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예정이 예외라는 듯이 물으며 소정남과 노동명을 쳐다봤다.“소 이사님과 함께 바이어 만난다고 하더니 그 바이어가 바로 노 대표님이었어요?”“맞아, 노 대표야.”전태윤이 고개 돌려 두 친구를 바라보자 둘은 무언의 메시지를 받고 나란히 걸어왔다.“이사님.”하예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웃으며 소정남과 노동명에게 인사했다.심효진도 덩달아 일어났다.다들 인사를 마친 후 하예정이 먼저 말을 꺼냈다.“다들 괜찮으면 함께 드실래요?”“좋지.”전태윤이 제일 빨리 대답했다.소정남은 심효진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효진 씨는 괜찮으세요?”심효진은 이들이 중요한 바이어 노동명을 무시한 것 같아 그에게 시선을 옮겼다.“노 대표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우리 함께 해요.”노 대표야말로 주인공인데 바이어와 함께 식사하러 온 두 사람은 정작 그를 내팽개치고 있었다.노동명은 가슴이 살짝 찔렸다.‘나 지금 여기 훼방꾼 하려고 온 거야? 친구 두 명이 알아서 짝을 맞췄는데 뭣 하러 날 불렀대? 이 네 사람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고만 있어도 배가 저절로 부르네.’“손님은 주인 뜻에 따르는 법이죠.”노동명이 말했다.이어서 세 남자는 정정당당하게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들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리고 또 수많은 메뉴를 시켰다.노동명이 앉아서 자연스럽게 하예정에게 물었다.“예정 씨 언니랑 우빈이는 왜 함께 안 왔어요?”모두가 그를 쳐다봤다.노동명은 두 눈을 깜빡이며 본인이 뭘 잘못 물었는지 의심했다!하예정은 언니에게 엄청 잘해주고 또 우빈이도 정성껏 보살피고 있으니 훠궈 먹으러 나올 때 당연히 언니네 모자를 부를 줄 알았다. 홀로 나온 모습에 의아해서 여쭸을 뿐인데 왜 다들 그를 쳐다보는 걸까?하에정이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대답했다.“언니는 지금 다이어트 중이라 안 오겠대요. 이리로 와도 음식을 안 먹을 테니 우리 식욕만 떨어트린다고 했어요. 우빈이는 저녁때만 되면 언니한테 더 달라붙어서 언니가 안 오면 걔도 안 와요.”노동명이 이해한다는 듯이
그는 애초에 전태윤 때문에 하예진을 유의 깊게 봤다.전태윤이 하예정과 초고속 결혼을 하자 하예진이 그의 처형이 됐고 노동명은 친구의 체면을 봐주느라 하예진이 차를 긁었을 때 수리비용을 적게 받았었다.노동명은 친구들이 지금 그가 하예진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고 오해하는 걸 잘 알고 있었다.다만 해석하기도 귀찮았다. 해석할수록 커버는 안 되고 일만 더 커질 테니까.남자들이 합석한 후 전태윤이 술을 두 병 시켰다. 노동명은 이따가 운전해야 하기에 술을 안 마셨고 소정남과 전태윤만 술잔을 살짝 기울였는데 취할 정도까진 아니었다.배불리 먹은 후 다들 자리에서 일어날 채비를 하고 있을 때 소정남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태윤아, 동명아, 나 집에 어떻게 가지? 술 먹어서 차를 몰 수 없잖아.”노동명은 아무리 눈치가 무뎌도 소정남이 지금 심효진과 함께 가고 싶어서 일부러 이런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난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그는 이 한마디만 남긴 채 얼른 자리를 떠났다.이때 전태윤이 말을 꺼냈다.“나도 술 마셔서 이사님 보내드릴 수가 없네. 효진 씨, 귀찮겠지만 저 대신 소 이사님 댁까지 바래다줄 수 있을까요?”하에정은 소정남더러 대리기사를 부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꾹 집어삼켰다.그녀는 두 사람의 선 자리를 주선해준 장본인으로서 반드시 소정남에게 기회를 만들어줘야 했다.결국 심효진이 소정남을 집까지 바래다주었다.하예정 부부는 발렌시아 아파트로 돌아왔다. 숙희 아주머니가 안 보이자 하예정이 아주머니께 전화하려 했다. 이때 전태윤이 말했다.“나 오늘 밤 아주머니께 휴가 줬어. 우리 둘만의 세상이야. 마음껏 즐겨.”그는 말하면서 하예정의 뒤에 다가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전태윤은 그녀를 품에 안고 그녀 목에 머리를 파묻으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예정아, 또 여보라고 불러줘. 난 네가 여보라고 부르는 게 너무 좋아.”하예정은 목이 간지러워 그를 밀쳐내려 했지만 좀처럼 풀어줄 기미가 없어 마지못
