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0시쯤,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윤성아가 문을 열자 강주환이 그녀를 위해 주문한 풍성한 아침을 배달해주러 온 사람이 보였다. 점심에도 주문한 음식을 받았고 저녁이 되자 남자는 퇴근하자마자 아파트로 찾아왔다!그는 그녀를 데리고 외식한 후, 저녁엔 함께 잠들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전에 없이 조화로웠다.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께 버림받은 윤성아였으나 강주환과 함께 있으며 난생 처음 따듯하게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다.하지만 그날, 결국 고은희가 아파트를 찾아왔다. 초인종이 울리고, 문을 연 윤성아는 고은희를 보자 매우 놀랐다. “왜? 난 여기 오면 안 되는 거니?”고은희는 교양 있는 사모님으로서 막무가내는 아니었다.“여기까지 왔는데 안에서 차라도 한잔 마셔도 될까? 아니면 서서 얘기할까?”윤성아가 옆으로 비켜서자 고은희가 안으로 들어가며 주위를 둘러봤다.“음, 꽤 괜찮네!”거실 소파에 앉은 그녀가 고개를 들어 윤성아를 보며 말했다.“서 있지만 말고 여기와 앉아.”“네.”두 사람은 그렇게 마주 보고 앉게 되었다. 고은희는 쓸데없는 얘기를 하지 않고 바로 10억짜리 수표를 꺼내 그녀의 앞으로 내밀었다.“전에 얘기했었지. 난 내 아들이 밖에서 여자를 만나는 건 간섭하지 않는다고.”“하지만 윤 비서, 이젠 자네가 내 아들과 유미 사이까지 영향 주고 있어. 긴말하지 않겠어. 이 돈 받고 물러나.”며칠 사이 너무나 부드럽게 바뀐 강주환을 떠올리며 윤성아는 돈을 받지 않았다. 둘 사이의 일은 그녀가 결정할 수 없었던 이유도 있다.고은희는 화가 치밀었지만 여전히 품위를 유지하며 차갑게 웃었다.“하긴! 자넨 그저 첩에 불과하니 함부로 헤어질 수도 없겠지. 하지만 이 도시를 떠나 멀리 가버릴 수는 있잖아!”경멸하는 눈빛으로 윤성아를 보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자기 주제를 알아야 해. 자넨.”말을 마치고 그녀는 10억짜리 수표를 다시 거뒀다. 그리고 떠나기 전, 그녀에게 당부했다.“윤 비서, 내 아들에게 내가 이곳에 왔다는 얘기는
강주환이 윤성아를 데려간 지 이제 반달이 거의 되어갔는데 그는 매일 밤 그녀의 아파트에 머물렀다.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고은희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와 결국 집에 돌아갔다.집에 들어서자마자 거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고은희와 일러바치러 온 게 분명해 보이는 송유미가 보였다.원인은 간단했다. 어젯밤이 송유미와 강주환의 약혼 날이었고 약혼식이 끝난 후, 송유미는 그날 밤 그가 곁에 남기를 바랐다.그녀는 그의 여자가 될 준비가 되었으나 강주환이 거절했다. 결국 참지 못한 송유미는 그와 싸우게 되었다. “윤성아 그년 때문이야? 강주환, 너 밖에서 애인이랑 자고 다녀?”앙칼진 목소리에 강주환은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응.”그가 인정했다.“강 씨와 송씨 가문의 혼인은 서로 윈윈인 거래야. 하지만 강씨 집안의 결혼 상대가 오직 너뿐이었던 적은 없어. 내가 원하는 비즈니스 아내는 착하고 이해심 넓은 사람이야.”송유미에게 더 큰 숲을 보라고, 자기 위치를 제대로 알라고 그가 경고하고 있었다.“지금이든 아니면 우리가 결혼한 후이든 상관없어. 겉으로 부부 사이를 유지하는 것 외에 나도 너의 사생활엔 간섭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너도 내 사생활은 간섭하지 말아줘.”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는 명확하게 송유미를 향해 경고했다.“이제 더는 그녀를 괴롭히지 마.”송유미는 강주환이 윤성아의 아파트로 떠나려는 모습을 직접 보게 되었다...“주환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약혼하자마자 유미를 울려버리는 게 어딨어?”고은희가 화가 나서 물었다. 강주환은 싸늘하게 송유미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젯밤에 이미 똑똑히 얘기했을 텐데.”“...”송유미는 울먹거리며 고은희를 바라봤다.“너 유미에게 뭐라 그랬어?”고은희가 유미의 편을 들어주며 언성을 높였다. 강주환을 나무라듯 “얼른 유미에게 잘못했다고 사과해!”라고 말했다.하지만 강주환은 전혀 사과할 생각이 없어 보였고 싸늘한 눈빛으로 송유미를 바라보며 어젯밤에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더 잔인한 단어를 골라
