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철, 넌 내 주먹맛을 보았으니 잘 알겠지. 네가 말하지 않으면, 믿거나 말거나, 난 네 얼굴을 그어버릴 거다. 온 얼굴의 여드름만으로 이미 충분히 못생겼는데 거기에 칼자국까지 생기면 정말 끔찍할 거야. 앞으로 장가도 못 가고 평생 홀아비로 살아야겠지.”하지철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 더듬거리며 말했다.“난, 말할 수 없어...”그의 말을 듣고 하예정은 그녀의 고향 친정 식구들이 그녀를 상대하려고 꿍꿍이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그녀는 두 경호원에게 말했다.“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세요, 아무래도 내가 사촌 동생을 잘 모셔야겠어요.”“누나, 누나, 나절로 들어갈게, 저 사람들 내 몸에 손 못 대게 해. 손힘이 너무 세.”하지철은 벌떡 일어나 쫓기듯이 하예정을 따라 가게로 뛰어 들어갔다.하지철은 하예정의 손에 걸리면 이익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녀한테 반죽음이 되게 얻어맞을 거란걸 잘 알고 있었다.가게에 돌아오자, 그는 하예정에게 의자를 가져다주고 물을 따라주며 부산을 떨었다.“말해, 그들이 나를 미행하라고 시켰지? 네가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내가 지금 어떤 신분인지 너도 잘 알고 있겠지? 내가 명령만 하면 바로 너희들의 그 계획을 똑똑히 조사할 수 있으니까. 네가 말하면, 내가 너를 택시에 앉혀 곱게 집에 보내줄게.”“...”“말할래, 안 할래?”하예정이 주먹을 부르쥐었다.“하예정, 감히 나를 때리려고...? 아니, 누나, 할 말 있으면 좋게 말해, 내가 다 말할 테니. 그들이 나더러 누나를 미행해 사진을 찍으라고 시켰어. 셋째 누나가 누나의 말과 행동을 따라 하도록 .”말을 들은 하예정의 눈빛이 반짝였다.심효진과 숙희 아주머니도 눈빛을 주고받았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하지철의 말을 듣고 바로 하씨 가문의 계획을 짐작할 수 있었다.“그리고 또?”하예정이 담담하게 물었다.하지철은 여기까지만 알고 있다고 딱 잡아뗐다.“예정누나, 그들은 일을 상의할 때 내가 어리다고 참여시키지 않아, 이번만 내가 필요 해서 나에게 조
하지만 할아버지의 눈에 하예진 누나는 하예정 누나만큼 가치가 없었다.하나는 이혼하고 아이를 데리고 혼자 사는 불쌍한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갑부 전씨 가문의 사모님인데, 누가 더 가치가 있는지 세 살짜리 어린애도 다 알고 있다.“썩 꺼져!”“누나, 택시비는...”하예정이 눈을 부릅뜨자 하지철은 얼른 도망쳤다.‘자기도 남을 속이며 말한 대로 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하예정 같은 사촌 누이가 다 있지?’하지철은 하예정한테 욕설을 퍼부으며 둘째 형이 세 든 집으로 돌아갔다.타이어 4개가 모두 납작해진 둘째 형의 고급 차는 몰고 올 수 없으니 둘째 형이 스스로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다행히 차 키는 가져왔다.하지문은 사촌 동생이 하예정에게 발각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예정의 가게 문 앞에 차를 두고 왔다고 하자 화가 치밀어 하지철의 다리를 걷어차며 욕설을 퍼부었다.“아무리 무서워도 도망갈 때 차를 몰고 와야지, 차 키만 가지고 돌아오면 어떡해!”하지철은 걷어차이면서도 감히 화를 내지 못하고 주눅이 들어 말했다.“둘째 형, 하예정이 칼로 타이어를 찔러 펑크내는 바람에 차를 몰고 올 수가 없었어. 말리려고 했는데, 속도가 너무 빨라서...”하지문은 살점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몇 개 펑크났는데?”하지철이 손가락 네 개를 내밀었다.“타이어 하나를 바꾸는데도 돈이 엄청 많이 드는데, 네 개나 펑크내다니!”하지문은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 “지철아, 우리 계획은 말 안 했겠지?”하지명이 서둘러 사촌 동생에게 물었다.“말하지 않았어.”그는 확실히 모든 계획을 하예정에게 말하지 않았다. 하예정을 몰래 촬영한 목적만 말했을 뿐이다.하지명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이 일은 우리만 알고 있고, 절대 말하면 안 돼. 하예정 부부에게 알려지면 실행할 수 없어.”하지철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형, 그 점은 나도 잘 알고 있으니 근심하지 마. 말하지 않았으니.”“내 차는 어떡해?”하지문은 그의 차가 몹시 아까웠다.타이어 4개를 모두 교체하려면,