“우리 엄마일 거야.”전태윤이 일어나며 말했다.“어젯밤에 네가 잠든 후 엄마한테 전화해서 오늘 함께 네 드레스를 골라 달라고 했거든. 회사 송년회 때 입을 옷 말이야.”하예정은 두 눈을 번쩍 뜨고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계속 자고 있어요, 내가 가서 문 열게요.”그녀는 말하면서 재빨리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머리도 단정하게 빗었다.전태윤은 그녀가 신속하게 준비하는 걸 보더니 한마디 덧붙였다.“나갈 때 주방 가서 앞치마 둘러.”“왜요?”“그냥 내 말대로 해.”전태윤이 가볍게 웃었다.“얼른 가서 문 열어드려. 너희 시어머님 기다리시겠다.”하예정은 곧바로 방문을 나섰다. 그녀는 전태윤의 말대로 주방에 가서 앞치마를 두르고는 종종걸음으로 밖에 달려나갔다.“나가요.”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진짜 그녀의 시어머니 장소민이었다.“오셨어요, 어머님.”하예정이 환하게 웃으며 시어머니께 인사드렸다.장소민은 양손 가득 물건을 들고 있었다. 이를 본 하예정이 재빨리 시어머니 손에서 물건을 건네받았다.“어머님, 이거 다 뭐예요? 엄청 무겁네요.”하예정이 문을 열 때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으니 식사 준비가 한창인 듯싶었다. 게다가 환하게 웃으며 시어머니의 손에서 짐을 건네받자 장소민도 훨씬 온화한 표정으로 집안에 들어섰다.“너희 먹을 거 챙겨왔어. 하나는 해산물이야. 태윤이가 너 해산물 좋아한다길래 아침 일찍 출발해서 신선한 해산물을 사 왔어. 이건 달걀인데 너희 할머니가 기어코 가져가라고 해서 챙겨왔어. 진짜 시골 달걀이라 너희가 평소 먹는 것보다 더 맛있대.”사실 이 달걀들도 다 사온 것이다. 단지 전씨 일가의 과수원 일꾼한테서 샀을 뿐이다. 일꾼들은 주인의 동의를 거친 후 수많은 닭을 잡아 과수원에서 키우고 있다.하여 진짜 시골 달걀이기도 하다.어르신은 장손을 감싸주기 위해 이렇게 하셨다. 하예정은 시골 달걀을 보고 전태윤이 진짜 평범한 사람이라고 믿을 테니까.장소민이 달걀 한 바구니를 하예정에게 건넸다.“맨 위에 엄청 큰 열몇 개는 전부
“몇 시인데 아직도 안 일어났어?”“태윤 씨 요즘 업무가 바빠서 늘 야근했어요. 좀 더 자게 해요.”장소민이 말했다.“걔 평상시엔 새벽 3시까지 일하고 집에 돌아와도 다음 날 아침 조깅하러 나가는 애야. 너 만나고 나서부터 게을러지기 시작했지? 예정아, 태윤이 너무 챙겨주지 마. 남자든 여자든 지나치게 챙겨주면 결국 본인만 상처받아.”“엄마, 지금 뒤에서 날 험담해요?”전태윤이 방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정장 차림에 훤칠한 체구를 드러내며 멋지게 다가왔다.다만 아직 외투를 걸치지 않았고 넥타이도 매지 않았다.전부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장소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까이 다가갔다.“엄마가 고작 너 게으르다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바로 나오네? 다행이야, 널 더 욕하지 않아서. 요즘 기온이 올라가긴 했지만 아침엔 여전히 쌀쌀해. 얼른 외투 입어. 또 감기 걸려서 예정이만 힘들게 하지 말고.”장소민은 평소 남편에게 했던 대로 아들에게 외투를 입혀주려 했다.전태윤은 얼른 스스로 옷을 입었다.그는 사실 하예정이 입혀주길 바랐지만 넥타이도 혼자 맸다.이때 하예정의 목소리가 주방에서 들려왔다.“어머님, 태윤 씨 또 감기 걸리면 그땐 매일 한약 한 컵씩 먹일 거예요.”전태윤의 잘생긴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장소민은 웃으며 며느리에게 말했다.“태윤이 한약 먹는 걸 제일 싫어해.”“엄만 몰라. 엄마 며느리가 글쎄 나 챙겨줄 때 그냥 지나가는 말로 양약이 부작용이 크다고 했더니 의사한테 바로 얘기해서 한약으로 싹 다 바꾼 거 있지. 그리고 매일 나한테 한약 한 컵씩 먹였어. 나 진짜 토 나오는 거 참으면서 겨우 먹었다니까.”장소민이 두 눈을 반짝이며 덤덤하게 말했다.“자고로 쓴 약이 병을 고칠 수 있어. 예정이도 네가 빨리 낫길 바라서 그랬겠지. 게다가 네가 양약이 부작용이 크다고 했으면서 뭘 원망해? 너 때문에 한약으로 바꾼 건데 뭐가 문제야? 네 몸 꼭 잘 챙겨. 엄마 걱정하게 하지 말고. 그리고 예정이가 지금 가게 나갈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
전태윤의 말을 들은 장소민이 버럭 화를 냈다.“아내가 무조건 아침을 차려야 한다고 누가 그래? 집안일도 당연히 하는 거라고? 천만에, 예정이는 너한테 빚진 것도 없는데 뭣 하러 널 양반처럼 모셔야 하니? 태윤아, 네 아빠를 봐. 제발 아빠를 본보기로 삼아. 너의 이런 마인드는 아빠랑 비교하면 한참 멀었어. 얼른 마음가짐 고쳐 써. 대체 뭘 배운 거야? 우리 집안에 시집온 여자는 전부 사랑받고 있어. 너만 예정이를 하녀 취급해. 그러면서 뭐? 당연한 거라고? 오늘 내가 왔으니 망정이지 네 할머니가 오셨다면 바로 지팡이 들어서 널 한바탕 두들겨 팼을 거야.”“예정아, 예정아.”장소민은 아들을 한바탕 욕한 후 주방에서 분주히 음식 차리는 하예정을 불렀다.하예정이 부랴부랴 주방에서 나왔다.“어머님, 왜요?”“이리 와.”장소민이 며느리에게 가까이 오라고 하더니 직접 앞치마를 풀어주며 아들에게 말했다.“너 그 외투부터 벗고 넥타이 다 풀어. 이따가 다시 해.”전태윤이 곧이곧대로 했다.장소민은 아들에게 앞치마를 두르더니 주방으로 떠밀며 말했다.“가서 아침 차려. 