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그런 대답이 나올 줄은 생각지 못했던 것 같았다. 직원은 심윤아와 진수현을 번갈아 보더니 조심스럽게 진수현에게 물었다. “그럼 진수현 씨 생각은 어떠세요?”조금 전 질문에서 직원은 분명 기대로 반짝이던 진수현의 눈빛을 보았었다. 하지만 진수현은 이젠 눈도 마주치지 않고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심윤아 말대로 해요.”‘큰일 났네. 이 커플은 설득 못하겠어.’직원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혼 신고를 마무리했다. 이혼 신고 접수를 마치고 진수현과 심윤아의 이혼 절차가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심윤아와 진수현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곧 구청에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심윤아는 겨울의 차가운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겨울바람에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흩날렸고, 얼굴은 칼로 에이는 듯이 아파왔다. 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다른 한 손을 진수현에게 내밀며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고마웠어.”“넌 이제 자유네.”진수현은 심윤아와 악수하려고 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한마디 툭 던져놓고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겨진 심윤아만이 그 자리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구청 앞의 바람은 유난히 시끄럽게 불어왔다. 심윤아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겨울바람에 날려 산발이 되었다. 심지어 머리카락이 얼굴을 찰싹찰싹 때리고 있었다. 얼굴에 닿은 머리카락은 축축하고 차가웠다. 그녀도 모르는 사이, 심윤아의 얼굴은 눈물로 젖어있었다. 눈물은 마치 틀어놓은 수도꼭지처럼 주체하지 못하고 아래로 줄줄 흘러내렸다.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고 이미 더는 신경 쓰이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진짜 그 순간이 찾아오니, 심윤아의 마음은 누가 구멍이라도 낸 것처럼 공허하고 허전했다. 그런 기분은 심윤아를 숨 막히게 했다. 구청을 오가는 사람 중에는 누구보다 행복한 마음으로 혼인신고를 하러 온 경우도 있고, 또 누군가는 죽상인 얼굴로 이혼신고를 하러 온 경우도 있다. 심윤
몇 초 후, 크고 따뜻한 외투가 그녀에게 걸쳐졌다. 곧이어 들려오는 것은 한숨 소리였다. “이렇게까지 울다니. 그 인간이 그렇게 좋아?”심윤아가 다시 고개를 들어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잔뜩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또 낯선 사람인 줄 알았네.”그 말에 이선우가 살포시 웃음을 흘렸다. “너에게 외투를 벗어주는 낯선 사람은 없어.”이선우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부드럽게 눈물을 닦아주었다. 눈물을 닦아내자 흐릿하던 시야가 또렷해졌다. 심윤아는 그제야 이선우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짙은 걱정으로 가득했다. 입술과 턱에는 아직도 까진 상처와 멍이 있었다. 진수현의 주먹에 맞았던 흔적이었다. 금방 닦아냈던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혼자였을 땐 괜찮았는데, 이선우가 눈앞에 있자 심윤아는 어쩐지 조금 민망해졌다. 그녀는 울며 이선우에게 말했다. “미안. 나 잠시...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는 것 같아.”이선우의 눈빛에 이상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여전히 부드러운 손길로 아무 말 없이 심윤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하지만 심윤아의 눈물은 마를 새도 없이 흘러나왔고, 그의 손수건은 곧 심윤아의 눈물로 젖어버렸다. 추운 날씨라 젖은 손수건을 쥐고 있는 손은 차고 시렸다. 참다못한 이선우가 말했다. “날이 너무 추운데, 내 차에 가 있을래?”심윤아는 아직도 조용히 눈물을 훔치고 있었고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심윤아의 모습에 이선우는 그녀를 품에 안고 싶었지만 또 갑작스러운 자신의 행동에 심윤아가 놀랄까 봐 결국은 옷 위로 손을 올려 어깨를 감쌌다. “가자.”이선우에게 이끌리자 못이라도 박힌 듯 움직이지 않던 발걸음이 드디어 떨어졌다. 하지만 한 발짝 움직였을 뿐인데, 발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아마도 너무 오래 서 있었던 탓에 발이 저린 모양이었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 심윤아를 다행히도 이선우가 재빨리 부축했다. “왜 그래?”이선우가 걱정 어린 말