하지철이 떠난 후 심효진이 걱정되어 친구에게 말했다.“예정아, 그들이 너를 바꿔치기하려고 계획하고 있는지도 몰라.”“가능성이 있는게 아니라 정말 계획하고 있어.”카운터에 앉아있는 하예정의 얼굴에 약간의 피로가 어렸다.두 자매는 정말 팔자도 사납다. 그런 쓰레기들과 한 가족이 되다니. 그것도 아주 가까운 혈족이니 말이다.“하지철이 말하는 셋째 누나는 너보다 나이가 많은 거야?”“나이가 같아, 내가 그녀보다 일주일 먼저야.”하예정은 같은 해에 태어나 지신보다 일주일 어린 사촌 여동생을 떠올렸다. 십여 년 동안 보지 못해 기억이 별로 없다. 그녀가 자기와 닮았을까?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그 사촌 동생이랑 같은 반이었는데 누가 좀 닮았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닮았다고 해도 조금 닮았을 뿐인데, 모방한다고 그녀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전태윤을 바보로 아나?상대방이 그녀의 모습대로 성형수술을 한다면 몰라도... “이름이 뭔데?”“하소진이야.”하예정이 말했다.“점심에 전 씨 그룹에 가봐야겠어. 이 일은 태윤 씨에게 맡겨야 해. 하소진은 지금쯤 아마 성형수술을 했을 거야.”전태윤이 속지 않더라도 하예정은 하소진이 자기 모습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하소진의 성형수술을 막을 능력이 없으니, 전태윤에게 맡겨야 했다.이제 그들 부부는 그놈들의 음해 대상이 되었으니, 부부는 한마음으로 그들을 상대해야 한다.“그들은 정말 쓰레기들이네, 이런 악랄한 계략을 다 생각해 내다니.”감히 하소진을 성형시켜 하예정 대신 전씨 가문에 들여보내고, 하예정을 죽이려고 하다니.“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아. 할아버지가 그들을 데리고 와서 소란을 피우며 돈을 요구했을 때, 나는 그들이 멈추지 않을 것을 짐작했어, 내가 그들에게 돈을 준다고 해도 그들은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거야.”그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이익을 챙기려고 할 것이다. “큰 도련님은 절대 속지 않을 거예요.”숙희 아주머니가 긍정적으로 말했다.
“동서남북, 어디서나 항상 바람이 불지.”할머니는 부축하려는 전이진의 손을 밀어냈다.“부축할 필요 없다. 이 할미는 아직 아주 정정하다. 너희들이 장가들고 아이를 낳는 것을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거다.”“그럼, 장가를 안 가겠어요. 할머니께서 200세까지 사시게.”전이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노부인은 전이진을 한 대 때렸다.“이 자식아, 할머니가 오늘 네 큰형을 따라 회사에 온 건 바로 네 종신대사를 위해서다.”“...”전이진은 도망가고 싶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그는 서둘러 할머니를 부축해 소파에 앉히고는 할머니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할머니의 다리를 두드리면서 호기심과 긴장이 어린 말투로 물었다.“할머니, 누가 마음에 드셨어요? 제가 아는 사람이에요?”그는 할머니가 최근에 그에게 주의를 돌리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큰형이 결혼했으니 둘째인 그의 차례가 된 것이다.“할머니, 제가 먼저 말씀드릴게요, 저는 초고속 결혼에 관심이 없어요. 전번처럼 바닥에 드러누우시면서 제가 생명의 은인과 결혼하도록 강요하지 마세요.”노부인이 빙그레 웃었다. “그 방법은 너 형한테 써먹었으니 다시는 안 쓸 거다. 시름 놓아라.”“그럼, 그녀는 누구예요?”“궁금하니?”“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요. 어느 집 딸이 할머니 눈에 들었는지 궁금해요.”그는 아직도 할머니께서 왜 하예정을 형수로 점찍으셨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이해가 안 된 전이진은 이번 기회에 이유를 물었다.할머니가 대답했다.“그때 난 진짜로 불편했었는데 예정이가 구해주었어. 나도 예정이가 정말 좋아서 네 큰형과 맺어주려 한 거다. 어떤 덕망 높은 무당이 너 형과 하예정의 점을 봐주었는데 그들 둘은 일생 부부의 인연이 있다고 하더라.”“...할머니, 어느 절의 무당이 그렇게 대단한데요? 그런 건 웬만한 점쟁이도 다 볼 줄 알아요.”노부인은 그 무당이 누구인지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물 한 잔 따라줘.”“좋아요.”전이진은 얼른 할머니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라 드렸다.할
