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우는 심윤아에게 다가가 그녀를 일으켜 세워주었다.“다시 정신을 차렸으니 됐어. 어디 아픈 데는 없어?”심윤아는 낯설기만 한 눈앞의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그의 걱정스러운 말투와 눈빛을 살폈다.하지만... 심윤아는 그 사람에 대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그쪽은...”그녀의 첫 번째 질문에 이선우는 그만 그 자리에서 넋을 잃고 말았다.“응?”이선우는 당연히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면 심윤아가 왜 그에게 누구냐고 묻겠는가?하지만 곧이어 심윤아가 건넨 말은 결코 이선우의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증명해주었다.“누구세요?”심윤아가 다시 한번 물었다. 이번에 그녀의 말투는 더욱 또렷했고 새하얗게 질린 그녀의 눈빛 또한 더욱 의심스러웠다.그뿐만 아니라 심윤아는 그녀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물었다.“다들 누구세요?”“...”그들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은 상관없었다. 어쨌든 그들은 이전에 심윤아와 만난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이 여자는가 이선우 대표님이 좋아하는 여자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그런데 이 여자는 어찌하여 그들의 이선우 대표마저 모르고 있냔 말인가?그때, 그녀의 이마에 난 상처를 보고 누군가가 무심코 입을 열었다.“설마 머리를 부딪쳐서 기억을 잃어 대표님을 못 알아보는 건 아닌가요?”“에이 설마. 겨우 한 번 부딪힌 건데 바로 기억을 잃는다고요?”머리를 다치는 사람은 정말 많지만 머리를 다쳐 기억을 잃는 경우는 정말 드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이선우가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기억을 잃었다고?“윤아야, 나야.”잠깐의 침묵이 흘렀지만 이선우는 끝내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나 기억 안 나?”이선우의 말에 그에게 시선을 돌린 심윤아는 순진한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좌우로 훑어보더니 마지막에는 멍한 눈빛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이선우의 미간은 더욱 보기 좋게 찌푸려졌다.한 번 부딪혔다고 못 알아본다고.?이게
윤아는 많이 아팠던 모양인지 반사적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선우는 윤아가 이렇게 아파할 줄 몰랐는지 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됐어, 그만 생각해. 검사부터 하자, 의사 선생님 말씀도 들어보고.”윤아는 창백한 얼굴로 그의 품에 안겨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 식은땀이 돋아났다.“종이.”그 말에 옆에 선 사람이 곧바로 종이를 꺼내 선우에게 넘겨주었다. 선우는 종이를 넘겨받아 조심스레 윤아의 땀을 닦아주었다.윤아는 입술마저 파랗게 질린 채 허약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선우의 품에 기대있었다. 선우는 가슴이 아파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면 볼수록 화가 나 선우는 차가운 목소리로 부하에게 질문했다.“얼마나 더 기다려야 해? 응급실로 가면 안 돼?”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저 멀리서 한 사람이 달려왔다.“저희 차례입니다, 가시죠.”그 말을 들은 선우가 윤아를 공주님 안기로 들어 올린 채 걸음을 옮겼다. 검사의 대부분은 윤아의 머리에 집중돼 있었다. 원래는 외상이 있는지만 보는 간단한 검사였지만, 윤아가 모든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 안 주치의가 다른 검사까지 시킨 것이다.가장 신속한 절차를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검사가 모두 끝났을 때엔 이미 몇 시간이 지나가 있었다.선우는 윤아를 VIP 병실에 입원시켰다. 검사를 마친 윤아는 지친 모양인지 금세 잠들었다. 그는 조용히 윤아에게 이불을 덮어주고는 침대 곁을 지켰다.선우가 병실에 들어온 민환에게 조용히 말했다.“결과는 언제쯤이면 나온대?”“빨리해달라고 부탁하긴 했지만, 언제가 될 지는 정확히 모릅니다.”썩 마음에 드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선우는 말을 아꼈다. 더 대화했다가는 윤아의 수면에 방해가 될까 봐 걱정됐다.그 모습을 본 고민환은 복잡한 심경이었다. 선우가 잠깐 좋아하는 여자라고만 생각했기에 자신도 윤아에게 냉랭하게 대했는데, 지금 선우의 행동은 생각보다 훨씬 진지하고 조심스러웠다. 잠깐 좋아하는 정도가 아닌 것 같았다.생각에 잠겼던 민환이 말했다.“그럼 쉬십시오, 전 이만 가보겠
