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후에 H시의 계열사로 보내서 몇 년간 일하면서 경험 쌓게 해야겠어. 예정이를 철저하게 내려놓고 좀 더 성숙해진 후에 다시 데려올 거야. 그리고 또 2년 좌우 단련해서 대임을 맡을 수 있으면 그땐 바로 김씨 그룹을 전수할 생각이야. 만약 헤어나오지 못하고 대임을 맡을 수 없다면 우리 김씨 그룹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상속자를 바꾸는 수밖에 없어.”김종헌은 제 아들이 김씨 그룹의 후계자가 되길 엄청 바라고 있지만 전제는 아들이 대임을 맡을 그릇이 돼야 한다. 만약 김진우가 앞날보다 사랑을 더 중시한다면 그는 어쩔 수 없이 많은 조카 중에서 새로운 후계자를 물색해야만 한다.심미란의 낯빛이 살짝 변했다.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다가 말을 꺼냈다.“정월 초나흘에 바로 보내요. 그리고 용돈도 전부 끊어요. 거기서 출근하거든 버는 만큼 쓰게 해야죠. 애가 안일한 삶에 너무 적응한 것 같아요. 예정이가 전씨 그룹 사모님이란 사실도 정월 초사흘에 진우한테 알려줍시다. 그럼 마음 접고 H시에 갈 거예요.”김종헌은 아내의 제안이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H시의 계열사에서 밑바닥부터 시작하게 해야겠어. 그쪽 담당자한테 잘 돌봐달라고 하면 별일 없을 거야. 하지만 더는 안일한 삶을 살 수도 없겠지. 은행카드 전부 정지시키고 H시에 가면 다시 은행카드를 발급받아 월급으로 살아남게 해야겠어.”그들 부부는 김진우가 하예정을 향한 사랑을 전부 내려놓고 김씨 그룹의 중임을 맡을 후계자가 되길 바라며 독하게 마음먹었다.김진우는 부모님이 그를 저 멀리 H시로 보낼 거란 계획을 전혀 몰랐고 하예정도 아무것도 모른 채 깊게 잠들었다.옆에 핫팩처럼 따뜻한 물체가 있어 품에 꼭 끌어안고 단잠에 빠졌다.꿈에서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는 건지 그녀는 가끔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다음 날 아침잠에서 깬 하예정은 전태윤이 옆에 누워있는 걸 발견하곤 한 손으로 머리를 지탱하며 곤히 잠든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다만 머릿속에 감도는 건 꿈에서 본 맛있는 음식이었다.그녀는 꿈에 누군가가 맛있는 음식을
하예정이 아침을 다 차렸지만 전태윤은 여전히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다.그녀는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워있는 남편을 한참 바라보다가 손 내밀어 그의 콧구멍에 살짝 갖다 대고 이마도 짚어보았다. 전태윤은 열이 나는 것도 아니고 숨도 잘 쉬고 있었다.“설마 오늘 아침에 돌아온 거 아니야? 왜 이렇게 깨질 않아?”하예정은 구시렁댔지만 그를 깨우지 않았다. 그녀는 부부의 옷을 정리하며 그가 깨나길 기다렸다. 이따가 아침 먹고 곧바로 출발하면 된다.“띠리링...”하예진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언니.”“제부랑 이미 출발했어?”“아니, 태윤 씨 아직 자고 있어. 이따가 깨나서 아침 먹고 출발하려고. 무슨 일이야 언니?”하예진이 대답했다.“그럼 집에서 기다려. 지금 바로 갈게. 너희 부부한테 설 용돈 준비했는데 까먹고 못 줬네.”“괜찮아 언니, 밖에 비 오고 바람 불어서 엄청 추워. 차도 없고 숙희 아주머니도 없는데 우빈이 데리고 나왔다가 애가 감기 걸리면 어떡해? 진짜 주고 싶으면 설날 아침에 나랑 태윤 씨 언니한테 전화해서 설 인사할 때, 그때 주면 돼. 그냥 인사 치레잖아.”관성에서 설을 쇨 때 용돈 주는 건 한해의 좋은 시작을 의미한다. 액수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서 보통 2천 원에서 4천 원 사이로 돈 봉투에 담아 준다. 가까운 사이여도 2만 원에서 4만 원 정도로 준다. 관성뿐만 아니라 수도권에서 대부분 이 금액으로 주고 있다. 세뱃돈 액수는 늘 그렇듯 많은 편이 아니다.하예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그래 그럼.”“언니, 진짜 우리랑 함께 안 갈 거야?”“응, 난 우빈이랑 함께 보내면 돼. 이젠 대가족을 위해 음식을 차릴 필요도 없고 시중들 필요가 없어서 얼마나 홀가분한지 몰라. 토스트 가게도 개업하지 않아서 이참에 우빈이 데리고 관성에서 실컷 놀아야겠어.”주형인에게 시집간 이후로 그녀는 거의 여행 가본 적이 없다.매일 남편과 아들 주변을 맴돌고 명절 때에는 남편을 따라 시댁에 가서 시댁 식구들의 하루 세끼를 차려야 했다.매년
