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연의 표정이 흔들리더니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지난번에, 집에서 불쾌한 일이 있고 난 뒤로 그녀도 인지석의 소식을 오랫동안 듣지 못했다.“오성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강서연이 솔직하게 대답했다.“하지만 그 사람은 최상 빌라의 집사라서 매일 할 일이 산더미일 텐데 함부로 자리를 비울 리가 있을까요?”“아...”신석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연희가 요 며칠 그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해서 오성을 떠난 줄 알았어요.”“석훈 씨!”강서연이 다급하게 말했다.“그 사람이 나타난다고 해도 절대 연희 양과 만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저랑 연준 씨 모두 연희 양이 그 사람과 연락을 끊길 바라고 있어요. 그 사람은 너무 위험해요!”신석훈은 잠깐 고뇌에 빠졌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조수가 헐레벌떡 뛰어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연희 양이 깼어요. 그런데 정신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요...”신석훈은 재빨리 상담실로 달려갔다.강서연도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 올라가는 신석훈의 뒤를 따랐다. 그가 들어가자, 최연희는 바로 안정을 되찾았고 한시름을 놓은 듯했다.신석훈은 그녀에게 간단한 검사를 진행하고 별문제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웃으며 얘기를 나누었다.그의 웃음은 마치 겨울의 햇볕처럼 따스했고 먹구름도 완전히 없앨 수 있을 것만 같았다.밖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강서연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신석훈이 문을 살며시 닫고 나왔다. 강서연이 아직 있는 걸 보고는 웃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괜찮아졌어요.”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까 상담받다가 요 며칠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소파에서 잠들었더라고요. 깨어나 보니까 주변 환경이 낯설어서 당황한 나머지 소리를 질렀던 것 같아요.”강서연의 얼굴에 근심이 어렸다.“연희 양의 정신 상태가 이렇게나 많이 안 좋아요?”“많이 안 좋은 건 아니에요.”신석훈이 어깨를 들썩였다.“학교에서 공부할 때는 참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나한테 나중에 의대에
“환자는 식중독인데 다행히도 증상이 아주 약합니다. 이미 약을 먹였으니 이번 주에 푹 쉬면 금방 나을 겁니다.”강서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식중독이라고요?”“다 내 잘못이야.”최연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서연아... 아침에 그 국물을 마시지 말라고 한 것도 아주머니가 국에 약을 탔다고 의심해서야.”강서연은 등골이 오싹해졌다.그러나 그녀는 최연준이 이유 없이 남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더욱이 그에게 충실한 집사에게 누명을 씌우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원래 그 국물을 당신한테 가져다주려고 했는데 그때 뚱냥이가 창턱에 뛰어올라 먹을 것을 찾고 있는 거야. 그래서 국물 한 그릇 떠서 줬는데 이상하게도 고양이가 냄새를 맡고 피하는 거야. 그때부터 국물에 뭔가 섞여 있을 수도 있다고 의심이 들었어.”강서연은 그제야 최연준이 왜 그때 마음이 심란했는지, 왜 이상한 말을 했는지, 앞으로 박경실이 만든 음식을 먹지 말라고 했는지 알게 됐다...최연준은 계속해서 말했다.“오후에 집에 돌아와 보니 아주머니가 집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는 거야. 내가 그때 이미 아주머니를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머니가 실수하는 것을 기다렸어. 그래서 국물을 왜 안 먹었냐고 물었을 때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거짓말을 했어. 그런데 아주머니가 그릇을 집어 들고 먹어 보는 거야.”강서연은 듣는 내내 간담이 서늘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만약 정말 아주머니가 넣은 약이라면, 그녀는 독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먹었을 리가 없다. 그러고 보니 아주머니도 몰랐던 것이다! 누가 자유롭게 집을 드나들면서 이런 더러운 것들을 주방에 가져올 수 있지?강서연은 이를 생각하자 소름이 끼치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어... 어떤 독이에요?”최연준은 그녀를 가볍게 껴안았고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만성 독약입니다. 약에는 중독성이 강한 성분이 있어 장기간 복용할 경우 중추신경계와 심혈관계를 손상할 수 있습니다.” 의사가 설명해 줬다.“환자분은 예전에 혈