“이 사람, 여자예요?”그는 사진에 있는 잘생긴 남자를 가리켰다.“그녀와 그의 남동생은 쌍둥이인데, 남매가 똑같이 생겼어. 가족들이 어려서부터 그녀를 남자아이처럼 키운 탓에 외부 사람들은 그녀를 집안의 장손이자 적손이라고 오해하고 있다.”“할머니께선 어떻게 여자인 걸 아셨어요?”허초의 일은 전이진도 들은 적이 있고, 사진도 본 적이 있다. 찬찬히 살펴보지 않으면 허초는 남자처럼 보이지만, 일부러 남자로 꾸민 것은 아니었고 중성적인 차림새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하지만 이 사진 속 훈남은 허초와 달리 남자아이로 키워졌고, 일부러 남자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짙은 눈썹과 날카로운 눈매며, 큰 키에 양복 차림은 누가 봐도 남자로 여길 것이다.전이진이 사진을 뒤집으니 사진 뒤에 상대방의 기본 자료가 있었다.고현, 28세. 현재 고 씨 그룹 회장의 ‘장남’으로서 그룹의 대표직을 맡고 있으며 고 회장의 깊은 신임을 받고 있다. 말수가 적고 말한 대로 하는 행동파이며 골프와 승마를 좋아한다. “할머니, 이게 다예요?”“맞아, 이 정도 자료면 충분하다. 그녀의 성이 무엇이고, 이름이 무엇이며, 몇 살이고, 어디에 사는지만 알면 된다. 더 많은걸 알고 싶으면 직접 알아보거라.”할머니는 그에게서 고현의 사진을 가져오며 말했다.“이건 셋째를 위해 준비한 거다. 고현은 과묵하고 행동파여서 너한테는 어울리지 않고 말솜씨가 좋은 셋째에게 적합하다. 만약 그가 고현과 결혼하게 된다면 앞으로 부부가 재미있게 살 수 있을 거다.”“...할머니, 저도 말을 잘하는데요.”“셋째를 이길 수 있니?”전이진은 말문이 막혔다. 그들 형제 중 셋째의 말솜씨가 제일 좋다.“왜, 고현한테 관심이 있는거냐?”“그건 아니고요... 셋째를 위해 준비한 거라니 다른 사람이 누군지 볼게요.”그는 그제야 다른 사진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한 여자는 얼굴을 거의 가리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눈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리지 않았다. 원래 얼굴이 작은 사람인데 큰 선글라스에 가려 얼굴이 더 작아
“없다. 당분간 너와 셋째의 상대만 골랐어. 나머진 아직 급하지 않다.”“아홉째가 아직 미성년이고, 여덟째가 갓 스무 살이 된 외에, 모두 결혼 나이를 넘었어요. 공정하게 그들도 모두 장가보내셔야죠. 손주며느리가 많아야 증손을 안을 확률이 높아져요.”“난 예정이가 증손녀를 낳아주길 바라고 있다. 그 무당이 말하기를, 예정이는 첫애를 딸을 낳을 팔자라고 했어.”“할머니께서 언제부터 이렇게 미신을 믿으셨어요?”“너 형이 예정이를 정말 좋아하기 시작했을 때부터다. 그것은 선조 님께서 남기신 현학 지식이니 잘 배운 거면 믿을 수 있다.”전 씨 할머니는 말을 마치고 일어섰다.“너를 방애하지 않을게. 난 예진의 가게에 가보겠다. 오랫동안 우빈이를 보지 못해서 너무 보고 싶구나. 예진의 가게도 개업했겠지?”“형수한테서 말씀 못 들었어요.”“너 형과 형수는 사이가 오랫동안 틀어졌는데, 네가 형도 모르는 일을 형수한테서 들었다면 말이 되겠니?.”전이진은 한참 동안 멍해졌다. 할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곰곰이 생각한 후에야 할머니의 말뜻을 이해했다.형님의 성격에 형님이 모르는 일을 자기가 알고 있다면, 형님이 자기를 어떻게 노려볼지 안 봐도 뻔하다.여자도 질투하는 형이니 그들은 더 말할 것도 없겠지.전 씨 할머니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하예정이 회사에 도착했다.그녀는 바쁜 전태윤이 점심을 거를까 봐 미리 점심을 준비해서 왔다.하예정이 차를 전 씨 그룹 입구에 주차하자 그녀를 본 당직 경비원은 날듯이 기뻤다.곧바로 회사 문을 열고 하예정의 차를 들여보낸 다음 얼른 안쪽으로 내선 전화를 걸어 프런트가 전화를 받자 활짝 웃으며 말했다.“사모님께서 오셨습니다.”요즘 대표님께서 심기가 불편하여 회사 전체가 아우성을 치는 것은 바로 사모님 때문이다.오늘, 사모님께서 오셨으니, 그들의 고달픈 생활은 곧 끝날 것이다.물론 보안 부문은 대표님한테 시달리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사모님께서 봄바람처럼 전 씨 그룹
“사모님.”“사모님.”프런트 데스크에 있던 두 직원은 하예정이 들어오자 미소 지으며 깍듯이 인사했다.하예정도 가볍게 웃었다. 프런트 직원은 늘 그녀에게 상냥했다.그중 한 명은 데스크에서 나와 하예정을 데리고 엘리베이터 입구로 가면서 그녀가 들고 있는 도시락통을 힐긋 보았다.“태윤 씨가 요즘 위가 불편해서 도시락 싸 왔어요. 곧 퇴근하죠?”하예정은 일찍 도착했다.프런트 직원이 관심 조로 물었다.“대표님이 위가 불편하시다고요? 그럼 몸조리 잘하셔야겠네요.”대표님은 요즘 매일 일만 하시고 제때 식사를 하지 않았다. 대부분 조 비서가 음식을 포장해서 회사로 가져오는데 그조차도 일이 너무 바빠서 끼니를 거르기가 일쑤였다.이러니 위가 안 아플 수 있나?“네, 이제 곧 퇴근이에요.”프런트 직원이 대답했다.프런트 직원은 하예정을 데리고 대표님 전용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간 후 버튼을 누르고 공손하게 그녀를 안으로 모셨다. 하예정은 도시락통을 두 개 들고 엘리베이터에 타서 프런트 직원에게 활짝 웃으며 인사한 후 홀로 맨 위층에 올라갔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조 비서의 활짝 웃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하예정은 환하게 웃는 얼굴을 마주한 순간 흠칫 머뭇거리더니 조 비서를 몇 번 더 흘겨보며 생각했다.‘이 남자 웃으니까 치아만 보이고 눈이 다 사라졌잖아.’“안녕하세요, 사모님. 저는 전 대표님의 비서 조우진이에요.”“안녕하세요.”하예정도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대표님 지금 시간 되시나요? 저 들어가도 될까요? 방해가 되는 건 아니겠죠?”조 비서가 눈웃음을 지으며 답했다.“그럴 리가요. 노크하고 들어가시면 됩니다, 사모님.”그는 대표님께 서프라이즈를 주려고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다만 부대표님이 안에 계십니다.”조 비서가 미리 알려주었다.전이진은 큰형을 찾아와 할머니가 결혼을 다그치는 걸 하소연하고 있었다. 달랑 사진 한 장 주면서 상대가 어떻게 생겼는지, 몇 살인지, 지금 하는 일은 무엇인지 딱 여기까지만 알뿐 다른 건 전혀 모르니