“얼른 가서 씻어요. 아침 다 차려놨으니 씻고 나와서 밥 먹고 출발해요. 거리가 멀다면서요, 우리 일찍 출발해요.”“뽀뽀해줘.”“왜 내가 해줘야 해요? 태윤 씨가 해주면 안 돼요?”전태윤은 웃으며 그녀를 돌려세우고 머리를 살짝 숙여 그녀의 빨간 입술을 탐했다.다만 하예정이 작은 손으로 그의 입술을 가로막았다.“씻고 나와서 뽀뽀해요.”하예정은 말하면서 그를 밀쳐내고는 뒤돌아서서 캐리어 지퍼를 잠갔다.전태윤은 말을 잇지 못했다.그는 아내에게 더럽다고 미움을 받았다.“씻을 때 수염도 깎아요. 볼 찌를라.”하예정은 캐리어를 끌고 문밖을 나섰다.그녀는 꽃에 물을 주고 반려동물 세 마리까지 전부 챙겼다.반려동물들도 잠시 후 언니네 집으로 보내서 며칠 동안 언니에게 맡기기로 했다.“여보, 나 왔어.”전태윤은 다 씻고 수염도 깔끔하게 깎은 후 방에 돌아와 사랑하는 아내를 불렀다.“얼른 와, 내가 뽀뽀하게.”하예정은 주방에서 다 만든 음식을 들고 나왔다.전태윤은 그녀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녀는 치킨 두 마리가 담긴 그릇을 전태윤에게 건넸다. 전태윤은 그릇을 건네받고 재빨리 그녀 볼에 입 맞추고 나서야 흡족한 듯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오늘은 웬일로 치킨?”하예정이 자리에 앉으며 가볍게 웃었다.“어젯밤에 누가 나한테 밥 사주는 꿈을 꿨거든요. 꿈에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밤새 먹다가 나중에 닭다리 두 개가 남아서 태윤 씨한테 먹이려고 포장하고 싶었는데 도통 잡히질 않는 거예요. 깨고 보니 꿈이더라고요. 그래도 태윤 씨한테 치킨 먹이고 싶어서 사 왔어요.”전태윤은 실소를 터트렸다.‘먹보가 따로 없다니까. 꿈에서조차 먹을 생각이잖아.’“난 닭날개를 좋아해서 저 두 개는 내 거예요. 여보, 일회용 장갑 줄래요? 장갑 끼고 먹으면 손 안 더럽혀서 편해요.”전태윤이 미소를 지었다.“네, 당신 남편께서 달갑게 서비스해드릴게요.”그는 하예정을 도와 일회용 장갑을 가져왔다.“어젯밤엔 대체 어디 갔다 왔어요? 나 처음엔 악몽 꾸고 잠에서 깼는데
하예정은 치킨을 먹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내가 태윤 씨한테 뭐 하나만 숨겨도 가족으로 여기지 않는다며 버럭 화내더니 정작 태윤 씨 좀 봐봐요. 소 이사님이 술 마시러 가자고 불러도 나한테 숨기고, 그래서 악몽까지 꾼 거잖아요.”전태윤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다 내 잘못이야. 다음에 소 이사가 또 불러내면 그땐 같이 가. 네가 대신 내 술을 막아주면 그 사람들도 뭐라 하지 못할 거야.”“그럼 다들 태윤 씨가 아내를 무서워하는 팔불출이라고 생각하겠죠.”“그러라고 하지 뭐. 자기들은 솔로라서 팔불출이 되고 싶어도 자격 없으면서.”하예정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트렸다.그녀는 남편이 건강을 해치는 일만 안 하면 더 간섭하지 않는다.배불리 먹은 후 하예정은 다시 한번 짐 정리를 체크하며 빠트린 게 없는지 확인한 후에야 문밖을 나섰다.그들은 우선 반려동물 세 마리와 차 키까지 하예진에게 갖다 주었다.하예진은 동생 부부를 보더니 그제야 준비했던 용돈을 건넸다.전태윤은 직접 운전하여 아내와 함께 본가로 설 쇠러 갔다.전씨 고택은 조상들이 남겨주신 거라 고전적인 느낌이 물씬 난다고 진작 전해 들었지만 제 눈으로 직접 보니 그녀는 여전히 경악을 금치 못했다.이건 조선 시대에서도 잘 산다는 대갓집 기준의 으리으리한 집이었다.고층 건물 없이 오로지 옛스러운 인테리어로 되어있었고 담장도 매우 높게 쌓아 올렸다. 사방에 CCTV를 설치해 안전 시스템이 매우 철저하게 되어있었다.저택 안에는 정자와 누각이 있었고 굽이굽이 오솔길을 따라가면 가산과 연못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택 안에 들어온 순간 마치 시공간을 초월하여 조선 시대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태윤 씨가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엄연한 도련님이었을 거예요.”전태윤은 아내와 함께 자가의 옛 저택을 거닐며 익숙한 환경을 감상했다. 그는 하예정의 말에 저도 몰래 웃음이 새어 나왔다.“내가 만약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널 만나지 못했을 거야.”그는 지금도 엄연한 도련님이다.전태윤을 협조하기 위해 전
“난 이젠 늙어서 하루하루 시간을 때울 뿐이야. 내가 죽기 전에 저 아이들 장가갈 순 있겠지?”할머니는 관성을 돌아다니며 남은 손자들에게 마땅한 신붓감을 골라줄 생각이었다. 자신이 고른 신붓감을 손자들에게 알린 후 손자들이 알아서 적극 구애하면 되니까.할머니의 미션을 완성하지 못하는 손자는 8월 말에 있을 할머니의 생신 잔치에 참석할 자격이 없다.“할머니는 꼭 만수무강하실 거예요.”“나도 그러길 바라. 증손녀가 태어나는 걸 지켜봐야지 않겠어?”증손녀라는 말에 할머니는 하예정의 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하예정은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볼 거 없어요, 할머니. 오늘 생리 왔어요.”할머니는 말을 잇지 못했다.전태윤이 그토록 노력했지만 아직 할머니께 증손녀를 안겨주지 못했다.전이진을 비롯한 몇몇 형제들은 바로 도시에 돌아갔고 전태윤과 하예정도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그들은 정월 초엿새에 집으로 돌아가서 남은 휴가를 여기저기 여행 다니며 알차게 보냈다. 전태윤은 매일 하예정과 함께 놀러 다녔는데 더는 남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 듯싶었다.