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태경의 변덕스러운 태도에 영문을 몰랐다. 그녀는 몰래 집사를 찾아가서 물었다.“오늘 집에 누가 왔었나요?”“아무도 오신 적이 없습니다, 작은 사모님.”사랑은 더욱 이상하다고 느꼈다. 진지하게 생각한 다음, 그녀는 태경이 그저 이런 사람이라고 자신을 설득했다.다행히 태경은 대부분 시간 동안 평온한 상태를 유지했다. 사랑은 지금 잠이 많아서, 태경의 마음을 알아맞힐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위층으로 올라간 다음, 눕자마자 바로 잠들었다.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었는데도 사랑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고, 이불로 자신을 꽁꽁 감싸며 깊이 잠들었다.태경은 식탁 위에 빈자리가 있는 것을 보고,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그 사람은요?”“위층으로 올라가신 후에 줄곧 내려오시지 않았습니다.”“가서 불러요.”박나은은 태경의 까칠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집에 네 원수라도 있어? 집에서도 그딴 표정 지을 거면 당장 나가.”태경은 침묵을 지키며 서서히 눈살을 찌푸렸다.‘난 강 비서의 일 때문에 이성을 잃으면 안 되는데.’태경은 일어섰다.“필요 없어요. 내가 올라가서 부를 테니까.”박나은은 이런 아들을 보며 그저 한심하다고 느낄 뿐이었다.“내가 어째서 이렇게 인정머리도 없는 아들을 낳았을까?”그건 아니었다. 예전에 태경은 세영을 아주 잘 달랬는데, 그 방식은 어찌나 다양한지, 보는 사람마다 수줍다고 느꼈다....커튼이 두꺼웠기에, 침실은 무척 어두웠다.태경이 불을 켜자, 침대가 볼록 튀어나온 것을 발견했다.그는 잠시 지켜보면서 소리도 내지 않았고 앞으로 나아가지도 않았다.‘정말 작은 여린 존재인 것 같아. 자칫하면 남에게 쉽게 안겨갈 수도.’태경은 처음으로 사랑을 깨웠고, 그 목소리는 무겁지도 않고 무척 부드러웠다.그러나 침대 위의 사람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태경은 침대에 앉아 사랑이 덮은 이불을 젖히며,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사랑이 간지럼을 타는 것을 알고, 손을 쓸 준비를 하다가 실수로 그녀의 배를 만졌다.품속의 여
태경은 사랑이 말을 잘 듣고, 얌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날 난처하게 만들 사람은 아닌데. 그러나 남녀 단둘이 지내면, 확실히 감정이 뜨거워질 수 있지.’태경은 입가에 냉소를 머금었고, 전례 없는 냉담한 눈빛을 보였다.지금 이 순간, 그의 마음속의 분노는 확실히 가라앉을 수 없었다.사랑이 임신을 했다는 일에 태경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리고 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아이가 자신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은 것은, 그가 매번 콘돔을 썼기 때문이다.‘그때 딱 한 번 콘돔을 쓰지 않았는데. 물론 후에 강 비서에게 약을 처방 받으라고 했고. 강 비서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야. 반대로 아주 똑똑하지. 그렇다면 이런 멍청한 짓을 하지 않을 텐데. 자신의 몸을 신경 쓰지 않으면, 남이 뭐라 해도 소용없어.’태경은 검사 보고서를 손에 꽉 쥐며, 묵묵히 몇 번 훑어보았다.그는 위의 모든 설명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었는데, 덕훈이 말한 거와 다름없었다.태경은 보고서를 서랍에 던진 뒤, 내선 전화로 차갑게 말했다.“강 비서 들어오라고 해.”현미는 전화 속 태경의 말투가 매우 좋지 않다고 느꼈다. 마치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것 같았다. 그녀는 얼른 탕비실에 가서 밀크티를 만들고 있는 사랑을 찾았다.“사랑아, 대표님이 찾으셔.”손을 데일 뻔한 사랑은 속눈썹을 드리우며 가볍게 떨었다.“이유는? 말씀하셨어?”현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그녀는 사방을 둘러보며, 탕비실에 다른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그러나 그 말투를 들어보니, 무서울 정도로 차분하시더라. 너 조심해, 괜히 대표님 심기 불편하게 하지 말고.”사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또 현미를 향해 웃었다.“고마워.”그녀는 태경이 무슨 일로 자신을 불렀는지 몰랐다.‘정리된 서류는 아침에 이미 사무실 책상에 놓았는데. 그리고 태경이 오늘 아침 외출할 때, 기분이 엄청 좋아 보였고.’사랑은 사무실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들어와.