“예정아, 오면 온다고 말을 하지. 내가 내려가서 마중할 텐데.”전태윤은 아내의 손에 든 도시락통을 얼른 건네받았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힘들까 봐 재빨리 도시락을 책상에 올려놓고 다시 그녀 손을 꼭 잡고는 소파에 가서 앉았다.그는 뜨거운 눈빛으로 하예정을 쳐다봤다.전이진은 한심한 표정으로 큰형을 바라봤다. 만약 눈알을 파서 형수님 몸에 붙일 수만 있다면 큰형은 아마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내가 태윤 씨 회사 처음 오는 것도 아닌데 뭘 마중 나와요. 도시락 싸 왔으니까 식기 전에 얼른 먹어요. 매일 제때 밥 먹어야 위병이 나아요.”전태윤이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고마워, 여보.”하예정은 참지 못하고 방긋 웃는 그의 얼굴을 살짝 꼬집으며 덩달아 웃었다.“태윤 씨 회사에서 오늘 보너스라도 줬어요? 차에서 내려서부터 보는 사람마다 눈웃음을 짓고 있는데 다들 진심으로 우러나온 그런 미소였어요.”전이진이 웃으며 한마디 끼어들었다.“형수님이 오신 건 보너스 받는 것보다 훨씬 기쁜 일이에요.”전태윤은 동생을 노려봤다.와이프가 도시락을 챙겨왔는데 동생이란 놈은 왜 저렇게 눈치도 없이 서 있기만 하는 건지, 얼른 꺼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도련님, 도시락통 이리 가져다주실래요? 제가 음식을 많이 담아와서 두 분 함께 먹어도 충분해요.”전이진은 재빨리 책상 위의 도시락통을 들고 소파 쪽으로 갔다. 그는 자리에 앉아 탁자에 도시락을 내려놓고 뚜껑을 열려고 하는데 전태윤이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순간 전이진은 동작을 멈췄다.전태윤은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에 짙은 눈길로 동생을 한껏 째려봤다.형의 따가운 시선에 전이진은 불편해서 죽을 지경이었다.“형, 그러니까 그게, 형수님이 얼마나 맛있는 음식을 해왔는지 내가 대신 봐주려고 뚜껑을 연 거야.”형의 따가운 시선에도 전이진은 꿋꿋이 도시락 뚜껑을 열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맨 위의 음식을 내려다보았다. 순간 그는 형수님의 음식 솜씨에 감탄을 연발했다.“냄새만 맡아도 벌써 군침 돌아.”전이진은 도
이경혜가 웃었다.“맛있지? 호호호...”말하는 사이에 성소현과 예준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가 돌아왔나 봐요.”하예정이 말했다.우빈은 성소현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안고 미친 듯이 뛰쳐나갔다.그가 넘어질까 봐 걱정된 하예정이 얼른 일어나 따라갔다.이경혜는 따라가지 않고 소파에 앉아 고개를 돌려 하예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이경혜의 얼굴의 웃음기는 이내 사라졌다. 그녀는 일찍 돌아간 여동생 이경희를 떠올렸다.그녀가 아직 살아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이경혜는 자신의 부모님 모두 살아계신다면 대가족이 함께 떠들썩하게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고 동생이 일찍 죽지도, 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여동생이 이 세상에 살아있다면 얼마나 좋을까!‘그 당시 어머니의 특별 비서님은 살아계실지...’이은숙의 특별 비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이경혜가 쓸 수 있는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찾았지만 결국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사람들이 그 노련한 특별 비서에 대해 기억은 없었지만, 이경혜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기억으로 그린 초상화가 맞을지도 모른다.이은화는 수십 년 동안 그 특별 비서를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으나 찾지 못했다.이은화가 그 비서에 대한 인상이 더 깊을 것이다.게다가 만약 살아있다고 해도 나이가 많아서 그 당시 일어난 일을 기억하고 있을지...이경혜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견고한 눈빛으로 속으로 돌아가신 엄마에게 말했다.‘엄마, 제가 반드시 엄마 대신 복수할 거예요. 우리 재산도 반드시 전부 되찾을 거에요! 엄마, 하늘나라에서 꼭 우리 예진이가 강성에서 무사히 우리의 모든 것을 되찾도록 도와주세요! 예진이는 엄마 외손녀예요. 그리고 여동생은... 제가 지켜주지 못했어요.’여동생만 생각하면 이경혜는 마음이 무거워진다.밖에 있던 성소현은 그녀를 향해 달려가는 우빈을 안아 들어 올려 두 바퀴 돌았다. 우빈은 기쁘게 웃으며 성소현에게 말했다.“이모! 더 높이 해줘요! 더요!”성소현
