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저녁 시간.바닷가 별장과 멀지 않은 곳의 항구에는 크루즈 한 척이 세워져 있었다. 이는 나엽의 크루즈였다.강주혜는 윤성아를 데리고 항구에 도착했다. 크루즈 위에서 나엽과 마주친 다음에는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말했다.“미션 컴플리트! 비서 언니를 데려왔어요!”나엽이 말했다.“고마워요.”비록 윤성아는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눈빛에 이미 감격과 감사로 가득했다. 그것을 보아낸 강주혜는 피식 웃었다.“너무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언니. 애초에 이건 오빠가 잘못해서 생긴 일이니까요. 그리고 저는 비서 언니가 진짜 좋아요. 그래서 항상 도와주고 싶었어요.”세 사람은 잠깐 얘기를 나눴다. 그러다가 강주혜가 두 사람을 등 떠밀면서 말했다.“됐어요. 이제 얼른 출발해요.”강주혜는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눈 다음 크루즈를 떠나려고 했다. 그녀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것을 발견한 검은색 그림자는 덩달아 빠르게 움직였다.발걸음 소리를 들은 강주혜가 머리를 돌리자 상대는 쇠 파이프를 들어 그녀의 목덜미를 향해 휘둘렀다. 그녀는 머리에 피를 흩뿌리면서 곧바로 기절해 버렸다. 상대는 살기로 번뜩이는 눈으로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발길질을 퍼부었다.“주제도 모르고 감히 내 딸 앞길을 막아? 오늘 아주 쌍으로 저승에 보내버릴 줄 알아!”강주혜를 습격한 사람은 다름 아닌 오늘 아침에 운성시로 떠나겠다고 했던 윤정월이었다. 그녀는 윤성아의 도망 계획을 완벽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전부 안효주에게 알려줬다.안효주는 윤정월에게 윤성아의 계획에 손을 보태는 척하라고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도망갈 때 타는 배에 함께 타라고 했다. 모두를 죽일 수 있는 타이밍에 불을 지를 수 있도록 말이다.안효주는 윤성아가 죽어야 마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나엽과 자신을 무시하는 강주혜도 죽이고 싶었다.어둠이 내려앉은 밤, 윤정월은 머리에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강주혜를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처박아뒀다. 그리고 계속 숨어서 기회를 기다렸다.2층
윤성아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리고 왼발로 몸을 지탱하면서 다시 통제실로 향했다.거센 바닷바람 속에서 불길은 거침없이 활활 타올랐다. 검은 연기에 숨이 올라오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다행히 밀폐된 공간이 아닌 덕에 어떻게든 견딜 수 있었다.얼마 후 드디어 통제실 앞에 도착한 윤성아는 나엽이 밖으로 나오기 위해 힘껏 금속 문을 잡아당기는 소리를 들었다.나엽은 혹시라도 윤성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되어 자기 몸이 다치는 건 신경 쓰지도 않은 채 문을 부수려고 했다. 뼈가 찌릿찌릿하고 피를 토했는데도 그만두지 않았다. 그가 힘껏 잡아당기던 손잡이는 어느덧 슬슬 덜렁거리기 시작했다.“나엽 씨!”희미한 목소리를 들은 나엽은 곧바로 문틈에 대고 말했다.“성아 씨! 성아 씨에요?”“네!”윤성아는 큰소리로 대답하면서 나엽에게 말했다.“누군가가 저희 방문을 잠그고 불을 질렀어요! 제가 어떻게든 문을 열어볼게요!”윤성아는 주변에 쓸 만한 도구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힘을 다해 자물쇠를 향해 메쳤다.결국 불이 통제실을 삼키기 전에 자물쇠가 툭 떨어졌다. 안에 갇혀 있던 나엽도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나엽은 당장이라도 불에 삼켜질 것 같은 크루즈를 바라보면서 단호하게 말했다.“성아 씨, 우리 바다에 뛰어들어요. 일단 잠깐만요.”나엽은 몸을 돌려 불 속으로 뛰어들더니 아직 타버리지 않은 구명조끼 두 개를 들고 왔다. 그리고 먼저 윤성아에게 입혀주고 자신도 입었다.손을 맞잡은 채로 바다에 뛰어든 두 사람은 마침 높은 파도를 맞게 되었다. 맞잡은 손은 파도의 힘을 이기지 못한 채 풀려버렸지만 높은 파도는 잇따라 밀려왔다.나엽을 구해내느라 오른쪽 다리가 부러질 대로 부러진 윤성아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그래서 정신을 잃은 채 파도에 휘말려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성아 씨!”나엽은 큰 소리로 외치면서 윤성아를 향해 헤엄쳐 가려고 했다. 하지만 또다시 파도가 밀려오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점점 벌어져갔다.크루즈는 이미 불길에