선우는 자신의 마음을 확신했다. 평생 윤아의 곁에 있고 싶었다. 설령 자신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그녀가 다른 사람의 옆에 있는 꼴을 눈 뜨고 못 볼 것 같았다.전에 그녀를 갖기 위해 노력할 때도 그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윤아는 선우를 거부하지 않았기에 선우도 윤아의 생각을 존중했다.하지만 그 뒤로부터...생각하면 할수록 아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귀국하게 하지 말 걸 그랬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갑자기 기억을 잃었다. 어쩌면 선우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모든 기억을 잃었으니 지금이 선우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그녀만 옆에 있어 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선우는 윤아의 침대 옆에서 잠들고 말았다. 민환이 그런 선우를 보고는 담요를 찾아와 그에게 덮어주었다.하지만 얼마 못 가 선우가 깨어났다. 민환은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의도를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민환도 자신을 위해서라는 걸 안 선우는 더 이상 그를 질책하지 않았다. 윤아 깨니까 이제 들어오지 말라는 당부만을 할 뿐이었다. 민환도 얌전히 대답한 후 더는 들어오지 않았다.그렇게 날이 밝고 검사 결과가 나왔다. 의사는 선우를 불러와 윤아의 검사 결과에 이상이 있다고 했다.“어떤 이상이요? 생명에 지장이 있는 건가요?”“긴장할 필요는 없어요,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다만...”“다만 뭐요?”“기억을 모두 잃어버렸다고요?”“네, 저희도 못 알아보고, 전에 있었던 일들도 기억하지 못해요.”“그럼 맞겠네요, 머리를 조금 다친 모양이에요, 절대 안정이 필요해요.”“기억은요? 기억은 언제쯤 돌아올까요?”“확실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라 장담은 하지 못해요. 전에 있던 곳에 자주 간다든지, 전에 했던 행동들을 많이 한다든지 하면 빨리 회복할 수도 있고, 평생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고요.”“평생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고요?”“네, 그런 사례가 있어요.”선우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윤아의 기억이 평생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네, 감사합니다.”얘기
“나가게 해줘요.”심윤아는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약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면서 손을 뻗어 그녀를 막고 있는 사람을 밀어내려고 했다.하지만 문 앞에서 막고 있는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다. 그들이 물러서지 않으면 심윤아는 밖으로 나갈 방법이 없었다.“저 정말 중요한 볼일이 있어서 그래요.”“무슨 중요한 일인데?”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멈칫했다. 그 소리를 따라가 보자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선우였다.그는 빠른 걸음으로 병실로 들어가 심윤아 앞으로 다가갔다.다른 사람들은 이선우를 보자 모두 물러갔고 나가면서 병실 문을 잠갔다.심윤아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키 크고 잘생긴 이선우를 보고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나 자신을 도와준 사람은 이선우였기도 했고, 그가 했던 일들을 돌이켜보자 자신과 그의 관계가 꽤 좋을 거라 생각되었다.이렇게 생각하자 심윤아는 그에 대한 믿음이 커졌다.“돌아왔네. 저 사람들이 나 못 나가게 막고 있었어. 무조건 네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대.”“맞아. 나 방금 의사 선생님한테 네 몸 상태에 대해 여쭤보러 갔어.”이선우가 자신의 병에 대해 언급하자 심윤아는 갑자기 긴장되기 시작했다.“내 몸 상태를 여쭤봤다고? 어떤데? 무슨 문제 있어?”이선우는 그녀를 흘끗 보자 불안해하는 모습이 웃겨서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응, 의사 선생님께서 문제가 있다고 하시더라.”“무슨 문제가 있는데?”자신의 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듣자 심윤아는 더 긴장되었다.“그건 급하지 않고.”그러나 이선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내가 대답하기 전에 네가 먼저 내 물음에 대답해 줬으면 좋겠어.”그 말을 듣자 심윤아는 흠칫했다.“뭔데?”“방금 내가 들어오기 전에 네가 문을 지키고 있던 사람한테 중요한 볼일이 있다고 말하는 걸 들었는데?”심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어떤 중요한 일이야?”이 물음에 심윤아는 당황해서 제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표정도 멍해졌다.어떤 중요한 일이냐고?그