“뭐라고?”최연준은 실눈을 뜨고 잠시 생각하다가 냉소했다.“아마도 죄가 들통날까 봐 도망간 거겠지.”강서연은 그를 바라보았다.공교롭게도, 조금 전에 그녀도 인지석이라고 의심했다.인지석과 최연희을 제외하고는 에덴에는 다른 손님을 접대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방 비서.”최연준은 싸늘한 눈빛으로 물어봤다.“인지석의 행방을 알아냈어?”방한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지석의 비행기표는 강주로 가는 것입니다.”보아하니 강주 쪽에 뭔가 그를 끌어당기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우선 집안의 인씨 성을 가진 집사들을 모두 감시해 봐. 그리고 즉시 사람을 보내 인지석의 강주 행방을 추적해 내!”최연준의 목소리는 뚜렷하고 차가웠다.“알겠습니다!”“인지석이 그렇게 쉽게 빌라에서 휴가를 얻어 도망칠 수 있다는 것은 배후에 그를 지지하고 있는 세력이 분명히 있다는 뜻이야!”최연준의 눈빛은 싸늘했지만, 머릿속에는 이미 초보적인 계획이 있었다.인지석은 그저 미끼일 뿐, 최연준은 그를 이용해서 배후에 있는 사람을 낚아내려 한다!그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최연준은 이미 짐작 가는 사람이 있었다.최연준은 말없이 옆에 있던 강서연을 돌아봤다.그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품에 안고는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이런 생활이 너무 무섭지?”강서연은 말하지 않고 무뚝뚝하게 그의 품에 안겨 있었고, 한 쌍의 까만 눈동자에는 복잡함이 스치고 지나갔다.“당신이 내 세상에 들어오려고 노력한다고 말했잖아. 내 세상이 이 모양이야. 언제든지 남에게 당할 수 있어.”최연준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단것을 먹지 않았어. 왜 그런지 알아? 내가 아홉 살 때 생일 케이크에 수은이 들어 있었는데... 그 생일이 내게 트라우마로 남겨져 있어. 그래서 그 이후로 단것을 먹지 않게 됐어.”강서연은 그를 보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부귀영화와 권문세가, 이것들은 모두 남한테 보여 주는 것이다.그 속에는 이미 상처투성이와 거친 파도고 자기 자신 외에는 누구
최연준은 표정이 어두워졌다.강서연도 상념에 잠겼다. 지난번에 인지석과 최연희가 놀러 올 때 손에는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는 것을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 가져온 물건은 전부 주방에 있고 저도 별 생각 안 했어요.”박경실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서연 씨에게 보신탕을 끓여주려고 꺼내놨는데, 누가 알았겠어요...”최연준의 표정은 순간 사납게 변했다.그래서 인지석은 결코 단순한 집사가 아니다! 그가 최연희한테 접근하는 목적은 이미 분명하다. 최연희의 손을 빌려 강서연과 자기 자신을 제거하려는 거다! 만일 그와 서연이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사는 곳이 에덴이어서 배씨 가문은 반드시 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때 되면 최씨 가문과 배씨 집안은 서로 앙숙이 되어 양쪽 세력이 대치하여 어느 쪽도 이득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연준 씨.”강서연도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이 일은 반드시 은 대표님께 알려야 해요! 조금 전에 병원에 들렀는데 신 의사님께서 그동안 연희 씨의 심리 상담을 해왔대요. 연희 씨가 지금 정신 상태가 안 좋아서 가벼운 우울증이 있다고 했어요! 이 모든 것은 틀림없이 인지석이 저지른 일이에요! 반드시 이 사람을 잡아서 연희 씨 대신 복수를 해야 분이 풀릴 것 같아요!”최연준은 그녀를 껴안고 어깨를 토닥였다.예전에 그는 인지석이라는 사람을 아예 안중에 두지도 않았다.이 사람이 이렇게 무서울 줄은... 그리고 그의 배후 세력은 그뿐만이 아니라 강서연, 최연희, 그의 부모님과 은 대표, 심지어 배씨 가문까지 있다. 최연준과 관련된 사람들은 전부 그 세력이 제거하려는 대상이다!“괜찮아, 내가 다 알아서 할게.”그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강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하나도 두렵지 않아요. 난 그저 당신과 함께 싸우고 싶을 뿐이에요.”최연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총애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나는 당신의 남자로서 전쟁터에는 나 하나로 족해. 내가 당신을 지켜주겠지만 당신도 자신을 지켜야 해. 당신이 안전해야만
“뭐라고?”최연준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지난번에 인지석이 에덴에 온 일을 모른다.강서연은 그 일을 있는 그대로 이실직고했다.“전에 연준 씨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일이 해결됐다고 생각해서 굳이 한 번 더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제가 정말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어요.”강서연은 괴로워했다.“인지석이 이렇게 깊은 속셈이 있는 줄 몰랐어요.”“자책할 필요 없어.”최연준은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었다.“나조차도 인지석이 그런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이 핸드폰은 아주머니가 망가뜨린 거예요.”강서연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때 핸드폰에 우리 집 사진이 있을까 봐 불안해했는데 아주머니가 방법을 생각해서 핸드폰을 뜨거운 국물에 빠뜨렸어요.”최연준은 고개를 끄덕였다.‘핸드폰은 이미 폐기됐지만 데이터를 복구하면 안에 뭐가 있는지 볼 수 있을 텐데...’