강주환은 송유미를 떼어내며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넌 이제 내 약혼녀야. 그리고 앞으로는 내 아내가 될 거야. 네가 가져야 할 건 빠짐없이 네 것이 될 거야. 돈이든 지위든, 내 아내라는 신분이든. 그리고 넌 아이를 가질 수도 있어. 하지만 그 이상은 바라지 마.”“내가 밖에서 하는 일은 상관하지 말길 바라.”송유미가 눈물을 떨구며 남자를 쳐다봤다.“나한테 정말 이렇게 잔인하게 굴 거야? 주환아, 어떤 여자가 남편이 밖에서 애인에게 돈을 주는 걸 견딜 수 있을까?”그러자 강주환이 차갑게 웃었다. “우리 두 집안은 가문의 이익을 위해 아무런 감정이 없는 혼인을 ‘계약’했어. 그러니 이런 일이 있는 건 정상이 아닐까? 네 아버지만 해도 밖에 여자가 하나만 있는 건 아니잖아.”“...”침묵하던 송유미가 결심한 듯 말했다.“그래, 상관하지 않을 수 있어! 네가 윤 비서와 뭘 하든 괜찮아. 계속 돈을 준다고 해도 괜찮아! 내 명성, 아니, 내 모든 것에 영향 주지만 않는다면.”“하지만..”송유미는 다시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주환아, 난 네 약혼녀야. 지금 바로 날 가져줘. 응?”강주환은 미간을 구겼다.송유미는 확실히 예쁘고 몸매도 좋았다. 그런 그녀가 안기며 안아달라 하는데 약혼까지 한 사이에 그가 거절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하지만 그는 끝내 거절했다!“결혼하고 얘기해. 지금은 관심 없어.”차갑게 뒤돌아서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송유미는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강주환의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얌전히 호텔에 남아 그를 기다렸다.그날 밤, 계약을 맺을 사업 파트너를 만나 많은 술을 마신 강주환이 호텔로 돌아오자 송유미가 그를 맞이했다.“왔어, 주환아?”“응.”“술 많이 마셨네. 해장국 끓여줄까?”로열 스위트룸의 주방으로 걸어 들어가며 송유미가 말했다.강주환이 소파에 앉아 약간 불그레한 눈빛으로 송유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윤성아를 떠올렸다. 여리지만 굴곡진 몸매를 가진 그녀. 그녀는 해장국을
기억 속의 소녀가 미소를 짓는다. “나엽...”하지만 현실은 윤성아가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나엽을 바라보며 그를 향해 물었다.“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요?”퍼뜩 정신을 차린 나엽. 그때의 소녀는 이미 생을 마감했다. 아무리 닮았다고 한들 윤성아는 수백 년 전통을 자랑하는 영주시 안씨 가문의 큰 딸 안효연일 수가 없었다!“당연하죠.”나엽은 윤성아를 감독에게 보여줬고 얼굴이나 분위기가 모두 예상을 뛰어넘게 광고의 여주인공과 어울렸던 그녀를 보며 감독은 마치 보물을 줍기라도 한 듯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되고말고! 나엽아, 너 어디서 이렇게 딱 맞는 캐릭터를 찾은 거야? 이전 여주인공보다 더 찰떡인 것 같아. 내가 장담하는데 광고가 출시되면 옆모습이랑 뒷모습뿐일지라도 네 친구는 바로 데뷔하는 거야!”나엽이 미소 지었다. 그는 부드럽고 많이 아끼는 듯한 눈빛으로 윤성아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감독님, 그런 말씀 하시면 성아 씨 놀라요. 그냥 도와주러 왔을 뿐이라 연예계 데뷔할 생각은 없어요.”“그건 참 안타까운 소식이네.”감독은 진심으로 아까웠다. 촬영 시간이 되자 모든 것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하지만 촬영이 끝나고 윤성아가 옷을 갈아입으러 갈 때 사고가 나버렸다! 현장의 배경에 세워놓았던 기둥 하나가 기울기 시작했다...“조심하세요!”나엽이 발견하고 얼른 외쳤다. 그리고 모든 것을 제쳐두고 윤성아를 향해 다려갔으나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다.“쿵!”윤성아는 기둥을 살짝 피했지만 모서리에 부딪히게 되었다. 몇십센티 의 기둥에 어깨가 부딪친 그녀는 바닥으로 털썩 넘어지며 이마 부위가 콘크리트 바닥을 크게 찧었다.신속하게 그녀의 옆으로 달려 온 나엽이 기둥을 옮기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성아 씨, 괜찮아요?”윤성아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거 같았고 머리가 아주 무거웠다. “괜찮아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기절해 버렸다. “성아 씨! 윤성아!”많이 놀란 나엽이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중얼거렸다. “괜찮을
