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기운을 너무 많이 썼더니 힘들어진 윤아는 곧 잠에 들었다.-한편, 우진도 선우 할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화가 아주 많이 나 있는 상태였는지 전화가 걸리자마자 우진에게 왜 선우의 핸드폰이 꺼져있냐며 당장 키라고 꾸짖었다.그 말에 우진은 전방의 복도를 힐끗 보았다.선우는 조금 전 나간 뒤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갑자기 선우를 찾으시는 건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생각 끝에 우진이 말했다.“회장님, 대표님 지금 자리에 안 계십니다. 전하실 말씀 있으시면 제가 전달하겠습니다.”“어디서 모르는 척이야. 네가 걔 비서인데 무슨 일인지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심씨 집안의 그 아가씨 당장 보내줘!”그 말에 우진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다른 일로 선우를 찾는 줄 알았는데 윤아 일로 연락이 온 거였다니.‘그러니까 지금 회장님도 이 일을 알게 됐고 윤아 님을 풀어주라고 하고 계시다는거지? 두 사람은 이미 통화를 한 상황이고 대표님은 당연히 싫다고 했을 테니 그 뒤로 핸드폰을 꺼버린 모양이군.’선우가 전화를 받지 않아서 지금 우진에게 윤아를 보내주라고 연락이 온 것이다.우진이 한창 상황 파악 중인데 수화기 너머로 말이 들려왔다.“됐다. 선우한텐 이런 말 하지 말고 지금 바로 그 아가씨 빼돌려서 귀국시켜.”무슨 말인지 우진은 단번에 알아챘다. 선우 몰래 이 일을 끝내란 말이다.우진은 입술을 꾹 깨물더니 말했다.“회장님.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그 말에 또다시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뭐라고? 안되긴 뭐가 안돼? 너도 이선우 그놈처럼 나한테 반항하는 거냐? 잊지 마. 난 그 애 할아버지다. 지금 이 가문은 내 손안에 있다고. 너 하나쯤 내쫓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거야.”이런 협박을 듣는 게 처음은 아니라 우진은 침착하게 받아들였다.“회장님. 그런 게 아니라 대표님이 이미 제 권력은 모조리 압수해서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그 말에 선우의 할아버지도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있었다.“그게 무슨 말이야? 그 자식이 여자 하나
이 생각이 떠오르자 우진은 자신이 어느새 선우에 대해 이렇게나 많이 알고 있음에 스스로 깜짝 놀랐다.선우는 정말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그럼 지금 그놈 주변에 이 일을 할만한 사람이 있냐?”수철이 분통을 터뜨린 뒤 다시 물었다.“그건 잘 모르겠습니다.”지금 그는 우진에게 많은 일을 시키고 있지만 오직 그것뿐이고 일단 그 범위를 넘어서면 다른 사람의 간섭을 일절 받지 않는다.“몰라? 네가 선우 옆에 있은 세월이 얼만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늙은이라고 내가 우스워 보이냐?”하지만 수철이 아무리 화를 내도 우진은 시종일관 덤덤한 모습이었다.“회장님도 한때 이씨 가문을 손에 넣고 쥐락펴락하시던 분인데 제가 어찌 감히 속일 수 있겠습니까? 못 믿으시겠으면 가서 조사해 보세요.”그가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것을 보자 수철은 의심스러운 기색을 드러내며 비서와 눈을 마주쳤다.비서가 상황을 보고 그에게 고개를 가로저었다.수철은 입술을 오므리고서야 그만두었다.“좋아. 이제 권한이 없다니 내가 직접 알아보지. 만에 하나 날 속인 거라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들켰다간...”뒷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짐작할 수 있었다.우진도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하지만 전화를 끊기 전 그는 참지 못하고 말을 보탰다.“회장님. 정말 윤아 님을 구하고 싶으시다면 가능한 한 빨리 구해주셨으면 합니다.”그 말에 수철이 다시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냐?”“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이것뿐입니다.”말을 마친 우진은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핸드폰에서 다시 들려오는 바쁜 소리에 통화 종료음에 수철의 미간이 매섭게 찌푸려졌다.“이것들이 하나같이 간땡이가 부었구나. 손자놈이 내 전화를 끊은 건 그렇다 쳐도 이젠 하다 하다 비서 나부랭이까지 내 전화를 먼저 끊어?”옆에 있던 비서 보좌관이 서둘러 말렸다.“회장님. 진정하세요.”수철은 방금 들은 말을 곱씹으며 미심쩍어했다.“그 아가씨를 구하려면 될수록 빨리 구해야 한다는 말이 무