그는 핸드폰을 방한서에게 건넸다. 방한서는 그의 눈빛 하나만으로 바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아차리고는 물러났다.“일찍 자자.”최연준은 강서연을 감싸 안았고 낮은 목소리에는 약간의 애틋함이 있다.“내일 아침 일찍 내가 연희를 보러 갈 거야. 기회를 찾아 이 일을 은 대표님한테 말하려고. 은 대표님 성격이라면 절대로 인지석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은씨 집안의 세력이 생겼으니 곧 인지석 배후에 있는 사람을 찾아낼 것이야!”최연준은 강력하게 말했다.강서연은 그를 보며 머리를 그의 가슴에 가볍게 기댔다.“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이미 짐작하는 사람이 있죠?”“응.”최연준은 웃으면서 정말 똑똑한 여인이라고 생각했다.“정말로 어르신과 당신 형이 한 짓일까요?”“그럴지도 몰라.”그는 강서연의 머리를 문지르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녀의 달콤한 향기가 그의 긴장된 신경을 잠시 풀어주었다.“나는 그 사람들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어.”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게 사람들이 권세를 다투기 위해서는 정말 가족애를 저버리고 모든 것을 저버릴 수 있다는
그것은 단지 최연준이 임나연과 통혼해야 하는 이유뿐만 아니라, 임나연이 그녀 앞에서 몇 번이나 위세를 떨친 이유이기도 하다!이것이 바로 튼튼한 가문이 있는 자의 여유다!강서연은 입술을 깨물고 있었고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서 그를 밀어냈다.최연준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표정을 살피고 얼굴의 어떤 사소한 표정도 놓치지 않았다.“무슨 일이야, 여보...”“괜찮아요.”강서연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사실 최연준을 밀어낸 순간 그녀는 후회했다.그녀는 자신이 또 억지를 부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런데 그녀는 다른 여자가 자기의 남자를 노리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최연준은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환한 미소를 지었고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괜찮다면... 우리 일찍 잘까?”“저는 아직 일이 남아서 먼저 자세요.”“일이 남았어?”최연준은 음조까지 변했다.강서연이 그를 힐끗 쳐다보자, 최연준은 곧바로 성질을 죽이고 억지로 웃음을 짜내어 그녀의 작은 손을 잡고 상냥하게 상의했다.“서연아, 이렇게 늦었는데 오늘은 일하지 말고... 당신 평소에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 가끔 쉬어도 괜찮아.”“안 돼요.”강서연의 태도는 상의할 여지도 없다.최연준은 떼를 쓰기 시작하여 뒤에서 그녀를 꼭 끌어안고 턱을 그녀의 목덜미에 괴었다.“여보, 이번 달 용돈이 부족해서...”“네?”최연준은 음흉하게 웃었다. “나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줄 기회를 줘야 담뱃값이라도 벌 수 있지!”“연준 씨, 당신...”그녀가 말하기도 전에 최연준은 그녀를 안고 침실로 뛰어 들어갔다.“최연준!”그는 강서연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이불속에 들어가 제멋대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나도... 당신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열심히 일하는 거예요... 전에 당신의 세계가 이렇게 금빛 찬란한 것을 누가 알았겠어요... 나의 이 혼수는 다음 생까지도 모을 수 없을 것 같아요!”최연준은 그녀의 살짝 붉어진 눈시울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인제야 그는 강서연이 그를 밀어낸 것은 ‘통혼’ 이
다음날 강서연은 시리고 아픈 몸을 이끌고 출근했다.김자옥은 또다시 그녀에게 많은 임무를 맡겨줬고, 그녀의 불편한 모습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강서연도 이런 얘기를 하기가 부끄러워 억지로 피곤함을 참으며 일을 했다.한편으로는 바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남몰래 감탄했다. 앞으로는 절대로 이 남자의 감언이설에 감동하여 그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어서는 안 된다!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책상을 두드리면서 우렁차게 말했다.“왜 그래? 몸이 안 좋아?”강서연은 눈을 들어 김자옥이 그녀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김자옥이 수시로 그녀를 부를 수 있도록 강서연의 자리를 대표님 사무실 바로 밖에 배정했다.“아니에요.”강서연이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김자옥은 실눈을 뜨고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어젯밤에 너무 피곤했어?”강서연은 놀라서 얼굴이 후끈 달아올라 벌떡 일어섰다.“대표님...”“괜찮아, 나한테 부끄러울 게 뭐 있어!”김자옥은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하자. 반차 쓰고 돌아가서 푹 쉬어...”“괜찮아요!”강서연은 급하게 거절했다.‘반차 쉬고 집에 가면 연준 씨가 절대로 가만 안 둘 거야!’이를 생각하니, 그녀는 갑자기... 마치 매번 김자옥이 휴가를 준다고 했을 때, 최연준은 모두 집에 있었던 것 같다...최연준은 집에서 뭘 하겠는가? 당연히 ‘용돈 달라’ 고 한다!강서연은 다시 김자옥의 교활한 미소를 보며 순간 깨달았다...‘역시 친엄마야!’“당연히 쉬어야지!”김자옥은 직접 그녀를 일으켜 세워 반달 모양의 눈웃음을 하며 그녀를 바라봤다.“몸이 건강해야지! 네가 잘 쉬어야 나도 빨리 손자를 볼 수 있지... 아니! 내 말은... 회사에 더 많은 가치를 줄 수 있지!”‘앗, 또 내 본심을 말해버렸네!’강서연은 할 수 없이 웃기만 했고 김자옥이 핸드폰을 꺼내는 모습을 지켜봤다.“어이, 아들? 뭐야? 집에 없어? 경매장? 알겠어!”김자옥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했다.“내가 서연이를 너한테 보내줄게!
