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심윤아는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심윤아는 꽤 오랫동안 잠들었다. 깨어나니 주변은 어두웠고 익숙한 환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한참을 조용하게 둘러보다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차리고는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다. 주현아의 집이었다. 이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주현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전히 조용한 방 안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오래 잤는데 왜 아직도 안 일어나는 거야. 설마 무슨 일 생긴 거 아냐?”말을 마치기 무섭게 심윤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아야.”주현아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얼른 심윤아에게 달려갔다. “인간아, 드디어 일어난 거야?”주현아는 침대맡에 있던 조명을 켰다. 아까는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불빛으로 간신히 집안을 확인했었다. 갑작스레 환해진 눈앞에 적응하지 못한 심윤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눈이 환한 불빛에 적응했다. “응.”“다행이야. 배 안 고파? 내가 국수 좀 했는데.”말하기 전엔 몰랐는데 말하고 나니 허기진 배가 느껴졌다. 비록 입맛은 없었지만 배 속의 아이는 배고플 것이 분명했다. 심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배고파.”“일어나서 밥 먹어.”주현아가 손을 뻗어 심윤아를 부축했다. 주현아가 이끄는 대로 몸을 일으키던 심윤아는 일어나는 순간 가슴에서 찌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아.”갑작스러운 통증에 심윤아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며 손으로 가슴을 꾹 눌렀다. 심윤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그래?”그 모습에 깜짝 놀란 주현아가 다급하게 물었다. 심윤아는 아파서 허리도 펴지 못하고 있었다. 주현아는 어쩔 수 없이 심윤아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뭐야, 대체 왜 그러는 거야? 119부를까?”말하며 주현아는 다급하게 휴대폰을 찾았다. 그러나 그녀가 막 휴대폰을 찾아 119에 전화하려는데 심윤아에게 제지당했다. “괜, 괜찮아. 그냥 갑자기 가슴이 아파서 그래.”심윤아는 갑자기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왜 이 상황이 이렇게 익숙한 것 같지?
“알아.”심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설명서 봤어. 통증이 심하고 오래 지속되면 병원에 가야 한댔어. 하지만 난 괜찮잖아?”“괜찮긴 뭐가 괜찮아. 통증도 증상이야. 안 그러면 왜 아픈 건데? 너 분명 요즘 제대로 쉬지 못해서 그래. 아니면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거나. 안 되겠어. 내가 널 데리고 병원에 가서 제대로 검사받아야 마음이 놓이겠어.”“알겠어, 알겠어.”주현아의 잔소리에 심윤아는 알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 진수현에게도 검사를 받아보라고 했어야 했다. ‘그 뒤로 다시 아픈 적 있나 모르겠네…’생각하던 심윤아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두 사람은 이미 분명 이혼한 사이였다. 앞으로는 전혀 상관없는 남남인데, 왜 이런 순간에서 진수현을 생각하는 걸까?오늘 구청 앞에서 악수조차도 거부했다. 심지어 그는 심윤아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런 인간을 내가 왜?’‘이젠 정말 정신 차려야 해, 심윤아. 너랑 진수현은 애초부터 안되는 거였어.’“윤아야, 무슨 생각해?”주현아가 눈에 초점이 없는 심윤아를 보며 호기심에 물었다. 그 말에 심윤아가 생각을 멈추었다. 그녀의 입가엔 옅고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쓸데없는 생각 좀 했어.”심윤아와 주현아 사이엔 숨길 얘기가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주현아도 바로 심윤아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눈치챘다. “쓸데없는 생각인 거 알면, 하지 마.”주현아의 목소리에 답답함이 묻어났다. “어차피 이젠 이혼한 사이야. 이제부터 어떻게 살지, 그거나 생각해.”심윤아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래야지.”심윤아의 모습에 주현아가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심윤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됐어. 어떻게 되든, 너에겐 내가 있잖아. 게다가 넌 지금 혼자도 아니고. 너에겐 아이가 있어. 아이가 너에게 힘을 줄 거야.”“맞아. 나에겐 우리 아기가 있지.”만약 아기가 없었다면 심윤아는 자기가 이토록 용기 있는 선택을 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음을