사랑은 태경의 물음에 어리둥절해졌다. 눈을 들자, 그녀는 태경의 표정이 정말 어둡다는 것을 발견했다.남자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으며, 평소에 부드러운 미간도 지금 차갑고 포악한 기운이 배어 있었다.사랑의 턱이 좀 아팠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아닙니다.”태경은 계속 그녀를 바라보았다.“강 비서, 똑똑히 생각하고 말해.”사랑은 태경의 차가운 눈동자를 바라보며 또다시 멍해졌다.‘내가 정말 대표님을 배신한 적이 있나? 난 회사의 기밀을 팔아먹지 않았고, 대표님의 일정을 다른 여자들에게 알려준 적이 없는데.’사랑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그런 적 없습니다, 대표님.”태경을 두려워하는 상태에서 입을 열면, 사랑의 목소리는 많이 간드러졌고, 억양도 좀 부드럽게 변했다.태경은 손을 내려놓으며, 눈 밑의 포악한 기운도 조금 누그러졌다.그는 사랑이 거짓말을 할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생각했다.사랑에 대한 태경의 인상은 줄곧 좋았다. 그의 앞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업무 능력도 유난히 훌륭했으니까.‘정말 뭐가 잘못됐나? 그럴 수도 있어.’“강사랑, 이것만큼은 똑똑히 알아뒀으면 좋겠어.”태경은 이렇게 성까지 붙이며 사랑의 이름을 부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잠시 넋을 잃더니 다시 정신이 들었다.“말씀하세요.”“이혼하고 나서, 네가 누구랑 함께 하든, 뭘 하든 난 상관하지 않을 거야.” 태경은 말투가 무척 엄숙했다. “그런데 우리 두 사람의 계약이 지속되는 동안, 난 절대로 네 배신을 용납할 수 없어.”태경이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사랑은 여전히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내가 또 누구와 함께 하겠어? 난 다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데.’태경은 화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성격이 더러운 사람이, 인정이 없는데도 지금 이렇게 다정한 척하다니.’태경은 항상 남에게 여지를 남겨주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지금 그는 사랑을 잔인하게 괴롭히고 싶었다. “난 결벽증이 있어서, 다른 남자가 갖
지난날들을 돌이켜보면, 사랑을 기쁘게 할 수 있었던 순간은 하나도 없었다.유일하게 따뜻했던 기억이 있다면, 아마도 아무 걱정 없이 살았던 열여섯 살의 한때일 것이다.가장 생기가 넘치던 그해 여름, 남청연의 병원비 외에는 다른 슬픈 일이 없었다. 사랑은 매일 몰래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바라볼 수 있었다.회사 아래층 벤치에 오랫동안 앉아 있던 사랑은 엄청난 피로감을 느꼈다. 그녀는 지루한 눈빛으로 오가는 행인들을 바라봤다. 대부분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이었다.맞은편 공원에서는 어린아이가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고, 대학생들은 꽃을 팔고 있었다. 사랑은 그들이 들고 있는 장미꽃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본가의 정원에도 장미가 가득 심어져 있지. 하지만 나를 위한 단 한 송이도 없었어.’사랑은 피곤한 몸을 일으켜 외투로 자신을 꽁꽁 감쌌다. 그녀는 스카프로 얼굴까지 감싸며 추위에 맞섰다.꽃을 파는 대학생 앞으로 다가간 사랑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한 송이에 얼마야?”요즘은 발렌타인데이도 아니고 크리스마스도 아니라서 꽃을 파는 장사가 그리 쉽지 않았다.대학생들은 오늘 아직 한 송이도 팔지 못했는데, 모처럼 자발적으로 꽃을 사려는 고객을 만났다.“아 언니, 한 송이에 1,000원이에요. 1,000원 주시면, 제가 두 송이 드릴게요.”“아니야, 한 송이만 줘, 고마워.”사랑은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건넸다.장미를 받자, 뿌리에 있는 가시가 손을 찔렀다. 아픔을 느끼지 못했는지, 사랑은 장미를 쥐고 찬바람을 쐬고 있었다.‘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는 것도 나쁘지 않아. 이게 그렇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은 아니잖아. 나도 자신을 위해 나만의 장미를 살 수 있고.’...사랑은 장미를 산 다음, 다빈에게 전화를 걸어 나와서 밥 먹자고 했다.다빈은 지금 집안에서 가장 한가한 사람인데, 매일 쇼핑하는 것 외에 다른 일이 없었다. 그녀는 황급히 사랑이 보낸 레스토랑으로 달려갔다.사랑은 이미 음식을 주문했고, 다빈에게 와인 한 병을 시켰다.