“아, 있어요. 그런데 어린아이예요. 연정 씨 양자인데 용정이라고 해요. 근데 어린아이일 뿐인데... 참! 생각났어요. 지난번에 연정 씨가 남편이 용정을 데리고 놀러 왔을 때 정남 씨가 태윤 씨에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 있어요. 엄청 대단한 거물이 관성에 나타났는데 재빨리 떠났다고 했어요. 어디에서 왔는지 성씨가 뭔지도 조사하지 못했다고 했어요.”용정의 출신을 떠올리며 하예정은 그녀의 상상력을 발휘했다.“이모, 혹시 그 사람이 관성에 한 번 온 게 아닐까요? 예씨 가문을 이용해 관성에서 수작을 부려 무언가 꾸미려는 게 아닐까요?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무언가를 하려면 A시로 가야 할 텐데요.”만약 용정을 노리고 온 것이라면 관성에서 계략을 꾸면 안 될 텐데 말이다.그리고 만약 지난번에 갑자기 나타난 그 거물이 용정을 노리고 왔다면 진작에 손을 썼을 것이다. 용정의 원수는 예씨 가문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다만 정겨울 뒤에 서 있는 신의 의사 일행을 두려워할 뿐이다.이경혜는 용정의 출신을 알지 못했고 이해하지도 못했기에 이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그녀는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이해할 수 없으면 그만둬. 너무 신경 쓰지 마. 여러 번 만난 것은 우연일 수 있지. 정 생각난다면 다음에 또 만났을 때 차라리 연락처를 요구해봐.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면서 천천히 조사해보면 되지 않을까? 그 사모님이 운별 씨와 상관있든 없든 지내다 보면 진실은 결국 드러나게 될 거야. 그런데 꼭 안전에 주의해야 해. 배 속의 아기도 잘 보호하고.”하예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응했다.“알겠어요. 용씨 사모님이 경호원을 거느리고 다니는 것처럼 저도 경호원들을 데리고 다니기 때문에 안전해요. 저도 싸움할 줄 알고요.”“가장 좋은 방법은 운초 씨가 나서서 허점을 찾는 건데. 용씨 사모님과 여운별 씨가 동일 인물이라면 운초 씨가 그녀의 친동생을 가장 잘 알기 때문에 가장 쉽게 허점을 찾을 수 있을걸.”“운초 씨의 시력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어요.”“그래도 허점을 발
이경혜는 한참을 생각한 끝에 입을 열었다.“내가 관성에서 수십 년을 살았거든. 네 이모부에게 시집가면서부터 상류사회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많은 사모님과 재벌가 아가씨들을 알고 있어. 근데 용씨 사모님이라고 들어본 적 없어.”하예정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관성의 사람은 아니라고 했어요. 단지 관성에 조금 머문다고 했고 사업도 모두 외지에 있다고 했어요. 남편도 조용하게 움직이는 편이라서 연회에도 잘 참석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어요.”이경혜가 말했다.“그래도 사업하는 사람이라면 사람과 교제하면서 살아야 할 텐데. 관성의 사람이 아닌데 관성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산다고 해도 사람들을 만나면서 살았을 텐데. 난 용씨 가문이라고 들어본 적 없어.”“아마도 재산이 너무 많은 편이 아니라서 상류 사회층에 다다르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이경혜가 물었다.“근데 이 사람을 조사봐서 뭐 하려고? 무슨 문제라도 있어?”하예정은 용씨 사모님을 알게 된 과정을 이경혜에게 알려주었다.“저는 그 사모님을 볼 때마다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그래요. 왠지 자꾸 여씨 가문의 여운별을 닮았다고 생각하거든. 운초 씨도 많이 닮았다고 했어요. 운초 씨는 여운별과 20년 넘게 자매로 지냈기에 여운별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거든요. 그 용씨 사모님의 몸매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여운별과 비슷하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용씨 사모님은 여운별이 아니란 말이에요. 여운별이 돈이 없어서 늘 운초 씨를 찾아가 돈을 달라고 난리 치고 있거든요. 며칠 전에도 우리 시댁에 가서 돈 달라고 어찌나 난리를 치는지...”이경혜가 말을 건넸다.“몸매도 비슷하고 목소리도 비슷한데 얼굴이 비슷하지 않다고? 여운별 씨가 다시 나타난 것으로 보면 성형하지는 않았을 거고. 성형하면 한동안은 나오지 못하거든. 그럼 말투와 행동은 어땠어?”“부드럽고 단아해요. 말할 때도 잘 웃고. 근데 어딘가 매우 어색하다고 느껴져요. 그렇다고 흠을 잡으려 해도 흠잡을 곳은 없고요.”이경혜가 다시 입을 열었다.“몇 번 만난 사람일 뿐
