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준은 얼굴을 감싸 쥐고 한숨을 내쉬었다.아들이 태어나기 전 나날들은 정말 행복하고 아름다웠었다... 그때 강서연은 물처럼 부드러웠고, 토끼처럼 온순했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기대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세상에서 자신에게 가장 큰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 바로 그의 넓은 가슴이라고 하면서 말이다...하지만 지금은?아들이 그녀의 몸, 그녀의 마음, 그녀의 세계까지 송두리째 빼앗아 갔다.최연준은 이 모든 것을 바꿀 방법을 찾고 싶었다.그중 하나가 바로 모유 수유를 끝내는 것이었다.군형이가 태어난 지 6개월에 접어들었을 때, 강서연은 모유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고 그 질도 좋지 않았다. 또한 아이의 입안에 이가 자라나 가끔 꽉 깨물 때면 강서연은 통증에 정신이 아찔해 났다.그때마다 최연준은 식은땀에 흠뻑 젖어있음에도 아이가 깰까 봐 입술을 꽉 깨물고 소리조차 내지 않는 강서연의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곤 했다.하지만 그대로 가만히 놔둘 최연준이 아니었다.그는 옆에 있는 방울을 집어 들고 아들의 주의력을 끌었다. 역시나 군형이가 입을 열고 큰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최연준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이놈은 정말 배가 고픈 것이 아니라 이가 자라나 씹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뭐 하는 거예요?”강서연이 눈을 부릅떴다.남자는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큰손으로 아이를 안아 재빨리 도우미에게 건네고는 분부했다.“데리고 나가서 우유를 먹이세요.”도우미와 유모가 아이를 데리고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강서연은 옷도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채 급히 따라 나가려 했다.하지만 최연준이 그녀를 막아 세우고 품 안에 꼭 끌어안았다.“이거 놔요!”강서연은 때리고 발길질하면서 벗어나려 했다.“군형이가 아직 못 먹었단 말이에요.”“유모도 있고 우유도 있으니 배고프진 않을 거야.”최연준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이제 더는 모유 먹이지 마!”“뭐라고요?”“군형이한테 물린 것 좀 봐!”강서연은 난처한 얼굴로 옷을 내렸다.하지만 그 두 곳이 옷과 접촉하니
송혁준은 최연준 강서연 부부, 그리고 두 사람의 아이도 함께 황궁에 초대했다. 또한 남양 최고의 사진작가를 찾아 그들의 가족사진을 찍어주었다.군형이는 아기 보행기를 타고 뒤뚱뒤뚱 걸어 다니고 있었다. 황궁 어화원에 흥미를 느꼈는지 통통한 작은 손으로 풀을 휘젓고, 잔뜩 흥분한 채 아야아야 옹알이를 하며 나비와 새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최연준은 단번에 그를 들어 어깨 위에 올렸다. 아들은 또다시 겁에 질려 연신 소리를 질렀다.강서연은 불안한 마음에 몇 번이나 최연준을 제지하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송혁준이 그녀를 막아섰다.“걱정하지 마세요. 연준 씨는 절대 아들을 다치게 하지 않을 거예요.”송혁준이 웃으며 말했다.강서연도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터뜨렸다. 실은 송혁준은 황궁 안 경호원과 시녀들에게 한순간도 놓치지 말고 따라다니라고 일러두었다. 만에 하나 최연준이 손이 미끄러져 아이를 떨어뜨린다고 해도 그들은 틀림없이 아이를 받아 안을 것이다.강서연이 고마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전하께선 정말 다정하고 세심하시네요.”“난 그저 아이가 웃는 걸 보는 게 좋을 뿐이에요.”송혁준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저 부자를 보세요. 얼마나 즐거워 보여요.”“송혁준...”강서연은 연준 씨를 좋아하냐고 물으려다가 잠시 고민하고는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그걸 물어 무엇하겠는가.송혁준은 이미 그걸 비밀에 부치기로 마음먹었으니, 그의 생각을 존중해 주면 된다.“왜요?”송혁준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강서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전하께선 정말 좋은 사람 같아서요. 전하 같은 분이 국왕이 되신다면 남양 국민들은 분명 행복할 거예요.”“하하. 저 역시 국왕이 되고 싶어요.”송혁준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남양 국민들은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면 절 남양에서 내쫓을지도 몰라요.”“그들이 과연 자신들을 진심으로 위하는 사람을 내쫓으려 할까요?”강서연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전하, 사람들은 전하가 생각하는