고은희는 황급히 강주환의 앞을 막아섰다.“주환아, 얼른 주혜를 풀어주지 못해? 네 동생이 다친 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거야?”강주환은 고은희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강주혜를 데리고 성큼성큼 멀어져갔다.고은희는 분을 참지 못하고 목덜미를 잡았다. 그러자 안효주가 다가가면서 위로했다.“어머님, 화내지 마세요. 주환 씨도 마음이 급해서 그러죠. 윤 비서가 죽었을 수도 있다는데요.”“흥!”고은희는 콧방귀를 뀌었다.“그년은 그냥 죽어야 해. 그래야 내 아들을 귀찮게 굴지 못하지.”안효주는 고은희를 다독여 주다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문을 닫자마자 윤정월에게 전화를 걸었다.“일은 어떻게 됐어요?”“성공했어!”윤정월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약간의 불안이 섞여 있었다.“네 말대로 셋 다 불에 타죽었을 거야!”“확실해요?”“응!”윤정월은 자신이 어젯밤 한 일을 다시 한번 얘기했다.“문이란 문은 다 잠그고 불을 질렀어. 그리고 강주혜는 정신 잃고 쓰러져 버려서 그대로 타죽었을 거야.”안효주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아침 강주혜가 살아서 돌아왔어요. 조금 전! 내가 있는 이 집으로요!”“뭐?! 어떻게 그럴 수가?!”‘만약 강주혜가 살아 있다면 윤성아와 나엽은? 둘은 방안에 잠겨 있었으니 무조건 죽었겠지?’안효주는 강주혜가 했던 말을 윤정월에게도 알려줬다. 물론 그녀의 말대로 윤성아와 나엽이 죽지 않았을 수도 있다면서 말이다. 만약 윤성아도 강주혜처럼 살아 있다면 진짜 큰일이었다.윤정월은 당황한 말투로 물었다.“그러면 어떡하지? 아무튼 나는 이미 네 말대로 했어! 나는...”“도망갈 때 누구랑 마주치지는 않았죠?”안효주는 표독한 눈빛으로 윤정월의 말머리를 자르면서 말했다.“그럼! 네가 말한 크루즈를 찾은 다음 누구도 몰래 올라탔어. 그리고 계속 숨어 있다가 강주혜를 공격할 때도 뒤에서 다가갔어.”윤정월은 아무도 자신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확인했다.“다행이네요. 요즘은 운성시에 가만히 있어요. 내가 찾아
이날 밤은 천둥 번개가 내리치며 세차게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다음날 오전 10시 즈음이 되어서야 강주환은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옆에 사람이 누워있다는 것을 느꼈다.서서히 고개를 돌려 옆에 누워 곤히 자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그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윤성아였다. 윤성아가 그의 곁으로 돌아와 옆에서 자고 있었던 것이었다. 머릿속에 어젯밤의 기억들이 점차 떠올랐다. 꿈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꿈에서 윤성아가 그의 곁으로 돌아왔고 그는 미친 듯이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점차 그녀가 호흡이 곤란해질 정도로 그녀의 입술을 탐하다가 같이 보냈던 수많은 밤처럼 어제도 같은 밤을 보낸 꿈을 꾸었다.“주환 씨.”잠에서 깬 안효주가 눈을 떴다.강주환이 자신을 그윽한 눈길로 빤히 바라보자 그녀는 발그레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강주환은 바로 미간을 확 찌푸렸다. 그는 단번에 안효주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왜 네가 여기 있는 거지?”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며 말했다.“왜 제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건데요? 주환 씨, 설마 저를 그 죽어버린 여자로 착각한 거예요?”안효주는 강주환에게 말했다.“어젯밤 술집에서 술에 만취한 주환 씨를 집까지 데리고 온 사람은 나예요! 여기는 우리 신혼집이라고요!”그녀는 어젯밤 얼마나 황홀한 시간을 보냈는지 강주환에게 말해줬다. 그리고 이내 몸 곳곳에 남아있는 흔적을 강주환에게 보여주며 그가 어젯밤에 남긴 것이라고 주장했다.하지만 사실은? 그녀의 몸 곳곳에 남겨진 흔적들은 사실 그녀 혼자 만들어 낸 것이었다!강주환이 말했다.“절대 그럴 리 없어!”그는 절대 윤성아 외에 다른 여자를 안을 리가 없었다.“하지만 사실이 눈앞에 있잖아요!”안효주는 강주환을 빤히 보며 애원하는 듯 비굴한 어투로 말했다.“주환 씨, 제발 윤 비서를 잊어요. 네? 우리는 이제 부부잖아요. 게다가 어젯밤도, 우리 아주 행복했잖아요.”안효주는 강주환에게 자신에게도 눈길을 돌려달라
안효주는 침착하게 말했다.“어머님은 혹시 그때 한의사의 치료로 다 완치가 된 거 아닐까요? 그래서 다시 검사했을 때 간암 말기가 아니게 된 게 아닐까요?”강주혜가 바로 반박했다.“지금 또 헛소리하시는 거예요?! 안효주 씨, 몇 달 내내 엄마 곁에 붙어있으면서 병원도 한두 번 같이 간 게 아니잖아요. 심지어 아는 선배 불러오겠다고 했을 땐, 저를 말리기까지 했죠. 하!”강주혜는 차갑게 웃어버리고는 죽일 듯이 안효주를 노려보았다.“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말 몰라요? 정말 우리 모두가 바보로 보여요?!”“...”안효주는 여전히 머리를 굴리며 변명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주환은 이미 일전에 고은희가 쓰러지게 되었을 때 정밀검진하려던 그를 막은 상황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강주혜는 엄청난 분노에 휩싸이게 되었다.