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관님, 사망자 DNA 채취했어요.”박가희는 밤새 야근하여 겨우 나의 시신에서 DNA를 채취했다.“기술팀에 넘기면 사망자 신원을 알 수 있어요.”고서연은 박가희가 들고 있는 용기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것을 망가뜨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눈치였다.“법의관님, 밤새 야근해서 먼저 들어가 잠 좀 잘게요. 이건 법의관님이 기술팀에 전해주겠어요?”박가희는 하품하면서 나가버렸다.고서연은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망설였다. 법의관으로서 절대 이런 짓을 해선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전에 안성우를 도와 시신을 처리하면서 이미 안성우와 한배를 타게 되었다. 안성우가 잡힌다면 고서연도 빠져나갈 수 없었다.고서연이 망설이던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열어보니 안성우였다.“여긴 어떻게 왔어?”안성우는 고서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들어와 문을 닫아버렸다.“보고 싶어서.”그가 고서연의 얼굴을 어루만지려 하자 고서연이 말했다.“다른 사람한테 들키면 곤란해져. 그러니까 얼른 나가.”안성우는 고서연의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해부실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해부대에 놓인 나의 시신을 보면서 떠보듯 물었다.“경찰 쪽에서 뭐 좀 알아낸 거 있어?”고서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더니 박가희가 건네준 DNA 용기를 서류로 슬쩍 덮어버렸다. 안성우는 고서연의 수상한 움직임을 캐치했지만 까발리진 않았다.그는 고서연을 품에 끌어안고 다정하게 말했다.“서연아, 다시 내 옆으로 돌아와. 난 진심으로 널 사랑해. 내가 진작 얘기했었지? 임태환은 너랑 어울리지 않는다고. 걔만 아니었더라면 어머님도 돌아가시지 않았어. 어머님이 널 얼마나 힘들게 키웠는데 복을 누리지도 못하고 임태환 때문에 돌아가시다니...”안성우가 내 얘기를 꺼내자 고서연이 버럭 화를 냈다.“다시는 내 앞에서 그 사람 얘기 꺼내지도 마. 생각만 해도 역겨우니까. 애초부터 걔를 만나는 게 아니었어.”‘내가 역겨워?’그렇다. 고서연의 마음속에는 늘 안성우뿐이었다.그때 고서연은 안성우를 질투하게
정리를 마친 고서연이 화장실에서 나와 보니 안성우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시신에서 채취한 DNA 샘플을 기술팀에 가져다주기로 결심했다.조금 전 화장실에서 그녀는 생각했다. 안성우를 도와 시신을 처리할 때 이미 잘못된 길로 들어섰기에 더는 이대로 잘못된 선택을 해서는 안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동안 배운 지식이 헛되이 되니까. 그녀가 해야 하는 건 사망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었다.마지막 조사 결과가 그녀와 연관이 있더라도, 처벌을 받는다고 해도 다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서연은 DNA 샘플을 기술팀에 가져갔다가 오는 길에 양구환을 만났다.양구환은 그녀를 보자마자 다급하게 물었다.“법의관님, 태환이 요즘 연락 있어요? 우리가 전화해도 계속 받질 않아요.”고서연은 양구환의 말을 듣고 나서야 일주일 동안 임태환의 문자를 받지 못했다는 걸 알아챘다.고서연이 고개를 내젓자 양구환은 애가 타기만 했다.“태환이는 절대 문제가 생기면 피하는 애가 아니에요. 일주일이나 연락이 없는데 설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죠?”그녀도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임태환은 싸웠다고 해서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연락이 없는 건 정말 이상했다.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임태환과의 마지막 연락이 9일 전 저녁 7시 23분에 머물러있었다.임태환은 그녀에게 연속 세 번 전화했고 그 후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카톡 문자도 9일 전이었는데 굿모닝이라는 문자가 마지막이었고 SNS에도 올라온 게시물이 없었다.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혹시 바람 쐬러 해외로 나간 건 아닐까요?”양구환은 고서연의 말을 듣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한참 머뭇거린 후 입을 열었다.“태환이 법의관님 어머님 죽음에 관한 진실을 조사하러 나갔었어요.”고서연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임태환의 원수 때문에 엄마가 죽은 거 아니었어? 근데 무슨 진실을 조사해?’“태환이가 그 건달들의 목표가 처음부터 법
고서연이 옷장 안의 옷을 다 들춰내서야 가장 깊숙한 곳에서 그 명함을 찾아냈다. 그리고 옷장 맨 아래층에 숨긴 서류 봉투 하나를 발견했는데 안에 신장 기증 계약서가 들어있었다.몇 년 전 고서연이 요독증에 걸려 급히 신장 이식을 받아야 했다.나는 그녀 몰래 검사했다가 나의 신장이 그녀에게 적합하다는 사실을 알고 한쪽 신장을 고서연에게 기증했다.하지만 이 사실을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다. 고서연이 나에게 보답하려고 내 옆에 있어 주는 건 싫었으니까.고서연을 사랑했지만 그녀가 부담을 갖는 건 싫었다.그녀는 서류를 보고서야 내가 예전에 신장을 기증한 적이 있다는 걸 알았다.“왼쪽 신장?”그 글자를 본 순간 고서연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굳어버렸다. 