사랑은 순간 숨이 멎은 것만 같았다. 숨을 죽인 채 떨리는 속눈썹을 들고, 조심스럽게 태경이 들고 있는 검사 보고서를 바라보았다.흰 종이 위에는 희미한 그림이 찍혀 있었다.사랑은 제자리에 뻣뻣하게 서 있었다. 발은 마치 못에 박힌 듯 들 수조차 없었다. 지금 태경의 표정을 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사랑은 병원에서 받은 모든 검사서를 분쇄기에 넣었지만, 유독 이 초음파 사진만큼은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줄곧 서랍 속에 숨겨 두었는데, 태경이 어떻게 이걸 발견했는지 알 수 없었다.사랑은 진정하려고 애썼다.‘아마도 태경 자신의 검사 보고서일 거야. 내 것이 아닐 수도 있어.’그녀는 몸의 떨림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손을 꼭 쥐고 천천히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태경은 아무 말 없이 소파에 나른하게 앉아 무뚝뚝하게 사랑을 바라보고 있었다.사랑은 그에게 등을 돌린 채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씻을 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가려 했다. 태경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당장 말을 꺼낼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사랑은 지금 무척 불안했다. 옷을 쥔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고, 손톱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다.욕실에 들어서자마자 사랑은 망설일 틈도 없이 문을 잠갔다.모든 힘이 빠진 듯, 그녀는 문을 등지고 천천히 주저앉았다.‘제발, 심태경의 손에 있는 그 보고서는 내 초음파 사진이 아니었으면 좋겠어.’그러나 사랑은 또 생각했다.‘어차피 알려야 하는 거라면, 지금 알게 되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거야.’그녀는 문에 기대어 바닥에 잠시 앉아 있다가, 차가운 손발이 점차 따뜻해질 때 천천히 일어섰다.욕실 안에서는 곧 샤워하는 물소리가 들려왔다.사랑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기에 작은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니 안색도 불그스름해, 임산부처럼 보이지 않았다.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한 후, 사랑은 욕실에서 나와 거울 앞에 앉아 스킨을 바르기 시작했다.태경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강 비서, 오
날카로운 종이에, 사랑은 하마터면 베일 뻔했다.한 달 정도 숨긴 비밀이 이 순간 들통나자, 사랑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태경이 건넨 사진을 받으며, 사랑은 보지도 않고 말없이 거두었다.한참을 침묵한 뒤, 그녀는 태경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네 맞아요, 나 임신했어요.”이렇게 오래 숨겼지만, 결국 밝혀야 하다니.사랑은 요즘 태경에게 뭐라도 발견될까 봐 두려웠고, 다음 순간 그의 버림을 받을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정작 들키고 나니, 그녀의 마음은 평온하기만 했다.마음에 걸려 있던 바위가 마침내 떨어졌다.혀끝에서 씁쓸함이 전해왔다. 사랑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랐지만, 좋은 결과가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순 없었다.‘만족 대신 실망뿐이겠지,’어두운 곳에 선 태경은 어렴풋이 냉엄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눈을 살짝 떨구며 묵묵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려 하다가, 또 무엇이 생각났는지 잠시 내려놓았다.“내 아이야?” 사랑은 몸이 굳어졌다.“맞아요.”그녀의 입술은 안색보다 더 창백했고, 목까지 쉬었다. 사랑은 불쌍하게 한 글자 한 글자, 어렵게 설명했다.“믿지 못하겠으면, 시간을 계산해 봐요. 임신한 지 7주가 됐으니, 마침 우리가 C시에 있을 때...”이제 더 이상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남녀 사이의 일에 대해 태경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굳이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었다.태경 역시 그날 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랑은 술을 조금 마신 상태였고, 평소와 달리 단순하고 귀여운 모습을 보였다. 호텔로 돌아왔을 때, 그의 욕구 또한 강하게 솟아올랐다.태경은 침대 머리맡을 살펴봤지만, 콘돔이 보이지 않았다.출장을 가더라도 청소부가 방에 들어와 청소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그는, 전날 밤에 콘돔이 모두 떨어졌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태경은 이런 사소한 일을 기억하지 않았고, 사랑도 그런 것을 사러 갈 리가 없었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관계를 가졌지만, 다음 날 아침 사랑에