“안효주 씨, 그 입에서는 변명만 나오네요? 죽을 때까지 변명만 할 건가요? 오늘 내가 오빠까지 부른 건, 그만큼 충분한 증거가 있어서 이 자리에 부른 거예요. 내가 말했죠, 엄마는 이미 내 선배가 다시 한번 검사했다고. 그리고 엄마는 애초에 암에 걸린 적이 아예 없는 거로 결과가 나왔어요!”강주혜는 이내 검사 결과 자료 뭉텅이를 테이블 위로 던졌다.“이건 방금 나온 우리 엄마의 검사 결과에요!”그리고 그녀는 다시 한번 선배를 언급하며 자랑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선배는 간 치료 분야에서 전문가예요. 선배가 이미 우리 엄마를 자세하게 검사했고, 확실히 우리 엄마 간 쪽에 뭔가가 작은 무언가가 보인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건 그저 작은 염증일 뿐이라고 했죠. 우리 엄마는 아주 건강하시다고요! 병원에 입원할 필요도 없었고 그냥 소염제만 며칠 먹으면 되는 병이었어요!”강주환은 검사 결과를 살펴보았다. 강주혜는 멈추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엄마가 간암 말기 진단을 받게 된 것도 선배가 다 확인해 줬어. 엄마가 병원에 갔을 때 동명이인이었던 환자와 실수로 결과가 바뀐 거래. 그래서 엄마가 간암 말기라는 오진을
안효주는 손을 뻗어 다시 한번 강주환의 바짓자락을 붙잡으며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주환 씨, 우린 이미 결혼식도 했잖아요! 영주시랑 운성시의 모든 가문도 알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에겐 이미 저는 주환 씨 아내라고요. 절 쫓아낼 수 없어요! 주환 씨가 저를 버릴 거라고 해도 버릴 수 없다고요!”강주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곤 강주환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당신이라는 여자는 대체 어쩜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죠? 인제 보니 그냥 꽃뱀이 아니고 쉽게 뗄 수 없는 거머리 같은 사람이었어요?”강주혜는 바로 시선을 돌려 강주환을 보았다.“오빠, 이 거머리 같은 여자를 아무리 떼어내기 힘들다고 해도 반드시 깔끔하게 떼어내야 해! 안 그러면 또다시 역겨운 짓을 할 거야!”안효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강주혜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 듯했고 다시 고은희 앞으로 기어가 통곡하며 말했다.“어머님, 제발 부탁드려요. 저 그동안 어머님 말씀 잘 들었잖아요. 그러니까 한 번만 저 용서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전 그동안 계속 어머님께 효도해 왔어요. 정말로 주환 씨를 사랑한다고요. 이렇게 버려지고 싶지 않아요!”안효주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어있었고 목멘 소리로 말했다.“어머님, 제가 가져온 그 약들은 어머님 건강에 아주 좋은 거예요! 몸보신하는 거라 다른 문제가 전혀 없어요! 정말이에요!”안효주는 계속 말을 이었다.“어머님, 전 안씨 가문의 딸이에요. 저야말로 주환 씨에게 어울리는 결혼 상대라고요. 주환 씨 아내는 저뿐이고, 앞으로 안씨 가문의 모든 것이 다 주환 씨 것이 될 거예요! 게다가 어젯밤에 전 주환 씨랑 같이 있었다고요.”안효주는 일부러 자신의 옷을 잡아당기며 고은희에게 목에 남은 흔적들을 보여주었다.“어머님, 어쩌면 제가 또 주환 씨의 아이를 가졌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제발 부탁드릴게요. 주환 씨 좀 말려주세요. 제발 절 버리지 말라고 말려주세요, 네?”강주혜는 바로 미간을 확 찌푸리며 실망 가득한 눈길로 강주환
고은희는 본능적으로 강주혜를 혼내려고 했다. 어떻게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그녀는 두 아이의 엄마로서 항상 아이들을 위해 움직여왔고, 항상 강주환이 잘 되길 바랐다. 하지만 강주환이 그동안 행복하지 않았을뿐더러 윤성아가 죽은 일로 마치 혼이라도 잃은 사람처럼 공허한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다.“너...!”고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됐다, 이젠 너희들은 상관하지 않을 거다! 앞으로 너희들이 누구를 만나든 알아서 해! 앞으로 더는 내 허락도 구할 필요 없다!”...강주환은 결국 안효주와의 모든 것을 끝내고 안효주를 본가에서 쫓아냈다. 그리곤 안효주에게 앞으로 다시는 영주시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되고, 그의 앞에 나타나서는 안 된다고 명령했다. 그는 심지어 더는 안효주와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며, 그와 안효주는 그저 아픈 어머니를 위해 연기를 했던 것뿐이라며 세상에 밝혔다.안효주는 울면서 운성시로 돌아가게 되었고 모든 걸 알게 된 안진강은 바로 강주환을 찾아왔다.