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출근한 고서연은 온 오전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는 듯했다.점심시간에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기술팀 동료가 고서연의 넋이 나간 표정을 보고 장난치듯 물었다.“법의관님 왜 그러세요? 임 형사님이 휴가 갔다고 하더니 법의관님 정신도 휴가 갔어요?”“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고서연은 상대를 흘겨보면서 아무 반찬이나 집었다.“법의관님, 잘못 집었어요. 그거 생강이에요.”박가희도 오전에 고서연의 상태가 뭔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법의관님도 이참에 휴가 내고 쉬는 건 어때요? 어제 나한테 준 그 샘플 뭔가 섞인 게 많더라고요. 내가 그나마 실력이 있길래 채취했지, 그렇지 않으면 채취하지 못했어요.”기술팀 동료가 툴툴거렸다.“그럴 리가요. 제가 채취한 거라서 기준에 100% 부합될 텐데요?”박가희는 자신의 기술에 무척이나 자신이 있었다.그 얘기를 듣던 고서연은 해부실에 CCTV가 있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만약 어제 안성우가 다녀갔었다는 걸 다른 사람이 알기라도 한다면 끝장이었다.고서연은 바로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어제 CCTV 영상을 지우려고 해부실로 달려갔다. 해부실에 도착한 그녀는 어제 CCTV 영상을 확인했다.마침 그녀가 화장실로 갔을 때의 장면이 나타났는데 홀로 해부실에 있던 안성우가 DNA 샘플을 바꿔치기하는 걸 보고 말았다.‘성우가 왜 이런 짓을...’고서연은 다른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은 DNA 샘플을 다시 채취하는 게 급선무였다. 문제는 이미 시신을 처리한 상황이라 DNA를 채취하기 더 어려워졌다.하지만 고서연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 DNA를 성공적으로 채취했고 바로 기술팀 동료에게 가져다줬다.가장 먼저 결과를 알고 싶었던 그녀는 기술팀 밖에서 기다렸다.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는데 안성우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서연아, 보고 싶어. 지금 날 만나러 와줄 수 있어?”안성우의 목소리에 취기가 있는 걸 봐서 꽤 많이 마신 듯했다.“지금 일하는 중이야.”고서연이 인내심 있게 대답했
양구환이 보낸 문자를 본 나는 바로 알아차렸다. 기술팀 동료가 매치하는 DNA를 찾았고 그리고 그 시신이 나라는 것을 말이다.나는 급히 국과수로 돌아가는 고서연을 쳐다보았다.아직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는 걸 봐서는 그 시신이 나라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고서연이 도착하자마자 양구환과 다른 동료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봤는데도 내가 보이지 않자 의아해하며 물었다.“태환이 찾았다면서요? 어디 있어요?”그녀의 질문에 동료들은 고개만 푹 숙일 뿐 아무도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왜 그래요? 왜 다들 말이 없어요? 태환이는요? 어디 다쳤어요? 어디 있는데요? 지금 가볼게요.”사람들이 꿈쩍도 하질 않자 고서연은 양구환에게 물었다.“양 팀장님, 태환이 어디 있어요?”양구환은 고개를 숙인 채 고서연의 해부실 쪽을 가리켰다.고서연은 뭔가 이상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고 양구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임태환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어디 있어요? 팀장님, 지금 저 놀리시는 거예요?”고서연이 고개를 돌리자 박가희가 다가왔다.박가희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고 울지 않으려고 이를 꽉 깨물었다. 그녀는 해부실 문을 열어 해부대 위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고서연이 해부실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었고 시신 한 구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이 시신이 태환이었어?”