그의 아들은 이미 글렀으나 남은 손자까지 그렇게 되는 꼴은 볼 수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우진은 윤아의 방문을 한 번 보았다. 말은 내뱉었는데 소용이 있을지는 모르겠다.우진이 한창 생각에 잠겨있는데 앞에 사람의 그림자가 다가왔다.그는 선우가 돌아온 것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대표님.”선우는 방문 앞에 가서 서서 눈을 고정한 채 입술을 약간 오므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그는 말을 하지 않았고 우진도 옆에서 끈기 있게 기다렸다.한참 후에 선우가 입을 뗐다.“좀 어때요?”우진은 잠시 멈칫했다.‘아까 금방 보지 않았나? 왜 또 묻는 거지?’“그대로일 겁니다.”“그래요?”선우의 목소리는 아주 낮아 그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묻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진 비서.”그가 갑자기 부르자 우진이 고개를 들었다.“대표님?”검푸른 눈빛은 마치 벽을 관통해 윤아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지금쯤 나를 미워했겠죠?”우진이 입술을 오므렸다.“지난 5년간 윤아 님에게 잘해주고 배려도 많이 해줬으니 기억을 잃든 아니든 미워하지 않을 겁니다.”“나를... 미워하지 않는다?”선우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난 어쩐지 나를 죽도록 미워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 자신을 망가뜨리면서까지 나를 괴롭히는 것 같아요.”한참을 쳐다보던 우진이 말했다.“윤아 님이 괴롭히는 건 자기 자신이죠.”선우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뭐라고요?”“윤아 님은 기억을 잃었고 지난 5년 동안 당신이 잘해줬던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해요. 그런데도 여기에 남아있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대표님은 지금까지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습니까?”“네?”“지난번 윤아 님이 공항에서 우연히 만난 여대생 때문에 경찰 두 명이 조사를 받은 것 말고는 왜 지금까지 경찰이 오지 않는 걸까요?”우진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마치 주의를 주려는 듯 말했다.“왜 그런 건지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선우가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
“대표님. 윤아 님 몸 상태가 안 좋아지기도 했으니 이만 보내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윤아 님을 위해서도, 대표님을 위해서도...”“윤아 님 기억이 돌아온다 해도 분명 대표님이 잘해줬던 것만 기억할 겁니다. 원수지간이 될 일은 없을 거고요. 그리고 중요한 건 대표님도 윤아 님이 잘 살길 바라지 않습니까?”우진은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윤아 님이 정말 잘못될 때까지 기다릴 생각입니까? 그때가 되면 되돌리려 해도 그럴 수 없다는 걸 아시잖습니까.”“그만해!”감정이 북받치던 선우는 무슨 충격 때문인지 갑자기 소리를 내 끊고 음산하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누가 그런 소리를 지껄이랍니까? 진 비서가 나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진 비서가 모시는 사람은 진수현이 아니라니라 나예요!”우진은 그의 감정이 통제 불능인 것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때부터... 그는 감정 조절이 안 되는 횟수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우진은 예전에 그의 신변에 있었던 일을 떠올린 탓인지 분노도 느끼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제가 진수현 대표님을 따라간 건 맞지만 그분도 대표님께 자비를 베풀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애초에 그분이 어쩌다 그렇게 다치게 된 건지, 대표님이 어떻게 여기서 서있을 수 있었던 건지 누구보다 잘 알지 않습니까. 그분과 윤아 님은 늘 대표님을 친구라고 생각했어요.”“친구? 내 여자를 뺏는 놈이 무슨 친구라는 겁니까?”“여자를 뺏어요?”우진이 가차 없이 반박했다.“윤아 님은 원래 진수현 대표님과 함께였어요.”“그래서요? 그 어린 계집애 앞에서 자기 옆자린 영원히 강소영이라는 말을 했어요. 그때 윤아가 무슨 심정이었을지 생각해 봤어요?”우진은 침묵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세 분의 과거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두 사람이 여전히 대표님이 돌아오길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것들이 무리해서는 안 되고 그랬다간 이 일에 연루된 모든 사람을 고통스럽게 할 뿐이라는 것도요.”선우는 자리를 박차고