“강 대표와 효주 사이의 일은 이미 효주를 통해 다 알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이 가짜일 줄은 몰랐네요!”모든 것을 알게 된 안진강은 화가 났다. 하지만 안효주가 동의한 일이었고 안효주는 강주환과 결혼하기 위해 자존심마저 다 버린 것이었다. 그랬기에 그가 아무리 화가 나도 도저히 분노를 표출할 수가 없었다. 안효주는 강주환과 결혼하기 위해 자살 소동까지 벌였었기 때문이다.여하간에 이 모든 건 그의 딸 탓이었다. 그랬기에 안진강은 자존심을 꺾어가며 강주환을 찾아와 얘기하는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결혼식을 치렀잖아요, 아닌가요? 이 일은 영주시와 운성시의 모든 사람이 알아요. 만약 이 일을 전부 밝힌다면, 그건 제 얼굴에 흙칠하는 거와 뭐가 다르죠! 더군다나 효주는 확실히 강 대표에게 어울리는 사람이잖아요!”안진강은 딸을 위해 체면까지 내려놓으면서 강주환에게 말했다.“제가 전에도 말했잖아요. 안효주는 지금 제게 남은 유일한 딸이라
윤정월은 바로 눈을 붉혔다.“효주야, 얼른 봐봐. 어디 또 다친 곳은 없어?”“난 괜찮아요!”안효주는 차가운 얼굴로 윤정월의 따스한 손길을 거절했다. 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윤정월을 보며 말했다.“잘 들으세요. 앞으로 이 집에서는 저를 아가씨라고 불러요. 절대 제 엄마라고 밝히면 안 돼요. 그리고 얼른 이 일을 그만두세요!”안효주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성형하기 전의 얼굴이 윤정월과 얼마나 닮았는지 말이다. 예전에는 눈치 못했지만 윤정월이 자신의 친모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녀는 아주 많이 닮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안효주는 불안했다. 윤정월의 등장으로 안진강과 서연우가 자신이 친딸이 아닌 것을 알게 될까 두려웠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정말로 망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윤정월의 표정이 바로 굳어졌다. 그리고 이내 어찌할 바를 모르며 다소 상처받은 듯한 모습을 보였다.“효주야, 난 그냥 네 곁에 가까이에서 널 보살펴 주고 싶었어! 앞으로 내가 널 효주라고 안 부를게, 그러니까 응? 넌 아가씨고, 난 그냥 널 보살피는 도우미야. 아가씨가 좋아서, 나 스스로 네가 시키는 모든 것을 하는 도우미가 될게.”윤정월은 말을 이었다.“그 사람들 앞에서든, 뒤에서든 절대 입 밖에 꺼내는 일도 없을 거야. 절대 누구한테도 들키지 않을게! 정말이야! 그러니까 아가씨, 나를 옆에 둬. 분명 도움이 될 거야!”안효주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결국 선택을 내렸다.“알았어요. 남아있어도 돼요. 하지만 잠시일 뿐이에요. 만약 시킨 일 제대로 못 하거나, 다른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안효주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윤정월이 바로 대답을 했다.“절대 그럴 일 없어!”윤정월은 맹세하듯 말했다.“난 분명 모든 걸 다 해낼 거야. 절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거고!”“그래요.”안효주는 그제야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윤정월은 안효주에게 약을 발라주었다. 얼굴에 난 상처와 몸에 있는 상처를 보니 다시금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은 음험하게
남서훈은 싱긋 웃었다.아직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맥으로 정확히 짚어 낼 순 없었지만 느낌은...“아마 남동생일 거야.”“아... 남동생...”양나나는 눈을 굴리더니 남서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남동생도 좋은 것 같아요. 동생 태어나면 저랑 엄마가 동생한테 의술도 가르쳐주고 아빠랑 사업하는 것도 배우고요. 그리고 남자애는 너무 응석 받아줄 필요도 없고 내가 맘껏 부려 먹을 수 있잖아요.”자기 뒤꽁무니를 쫄랑쫄랑 따라다니며 누나, 누나 하고 부르는 장면을 상상하니 양나나는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어떻게 생긴 남동생이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날까, 양나나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그러나 남서훈이 임신 다섯 달째로 접어드는 어느 날, 양나나는 실종됐다.양준회와 남서훈은 매일 안절부절못하여 속이 타들어 갔다.둘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세력을 동원해 전 세계 각 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여전히 양나나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양나나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그때 양나나는 이미 8살이었다.남서훈은 딸을 찾지 못해 날마다 눈물로 얼굴을 적셨다. 그녀는 점점 야위어갔다.