이선우의 차는 구청 앞에 세워져 있었다. 한참 동안 조용히 심윤아를 바라보던 이선우가 막 차에 시동을 걸려고 하는데, 심윤아의 품에 있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 하지만 깊은 잠에 빠진 심윤아는 전혀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선우는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가져와 통화버튼을 눌렀다. “윤아야, 나 구청 앞에 도착했는데, 네가 안 보이네? 너 어딨어?”청아한 여자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여자의 말에 이선우가 구청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앞에는 과연 검은색 패딩을 입고 작은 크로스백을 메고 있는 여자가 구청 입구 앞에서 심윤아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선우는 그 여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심윤아의 제일 친한 친구인 주현아였다. 주현아를 알아본 이선우가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이선우예요.”구청 입구에서 두리번거리던 여자가 이선우의 말을 듣고 멈칫 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는 조금 경계심을 띄며 물었다. “이선우? 누구세요? 윤아는요?”이선우는 어이가 없어 말을 잇지 못했다. ‘날 잊었어?’“저 잊으셨어요? 어렸을 때 윤아랑 자주 같이 있었던.”그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주현아는 한참 만에야 기억을 떠올렸다. “아, 이선우 씨였구나. 지금 윤아랑 같이 있어요?”“네. 울다가 지쳐서 지금 차에서 잠들었어요.”“차에서요?”잠시 머뭇거리던 주현아는 곧 다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이선우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선우가 차창을 내리더니 주현아에게 손짓했다. “봤어요. 선우 씨 차예요?”주현아가 통화하며 물었다. “네.”이선우 차라는 것을 확인한 주현우가 얼른 휴대폰을 손에 쥐고 뛰어왔다. 생각하던 이선우는 차에서 내려 주현아와 마주했다. 차가 있는 곳으로 뛰어온 주현우는 먼저 창문에 달라붙어 눈을 감고 있는 심윤아를 한참 쳐다보더니 갑자기 고개를 돌려 물었다. “윤아는 잠이 든 거예요, 날 보기 싫은 거예요?”예상외의 질문에 이선우가 멈칫하더니 어이없다는
하지만 조금 전 통화에서 숨을 제대로 고르지 못할 정도로 울던 심윤아를 떠올린 주현아는 조금 머뭇거렸다. ‘겨우 잠든 것 같은데, 내가 깨우면 또 우는 거 아냐?’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주현아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바로 이때 이선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요.”그 말에 멈칫한 주현아가 고개를 돌려 이선우를 쳐다보았다. 이선우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디로 가실 거예요? 모셔다 드릴게요. 윤아도 좀 더 자게 놔두고요.”그제야 주현아는 이선우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고마워요.”주현아가 얼른 휴대폰을 넣고 차에 올라탔다. 심윤아는 조수석에서 잠이 들었던 터라 주현아는 뒷좌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선우까지 올라타자 그들을 태운 차는 곧 구청 앞에서 사라졌다. 얼마간 주행한 뒤, 심윤아가 그렇게 빨리 잠에서 깨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자 이선우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어디 가실래요?”뒷좌석에 앉은 주현아가 얼른 대답했다. “저희 집으로 데려가는 게 좋겠어요.”지금 이런 상황에 갈 수 있는 것은 주현아 집밖에 없었다. 어쨌든 진수현과는 이혼했으니 집으로 데려다줄 수는 없었다. 곧 주현아는 이선우에게 주소를 알려주었고 이선우는 주현아의 집을 향해 운전했다. 주현아는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이성우와 깊은 잠에 빠져있는 심윤아를 번갈아 보며 입술을 짓이겼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결국 다시 말을 삼켰다. ‘됐어. 윤아가 일어나면 그때 물어보자.’구청에서 멀지 않은 것이라 이선우의 차는 곧 주현아의 집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릴 때가 되었지만 심윤아는 아직도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주현아가 감탄했다. ‘사람이 속상하면 이 정도로 깊은 잠에 빠질 수도 있구나.’주현아가 심윤아를 깨우려는데 이선우가 그녀를 만류했다. “깨우지 마세요. 더 자게 놔둬요.”이선우가 그렇게 얘기하니 주현아도 심윤아를 깨우지 않고 가만히 놔뒀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차에서 내렸고 이선우가 심윤아를 공주님 안기로 안았다. 주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심윤아는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심윤아는 꽤 오랫동안 잠들었다. 