그때 그 시신도 왼쪽 신장이 없었다는 사실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고서연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불길한 예감이 마구 밀려왔다.‘그 시신 설마 임태환은 아니겠지?’바로 그때 고서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기술팀 동료의 전화였는데 DNA 검사 결과가 나왔고 데이터에서 찾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그 소리에 고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왜냐하면 경찰서 사람들의 DNA가 전부 데이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술팀에서 검사한 DNA가 데이터에 없는 사람이라면 그 시신도 임태환이 아니라는 걸 뜻했다.더 확실하게 하려고 고서연이 또 물었다.“그럼 우리 데이터랑 비교해봤어요?”“네. 매치하는 사람이 없었어요.”확답을 듣고 나니 고서연은 그제야 한시름을 놓았다.‘다행히 임태환이 아니었어.’고서연의 옆에서 떠돌고 있던 나는 한숨만 내쉬었다.시신에서 채취한 DNA를 안성우가 바꿔치기했으니 당연히 나의 DNA와 매치할 리가 없었다.고서연은 또다시 임태환에게 전화했지만 여전히 꺼져있었다. 하여 카톡을 보냈다.[나 다 알았으니까 우리 얘기 좀 해.]세 시간이 지났지만 임태환은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고서연은 임태환의 SNS를 열어보았다. SNS도 마지막 로그인한 날짜가 9일 전이
이튿날 출근한 고서연은 온 오전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는 듯했다.점심시간에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기술팀 동료가 고서연의 넋이 나간 표정을 보고 장난치듯 물었다.“법의관님 왜 그러세요? 임 형사님이 휴가 갔다고 하더니 법의관님 정신도 휴가 갔어요?”“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고서연은 상대를 흘겨보면서 아무 반찬이나 집었다.“법의관님, 잘못 집었어요. 그거 생강이에요.”박가희도 오전에 고서연의 상태가 뭔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법의관님도 이참에 휴가 내고 쉬는 건 어때요? 어제 나한테 준 그 샘플 뭔가 섞인 게 많더라고요. 내가 그나마 실력이 있길래 채취했지, 그렇지 않으면 채취하지 못했어요.”기술팀 동료가 툴툴거렸다.“그럴 리가요. 제가 채취한 거라서 기준에 100% 부합될 텐데요?”박가희는 자신의 기술에 무척이나 자신이 있었다.그 얘기를 듣던 고서연은 해부실에 CCTV가 있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만약 어제 안성우가 다녀갔었다는 걸 다른 사람이 알기라도 한다면 끝장이었다.고서연은 바로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어제 CCTV 영상을 지우려고 해부실로 달려갔다. 해부실에 도착한 그녀는 어제 CCTV 영상을 확인했다.마침 그녀가 화장실로 갔을 때의 장면이 나타났는데 홀로 해부실에 있던 안성우가 DNA 샘플을 바꿔치기하는 걸 보고 말았다.‘성우가 왜 이런 짓을...’고서연은 다른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은 DNA 샘플을 다시 채취하는 게 급선무였다. 문제는 이미 시신을 처리한 상황이라 DNA를 채취하기 더 어려워졌다.하지만 고서연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 DNA를 성공적으로 채취했고 바로 기술팀 동료에게 가져다줬다.가장 먼저 결과를 알고 싶었던 그녀는 기술팀 밖에서 기다렸다.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는데 안성우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서연아, 보고 싶어. 지금 날 만나러 와줄 수 있어?”안성우의 목소리에 취기가 있는 걸 봐서 꽤 많이 마신 듯했다.“지금 일하는 중이야.”고서연이 인내심 있게 대답했
양구환이 보낸 문자를 본 나는 바로 알아차렸다. 기술팀 동료가 매치하는 DNA를 찾았고 그리고 그 시신이 나라는 것을 말이다.나는 급히 국과수로 돌아가는 고서연을 쳐다보았다.아직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는 걸 봐서는 그 시신이 나라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고서연이 도착하자마자 양구환과 다른 동료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봤는데도 내가 보이지 않자 의아해하며 물었다.“태환이 찾았다면서요? 어디 있어요?”그녀의 질문에 동료들은 고개만 푹 숙일 뿐 아무도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왜 그래요? 왜 다들 말이 없어요? 태환이는요? 어디 다쳤어요? 어디 있는데요? 지금 가볼게요.”사람들이 꿈쩍도 하질 않자 고서연은 양구환에게 물었다.“양 팀장님, 태환이 어디 있어요?”양구환은 고개를 숙인 채 고서연의 해부실 쪽을 가리켰다.고서연은 뭔가 이상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고 양구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임태환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어디 있어요? 팀장님, 지금 저 놀리시는 거예요?”고서연이 고개를 돌리자 박가희가 다가왔다.박가희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고 울지 않으려고 이를 꽉 깨물었다. 그녀는 해부실 문을 열어 해부대 위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고서연이 해부실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었고 시신 한 구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이 시신이 태환이었어?”