하여 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여행지에서 그를 우연히 마주쳤다.그리고 베일에 싸인 전 대표의 아내도 보았는데 미인이 따로 없었다. 다들 그녀가 눈에 익었지만 이름이 좀처럼 생각나지 않았다.사람들은 감히 전태윤 부부에게 다가가 인사하지 못하고 몰래 사진을 찍었다.전태윤은 하예정에게 한없이 자상하고 두 눈에서 꿀 떨어질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이런 모습들을 아름다운 사진으로 휴대폰에 저장했다.전태윤이 널리 알리지 않아도 그들이 알아서 소식을 퍼뜨렸고 전씨 그룹 대표님이 아내를 엄청 아낀다는 타이틀이 따라붙었다.유쾌한 휴가가 끝나고 다들 각자 회사 혹은 학교로 복귀했다. 긴 휴가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사람들은 곧바로 발런타인데이를 맞이했다.하예정은 명절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온통 관성중학교가 곧 개학한다는 생각으로 차 있었다. 그녀와 심효진은 아침 일찍 가게에 돌아가 깨끗이 청소하고 물건을
전태윤이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이에 기자들은 어안이 벙벙했다.아니나 다를까 아내에게 푹 빠진 전씨 그룹 도련님은 사모님의 이름만 물었어도 온화한 표정으로 바뀌었다.전태윤은 최근에 아내와 함께 여기저기 놀러 다닐 때 이토록 자상한 표정을 지었었다. 평소에 그는 차갑고 카리스마가 넘쳐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다.사랑의 힘이 이렇게 대단한 거였구나. 그토록 차갑고 냉정한 남자도 자상하고 애틋한 사람으로 바뀔 수 있다니.“아내는 재벌가 출신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 전씨 일가의 사모님이 되었으니 명문가의 부인으로 거듭난 건 사실이죠. 이름은 하예정이고 올해 나이 26살이에요. 사실 아직 생일이 안 지나서 26살이라고 하는 것도 나이 들어 보이네요.”기자들은 감탄을 연발했다.‘맙소사, 전씨 그룹 사모님 얘기에 그토록 말을 아끼던 대표님이 이렇게 수다스러워진 거야? 잠깐! 하예정?’“대표님, 혹시 사모님 성함이 하예정이라고 하셨습니까?”방금 질문했던 여자 기자가 놀란 표정으로 전태윤에게 되물었다.전태윤은 그녀를 보더니 순간 차가운 눈빛으로 돌변하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내 아내가 하예정인 게 뭐가 잘못됐나요?”지극히 평범한 말이지만 전태윤의 입을 거치니 무엇보다 날카롭게 귀에 박혔다. 질문했던 여자 기자는 저도 몰래 목을 움츠렸다.다만 기자들도 수많은 사람을 접했으니 전태윤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는 비록 늘 차가운 모습이지만 교양이 있어 누군가를 욕하거나 내쫓지 않는다. 방금 질문했던 여자 기자는 다시 용기 내어 말을 이었다.“사모님 성함이 하예정인 건 아무 문제 없지만 이 이름이 너무 귀에 익네요. 아, 생각났어요. 바로 작년 10월에 불효 손녀라는 타이틀을 얻은 그 하예정 씨 맞죠?”여자 기자는 하예정의 신분을 떠올린 후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마치 하에정에게 무한한 기삿거리가 숨겨져 있어 끊임없이 파고들 수 있을 것 같았다.“제 아내는 불효 손녀가 아닙니다. 아내의 고향 식구들이 사악한 마음을 품고 아내와 처형을 집
“네, 아주 행복합니다.”전태윤의 굳은 표정이 또다시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는 온화한 표정으로 바뀌며 입꼬리가 저도 몰래 귀에 걸렸다.독감에 걸렸을 때 하예정이 밤새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그를 챙겨주었다. 비록 매일 한약을 마시라고 다그쳤지만, 역겨워서 토할 지경으로 마셨지만 아내가 그를 향한 사랑만큼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 행복과 달콤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대표님, 사모님과 초고속결혼을 하셨다는데 사실입니까?”전태윤이 솔직하게 대답했다.“네, 맞아요. 혼인신고 하기 전까지 아내를 본 적도 없었어요. 다만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긴 했죠. 아내가 제 할머니를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거든요.”“대표님은 어르신을 위해 아내분과 결혼하셨습니까?”“맞아요, 할머니 때문에 아내와 초고속결혼을 했어요. 다만 이젠 할머니께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어요. 할머니가 끝까지 견지하지 않았다면 저는 예정이를 놓쳤을 겁니다.”“정말 의외네요, 대표님.”전태윤 같은 남자도 초고속결혼을 하다니, 다들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다.바로 이 때문에 전태윤은 혼인 신고한 지 몇 개월이 지났지만 기혼 사실을 완전히 공개하지 않았고 하예정을 지극히 보호해주었다.그랬던 그가 오늘 기자들의 인터뷰를 허락한 것은...기혼 사실을 공개하려는 걸까?몇몇 기자들이 문득 흥분하기 시작했다.그들이 전태윤을 대신하여 그의 기혼 사실을 알리는 것은 무한 영광이니까!“대표님은 초고속결혼 초기에 오늘날 아내에게 푹 빠진 팔불출이 될 거라는 예상을 해보신 적 있나요?”전태윤이 웃으며 대답했다.“전혀요. 미래의 일을 누가 예상할 수 있겠어요? 아무튼 저는 그런 능력 없어요. 여기 만약 예지력을 가진 분이 계신다면 저희 부부가 첫애를 딸 낳을지 아들 낳을지 예측해주실 수 있을까요?”기자들이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사모님께서 혹시 임신하셨나요?”전태윤이 웃으며 말했다.“아직은 아니지만 조만간 그렇게 되겠죠. 저는 귀여운 딸아이가 있었으면 좋겠어요.”뭇사람들은 흥분했던 마음이 확 가
