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일 거야.”전태윤이 일어나며 말했다.“어젯밤에 네가 잠든 후 엄마한테 전화해서 오늘 함께 네 드레스를 골라 달라고 했거든. 회사 송년회 때 입을 옷 말이야.”하예정은 두 눈을 번쩍 뜨고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계속 자고 있어요, 내가 가서 문 열게요.”그녀는 말하면서 재빨리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머리도 단정하게 빗었다.전태윤은 그녀가 신속하게 준비하는 걸 보더니 한마디 덧붙였다.“나갈 때 주방 가서 앞치마 둘러.”“왜요?”“그냥 내 말대로 해.”전태윤이 가볍게 웃었다.“얼른 가서 문 열어드려. 너희 시어머님 기다리시겠다.”하예정은 곧바로 방문을 나섰다. 그녀는 전태윤의 말대로 주방에 가서 앞치마를 두르고는 종종걸음으로 밖에 달려나갔다.“나가요.”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진짜 그녀의 시어머니 장소민이었다.“오셨어요, 어머님.”하예정이 환하게 웃으며 시어머니께 인사드렸다.장소민은 양손 가득 물건을 들고 있었다. 이를 본 하예정이 재빨리 시어머니 손에서 물건을 건네받았다.“어머님, 이거 다 뭐예요? 엄청 무겁네요.”하예정이 문을 열 때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으니 식사 준비가 한창인 듯싶었다. 게다가 환하게 웃으며 시어머니의 손에서 짐을 건네받자 장소민도 훨씬 온화한 표정으로 집안에 들어섰다.“너희 먹을 거 챙겨왔어. 하나는 해산물이야. 태윤이가 너 해산물 좋아한다길래 아침 일찍 출발해서 신선한 해산물을 사 왔어. 이건 달걀인데 너희 할머니가 기어코 가져가라고 해서 챙겨왔어. 진짜 시골 달걀이라 너희가 평소 먹는 것보다 더 맛있대.”사실 이 달걀들도 다 사온 것이다. 단지 전씨 일가의 과수원 일꾼한테서 샀을 뿐이다. 일꾼들은 주인의 동의를 거친 후 수많은 닭을 잡아 과수원에서 키우고 있다.하여 진짜 시골 달걀이기도 하다.어르신은 장손을 감싸주기 위해 이렇게 하셨다. 하예정은 시골 달걀을 보고 전태윤이 진짜 평범한 사람이라고 믿을 테니까.장소민이 달걀 한 바구니를 하예정에게 건넸다.“맨 위에 엄청 큰 열몇 개는 전부
“몇 시인데 아직도 안 일어났어?”“태윤 씨 요즘 업무가 바빠서 늘 야근했어요. 좀 더 자게 해요.”장소민이 말했다.“걔 평상시엔 새벽 3시까지 일하고 집에 돌아와도 다음 날 아침 조깅하러 나가는 애야. 너 만나고 나서부터 게을러지기 시작했지? 예정아, 태윤이 너무 챙겨주지 마. 남자든 여자든 지나치게 챙겨주면 결국 본인만 상처받아.”“엄마, 지금 뒤에서 날 험담해요?”전태윤이 방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정장 차림에 훤칠한 체구를 드러내며 멋지게 다가왔다.다만 아직 외투를 걸치지 않았고 넥타이도 매지 않았다.전부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장소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까이 다가갔다.“엄마가 고작 너 게으르다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바로 나오네? 다행이야, 널 더 욕하지 않아서. 요즘 기온이 올라가긴 했지만 아침엔 여전히 쌀쌀해. 얼른 외투 입어. 또 감기 걸려서 예정이만 힘들게 하지 말고.”장소민은 평소 남편에게 했던 대로 아들에게 외투를 입혀주려 했다.전태윤은 얼른 스스로 옷을 입었다.그는 사실 하예정이 입혀주길 바랐지만 넥타이도 혼자 맸다.이때 하예정의 목소리가 주방에서 들려왔다.“어머님, 태윤 씨 또 감기 걸리면 그땐 매일 한약 한 컵씩 먹일 거예요.”