울면 감정을 많이 발산할 수 있었다.사랑은 붉어진 눈을 천천히 들고, 태경의 차가운 두 눈을 마주했다.“사실, 나도 며칠 후에 이 일을 태경 씨에게 알려줄 생각이었어요.”그들은 모두 성인이었기에, 유치하고 충동적으로 일을 처리할 필요가 없었다.누가 뭐라 해도 아이는 죄가 없으니까. 사랑의 부주의로 작은 생명이 이 세상에 찾아왔으니, 그녀가 낳고 싶어도 태경과 상의해야 했다. 한부모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행복하지 못했다. 금전적으로 사랑은 아이에게 가장 좋은 생활을 줄 수 없었고, 감정적으로도 그녀는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었다.그렇다고 해서 꼭 태경이 아버지 역할을 하라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사랑은 혼자서 아이를 키울 것이다.태경은 손을 내려놓았다. 사랑은 어찌나 불쌍하게 울던지, 눈시울이 붉어졌을 뿐만 아니라, 속눈썹에는 심지어 눈물이 맺혀 있었다. 마치 큰 억울함이라도 당한 것처럼.태경은 두 손을 주머니를 넣으며, 담담하게 입을 열어 물었다.“그래서?”사랑은 그의 차분함에 이미 익숙해졌다.태경은 언제나 그랬다. 먼저 따지는 대신, 항상 먼저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부터 생각했다.사랑은 코를 훌쩍거렸다.“태경 씨가 아이의 아버지이니, 나도 당신의 의견을 듣고, 당신의 태도를 알고 싶어요.”태경은 담담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다만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고, 그는 싸늘하게 물었다.“내가 어떤 대답을 할지 정말 모르는 거야?”사랑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닐 거라고 믿고 있었다. 태경은 그렇게 무정하지 않을 거라고, 이런 단순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태경의 말은 마치 칼처럼 사랑의 마음을 쿡쿡 찔렀다.사랑은 자신이 모욕을 자초한 것 같다고 느꼈다. 그녀는 억지로 몸을 받치고 벽을 짚고서야 바닥에 쓰러지지 않았다.“이건 작은 일이 아니니, 내가 생각해 봐도 소용이 없어요. 난 직접 태경 씨의 생각을 들을 거예요.”그러나 태경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태도는 매
태경은 마치 호의로 사랑을 일깨워 준 선생님 같았다. 냉정하고 무정하게 그녀에게 게임 규칙을 알려주는 동시에, 또 완곡하게 사랑은 이미 두 사람 사이의 계약을 어겼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신용을 지키지 않았으니 자신은 실망을 느꼈다고.사랑은 귀가 윙윙거리며 태경이 한 말을 한참이나 소화했다.‘계약 결혼. 그래. 나와 태경은 본래 계약한 사이에 불과하지.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게 아니라, 내가 합작하기에 적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던 거야.’숨을 천천히 들이마신 사랑은 몇 번이나 입을 열려고 시도했지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몰랐다.태경은 그녀의 면전에서 묵묵히 담배를 피웠고, 삼킨 숨결은 담배의 떫은맛을 머금고 있었다.심씨 가문을 책임진 후, 태경은 담배를 거의 피우지 않았다. 라이터의 소리는 맑았고, 불빛은 밝았다가 또 꺼졌다.사랑이 기침을 했다. 태경은 그녀를 한 번 보더니 말없이 담배를 껐다. 그녀는 태경의 마음을 몰랐고, 또 태경의 기분을 알 수 없었다.태경은 앞으로 나아갔다. 압박감이 너무 강해서인지, 사랑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사랑이 후퇴하는 동작을 보며, 태경은 가볍게 웃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무척 차가웠다.“강 비서.”사랑은 가슴이 떨리더니, 본능적으로 태경의 목소리에 두려움을 느꼈다.태경은 여전히 담담했다.“이렇게 나오면 곤란한데.”‘곤란하다고?’그러나 태경의 말투는 정말 차분하고 싸늘했다.태경 같은 사람은 아마 이 일을 알았을 때부터 이미 처리 방식을 생각했을 것이다.사랑은 침착해졌고, 태경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하고 싶은지 직접 말해요.”태경은 입술을 깨물었다.“이 일도 내 책임이니 있으니, 감당할 건 나도 감당해야지.”사랑은 긴장한 표정으로 주먹을 움켜쥐며, 차분한 얼굴로 판결을 기다렸다.태경은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이 아이는 확실히 내 계획을 벗어났어. 그러니 아이를 낳으면 얼마나 귀찮을지,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아이는 애완동물이 아니야. 강
사랑은 몸이 뻣뻣해졌다. 지호가 아직도 이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사람은 모두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가 있었다. 사랑도 그때 궁지에 몰리지 않았다면, 나이트클럽에 가서 술을 팔지도 않았을 것이다.태경은 별로 신경 안 쓰는 것 같았다.그도 사랑이 왜 에스타나이트에 가서 아르바이트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남청연의 병원비는 결코 한 학생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태경은 사랑이 그녀의 아버지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만약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게 아니라면, 이미 돌아가셨을 수도 있겠군.’