처음에 이선우는 심윤아가 연기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안색이 서서히 창백해지는 걸 보고, 또 검사 결과를 생각하자 이게 연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이선우는 눈빛이 변하더니 갑자기 앞으로 다가가 심윤아의 손을 잡았다.“윤아야, 기억이 안 나면 억지로 생각하려 하지 마.”그러나 이때 심윤아는 이미 깊은 생각에 빠져 있어 이선우가 하는 말이 귀에 전혀 들리지 않았다.이선우는 할 수 없이 그녀의 안색이 서서히 더 창백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녀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자 어쩔 수 없이 손을 들어 심윤아의 목덜미를 쳐서 기절시켰다.의식을 잃은 심윤아는 곧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졌고, 이선우는 잽싸게 허약한 그녀를 끌어안았다.그는 한참 동안 자신의 품에 안긴 의식 잃은 심윤아를 안쓰럽게 쳐다봤다. 그리고 그녀를 들어 안아 다시 침대에 눕혔다.이선우는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손수건을 꺼내 심윤아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이제 심윤아가 깨어나면 그냥 이렇게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우선, 그녀가 기억을 회복하면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도 없고, 둘째, 만약 기억을 회복하는 과정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차라리 계속 잊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이렇게 생각한 이선우는 손을 천천히 심윤아의 하얀 얼굴에 대고 자기만 들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윤아야, 내가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마. 난 그저 널 직접 보살피고 싶었을 뿐이야.”...점심때, 고민환은 급한 일이 있다면서 이선우를 찾아왔다.이선우는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기분이 좋았다.“무슨 일이야?”“대표님, 진 비서가 대표님을 뵙고 싶다고 합니다.”고민환이 진우진을 언급하자 그제야 이선우는 그가 심윤아를 데려왔던 것이 생각났다. 그는 입꼬리에 살짝 힘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고민환이 이어서 말했다.“이미 도착해서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그 말을 듣자 이선우는 표정이 확 굳어지면서 차갑게 말했다.“누가 알려준 거
이선우는 코웃음을 쳤다.“너 지금 나를 가르치는 거야?”“의견을 드렸을 뿐입니다.”“진 비서...”이선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냉정하게 그를 훑어보았다. 목소리는 가벼우면서 차가웠다. 전에 있던 부드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오랫동안 좋은 사람인 척 행동하다가 정말로 자기가 좋은 사람인 줄 아는 건 아니지?”그러자 진우진이 반박했다.“제가 좋은 사람인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대표님께서 강제로 심윤아 씨를 자신의 곁에 두려고 하는 건 당당한 일이 아닌 것 같네요.”이선우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진 비서 말은 그렇게 자신 있게 하지만 그래도 부모님을 위해서 윤아를 내 곁으로 데려다줬잖아?”이에 진우진은 더 이상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잠시 뒤 진우진은 겨우 입을 열었다.“네, 저 당당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대표님은 저보다 더 비겁한 걸요.”그러고는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이선우는 제 자리에 선 채로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무언가가 생각난 듯 눈빛이 점점 더 차가워졌다.옆에 있던 고민환도 무언가가 생각난 듯 물었다.“대표님, 이제 심윤아 씨도 돌아왔으니 저 사람은...”이선우는 그가 누구를 말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지금 그것을 신경 쓸 기분이 아니라 그에게 경고하듯이 눈빛을 쏘아붙이고는 이내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아직 그에게 진수현이라는 큰 골칫거리가 남아 있다. 원래는 심윤아를 자신의 곁으로 데려오고 나면 손을 쓰려고 했다.그런데 심윤아가 기억을 잃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만약 그녀가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을 못하고 진수현까지 잊었으면 여기서 멈춰도 되지 않은가?이선우는 심윤아의 침대 옆으로 가서 앉아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만약 네가 깨어나서 순순히 내 말을 따라 내 곁에 남는다면 난... 그 사람을 놓아줄 수 있어.”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심윤아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들을 수가 없다.오후가 되어서야 심윤아는 비몽사몽 깨어났다.이제 깨어난 후의 기억은 있기 때문에 다시 일어났을 때 눈앞