“잔다고? 좋아!”최연준은 웃으며 말했다.“내가 같이 자줄게.”“연준 씨!”강서연은 강하게 얘기하려고 했지만 전혀 사납지 않았다.“내가 말하는 것은 진짜 잠을 자는 것이지, 당신이 말하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내가 뭐랬어?”“...”강서연은 또 그에게 당해 말을 하지 않았다.최연준은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껴안았다.몇몇 외국인들이 그들 곁을 지나가자, 최연준은 잔을 들고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그가 잔을 들어 올리는 동작은 딱 마침 강서연을 막았다.방한서는 계속해서 한숨을 쉬었다. 그들 곁에 있는 것이 실수라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혹시 도련님과 의논해서 앞으로 직원 복지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할 수 있을까? 여자친구 찾아줌... 에휴...’그때 멀리서 로제 색 그림자가 샴페인 잔을 들고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최연준은 떠나려 했지만, 강서연이 그를 잡고 눈치를 줬다.‘임나연 아니야? 무슨 무서운 맹수도 아니고...’강서연은 삐죽거리고 곧바로 전투태세로 전환했다.“임나연 씨.”강서연은 웃음꽃을 피우며 인사했다.“강서연 씨도 있었네요!”임나연은 턱을 치켜들고 체면을 유지하고 있었다.최연준은 임나연과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강서연에게 속삭였다.“저쪽에 친구들이 몇 명 있는데 내가 소개해 줄게.”“연준 씨.”임나연은 그에게 다가갔다.“마침 마주쳤네요. 연준 씨와 서교 땅 프로젝트에 관한 것을 의논하고 싶어요.”최연준이 냉랭하게 그녀를 힐끗 보았다. “왜요?”“공사가 지금까지 진행되어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요. 다만 두 곳의 협력업체가 근무 시간이 너무 길다고 생각하여 조기 퇴출하고 싶다고 선언했어요.”“큰 문제가 아니에요.”최연준은 담담하게 말했다.“만약 절차가 모두 계약에 부합한다면, 그들이 물러난다고 해도 우리는 막지 않을 거예요.”“네.”임나연이 조용히 말했다.“하지만 그렇게 되면 공사가 지연될 수 있어요. 이를 방지하기 위해 제가 두 곳의 협력업체를 추천했는데 명단과 자료는
가끔 차가 지나갔지만, 정승우가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어도 아무도 멈춰 서지 않았다.어둠이 내려앉았고 기온은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며칠 동안 육체와 마음이 지친 권온유는 이제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정승우는 어쩔 수 없이 온유를 등에 업고 비틀거리며 길을 걸었다.“오빠...”권온유는 울먹이며 말했다.“해가 졌어요. 저... 무서워요.”“괜찮아.”정승우는 뒤돌아 미소를 지었다.“오빠가 집에 데려다줄게.”“오빠, 우리 그냥 돌아가요...”“뭐라고?”권온유의 시선이 정승우의 피로 물든 발에 닿았다.“발이 많이 아프죠?”권온유의 작은 얼굴 위로 눈물이 두 줄기 흘러내렸다.“오빠, 저 내려주세요. 그냥 돌아가요...”“온유야?”권온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그 집이 낡고 춥긴 해도... 오빠 발에서 피가 나진 않잖아요!”정승우는 멍하니 잠시 굳어 있다가 그 어눌한 말 속에 담긴 다정함을 깨달았다.이 작은 아이는 납치당했던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라도 정승우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정승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작은 새들이 집으로 향해 줄지어 날고 있었다.정승우는 온유를 데리고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다짐했다.“바보야.”정승우는 온유를 내려놓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난 하나도 안 아파.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그 사람이... 우리를 때릴까요?”“그럴 거야.”정승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어린 시절, 정대명에게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탈출할 때 그의 뒤통수를 내려친 한 방은 그동안의 빚을 모두 갚은 셈이었다.“그런데 오빠, 그 사람은 오빠 아빠잖아요?”권온유는 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하지만 오빠가 아프다고 제가 말했을 때 오빠 아빠가 들어왔었잖아요.”정승우는 쓴웃음을 지었다.자신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정대명이 들어온 것은 아마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죽으면 함께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없어질까 봐서였었다.정대명은 단지