나석진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송지아를 발견하고는 이마를 찌푸린 채 서지현의 어깨를 감싸 안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난감함에 고민에 잠겼다. 여친왕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지만, 나씨 가문도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다.때문에 그들은 간단히 예만 표하고 핑계를 대어 자리를 떴다.송지아는 사람들이 자신을 외면하는 이 광경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누나.”그때 송혁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송혁준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황실 핏줄이라는 신분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송혁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야. 누나가 어느 정도의 사람인지 다들 짐작하고 있어.”“뭐라고?”송지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나 이제 이런 파티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거야? 여긴 궁이고, 내 집이기도 해. 주인의 동의도 없이 파티를 연 이 상황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누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이 황궁이 언제부터 누나 집이었어? 여긴 큰아버지의 집이야. 우리 두 남매는 얹혀사는 것뿐이고!”“너...”“그리고 이 파티는 큰아버지에게 허락받고 연 거야.”“송혁준!”송지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넌 왜 그렇게 나랑 맞서지 못해서 안달이야?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한테는 그렇게 잘해주면서 친누나인 나한테는 왜 이렇게 못되게 구는 건데!”“누나, 난 그냥 누나가 이곳에서 비웃음을 당하는 걸 원치 않는 거야.”송혁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누난 매일같이 황실 체면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잖아. 그러니까 제발 황실 체면을 깎아내리는 일은 하지 마!”말을 마친 송혁준은 차갑게 그녀를 노려보고는 매정하게 돌아섰다.송지아는 손톱이 살을 파고들도록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분노에 씩씩거리는 그녀의 얼굴에 악독함이 어렸다.그때 마침 도우미들이 목탄을 들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송지아는 아무도 모르게 발을 쑥 뻗었다. 그 바람에 도우미는 바닥
시녀는 그녀가 또 서지현 때문에 화났음을 눈치챘다.“전하.”시녀가 그런 그녀를 달래주려고 이렇게 말했다.“새로 들어온 정보가 있습니다...”송지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뭔데?”“뒷조사하러 간 사람이 그러는데 서지현은 맨체스터 시티 판자촌에서 자라나 종일 집시들과 어울렸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밀항객에 아버지는 마약, 어머니는 몸 파는 여자라 어릴 적부터 버려진 거나 다름없다고 했습니다.”“그럼 우리 고모와도 아무 관계 없겠네.”송지아는 그제야 길게 숨을 내쉬며 자기가 생각이 많아진 거라고 생각했다.“전하, 당연한 말씀입니다.”시녀가 웃으며 말했다.“그 비천한 출신으로 남양에 상경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복이지요. 전하, 오늘 무슨 일 있었습니까? 혹시 석진 도련님과 싸우셨는지요?”송지아는 울화가 치밀어올라 등을 돌렸다.차라리 싸웠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석진이 얼마나 다쳤는지도 모르는데 이 상황을 어떻게 넘겨야 할지 모르겠다.저번에 가연 왕후가 이미 그녀에게 나씨 집안과 윤씨 집안과 대적하지 말라고 했건만 지금 이렇게 상황이 꼬인 것이다.송지아는 눈을 질끈 감더니 다시 번쩍 떴다.“흥, 내가 무서워할게 뭐람?”그녀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아저씨가 이런 비천한 여자랑 돌아다니는 걸 알면 나씨 집안도 쪽팔릴 거야. 오늘 내가 서지현 씨한테 손댄 건 혼 좀 내줘서 나씨 집안 체면을 살려주려고 한 것뿐이라고.”가연 왕후가 물으면 이렇게 답할 생각이었다.칼날을 서지현에게 돌리면 가연 왕후도 나석진이 다친 걸 추궁하지는 않을 것이다.이렇게 생각한 송지아는 기분이 좋아졌다. 좋은 아이디어가 생기자 몸도 마음도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됐어. 나도 이만 쉴래. 나가봐.”“전하, 말씀드릴 게 하나 더 있습니다...”“뭔데?”“어제 윤 회장님을 봤습니다.”시녀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서궁 쪽으로 가는 걸 봤습니다. 혁준 전하께서 정말 윤 회장님께 임월 공주님의 치료를 부탁하셨나 봅니다.”“그런 일이 있었어?”송지아가 미간을
“...”최연준은 말문이 막혔다.만약 강서연이 아이를 낳지 않기로 마음 먹으면, 이제 뜨겁고 엉큼한 짓은 못하게 된다.아이를 낳는 건 둘째 치고 뜨겁고 엉큼한 짓을 못 하는 건 큰일이다.요즘 일진이 좋지 않은지 말을 잘못하지 않으면 곧 말을 잘못할 예정이었다.최연준은 얼른 강서연의 팔을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여보, 나는 그 뜻이 아니라, 내 말은... 그러니까 전에 당신한테도 얘기하지 않았나? 당신을 딸처럼 아껴주겠다고?”강서연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만해요.”“진짜야.”최연준도 웃으며 말했다.“이번 생에 내 ‘딸’은 너 하나야...”“네 이놈!”최연준은 갑자기 들려오는 윤정재의 목소리에 심장이 떨렸다.윤정재는 어느샌가 편전으로 들어와 있었다. 최연준은 고개를 들자마자 부릅뜬 윤정재의 두 눈을 맞닥트렸다.“무슨 헛소리야?”“...”“지금 감히 내 머리 위로 기어올라?”윤정재는 은침으로 소독을 하던 차에 은침을 하나 더 꺼내 최연준을 찌르려고 했다.강서연이 얼른 최연준을 막아서며 말을 돌렸다.