전태윤의 잘생긴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장소민은 웃으며 며느리에게 말했다.“태윤이 한약 먹는 걸 제일 싫어해.”“엄만 몰라. 엄마 며느리가 글쎄 나 챙겨줄 때 그냥 지나가는 말로 양약이 부작용이 크다고 했더니 의사한테 바로 얘기해서 한약으로 싹 다 바꾼 거 있지. 그리고 매일 나한테 한약 한 컵씩 먹였어. 나 진짜 토 나오는 거 참으면서 겨우 먹었다니까.”장소민이 두 눈을 반짝이며 덤덤하게 말했다.“자고로 쓴 약이 병을 고칠 수 있어. 예정이도 네가 빨리 낫길 바라서 그랬겠지. 게다가 네가 양약이 부작용이 크다고 했으면서 뭘 원망해? 너 때문에 한약으로 바꾼 건데 뭐가 문제야? 네 몸 꼭 잘 챙겨. 엄마 걱정하게 하지 말고. 그리고 예정이가 지금 가게 나갈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
전태윤의 말을 들은 장소민이 버럭 화를 냈다.“아내가 무조건 아침을 차려야 한다고 누가 그래? 집안일도 당연히 하는 거라고? 천만에, 예정이는 너한테 빚진 것도 없는데 뭣 하러 널 양반처럼 모셔야 하니? 태윤아, 네 아빠를 봐. 제발 아빠를 본보기로 삼아. 너의 이런 마인드는 아빠랑 비교하면 한참 멀었어. 얼른 마음가짐 고쳐 써. 대체 뭘 배운 거야? 우리 집안에 시집온 여자는 전부 사랑받고 있어. 너만 예정이를 하녀 취급해. 그러면서 뭐? 당연한 거라고? 오늘 내가 왔으니 망정이지 네 할머니가 오셨다면 바로 지팡이 들어서 널 한바탕 두들겨 팼을 거야.”“예정아, 예정아.”장소민은 아들을 한바탕 욕한 후 주방에서 분주히 음식 차리는 하예정을 불렀다.하예정이 부랴부랴 주방에서 나왔다.“어머님, 왜요?”“이리 와.”장소민이 며느리에게 가까이 오라고 하더니 직접 앞치마를 풀어주며 아들에게 말했다.“너 그 외투부터 벗고 넥타이 다 풀어. 이따가 다시 해.”전태윤이 곧이곧대로 했다.장소민은 아들에게 앞치마를 두르더니 주방으로 떠밀며 말했다.“가서 아침 차려. 예정이는 쉬고 있어. 너 집에서 하는 양반 버릇 당장 고쳐.”하예정이 재빨리 말했다.“어머님,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예정아, 너 이러면 태윤이 버릇 나빠져. 쟤는 내가 낳은 아이라 내가 잘 알아. 뼛속까지 이기주의라 모든 이가 제 위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여기는 애야. 너 태윤이랑 함께 지낸 몇 개월 동안 많이 속상했지?”하예정이 속으로 구시렁댔다.‘역시 아들을 아는 건 엄마뿐이야.’전태윤은 전에 모든 이가 그의 위주로 돌아가야 하고 그가 중심이 되어야 했다. 게다가 속이 엄청 좁아 걸핏하면 삐졌다.부부는 두 차례 갈등을 빚었고 최근에 변해가고 있는데 완전히 고친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또 언젠가 버럭 화를 내며 그녀와 갈등을 빚고 냉전을 벌일지 모른다.“엄마, 대체 누가 엄마 친자식이에요?”전태윤이 앞치마를 두르며 구시렁댔다. 그는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주방에 들어가더니 몰
장소민은 아들에게 속은 기분이 들어 아침 먹을 때 일부러 하예정에게 잘해줬다. 이에 질투 난 아들이 씩씩거리며 말했다.“엄마, 난 주워온 아이예요?”장소민이 그를 힐긋 바라보며 말했다.“이게 바로 내가 딸과 아들을 대하는 태도야.”‘녀석, 또 한 번 날 속여봐.’전태윤은 말문이 막혔다.배불리 먹은 후 하예정은 전태윤을 배웅하러 집 아래로 내려갔다.“사실 나 드레스가 한 벌 있어서 새로 살 필요 없어요.”하예정이 남편에게 말했다.“드레스는 비싼 데다가 1년에 한 번이나 입을까 말까예요. 사서 옷장에 넣어둘 뿐인데 그러다가 내가 살쪄서 못 입으면 더 낭비잖아요. 