“대표님은 왜 액세서리를 30세트 선물하셨나요? 무슨 의미라도 담긴 겁니까?”전태윤이 본능적으로 대답했다.“별 뜻 없어요. 한 달에 30일이니 우리 예정이한테 액세서리를 30세트 선물해서 매일 다른 스타일로 치장해주고 싶었어요. 그뿐입니다.”뭇사람들은 입이 쩍 벌어졌다.“대표님이 플렉스 하셨네요!”다들 부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남자 기자마저 하예정이 부럽고 질투 났다.그들은 전태윤과 함께 어울리지 못하는 걸 천만다행으로 여겼다. 안 그러면 전태윤에게 비교당해 여자친구조차 찾기 힘들 테니까. 전태윤은 그야말로 사치의 끝판왕이었다.“대표님, 사모님은 이경혜 씨의 외조카이신데 정작 대표님은 성기현 대표님과 사이가 안 좋으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사모님을 위해서 성씨 그룹과 잘 지내보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성씨 그룹 성소현 씨가 공개적으로 대표님께 고백했고 대표님을 엄청 좋아하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이젠 성소현 씨와 하예정 씨가 사촌지간이 되었네요. 이 일은 어떻게 대처하실 생각입니까?”전태윤이 담담하게 대답했다.“사석에서 우린 친척 사이지만 업계에서는 서로 양보 없어요. 다들 제 실력으로 자리를 지켜내야죠. 성소현 씨가 저에게 호감을 가졌던 건 알고 있지만 제가 사랑하는 건 오직 제 아내 하예정 한 명뿐입니다. 우리 부부는 이미 약속했어요. 평생 둘이서 영원히 함께하기로 맹세했거든요. 제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성소현 씨를 마주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요?”기자가 또 물었다.“대표님은 아직 성씨 일가를 방문한 적이 없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만.”“이모님 온 가족이 설 연휴에 여행을 떠나셨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제가 텅 빈 별장을 방문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기자는 말문이 막혔다.전태윤이 차분하고 조리 밝게 인터뷰를 이어갔지만 기자들은 여전히 궁금증을 내려놓지 못했다. 성씨 일가에서 전태윤이 하예정 남편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일까?소문에 의하면 성소현과 하예정 사이가 엄청 좋고 둘은 서로 사촌지간인 걸 확인하기 전부
“형인 씨 마음속엔 아직 네가 있을지도 몰라.”노동명이 말했다.그는 오히려 주형인이 우빈 앞에서 그의 험담을 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주형인이 험담하면 할수록 우빈은 그를 싫어할 것이고 오히려 노동명과 우빈의 정이 더 깊어져만 갈 테니까.노동명은 마침내 우빈이 주씨 집에서 돌아올 때마다 그에게 무척 잘해준 이유를 알게 되었다.우빈도 미안했던 모양이다.주형인이 그의 험담을 했기 때문이다.“형인 씨는 저에 대한 사랑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을 거예요. 저를 사랑했다면 저를 배신하고 상처를 주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주씨 집안 가족들이 저를 괴롭히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을 거예요. 남자가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어떻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어요? 시어머니와 갈등이 생긴다 해도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노력했을 텐데. 어떻게 시어머니와 그의 누나가 저를 비난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었겠어요?”“그 사람은 마음이 편치 않았을 뿐이에요. 제가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만약 형인 씨와 서현주 씨가 아주 행복하게 잘 지내고 그렇게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행복하게 살면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를 기다렸을 텐데. 제가 죽든 살든 상관했겠어요? 우빈에 대한 감정조차 옅어졌을걸요. 