“목이 불편한 것 말고 다른 곳은 불편한 데 없어?”심윤아는 그의 말을 듣고 자세히 느껴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없어.”그러자 코를 만지던 이선우는 왠지 마음이 켕겼다. 그때 당시만 해도 그는 그녀가 이런 일들을 생각하지 않게 하는 데만 신경을 썼지 자신이 손으로 내려친 후에 후유증이 남을 거라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목이 아프다는 그녀의 말에 이선우는 마음이 아팠다.“아니면 내가 주물러 줄까?”그는 말을 할 때 이미 허리를 굽혀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목에 닿으려고 했다.지난번에는 그가 심윤아를 부축하여 힘이 없었지만, 이번에 그녀는 앉아 있었기에 저항할 힘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손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옆으로 비켜 이선우의 손길을 피해버렸다. 그러자 이선우는 잠시 멈칫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선우가 노골적인 눈빛으로 쳐다보자 심윤아는 저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하며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니. 주물러 주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하면 돼.”말을 마친 그녀는 손을 뻗어 통증이 느껴지는 부위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이선우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시 자리에 앉자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에야 이선우는 입을 열었다.“배고프지? 뭐 좀 먹을래?”정상적이라면 그녀는 어제 비행기에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니 이미 무척 배고플 것이다. 다친 곳은 머리이니 뭐든 먹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심윤아는 고개를 저었다.“걱정해 줘서 고마운데 배고프지 않아.”“배고프지 않다고?”이선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너 아무것도 안 먹은 지 얼마나 지났는지 알아?” “뭐?”그의 질문에 심윤아는 조금 당황한 듯 손을 뻗어 배를 가리며 말했다.“근데 진짜 전혀 배고프지 않아.”왠지 모르게 심윤아는 먹고 싶은 욕구가 조금도 없었다. 이선우가 보기에도 그녀는 정말 먹고 싶지 않은 것 같았
이선우는 얼굴도 붉히지 않고 심윤아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약혼자?”그가 자신의 약혼자라니? 친한 친구 정도로만 생각했지 그와 이렇게 친밀한 사이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심윤아는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붉은 입술을 감쳐물었다. 만약 그가 정말 자신의 약혼자라면 왜 그의 접촉이 이렇게 꺼려지는 걸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안 믿어?”그 말에 심윤아는 고개를 들고 이선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다만 믿는지 안 믿는지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다.“윤아야, 네가 기억을 잃기 전에 우리 싸워서 사이가 틀어졌는데, 넌 나한테 토라진 상태였어. 그런데 기억을 잃었는데도 계속 화내고 있는 건 아니지?”“싸웠다고?”그러면 그녀가 신체적으로 거부감을 느낀 이유가 그와 싸워서란 말인가?“그래, 그만 토라져. 너 지금 병세 안정이 필요하니까. 이후부터는 내가 돌봐줄게, 응?”이유는 모르겠지만 심윤아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네가 내 약혼자라고? 진짜야?”말을 마친 그녀는 이선우의 얼굴을 응시하며 그의 반응을 살피려고 했다. 아쉽지만 이선우의 표정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고 평범해 보였다.“뭐야, 싸웠다고 약혼자도 인정하기 싫은 거야?”심윤아는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말을 하지 않자 이선우 역시 조용히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심윤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 넌 내 약혼자가 아니야.”이 말에 이선우는 마음이 뜨끔했다. 기억을 잃었는데 어떻게 약혼자가 아닌 걸 알았을까?어떻게 입을 열어 물어볼지 망설이는 순간, 심윤아가 그를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넌 전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야.”실로 가벼운 한마디였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그 가벼운 한마디는 이선우의 가슴을 꿰뚫어버리듯이 날카롭게 그의 마음에 꽂혔다.기억을 잃어버렸다고 해도 어떤 말을 해야 그에게 상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