예정이는 쉬고 있어. 너 집에서 하는 양반 버릇 당장 고쳐.”하예정이 재빨리 말했다.“어머님,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예정아, 너 이러면 태윤이 버릇 나빠져. 쟤는 내가 낳은 아이라 내가 잘 알아. 뼛속까지 이기주의라 모든 이가 제 위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여기는 애야. 너 태윤이랑 함께 지낸 몇 개월 동안 많이 속상했지?”하예정이 속으로 구시렁댔다.‘역시 아들을 아는 건 엄마뿐이야.’전태윤은 전에 모든 이가 그의 위주로 돌아가야 하고 그가 중심이 되어야 했다. 게다가 속이 엄청 좁아 걸핏하면 삐졌다.부부는 두 차례 갈등을 빚었고 최근에 변해가고 있는데 완전히 고친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또 언젠가 버럭 화를 내며 그녀와 갈등을 빚고 냉전을 벌일지 모른다.“엄마, 대체 누가 엄마 친자식이에요?”전태윤이 앞치마를 두르며 구시렁댔다. 그는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주방에 들어가더니 몰
장소민은 아들에게 속은 기분이 들어 아침 먹을 때 일부러 하예정에게 잘해줬다. 이에 질투 난 아들이 씩씩거리며 말했다.“엄마, 난 주워온 아이예요?”장소민이 그를 힐긋 바라보며 말했다.“이게 바로 내가 딸과 아들을 대하는 태도야.”‘녀석, 또 한 번 날 속여봐.’전태윤은 말문이 막혔다.배불리 먹은 후 하예정은 전태윤을 배웅하러 집 아래로 내려갔다.“사실 나 드레스가 한 벌 있어서 새로 살 필요 없어요.”하예정이 남편에게 말했다.“드레스는 비싼 데다가 1년에 한 번이나 입을까 말까예요. 사서 옷장에 넣어둘 뿐인데 그러다가 내가 살쪄서 못 입으면 더 낭비잖아요. 입을 만한 드레스 한 벌만 있으면 돼요. 새로 살 필요 없어요. 이제 곧 구정이라 이것저것 장만해야 할 것들도 많으니 다 돈 나갈 구멍이에요. 나한테 상의도 없이 어머님 모셔오면 어떡해요?”전태윤은 아내의 시시콜콜한 잔소리와 불만을 들으며 차에 오르기 전 가볍게 그녀의 콧등을 어루만졌다.“예정아, 내가 늘 말했듯이 우린 조건에 맞게 사는 거야. 내가 만약 돈이 빠듯했다면 절대 이렇게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지금 너보고 드레스를 사라고 하는 건 내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다는 뜻이야. 걱정 마, 우리 아내 드레스 두 벌쯤은 충분히 사줄 수 있어. 구정 때도 장만할 물건들 사고 어르신들께도 용돈 챙겨드리자. 우린 올해 받을 돈도 꽤 많을걸. 넌 우리 집에서 처음 설을 보내는 거라 어르신들이 세뱃돈을 푸짐하게 줄 거야.”전태윤이 일부러 한마디 덧붙였다.“그때 가서 세뱃돈 두둑이 받으면 나 절반 줘야 해. 내 덕분에 너도 우리 집안의 며느리가 될 수 있었잖아.”하예정이 실소를 터트렸다.“알았어요. 설에 받은 세뱃돈은 반반씩 나눠 가져요.”“드레스 살 돈은 이미 엄마한테 계좌 이체했어. 엄마가 재벌 집 사모님들이랑 자주 어울려서 이쪽 분야를 잘 알고 계셔. 널 위해 예쁜 드레스를 골라주실 거야. 너한테 어울리면서도 원단이 좋은지 분별할 수 있어. 그러니까 사기당할 걱정은 하지 마.”전태윤
장소민은 며느리를 회사 송년회에서 가장 빛나는 여성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에 며느리에게 가장 예쁘고 화려한 드레스를 골라주었다. 하예정은 기질이 좋은 덕에 그 드레스를 입었을 때 그 옷의 장점을 살릴 수 있었다.장소민은 드레스를 갈아입으니 마치 사림이 바뀐 것 같은 하예정을 보며 말했다.“예정아, 너는 기질이 아주 좋구나, 여기에 네가 예의까지 배운다면 꼭 상류층 규수가 될 수 있을 거야.”“어머님, 제 목표는 돈 많이 벌고, 집 한 채를 사는 거예요. 상류층 규수가 되는 데엔 관심이 별로 없는 걸요, 그리고 또 제가 어떻게 상류층 규수가 되겠어요? 저에게 뭐 내로라하는 가문이 있나, 전 그냥 작은 서점 하나 꾸려 학교랑 합작하여 많지도 않은 돈을 벌어서 살아가고 있어요. 상류층이니 뭐니, 생각해 볼 겨를도 없는걸요.”“태윤이는 벌써 집을 두 채나 샀잖아...”장소민은 자기 아들이 다른 건 몰라도 돈과 집은 아주 많이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전 학교와 좀 가까운 곳에 집을 한 채 사고 싶어요.”이 말이 나오자, 장소민은 웃으며 말했다.“좋아, 그럼, 먼저 학교와 가까운 곳에 집 한 채 마련해 둬. 이제 인테리어 한 후 환기 좀 시켰다가 나중에 너랑 태윤이 아이가 생기면 학교에 다니기 편할 거야.”하예정의 말 한마디에 장소민은 둘이 이미 진짜 부부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장소민은 웃으면서 속으론 한숨을 쉬었다.‘예정이가 내 맏며느리인 게 더는 변하지 않을 것 같으니, 앞으로 좀 더 잘 가르쳐줘야겠어. 맏형수 하기 쉽지 않을텐데...’하예정은 맏형수일 뿐만 아니라 전씨 가문의 큰 사모님이다.전씨 가문의 아홉 도련님은 모두 전태윤처럼 보통 가문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수는 없을 거이니, 앞으로 하예정은 그녀보다 가정조건이 몇 배나 좋은 동서들을 상대하여야 한다. 