“아빠, 아빠가 약 가져다 달라고 시켜서 온 거잖아요. 확인해 보세요. 이거 맞아요?”윤정재는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그들이 가져온 한약을 유심히 살펴봤다.그는 한약을 살피면서 오버스럽게 냄새를 킁킁 맡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하게 웃었다.“그래, 이거 맞아... 음, 그래 이것도 맞고.”강서연은 윤정재가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최연준은 멈칫하더니 주변을 둘러봤다.생기를 잃은 듯 창백한 여자가 내전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바로 송임월이었다.강서연과 최연준이 오기 전에 윤정재는 이미 송임월의 주요 혈 자리에 침을 놓았기에 그녀는 이렇게 깊이 잠들 수 있었다.송임월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은...최연준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 시녀들은 아마 송임월을 보살피러 온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좋은 마음’으로 일부러 송임월 옆에 심어놓은 사람일 수도 있다.지
윤정재는 실눈을 뜨고 씩씩거리며 최연준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은침함을 만지작거렸다.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달콤하지만 어딘가 어색한 발음이 들려왔다.“하라부지.”윤정재가 멈칫했다.최군형이 비틀거리며 윤정재를 향해 달려왔다. 멀리서 보면 정말 하얗고 동그란 것이 찹쌀떡 같았고 동그란 눈은 사람을 사르르 녹게 했다.햇빛 아래 어린아이의 미소는 유난히 빛났다. 마치 하느님이 그를 만들 때 모든 아름다움을 그의 보조개에 때려 넣은 것처럼 말이다.강서연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얼른 고쳐주었다.“내 새끼, 할아버지야, 하라부지가 아니라.”윤정재는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든 하라부지든 막론하고 손주의 목소리는 천사의 속삭임 같았다.윤정재는 얼굴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벌리고 큰 소리로 불렀다.“아이고! 하라부지 여기 있다. 하라부지가 우리 손주 만나러 왔어.”강서연과 최연준이 서로 마주 보며 겨우 웃음을 참아냈다.찹쌀떡과도 같은 최군형은 그대로 윤정재의 품에 쏙 안겼고 윤정재는 최군형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조심스럽게 그를 꼭 끌어안았다. 뽀뽀하고 싶었지만 꺼칠꺼칠한 수염이 그를 찌를까 봐 짓궂은 표정을 지었고 이에 최군형이 깔깔 웃어댔다.최연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최군형은 하늘이 보낸 구세주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윤정재는 최군형을 보자 최연준이 개코라고 한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손주랑 놀아주기 시작했다.평소에 다가가기 힘들다고 소문난 윤정재는 늘 엄숙하고 거리감이 느껴졌고 그와 대화하려면 숨을 꾹 참고 얘기해야 할 것 같았다.하지만 최군형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윤정재의 수염을 당기고 눈썹을 뽑고 머리채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아이는 힘 조절이라는 걸 몰랐기에 윤정재는 아파서 표정이 일그러졌고 보다 못한 강서연이 최군형의 포동포동한 손을 찰싹 내리쳤다.“이거 놔!”“뭐 하는 거야?”윤정재는 바로 눈을 부릅뜨며 최군형을 품속에 숨겼다.“아빠, 어릴 때부터 좋은 습
“...”최연준은 할말을 잃었다.강서연은 풍부한 남편의 표정에 풉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꺼이꺼이 웃었다....송지아가 낮잠을 자려는데 누군가 살금살금 들어오는 게 보였다.“전하, 왕후 마마께서 부르십니다.”송지아는 가슴이 떨렸다. 말하는 사람은 가연 왕후의 시녀였다. 왕후는 인자하기로 소문난 사람이기에 오수에 이렇게 시녀를 보내지 않을 것이다.이 시간에 그녀를 불렀다는 건 아마 나석진이 다쳤다는 소문을 들어서일 것이다.송지아는 정신을 차리고 시녀에게 단장을 해달라고 하고는 얼른 정전으로 향했다.왕후가 그녀를 부른 곳은 정전 속의 한 밀실이었다.송지아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뒤에 있던 나무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어두운 불빛 아래 왕후는 돌벽을 마주하고 서 있었다. 깡마른 뒷모습이었지만 아우라는 여전했다.송지아는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올렸다.“숙모님...”이렇게 부르자마자 저번처럼 가연의 따귀가 날라왔다.“지아야,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거야?”가연 왕후는 참다못해 이번에 끝내 터지고 말았다.이번에 송지아를 때릴 때도 힘을 잔뜩 넣었기에 손바닥이 아팠다.덕분에 송지아는 얼굴에 선명한 손자국이 났고 바로 눈물이 핑 돌면서 억울하고 분했다.“숙모님, 이번엔 정말 억울합니다.”송지아가 변명을 늘어놓았다.“아저씨가 다칠 줄은 몰랐어요. 그냥 그 비천한 여자를 손 봐주려고 했을 뿐인데...”“그게 네 무덤을 직접 파는 거야!”가연 왕후는 눈을 부릅뜬 채 죽일 듯이 송지아를 노려봤다.“나석진이 그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황궁에서 다쳤다는 걸 장군부 전체가 다 알고 있어. 나씨 집안과 얼마나 더 원수를 지려고 그러는 거야?”“지아야, 너 알기나 하니? 내각에서 정권을 잡고 있다면 나도훈 장군은 군권을 들고 있어. 우리는 황족이지만 그냥 타이틀만 있을 뿐이고. 