깨어나니 주변은 어두웠고 익숙한 환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한참을 조용하게 둘러보다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차리고는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다. 주현아의 집이었다. 이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주현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전히 조용한 방 안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오래 잤는데 왜 아직도 안 일어나는 거야. 설마 무슨 일 생긴 거 아냐?”말을 마치기 무섭게 심윤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아야.”주현아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얼른 심윤아에게 달려갔다. “인간아, 드디어 일어난 거야?”주현아는 침대맡에 있던 조명을 켰다. 아까는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불빛으로 간신히 집안을 확인했었다. 갑작스레 환해진 눈앞에 적응하지 못한 심윤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눈이 환한 불빛에 적응했다. “응.”“다행이야. 배 안 고파? 내가 국수 좀 했는데.”말하기 전엔 몰랐는데 말하고 나니 허기진 배가 느껴졌다. 비록 입맛은 없었지만 배 속의 아이는 배고플 것이 분명했다. 심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배고파.”“일어나서 밥 먹어.”주현아가 손을 뻗어 심윤아를 부축했다. 주현아가 이끄는 대로 몸을 일으키던 심윤아는 일어나는 순간 가슴에서 찌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아.”갑작스러운 통증에 심윤아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며 손으로 가슴을 꾹 눌렀다. 심윤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그래?”그 모습에 깜짝 놀란 주현아가 다급하게 물었다. 심윤아는 아파서 허리도 펴지 못하고 있었다. 주현아는 어쩔 수 없이 심윤아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뭐야, 대체 왜 그러는 거야? 119부를까?”말하며 주현아는 다급하게 휴대폰을 찾았다. 그러나 그녀가 막 휴대폰을 찾아 119에 전화하려는데 심윤아에게 제지당했다. “괜, 괜찮아. 그냥 갑자기 가슴이 아파서 그래.”심윤아는 갑자기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왜 이 상황이 이렇게 익숙한 것 같지?
“알아.”심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설명서 봤어. 통증이 심하고 오래 지속되면 병원에 가야 한댔어. 하지만 난 괜찮잖아?”“괜찮긴 뭐가 괜찮아. 통증도 증상이야. 안 그러면 왜 아픈 건데? 너 분명 요즘 제대로 쉬지 못해서 그래. 아니면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거나. 안 되겠어. 내가 널 데리고 병원에 가서 제대로 검사받아야 마음이 놓이겠어.”“알겠어, 알겠어.”주현아의 잔소리에 심윤아는 알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 진수현에게도 검사를 받아보라고 했어야 했다. ‘그 뒤로 다시 아픈 적 있나 모르겠네…’생각하던 심윤아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두 사람은 이미 분명 이혼한 사이였다. 앞으로는 전혀 상관없는 남남인데, 왜 이런 순간에서 진수현을 생각하는 걸까?오늘 구청 앞에서 악수조차도 거부했다. 심지어 그는 심윤아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런 인간을 내가 왜?’‘이젠 정말 정신 차려야 해, 심윤아. 너랑 진수현은 애초부터 안되는 거였어.’“윤아야, 무슨 생각해?”주현아가 눈에 초점이 없는 심윤아를 보며 호기심에 물었다. 그 말에 심윤아가 생각을 멈추었다. 그녀의 입가엔 옅고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쓸데없는 생각 좀 했어.”심윤아와 주현아 사이엔 숨길 얘기가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주현아도 바로 심윤아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눈치챘다. “쓸데없는 생각인 거 알면, 하지 마.”주현아의 목소리에 답답함이 묻어났다. “어차피 이젠 이혼한 사이야. 이제부터 어떻게 살지, 그거나 생각해.”심윤아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래야지.”심윤아의 모습에 주현아가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심윤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됐어. 어떻게 되든, 너에겐 내가 있잖아. 게다가 넌 지금 혼자도 아니고. 너에겐 아이가 있어. 아이가 너에게 힘을 줄 거야.”“맞아. 나에겐 우리 아기가 있지.”만약 아기가 없었다면 심윤아는 자기가 이토록 용기 있는 선택을 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음을