정윤의 윤아의 행동의 보며 살짝 뿌듯했다. 하지만 선우가 윤아의 상황을 묻자 사실대로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전에 정신과 의사를 부르는 것도 너무 어려웠는데 만약 윤아가 뭘 좀 먹기 시작한다는 걸 선우가 알기라도 하면 더는 정신과 의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돌려보내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생각이 길어질수록 정윤은 이 일을 선우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비록 정윤을 데려온 건 선우지만 이 모든 건 윤아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우는 지금 이상한 딜레마에 빠진 것 같았다. 정윤은 윤아가 좋아지는 게 선우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렇게 자아 설득을 마친 정윤은 윤아가 먹고 난 음식을 치우고 방을 나섰다.서재를 지나가는데 선우가 예전처럼 정윤을 불러세웠다.“오늘은 어때요?”정윤은 오늘 조금 빨리 걸어 선우를 피할 수 있으면 피하려고 했다. 고용주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건 용기가 필요했으니 말이다.하지만 선우가 거기서 지키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냥 지나가긴 그른 것 같았다.정윤은 하는 수 없이 걸음을 멈추고 잠깐 망설이다가 선우를 보며 하려던 말을 다시 멈췄다.하지만 정윤이 입을 열기도 전에 선우가 먼저 이렇게 물었다.“예전과 똑같나요?”어떻게 말해야 들키지 않을까 고민하던 정윤이었는데 입을 열기도 전에 선우가 알아서 판단한 것이었다.그러면...아무 얘기도 안 해도 되는 건가?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거짓말을 하는 건 정윤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선우가 알아서 원하는 방향으로 판단했으니 정윤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선우는 정윤이 주저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또 전과 같은 결과라고 생각하고는 그저 손을 흔들어 정윤에게 물러가라고 했다.이에 정윤은 정말 크게 한시름 놓았다.정윤은 윤아의 병이 완전히 낫기 전까지 이렇게 쭉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기를 바랐다.선우는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표정이 어두워졌다.윤아는 거의 살고 싶은 욕구가 없는 것 같았다. 아이들의 소식은 아직 없었다. 우
하지만 이를 발견한 사람은 없었다.선우가 늘 침묵으로 이 모든 걸 감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큰일을 겪을수록 선우는 더 침묵했고 그렇게 침묵하다 보니 오히려 성격은 부드러워지고 사람들을 향해 웃을 줄도 알게 되었다.모든 슬픔과 고통은 그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선우는 아버지의 무책임함과 그 속에서 자아를 잃은 엄마까지 원망했다.선우는 마음 깊은 곳에서 이 모든 걸 거부하면서도 조금씩 잠식당했고 동화되어 결국 이렇게 걷잡을 수 없는 정도까지 오게 되었다.윤아를 놓아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신경 쓰이는 사람이 윤아밖에 없는데 그녀까지 떠나보내면 선우는 아무것도 없었다.아침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지태가 찾아왔다.그는 늘 하던 대로 윤아의 방으로 찾아가 윤아와 얘기를 나누었다. 이렇게 소통을 거부하는 환자를 만나면 치료하기 어렵긴 했지만 그래도 유지태는 그만큼 인내심이 있기에 조금씩 해결하기로 했다.고작 며칠이 더 지났을 뿐인데 유지태는 윤아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생겼고 꼭 고쳐주고 싶었다.유지태가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데 계속 말이 없던 윤아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유 선생님.”유지태는 아마 윤아가 자기를 부를 거라는 생각은 못 했는지 멈칫했다.“윤아 씨, 드디어 저랑 얘기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저한테서 시간 낭비하는 것보다 선우한테 가보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요.”“네?”유지태는 약간 어리둥절했다.“저는 아프지 않거든요.”윤아가 한마디 덧붙였다.유지태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윤아 씨, 윤아 씨가 아프다는 게 아니니 긴장할 필요 없어요.”유지태는 일부러 천천히 말했다.“그냥 편하게 대화를 나누면 돼요. 자신에게 문제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제 말은 몸이든 정신이든 다 정상이라는 거예요.”유지태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봐 윤아가 다시 한번 강조했다.유지태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윤아를 지켜보며 윤아가 계속 말하기를 기다렸다.“그