송혁준도 너보다 이를 더 잘 알고 있어!”“숙모님, 저는...”송지아는 입술을 꽉 깨물며 미리 생각해 둔 핑계를 꺼냈다.“그날 저들이 어화원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요새 나석진은 계속 병원에서 지냈다.병원 꼭대기의 VIP 병실 피부과.두 손 다 화상으로 껍질이 한층 벗겨졌기에 잘 보호해야 했고 의사들은 회진 후 두 손을 만두처럼 붕대로 꽁꽁 감쌌다.자세히 보지 않으면 아마 도라에몽과 비슷할 것이다.손을 쓸 수 없으니 핸드폰을 만지거나 게임을 할 수도 없었고 그저 매일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거기에 새겨진 모양이 몇 개의 실로 이루어졌는지를 셌다.다행히 서지현은 양복점에 휴가를 내고 매일 밤낮으로 나석진의 곁을 지켰다.서지현은 나석진이 그를 보호하다가 다쳤다고 생각해 죄책감으로 가득 찼다. 전에는 그저 약간의 애정을 느꼈을 뿐이었다면 지금은 그 애정이 홍수처럼 그녀의 마음을 덮치고 있었다.밥을 먹고 물을 마시는 작은 일부터 시작해 몸을 닦는 일까지 손수 진행했다.처음에는 나석진도 이를 불편해했다.하지만 익숙해져서 그런지 세 번째부터는 그저 즐겼다.서지현이 몸을 닦아주는 손짓이 너무 부드러워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손은 야들야들하고 타올의 온도도 알맞았다. 그렇게 그의 몸을 닦아줄 때마다 그는 코피가 터질 것 같았고 머릿속엔 19금 장면들로 가득했다.“아저씨.”서지현이 열심히 나석준의 몸을 닦으며 말했다.“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남양은 날씨가 더워서 반드시 몸이 뽀송해야 한다고 했어요. 아니면 계속 이렇게 누워 있다가 땀띠가 날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그래.”나석진은 서지현의 부드러움에 푹 빠져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인지하지 못했다.“그럼 몇 번 더 닦아주든지.”서지현이 멈칫하더니 빨개진 얼굴로 아무 말 없이 계속 몸만 닦았다.하지만 고양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간질간질하게 하는 그녀의 손짓이 점점 아래로 향할수록 나석진은 온몸에 불이 붙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이러다 정말 망신을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대배우로서 그럴 수는 없었다. 특히 서지현 앞이라면 더더욱 말이다.하여 나석진은 마치 장어처럼 펄떡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이에 서지현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어떻게 소피아라는 걸 확신하죠?”배윤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부모님이 회사의 핵심 자료를 제게 모두 맡기셨어요. 그런데 그걸 받은 지 이틀 만에 공격을 당했죠. 이게 단순한 우연일까요?”임지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그 자료들은 어디 있어요?”“아마 소피아가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 자료들은 너무 중요해서 항상 제 곁에 두고 다녔거든요. 하지만 그날 제가 기절하고 다시 깨어났을 때, 가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다만...”“다만 뭐요?”“법인 도장은 가방 안에 없었어요.”배윤아는 미소를 지으며 약간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법인 도장은 본사가 모든 자원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이에요. 엄마가 제게 주자마자 저는 바로 군성이에게 맡겼어요. 지금 법인 도장은 최씨 가문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어요.”“그렇다면 소피아가 자료를 손에 넣더라도 아무 쓸모가 없겠군요?”배윤아는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똑똑하네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었다.“배씨 가문 사람들도 다 무능하진 않나 보네요.”“임 선생님...”배윤아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오빠가 송윤지에게 잘못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는 임 선생님이 우리 가문에 복수하려고 저를 납치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선생님은 그런 수준 낮은 사람이 아니니까요.”임지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확실히 똑똑한 사람이네요.”그러나 배윤아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그런데... 정말 우리 오빠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요?”임지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임지강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가족들에게 안부 전화라도 주세요.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실 거예요.”“이미 군성이에게 연락을 했어요.”배윤아가 말했다.“군성이에게 조용히 아빠에게 알려 드리라고 했어요. 엄마는 충격을 받으시면 안 되니까요... 하지만 제 상황을 오빠에겐 비밀로 해야 해요. 오빠와 소피아는 제가 조 회장님에게 잡혀 있고 선생님이 일부러 복수를 위해 조 회장님을