윤성아는 화들짝 놀라며 자기 귀를 의심했다.창밖의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을 바라보며 나엽은 말을 이었다. “연회장에서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예전에 제가 알던 여자랑 엄청나게 닮았다고 한 건 사실이에요. 당신은 정말 그녀를 닮았어요. 성아 씨, 어쩌면 제가 성아 씨를 좋아하는 마음이 완전무결하진 않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내 여자친구가 되길 바라는 마음만큼은 확신할 수 있어요. 전 성아 씨를 지켜 주고 싶어요!”하지만 윤성아는 거절했다.“전 누군가를 대신하고 싶진 않아요. 그리고 저와 나엽 씨는 이어질 가능성이 없어요.”그 말을 마친 윤성아가 차갑게 웃었다. 그리고 자신을 경멸하는 듯한 표정으로 무덤덤하게 말했다.“인터넷에 폭로된 거 다 사실이에요. 저 그런 여자 맞아요.”나엽이 미간을 구겼다. 그의 호흡이 약간 거칠어졌다. “전 상관 하지 않아요! 성아 씨, 당신의 과거, 신경 쓰지 않는다고요.”그는 정말 모든 것을 눈 감아줄 수 있었다.윤성아가 그의 삶에서 가장 소중했었으나 이미 놓쳐 버린 그 여자를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생김새뿐만 아니라 그에게 주는 느낌 마저 닮아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끌렸고 그녀가 안타까워졌으며 자꾸 신경이 쓰였다...그녀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그녀를 지켜 주고 싶었다.“당신이 내 여자친구가 되어 줄 수 있다면 지금 바로 당신이 혐오하는 그 생활에서 멀어질 수 있게 도와줄게요. 얘기했잖아요 제가 지켜 줄 거라고.”“그럴 수 없어요. 나엽 씨, 저와 나엽 씨는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이에요.”그녀는 크게 심호흡하더니 담담하고 거리가 느껴지는 어조로 말했다.“나엽 씨, 이번 사건은 될수록 빨리 해결하길 바라요! 모든 것을 해명해 주세요. 저 때문에 당신과 당신 가족이 영향 받지 말길 바라요.”“... 알겠어요.”나엽이 허락했다. 그는 핸드폰을 꽉 움켜쥐며 윤성아에게 약속 하듯이 말했다.“지금 바로 모든 것을 밝히겠어요. 더는 성아 씨 귀찮게 하는 일 없게
그녀는 다시 회사로 돌아가는 대신 양신우를 만나러 병원에 갔다.그날 밤, 퇴근 후 아파트에 온 강주환이 밤 열 시 까지 기다렸으나 윤성아는 돌아오지 않았다.그의 표정이 아주 어두웠다. ‘빌어먹을. 아직도 돌아오지 않네. 설마 나엽의 그 몇 마디에 감동해서 정말 사귀는 건가?’열 한시!역시나 윤성아는 돌아오지 않았다.‘젠장! 열 한시야. 설마 둘이 자는 건 아니겠지?’강주환은 이미 인내심이 바닥난 상태였다.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문 앞으로 다가간 그는 직접 그녀를 찾을 생각으로 문을 벌컥 열었다.그때 마침 지문을 입력하려던 여자와 마주치게 되었다.윤성아가 멍하니 무서운 빛을 내뿜는 강주환의 눈을 바라봤다.“나엽이랑 어딜 간 거야? 왜 이 시간이 돼서야 돌아와?”분노로 가득한 그가 여자의 턱을 움켜쥐었다.“말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어? 키스? 아니면 섹스?”화가 치민 윤성아가 강주환을 밀어냈다. 그리고 싸늘하게 한마디 했다.“믿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요. 난 동생 보러 갔어요. 나엽이 아니라. 지금 피곤해요.”그녀는 말싸움할 힘이 없었다. 그대로 남자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열 한시가 넘었으니 그저 씻고 누워서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하지만 강주환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나엽의 여자친구가 되기로 한 거야? 정말 널 건드리지 않았어?”“아뇨. 그리고 건드린 적 없어요.”그를 마주하는 그녀의 눈동자는 당당하고 맑았다. 하지만 여전히 다소 고집스러웠다.“그래. 난 너를 믿어.”남자의 분노는 다시 사그라들었다. 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며칠간 출장 갔었고 또 송유미를 상대하느라 오랫동안 윤성아를 만질 수 없었다.그녀의 향기가 너무나 그리웠다. 조용한 밤, 창가의 커튼이 가벼운 바람에 나부꼈다.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키스를 퍼부으며 강주환은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싫어요.”윤성아가 거절하며 그를 밀어냈다.“정말 싫다고요.”진심이었다.그녀는 지금
