, 하루가 숨던 곳에서 고개를 내밀자 한 고용병이 그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들어가!” 아심이 다급하게 소리치며 발로 근처에 있던 나무 의자를 걷어차 상대의 어깨를 가격해 총을 떨어뜨렸다.“탕!” 총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방아쇠가 당겨졌고, 총알이 벽을 뚫고 나갔다.아심은 두 명을 밀어내며 하루가 숨은 대나무 침상으로 다가가 그를 보호했다. 그 순간 또 다른 고용병이 방 안으로 뛰어들어 하루가 숨은 침상 밑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아심은 몸을 날려 고용병의 총을 걷어차며 떨어뜨렸고, 다시 그 총을 잡으려는 찰나 또 다른 고용병 두 명이 그녀를 공격해 왔다.아심은 한 남자의 팔을 비틀어 탈골 시키고, 몸을 회전시켜 다른 남자의 복부를 강하게 가격했다. 아심의 힘은 이 고용병들보다 약했지만 몸놀림이 민첩하고 공격이 매끄러워 누구도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그러나 그 순간, 대나무 침상 위로 한 남자가 뛰어올라 침상을 들어 올리며 하루를 붙잡아 칼을 그의 여린 목에 들이댔다.“움직이지 마라, 움직이면 이 아이를 죽일 거야!”이와 동시에 문이 거칠게 열리며 시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시언이 지나온 길에는 이미 쓰러진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시언의 등장에 방 안의 고용병들은 더욱 경계하며 총을 모두 그에게 겨누었다.가장 가까이 있던 고용병이 아심의 머리에 총을 겨누자 시언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총으로 겨누지 마.”고용병은 시언의 서늘한 시선을 받자 손이 떨렸지만,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시언은 천천히 아심 쪽으로 걸어갔다. 고용병의 눈빛은 두려움이 엿보였고, 본
조하루가 즉시 과일 주스를 시언에게 내밀며 말했다.“삼촌, 이거 드세요. 저를 그렇게 오랫동안 업어 주셨잖아요. 고마워요!”시언은 얇게 입가를 올리며 주스를 다시 돌려주었다.“난 누나와 장난친 거야.”“아...”시언은 최대한 표정을 부드럽게 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효과는 없었다. 조하루는 멍하게 대답하며 다시는 시언을 쳐다보지 못했다.아심은 입술을 꽉 다물며 웃음을 참았고, 차마 대놓고 웃을 수 없어서 고개를 돌려 빵을 베어 물었다.숲속에서 한 마리 새가 날아와 창가에 앉아 방 안을 들여다보며 검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쭈쭈 하고 소리를 내면서. 아직 인간에게 위협을 느껴본 적 없는 새는 사람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아심은 빵 부스러기를 조금 떼어 창가에 놓았다. 새는 신나게 부리로 쪼아먹었지만 다 먹기도 전에 갑자기 날아가 버렸다. 시언은 창 아래에 서 있는 아심을 보며 반쪽 남은 빵을 들어 올렸다.“천천히 먹어, 난 밖에 좀 보고 올게.”아심은 시언이 문을 나가는 걸 보고 하루에게 속삭였다.“볼일 보러 가야 해? 삼촌이랑 같이 가면 돼!”하루는 눈을 크게 뜨다가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어갔다. 아심은 천천히 빵을 다 먹고 물병을 집어 들고 막 마시려던 순간, 밖에서 탕! 하고 커다란 총성이 들려왔다.아심의 얼굴이 굳어졌고,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문이 갑자기 열렸다. 시언이 떨고 있는 하루를 방 안으로 밀어 넣고는, 곧바로 따라오던 한 남자를 발로 차서 밖으로 날려 보냈다.그는 고개를 돌려 매우 빠르게 말했다.“지켜, 절대 나오지 마. 창문도 다 잠가!”문이 열리는 그 순간, 아심은 이미 상황을 확인했다. 그들은 이미 포위당한 상태였다. 나무집 주위는 전부 위장복을 입고 얼굴을 가린 용병들로 가득했고, 적어도 스무 명이 넘었다.문이 닫히고 난 뒤, 바깥에서는 치열한 싸움 소리가 들려왔다.아심은 조하루를 안전한 곳에 숨기고 두 개의 창문을 빠르게 닫은 뒤, 창을 야생 동물로부터