맏형수로써 동서들을 잘 다스릴 수 있을지는 모두 그녀 자신에게 달려 있다.장소민도 시어머니의 안목을 믿고 있고 하예정이 전씨 가문의 큰 사모님 역을 잘할 것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큰 쇼핑백을 들고 차에 올라탔다.곧 하예정은 차를 몰고 시어머니를 태우고 집으로 갔고 고급 차 한 대가 옆에 멈춰 서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차 안의 사람들은 창문을 내리고 하예정의 멀어져가는 차를 바라보았다.이경혜는 옆에 앉아있는 며느리에게 물었다.“청하야, 방금 그 둘 중 하나가 예정이 맞지?”유청하는 확신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 예정 아가씨예요.”“예정이와 함께 있는 그 여자, 전씨 가문의 사모님 아니야? 바로 전태윤의 친어머니 말이야.”이경혜는 여전히 눈매가 좋았다.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라이벌 관계라 장소민과 이경혜도 만날 때마다 서로 경계하고 있어 서로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방금 이경혜는 멀리서 자기 조카딸과 장소민이 같은 차에 타는 것을 보고, 급히 며느리에게 차를 세워 똑똑히 확인하라고 했는데 정말 장소민이었다!‘예정이가 어떻게 장소민과 함께 있을 수 있지?’“어머님, 저 사람은 전씨 사모님 같긴 하지만 진짜 전씨 사모님인지 아닌지는 얼굴을 제대로 못 봤어요, 거리가 좀 멀어서...”유청하은 너무 확신하는 말을 감히 하지 못했다.“아니, 장소민이 맞아! 분명 장소민일 거야! 난 그 집 사모님을 오랫동안 상대해 와서 설령 그녀가 얼굴을 바꾼다고 해도 알아볼 수 있어. 예정이가 장소민과 같이 있다니... 그 둘은 사이도 매우 좋아 보여, 그리고 예정이의 남편도 전씨 성을 가진 거로 기억되는데...”이경혜는 갑자기 자기가 소홀한 조카사위가 생각났다.그러고 보니 조카사위 이름을 물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청하야, 예정이의 남편이 혹시 전태윤은 아닐까? 아니면 전태윤의 동생이라던지... 아니다, 전태윤의 동생들은 전씨 그룹에 근무하지 않아! 예정이의 남편은 전씨 그룹에 근무한다고 했으니 바로 전태윤일 거야.”유청하는 혼란한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자기와 남편은 전태윤이 하예정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진작 알고 있었다는 것을 시어머니에게 들킬까 봐 두려웠다.이경혜는 유청하의 부자연
“엄마.”고현은 진미리의 전화를 받았다.“현아, 퇴근했어?”“네, 막 퇴근하려고 그래요. 왜 그러세요?”“드레스 말고도 평소에 입을 옷도 몇 벌 더 사줄까?”고현은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거절했다.“필요 없어요.”고현은 단지 내일 저녁 연회에 드레스를 입고 참석하여 사람들에게 그녀가 사실 여자라는 것을 알려주어 전호영이 동성애자가 아닌 정상적인 남자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사람들이 더는 색안경을 끼고 전호영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다들 전호영이 고현을 삐뚤어지게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항상 색안경을 끼고 전호영을 바라보았으나 고현은 정상적인 남자라고 여겼다.진미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필요 없어? 여자 신분을 회복하려고 하는 거 아니었어? 내일 저녁에만 드레스 입고 계속 남자 옷을 입고 다니려고?”“네. 원래대로 다니려고요.”고현은 이제 그녀의 가짜 가슴 근육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약간 태평공주기 때문에 가슴 근육을 사용하지 않고 양복을 입어도 남자처럼 보였다.진미리는 계속해서 설득했다.“신분을 드러내기로 했는데 왜 또 남자 행세를 하려고 해? 얼마나 힘들어.”“엄마, 그건 제 습관이에요. 20년 동안의 습관을 단번에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엄마, 저의 요구대로 사주세요. 앞으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하시려면 엄마 아드님 걱정 좀 하세요.”“빈이 그 자식은 걱정해도 소용없어. 그럼 엄마는 네 요구대로 드레스를 사줄게. 그리고 평소 입을 옷도 몇 벌 사 갈게. 옷장에 넣어두었다가 입고 싶을 때 꺼내서 입어.”“알겠어요.”“그래. 넌 퇴근해. 난 네 아빠랑 밥 좀 먹어야겠어. 네 아빠가 오랜만에 쇼핑하니 너무 힘들대. 먼저 밥 먹고 나서 다시 옷 보러 돌아다닐게.”진미리는 전화를 끊었다.고지호가 곁에 물었다.“현이가 싫대?”고진호 부부는 고현의 도도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옷들을 많이 봤다.“현이가 싫다고 해도 우리가 집으로 사가서 현이 옷장에 넣어두