입을 만한 드레스 한 벌만 있으면 돼요. 새로 살 필요 없어요. 이제 곧 구정이라 이것저것 장만해야 할 것들도 많으니 다 돈 나갈 구멍이에요. 나한테 상의도 없이 어머님 모셔오면 어떡해요?”전태윤은 아내의 시시콜콜한 잔소리와 불만을 들으며 차에 오르기 전 가볍게 그녀의 콧등을 어루만졌다.“예정아, 내가 늘 말했듯이 우린 조건에 맞게 사는 거야. 내가 만약 돈이 빠듯했다면 절대 이렇게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지금 너보고 드레스를 사라고 하는 건 내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다는 뜻이야. 걱정 마, 우리 아내 드레스 두 벌쯤은 충분히 사줄 수 있어. 구정 때도 장만할 물건들 사고 어르신들께도 용돈 챙겨드리자. 우린 올해 받을 돈도 꽤 많을걸. 넌 우리 집에서 처음 설을 보내는 거라 어르신들이 세뱃돈을 푸짐하게 줄 거야.”전태윤이 일부러 한마디 덧붙였다.“그때 가서 세뱃돈 두둑이 받으면 나 절반 줘야 해. 내 덕분에 너도 우리 집안의 며느리가 될 수 있었잖아.”하예정이 실소를 터트렸다.“알았어요. 설에 받은 세뱃돈은 반반씩 나눠 가져요.”“드레스 살 돈은 이미 엄마한테 계좌 이체했어. 엄마가 재벌 집 사모님들이랑 자주 어울려서 이쪽 분야를 잘 알고 계셔. 널 위해 예쁜 드레스를 골라주실 거야. 너한테 어울리면서도 원단이 좋은지 분별할 수 있어. 그러니까 사기당할 걱정은 하지 마.”전태윤
장소민은 며느리를 회사 송년회에서 가장 빛나는 여성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에 며느리에게 가장 예쁘고 화려한 드레스를 골라주었다. 하예정은 기질이 좋은 덕에 그 드레스를 입었을 때 그 옷의 장점을 살릴 수 있었다.장소민은 드레스를 갈아입으니 마치 사림이 바뀐 것 같은 하예정을 보며 말했다.“예정아, 너는 기질이 아주 좋구나, 여기에 네가 예의까지 배운다면 꼭 상류층 규수가 될 수 있을 거야.”“어머님, 제 목표는 돈 많이 벌고, 집 한 채를 사는 거예요. 상류층 규수가 되는 데엔 관심이 별로 없는 걸요, 그리고 또 제가 어떻게 상류층 규수가 되겠어요? 저에게 뭐 내로라하는 가문이 있나, 전 그냥 작은 서점 하나 꾸려 학교랑 합작하여 많지도 않은 돈을 벌어서 살아가고 있어요. 상류층이니 뭐니, 생각해 볼 겨를도 없는걸요.”“태윤이는 벌써 집을 두 채나 샀잖아...”장소민은 자기 아들이 다른 건 몰라도 돈과 집은 아주 많이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전 학교와 좀 가까운 곳에 집을 한 채 사고 싶어요.”이 말이 나오자, 장소민은 웃으며 말했다.“좋아, 그럼, 먼저 학교와 가까운 곳에 집 한 채 마련해 둬. 이제 인테리어 한 후 환기 좀 시켰다가 나중에 너랑 태윤이 아이가 생기면 학교에 다니기 편할 거야.”하예정의 말 한마디에 장소민은 둘이 이미 진짜 부부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장소민은 웃으면서 속으론 한숨을 쉬었다.‘예정이가 내 맏며느리인 게 더는 변하지 않을 것 같으니, 앞으로 좀 더 잘 가르쳐줘야겠어. 맏형수 하기 쉽지 않을텐데...’하예정은 맏형수일 뿐만 아니라 전씨 가문의 큰 사모님이다.전씨 가문의 아홉 도련님은 모두 전태윤처럼 보통 가문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수는 없을 거이니, 앞으로 하예정은 그녀보다 가정조건이 몇 배나 좋은 동서들을 상대하여야 한다. 맏형수로써 동서들을 잘 다스릴 수 있을지는 모두 그녀 자신에게 달려 있다.장소민도 시어머니의 안목을 믿고 있고 하예정이 전씨 가문의 큰 사모님 역을 잘할 것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큰 쇼핑백을 들고 차에 올라탔다.