지호는 태경이 무관심한 것을 보고 재미없다고 느꼈다.‘하긴, 신경 쓰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았으니 강사랑에게 무슨 감정을 가지겠어.’지호의 머리는 또 아프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이미 오랫동안 참았다. 매번 사랑의 얼굴을 볼 때마다, 지호는 머리가 따끔거렸고, 마치 바늘이 관자놀이를 호되게 꿰뚫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또 그렇게 빨리 사랑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려 하지 않았다.지호는 도대체 어디에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다. 도대체 자신의 병 때문인지, 아니면 사랑이 그렇게 얄미운 것인지. 그의 피부는 눈처럼 창백했고,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그럼 너희들 방해하지 않을게.”‘더 이상 있을 순 없어.’몸을 돌려 떠나자, 애써 참았던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지호는 발걸음을 비틀거렸고, 옆의 난간을 짚어서야 겨우 넘어지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숨을 깊게 쉬었다.이 순간, 전기 충격을 받은 것 같은 통증은 그제야 서서히 사라졌다.지호는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눈빛의 살의는 전례 없이 짙어졌다. 그는 마치 악마처럼 이를 갈며 생각했다. ‘언젠가는 강사랑을 죽일 거야. 그 사람이 죽기만 하면, 난 더 이상 그 여자를 볼 리가 없고, 이렇게 고통스럽지도 않을 거야.지호는 일찍 연회장을 나섰다. 그는 차에 앉아 미간을 비비다가, 갑자기 입을 열고 앞에 앉은 기사에게 물었다.“내가 예전에 병원에 있을 때, 어떤 치료를 받은
지호의 말은 모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록 몇 마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미 사랑을 향한 경멸이 넘쳤다.태경은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내 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거지?”지호는 평소에 남의 일을 알아보지 않았고, 그럴 흥미도 없었다. 특히 최근 몇 년간 가족사업을 인수하면서, 그 깨끗하지 못한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빠서 이런 일들을 신경 쓸 틈도 없었다.지호의 안색은 차가웠고, 짙은 동공은 그 속을 헤아릴 수 없었다.“궁금해서.”태경은 코웃음을 쳤다.“이제 세영을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거야? 네가?”지호가 세영을 좋아하는 것은 비밀이 아니었다. 오래전에 이미 누군가 알아차린 일이었고, 그때 태경도 오만하고 도도한 소년이었으니, 이 일에 조금도 개의치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다만 그는 승부욕이 강했기에 지호에게 한 번 고백해 보라고 했다. 누가 세영의 마음을 얻느냐에 따라 진정한 승자가 결정된다고 말하며.태경은 지호가 과거에 대해 말하는 것을 어렴풋이 들었다. 그는 세영과 죽마고우였으며, 같은 골목에서 자란 이웃이었다고 했다.오랜 치료로 지호는 그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그때의 감정만큼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지호는 태경이 허리를 감싸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듣기에도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동창이었으니 당연히 궁금하지.”태경은 사랑과 지호가 동창이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듯 무척 의아해했다. 물론 태경도 사랑과 동창이었다.그러나 태경은 이에 대해 아무런 인상도 없어, 잠시 침묵했다.“중학교? 고등학교? 아니면 대학?”지호는 무슨 재미있는 일이 생각났는지, 입가에 미소가 천천히 나타났다. 그는 수려하고 정교하게 생겼으며, 뚜렷한 윤곽은 마치 조각한 것처럼 아름다웠다. 웃으면 미간의 포악한 기운도 사라져 무척 매혹적이었다.그는 쯧쯧 소리를 내며 말했다. “네가 강사랑에게 물어봐.”걸레라 말하고 싶었지만, 지호는 또 억지로 삼켰다.지호는 동정심
사랑은 태경의 뜻을 알 수 있었다.“사랑 따위 없어.”이것은 태경이 준 충고였다.두 사람 사이에 호흡이 생겼는지,사랑은 자신이 지금 정서를 잘 숨길 수 있는 배우로 된 것 같다고 느꼈다. 심장 전체가 유리 조각으로 뒤덮여 따끔거려도, 겉으로는 멀쩡한 사람 행세할 수 있었다.그녀는 억지로 태경에게 웃었고, 조금도 자신의 슬픈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농담이에요.”말하면서 사랑은 손을 놓았다.“대표님께서 듣고 싶지 않으시다면, 앞으로 저도 이렇게 말하지 않을게요.”태경은 오늘 밤 사랑이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또 어디가 이상한지 알 수 없었다. 생각에 잠기다, 그는 사랑의 너무 요염한 미소를 보며 입을 열었다.“강 비서 오늘 밤 기분이 좋은가 봐?”‘이렇게 환하게 웃다니. 하지만 너무 가식적이야.’태경은 사랑이 가식적인 미소를 짓는 것을 싫어했다. 그런 미소는 항상 뻣뻣하고 불편해 보였다.“괜찮은 편이에요.”“하지만 괜찮아 보이지 않는데.”“아. 제가 디자인과 관련된 것을 좋아해서 그런가 봐요.”