차 안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영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정대명에게 다가갔다. 그의 머리 아래로 어두운 핏자국이 퍼져 있었고 그 흔적은 이미 굳어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영미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차가운 눈빛으로 정대명을 내려다보다가 거칠게 발길을 휘둘렀다.“일어나요!”강소아와 최군형도 다가와 공장 안을 살폈지만 안은 고요히 비어 있었다.“아이들은요?”“아이고...”정대명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살려줘, 살려줘... 저 괘씸한 녀석이!”“정대명 씨!”영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어쨌든 이번 일은 영미가 자신 있게 권온유의 행방을 안다고 장담한 일이었다.영미는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함께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확신에 차 말했다.그런데 지금... 정대명은 다쳐 쓰러져 있고 두 아이는 사라졌었다.백인서를 함정에 빠뜨리려던 영미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다.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정대명은 도움을 청하려다 영미가 눈짓을 주는 것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영미의 눈길을 따라 보니 최군형과 강소아도 함께 와있었다.정대명은 예전에 영미가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는 척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정대명은 머리를 살짝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신이 정대명인가요?”최군형이 다가가 물었다.정대명은 말끝을 흐리며 최군형의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백인서의 양아버지시고?”최군형은 다시 물었다.“당신이 당신 아들과 함께 권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게 맞나요?”“아니야, 나 아니야!”정대명은 크게 당황하며 손을 흔들었다.“이봐, 동생, 난 억울해! 내 아들 녀석이 나를 해치려고 했어! 내 머리를 봐, 그 자식이 벽돌로 내리쳤다니까!”“그만해요!”영미는 정대명의 말이 길어질수록 상황이 불리해질 것을 우려해 정대명을 노려보며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했다.강소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들의 서툰 수법이 한심하기만
경찰서 밖에서 최지용은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젊은 경찰관이 안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최지용은 급히 다가가며 말했다.“정호야!”정호라는 젊은 경찰관은 최지용을 보자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 녀석!”최지용은 정호에게 다가가 가볍게 주먹을 툭 날리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거야?”정호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방금 최씨 집안에서 백인서를 데려간 사람 중에 정호도 있었다. 최지용도 놀라웠지만, 영미 역시 경찰이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떠나기 전, 정호가 살짝 눈짓을 보냈고 최지용은 그의 의도를 알아채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지용이 형.”정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형수님께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하고 계시니 문제없을 겁니다!”“도대체 누구 지시로 백인서를 여기로 데려온 거지?”“소아 아가씨예요!”정호는 어깨를 으쓱했다.“소아 아가씨가 갑자기 지시한 거라 사전에 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최지용은 살짝 놀랐다. 강소아의 지시라니.“형수님께서도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 아이가 실종되기 전에 형수님께서 만난 적이 있거든요. 경찰이 형수님을 데려가서 조사하는 건 당연한 절차입니다.”최지용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피식 웃음을 지었다.강소아가 이런 ‘당연한 절차’를 이용해 백인서를 경찰서로 보낸 이유는 경찰서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또 누군가가 음모를 꾸며 백인서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해도 경찰서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경찰서 안에는 일을 봐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백인서가 여기서 며칠 지내는 동안 힘든 일 없이 외부의 소란도 피할 수 있는 셈이었다.최지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강소아는 정말 자매를 위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렇게까지 배려심 깊은 방안을 생각해 내다니!“지용이 형.”정호가 계속해서 말했다.“도련님께서