“설마...”“소피아!”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이름을 입에 올린 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정말 소피아일 줄이야.”임지강이 담배를 꺼내 들었다. 조 회장이 눈짓을 하자 부하가 공손히 불을 붙였다.방 안은 금세 니코틴 냄새로 가득 찼고 임지강은 잠시 침묵하며 담배 재를 털어냈다.“아마... 조 회장님도 지금 저와 같은 처지겠죠.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했다는 누명을 쓰게 됐으니 말이에요.”“그러게 말이야.”조 회장은 차갑게 웃었다.“겉으로는 온갖 아부를 떨면서도 뒤에서는 이런 음모를 꾸미고 내가 배윤아를 납치했다고 소문까지 퍼뜨리고 있더군.”“회장님과 제가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의심의 화살을 제게도 돌리겠죠.”임지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면, 연루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겁니다. 저 때문에 저의 매형까지 연루되면, 배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사이도 틀어질 거고요.”“그 여자는 이런 식으로 우리 모두를 자기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조 회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웃기지 말라 그래.”조 회장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임지강은 조 회장의 꽉 쥐어진 주먹을 발견했다. 그의 손등에는 화가 잔뜩 난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조 회장님.”임지강은 잠시 침묵한 뒤 부드럽게 말했다.“운산시 광산의 가격을 조작하도록 제가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 두 광산은 이제 그렇게 가치 있는 자산이 아닙니다.”“알고 있어.”조 회장은 임지강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이 일은 원래 자네 복수를 위해 시작한 일이야. 자네의 화가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내 수고도 헛된 게 아니야. 하지만 문제는...”조 회장은 손짓으로 방 안을 가리켰다.그때 방 안에서 배윤아가 몸을 뒤척이며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임지강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배윤아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조 회장은 잠시 망
임지강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차가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그를 철저히 파산시키고 싶습니다.”“배씨 가문 전체를 함께 무너뜨리겠다는 뜻인가?”조 회장이 묻자, 임지강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말하면, 예전의 저라면 그렇게 했겠죠. 하지만 지금은...”“지금은 마음이 약해졌다는 건가?”조 회장이 비웃듯 웃으며 말했다.“내가 알던 임지강은 그런 자비를 베풀 인물이 아닌데?”임지강도 미소를 지었다.그 웃음 뒤로 누군가의 맑은 눈빛과 깨끗한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이번 일은 송윤지가 부탁해서 오게 된 것이었다.송윤지는 배윤아의 실종 소식을 듣고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 비록 배현진과 부부의 연을 맺지 못했지만, 배윤아와는 과거에 친하게 지냈던 사이였기에 친구로서 걱정되었기 때문이다.임지강 자신도 이곳에 올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송윤지의 부탁 때문이고 또 하나는 배윤아의 납치 사건이 왜 갑자기 자신에게 덮어씌워졌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임지강은 배윤아와 거의 만난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사실상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조 회장님, 전 자비를 베푸는 게 아닙니다.”임지강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단지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이미 많은데 한낱 파리 한 마리와 얽혀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 녀석에게 적당히 벌을 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게다가 저는 배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과는 아무런 원한도 없으니, 배씨 가문을 완전히 망가뜨릴 필요는 없습니다.”“흠...”조 회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1조라... 적지 않은 금액이지. 배현진은 은행에서 전 재산을 담보로 대출받았다고 하더군. 이 일이 발각되면 한동안 꽤 고생하겠지.”“조 회장님, 사실 오늘 제가 온 이유는 다른 목적도 있어서입니다.”임지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약간 굽히며 공손히 말했다. 그러나 조 회장은 손짓으로 그를 제지하며 미소를 지었다.조 회장은 아무 말 없이 손짓으로 따라오라는