이경혜는 말을 하면서 두 사람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유청하 모자는 모두 잠들어 있었다. 이를 본 하예정은 들어가는 이경혜를 막으며 조용히 말을 건넸다.“이모, 편히 쉬게 해요.”이경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문을 조용히 닫았다.우빈은 조금 실망한 모양이다.그는 동생과 잠시 놀아주려고 했다.1층으로 돌아온 우빈은 소파에 앉아 간식을 조금 먹으면서 홀에서 혼자 놀았다.성씨 가문에도 몇 가지 장난감이 있었다. 이는 우빈이가 평소에 성씨 가문에 놀러 왔을 때 성소현이 사준 장난감이었는데 집에 가져가지 않았다.지금은 새로 산 장난감들이 더 많아졌다. 아마도 어린 동생을 위해 사 온 장난감인 듯하다.우빈은 먼저 놀고 있었다.“이모, 제가 사람 한 분에 관해 물어볼 게 있어요.”이경혜는 조카딸을 바라보며 물었다.“누구? 누구에 관해 물어보려고?”이경혜는 전태윤에게 물어보면 모두 해결될 문제를 자신에게 왜 물어보는지 의아해하며 하예정을 바라보았다.하예정은 웃으며 대답했다.“여자 한 분에 대해 알아보려고요. 태윤 씨는 여자에게 관심 없어서 제가 물어본다고 해도 남편이 또 공을 들여 알아봐야 하잖아요.”이경혜는 담담하게 웃었다.“하긴, 태윤 씨가 너에 대한 감정은 유난히 한결같지. 너희들이 이렇게 행복하고 사는 것처럼 소현과 준하 씨도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다.”성기현은 줄곤 이경혜의 곁에 남아있기 때문에 그녀는 걱정하지 않았다.그러나 성소현은 멀리 시집가야 했다.예준하는 지금 성소현에게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잘해주고 있었다. 그는 심지어 성소현을 위해 데릴사위로 장가오고 싶을 마음도 있었다.예준하는 일찍 성씨 가문의 저택 옆에 큰 별장을 구매하고는 앞으로 관성에 오래 머물 계획을 하고 있었다. 성소현이 친정으로 돌아가는 길이 더 이상 가까울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기나긴 인생길에서 앞으로 어떤 변화가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이모,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준하 씨는 분명 소현 언니에게 잘해주실 거예요. 두
“큰이모.”하예정은 웃으며 이경혜를 불렀다.이경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오늘은 네가 우빈이를 데리러 갔구나?”“네. 동명 씨가 오후 내내 바빴거든요. 저는 요즘 반쯤 일하고 반쯤 쉬는 상태라 시간이 되기도 했고요. 그래서 제가 다녀왔어요.”그러면서 하예정은 우빈을 받아 안으려고 손을 뻗으며 말했다.“우빈아, 이제 네가 스스로 걸어야지. 계속 안겨 있으면 이모할머니 힘드실 거야.”그러자 이경혜는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괜찮아, 내가 안고 들어갈게. 우빈이가 부쩍 크긴 했지만 아직 어린아이잖니. 이 정도는 전혀 힘들지 않아.”그럼에도 우빈이는 고분고분 이경혜의 품에서 내려와 작은 발을 바닥에 내디뎠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저 이모할머니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요.”엄마와 작은이모가 늘 당부했었다. 이모할머니는 연세가 많으니 어린아이처럼 계속 안겨 있으면 안 된다고 말이다.이경혜는 우빈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환하게 웃었다.“우리 우빈이는 말도 참 예쁘게 하는구나.”“이모할머니, 그럼 다른 때는 안 예뻐요?”아이의 천진난만한 물음에 이경혜는 더욱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아니야, 우리 우빈이는 언제나 예쁘고 사랑스럽지.”하예정도 그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우빈이는 가끔 어른스럽다가도, 또 어떤 때는 천진난만해서 너무 귀여워요.”이경혜는 우빈이의 작은 손을 잡고 하예정과 함께 안으로 걸어가며 말했다.“우빈이는 똑똑한 아이야. 하지만 아직은 어리니까 장난도 치고 말썽도 부릴 때가 있지. 어린아이가 매일 조용하기만 하면 오히려 걱정되지 않겠니?”“네 그이도 어릴 때는 또래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어. 예의는 바르지만 말수가 적었고 표정도 늘 딱딱했지. 눈빛마저 차가워서 어린애 같지가 않았어. 그때부터 나는 네 이모부에게 말했어. 전태윤 쟤는 크면 분명 냉정하고 무서운 사람이 될 거라고 말이야.성씨 가문과 전씨 가문은 한때 앙숙 같은 사이였지만, 같은 도시에서 살아가다 보니 서로의 소식을 놓칠 수 없었