영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소아 언니, 저를 믿지 않으세요?”“난 오직 사실만을 믿어.”“권씨 가문의 딸이 실종된 사건에 백인서 씨의 양아버지와 남동생이 관련되었어요, 그게 바로 사실이에요!”강소아는 순간 멍하니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려 했다.세상에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호텔 뒷뜰에 있는 그 CCTV가 정말 완전히 고장 났다고 생각하는 걸까? 육씨 가문과 최씨 가문이 힘을 합쳐 그 고장 난 CCTV 하나도 못 고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최군형은 강소아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안심시키며 슬며시 휴대전화를 건넸다.강소아는 화면을 확인했다. 최군형의 부하가 보낸 메시지였다.“도련님, CCTV 데이터를 복구 중입니다. 곧 진실이 밝혀질 겁니다!”강소아는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영미가 이렇게까지 백인서를 몰아세우는 걸 보니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 꺼림칙한 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어차피 꼬리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었기에 그저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바로 그때, 집사가 다소 당황한 얼굴로 방에 들어섰다. 집사의 뒤에는 몇 명의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신분을 밝힌 후 방 안을 둘러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여기 백인서 씨가 계십니까?”표아정은 등을 꼿꼿이 펴고 대답했다.“경찰관님께서 여긴 무슨 일로 오셨나요?”“당신이 백인서 씨인가요?”“저는...”“백인서 씨가 납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신고를 접수했습니다!”“뭐라고요?”백인서는 얼굴이 창백해졌다.“백인서 씨, 조사에 협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권온유가 납치된 지 하루가 지났다.그동안 정대명은 단 한 번 음식을 가져왔는데, 그것도 차갑게 식은 죽 한 그릇과 딱딱한 빵 한 조각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귀하게 자란 권온유에게 이런 음식은 처음이었다. 울고 싶었지만, 감히 울지 못하고 그저 눈물을 참으며 빵을 조금씩 뜯어 먹고 있었다.정승우는 그런 온유의 모습을 보고
“아줌마,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럼, 제가 알아낸 사실을 전부 말씀드릴게요!”영미는 입가에 교만한 미소를 띠며 백인서를 차갑게 한 번 쳐다보았다.“백인서 씨의 친어머니인 백홍은 인신매매범이었다는 사실, 모두 아셨나요? 백인서 씨의 어머니는 백인서를 정대명의 집에 맡겼고... 흥! 정대명의 아내도 백홍이 납치해 왔다는 소문이 있어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잖아요. 제 생각엔... 인신매매범의 딸이라면 그런 일쯤은 익숙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권온유의 실종이 정말로 백인서 씨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시나요?”“영미!”강소아가 나서며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허위 사실을 퍼뜨리지 마!”“소유 아가씨, 억울하네요!”영미는 강소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이렇게까지 조사한 건 다 아가씨를 위한 거예요! 딸도 있는 사람이 백인서를 곁에 두고도 마음이 놓이세요?”“그만해!”최지용이 크게 소리쳤다.백인서는 몸을 떨며 믿기지 않는 눈으로 최지용을 쳐다보았다.그러나 최지용의 얼굴에는 의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최지용은 굳건한 눈빛으로 뒤에 있는 백인서를 지키고 있었다.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백인서를 아끼고 있었다.백인서는 코끝이 찡해지며 본능적으로 최지용의 손을 꼭 붙잡았다. 최지용의 따스한 손은 백인서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그 온기가 어둠의 두려움을 잊게 해주었다.최지용은 백인서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고 다시 영미를 바라볼 때는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영미야.”최지용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두 집안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저 넘어가는 거야. 더 이상 선을 넘지 마.”최군형도 나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요, 백인서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모르겠어요? 영미 아가씨, 우리 최씨 가문 사람들을 바보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영미는 순간 긴장했다. 최군형의 말 속엔 어딘가 숨은 뜻이 있는 듯했다.최군형의 깊고 복잡한 눈빛을 파악하기 어려웠다.표아정은 천천히 일어나 어깨에 걸친 숄을