곧 하예정은 차를 몰고 시어머니를 태우고 집으로 갔고 고급 차 한 대가 옆에 멈춰 서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차 안의 사람들은 창문을 내리고 하예정의 멀어져가는 차를 바라보았다.이경혜는 옆에 앉아있는 며느리에게 물었다.“청하야, 방금 그 둘 중 하나가 예정이 맞지?”유청하는 확신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 예정 아가씨예요.”“예정이와 함께 있는 그 여자, 전씨 가문의 사모님 아니야? 바로 전태윤의 친어머니 말이야.”이경혜는 여전히 눈매가 좋았다.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라이벌 관계라 장소민과 이경혜도 만날 때마다 서로 경계하고 있어 서로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방금 이경혜는 멀리서 자기 조카딸과 장소민이 같은 차에 타는 것을 보고, 급히 며느리에게 차를 세워 똑똑히 확인하라고 했는데 정말 장소민이었다!‘예정이가 어떻게 장소민과 함께 있을 수 있지?’“어머님, 저 사람은 전씨 사모님 같긴 하지만 진짜 전씨 사모님인지 아닌지는 얼굴을 제대로 못 봤어요, 거리가 좀 멀어서...”유청하은 너무 확신하는 말을 감히 하지 못했다.“아니, 장소민이 맞아! 분명 장소민일 거야! 난 그 집 사모님을 오랫동안 상대해 와서 설령 그녀가 얼굴을 바꾼다고 해도 알아볼 수 있어. 예정이가 장소민과 같이 있다니... 그 둘은 사이도 매우 좋아 보여, 그리고 예정이의 남편도 전씨 성을 가진 거로 기억되는데...”이경혜는 갑자기 자기가 소홀한 조카사위가 생각났다.그러고 보니 조카사위 이름을 물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청하야, 예정이의 남편이 혹시 전태윤은 아닐까? 아니면 전태윤의 동생이라던지... 아니다, 전태윤의 동생들은 전씨 그룹에 근무하지 않아! 예정이의 남편은 전씨 그룹에 근무한다고 했으니 바로 전태윤일 거야.”유청하는 혼란한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자기와 남편은 전태윤이 하예정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진작 알고 있었다는 것을 시어머니에게 들킬까 봐 두려웠다.이경혜는 유청하의 부자연
장소민은 밖에 나가서 쇼핑하는 일이 거의 없고 필요한 것은 모두 브랜드 쪽에 시켜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오늘 어쩌다 한 번 외출했는데, 이경혜한테 들킬줄이야...전태윤은 하예정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경혜는 속일 수 없을 것이다.이걸 알 리가 없는 하예정은 이경혜의 말을 듣고 그저 웃으며 답했다.“이모, 잠시만 기다려 주실래요? 저 지금 어머님과 함께 있는데 먼저 집에 모셔다드리고 이모한테 갈게요.”“그러면 네 시어머니도 불러. 우리 두 집은 아직 서로 인사한 적이 없잖아. 이참에 네 시어머니도 만나보고 함께 식사하면 되겠네.”“이모, 저 먼저 어머님께 물어보고요.”하예정도 이모와 시어머니가 서로 만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두 자매에게 가장 잘 대해준 가족은 이모이다.장소민은 이모와 조카의 통화를 유심히 지켜 듣다가 하예정이 묻기도 전에 얼른 입을 열었다.“예정아, 내가 오랫동안 쇼핑을 하지 않아 그런지 오늘 이렇게 오래 걸었더니 발바닥이 시큰거려서 더 이상 돌아다니기 싫구나, 네 이모에겐 미안하다고 전하고 다음에 시간이 나면 같이 앉아서 식사하자고 해.”