고요하던 밤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잔뜩 꼈다. 약간 텁텁하던 공기가 차갑게 바뀌며 거센 바람이 불었다. “우르릉!”천둥소리가 울렸고 곧이어 검은 하늘을 두 동강 내듯이 번개가 번쩍여 하늘이 대낮처럼 밝아졌다가 다시 어둠으로 돌아갔다.방 안.남자의 난폭함을 당해낼 수 없었던 윤성아는 결국 그의 몸 아래에 깔리게 되었다.그가 그녀를 탐하는 모든 순간, 그녀는 견딜 수 없이 괴롭고 싫었다.처음엔 힘을 써서 버둥거리며 반항하다가 나중엔 마치 이미 죽어버린 시체처럼, 영혼 없는 인형처럼 아득하게 깊고 허무한 눈빛을 한 채 가만히 누워있었다.그녀의 몸이 떨려왔다. 시체처럼 누워있는 순간마저도 온몸의 세포가 강주환을 거절하고 있었다.“날 봐!”그가 그녀의 턱을 꽉 붙잡아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그녀의 얼굴을 돌려 억지로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눈을 감아버렸다.모욕적이고 역겨웠다.그녀는 진심으로 남자가 더럽게 느껴졌다. 송유미와 섹스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그녀를 건드리다니. 그것도 이런 식으로!역겨움이 몰려왔다.“웁...”윤성아가 참지 못하고 헛구역질했다. 머리가 굉장히 어지러웠고 몸 곳곳이 아픈 것 같았다.마치 심장과 폐를 토해낼 듯한 헛구역질이 이어졌고 나중엔 눈물까지 나왔다.결국 한껏 굳은 얼굴로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강주환은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그가 너무 세게 문을 닫는 바람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게 되었다.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고 구역질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 지나서야 차츰 증세가 가라앉았다.자리에서 일어나 욕실에 간 윤성아는 샤워기를 틀었다. 따듯한 물이 정수리에 떨어졌다. 스르륵 주저앉아 두 팔로 자기 무릎을 끌어안은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려왔다.너무 오래 주저앉은 탓에 다시 일어날 때 다리가 저렸다. 깨끗하게 씻고 나서 그녀는 널찍한 샤워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슬리퍼를 끌며 발코니로 걸어왔다.깜깜한 어둠 속, 거센 바람의 소리가 윙윙 울렸다. 그녀는 발코니에 서서
“동생은 꼭 구할게요.”“그래야지!”윤정월은 그렇게 한마디 하곤 윤성아를 보지도 않고 바로 병실로 들어가 버렸다. 윤성아가 따라 들어가자 그녀를 본 양신우는 활짝 웃으며 “누나!”하고 불렀다.“응.”부드럽게 웃으며 윤성아가 대꾸했다.“네가 좋아하던 성수 가로수길 빵집에 들러서 사 오려고 했는데 까먹었어. 누나가 다음번엔 꼭 기억하고 사 올게.”“네!”양우신은 윤성아가 빵을 사 오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누나가 병원에 와서 그와 함께해준다는 사실이 기뻤다.둘은 어려서부터 사이가 아주 좋았다. 그래서 양신우가 있을 때 윤정월이 성아를 대하는 태도가 한결 누그러졌다.저녁 무렵, 윤성아가 떠날 때 윤정월이 그녀를 바래다주며 차갑게 말했다.“수술비 6억은 어떻게 해서든 마련해. 돈이 준비되면 적합한 심장이 나타났을 때 바로 네 동생 수술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며칠 사이 검진 비용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들었다. 난 이미 빚을 졌어. 너 이따가 입원 병동에 가서 요금 납부하고 와. 여유가 있으면 먼저 4천만 원 보내줘.”윤성아가 놀라며 물었다.“엄마, 4천만 원은 왜 필요해요?”그러자 윤정월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네 동생이 아픈데 좀 좋은 걸 먹어야 하지 않겠어? 그리고 나는? 나도 산 사람인데 먹고 살아야지? 게다가 네 아버지가 죽고 나서 아직도 빚을 다 갚지 못했어. 네 큰 이모네한테 빚진 3천만 원을 몇 년째 못 갚고 있어.”“네 큰이모부한테 일이 좀 생긴 모양이야. 큰이모도 어쩔 수 없어 날 찾아와 돈을 먼저 갚을 수 없냐고 묻더라.”윤정월은 팔짱을 끼고 싸늘하게 윤성아를 향해 물었다.“어차피 너 그 남자한테서 돈 받을 수 있잖아. 안 그래?”“...”윤성아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음날.회사로 출근한 윤성아는 어젯밤 남자의 심기를 건드린데다 끝내자고, 이제 돈이 필요 없다고 얘기했던 터라 그에게 돈 얘기를 꺼낼 수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재무부에 가서 월급을 미리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했다.