강시언이 앞서 걸었고, 중간에는 조하루, 뒤에는 강아심이 따라갔다.비에 젖어 미끄러운 산길을 걸으며, 아심은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조하루에게 지팡이 삼아 주었다. 세 사람은 고요하고 습한 산림 속을 조용히 지나갔다.겨우 한 시간 정도 걸었을 뿐인데, 하루는 이미 지쳐 헉헉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직 어린아이라 무리가 있는 듯했다.아심은 걸음을 멈추고 하루의 앞에 가서 쪼그려 앉았다.“자, 내가 업어줄게!”시언이 돌아서더니 자신이 메고 있던 가방을 아심에게 넘기며 말했다.“내가 업을게!”하루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겁먹은 듯 시언을 올려다보았다.“저, 저 아직 괜찮아요.”“아직 한참 남았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겠어? 올라와!” 이번에는 시언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지만 여전히 냉정하고 단호해서 거부할 수 없었다.하루는 아심을 바라보았다. 아심의 격려하는 눈빛을 본 후에야 조심스럽게 다가가, 살며시 시언의 등에 올라탔다.시언이 일어서자 조하루의 모든 불안과 두려움이 마법처럼 사라졌다. 시언의 넓고 든든한 등에 안겨, 하루는 안전감을 느꼈다. 시언은 고개를 돌려 아심에게 환히 웃어 보였다.아심도 미소를 지으며 뒤따랐다. 열몇 개의 계단을 더 오르던 중, 하루는 손에 쥐고 있던 비타민 젤리를 시언의 입가에 내밀었다.“아저씨, 이거 드세요!”시언은 원래 거절하려 했으나, 아심이 늘 이 아이들이 자신을 무서워한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나 한 손을 뻗어 젤리를 받아 입에 넣었다.하루의 검게 빛나는 눈이 환하게 반짝였고, 시언이 자기가 준 젤리를 먹자 무척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시언이 젤리를 씹으며 물었다.“더 있어?”하루는 허둥지둥 젤리 통을 꺼내 다시 시언에게 주려 했지만, 그가 말했다.“뒤에 있는 누나한테 두 알 줘.”하루는 그제야 깨닫고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에 다섯 여섯 개의 젤리를 쥐고 아심에게 내밀었다.“누나!”아심이 두 걸음 앞으로 다가와 하나를 집었다.“고마워!”하루는 여전히 손을 내밀고 있었지만, 아
“네!” 하루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반짝이는 눈빛을 보였다. “정말 맛있어요, 우리 다들 엄청나게 좋아해요.”“하루에 두 알만 먹어야 해, 너무 많이 먹지 말고.” 아심은 자연스럽게 하루와 대화를 이어갔다.“알아요, 선생님이 우리한테 말씀해 주셨어요.” 하루의 미소는 순수하고 귀여웠다.시언은 그들이 뒤에서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룸미러로 아심을 흘깃 보았다. 그의 입가에 미세한 웃음이 번졌다.아심을 데리고 오길 잘했다. 아니었으면 이 작은 아이와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몰랐을 테니까.어둡고 흐린 날씨에, 세차게 내리는 비로 인해 차창이 물안개로 덮여 바깥 풍경이 희미하게 변해 있었다. 차 안은 조용했지만, 아심과 하루의 대화와 빗소리, 그리고 쉼 없이 움직이는 와이퍼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차가 한 시간 정도 달린 후, 시언은 뒷좌석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고개를 돌려보았다. 아심은 이마를 차창에 대고 잠이 들어 있었다.하루는 창문에 성에 낀 자국을 손가락으로 그리다가, 시언이 뒤를 돌아보는 것을 보자 얼른 손을 내리고 긴장한 표정으로 몸을 똑바로 세웠다. 시언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손으로 자기 외투를 벗어 소년에게 건넸다.“이거 좀 도와줘. 누나에게 덮어줘.”아심은 얇은 회색 운동복을 입고 있었고, 그녀가 운성에 왔을 때 날씨가 더워서 두꺼운 옷은 가져오지 않았다. 하루는 외투를 받아 조심스럽게 아심의 몸에 덮어주었다.시언은 아심을 한 번 더 보자, 그녀는 꼼짝하지 않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이에 시언은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돌렸다.차는 산길을 따라 다시 30분가량을 달렸고, 드디어 앞쪽에 무너진 도로가 보였다. 더는 차로 갈 수 없었다.“네 물건 잘 챙기고, 여기서 내려야 해.” 시언이 하루에게 말했다. “산을 돌아서 넘어가야 하거든.”“네!” 하루는 대답하며 자신의 가방을 메고, 안에 들어 있는 옷과 책을 잘 챙겼다.“삼촌, 누나를 깨울까요?” 하루가 묻자, 시언은 표정을 굳히며 뒤돌아보았다.“