전호영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아니에요. 제가 고현 씨에게 꽃다발을 반년 넘게 보냈지만, 당신은 돈을 낭비한다면서 표정 한 번 변하지 않더니만 갑자기 이렇게 반응이 달라지니 놀라서 그러죠. 고현 씨가 제 꽃다발을 좋아한다고 하니 저도 기분이 너무 좋네요.”고현은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몸을 일으켜 책상을 에돌아 꽃다발을 꽃병에 꽂았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보면서 말했다.“너무 예쁘네요. 이 꽃병에 마침 꽉 찼네요.”“그럼요. 저의 마음이니까요.”고현은 다시 돌아서서 책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출근하기 전에도 책상 위가 깨끗해야 했고 퇴근할 때도 책상 위가 정연해야 했다.“가요. 밥 먹으러 가요. 예진 언니랑 노 대표님께서 오래 기다리게 해서는 안 돼요.”전호영은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며 말했다.“제가 왔을 때 동명 형에게 전화했는데 예진 누나랑 지금 돌아오는 길이래요. 조금 먼 거리에 있어서 저희보다 조금 늦게 호텔에 돌아올 것 같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지금은 퇴근 시간대라 길이 막히기 쉽거든요.”두 사람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고현은 남 비서에게 지시했다.“박 대표님께 미팅이 한 시간 늦어진다고 전해주세요.”“알겠습니다.”비서는 고현이 박 대표와의 미팅을 취소하는 줄 알았다. 다행히 박 대표와 미리 말을 해 놓았다.전호영은 고현에게 물었다.“저녁에도 또 일 보려고요?”고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전호영은 곧 그녀의 눈빛의 뜻을 알고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저도 사실 매우 바쁘거든요. 매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놀부가 아니라고요.”전호영에게는 미래의 아내에게 구애하는 일도 큰일이었다.그는 매일 고현을 쫓아다니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정말 빈둥빈둥 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호영 씨는 제가 본 사람 중 가장 한가한 사람이에요. 전씨 할머니도 호영 씨보다 더 바쁘실걸요.”전호영은 걸어가면서 말을 이었다.“그건 그래요. 저는 우리 할머니에 비하면 덜 바쁘죠. 우리 어
저녁 무렵, 전호영은 그가 자주 사용하는 마이바흐를 몰고 제때 고씨 그룹에 들어섰다.고씨 그룹 건물 입구에서 차를 멈추었다.그는 꽃다발을 안고 차에서 내렸다.양복 차림의 전호영은 언제나 그랬듯 늘 멋졌다.“전 대표님.”그는 꽃다발을 안고 걸어 들어갔고 모두 그를 보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안부를 물었다.전호영이 지나가자 그 직원들은 웃음을 거두어들였다.전호영은 고씨 그룹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를 싫어하는지 잘 알고 있다.그의 신분이 높지 않았다면 그 직원들은 가짜 웃음조차 그에게 주기 싫었을 것이다.‘휴, 현이 씨가 여전히 여성 신분을 폭로하기 싫은 거로 보면 아무래도 내 노력이 너무 부족했나 싶다...’전호영은 계속 동성애자라는 누명을 쓰며 강성의 젊은 여성들의 증오와 미움을 견뎌야 했다.그러나 전호영은 곧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그는 고현을 따르기로 한 그날부터 단단히 마음 먹었다.남들이 뭐라고 하든 그는 아내를 쫓아다닐 거라고 다짐했다.이렇게 하면 사실 좋은 점도 있다. 바로 고현이 원래 여자였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진정한 연적이 없다는 점이다.그리고 여자 연적들에 대해서도 두려울 게 뭐가 있는가!고현의 여자 신분이 드러나게 되면 그 여자들의 마음은 아마 단번에 무너질 것이다.전호영은 그렇게 기분 좋게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전호영은 남 비서의 도움으로 문을 열고는 그녀에게 서프라이즈를 주려고 살금살금 들어갔다.“나가세요! 노크 다시 하고 들어와요!”고현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전호영은 멈칫했다.고현의 청력이 정말 대단했다.“현이 씨...”고현은 고개를 들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전호영은 즉시 항복했다.“네네네, 나가겠나이다. 노크하고 다시 들어오겠나이다.”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었지만, 고현은 문 여는 소리를 듣더니 다시 노크하고 들어오라고 했다.전호영은 어쩔 수 없이 사무실에서 나갔다.남 비서는 그가 들어가자마자 다시 나오는 모습을 보고 무