“커플을 맺어주려고 그랬다고?”이때 주현아는 어리둥절해서 저도 모르게 물었다.“누구랑 누군데?”심윤아는 한참 침묵하다가 말했다.“진수현이랑 강소영.”“...”한참 뒤 주현아가 말했다.“나 진짜 스스로 목을 졸라 죽이고 싶을 지경이야.”심윤아는 그녀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알고 고개를 들어 웃었다.“됐어. 난 괜찮아. 틀린 말도 아닌데 뭐. 두 사람 커플 맞잖아.”“커플은 개뿔.”주현아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만약 강소영이 진수현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강소영을 신경 쓰지도 않았겠지? 목숨을 구해준 은혜로 마음을 얻었을 뿐이야.”그 말을 듣자 심윤아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고개를 떨구고 말했다.“됐어. 그 얘긴 그만하자.”“내가 잘못했어.”주현아는 무안한 듯 혀를 내밀며 말했다.“너 먼저 좀 쉬어. 내가 면을 삶아 놓을 테니까 조금 있다가 일어나서 좀 먹어.”“그래.”주현아가 나가자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심윤아는 손을 들어 눈가의 눈물을 닦았다.이번이 마지막이다. 앞으로 그녀는 다시는 진수현 때문에 눈물 흘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그날 밤 심윤아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이선희는 한참 기다리다가 이상하다 싶어 진수현에게 물었다.그는 집에 돌아온 뒤로 서재에 들어가 틀어박혀 있었다. 이선희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는 책상 앞에 앉아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윤아는?”이선희가 물었다.심윤아의 이름을 듣자 진수현은 마치 가슴이 찢기는 듯했지만 입술을 앙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전부터 두 사람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던 이선희는 그의 표정을 보고 무슨 일이 일었음을 확신했다.그녀는 입술을 앙다물다가 물었다.“왜, 너희 둘 사이 나빠졌어?”진수현은 그녀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말했다.“저 바빠요.”“뭐가 그렇게 바쁜데?”이선희는 그의 앞에 놓인 노트북을 가리키며 코웃음을 쳤다.“꺼진 검은 스크린을 쳐다보느라 바쁜 거야?”집에 돌아오고부터 지금까지 그의 노트북은 켜진 적이 없었다.진수현은 눈썹을 찌푸
밖으로 나갈 때 이선희는 너무 화가 나 머리가 찌릿찌릿 아팠다.그런데 그때 갑자기 그녀는 무언가가 생각난 듯 발걸음을 멈추었다.진수현은 그녀의 아들이기 때문에 엄마로서 자신의 아들이 어떤 성격인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가 화내는 모습을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까지 분노한 건 처음이었다.교양까지 버릴 정도라니.그렇게 생각하자 순간 이선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그렇다면...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이선희가 떠나자 서재는 다시 조용해졌고, 진수현은 제 자리에 한참 서 있다가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지만 머릿속에서 이선희가 가기 전에 했던 말이 끊임없이 맴돌았다.“혹시라도 윤아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후회하지 마.”마치 마음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그에게 심윤아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는 꼭 후회할 것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 가서 데려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런데 또 정신 차리고 보면 우스웠다.무슨 일이 생긴다고?심윤아는 이선우와 같이 있지 않은가?진수현에게 오랫동안 갇혀 있던 심윤아는 요즘 따라 이혼을 요구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이혼하고 나서 이선우와 만나려는 게 아닐까?이제 자유로워졌으니 아마도 이선우의 품으로 뛰어들었을 것이다.통화가 안 되는 건 이선우와 함께 시간을 보내느라 전화를 못 받는 것일 수도 있다. 무슨 큰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비록 두 사람은 이미 이혼하고 남이 되었지만 진수현은 지금 이 순간 심윤아가 이선우와 같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했다. 성인 남녀가 저녁에 같이 있으면 무엇을 할지 안 봐도 뻔하다.진수현의 머릿속에서 저도 모르게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젠장!”생각만 해도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진수현은 손으로 책상 위의 모든 물건을 쓸어 던졌다.방 안에서 갑자기 물건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물건이 떨어지고 부서져도 진수현의 흥분된 마음은 전혀 가라앉지 않고 오히려 더 심각해졌다. 가슴은