남서훈은 싱긋 웃었다.아직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맥으로 정확히 짚어 낼 순 없었지만 느낌은...“아마 남동생일 거야.”“아... 남동생...”양나나는 눈을 굴리더니 남서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남동생도 좋은 것 같아요. 동생 태어나면 저랑 엄마가 동생한테 의술도 가르쳐주고 아빠랑 사업하는 것도 배우고요. 그리고 남자애는 너무 응석 받아줄 필요도 없고 내가 맘껏 부려 먹을 수 있잖아요.”자기 뒤꽁무니를 쫄랑쫄랑 따라다니며 누나, 누나 하고 부르는 장면을 상상하니 양나나는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어떻게 생긴 남동생이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날까, 양나나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그러나 남서훈이 임신 다섯 달째로 접어드는 어느 날, 양나나는 실종됐다.양준회와 남서훈은 매일 안절부절못하여 속이 타들어 갔다.둘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세력을 동원해 전 세계 각 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여전히 양나나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양나나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그때 양나나는 이미 8살이었다.남서훈은 딸을 찾지 못해 날마다 눈물로 얼굴을 적셨다. 그녀는 점점 야위어갔다.그걸 보는 양준회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는 아내를 꼭 끌어안고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나는 똑똑한 아이야. 당신이 의술과 독 쓰는 법도 잘 가르쳐줬으니까 별일 없을 거야. 나나는 너와 내가 낳은 딸이야. 전에 풍운파에 혼자 몰래 들어가서도 그 안을 마구 헤집고 다녔잖아.”아무튼 그는 양나나가 어디에 가서 어떠한 상황에 부딪히던 자신을 잘 보호할 거라고, 아무 일 없이 잘 살아 있을 거라고 남서훈을 위로했다.남서훈도 굳게 믿고 있었다. 양나나의 시체를 보게 되지 않는 한 그들의 딸은 세상 어딘가에 꼭 살아있을 거라고.그 후 넉 달이 지났다. 9달이 된 배는 불룩하게 튀어나왔다.양나나는 아직도 찾지 못했고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그러다 남서훈은 아들을 낳았다. 강보에 싸여 품에 안겨있는 아들을 보며 남서훈은 양나나를 그리워했다.“나나야,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네 뒤꽁무
그리고 바로 그날 오후.양준회와 남서훈, 그리고 백나연과 성진훤, 이렇게 네 사람은 백무산을 찾아갔다.그를 만나자마자 양준회와 성진훤은 백무산한테 사과부터 했다.어리둥절한 백무산은 그들이 왜 갑자기 찾아와서 사과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 후 양준회는 남서훈의 어깨를 와락 감싸안았고 성진훤도 보란 듯이 백나연의 손을 꼭 잡았다. 성진훤은 원래 양준회처럼 백나연을 확 끌어안고 싶었지만 미래 장인어른이 될 사람 앞이라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손만 잡았다.백무산은 더 혼란스럽고 얼떨떨해졌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그는 눈알이 튀어져 나올 듯하게 그들 넷을 번갈아 쳐다봤다.그때 양준회가 입을 열었다.“어르신, 우리 서훈이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입니다. 남씨 집안의 특수한 사정으로 어릴 때부터 남장을 했던 것이고, 백나연 씨와의 혼약도 그저 소동극이었습니다. 이 일은 서훈이한테 책임 묻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노여움이 있으시면 저한테 푸세요.”그 말에 백무산은 눈살을 찌푸렸다.남서훈이 여자라니... 어떻게 그런 일이?여자가 그의 딸과 약혼했다니,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었다.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인가.백무산은 불같이 화를 냈다.그러자 백나연이 나섰다.“아빠, 이 일은 서훈이 탓이 아니에요, 제가, 제가 꼭 도와달라고 했어요.”“뭐야? 널 도와줘?”“네.”백나연이 설명했다,“아빠랑 오빠가 자꾸 소개팅 주선하는 바람에 제가 너무 골치 아파서 서훈이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나랑 약혼하자고. 그럼 아빠랑 오빠가 나한테 선 자리를 더는 강요 안 할 거 아니에요. 서훈이는 싫다고 했는데 내가 억지 써서 해주기로 한 거예요.”백나연은 자기 잘못이라고 매우 강조했다.그녀의 눈빛에 아픔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전 그때 결혼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리고 저랑 서훈이는 서로 약속했어요. 누가 먼저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되든, 그때 되면 파혼하기로요. 절대 서로의 앞날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어요. 이제