배현진은 병원 복도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완전히 무너진 모습이었다.“그럴 리가 없어...”한참 동안 앉아 있던 배현진은 갑자기 고개를 들며 말했다.“연준 아저씨와 서연 이모는 소피아와 함께 지낸 적이 없잖아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소피아는 절대 저를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이 녀석아,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고집을 부릴 거야.”최연준이 엄하게 꾸짖었다.배경원은 아무 말 없이 아들의 손을 잡았다. 그의 눈에는 깊은 절망이 서려 있었다.“그만해요, 셋째 형님...”배경원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수정이가 응급실에 있는데, 이 아이와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없는 아들이라고 생각하려 합니다.”“아버지!”“꺼져버려!”배경원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눈빛 너머에는 모든 걸 놓아버린 듯한 깊은 허무가 스며 있었다.배현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돌아섰다. 떠나기 전, 그는 다시 돌아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윤아를 반드시 무사히 데려올게요. 엄마도 무사할 거예요. 우리 가족은... 예전처럼 다시 행복해질 거예요.”배경원은 아들에게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잠시 후, 응급실의 불이 꺼졌다. 배경원은 화살처럼 뛰어가며 아내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의사가 땀으로 흠뻑 젖은 마스크를 벗으며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배 선생님, 사모님께서는 일단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뭐라고요?”강서연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일단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건, 앞으로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다들 진정하세요.”의사는 부드럽게 설명했다.“사모님의 상태가 많이 복잡합니다. 곧바로 특수 병동으로 옮길 예정이라 당분간 면회는 어려울 겁니다. 이번 주가 아주 중요한 시기이긴 하지만, 제 판단으로는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기실 가능성이 큽니다.”세 사람은 안도의 숨을 쉬며 그나마
“아내라고?”강서연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현진이와 정식으로 결혼한 적 있니? 다른 사람과 약혼한 상태에서 끼어든 건 너잖아. 명분도 없는 관계에 ‘아내’라는 말을 쓰다니, 웃음거리밖에 안 될 거야.”“최 사모님...”“갑자기 생각난 건데.”강서연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수정 씨가 쓰러졌을 때 네가 침대 옆에 있었던 거 맞지?”“아, 네.”소피아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현진 씨를 대신해 효도하러 갔던 거예요. 하지만 어머님 건강이 그렇게 나쁘실 줄은 몰랐습니다.”“수정 씨가 쓰러지기 직전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말해보렴.”소피아는 순간 멈칫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말할 수 없는 이유라도 있니?”강서연은 한 발짝 다가가며 소피아를 몰아붙였다.“수정 씨는 평소 건강관리를 철저히 하던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쉽게 쓰러질 리 없지. 분명 큰 충격이 있었을 거야. 쓰러지기 직전 병실에 너 혼자 있었다며?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해.”“서연 이모,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배현진은 소피아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기며 소피아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소피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복도를 따라 빠르게 사라졌다.소피아가 사라지자, 배현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서연 이모, 소피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배현진!”강서연은 배경원이 아들을 두 번이나 때린 이유를 이제야 완벽히 이해한 듯,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너 어떻게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니? 네 엄마는 지금 저 안에 누워 있어.”“정말로 소피아와는 아무 관련이 없어요...”배현진은 조심스럽게 입술을 핥으며 설명했다.“서연 이모, 사실 소피아도 자책하고 있어요. 그날 소피아도 윤아의 안전을 걱정하다가 엄마 앞에서 그만 실수로 말을 흘리고 만 거예요. 그래서...”“뭐라고?”최연준이 눈을 부릅뜨며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배현진, 네 엄마 쓰러졌을 때 넌 방에 없었잖아.”“소피아가 제게 그렇게 말했어요.”“너...”최연준은 순간