그들만의 아기가 생기면 우빈에 대한 감정이 워낙 깊지 않은데다 감정이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노동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문득 화제를 돌렸다.“맞아. 그런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과 일들을 생각하지 말자. 나 내일 관성으로 돌아갈 거야. 예진아, 나랑 같이 가서 새 옷 몇 벌 사 오자. 우빈에게 줄 장난감도 좀 골라줘. 내가 매번 선물한 장난감을 녀석이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하예진도 전남편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진작에 태연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였지만 노동명 앞에서 전남편 얘기를 꺼내면 노동명이 질투할까 봐 걱정했다.교통사고를 당한 후 노동명도 많이 연약해졌다.주로 다리 장애로 자신감을 잃은 노동명은 마음이 매우 약해졌다.노동명
하예진이 물었다.“예정이에게 없고 저한테 있는 게 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동명 씨가 재활을 꾸준히 하시고 제가 관성에 없을 때 자신을 돌보고 시간이 나면 우빈을 돌봐 주세요. 우빈이도 동명 씨를 보러 자주 갈 거예요. 녀석이 지금 자기 아빠보다 동명 씨를 더 좋아하니까요.”노동명은 의기양양하면서 말했다.“그건 내가 우빈에게 진심으로 대해서 그래. 우빈이 친아빠는 늘 우빈이 앞에서 내 험담만 하거든. 우빈이는 똑똑하니까 누가 좋고 누가 나쁜지 잘 알고 있어. 우빈이 친아빠가 내 험담을 하면 할수록 자기 친아빠를 더 싫어할걸.”노동명은 고개를 돌려 하예진을 바라보았다.주형인에 관한 얘기가 언급되자 하예진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그때 하예진이 입을 열었다.“뭘 봐요? 내가 아직도 그 남자를 신경 쓰는 줄 알았어요? 그 사람은 단지 우빈이 아빠일 뿐이에요. 제가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 줄 알았죠? 그 사람을 언급하면 제 기분이 가라앉을 줄 알았어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제가 어떻게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어요? 제가 아직도 사랑했다면 애초에 이혼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마음이 찢어진 이상 최대한 빨리 이혼하는 것도 좋은 일이죠.”주형인도 약속한 대로 그와 그의 가족들은 더는 하예진의 생활을 방해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유일한 연관성은 우빈 뿐이었다.그러나 주형인은 하예진과 노동명이 함께 있는 모습을 태연자약하게 지켜보지 못했다.그는 또 노동명이 친아버지인 자신보다 더 나은 계부로 될까 봐 두려운 마음에 우빈 앞에서 노동명의 험담을 했다.우빈이 아직 노동명을 두려워할 때, 주형인은 우빈 앞에서 노동명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우빈은 노동명을 대신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하기도 했다.오늘날 우빈과 노동명의 사이가 매우 좋으니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주형인 부자가 만날 때마다 주형인은 우빈 앞에서 노동명이 폐인으로 되었기에 하예진과 함께 한다면서 그녀의 발목을 잡는 거나 다름없다면서 노동명의 험담했다.또
모두 웃기 시작했다.전호영은 노동명과 하예진이 돌아오면 요리들이 올라오게끔 미리 준비해 놓았다.그들은 유쾌하게 저녁 식사를 했다.식사 후 고현은 곧 자리를 떠나 고성 호텔로 박 대표를 만나러 갔다.다행히도 하루 호텔과 고성 호텔은 가까웠다. 두 호텔은 길을 건너면 바로 볼 수 있다.그러나 아무리 가까워도 전호영은 고현을 배웅해 주겠다고 고집했다.하예진은 노동명을 밀고 호텔을 나와 호텔 근처 거리를 거닐며 강성의 밤거리를 구경시켜 주었다.“기분은 좀 나아졌어?”노동명이 뒤에 있는 하예진에게 물었다.하예진은 한참 말이 없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네, 많이 나아졌어요. 앞으로 저에게 닥칠 일들이 지금보다 더 가혹할 거에요. 만약 이번 일조차 직면할 수 없다면 제가 강성에 있을 필요도 없이 관성으로 돌아가 계속 저의 레스토랑을 돌보는 게 나을걸요.”그렇게 하면 이경혜의 바람과 기대를 저버리게 될 것이다.노동명은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말했다.“다행이네. 이렇게 오래 돌아다녔는데 뭐 사고 싶은 거 없어? 원하는 게 있으면 내가 선물로 사줄게.”하예진은 웃으면서 대답했다.“제가 사면 돼요. 선물할 필요 없어요.”“난 지금 네 남자 친구거든. 앞으로 남은 인생을 함께할 남자라고. 나도 너에게 선물을 준 적 없는데. 사실 우리 집 객실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는 여자들이 좋아하는 여러 선물로 가득 차 있거든. 전부 내가 너에게 준비한 선물들이야. 어떤 것은 너에게 선물했지만 네가 받지 않은 물건들이고 어떤 것은 내가 너에게 미처 선물하지 못한 것도 들어있어. 네가 받지 않으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먼저 그 방에 넣어두었거든. 앞으로 우리가 한 가족으로 되면 그 물건들은 어차피 너의 것으로 될 테니까. 네가 가지지 않으면 우리 집안의 돈이 낭비되는 거나 다름없을 텐데. 너도 우리 가정의 돈이 낭비되는 게 싫지?”하예진은 말문이 막혔다.과거에 그녀는 노동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재혼하고 싶지 않고 돈만 벌고, 사업을 일으켜 우빈을 잘 키워