그걸 보는 양준회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는 아내를 꼭 끌어안고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나는 똑똑한 아이야. 당신이 의술과 독 쓰는 법도 잘 가르쳐줬으니까 별일 없을 거야. 나나는 너와 내가 낳은 딸이야. 전에 풍운파에 혼자 몰래 들어가서도 그 안을 마구 헤집고 다녔잖아.”아무튼 그는 양나나가 어디에 가서 어떠한 상황에 부딪히던 자신을 잘 보호할 거라고, 아무 일 없이 잘 살아 있을 거라고 남서훈을 위로했다.남서훈도 굳게 믿고 있었다. 양나나의 시체를 보게 되지 않는 한 그들의 딸은 세상 어딘가에 꼭 살아있을 거라고.그 후 넉 달이 지났다. 9달이 된 배는 불룩하게 튀어나왔다.양나나는 아직도 찾지 못했고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그러다 남서훈은 아들을 낳았다. 강보에 싸여 품에 안겨있는 아들을 보며 남서훈은 양나나를 그리워했다.“나나야,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네 뒤꽁무
그리고 바로 그날 오후.양준회와 남서훈, 그리고 백나연과 성진훤, 이렇게 네 사람은 백무산을 찾아갔다.그를 만나자마자 양준회와 성진훤은 백무산한테 사과부터 했다.어리둥절한 백무산은 그들이 왜 갑자기 찾아와서 사과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 후 양준회는 남서훈의 어깨를 와락 감싸안았고 성진훤도 보란 듯이 백나연의 손을 꼭 잡았다. 성진훤은 원래 양준회처럼 백나연을 확 끌어안고 싶었지만 미래 장인어른이 될 사람 앞이라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손만 잡았다.백무산은 더 혼란스럽고 얼떨떨해졌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그는 눈알이 튀어져 나올 듯하게 그들 넷을 번갈아 쳐다봤다.그때 양준회가 입을 열었다.“어르신, 우리 서훈이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입니다. 남씨 집안의 특수한 사정으로 어릴 때부터 남장을 했던 것이고, 백나연 씨와의 혼약도 그저 소동극이었습니다. 이 일은 서훈이한테 책임 묻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노여움이 있으시면 저한테 푸세요.”그 말에 백무산은 눈살을 찌푸렸다.남서훈이 여자라니... 어떻게 그런 일이?여자가 그의 딸과 약혼했다니,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었다.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인가.백무산은 불같이 화를 냈다.그러자 백나연이 나섰다.“아빠, 이 일은 서훈이 탓이 아니에요, 제가, 제가 꼭 도와달라고 했어요.”“뭐야? 널 도와줘?”“네.”백나연이 설명했다,“아빠랑 오빠가 자꾸 소개팅 주선하는 바람에 제가 너무 골치 아파서 서훈이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나랑 약혼하자고. 그럼 아빠랑 오빠가 나한테 선 자리를 더는 강요 안 할 거 아니에요. 서훈이는 싫다고 했는데 내가 억지 써서 해주기로 한 거예요.”백나연은 자기 잘못이라고 매우 강조했다.그녀의 눈빛에 아픔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전 그때 결혼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리고 저랑 서훈이는 서로 약속했어요. 누가 먼저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되든, 그때 되면 파혼하기로요. 절대 서로의 앞날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어요. 이제
그 순간 용준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은 그칠 줄을 모르고 펑펑 쏟아졌다.이게 얼마 만인가.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고 싶은 생각을 항상 했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는 오늘 끝내 그녀를 안을 수 있었다. 팔을 뻗어 그녀를 껴안고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파묻은 채 용준은 또 한참을 울었다.예서는 그가 평생 사랑한 유일한 여자였다.그는 품속에 있는 그녀를 부드럽고 진실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난 네가 고마워. 넌 너무 용감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용감해. 옛날 일은 이미 다 지나갔어. 넌 이것만 기억해. 난 널 사랑하고, 네가 있어야만 내가 살 수 있어. 네가 있으니까 내가 괴물로 변하지 않은 거야. 아니면 난 모든 걸 다 망가뜨렸을 거야. 스스로도 혐오하는 그런 나쁜 인간으로 돼버렸을 거야.”예서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도 알고 있었다. 남자가 하려는 말이 뭔지 그녀는 모두 알고 있었다.이날, 둘은 아주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다.예서는 더는 용준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용준이 있으므로 하여 그녀는 더 빨리 회복될 것이었다.