병원 응급실 밖.배경원은 의자에 주저앉아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충혈된 눈으로 응급실 문을 응시하며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한때 당당했던 그의 어깨는 지금 축 처져 있었다. 뒷모습만으로도 절망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배경원은 주먹을 단단히 쥐었지만, 온몸은 떨리고 있었다.적막이 흐르는 복도는 불길한 정적마저 감돌았다.결국,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와 눈물이 조용히 뺨을 적셨다.“경원아!”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배경원이 고개를 들자, 최연준과 강서연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질 뻔한 배경원을 최연준이 재빨리 부축했다.강서연은 응급실 문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치료는 연희 씨와 신석훈 씨의 제자들이 맡고 있어요. 모두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에요. 수정 씨는 평소 건강을 잘 관리하셨으니 금방 회복될 겁니다.”“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최연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갑자기 병세가 심각해진 거야? 그리고 윤아는...”배경원은 떨리는 손으로 최연준의 팔을 붙잡으며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셋째 형님, 제발 윤아를 찾아주세요. 딸은 사라지고 아내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어요. 둘 다 잃으면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그런 바보 같은 말 하지 마세요. 둘 다 무사할 겁니다.”강서연이 단호히 말했다.“윤아는 우리 집안의 며느리예요. 누가 윤아를 해치려 한다면 최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어요. 그 결과가 어떤 건지 모를 리도 없고요. 그리고...”강서연은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을 이어가려다 복도 끝에서 배현진이 소피아와 함께 급히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는 말을 삼키고 배현진을 노려보았다.“연준 아저씨, 서연 이모...”배현진은 어딘가 죄책감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배현진은 배경원에게 다가가 팔을 살며시 부축하며 조심스레 말했다.“아버지...”그 순간, 배경원이 배현진의 뺨을 내려쳤다.배경원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배현진을 노려보며
임수정은 갑작스러운 기침을 하며 침대 옆 경보 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소피아에 의해 단호히 막혔다.“사모님, 제 말을 듣는 게 좋으실 겁니다.”소피아는 부드럽지만 섬뜩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제가 만든 음식이 그렇게 형편없지도 않고 독을 넣을 만큼 제가 어리석지도 않아요. 안심하세요. 이 모든 재료는 사모님의 건강을 생각하며 준비한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는 진심으로 사모님을 돌보고 싶어서예요.”임수정은 가슴을 움켜쥔 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임수정의 눈엔 불신과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요즘 배경원은 외출이 잦아졌고 이유를 묻자, 회사 일 때문이라며 안심하라는 대답뿐이었다.그럼에도 임수정의 마음속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만 갔다.깊게 숨을 들이마신 임수정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겉으론 소피아의 말을 따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사모님, 잘 생각하셨어요.”소피아는 임수정에게 쿠션을 건네며 은은하게 웃었다.“우리 결국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될 사이잖아요. 지금부터 제 존재에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흥! 내 아들이 눈이 먼 게 분명해.”임수정은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떻게 너 같은 사람에게 속을 수 있는지...”“저를 깔보지 마세요. 저는 이혼하고 아이도 데리고 있지만, 현진 씨를 향한 제 진심은 변하지 않아요. 저는 현진 씨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누구와는 달리 겉으론 순수한 척하면서 남자를 유혹하는 짓은 안 한다는 건 알아주셨으면 해요.”“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임수정은 언성을 높이며 노려보았다.소피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더욱 날카롭게 말했다.“사모님, 제가 말하는 사람은 바로 사모님의 그 옛날 며느리가 될 뻔했던 그 사람이에요.”“헛소리하지 마!”임수정은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그 일은 우리 배씨 가문이 송윤지에게 잘못한 일이야. 그 애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사모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법이에요.”소피아는 태연한