선우는 들었던 다리를 천천히 거두더니 서늘한 눈빛으로 유지태를 바라봤다.“오늘은 왜 이렇게 오래 걸렸죠?”아무런 진척이 없는데 들어가서 20분이나 있었다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닐까?“대표님,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시네요? 윤아 씨에게 진척이 있다면 기뻐하셔야 하는거 아닌가요?” 선우는 여전히 차가운 눈빛으로 유지태를 바라봤다.“그럼 말씀해 보세요, 그 진척에 대해서.”“뭐 특별한 진척은 아닙니다. 이제는 저를 무시하지 않으니 그냥 몇 마디 더 나눈 것뿐이에요.”이를 들은 선우가 미간을 찌푸렸다.“대표님, 혹시 가능하다면 대표님도 상담해 드리고 싶은데.”“무슨 말이죠?”“현재 윤아 씨와 제일 가까운 사람이 대표님 아니신가요? 윤아 씨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과 소통해 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선우는 원래 거절하고 싶었지만 윤아와 제일 가까운 사람이 아니냐는 질문에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다시 삼켰다.“네, 우리 다 해야 하는 거죠?”유지태는 그들을 한번 쭉 살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대표님과 정윤 씨면 되겠네요.”유지태가 손으로 선우와 정윤을 가리켰다.둘은 유지태와 함께 떠났다.우진은 거기에 남아 있다가 사람들이 떠나자 노크했다.“윤아 님.”인기척이 없자 우진이 다시 말했다.“잠깐 들어가도 될까요?”“들어오세요.”우진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윤아는 우진이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부터 대꾸하고 싶었지만 아직 선우가 밖에 있을까 봐 소리를 내지 않았다. 우진이 한마디 덧붙이고 나서야 윤아는 선우가 밖에 없음을 확인했다.우진이 방에 들어가자 윤아는 매우 기분이 좋아 보였다.“오셨어요? 사람들은 다 갔나요?”“네.”우진은 윤아가 좋아하는 걸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다들 유 선생님과 같이 갔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신 거예요? 오늘은 좀 오래 나누시는 것 같던데.”“음, 어떤 일에 대해서요.”윤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진을 향해 다가왔다.“비서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말씀해 보세요.”“어제 저한테
우진은 바깥을 한번 힐끔 쳐다보더니 잠깐 망설이는 듯 보였다.“괜찮아요.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말씀하세요. 그들이 돌아오면 돌아오는 거죠. 어떻게 대처할지 제게도 생각이 있거든요.”사실 어제 우진과 얘기를 나누고 나서 윤아도 생각을 정리했다. 만약 정말 선우를 설득해 이곳을 떠나고 싶다면 적극적으로 나가야지 너무 수동적으로만 있으면 안 된다.수동적으로 있으면 영원히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테고 우진의 심리적인 문제도 치료되지 않을 것이다.윤아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는지 눈빛이 밝았다. 아마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찾은 듯했다. 본인이 마음을 다잡고 힘을 내는 게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우진은 살아만 있다면 이 모든 게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네, 윤아 님이 이미 결정했다면 윤아 님 뜻을 따르겠습니다.”선우와 정윤이 오기 전 우진은 계속 윤아에게 두 아이에 대한 일을 말해줬다.윤아와 수현의 서사에 대해서는 우진도 잘 몰랐다. 하지만 지난 5년간 윤아가 두 아이와 어떻게 지내는지 우진은 종종 옆에서 보았기에 아이에 대해서는 우진도 할말이 많았다.윤아는 아이에 관한 얘기에 큰 흥미를 보였다. 우진이 말주변이 없다고 해도 윤아는 우진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열심히 들었다.윤아는 우진이 들려주는 얘기로 아이들의 성격과 표정과 생김새를 상상했다.생각하면 할수록 윤아의 눈동자는 점점 더 부드러워졌다.우진은 많은 말을 했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선우가 돌아오지 않자 우진이 윤아에게 이렇게 말했다.“윤아 님,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할까요. 너무 오래 있은 것 같아요.”우진이 벌써 간다는 말에 윤아는 실망한 표정으로 입술을 오므렸다. 조금 더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아쉽긴 했지만 자신과 있은 시간이 너무 길었다는 생각에 윤아는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우진이 가고 윤아는 소파에 앉아 아까 우진이 들려준 두 아이의 소식을 떠올리며 기분이 더 좋아졌다.얼마나 지났을까, 정윤이 돌아왔다.정윤이 들어오는 걸 느끼지 못했던 윤아는 입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