그렇게 예서가 하루하루 나아지고 있을 때. 남서훈과 양나나는 한 번 나가 돌아다니기로 했다.한 거리의 상가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남자애 몇 명이 갑자기 튀어나와 양나나를 에워쌌다.그들은 매우 들뜬 소리로 말했다.“대장! 살아 있었어요?”“너무 잘 됐어요!”“대장, 대장을 그 사람들이 데려간 후로 우린 계속 대장의 소식을 기다렸어요. 대장도 그 애들처럼 상처투성이가 돼서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고요.”“지금은 어떤 상황이에요? 대장이 후계자가 된 거예요?”양나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 라고 대답했다.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남자애들한테 말했다.“난 후계자 되는 것에 관심 없어. 풍운파에 지금 남아있는 건 의술을 배우기 위해서야.”양나나는 시선을 남서훈한테 향하며 그들한테 남서훈을 소개했다.“이분이 내 스승님이야, 우리 스승님 엄청 대단해!”그날, 양나나는 그
지난 날에 발생한 그 끔찍한 과거를 스스로 입에 올리는 용준은 피가 흘러나올 듯이 눈이 시뻘겋게 물들었고 감정이 폭발할 한계치까지 다다랐다.그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몇 분 후에야 그는 비로소 다시 입을 열었다.“그놈들은 죄다 죽여버려야 할 놈들이에요. 예서가 이쁘니까, 내 앞에서 예서를... 그때 예서는 이미 내 아이를 임신했는데...”용준의 온몸에서 난폭한 기운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돌아서서 주먹으로 나무를 세게 한 방 내리쳤다. 그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그 큰 나무가 흔들릴 정도면 얼마나 센 펀치를 날렸는지 알 수 있었다.그의 손마디도 살이 찢겨나가 새빨간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감각을 느낄 수 없는 사람처럼 상처에 무덤덤했다. 아마도 손보다 마음이 더 아팠을 터였다.용준은 그때 일만 생각하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심장이 뜯겨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예서가 피투성이가 된 채 텅 빈 눈으로 누더기 인형처럼 맥없이 쓰러져서 누워있던 참혹한 장면만 머릿속에 떠올리면 그놈들을 무참하게 도륙을 내고 싶었다.그리고 그는 그렇게 하였다.풍운파의 보스가 된 후 첫 번째로 한 일이 바로 예서의 복수를 하는 것이었다.그놈들의 범죄증거를 전부 찾아내 한 명도 빠짐없이 직접 처단했다.그때 그들은 무릎을 꿇고 울며불며 용서를 빌었다. 막다른 길에 몰려 살려고 해도 안 되고 죽으려고 해도 죽지 못할 때, 그들은 찌질이같이 눈물 콧물을 쥐어짜며 애원했다. 제발 살려달라고, 잘못했다고.정작 그들은 용준이나 예서한테 그런 자비를 베푼 적이 없는데 말이다.용준의 목소리는 점점 차가워졌다.“그것들이 나와 예서의 모든 것을 망치고 날 시궁창에 몰아넣었죠. 여전히 난 이렇게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생지옥에서 살고 있어요. 그것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해요!”그러나 그놈들이 죽는다고 해서 상처가 아무는 것은 아니었다.용준은 피로 물든 주먹을 으스러지게 잡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들은 예서가 그들이 한
용준은 원래 정직한 사람이었고, 금호의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그는 어둠이 없는 밝은 햇빛 아래에서 사는 반듯한 사람이었다.그러나 일부 국제조직에서는 용준을 불안하게 여겼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심지어 그가 의심되어 오랫동안 그에게 전자발찌를 채웠다.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는 범죄자 취급을 당했고, 그리하여 생활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더더욱 생각지도 못한 건, 그 당시 그와 깊은 사랑에 빠져있었던 여자친구마저 누구한테 몹쓸 짓을 당하게 된 것이다.그러므로 용준이 점점 나쁘게 변하여 나중에 어떤 일을 저지르게 되었던, 모두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요 몇 년 동안 풍운파는 용준의 관리하에 동남아에서 제일 큰 폭력조직으로 성장하였고, 닥치는 대로 무슨 일이나 다 저지르는 편이었지만 딱 한 가지 철칙이 있었다. 그건 바로 노약자와 여자, 아이들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거였다.의리도 지켰다.하지만...“그건 중요하지 않아요.”남서훈이 말했다.“이 세상은 원래 흑과 백으로 나뉘는 게 아니니깐요. 동남아는 원래 상황이 어수선하잖아요. 무장세력과 폭력조직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일시적으로 바꿀 수도 없어요. 