“너와 상관없다고?”임우정은 다급하게 외쳤다.“네 형부가 이미 윤아의 통화 기록을 조사했어. 윤아가 실종되기 전에 조 회장이랑 통화했던 게 드러났다고! 지강아, 너와 조 회장이 어떤 관계인지 나한테도 숨길 작정이었어?”임지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건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그래요. 저와 조 회장이 가까운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와 배윤아 사이엔 원한이라곤 없잖아요... 누나, 왜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지강아!”임우정의 목소리가 더욱 절박해졌다.“너, 송윤지 일 때문에 배현진을 미워하는 건 알아.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윤아한테까지 증오를 전가하면 안 되잖아!”“누나, 정신 좀 차리세요!”임지강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어둠이 깃든 그의 얼굴은 단호함을 더했다.“무슨 근거로 저를 의심하시는 건데요?”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임지강의 강경한 태도에 임우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한참 후, 임우정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렇다면... 배씨 가문을 좀 도와줄 순 없겠니?”임지강은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었다.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자 맑고 투명한 송윤지의 눈빛과 마주쳤다.“배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요양원 병실 문 앞.소피아의 하이힐 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울리며 퍼져 나갔다. 소피아의 손엔 보온 도시락이 들려 있었고 문 앞을 지키는 경호원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제가 사모님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경호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이건 도련님께서 지시하신 거예요.”소피아는 휴대전화를 꺼내 그들에게 일부러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실래요? 아시다시피 사모님 건강이 좋지 않으세요. 세 끼 제대로 챙겨 드시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책임지실 겁니까?”경호원들은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다 결국 길을 내주었다.“이제야 말이 통하네.”소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송윤지는 겨우 한 모금을 마시고 사레가 들어 술을 뱉을 뻔했다. 마신 술이 얼굴에 스며든 듯 송윤지의 뽀얀 볼은 어느새 매혹적인 와인빛으로 물들었다.임지강은 그런 송윤지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임지강은 송윤지에게 다가가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입가에 묻은 술자국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임 대표님...”송윤지는 조심스럽게 임지강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썼다.하지만 임지강은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아 통유리창 앞까지 데려갔다.송윤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 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깊고 짙은 밤하늘에 수많은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잘게 부서진 불빛들이 반짝거렸다.불꽃은 색과 모양을 끊임없이 바꾸며 꿈같은 광경을 만들어냈다.송윤지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마음에 들어요?”임지강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송윤지의 귀에 스며들었다.“잠깐 눈 좀 감아 봐요.”“네?”임지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제가 별을 따다 줄게요.”마지막 불꽃이 빛의 궤적을 남기며 밤하늘로 사라지고 다시 평온한 고요가 찾아왔다.송윤지는 미소를 지으며 임지강의 말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러자 따뜻하면서도 약간 서늘한 남자의 손길이 송윤지의 손을 잡더니 손바닥 위에 무언가가 놓이는 느낌이 들었다.송윤지는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손에는 정말로 ‘별’이 있었다.“이건...”그것은 목걸이였다. 펜던트는 별 모양으로 깎아낸 다이아몬드로, 완벽하게 다듬어져 찬란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제가 해줄게요.”임지강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이건 너무 비싼 거라서 제가...”“받아줘요.”임지강의 눈빛은 따스하고도 단호했다.“그리고...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송윤지는 고개를 숙였다. 귀 끝까지 붉어진 송윤지의 얼굴은 마치 열이 오른 듯했다.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의 귓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정리해 주었다.“사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 윤지 씨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