“그래, 일 봐. 엄마가 지금 네 아빠 불러서 함께 드레스랑 하이힐을 사러 갈게.”진미리는 기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귓가에서 휴대전화를 떼자마자 진미리가 소리쳤다.“여보! 여보!”고진호가 밖에서 대답했다.“왜 그래?”고진호가 곧 밖에서 뛰어 들어왔다.“무슨 일이에요? 너무 큰 소리로 외쳐서 허둥지둥 달려왔는데.”“가요. 당장 옷 갈아입고 나가서 치마 좀 사요. 제가 직접 우리 딸을 위해 드레스를 골라줘야겠어요. 드디어 예쁜 치마를 사서 우리 딸을 예쁘게 꾸밀 수 있게 됐어요.”고진호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우리 현이가 그렇게 말했다고요? 너무 좋은 일이네요. 그럼, 사람 시켜 패션 디자인 사진을 가져오게 해요. 문 나설 필요 없이 사진만 고르면 되잖아요. 우리 현이가 입을 건데 당연히 가장 좋은 옷을 주문해서 제작해야죠.”“그러기엔 너무 늦었어요. 내일 저녁에 입을 드레스라서 시간이 안 돼요. 저한테도 드레스가 많지만, 중년 드레스라서 젊은이가 입기에는 어울리지 않아요. 우리 백화점에 가서 먼저 현물을 사고 나중에 천천히 주문 제작해요.”고진호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우리 현이가 치마를 입고 싶어 하다니... 호영이에게 미리 웨딩드레스를 맞추라고 알려줘야 겠어요. 그럼 곧 결혼할 수도 있겠네요. 우리도 큰 걱정거리를 해결할 수 있겠네요.”그리고 나서 고진호 부부는 집중적으로 매일 시시덕거리고 껄렁껄렁한 고빈을 혼내줄 수 있을 것이다.서른이 다 되어가는 고빈 주위에는 예쁜 미인들이 많지만 여자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장녀 고현이 있기 때문에 진미리 부부는 잠시 고현의 인생 대사에 몰두하고 있었다.고현의 일이 곧 결실을 보게 되면 이번에는 고빈의 차례로 될 것이다.두 아이는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시각에 태어났다.“내일 저녁 현이가 드레스를 입고 연회에 참석하는 일은 당분간 호영에게 알리지 마세요. 제 생각에는 현이도 갑자기 치마를 입고 여성 신분을 모두에게 알리려는 것을 호영이가 모르는 것 같더라고요.”진미리는
“엄마, 사실 나도 좀 망설여져요.”고현의 말을 들은 진미리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망설일 필요 없어. 너 원래 여자이고 원래 치마 입어도 되는 신분이야. 네가 20년 이상 남자 옷을 입었으니 진작 여자 옷을 입었어야 했어. 호영이도 네가 드레스를 입고 연회에 함께 참석하는 것을 알면 얼마나 기뻐하겠어. 그때 가서 다들 네가 여자라는 걸 알게 될 거고 너희 둘이 게이라고 수군대지도 않을 테고. 사실 사람들이 나한테 네가 그토록 훌륭한데 호영 때문에 삐뚤어진다는 말을 했거든. 네가 정상인데 호영 때문에 게이로 되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난 사실을 그들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어. 그런데 넌 여자 신분을 되찾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는 늘 참고 있었지. 그리고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어.”진미리 부부도 사실 큰 스트레스를 이겨내고 있었다.다른 사람의 말들은 고진호 부부가 무시하고 멀리하면 그뿐이지만 친척과 친구들이 와서 설득할 때면 그들은 정말 어쩔 수 없었다.진미리는 결국 고현이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딸이 행복하면 그뿐이라면서 딸의 의사를 존중해 주겠다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이 때문에 그 친척들은 몇 년 지나면 고현이 후회할 것이라고 화를 내면서 진미리가 고현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고빈도 따라서 게이로 될 것이고 따라서 손주를 안고 싶어 해도 기회가 없을 거라는 심한 말을 내뱉기도 했다.이는 진미리를 화나게 했지만 그렇다고 또 어쩔 수도 없었다.“엄마가 좀 이따가 드레스 몇 벌 골라줄게. 네 취향대로 골라봐. 액세서리는 새것으로 살래? 엄마가 몇 벌 골라줄까? 하이힐도 몇 켤게 사줄게. 다 신어 봐.”고현이 대답했다.“엄마가 결정해 주시면 돼요. 제가 내일 오후에 쉬니 집으로 돌아가서 드레스와 하이힐을 신어 볼게요. 하이힐을 신어 본 경험이 없으니 걷는 연습도 해야겠어요. 아니면 추태를 보일지도 모르니까요.”진미리가 웃으며 대답했다.“하긴, 걷는 연습을 좀 해야겠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하이힐을 신고 몇 걸음도