이 시간에 시언은 이미 아침을 먹었을 거라 생각한 아심은 따로 묻지 않고 혼자 아침을 먹었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아심은 평소처럼 전화를 걸어 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오늘은 아이들이 다시 수업을 시작하는 날이라 아심은 우산을 챙겨 밖으로 나가 도서관에서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들으러 갔다.도서관 입구에 들어서자, 그녀는 도도희와 시언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두 사람은 무언가 심각하게 상의하고 있었고, 그 대화를 어렴풋이 들을 수 있었다.“산길이 비에 무너져서 아직 완전히 복구되지 않았어. 차로는 갈 수 없을 것 같은데, 산길을 올라가야 해서 너무 위험해.”도도희가 걱정스럽게 말하자, 시언이 단호하게 대답했다.“비가 많이 오진 않으니까 시도해 볼 만해요.” 이때, 아심은 다가가며 물었다.“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 생겼나요?”시언은 아심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분명히 옷 따뜻하게 입으라고 한 것 같은데.”오늘 아심은 얇은 검은색 긴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시언의 지적에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도도희 앞이라 반박하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곧 가서 갈아입을게요.”도도희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는 아심에게 설명했다.“한 학생의 할아버지가 병이 너무 위중해서 의식이 흐려졌대.”“그런데 할아버지가 계속 손자를 찾고 계셔서 가족들이 전화로 아이를 데려와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겠냐고 물어봤어.”도도희는 시언을 바라보며 말했다.“시언은 아이를 데려다주겠다고 했는데, 비가 와서 산길이 위험할까 봐 걱정돼.”“위험할 게 뭐 있어요?” 시언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럼 그렇게 해요. 아이한테 준비하라고 전해주고, 곧 출발할게요.”시언은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밖으로 나갔고, 아심도 뒤따라가며 말했다.“나도 같이 갈게요.”시언은 뒤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안 돼.”“왜 안 돼요?” 아심은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시언을 따라붙었다.“그 애들이 얼마나 당신을 무서워하는지 모르죠? 혼자 데려가
차에 올라탄 지아윤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큰어머니, 이제야 제가 한 말 믿으시겠죠?”권수영은 약간 흥분한 표정으로, 눈빛이 반짝였다.“저 아가씨, 혹시 남자친구 없나?”“물론 없죠!”“그럼 기다릴 필요 없겠네. 빨리 승현이와 만나게 해야겠어.” 권수영은 이미 마음이 급해져 있었다.“제가 재아에게 말만 하면 분명히 승낙할 거예요.” 아윤은 눈을 굴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할머니의 혼수품도 되찾고, 오빠에게 좋은 여자친구까지 소개해 드렸으니, 큰어머니께서 저를 어떻게 보상해 주실 건가요?”권수영은 속으로 이익을 따져 보며 생각했다. 만약 도씨 집안과 결혼까지 성사된다면, 그야말로 돈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이득이었다.“네가 승현이와 저 아가씨를 이어준다면, 내가 할머니의 혼수품을 되찾아도 그중 절반은 네 몫으로 줄게.”“정말 약속하신 거죠?” 아윤의 눈이 반짝였다.“그럼, 내가 직접 약속했는데 속이겠니?”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반드시 최선을 다할게요!”...집에 돌아온 아윤은 바로 재아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권수영과의 만남 이유를 은근히 흘리며 설명했다. 그리고는 지승현을 칭찬하며 그와 한번 만나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재아는 그제야 모든 상황을 깨달았다. 속으로 기분이 상했다. 첫째는 자신이 누군가의 결혼 상대자로 몰래 계획된 것 같아서였고, 둘째는 현재 중간급인 지씨 집안과 연결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래서 재아는 시큰둥한 태도로 말했다.“야, 그런 얘기를 진작해주지 그랬어? 미안하지만 난 지금 연애할 생각 없어. 아마 큰어머니께서 실망하실 거야.”아윤은 재아의 기분이 상한 것을 눈치채고 급히 사과했다.[미안해, 재아야. 정말로 큰어머니께서 그냥 너를 보고 싶어 하셔서 그런 거야. 괜한 부담은 갖지 마.]아윤이 이렇게 간곡히 사과하자, 재아는 약간 기분이 풀리며 말했다.“괜찮아. 나 화난 건 아니야. 그냥 난 당분간 일에 집중하고 싶어. 외할아버지도 내가 빨리 결혼하길 원치 않으셔.”아윤은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