박가희는 그녀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고서연은 잠깐 멈칫했다가 웃음을 터트리더니 밖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농담하지 말아요. 태환이 대체 어디 있어요?”대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서연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기만 할 뿐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기 두 손으로 직접 약혼자의 시신을 망가뜨렸다는 사실을.양구환이 다가와 고서연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법의관님,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거 알아요. 휴가 내고 당분간 좀 쉬어요.”고서연이 아무 반응이 없자 양구환은 다시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털썩.고서연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져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나는 그녀를 부축하고 싶었지만 영혼이라 잡을 수가 없었다. 고서연의 몸이 나의 두 팔을 그대로 지나쳐 바닥에 쓰러졌다.나는 슬픔에 사무쳐 쓰러진 고서연을 내려다보았다. 예전이었더라면 마음이 아파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을 테지만 지금은 아무 느낌이 없었다.고서연과 관계가 좋은 동료 두 명이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동료들이 며칠이라도 그녀 옆에 있어 주겠다고 했지만 고서연은 억지 미소를 쥐어짜면서 거절했다.동료들은 고서연이 혹시라도 바보 같은 짓을 할까 봐 걱정했다. 고서연은 절대 그럴 일 없다고 재차 말했다. 어쨌거나 직접 범인을 잡아서 나 대신 복수해야 하니까.두 동료는 그제야 시름 놓고 그녀의 집에서 나왔다.그들을 배웅한 후 고서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목놓아 울부짖었다.“태환아, 나 화내지 않을 테니까 제발 돌아오면 안 돼? 내가 잘못했어. 널 때리는 게 아닌데. 제발 나 좀 용서해 줘, 응? 네가 없으면 나 어떻게 살아.”고서연은 숨이 넘어갈 듯이 울다가 결국 또 정신을 잃고 말았다. 혹시라도 생명에 위험이 있을까 봐 그녀를 깨우려고 여러 방법을 써봤다.하지만 계속 그녀의 몸을 통과할 뿐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왔다 갔다 했다.그러다가 문득 내가 움직일 때 바람이 살짝 부는
그날 밤 고서연은 자신이 저지른 죄를 상세하게 적은 고발장을 작성했다. 이렇게 하면 징역을 선고받고 감옥에 갈 수도 있었지만 나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이 길을 택했다.그리고 인터넷에 검색하여 그 철물점 사장이 안성우라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 증거들이 있으니 안성우도 더는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고발장을 제출하여 증인과 물증 모두 확보한 상태라 고서연과 안성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잡혔다.“법의관님, 왜 그랬어요.”양구환은 고서연의 고발장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고서연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기 싫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팀장님, 태환이가 절 용서할까요?”“난 널 탓한 적이 없어.”나는 옆에서 바로 대답했다. 고서연이 나의 시신을 망가뜨려도, 나의 마지막 구조 전화를 꺼버려도 전혀 탓하지 않았다. 탓하려면 그녀를 너무 사랑한 나를 탓해야지.“태환이는 법의관님을 탓하지 않을 거예요.”양구환이 한숨을 내쉬고는 계속 말했다.“태환이가 법의관님 어머님 사건을 조사하는 걸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만약 자기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법의관님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서 평생 죄책감 가지고 살지 않길 바란다고 했어요. 이 말도 얘기하지 말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태환이는 고아라 평생 고생한 애예요. 죽어서도 다른 사람이 미워하게 할 수는 없어요.”양구환의 말에 고서연이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안성우는 그리 쉽게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계속 부정하다가 경찰이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를 내놓자 그제야 진실을 털어놓았다.최영옥이 안성우가 다른 사람과 하는 얘기를 우연히 듣게 되면서 안성우가 법을 어기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마침 그때 경찰들이 범죄조직을 대대적으로 소탕할 때라 안성우는 최영옥이 이 사실을 나에게 알릴까 봐 두려워 최영옥을 지켜봤다.그러다가 이튿날에 최영옥이 삼계탕을 들고 나를 찾으러 경찰서로 온 걸 알게 된 안성우는 사실이 들통날까 봐 건달 몇 명을 불러 최영옥을 죽인 것이었다.아무런 흔
내 이름은 임태환, 생전에 강력계 형사였다. 이젠 영혼이 되어 나의 약혼녀인 고서연의 곁에서만 맴돌았다.“서연아, 큰일 났어. 와서 나 좀 도와줘.”안성우의 전화를 받은 고서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하던 일을 멈추고 그에게로 달려갔다.안성우는 그녀의 첫사랑이었고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랐다. 그가 입만 열면 고서연은 무슨 일이든 다 오케이했다.전에 내가 너무 안성우만 신경 쓰는 거 아니냐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고서연은 짜증을 내면서 퉁명스럽게 대답했었다.“나랑 성우는 그냥 일반 친구야. 제발 그런 말도 안 되는 질투 좀 하지 마.”이번에 안성우가 살인을 저질렀고 고서연에게 시신을 처리해달라고 했다. 고서연은 이런 일까지도 대신 처리해줬다.그러나 이 사실은 몰랐다. 그 시신의 주인이 나라는 것을.