하예정은 우빈을 부드럽게 안아 올려 자기 무릎 위에 앉혔다.그녀는 조심스레 휴지를 뽑아 눈물이 맺힌 아이의 볼을 닦아 주었다.평소의 우빈이는 해맑고 천진난만했다. 마치 세상에 아무런 걱정도 없는 듯 보였지만 아직 세 살을 갓 넘긴 아이였다. 엄마가 곁에 없다는 사실은 그에게도 여전히 버거운 일이었다. 하예진이 강성시로 떠난 후 하예정 부부가 세심하게 돌봐 주었고 노동명 역시 자주 시간을 내어 곁을 지켜 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따뜻한 손길이 곁에 있어도 엄마의 빈자리는 쉽게 채워지지 않는 법이었다. 가끔 한가로운 순간이 찾아오면 우빈이는 문득 엄마를 떠올렸다.엄마와 통화를 하니 그리움이 더욱 깊어진 모양이었다.“정말요? 그럼 저 울지 않을게요! 엄마, 저랑 아저씨가 엄마한테 가면 엄마 일하는 데 방해되지 않을까요?”우빈은 엄마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만큼 엄마가 바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혹여 자신이 가서 엄마의 일에 폐가 되지는 않을까, 어린 마음에도 걱정이 앞섰다.하예진은 다정한 목소리로 아이를 달랬다.“괜찮아, 주말에 오는 거잖니. 엄마도 주말엔 쉬니까. 설령 쉬지 못하더라도 엄마는 너랑 시간을 보낼 거야.”그녀 역시 아들이 몹시 그리웠다.하지만 강성시에서 해야 할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아 당장은 관성시로 돌아갈 수 없었다.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강성시에서 살게 될지도 몰랐다.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빈이를 강성시 학교로 전학시키는 편이 나을 터였다. 그러면 더 이상 이렇게 떨어져 지내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관성시에서는 동생 부부가 최선을 다해 우빈을 보살펴 주었지만 머지않아 동생에게도 아이가 생길 예정이라 그녀는 동생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우빈이는 금세 기분을 추스르고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그는 유치원에서 있었던 재미난 이야기들을 엄마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어떤 이야기는 몇 번이고 반복했다. 하예진은 아이의 목소리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한 마디 한 마디에 온 마음을 실어 들어주었다.그러다 마침내
“우빈아, 이모가 아저씨 회사에 데려다줄까? 가서 아저씨랑 같이 놀고 있어, 이모는 이모할머니 댁에 가서 아기 좀 보고 올게.”하예정이 다정한 목소리로 우빈이를 달래며 말했다.그러나 우빈은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나도 이모랑 같이 갈 거예요. 이모할머니 집에 가서 아기 볼래요!”곧바로 우빈이는 다시 물었다.“이모, 아기는 언제쯤 나랑 놀 수 있어요? 맨날 이모할머니 집에 가면 자고 있거나 울고만 있잖아요. 울 때는 내가 아무리 달래도 안 그쳐요. 왜 아기는 맨날 그렇게 우는 거예요?”하예정은 우빈이의 작은 손을 꼭 쥔 채 차 앞으로 걸어갔다. 경호원이 문을 열어주자 그녀는 우빈이를 품에 안고 차에 올랐다.자리에 앉은 후에야 그녀는 다정하게 대답했다.“아기는 원래 그래. 아직 말을 못 하잖아. 배고프거나 기저귀가 더럽거나 목이 마르면 그런 걸 말로 표현할 수 없으니 울음으로 알려주는 거야. 울면 어른들이 금방 알아채고 왜 우는지 살펴보게 되거든.”“너도 아기 때는 그랬어. 지금 그 아기보다 더 다루기 힘들었지.”하예정은 장난스럽게 우빈이의 통통한 볼을 살짝 꼬집으며 덧붙였다.“우빈이 너, 태어나자마자 이렇게 컸다고 생각해? 너도 이렇게 조금씩 자란 거야.”우빈은 신기하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나도 아기 때 그랬어요? 근데 난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이모, 왜 어릴 때 일은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아기 때는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거든. 지금 네가 겪는 일들도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져. 한 8년, 10년쯤 지나면 지금의 일들이 마치 꿈처럼 사라질지도 몰라.”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우빈이의 작은 가방을 열어 오늘 유치원에서 가져온 책을 살펴보았다.우빈이는 이제 겨우 세 살 반으로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선생님이 간단한 책 읽기를 가르치긴 했으나 아직은 놀이가 더 익숙한 나이인지라 놀이 형식의 수업이 더 많았다. 매일 한 권씩 읽을 책을 보내주었지만 아직 글씨를 쓰기엔 이른 시기였다.그럼에도 우빈이는 아라비아 숫자도