집사는 한숨을 내쉬었다.싸워서 이 지경이 된 마당에 성격이 더럽고 오만한 진수현이 심윤아를 찾으러 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한 도우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에 강소영 씨가 여기 왔을 때부터 대표님과 사모님의 관계가 심상치 않더라고요. 나중에 다시 좋아지는 것 같긴 했는데 전과는 확실히 달랐어요. 저희 대표님이랑 사모님... 설마 이혼하신 건 아니겠죠?”이혼이라는 단어를 듣자 집사는 펄쩍 뛰며 그 도우미를 나무랐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앞으로 그 단어를 함부로 쓰면 안 돼. 부부 사이에 모순 있는 건 이상하지 않아. 대표님과 사모님이 싸우셨다고 해도 다시 화해하실 거야. 심심하면 가서 창문이나 한 번 더 닦아.”도우미들은 집사에게서 꾸중을 듣고 입을 삐죽거리며 떠났다.집사는 화가 나 머리가 아파서 손을 내저으며 방으로 돌아가 쉬었다.하지만 도우미들은 그가 떠나자 참지 못하고 함께 모여서 수다를 떨었다.“사실 전 저희 대표님이랑 사모님이 이혼하신 것 같아요. 지금 이혼 안 했다고 해도 언젠가는 하실 것 같아요. 두고 보세요. 이번엔 확실히 심각하게 싸운 것 같아요. 저희가 진씨 집안에 들어온 지 몇 년 됐는데 대표님이 언제 이렇게 화내시는 거 본 적 있어요?”“맞아. 다들 아까 못 들었지? 난 서재 문 앞까지 갔다가 안에서 소리가 너무 커서 놀랐다니까. 어휴, 근데 그게 다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사모님이 나가신다고 해도 그 강소영이란 여자랑 우리가 잘 지낼 것 같지는 않아. 내 생각엔 지금 이 사모님이 제일 좋아. 평소에 우리한테 어려운 거 시키지 않잖아.”“맞아요.”원래 그들은 부잣집 아가씨인 심윤아의 집안이 망하자 깨고소해하며 그녀를 비웃었지만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생각하자 다들 표정이 어두워졌다.그렇다, 심윤아를 얕잡아 보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그녀가 떠나도 앞으로 또 새로운 사모님이 오실 것이다. 그리고 새로 온 사모님은 심윤아보다 좋을 거란 보장이 없다.만약 그때 가서 그들에게 어려운 일을 시키면...불확실
그녀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아직 휴대폰을 잡고 있던 심윤아는 화면에 진수현의 이름이 뜨는 것을 보자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이렇게 된 마당에 무슨 일로 나한테 전화하는 걸까?”심윤아는 전화를 받을지 말지 망설였다.두 사람은 이미 이혼까지 했는데 이보다 더 나쁜 일은 없을 거다. 전화 한 통 받는 건 괜찮겠지?그녀가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리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결국 전화를 받으려 할 때 벨소리가 끊겨버렸다.그래서 심윤아는 할 수 없이 심호흡하고 다시 진수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자 그녀는 먼저 설명했다.“미안, 방금 좀 바빴어.”그녀가 말을 마치자 전화기 너머에서는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갑자기 “풉” 하고 웃음소리가 들렸다.“이선우랑 같이 있느라 바쁜가 봐? 내가 방해한 거 아니야?”심윤아는 어이가 없었다.“...”그녀와 이선우는 아무 사이도 아니기 때문에 진수현이 두 사람 사이를 의심할 때 저도 모르게 반박하려고 했으나, 전에 그의 앞에서 이미 인정해 버렸기 때문에 그 순간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지금 진수현은 그녀와 이선우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을 것이다. 어젯밤에도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하지만 이제 더 이상 설명은 필요 없는 것 같아서 심윤아는 결국 침묵하기로 했다.그런데 그녀의 침묵은 진수현에게 인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그래서 어젯밤에 윤아와 선우는 함께 있었던 게 틀림없네.’순간 진수현은 큰 실망감에 이를 악물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한참 뒤에야 심윤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집에 아직 내 물건이 남아 있어서... 나 오늘 가서 짐 좀 챙겨도 돼? 그리고 우리 둘이 이혼한 거 어머님 아버님한테...”심윤아는 말하다가 갑자기 호칭을 잘못 부른 것을 깨달은 듯 멈추고 다시 고쳐서 말했다.“우리 이혼한 거 아직 아저씨 아줌마한테 말 안 한 거야?”그녀는 진수현과 결혼하기 전에 썼던 호칭으로 그의 부모님을 불렀다.아저씨, 아줌마.그 말을 듣고 진수현의