“성우야, 이번이 마지막이야.”고서연은 능숙하게 장갑을 끼고 시신의 지문을 공구로 싹 다 지웠다.시신의 오른팔에 있는 흉터를 발견하고는 가족에게 들킬까 두려워 황산으로 흉터를 부식시켜버렸다. 그러고는 시신의 몸에 또 다른 특징이 있나 꼼꼼하게 살폈다.“왼쪽 복부에 흔적이 있어. 수술 자국 같아.”고서연은 시신을 살피면서 말했다.나와 고서연은 만난 지 몇 년이나 됐지만 한 번도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었다. 그녀는 나에게 혼전 순결주의라고 했고 나도 그녀의 생각을 존중하기로 했다. 하여 내 팔과 복부에 상처가 있다는 걸 아예 모르고 있었다.옆에 있는 안성우는 고서연의 말에 당황하면서 숨소리도 내질 못했다. 고서연이 황산으로 흉터를 지운 후에야 완전히 시름을 놓았다.“신장이 하나밖에 없는 것 같아.”고서연은 시신의 왼쪽 복부를 눌렀다. 텅 빈 걸 보니 그녀의 추측이 맞았다.안성우는 고서연이 뭔가라도 알아차릴까 봐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다 처리하면 시신은 어디에 버리면 될까?”“들키지만 않으면 아무 곳에 버려도 돼.”안성우는 알겠다고 한 후 고서연을 빤히 보며 물었다.“아직도 약혼자랑 냉전 중이야?”그러자 고서연이 코웃음을 쳤다.“갑자기 그 사람 얘기는 왜 꺼내고 그래?”안성우는 고서연의 표정만 봐도 아직 내가 고서연과 냉전 중인 걸 알아챘다. 대답을 알고 난 후에는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사실 그가 확인하려 했던 건 고서연이 아직 내가 사라진 걸 아는지 모르는지였다.한 달 전에 나는 고서연과 심하게 싸웠고 그 뒤로 우린 계속 냉전 중이었다.내가 문자를 보내도 답장이 없었고 심지어 집에도 들어오질 않았다.고서연은 시신을 다 처리한 후 장갑을 벗더니 시신의 머리를 힐끗 보았다. 이미 생김새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뭉개졌고 멀쩡한 피부라곤 없었다.하여 당연히 누구인지도 알 리가 없었다. 고서연이 물었다.“대체 이 사람한테 원한이 얼마나 깊길래 얼굴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놨어? 아는 사람은 아니지?”안성우는 제 발 저린 나
두 사람의 신음이 내 귓가에 들려왔다. 그 소리는 귀를 막아도 내 영혼을 뚫고 그대로 전해졌기에 아무 소용이 없었다.그리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나의 영혼은 자석에 이끌린 것처럼 고서연의 옆에서만 맴돌았다.나는 내 목숨보다도 중요하게 여겼던 약혼녀가 나를 죽인 범인과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걸 가만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너무도 역겨워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또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고서연, 언젠가는 저 시신이 나라는 걸 알게 될 텐데... 약혼자를 죽인 살인자와 잔 것도 모자라 살인자를 도와 내 시신을 없애버렸다는 걸 알게 되면 제정신으로 살 수 있겠어?’나는 왠지 모르게 복수의 쾌감이 들었다. 그 생각에 나의 마음도 많이 편해졌다.고서연과 안성우는 나의 시신 옆에서 한 시간 넘게 역겨운 짓을 했다.집으로 돌아온 고서연이 현관문을 열자 칠흑 같은 어둠이 펼쳐졌다. 그녀는 불을 켜고 곧장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에서 차가운 코코넛 음료수를 꺼냈다.냉장고 안에서 야채 썩은 냄새가 풍겼다. 고서연은 코를 막고 썩은 야채를 정리했다.