오히려 풍운파와 같은 조직이 있다는 게 더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양준회가 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어떤 측면으로 보면 용준은 꽤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둘은 원수지간이다. 양준회가 그의 아버지를 죽였다. 비록 지금까지는 아무 짓을 안 했어도, 또 그가 원래 정직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풍운파를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다스린 용준이 지금은 어떤 사람인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그리하여 양준회는 안심할 수 없었다. 여전히 남서훈과 같이 풍운파를 즉시 떠나려고 했다.“하지만 나나도 여기 있어요.”남서훈이 예상치도 못한 폭탄을 터트렸다. 양준회는 깜짝 놀랐다.양나나가 여기에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그는 바로 말했다.“그럼 나나도 같이 떠나면 돼.”갇힌 두 달
강하영이 부케를 내던지는 일순간 우양주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부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공중에서 부케를 잽싸게 낚아채는 그의 모습이 정지화면인 양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부케를 손에 쥔 그다음 순간, 그는 부케와 함께 바다에 떨어졌다.모두가 경악했다.강하영은 크루즈 난간 쪽으로 달려가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남자를 보며 입을 떡 벌리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선원들이 즉시 튜브를 던졌고, 또 어떤 사람들은 즉시 뛰어내려 구조하려 했지만 강주환이 그들을 말렸다.왜 구하지 말라는 건지 이해 안 된다는 듯한 눈빛으로 윤성아는 강주환을 쳐다봤다.그러다 팔로 물살을 가르며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우양주가 크루즈 위에 있는 강하영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는 걸 듣고 왜 그러는지 알 것만 같았다.“여보, 어쨌든 내가 부케 받았으니까 당신 나랑 결혼식 치러야 돼요! 안 그러면...”그 뒤엔 위협적인 말이 따라야 하는데 우양주도 무엇으로 강하영을 협박할 수 있을지 몰랐다. 남은 건 자신의 이 몸뚱이 하나뿐인데...“안 그러면 나 안 올라갈 거야. 여기 바다에 계속 있을 거야, 결혼식도 못 하는데 그냥 빠져 죽지 뭐.”강하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바다에 빠진 남자를 까만 눈동자로 차분하게 내려다보며 끝내 입을 열었다.“빠져 죽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안 말려요.”“...”우양주는 서럽게 그녀를 쳐다봤다.역시나 아내는 매정했고 자신에 대해 애정이 없었다.그러나 그때 윤성아 곁에 서있는 강주환이 무덤덤하게 한마디 했다.“내 기억이 맞다면, 이 바다에 상어가 출몰한다고 했어요. 식인 상어.”강주환은 고개를 돌려 강하영한테 말했다. “지금 아직 상어가 오지 않아서 그렇지, 나타나기만 하면 한꺼번에 열 몇 마리씩 무리 지어서 나올 거예요. 그게 게네들 습성이라. 이야... 쟨 아마 그러면 뼛조각도 남지 않겠네.”“...”그 말에 강하영이 급해 났다. 말투도 전처럼 차분하고 담담하지 않았다.난간에 기대어 우양주를 향해 내리 소리 질렀다.“뭐
미리 준비한 축사를 울먹이며 끝까지 다 읽고는 원이림을 향해 볼멘소리를 했다.“너 이 놈 자식, 내가 죽을 때까지 네가 결혼하는 걸 못 보는 줄 알았다. 아이고... 드디어 결혼하는구나. 너도 이제 가정이 생겼어.”“너 똑바로 들어. 은진이한테 평생 잘 해줘야 돼, 아내한테 잘 하는 건 우리 집안 내력이야. 나도 네 엄마 말을 엄청 잘 들었어. 너도 똑같아, 알겠니? 오늘부터는 은진이한테 더 잘해야 돼, 말도 잘 듣고, 은진이부터 생각하고 배려해 주고. 은진이가 조금이라도 맘고생을 하게 되는 날엔 내가 너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알겠어?!”원이림은 새카만 눈동자로 여은진을 깊게, 애틋하게 들여다보며 그녀와 깍지를 낀 두 손에 힘을 더 주었다.“걱정 마세요. 난 평생 우리 여보 맘고생 안 시킬 거예요.”여보라는 호칭이 지금 이 시각부터 명실상부하게 되었다.원이림은 그녀의 손을 잡고 크루즈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그리고 미리 준비된 데이지 꽃을 바다로 뿌렸다. 하얀 꽃잎들이 파도에 실려 멀리 떠내려갔다.둘은 거기에 선 채 눈물을 머금고 울먹이며 말했다.“어머니, 아버지. 저 너무 행복해요. 우리 너무 행복해요.”결혼식의 마지막을 장식할 부케 토스하는 시간이 다가왔다.강주환과 윤성아, 그리고 나엽과 안효연은 모두 기혼자로서 나가지 않고 구경만 했다. 하객 중에 미혼인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다.우양주도 강하영의 손을 잡고 그리로 향했다.강하영은 몸을 뒤로 빼면서 말했다.“우린 결혼했는데 왜 부케를 받으러 가요? 다른 사람한테 갈 좋은 축복을 왜 우리끼리 받겠다고 달려들어요, 쓸데없이. 그렇게 할 일 없고 힘이 남아돌면 내가 다른 일 하게 해 줄게요.”“무슨 일?”강하영은 푸른 바다를 향해 눈을 힐끔 하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당신 수영 좋아하잖아요. 내가 엉덩이 확 걷어찰 테니까 바다로 들어가서 수영이나 할래요?”“...”저번에 강하영과 같이 수영하면서 그녀가 자신한테 새빨간 수영팬티를 사줘 창피를 당하고 나서부터 우양주는 수영하는