태경은 사랑이 전에 디자인과 관련된 주문을 받은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그러나 하나는 홈 디자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주얼리 디자인이었다. 어떻게 봐도 관계가 없었다.사랑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아직 직장을 구하지 못한 대학생이었다. 사랑은 매일 힘들게 뛰어다니며 여러 회사로 면접을 보러 갔다. 약간 초췌했지만 또 의욕이 넘쳤다.마치 바위 틈에서 왕성하게 자라는 잡초와 같았다.바람을 맞으며 흔들리니, 한없이 연약해 보이고 바로 끊어질 것 같지만, 또 생각보다 완고하고 강인했다.“주얼리 디자인과 홈 디자인이 같은 거야?”태경이 웃으며 물었다.“확실히 다르지만, 홈 디자이너는 주얼리를 좋아하면 안 되나요? 대부분 여자들은 주얼리를 좋아하잖아요.”태경은 사랑이 평소 주얼리에 관심을 가진 적을 보지 못했다. 박나은은 사랑을 엄청 좋아했는데, 때로는 친아들인 그보다도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약혼하자마자, 박나은은 사랑에게
태경은 똑똑한 사랑이 무척 마음에 들었고, 가끔 애교를 부리는 그녀가 좋았다.그는 눈앞의 정교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간드러진 웃음은 진심이 아닌 짜낸 웃음이었지만, 이곳의 많은 사람들보다 훨씬 아름다웠다.“앞으로 그 사람들 건드리지 마.”태경은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이 한마디만 했다.사랑은 바늘이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지만, 이 정도 따끔함은 무시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점차 웃음을 거두며, 진심인 듯 농담인 듯 입을 열었다.“제가 어찌 감히 엄 여사님을 건드리겠어요? 그런데 기어코 저를 귀찮게 하려 하시잖아요.”태경은 눈썹을 치켜세웠다.“강 비서는 피할 줄도 모르는 거야?”사랑이 말했다.“제가 눈에 거슬리니까, 저를 해치려는 거잖아요. 그럼 어떡해도 피할 수 없죠.”사랑은 다정하게 태경의 팔을 안으며 다시 웃었다.“차라리 대표님이 가셔서 엄 여사님에게 직접 말씀드려요. 저와 대표님은 그저 계약 부부일 뿐이란 것을. 그럼 엄 여사님도 저를 봐줄지도 몰라요.”말을 끝내자, 태경은 줄곧 침묵에 잠겼다.엄수인이 그렇게 유치하고 지루한 사람이 아니라서, 사랑을 괴롭힐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단지 이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았는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랑은 오늘 기분이 정말 좋지 않았기 때문에, 태경의 앞에서 말할 때, 더 이상 주의하지 않았다. 물론 누구에게 불쾌감을 주고 싶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만약 엄 여사님이 오늘 절 봐주지 않는다면, 대표님께선 절 도와줄 건가요?”태경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엄 여사님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지?”“강세영 씨가 슬퍼할까 봐 걱정하는 거잖아요.”태경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사랑의 턱을 들어 올렸다.“넌 항상 세영과 비교하길 좋아하더라.”그가 이렇게 말하자, 사랑은 그제야 자신이 늘 세영과 비교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남편이 바람난 조강지처도 아니고, 이러면 안 돼, 강사랑. 난 이런 사람으로 되고 싶지 않아.’사랑은 더 이상 웃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태경은 무척
사랑은 태경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봐도, 그녀는 여전히 태연자약했다.사랑은 담담하게 엄수인을 바라보았다. 마흔에 가까운 여자는 마치 30대 초반처럼 보였다. 얼굴이 놀라울 정도로 예쁘지는 않았지만, 기질은 무척 부드러웠고, 사람들로 하여금 경계를 풀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엄수인을 처음 만났을 때, 사랑은 병원에 있었고, 병실 안에는 생사를 알 수 없는 남청연이 누워 있었다.엄수인은 문 밖에서 유리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며 가식적인 태도를 보였다.“어머 불쌍해라.”남씨 가문의 사람들은 거의 다 죽었고, 사랑의 삼촌도 경제 범죄로 감옥에 들어갔다. 강남복은 그런 사랑을 C시로 데리고 갔다.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진심으로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남들 손가락질을 받을까 봐 억지로 자신을 키웠단 것을 잘 알고 있었다.엄수인은 강남복 앞에서 사랑을 비난하지 않았다. 다만 뒤에서 은근히 강남복에게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사랑이 오늘 또 울었어. 아마도 가족이 그리운 것 같아.’사랑은 줄곧 남씨 가문의 사람들과 아주 친했다.강남복은 양심에 찔리는 일을 해서, 그 사람들을 가장 싫어했고, 이름조차 듣고 싶지 않았다.엄수인이 아무렇게 한 말 때문에, 사랑은 강남복에게 뺨을 두 대나 맞았다.“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이미 죽었고, 네 삼촌도 이미 감옥에 들어갔어. 정말 그 사람들이 그렇게 보고 싶으면, 너도 그냥 죽어. 내 앞에 와서 재수 없게 굴지 말고.”사랑도 그때 겨우 열 몇 살이었고, 나이가 아직 어렸다. 그녀는 강남복 앞에서 울지도 않고, 아픔을 참으며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했다.울고 보채고, 또 강남복과 말다툼하면 엄수인의 함정에 걸려들 뿐이었다.그때 사랑은 강남복이 매달 주는 생활비를 받아서 남청연의 병원비를 내야 했다.그녀는 전에 엄수인에게 고개를 숙인 적이 없었기에, 지금은 더욱 그럴 리가 없었다. 사랑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웃었다.“엄 여사님, 나이가 드셔서 치매라도 걸리셨나 봐요? 절