전호영은 더는 묻지 않았다.엘리베이터가 두 사람을 1층으로 안내했다.전호영은 엘리베이터에서 고현에게 뽀뽀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었다.그는 고씨 그룹에서 고현에게 체면을 세워 주어야 했다. 어쨌든 고현은 고씨 그룹의 대표님이니까.전호영이 차를 몰고 고현과 함께 고씨 그룹을 떠났고 고현의 운전기사와 경호원들도 두 사람 뒤를 따랐다.식사를 마치고 나면 고현은 또 박 대표와 약속이 있었다.전호영은 그들이 하루 호텔에 도착했을 때 하예진과 노동명은 아직 호텔에 돌아오지 않았다.하예진 일행은 약 30분 뒤에야 호텔로 돌아왔다.하예진은 어두운 얼굴로 노동명을 호텔로 밀고 들어갔다. 노동명은 계속 고개를 돌려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못 듣는 체했다.노동명은 그녀가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위로의 말을 아무리 많이 해도 하예진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고 노동명도 더는 위로하지 않았다.하예진은 스스로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위층으로 올라가 전호영이 안배해 준 식사하는 룸에 도착해서야 하예진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동명이 형.”전호영은 하예진이 노동명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급히 일어나 하예진을 도우려고 했다.“호영 씨, 동명 씨가 혼자 몇 걸음 걸을 수 있어요.”하예진은 전호영의 도움 없이 노동명의 휠체어를 식탁 앞에 세웠고 노동명은 스스로 일어나 두 걸음 걷다가 다시 탁자 앞에 있는 걸상에 앉았다.고현도 일어섰다. 그녀는 예의 바르게 두 사람과 인사를 했다.“돌아오는 길에 차가 막혀서 오래 기다리게 했네요.”하예진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강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돌아왔다.“괜찮아요. 저희도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언니, 일은 다 처리했어요?”모두 자리에 앉은 후 고현은 두 사람에게 각각 따뜻한 차 한 잔을 따라주며 관심 있게 하예진에게 물었다.“다 처리했어요.”하예진이 대답했다.“잘됐네요. 노 대표님, 내일 돌아가시려고요?”고현은 나지막이 물었다.노동명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예진이 보러 온 것뿐이
“엄마.”고현은 진미리의 전화를 받았다.“현아, 퇴근했어?”“네, 막 퇴근하려고 그래요. 왜 그러세요?”“드레스 말고도 평소에 입을 옷도 몇 벌 더 사줄까?”고현은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거절했다.“필요 없어요.”고현은 단지 내일 저녁 연회에 드레스를 입고 참석하여 사람들에게 그녀가 사실 여자라는 것을 알려주어 전호영이 동성애자가 아닌 정상적인 남자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사람들이 더는 색안경을 끼고 전호영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다들 전호영이 고현을 삐뚤어지게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항상 색안경을 끼고 전호영을 바라보았으나 고현은 정상적인 남자라고 여겼다.진미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필요 없어? 여자 신분을 회복하려고 하는 거 아니었어? 내일 저녁에만 드레스 입고 계속 남자 옷을 입고 다니려고?”“네. 원래대로 다니려고요.”고현은 이제 그녀의 가짜 가슴 근육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약간 태평공주기 때문에 가슴 근육을 사용하지 않고 양복을 입어도 남자처럼 보였다.진미리는 계속해서 설득했다.“신분을 드러내기로 했는데 왜 또 남자 행세를 하려고 해? 얼마나 힘들어.”“엄마, 그건 제 습관이에요. 20년 동안의 습관을 단번에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엄마, 저의 요구대로 사주세요. 앞으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하시려면 엄마 아드님 걱정 좀 하세요.”“빈이 그 자식은 걱정해도 소용없어. 그럼 엄마는 네 요구대로 드레스를 사줄게. 그리고 평소 입을 옷도 몇 벌 사 갈게. 옷장에 넣어두었다가 입고 싶을 때 꺼내서 입어.”“알겠어요.”“그래. 넌 퇴근해. 난 네 아빠랑 밥 좀 먹어야겠어. 네 아빠가 오랜만에 쇼핑하니 너무 힘들대. 먼저 밥 먹고 나서 다시 옷 보러 돌아다닐게.”진미리는 전화를 끊었다.고지호가 곁에 물었다.“현이가 싫대?”고진호 부부는 고현의 도도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옷들을 많이 봤다.“현이가 싫다고 해도 우리가 집으로 사가서 현이 옷장에 넣어두