여은진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예쁘게 미소 지었다.“나 다 알아요.”지난 1년 동안 그가 어떻게 해왔는지 잘 아는 그녀는 더 이상의 맹세와 언약 같은 건 필요 없었다.“응!”여은진을 안은 채로 원이림은 그녀의 여린 입술에 쪽쪽거리며 뽀뽀를 했다.장내의 플래시 세례가 정신없이 터지는 가운데 그는 돌아서서 무대 아래에 앉아있는 모든 사람한테 당찬 목소리로 선포했다.“오늘 저의 이 행복한 순간을 지켜본 여기 계신 모든 증인 분들한테 제가 선물을 준비할 생각입니다. 나중에 저희 베린 그룹에 가셔서 선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달 20일에 저와 은진이의 결혼식이 있을 예정이니 여러분들께서 모두 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여은진을 안고 시상대를 내려가려 했다.여은진이 내려달라고 했지만 그는 내려놓지 않았다. 그렇게 안은 채로 시상식장을 걸어 나와 차에 올라탔다.럭셔리한 롤스로이스가 천천히 내달리고 있었다.여은진은 아직도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있었다.“이번 달 20일에 결혼한다고요? 그럼 열흘밖에 안 남았는데, 너무 촉박하지 않아요?”그녀가 눈을 들어 바라보며 물었다.“아니, 전혀.”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떨구며 원이림이 말했다.“시간이 모자라지만 않았으면 내일에라도 당장 결혼식 치르고 싶어.”반년이 넘는 동안, 그는 매일 결혼식에 관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결혼반지, 웨딩드레스, 그리고 결혼에 필요한 모든 물품과 디테일한 사항들을 전부 준비하고 체크했다. 그녀가 결혼을 동의하는 그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그리고 그 순간이 끝내 다가왔다.웨딩사진을 찍는 것 외에는 크게 시간을 들일 일도 없었다.다만 여은진이 임신했기 때문에 너무 빠듯하게 스케줄을 잡지 않고 싶었을 뿐이다.결혼식에 참석할 하객을 초대하는 일도 있긴 하지만 10일이면 충분했다.촉박하지 않을뿐더러 시간적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여보, 우리 지금 바로 혼인신고 하러 가.”원이림은 한시라도 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기사한테 얘기하여 구청으로 가자
원이림은 금방 샤워를 마친 여은진한테로 다가가 그녀의 팔을 끌어당겨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다음에는 당연히 침대로 향했다.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수순을 밟아갔다.한창 격렬해지려던 찰나, 원이림은 짧게 비명을 질렀다. 크게 지르진 않았다. 본능적으로 소리를 내질렀지만 그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여은진이 알아차리지도 못한 새에 살에 푹 찔린 그 가는 물건을 빼내야겠다고 머릿속으로 빨리 반응했다.하지만 역시 늦었다.여은진이 몸을 일으켜 스탠드를 켰고, 어두웠던 방안은 환한 빛으로 채워졌다.이어 급히 그를 살피던 여은진은 원이림의 엉덩이에 바늘이 하나 꽂혀있는 걸 발견했다.짧고 가는 옷을 꿰맬 때 쓰는 그런 바늘이었다.여은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남자를 보며 물었다.“어떻게 바늘에 찔릴 수 있어요? 침대에 왜 바늘이...”“...”꽂힌 바늘을 빼며 원이림은 이야기를 얼버무렸다.“괜찮아, 그냥 바늘인데 뭐. 별로 아프지도 않아.”그러고는 또 다짜고짜 몸을 뒤집으며 여은진을 몸 아래로 깔았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손을 뻗어 스탠드를 끄고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탐했다. 잠깐 벌어진 에피소드를 그녀의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진행 중이었던 일을 마무리하려는 의지였다.하지만 여은진은 그의 키스를 받아내면서도 오후 그의 당황스러운 표정과 난데없이 침대에 나타난 바늘을 함께 떠올렸다. 정신을 쏙 빼놓으려는 지금의 행동도 분명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잠깐만.”여은진은 원이림을 밀어내고 다시 한번 스탠드를 켰다.의심이 부풀어 오른 눈으로 빤히 그를 노려봤다. “똑바로 말해요. 아까 그 바늘로 수작 부린 거 맞죠? 말해요, 몇 개나 찔렀어요?”“...”끝내는 발각되었다. 원이림은 이실직고했다. 강주환이 원흉이라고, 그가 시켜서 했다고 불었다.“여보, 나 며칠 전에 운봉 비즈니스 회담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강주환을 만났어. 그 자식이 날 비웃는 거야. 그리고 이렇게 하라고 아이디어를 내줬어. 바늘로 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