사랑은 추위를 좀 타서 숄을 걸친 다음, 사람이 적은 구석에 가서 앉으며, 종업원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달라고 했다.경매장에는 화려한 등불이 켜져 있었고, 무척 눈이 부셨다.사랑은 C시에서 아주 잘나가는 거물들을 많이 보았다.‘강세영도 대단하네, 이런 분들을 초대했다니.’사실 사랑은 처음에 주얼리 디자인을 전공했는데,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선생님을 따라 각 대회에 참가했다. 세영은 그녀와 같은 학교, 같은 전공을 선택했고, 그저 학급과 교수님이 달랐다.매년의 디자인 대회는 신인들이 얼굴을 내밀 수 있는 곳이었다. 그해 사랑은 자신의 작품을 제출하기 전에, 교수님이 보낸 최고의 디자인 대상을 보았다. 그 그림은 그녀의 컴퓨터에 있는 내용과 거의 똑같았다.그것을 본 순간, 사랑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교수님은 세영이 디자인상을 받은 작품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녀를 천재라고 했다.사랑은 그 그림을 보고 머릿속이 좀 혼란스러웠다.“이게 강세영의 작품이라고요?”교수님은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그래, 너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특히 생기가 있어. 이미 오랫동안 이렇게 대단한 신인이 나타난 적이 없는데.”사랑은 자신의 기억이 잘못된 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신의 작품이 왜 세영의 것으로 됐겠는가?그녀는 한 달 넘은 시간을 들여서야 이 작품을 설계했는데, 그동안 무수히 많은 원고를 쓰레기통에 버렸다.아직 어떻게 된 일인지 몰랐을 때, 세영은 재빨리 사랑을 찾아왔다. 그녀는 자신이 훔쳤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단지 사랑에게 출세할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했다.사랑은 자신의 컴퓨터가 영문도 모른 채 해킹당한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컴퓨터를 들고 수리하러 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디자인 원고를 되찾았다.‘아마 그때부터 강세영은 이 일을 계획하고 있었을지 몰라.’자신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이 전혀 없었기에, 사랑도 나설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유력한 증거조차 내놓을
병원의 간병인은 사랑의 엄격한 말투에 깜짝 놀랐다.평소의 사랑은 줄곧 얌전하고 부드러워, 여태껏 이렇게 큰 소리로 자신과 말을 한 적이 없었다.간병인은 전전긍긍했다.[꽃을 들고 오셨기에 나쁜 사람 같지 않았어요. 게다가 또 어머님의 옛 친구라고 말씀하셔서, 들어오시라고 했어요.]사랑은 이 말에 화가 나서 머리가 좀 어지러웠다. 그녀는 보기 드물게 차가운 얼굴을 하며 엄숙하게 경고했다.“앞으로 그 여자 또 온다면, 그냥 떠나라고 해요.”간병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알겠어요.]사랑은 전화를 끊어도 화가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겨우 냉정함을 유지하며, 엄수인이 오늘 이렇게 한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엄수인은 이유 없이 우리 어머니를 찾으러 가지 않았을 거야. 그 여자는 무슨 일을 하든 다 목적이 있었어. 그때 그렇게 오랫동안 참은 것을 보면, 엄청 교활하고 똑똑한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어.’강남복이 이렇게 쉽게 남씨 가문의 모든 재산을 차지한 것도 다 엄수인이 뒤에서 도와줬기 때문이다.태경은 사랑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병원에 무슨 일 생겼어?”사랑은 화를 참으면서 태경에게 화풀이를 하지 않았다.“아니에요.”태경은 여전히 사랑을 챙겨주고 싶었다. 동정이 아니라, 그동안 함께 지내면서 사랑이 홀로 C시에 와서 학업을 마치고, 일자리를 찾는 게 확실히 쉽지 않다고 느꼈다.‘강 비서는 원래 N시의 사람인 것 같은데. 강 비서 어머니도 N시의 사람이었지.’C시에 배경도, 가족도 없었으니, 한 걸음 한 걸음 무척 힘들게 나아갔다.태경은 사랑을 그윽하게 쳐다보았다.“도움이 필요하면 나한테 솔직히 말해.”사랑도 사양하지 않았다.“알았어요.”사랑은 눈을 들어 태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엄수인과 맞설 때, 내가 이긴 적이 없는 건 아니야. 엄수인은 심태경을 자신의 사위로 삼고 싶어 할 텐데.’심씨 가문은 강씨 가문과는 달리 명실상부한 명문가였다. 태경의 아버지는 정치인이었고, 작은아버지도 권세가 높은