전호영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아니에요. 제가 고현 씨에게 꽃다발을 반년 넘게 보냈지만, 당신은 돈을 낭비한다면서 표정 한 번 변하지 않더니만 갑자기 이렇게 반응이 달라지니 놀라서 그러죠. 고현 씨가 제 꽃다발을 좋아한다고 하니 저도 기분이 너무 좋네요.”고현은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몸을 일으켜 책상을 에돌아 꽃다발을 꽃병에 꽂았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보면서 말했다.“너무 예쁘네요. 이 꽃병에 마침 꽉 찼네요.”“그럼요. 저의 마음이니까요.”고현은 다시 돌아서서 책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출근하기 전에도 책상 위가 깨끗해야 했고 퇴근할 때도 책상 위가 정연해야 했다.“가요. 밥 먹으러 가요. 예진 언니랑 노 대표님께서 오래 기다리게 해서는 안 돼요.”전호영은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며 말했다.“제가 왔을 때 동명 형에게 전화했는데 예진 누나랑 지금 돌아오는 길이래요. 조금 먼 거리에 있어서 저희보다 조금 늦게 호텔에 돌아올 것 같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지금은 퇴근 시간대라 길이 막히기 쉽거든요.”두 사람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고현은 남 비서에게 지시했다.“박 대표님께 미팅이 한 시간 늦어진다고 전해주세요.”“알겠습니다.”비서는 고현이 박 대표와의 미팅을 취소하는 줄 알았다. 다행히 박 대표와 미리 말을 해 놓았다.전호영은 고현에게 물었다.“저녁에도 또 일 보려고요?”고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전호영은 곧 그녀의 눈빛의 뜻을 알고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저도 사실 매우 바쁘거든요. 매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놀부가 아니라고요.”전호영에게는 미래의 아내에게 구애하는 일도 큰일이었다.그는 매일 고현을 쫓아다니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정말 빈둥빈둥 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호영 씨는 제가 본 사람 중 가장 한가한 사람이에요. 전씨 할머니도 호영 씨보다 더 바쁘실걸요.”전호영은 걸어가면서 말을 이었다.“그건 그래요. 저는 우리 할머니에 비하면 덜 바쁘죠. 우리 어
저녁 무렵, 전호영은 그가 자주 사용하는 마이바흐를 몰고 제때 고씨 그룹에 들어섰다.고씨 그룹 건물 입구에서 차를 멈추었다.그는 꽃다발을 안고 차에서 내렸다.양복 차림의 전호영은 언제나 그랬듯 늘 멋졌다.“전 대표님.”그는 꽃다발을 안고 걸어 들어갔고 모두 그를 보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안부를 물었다.전호영이 지나가자 그 직원들은 웃음을 거두어들였다.전호영은 고씨 그룹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를 싫어하는지 잘 알고 있다.그의 신분이 높지 않았다면 그 직원들은 가짜 웃음조차 그에게 주기 싫었을 것이다.‘휴, 현이 씨가 여전히 여성 신분을 폭로하기 싫은 거로 보면 아무래도 내 노력이 너무 부족했나 싶다...’전호영은 계속 동성애자라는 누명을 쓰며 강성의 젊은 여성들의 증오와 미움을 견뎌야 했다.그러나 전호영은 곧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그는 고현을 따르기로 한 그날부터 단단히 마음 먹었다.남들이 뭐라고 하든 그는 아내를 쫓아다닐 거라고 다짐했다.이렇게 하면 사실 좋은 점도 있다. 바로 고현이 원래 여자였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진정한 연적이 없다는 점이다.그리고 여자 연적들에 대해서도 두려울 게 뭐가 있는가!고현의 여자 신분이 드러나게 되면 그 여자들의 마음은 아마 단번에 무너질 것이다.전호영은 그렇게 기분 좋게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전호영은 남 비서의 도움으로 문을 열고는 그녀에게 서프라이즈를 주려고 살금살금 들어갔다.“나가세요! 노크 다시 하고 들어와요!”고현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전호영은 멈칫했다.고현의 청력이 정말 대단했다.“현이 씨...”고현은 고개를 들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전호영은 즉시 항복했다.“네네네, 나가겠나이다. 노크하고 다시 들어오겠나이다.”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었지만, 고현은 문 여는 소리를 듣더니 다시 노크하고 들어오라고 했다.전호영은 어쩔 수 없이 사무실에서 나갔다.남 비서는 그가 들어가자마자 다시 나오는 모습을 보고 무