“커플을 맺어주려고 그랬다고?”이때 주현아는 어리둥절해서 저도 모르게 물었다.“누구랑 누군데?”심윤아는 한참 침묵하다가 말했다.“진수현이랑 강소영.”“...”한참 뒤 주현아가 말했다.“나 진짜 스스로 목을 졸라 죽이고 싶을 지경이야.”심윤아는 그녀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알고 고개를 들어 웃었다.“됐어. 난 괜찮아. 틀린 말도 아닌데 뭐. 두 사람 커플 맞잖아.”“커플은 개뿔.”주현아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만약 강소영이 진수현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강소영을 신경 쓰지도 않았겠지? 목숨을 구해준 은혜로 마음을 얻었을 뿐이야.”그 말을 듣자 심윤아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고개를 떨구고 말했다.“됐어. 그 얘긴 그만하자.”“내가 잘못했어.”주현아는 무안한 듯 혀를 내밀며 말했다.“너 먼저 좀 쉬어. 내가 면을 삶아 놓을 테니까 조금 있다가 일어나서 좀 먹어.”“그래.”주현아가 나가자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심윤아는 손을 들어 눈가의 눈물을 닦았다.이번이 마지막이다. 앞으로 그녀는 다시는 진수현 때문에 눈물 흘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그날 밤 심윤아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이선희는 한참 기다리다가 이상하다 싶어 진수현에게 물었다.그는 집에 돌아온 뒤로 서재에 들어가 틀어박혀 있었다. 이선희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는 책상 앞에 앉아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윤아는?”이선희가 물었다.심윤아의 이름을 듣자 진수현은 마치 가슴이 찢기는 듯했지만 입술을 앙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전부터 두 사람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던 이선희는 그의 표정을 보고 무슨 일이 일었음을 확신했다.그녀는 입술을 앙다물다가 물었다.“왜, 너희 둘 사이 나빠졌어?”진수현은 그녀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말했다.“저 바빠요.”“뭐가 그렇게 바쁜데?”이선희는 그의 앞에 놓인 노트북을 가리키며 코웃음을 쳤다.“꺼진 검은 스크린을 쳐다보느라 바쁜 거야?”집에 돌아오고부터 지금까지 그의 노트북은 켜진 적이 없었다.진수현은 눈썹을 찌푸
밖으로 나갈 때 이선희는 너무 화가 나 머리가 찌릿찌릿 아팠다.그런데 그때 갑자기 그녀는 무언가가 생각난 듯 발걸음을 멈추었다.진수현은 그녀의 아들이기 때문에 엄마로서 자신의 아들이 어떤 성격인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가 화내는 모습을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까지 분노한 건 처음이었다.교양까지 버릴 정도라니.그렇게 생각하자 순간 이선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그렇다면...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이선희가 떠나자 서재는 다시 조용해졌고, 진수현은 제 자리에 한참 서 있다가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지만 머릿속에서 이선희가 가기 전에 했던 말이 끊임없이 맴돌았다.“혹시라도 윤아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후회하지 마.”마치 마음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그에게 심윤아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는 꼭 후회할 것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 가서 데려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런데 또 정신 차리고 보면 우스웠다.무슨 일이 생긴다고?심윤아는 이선우와 같이 있지 않은가?진수현에게 오랫동안 갇혀 있던 심윤아는 요즘 따라 이혼을 요구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이혼하고 나서 이선우와 만나려는 게 아닐까?이제 자유로워졌으니 아마도 이선우의 품으로 뛰어들었을 것이다.통화가 안 되는 건 이선우와 함께 시간을 보내느라 전화를 못 받는 것일 수도 있다. 무슨 큰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비록 두 사람은 이미 이혼하고 남이 되었지만 진수현은 지금 이 순간 심윤아가 이선우와 같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했다. 성인 남녀가 저녁에 같이 있으면 무엇을 할지 안 봐도 뻔하다.진수현의 머릿속에서 저도 모르게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젠장!”생각만 해도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진수현은 손으로 책상 위의 모든 물건을 쓸어 던졌다.방 안에서 갑자기 물건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물건이 떨어지고 부서져도 진수현의 흥분된 마음은 전혀 가라앉지 않고 오히려 더 심각해졌다. 가슴은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