여운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응, 난 우리 아가씨랑 사이가 정말 좋아. 시부모님과 남편은 늘 사업으로 바쁘다 보니 집에 한가한 사람은 나뿐이라 자연스럽게 아가씨를 돌보게 됐어. 그러다 보니 아가씨도 나한테 더 의지하고, 시어머니보다 나를 더 따르더라고.”“그래서 매일 유치원 등하원도 나만 고집해. 운전기사나 가정부가 데려다주는 건 싫대.”여운별은 자신이 점점 더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지어내는 걸 느꼈다.어차피 여기서 하예정과 우연히 마주치는 게 목적일 뿐, 진짜로 아이를 데리고 갈 필요는 없으니 괜찮았다.하예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애들은 원래 그렇지. 누가 누가 더 많이 곁에 있어 주느냐에 따라 정을 붙이거든. 우리 조카도 그래. 언니가 출장으로 집을 비워도 울면서 엄마 찾는 일은 없어.”“맞아, 우리 아가씨도 똑같아.”여운별은 인내심 있게 아이 이야기를 이어가며 하예정과 대화를 나눴다.하예정은 결혼 전부터 언니를 도와 조카를 돌본 경험이 있었고 지금은 아이를 품고 있는 임산부였다. 넘치는 모성애는 그녀를 더욱 따뜻한 표정으로 물들였고 아이에 관한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두 사람은 생각보다 잘 통하는 듯했다.그때 마침 선생님이 우빈의 손을 잡고 유치원 문을 나서는 모습이 보였다.여운별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하예정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저기, 우리 연락처를 주고받을 수 있을까? 우리 도련님이 필요한 자료가 있으면 앞으로 당신 서점에서 바로 사면 좋잖아. 여기저기 헤맬 필요도 없고 편하잖아.”하지만 하예정은 가벼운 미소만 지으며 대답했다.“내 서점은 저기 그대로야. 이사 갈 일도 없고. 도련님께서 필요한 게 있으면 그냥 들러서 사면 돼.”하예정이 연락처 교환을 거절하자, 여운별은 살짝 불쾌한 기분이 들었지만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렇구나. 그럼 나중에 필요할 때 들를게. 아, 참고로 우리 시댁은 용씨 가문이야. 관성시 토박이는 아니고, 전국 곳곳에 사업체와 집이 있어.”“시어머니가 관성시를 좋아
“아버지, 만약 윤정이가 끝내 떠나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죠?”거의 삼십 년을 이윤정과 남매로 지내왔기에 정일범은 그녀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는 이윤정이 쉽게 떠나지 않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럴 만도 한 게 그녀는 아직도 어머니의 용서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게다가 지금 이윤정에게는 수입원이 없었다. 그런데 그녀더러 강성을 떠나라고 한다면 어떻게 살아가란 말인가?물론 이윤정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평생 안락한 환경에서 자라며 콧대를 높여왔다. 그런 그녀가 남의 밑에서 일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잠시 침묵하던 정군호가 입을 열었다.“더 이상 강성에 머물게 하지 말고 최대한 설득해서 보내도록 해.”“알겠습니다. 사람을 보내서 윤정이를 찾아보고, 찾으면 몰래 돈을 쥐여주고 강성을 떠나게 하죠.”“아버지, 이젠 좀 쉬세요. 저도 좀 피곤해서 잠깐 쉬려고요.”정일범이 말했다.“그래, 밖의 소파에서 눈 좀 붙이렴.”정군호는 그래도 아들을 생각하는 듯했다. 정군호는 아들의 피곤한 얼굴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거실 소파에서 편히 쉬라고 권했다.그리고 정군호도 곧 잠에 빠져들었다.관성은 어느덧 오후 세 시 반이 되었다. 하예정이 심효진에게 말했다.“효진아, 나 우빈이 데리러 유치원 좀 갔다 올게.”심효진이 가볍게 답했다.“그래, 다녀와. 우빈이 데리고 바로 집에 가. 여기서는 사람들이 도와줄 거니까 굳이 다시 오지 않아도 돼.”심효진은 친구가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게 마음에 걸렸다.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응, 우빈이 데리고 큰이모 집에 들를 거야. 아기도 보고.”겸사겸사 아기도 볼 수 있었다.우빈은 아기 보는 걸 참 좋아했다.매번 아기를 보고 나면, 그 작은 생명은 언제 나와서 자신과 함께 놀 수 있을지 묻곤 했다.그러면서 자신의 많은 장난감들을 아기한테 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하예정은 두 명의 경호원과 함께 서점을 나섰다. 떠나기 전, 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