“그래, 일 봐. 엄마가 지금 네 아빠 불러서 함께 드레스랑 하이힐을 사러 갈게.”진미리는 기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귓가에서 휴대전화를 떼자마자 진미리가 소리쳤다.“여보! 여보!”고진호가 밖에서 대답했다.“왜 그래?”고진호가 곧 밖에서 뛰어 들어왔다.“무슨 일이에요? 너무 큰 소리로 외쳐서 허둥지둥 달려왔는데.”“가요. 당장 옷 갈아입고 나가서 치마 좀 사요. 제가 직접 우리 딸을 위해 드레스를 골라줘야겠어요. 드디어 예쁜 치마를 사서 우리 딸을 예쁘게 꾸밀 수 있게 됐어요.”고진호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우리 현이가 그렇게 말했다고요? 너무 좋은 일이네요. 그럼, 사람 시켜 패션 디자인 사진을 가져오게 해요. 문 나설 필요 없이 사진만 고르면 되잖아요. 우리 현이가 입을 건데 당연히 가장 좋은 옷을 주문해서 제작해야죠.”“그러기엔 너무 늦었어요. 내일 저녁에 입을 드레스라서 시간이 안 돼요. 저한테도 드레스가 많지만, 중년 드레스라서 젊은이가 입기에는 어울리지 않아요. 우리 백화점에 가서 먼저 현물을 사고 나중에 천천히 주문 제작해요.”고진호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우리 현이가 치마를 입고 싶어 하다니... 호영이에게 미리 웨딩드레스를 맞추라고 알려줘야 겠어요. 그럼 곧 결혼할 수도 있겠네요. 우리도 큰 걱정거리를 해결할 수 있겠네요.”그리고 나서 고진호 부부는 집중적으로 매일 시시덕거리고 껄렁껄렁한 고빈을 혼내줄 수 있을 것이다.서른이 다 되어가는 고빈 주위에는 예쁜 미인들이 많지만 여자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장녀 고현이 있기 때문에 진미리 부부는 잠시 고현의 인생 대사에 몰두하고 있었다.고현의 일이 곧 결실을 보게 되면 이번에는 고빈의 차례로 될 것이다.두 아이는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시각에 태어났다.“내일 저녁 현이가 드레스를 입고 연회에 참석하는 일은 당분간 호영에게 알리지 마세요. 제 생각에는 현이도 갑자기 치마를 입고 여성 신분을 모두에게 알리려는 것을 호영이가 모르는 것 같더라고요.”진미리는
“엄마, 사실 나도 좀 망설여져요.”고현의 말을 들은 진미리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망설일 필요 없어. 너 원래 여자이고 원래 치마 입어도 되는 신분이야. 네가 20년 이상 남자 옷을 입었으니 진작 여자 옷을 입었어야 했어. 호영이도 네가 드레스를 입고 연회에 함께 참석하는 것을 알면 얼마나 기뻐하겠어. 그때 가서 다들 네가 여자라는 걸 알게 될 거고 너희 둘이 게이라고 수군대지도 않을 테고. 사실 사람들이 나한테 네가 그토록 훌륭한데 호영 때문에 삐뚤어진다는 말을 했거든. 네가 정상인데 호영 때문에 게이로 되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난 사실을 그들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어. 그런데 넌 여자 신분을 되찾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는 늘 참고 있었지. 그리고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어.”진미리 부부도 사실 큰 스트레스를 이겨내고 있었다.다른 사람의 말들은 고진호 부부가 무시하고 멀리하면 그뿐이지만 친척과 친구들이 와서 설득할 때면 그들은 정말 어쩔 수 없었다.진미리는 결국 고현이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딸이 행복하면 그뿐이라면서 딸의 의사를 존중해 주겠다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이 때문에 그 친척들은 몇 년 지나면 고현이 후회할 것이라고 화를 내면서 진미리가 고현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고빈도 따라서 게이로 될 것이고 따라서 손주를 안고 싶어 해도 기회가 없을 거라는 심한 말을 내뱉기도 했다.이는 진미리를 화나게 했지만 그렇다고 또 어쩔 수도 없었다.“엄마가 좀 이따가 드레스 몇 벌 골라줄게. 네 취향대로 골라봐. 액세서리는 새것으로 살래? 엄마가 몇 벌 골라줄까? 하이힐도 몇 켤게 사줄게. 다 신어 봐.”고현이 대답했다.“엄마가 결정해 주시면 돼요. 제가 내일 오후에 쉬니 집으로 돌아가서 드레스와 하이힐을 신어 볼게요. 하이힐을 신어 본 경험이 없으니 걷는 연습도 해야겠어요. 아니면 추태를 보일지도 모르니까요.”진미리가 웃으며 대답했다.“하긴, 걷는 연습을 좀 해야겠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하이힐을 신고 몇 걸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