그 순간 용준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은 그칠 줄을 모르고 펑펑 쏟아졌다.이게 얼마 만인가.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고 싶은 생각을 항상 했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는 오늘 끝내 그녀를 안을 수 있었다. 팔을 뻗어 그녀를 껴안고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파묻은 채 용준은 또 한참을 울었다.예서는 그가 평생 사랑한 유일한 여자였다.그는 품속에 있는 그녀를 부드럽고 진실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난 네가 고마워. 넌 너무 용감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용감해. 옛날 일은 이미 다 지나갔어. 넌 이것만 기억해. 난 널 사랑하고, 네가 있어야만 내가 살 수 있어. 네가 있으니까 내가 괴물로 변하지 않은 거야. 아니면 난 모든 걸 다 망가뜨렸을 거야. 스스로도 혐오하는 그런 나쁜 인간으로 돼버렸을 거야.”예서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도 알고 있었다. 남자가 하려는 말이 뭔지 그녀는 모두 알고 있었다.이날, 둘은 아주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다.예서는 더는 용준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용준이 있으므로 하여 그녀는 더 빨리 회복될 것이었다.그렇게 예서가 하루하루 나아지고 있을 때. 남서훈과 양나나는 한 번 나가 돌아다니기로 했다.한 거리의 상가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남자애 몇 명이 갑자기 튀어나와 양나나를 에워쌌다.그들은 매우 들뜬 소리로 말했다.“대장! 살아 있었어요?”“너무 잘 됐어요!”“대장, 대장을 그 사람들이 데려간 후로 우린 계속 대장의 소식을 기다렸어요. 대장도 그 애들처럼 상처투성이가 돼서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고요.”“지금은 어떤 상황이에요? 대장이 후계자가 된 거예요?”양나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 라고 대답했다.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남자애들한테 말했다.“난 후계자 되는 것에 관심 없어. 풍운파에 지금 남아있는 건 의술을 배우기 위해서야.”양나나는 시선을 남서훈한테 향하며 그들한테 남서훈을 소개했다.“이분이 내 스승님이야, 우리 스승님 엄청 대단해!”그날, 양나나는 그
지난 날에 발생한 그 끔찍한 과거를 스스로 입에 올리는 용준은 피가 흘러나올 듯이 눈이 시뻘겋게 물들었고 감정이 폭발할 한계치까지 다다랐다.그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몇 분 후에야 그는 비로소 다시 입을 열었다.“그놈들은 죄다 죽여버려야 할 놈들이에요. 예서가 이쁘니까, 내 앞에서 예서를... 그때 예서는 이미 내 아이를 임신했는데...”용준의 온몸에서 난폭한 기운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돌아서서 주먹으로 나무를 세게 한 방 내리쳤다. 그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그 큰 나무가 흔들릴 정도면 얼마나 센 펀치를 날렸는지 알 수 있었다.그의 손마디도 살이 찢겨나가 새빨간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감각을 느낄 수 없는 사람처럼 상처에 무덤덤했다. 아마도 손보다 마음이 더 아팠을 터였다.용준은 그때 일만 생각하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심장이 뜯겨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예서가 피투성이가 된 채 텅 빈 눈으로 누더기 인형처럼 맥없이 쓰러져서 누워있던 참혹한 장면만 머릿속에 떠올리면 그놈들을 무참하게 도륙을 내고 싶었다.그리고 그는 그렇게 하였다.풍운파의 보스가 된 후 첫 번째로 한 일이 바로 예서의 복수를 하는 것이었다.그놈들의 범죄증거를 전부 찾아내 한 명도 빠짐없이 직접 처단했다.그때 그들은 무릎을 꿇고 울며불며 용서를 빌었다. 막다른 길에 몰려 살려고 해도 안 되고 죽으려고 해도 죽지 못할 때, 그들은 찌질이같이 눈물 콧물을 쥐어짜며 애원했다. 제발 살려달라고, 잘못했다고.정작 그들은 용준이나 예서한테 그런 자비를 베푼 적이 없는데 말이다.용준의 목소리는 점점 차가워졌다.“그것들이 나와 예서의 모든 것을 망치고 날 시궁창에 몰아넣었죠. 여전히 난 이렇게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생지옥에서 살고 있어요. 그것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해요!”그러나 그놈들이 죽는다고 해서 상처가 아무는 것은 아니었다.용준은 피로 물든 주먹을 으스러지게 잡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들은 예서가 그들이 한
용준은 원래 정직한 사람이었고, 금호의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그는 어둠이 없는 밝은 햇빛 아래에서 사는 반듯한 사람이었다.그러나 일부 국제조직에서는 용준을 불안하게 여겼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심지어 그가 의심되어 오랫동안 그에게 전자발찌를 채웠다.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는 범죄자 취급을 당했고, 그리하여 생활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더더욱 생각지도 못한 건, 그 당시 그와 깊은 사랑에 빠져있었던 여자친구마저 누구한테 몹쓸 짓을 당하게 된 것이다.