태경은 들으면서 기분이 매우 언짢았다. ‘난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을 많이 하면, 내가 엄청 신경 쓰이는 것 같잖아.’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차가운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그때 가도 정말 이렇게 소탈하게 생각할 수 있길 바라.”태경은 남자를 잘못 만나 고생한 여자들을 많이 보아왔다.그에게는 멍청한 사촌 여동생이 있었다. 재벌가의 아가씨였던 그녀는 가난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몇 년 동안 끈질기게 매달린 끝에 겨우 그 남자를 손에 넣었고, 각 방면으로 잘 챙겨주었지만, 결국 그 남자는 사촌 여동생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돈을 충분히 모은 후에 그녀를 차버렸다.사촌 여동생은 울면서 태경을 찾아와 애원했다. 이를 갈며 그 남자에게 평생 잊지 못할 교훈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태경은 그녀의 부탁에 짜증이 났지만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남자를 어떻게 하기도 전에, 사촌 여동생은 마음이 약해져 얼른 멈추라고 했다.당시 태경은 무척 냉담하게 물었다.“대체 어쩌자는 거야?”사촌 여동생은 울면서 말했다. “이렇게 맞는 것을 보니까, 내 마음이 아프단 말이에요.”태경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마음이 왜 아파?”만약 자신의 아내가 이렇게 그를 대한다면, 태경은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날 놀리고, 내 감정을 짓밟는다면, 죽어도 싸지.’태경의 사촌 여동생도 그리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당하면 반드시 갚아줘야 했고, 속도 좁아서 의심이 많았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남에게 거의 당한 적이 없던 재벌 집 아가씨가 남자에게 버림받는 것을 참을 수 있었다니.정신을 차리자, 태경은 사랑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그럴게요.”태경은 사랑과 오랫동안 함께 일하면서, 나름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부드럽지만 자존심이 있었고, 강경하지만 상대방으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항상 약속을 잘 지켰다.그러나 태경은 여전히 사랑을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그때 가서 돈도 낭비하고, 시간도 낭비했지만 괜히 마음
이혼을 하든 말든 사랑은 상관없었다. 지금 이혼하나, 2년 후에 이혼하나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 같았다.물론 그렇게 되면 사랑은 다른 방법을 찾아 남청연의 병원비를 벌어야 했다. 다른 모든 것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을 터였다.사랑은 곰곰이 생각한 끝에, 태경에게 사실대로 말했다.“만약 이혼을 원하신다면, 전 상관없어요.”그녀는 언제든 계약을 앞당겨 종료하는 것에 협조할 수 있었다. 태경이 계약서의 규정에 따라 상응하는 위약금을 배상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사랑은 자신이 말을 마치고 난 후, 태경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진 것을 발견했다.태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은 무척 차가웠다.태경의 변덕스러운 기분을 줄곧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던 사랑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완곡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물론, 앞당겨 종료한다면, 나에도 배상금이 있는 거 맞죠?”사랑은 행여나 태경이 화가 나서 약속을 번복할 봐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이제야 태경이 왜 감정이 없는 거래를 하기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확실히 간단하고 편리했다. 앞으로도 번거로움이 없을 것이고, 그저 충분한 돈만 있으면 된다.태경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랑을 쳐다보더니 냉소를 지었다.“강 비서, 나한테서 배상금을 충분히 받지 못한 거야?”이 말이 나온 순간, 사랑은 가슴이 아팠다. 정말 각박하고 매정한 남자였다.태경은 인정사정 없이 말했고, 사랑은 시간이 좀 걸려서야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좀 초라해 보였는데, 생각해 보면 태경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난 이미 심태경에게서 적지 않은 배상금을 받은 것 같아. 아이를 지우면서, 천만 원 넘은 돈을 받았잖아.’사랑은 마음이 이미 마비되어 더 이상 통증을 느끼지 못했지만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사람은 욕심이 많은 법이죠. 돈이 많다고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태경은 손으로 사랑의 턱을 잡으며, 좁고 긴 눈을 살짝 들어올렸다. 그리고 담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