전호영은 눈치채지 못했다. 고현도 일부러 그에게 명백하게 알려주지 않았다.내일 저녁에 그를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강성 전체 사람들도 분명 충격받을 것이다.고현은 이미 전호영에 대한 감정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변이 없다면 2년 안에 전호영에게 시집갈 것이다.그녀는 전호영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는 그가 동성애라자라는 누명을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전호영은 게이가 아니라 정상적인 남자였다.고현이 모든 사람을 속인 것이다.고현은 전호영을 위해 정정당당하게 여자로 되고 싶어 했다.그 또한 기뻐할 것이다.고현의 형상이 너무 남자다웠기 때문에 그녀가 아무리 여성 옷을 입고 연회에 참석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녀가 전호영의 마음을 사기 위해 여자 행세를 하는 것으로 여길 것이라는 점을 고현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전호영도 그녀를 기쁘게 하려고 여자로 분장한 적 있다.당시 고씨 그룹 직원들은 여자 분장을 한 전호영이 매우 눈에 익다고 생각했다.전호영의 자매인 줄 알았지만 전씨 가문에는 딸이 없고 전호영에게도 자매가 없었다는 것을 반응한 사람들은 그제야 전호영이 분장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날 그 사실은 고씨 그룹에서 아주 큰 가십거리로 소문이 자자했다.전호영과 통화를 마친 고현은 진미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진미리가 전화를 받았지만 고현은 주저하며 말을 하지 않았다.“현아, 왜 그래?”고현이 여전히 말을 하지 않자 진미리는 놀라워하며 고현에게 무슨 사고라도 난 줄 알았다.고현은 어려서부터 철이 들어서 어떤 일이 있어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했다.“엄마, 시간 있어요? ”“있지. 난 언제나 시간 있지. 왜? 내가 뭐 도울 거라도 있어? 말해봐. 내가 다 해줄게.”고현이 먼저 도움을 청하는 일이라면 분명 큰일일 것이다.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낸 진미리는 관심 있게 물었다.“생리 왔어? 배 아파?”고현은 때때로 생리통을 앓곤 한다.진미리는 한동안 몰래 고현에게 한약을 지어주면서 그녀를 돌보았다.“아니요. 엄마. 저 내일 저녁 연회
“호영 씨.”고현이 기분이 좋은 듯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휴대폰 너머에 있던 전호영도 덩달아 신이 나서 웃었다.“현이 씨, 뭐 좋은 일이 있나요? 제 이름을 부르면서까지 웃음기가 묻어나네요. 현이 씨를 오랫동안 알고 지냈지만, 이런 경우가 흔치 않은데.”고현이 전호영에게 감정이 있다고는 하나 성격이 워낙 무뚝뚝하다 보니 전호영을 대하는 태도는 항상 차가웠다.“제가 기분이 나빴으면 좋겠어요?”“그럴 리가요. 당연히 현이 씨가 날마다 즐겁고 행복하면 좋죠. 그렇지만 현이 씨는 짊어진 짐이 너무 무겁다 보니 하루 종일 웃지도 않잖아요. 시시덕거리는 고빈을 볼 때마다 테이프로 그의 주둥이를 틀어막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그가 사랑했던 여자는 고씨 그룹을 위해 매일 쉬지 않고 일하지만, 고빈은 틈만 나면 여자들을 만나느라 바빴다.그렇다고 해서 고빈이 결혼할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현이 웃으며 말했다.“얼른 가서 그 입 틀어막지 않고 뭐 해요? 솔직히 말해서 아무 근심 걱정 없는 그의 모습을 볼 때면 가끔 부럽기는 해요.”자신이 맏이기 때문에 동생을 대신해 모든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그녀의 머릿속에 꽉 박혀있었다.줄곧 남장하고 있었지만, 여자로 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무거운 책임감을 안고 있다고는 하지만 동생을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만으로 그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전호영이 나타난 후부터 고현은 점차 동생이 부러워지기 시작했다.물론 동생에게 말했던 것처럼 고씨 그룹이 언젠가는 동생의 손에 넘어갈 것을 생각하고 가끔 동생에게 일을 맡기곤 했었지만.평생을 이렇게 버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란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기대하고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전호영이 딱 그런 존재였다.“나중 가면 현이 씨 동생이 현이 씨를 부러워할 것이니 동생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어요. 현이 씨가 회사 일을 조금씩 그에게 맡긴다면 우리도 언젠가는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거예요. 아니면 저처럼 호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이윤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고현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온 후, 이윤미가 자신의 비서에게 말했다.“먼저 회사에 가 있어요. 요즘 가주가 시간 없다고 하니 제가 집안일 처리하러 집에 가야겠어요.”