그러므로 용준이 점점 나쁘게 변하여 나중에 어떤 일을 저지르게 되었던, 모두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요 몇 년 동안 풍운파는 용준의 관리하에 동남아에서 제일 큰 폭력조직으로 성장하였고, 닥치는 대로 무슨 일이나 다 저지르는 편이었지만 딱 한 가지 철칙이 있었다. 그건 바로 노약자와 여자, 아이들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거였다.의리도 지켰다.하지만...“그건 중요하지 않아요.”남서훈이 말했다.“이 세상은 원래 흑과 백으로 나뉘는 게 아니니깐요. 동남아는 원래 상황이 어수선하잖아요. 무장세력과 폭력조직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일시적으로 바꿀 수도 없어요. 오히려 풍운파와 같은 조직이 있다는 게 더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양준회가 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어떤 측면으로 보면 용준은 꽤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둘은 원수지간이다. 양준회가 그의 아버지를 죽였다. 비록 지금까지는 아무 짓을 안 했어도, 또 그가 원래 정직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풍운파를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다스린 용준이 지금은 어떤 사람인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그리하여 양준회는 안심할 수 없었다. 여전히 남서훈과 같이 풍운파를 즉시 떠나려고 했다.“하지만 나나도 여기 있어요.”남서훈이 예상치도 못한 폭탄을 터트렸다. 양준회는 깜짝 놀랐다.양나나가 여기에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그는 바로 말했다.“그럼 나나도 같이 떠나면 돼.”갇힌 두 달
강하영이 부케를 내던지는 일순간 우양주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부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공중에서 부케를 잽싸게 낚아채는 그의 모습이 정지화면인 양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부케를 손에 쥔 그다음 순간, 그는 부케와 함께 바다에 떨어졌다.모두가 경악했다.강하영은 크루즈 난간 쪽으로 달려가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남자를 보며 입을 떡 벌리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선원들이 즉시 튜브를 던졌고, 또 어떤 사람들은 즉시 뛰어내려 구조하려 했지만 강주환이 그들을 말렸다.왜 구하지 말라는 건지 이해 안 된다는 듯한 눈빛으로 윤성아는 강주환을 쳐다봤다.그러다 팔로 물살을 가르며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우양주가 크루즈 위에 있는 강하영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는 걸 듣고 왜 그러는지 알 것만 같았다.“여보, 어쨌든 내가 부케 받았으니까 당신 나랑 결혼식 치러야 돼요! 안 그러면...”그 뒤엔 위협적인 말이 따라야 하는데 우양주도 무엇으로 강하영을 협박할 수 있을지 몰랐다. 남은 건 자신의 이 몸뚱이 하나뿐인데...“안 그러면 나 안 올라갈 거야. 여기 바다에 계속 있을 거야, 결혼식도 못 하는데 그냥 빠져 죽지 뭐.”강하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바다에 빠진 남자를 까만 눈동자로 차분하게 내려다보며 끝내 입을 열었다.“빠져 죽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안 말려요.”“...”우양주는 서럽게 그녀를 쳐다봤다.역시나 아내는 매정했고 자신에 대해 애정이 없었다.그러나 그때 윤성아 곁에 서있는 강주환이 무덤덤하게 한마디 했다.“내 기억이 맞다면, 이 바다에 상어가 출몰한다고 했어요. 식인 상어.”강주환은 고개를 돌려 강하영한테 말했다. “지금 아직 상어가 오지 않아서 그렇지, 나타나기만 하면 한꺼번에 열 몇 마리씩 무리 지어서 나올 거예요. 그게 게네들 습성이라. 이야... 쟨 아마 그러면 뼛조각도 남지 않겠네.”“...”그 말에 강하영이 급해 났다. 말투도 전처럼 차분하고 담담하지 않았다.난간에 기대어 우양주를 향해 내리 소리 질렀다.“뭐
미리 준비한 축사를 울먹이며 끝까지 다 읽고는 원이림을 향해 볼멘소리를 했다.“너 이 놈 자식, 내가 죽을 때까지 네가 결혼하는 걸 못 보는 줄 알았다. 아이고... 드디어 결혼하는구나. 너도 이제 가정이 생겼어.”“너 똑바로 들어. 은진이한테 평생 잘 해줘야 돼, 아내한테 잘 하는 건 우리 집안 내력이야. 나도 네 엄마 말을 엄청 잘 들었어. 너도 똑같아, 알겠니? 오늘부터는 은진이한테 더 잘해야 돼, 말도 잘 듣고, 은진이부터 생각하고 배려해 주고. 은진이가 조금이라도 맘고생을 하게 되는 날엔 내가 너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알겠어?!”원이림은 새카만 눈동자로 여은진을 깊게, 애틋하게 들여다보며 그녀와 깍지를 낀 두 손에 힘을 더 주었다.“걱정 마세요. 난 평생 우리 여보 맘고생 안 시킬 거예요.”여보라는 호칭이 지금 이 시각부터 명실상부하게 되었다.원이림은 그녀의 손을 잡고 크루즈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그리고 미리 준비된 데이지 꽃을 바다로 뿌렸다. 하얀 꽃잎들이 파도에 실려 멀리 떠내려갔다.둘은 거기에 선 채 눈물을 머금고 울먹이며 말했다.“어머니, 아버지. 저 너무 행복해요. 우리 너무 행복해요.”결혼식의 마지막을 장식할 부케 토스하는 시간이 다가왔다.강주환과 윤성아, 그리고 나엽과 안효연은 모두 기혼자로서 나가지 않고 구경만 했다. 하객 중에 미혼인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다.우양주도 강하영의 손을 잡고 그리로 향했다.강하영은 몸을 뒤로 빼면서 말했다.“우린 결혼했는데 왜 부케를 받으러 가요? 다른 사람한테 갈 좋은 축복을 왜 우리끼리 받겠다고 달려들어요, 쓸데없이. 그렇게 할 일 없고 힘이 남아돌면 내가 다른 일 하게 해 줄게요.”“무슨 일?”강하영은 푸른 바다를 향해 눈을 힐끔 하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당신 수영 좋아하잖아요. 내가 엉덩이 확 걷어찰 테니까 바다로 들어가서 수영이나 할래요?”“...”저번에 강하영과 같이 수영하면서 그녀가 자신한테 새빨간 수영팬티를 사줘 창피를 당하고 나서부터 우양주는 수영하는