백인서는 복잡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그때 최지용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표아정이었고 다급한 목소리로 서둘러 돌아오라고 재촉했다.최지용은 결국 어머니의 말에 따라 백인서를 데리고 최씨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넓은 거실에는 최군형과 강소아도 나와 있었고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백인서가 들어서자, 표아정이 백인서를 올려다보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다.강소아는 백인서와 눈을 마주치며 단호하게 미소 지었다.백인서가 의아해하던 찰나, 영미가 천천히 밖에서 걸어 들어왔다.“아줌마, 지용 오빠. 제가 권온유의 행방을 알아냈어요.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뭐라고?”최지용이 놀라서 물었다.“네가 어떻게 아는데?”영미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지용 오빠, 특수부대 출신이라고 정보가 우리보다 더 빠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최씨 가문은 만능이 아니에요, 최씨 가문도 모르는 정보가 있다고요.”표아정은 가볍게 기침하며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았다.최군형과 강소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주목하고 있었다.최지용의 이마에는 점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미의 눈에는 한 줄기 교만한 빛이 번졌다.영미는 오는 길에 이미 모든 계획을 짰다. 정대명의 말이 맞았다. 누구를 훔치든 상관없었다. 인신매매범의 딸인 백인서가 아이들을 해치러 다닌다는 누명을 씌우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하면 백인서는 모두의 신뢰를 잃게 될 터였다.영미는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강소아가 인신매매범을 곁에 둘 리 없다고 믿었고, 최지용 역시 이 사실을 알면 더는 백인서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영미는 정대명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영미는 권온유를 넘기고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한패가 되어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주장할 계획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인서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궁지에 몰릴 것이었다!“지용 오빠.”영미는 고개를 돌려 최지용을 바라보며 한 글자씩 천천히 말했다.“권온유는 정승
“그... 괜찮아!”정승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권온유에게 말했다. 정승우는 이곳에서 권온유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그런데 이때, 공장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곧바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정승우는 재빨리 권온유에게 눈짓했고 권온유도 알아채고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없는 척했다.정승우는 벽에 기대어 눈을 반쯤 감았다.“이 아이인가요?”영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맞아.”정대명은 영미를 흘깃 노려보며 묵묵히 대답했다.영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희미한 빛 속에 있는 아이를 살펴보더니, 곧 얼굴빛이 확 변했다.“이 아이... 혹시 권씨 집안의 막내딸 아니에요?”정대명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훔쳐 올 때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리가 없었다.“정대명 씨.”영미가 차갑게 웃으며 돌아보았다.“제가 최씨 가문 집안 아이를 훔쳐 오라고 했지, 권씨 집안 아이를 훔치라고 했나요? 이러고도 저를 속이지 않았다고요?”“그게...”정대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영미 아가씨, 어차피 목적은 백인서를 곤경에 빠뜨리는 거잖아? 그러니 누구를 훔쳐 오든 상관없지 않아? 아이를 훔치기만 하면 유괴범이 되는 거니까.”이 말은 영미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정승우의 귀에도 또렷이 들어왔다.“좋아요.”영미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는 잘 지키고 있어요, 제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한편, 권씨 집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권욱은 조순영을 탓하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했고, 조순영은 오열하며 남편을 원망했다. 조순영은 권욱이 바깥에서 여자와 부적절하게 얽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헛소리하지 마!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지 잘 알잖아. 결혼 생활 내내 너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어.”“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정말 떳떳하게 행동했다면 왜 사람들이 당신만 가만두지 않는 건데?”며칠 전까지만