박가희는 그녀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고서연은 잠깐 멈칫했다가 웃음을 터트리더니 밖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농담하지 말아요. 태환이 대체 어디 있어요?”대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서연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기만 할 뿐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기 두 손으로 직접 약혼자의 시신을 망가뜨렸다는 사실을.양구환이 다가와 고서연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법의관님,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거 알아요. 휴가 내고 당분간 좀 쉬어요.”고서연이 아무 반응이 없자 양구환은 다시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털썩.고서연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져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나는 그녀를 부축하고 싶었지만 영혼이라 잡을 수가 없었다. 고서연의 몸이 나의 두 팔을 그대로 지나쳐 바닥에 쓰러졌다.나는 슬픔에 사무쳐 쓰러진 고서연을 내려다보았다. 예전이었더라면 마음이 아파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을 테지만 지금은 아무 느낌이 없었다.고서연과 관계가 좋은 동료 두 명이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동료들이 며칠이라도 그녀 옆에 있어 주겠다고 했지만 고서연은 억지 미소를 쥐어짜면서 거절했다.동료들은 고서연이 혹시라도 바보 같은 짓을 할까 봐 걱정했다. 고서연은 절대 그럴 일 없다고 재차 말했다. 어쨌거나 직접 범인을 잡아서 나 대신 복수해야 하니까.두 동료는 그제야 시름 놓고 그녀의 집에서 나왔다.그들을 배웅한 후 고서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목놓아 울부짖었다.“태환아, 나 화내지 않을 테니까 제발 돌아오면 안 돼? 내가 잘못했어. 널 때리는 게 아닌데. 제발 나 좀 용서해 줘, 응? 네가 없으면 나 어떻게 살아.”고서연은 숨이 넘어갈 듯이 울다가 결국 또 정신을 잃고 말았다. 혹시라도 생명에 위험이 있을까 봐 그녀를 깨우려고 여러 방법을 써봤다.하지만 계속 그녀의 몸을 통과할 뿐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왔다 갔다 했다.그러다가 문득 내가 움직일 때 바람이 살짝 부는
그날 밤 고서연은 자신이 저지른 죄를 상세하게 적은 고발장을 작성했다. 이렇게 하면 징역을 선고받고 감옥에 갈 수도 있었지만 나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이 길을 택했다.그리고 인터넷에 검색하여 그 철물점 사장이 안성우라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 증거들이 있으니 안성우도 더는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고발장을 제출하여 증인과 물증 모두 확보한 상태라 고서연과 안성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잡혔다.“법의관님, 왜 그랬어요.”양구환은 고서연의 고발장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고서연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기 싫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팀장님, 태환이가 절 용서할까요?”“난 널 탓한 적이 없어.”나는 옆에서 바로 대답했다. 고서연이 나의 시신을 망가뜨려도, 나의 마지막 구조 전화를 꺼버려도 전혀 탓하지 않았다. 탓하려면 그녀를 너무 사랑한 나를 탓해야지.“태환이는 법의관님을 탓하지 않을 거예요.”양구환이 한숨을 내쉬고는 계속 말했다.“태환이가 법의관님 어머님 사건을 조사하는 걸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만약 자기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법의관님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서 평생 죄책감 가지고 살지 않길 바란다고 했어요. 이 말도 얘기하지 말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태환이는 고아라 평생 고생한 애예요. 죽어서도 다른 사람이 미워하게 할 수는 없어요.”양구환의 말에 고서연이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안성우는 그리 쉽게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계속 부정하다가 경찰이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를 내놓자 그제야 진실을 털어놓았다.최영옥이 안성우가 다른 사람과 하는 얘기를 우연히 듣게 되면서 안성우가 법을 어기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마침 그때 경찰들이 범죄조직을 대대적으로 소탕할 때라 안성우는 최영옥이 이 사실을 나에게 알릴까 봐 두려워 최영옥을 지켜봤다.그러다가 이튿날에 최영옥이 삼계탕을 들고 나를 찾으러 경찰서로 온 걸 알게 된 안성우는 사실이 들통날까 봐 건달 몇 명을 불러 최영옥을 죽인 것이었다.아무런 흔
내 이름은 임태환, 생전에 강력계 형사였다. 이젠 영혼이 되어 나의 약혼녀인 고서연의 곁에서만 맴돌았다.“서연아, 큰일 났어. 와서 나 좀 도와줘.”안성우의 전화를 받은 고서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하던 일을 멈추고 그에게로 달려갔다.안성우는 그녀의 첫사랑이었고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랐다. 그가 입만 열면 고서연은 무슨 일이든 다 오케이했다.전에 내가 너무 안성우만 신경 쓰는 거 아니냐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고서연은 짜증을 내면서 퉁명스럽게 대답했었다.“나랑 성우는 그냥 일반 친구야. 제발 그런 말도 안 되는 질투 좀 하지 마.”이번에 안성우가 살인을 저질렀고 고서연에게 시신을 처리해달라고 했다. 고서연은 이런 일까지도 대신 처리해줬다.그러나 이 사실은 몰랐다. 그 시신의 주인이 나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