그리고 우유 한 병이 있었는데 유통 기한이 하루 남았고 생산 날짜는 일주일 전이었다. 날짜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그 시신을 떠올렸다.그녀는 시신을 보자마자 바로 일주일 전에 죽었다는 걸 알아챘다. 지금까지 썩지 않은 걸 보면 안성우가 시신을 보관하려고 꽤 많은 공을 들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고서연은 안성우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생각하지 않으려고 고개를 내저었다.그러다가 내 방문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 개지 않은 빨래들이 널브러져 있었다.그녀는 옷을 개인 후 옷장 안에 넣었다. 그런데 옷을 넣다가 그만 실수로 뭔가를 떨어뜨리고 말았다.나는 고서연에게 프러포즈하려고 준비한 반지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다.반지 케이스를 열어 안에 있는 반지를 본 고서연은 몇 초 동안 멍하니 넋을 놓다가 다시 싫은 티를 내면서 옷장 안에 던져버린
한 달 전 우리 경찰서는 다른 관할 구역 경찰서와 함께 힘을 합쳐 범죄조직을 소탕했다. 한 달 내내 연속 야근한 바람에 너무 바빠서 고서연의 어머니 최영옥의 생일조차 까맣게 잊고 말았다.최영옥은 나의 일이 힘들다는 걸 이해했고 한 달 내내 야근한 나를 걱정했다.그날 밤 최영옥은 나에게 몸보신해주겠다고 직접 삼계탕을 끓여 경찰서까지 가져다줬다.최영옥의 전화를 받고 대문 앞으로 만나러 나가려던 그때 마침 당직을 서던 경찰이 범인을 잡고 심문하려 했다.나는 따라 들어가서 범인을 심문한 바람에 최영옥과 만나려 했던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다.범인 심문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고서연이 화를 내면서 나를 찾아왔다.최근 사건이 별로 없어 고서연은 야근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던 그때 고서연이 다짜고짜 나의 뺨을 후려갈겼다.“어떻게 우리 엄마를 잊어버릴 수가 있어?”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최영옥이 계속 경찰서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게 떠올랐다.“미안, 미안. 진짜 깜빡했어. 지금 당장 가서 사과드릴게.”내가 밖으로 달려나가려는데 고서연은 그 자리에 서서 꿈쩍도 하질 않았다. 왜 그러냐고 물으려던 그때 양구환이 어두운 얼굴로 밖에서 들어왔다.“임태환, 법의관님, 잠깐 따라와요.”양구환의 사무실로 들어가서야 최영옥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어머님이 돌아가셨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양구환은 최영옥이 경찰서 밖에서 나를 기다리다가 몇몇 건달을 만났다고 했다. 최근 범죄조직을 소탕하느라 건달들의 보스를 내가 잡았는데 나에게 복수하기 위해 최영옥을 기절시킨 다음 팔과 다리를 잘라서 근처 하수구에 버렸다고 했다.나는 그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어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양구환을 쳐다보았다.양구환은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 있던 고서연이 테이블에 엎드린 채 목놓아 울부짖었다.“임태환, 이 나쁜 자식아. 조금만 더 빨리 나와서 우리 엄마를 데리고 들어갔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