권온유의 질문에 정승우는 당황했다.권온유는 커다란 눈망울로 정승우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슈퍼맨 같은 오빠가, 이제는 먹을 것 하나 구하지 못하는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정승우는 어색하게 입가를 씰룩이며 권온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갔다.“너, 정말 배고파?”“네!”권온유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작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원래는 엄마랑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 했어요. 엄마가 특별히 고등어조림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엉엉... 엉엉...”“울지 마, 울지 마! 그냥 생선 하나 가지고...”“나 배고파!”정승우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아이와 대화하는 건 그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겨우 권온유를 달래고 나서 정승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팔을 걷어붙이며 권온유에게 내밀었다.“너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고프면, 여기 한번 물어볼래?”권온유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정승우를 바라보았다.“우리 집은 가난해서 늘 먹을 게 부족했거든. 그래서 어릴 때 너무 배가 고프면 이렇게 배고픔을 달랠 만한 걸 물곤 했어.”권온유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배고픔을 달랠 만한 것'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정승우는 웃으며 계속 설명했다.“예를 들어 쌀통 같은 거야. 한때 쌀이 들어 있던 쌀통은 비어 있어도 쌀 냄새가 남아 있거든. 그래서 쌀통 가장자리를 살짝 물면서 하얀 쌀밥을 먹는 상상하는 거야. 그러면 배가 덜 고파져.”“그리고 이웃집에서 밥하는 냄새를 맡으며 그 밥을 먹는 상상을 하는 거야. 그러면 그렇게 배고프지 않더라고.”권온유는 정승우의 이야기에 넋을 잃고 입을 벌린 채 있었다. 정승우는 웃음을 터뜨렸다.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한때 정대명이 도박과 술에 빠져 정승우를 굶겼던 시절은 그야말로 비참한 순간들이었다.잠시 후, 권온유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고 정승우는 속으로 ‘큰일이다'라고 생
영미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최지용을 지켜보았다.최지용은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구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영미는 바로 뒤를 따라갔고 최지용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찾았습니까?”“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세요... 만약 납치범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분명 전화를 걸어올 겁니다!”영미의 가슴이 철렁하며 내려앉았다.납치범이라니? 대체 뭘 찾는다는 거지?백인서와 통화한 걸까?그때, 최군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지용이 형, 여기서 뭐 해요?”영미는 얼른 몸을 숨겼고 최군성은 최지용에게 다가가 최지용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형이 찾고 있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서 와서 먹고 즐기자고요!”최지용은 최군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영미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영미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억지 미소로 인사했다.“지용 오빠...”“어, 영미?”최군성도 배윤아처럼 물었다.“여기 웬일이야? 형님이 널 초대한 것 같지 않은데?”“그게...”영미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군성은 영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지용을 끌고 가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최지용은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영미가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사람이, 왜 하필 오늘 온유가 사라진 날에 나타난 걸까?그때, 최군형과 강소아가 가원이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강소아는 아이를 보행기에 앉혔고 아이는 보행기 가장자리를 잡고 작은 발을 내디뎠다. 이 모습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영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리를 떠 교외의 버려진 공장으로 향했다.그 시각, 정대명은 영미의 지시에 따라 승합차를 몰고 공장에 도착해 있었고 영미가 도착했을 때 그는 공장 문 앞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미는 핸드백을 휘둘러 정대명에게 던졌다.“정대명 씨, 감히 날 속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