여은진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예쁘게 미소 지었다.“나 다 알아요.”지난 1년 동안 그가 어떻게 해왔는지 잘 아는 그녀는 더 이상의 맹세와 언약 같은 건 필요 없었다.“응!”여은진을 안은 채로 원이림은 그녀의 여린 입술에 쪽쪽거리며 뽀뽀를 했다.장내의 플래시 세례가 정신없이 터지는 가운데 그는 돌아서서 무대 아래에 앉아있는 모든 사람한테 당찬 목소리로 선포했다.“오늘 저의 이 행복한 순간을 지켜본 여기 계신 모든 증인 분들한테 제가 선물을 준비할 생각입니다. 나중에 저희 베린 그룹에 가셔서 선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달 20일에 저와 은진이의 결혼식이 있을 예정이니 여러분들께서 모두 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여은진을 안고 시상대를 내려가려 했다.여은진이 내려달라고 했지만 그는 내려놓지 않았다. 그렇게 안은 채로 시상식장을 걸어 나와 차에 올라탔다.럭셔리한 롤스로이스가 천천히 내달리고 있었다.여은진은 아직도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있었다.“이번 달 20일에 결혼한다고요? 그럼 열흘밖에 안 남았는데, 너무 촉박하지 않아요?”그녀가 눈을 들어 바라보며 물었다.“아니, 전혀.”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떨구며 원이림이 말했다.“시간이 모자라지만 않았으면 내일에라도 당장 결혼식 치르고 싶어.”반년이 넘는 동안, 그는 매일 결혼식에 관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결혼반지, 웨딩드레스, 그리고 결혼에 필요한 모든 물품과 디테일한 사항들을 전부 준비하고 체크했다. 그녀가 결혼을 동의하는 그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그리고 그 순간이 끝내 다가왔다.웨딩사진을 찍는 것 외에는 크게 시간을 들일 일도 없었다.다만 여은진이 임신했기 때문에 너무 빠듯하게 스케줄을 잡지 않고 싶었을 뿐이다.결혼식에 참석할 하객을 초대하는 일도 있긴 하지만 10일이면 충분했다.촉박하지 않을뿐더러 시간적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여보, 우리 지금 바로 혼인신고 하러 가.”원이림은 한시라도 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기사한테 얘기하여 구청으로 가자
원이림은 금방 샤워를 마친 여은진한테로 다가가 그녀의 팔을 끌어당겨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다음에는 당연히 침대로 향했다.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수순을 밟아갔다.한창 격렬해지려던 찰나, 원이림은 짧게 비명을 질렀다. 크게 지르진 않았다. 본능적으로 소리를 내질렀지만 그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여은진이 알아차리지도 못한 새에 살에 푹 찔린 그 가는 물건을 빼내야겠다고 머릿속으로 빨리 반응했다.하지만 역시 늦었다.여은진이 몸을 일으켜 스탠드를 켰고, 어두웠던 방안은 환한 빛으로 채워졌다.이어 급히 그를 살피던 여은진은 원이림의 엉덩이에 바늘이 하나 꽂혀있는 걸 발견했다.짧고 가는 옷을 꿰맬 때 쓰는 그런 바늘이었다.여은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남자를 보며 물었다.“어떻게 바늘에 찔릴 수 있어요? 침대에 왜 바늘이...”“...”꽂힌 바늘을 빼며 원이림은 이야기를 얼버무렸다.“괜찮아, 그냥 바늘인데 뭐. 별로 아프지도 않아.”그러고는 또 다짜고짜 몸을 뒤집으며 여은진을 몸 아래로 깔았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손을 뻗어 스탠드를 끄고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탐했다. 잠깐 벌어진 에피소드를 그녀의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진행 중이었던 일을 마무리하려는 의지였다.하지만 여은진은 그의 키스를 받아내면서도 오후 그의 당황스러운 표정과 난데없이 침대에 나타난 바늘을 함께 떠올렸다. 정신을 쏙 빼놓으려는 지금의 행동도 분명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잠깐만.”여은진은 원이림을 밀어내고 다시 한번 스탠드를 켰다.의심이 부풀어 오른 눈으로 빤히 그를 노려봤다. “똑바로 말해요. 아까 그 바늘로 수작 부린 거 맞죠? 말해요, 몇 개나 찔렀어요?”“...”끝내는 발각되었다. 원이림은 이실직고했다. 강주환이 원흉이라고, 그가 시켜서 했다고 불었다.“여보, 나 며칠 전에 운봉 비즈니스 회담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강주환을 만났어. 그 자식이 날 비웃는 거야. 그리고 이렇게 하라고 아이디어를 내줬어. 바늘로 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