뚜뚜...귓가에 들려오는 신호음 소리는 마치 가시처럼 그녀의 가슴을 콕콕 찔렀다.한순간 심윤아는 그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자신의 물건도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중요한 물건을 두고 왔기 때문에 진수현이 집에 없을 때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심윤아는 주현아에게 자신의 생각에 대해 말했다.“너 어제저녁에 이미 나한테 말했었잖아. 나 차도 있고 다른 친구들도 불렀어. 이제 짐 옮길 때 우리가 도와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서 잘 챙겨.”주현아가 자신을 이렇게까지 세심하게 준비했을 줄은 몰랐다.“현아야, 고마워.”“아이고, 우리 사이에 고맙긴.”“네 친구들까지 부를 필요는 없어. 짐이 많지 않아서 나 혼자 가도 돼.”그 말을 듣고 주현아는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말했다.“너 혼자 간다고? 안돼. 나랑 같이 가. 너 혼자 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려고?”“무슨 일이 생기겠어? 그래도 내가 오랫동안 생활했던 곳이고 우리 두 집안도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데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거야?”심윤아의 말을 듣자 주현아는 갑자기 자신이 지나치게 걱정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씨 가문도 명망이 있는 집안이라 그녀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정말 내가 같이 안 가도 되겠어?”“진짜 괜찮아. 어차피 얼마 없어. 나 먼저 병원 갔다가 물건 가지고 올 거야.”“그래... 그럼 혼자 조심해. 어제처럼 그러지 말고.”어제의 일을 떠올리자 심윤아의 눈빛은 살짝 어두워졌고 그녀는 그저 미소만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심윤아는 병원으로 출발했다.어제 병원에 다녀오지 않았기 때문에 김선월은 그녀를 보자마자 어제 어디 갔었냐고 물었다.심윤아는 할머니를 속이고 싶지 않아서 웃으며 말했다.“할머니, 어제는 중요한 볼일이 있어서 못 왔어요.”김선월도 심윤아에게 중요한 볼일이 있었다는 것을 듣고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젊은이들은 자신만의 프라이버시가 있어서 어떤 건 잘 말하려고 하지
심윤아는 제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결국 뭔가를 다짐한 듯 돌아서서 떠나려고 했다.그런데 돌아서자마자 병실 입구에 서 있는 진수현을 발견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그 순간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잠시 뒤 심윤아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할머니 뵈러 왔어...”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호칭을 바꾸었다.“어르신 뵈러 온 거야.”진수현은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그는 마치 그녀를 못 본 것처럼 무시하고 스쳐 지나갔다. 그가 지나고 간 공기 속에 마치 얼음 부스러기가 들어있는 것 같았다.심윤아는 제 자리에 십여 초 동안 서 있다가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자신의 자리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조용히 떠났다.심윤아가 떠난 후 진수현은 그녀가 서 있던 자리를 돌아보고 천천히 시선을 거두었다....심윤아는 진씨 가문 저택으로 가서 짐을 챙겼다.그녀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집사와 도우미들이 재빨리 다가와 가족을 만난 것처럼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사모님, 드디어 돌아오셨네요.”“사모님, 어제는 어디 가셔서 밤새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 엄청 보고 싶었어요.”“그래요, 사모님. 집으로 돌아오셔서 참 좋네요. 배고프진 않으세요? 뭐 드릴까요?”예전에도 그들이 이렇게 열정적으로 자신을 대했었던가?갑작스러운 환영에 심윤아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저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그들과 인사를 나눈 뒤에야 심윤아는 위층으로 올라가서 자신의 물건을 챙겼다.정리할 물건은 많지 않았다. 평소에 갖고 다니는 물건 외에 옷 같은 것들은 따로 챙기지 않기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려갔다가 도우미들에게 들킬 것이다.오늘 이선희와 진수현 두 사람 다 집에 있지 않아서 심윤아는 간단히 짐을 챙긴 후 재빨리 떠났다.도우미들은 일 층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사모님이 오늘 돌아오신 건 대표님과 화해했다는 뜻 아닌가?”“맞을걸? 부부니까 싸우기도 하고 바로 화해하기도 하는 거지.”그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