그녀의 어머니는 여전히 병원에서 아버지를 돌보고 있었다.이씨 가문에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그녀의 비서 외에 회사 사람들은 다 모르고 있었다.이윤미만 회사에 나오고 가주와 그녀의 오빠들은 회사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만 회사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이 대표가 비록 능력이 부족한 이 부대표를 못마땅하게 여긴다고 해도 어찌 됐든 자기 친딸이니 무슨 일을 저지른다 해도 이 대표가 뒷수습을 다 할 것으로 회사 사람들은 뒤에서 수군거렸다.이윤미가 이 대표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을 막으려는 사람들은 온갖 망발을 늘어놓으며 그녀를 헐뜯기에 바빴다.그렇지만 이윤미는 가만있지 않았다.중요한 직위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 설치고 다니는 사람들을 그녀는 직접 해고하여 이씨 그룹에서 쫓아냈다.그리고 직위가 높은 사람들은 강등시키거나 급여를 깎았다.게다가 해고된 사람들이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블랙리스트에 올린 탓에 그들은 복지와 소득 면에서 이씨 그룹에 한참 미치지도 못하는 작은 회사만 전전해야 했다.조금의 손해를 볼지언정 이윤미는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이씨 그룹에서 쫓겨난 직원들을 보며 다른 직원들은 공포감을 느꼈다.모두가 부를 추구하고 부양해야 할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일자리를 잃을 수 없었다.누가 대표직에 오르든지 간에 모두 이씨 가문의 출신일 것이니 승급을 못 할 바에는 이씨 가문의 암투에 직원들은 끼어들 필요가 없었다.어차피 대우는 변하지 않으니 오히려 정직하게 일하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몰랐다.그렇게 한다면 해고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사에게 더 주목받을 수도 있었다.“알았어요.”택시비를 보상해 주겠다며 말한 뒤 이윤미는 비서를 택시에 앉혀 보내고 자신은 차를 몰고 집으로 돌
그들은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고 대표님, 저는 회사의 프로젝트 협력에 대해 논의하러 왔어요. 방안을 가져왔으니 한번 보도록 하세요.”이윤미는 말하면서 자신 비서의 손에서 서류를 건네받은 뒤 두 손으로 고현에게 건넸다.고현은 서류를 받아 들고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한참 후에 다 훑어본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그녀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꺼냈다.“윤미 씨의 방안이 괜찮아 보이지만 이씨 그룹의 실력이 부족해서 별로 협력하고 싶지 않네요.”고현은 직설적으로 말했다.협력업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윤미의 개인 회사와 협력하려 했던 것은 그냥 단순히 이윤미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했던 것이었다.하예진의 회사도 설립되고 나면 고씨 그룹과 협력할 예정이었다.이윤미가 호탕하게 웃었다.“고 대표님, 우리 이씨 그룹이 귀사에 비해 조금 못하단 걸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 이씨 그룹도 강성에서 백 년을 이어온 명문가라서 뿌리가 깊어요. 저도 일부 프로젝트를 책임졌으니 어느 정도 발언권이 있어요. 고 대표님이 저와 협력한다면 서로 윈윈할 수 있을 거예요. 당연히 대표님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을 거고요.”이윤미와 그녀의 비서는 협상에 진전이 없을 거란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고현에게 잘 보이려고 최선을 다했다.이씨 그룹을 아무리 추켜세워도 고현이 마음을 바꾸지 않자, 이윤미가 말했다.“고 대표님, 협력하지 않더라도 저와의 인연은 끊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비록 우리 이씨 그룹이 대표님의 눈에 들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협력할 기회가 생길지도 몰라요.”고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게 될 거예요.”이씨 가문이 권력에서 물러난다면 가능성이 있었다.이씨 그룹의 권력을 쥐고 있는 이씨 가문이 고씨 그룹과의 협력을 이용해 힘을 키우는 것이 두려워 고현은 협력하기 싫었던 것이었다.만약 이씨 그룹의 세력이 커진다면 하예진의 앞날이 더욱 험난해질 것 같았다.이윤미가 웃으며 말했다.“우리 이씨 그룹이 열심히 노력해서 하루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