장소민의 말을 들은 하예정은 미안한 마음으로 말했다.“이모, 어머님께서 더는 쇼핑하기 힘들다고 하셔서 오늘은 그만하고 다음에 또 같이 식사하는 건 어때요? 맞다, 소현 언니랑 새 언니는 같이 안 계시나요?”설령 둘 다 시간이 없더라도 은퇴하여 집에 있는 이모부가 이모 옆에 동반할 수 있을 것이다.“알았어, 다음에 시간 나면 다시 약속 잡는 거로 해. 너 먼저 시어머니 집에 데려다주고, 네 남편한테 저녁에 시간 되는지 물어봐봐. 네 언니도 불러서 우빈이 데리고 같이 저녁 먹으러 오라고 해. 네 남편, 이모는 아직 못 봤잖아... 참, 이름이 뭐였더라?”“전태윤이에요. 그런데 아마도 시간이 없을 것 같아요. 제가 전에 물어봤는데, 구정이 지난 후에 이모를 찾아뵐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이경혜는 가볍게 응하며 하예정에게 운전 조심하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전태윤
가는 내내 이경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유청하는 시어머니가 자기 딸을 위해 하예정에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걱정됐다.아직 찾은 지 얼마 안 되는 외조카보다는 자기 친딸이 더 중요한 건 사실이다.성씨 그룹에 도착하자, 이경혜는 곧장 사무실로 들어갔고, 유청하는 일부러 걸음을 늦추며 성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기현 씨, 어머님이 회사로 오셨어요. 곧 당신 사무실에 도착할 거예요.”성기현은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알았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엄마는 화가 나도 다른 일은 하지 않을 거예요.”어머니는 전태윤이 눈이 멀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전태윤은 모든 면에서 자기와 잘 어울리는 성소현이 아닌 하예정과 사랑에 빠졌고, 하필이면 하예정은 이제 그들의 사촌 여동생이 되었다.만약 이런 가족 관계가 없었다면...아마 하예정을 따끔하게 혼내줬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하예정으로 인해 성소현이 사랑의 상처를 받게 됐으니 말이다.“전 올라가지 않을게요, 어머님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보여요. 전 1층의 VIP룸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어머님 좀 위로해 드려요.”“그럴게요.”전화를 끊은 유청하는 위층으로 올라가지 않고 1층의 VIP룸에서 기다렸다.두 모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저녁 퇴근 시간이 되어서야 이경혜는 위층에서 내려왔다.“어머님.”유청하는 급히 VIP룸을 나서 시어머니를 불렀다.시어머니의 안색은 여전히 안 좋았지만, 분노가 많이 수그러든 것 같아 이청하는 마음이 조금 놓였다.“청하야, 차 키 이리 줘, 나 혼자 집에 갈 테니. 넌 여기서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기현이랑 같이 돌아가.”“네, 알겠어요.”유청하는 시어머니에게 차 키를 건네주었고, 시어머니는 차 키를 받고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떠나갔다.하예정은 이 일들을 전혀 몰랐다.그녀와 시어머니가 발렌시아 아파트로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아버지로부터 시어머니더러 빨리 집으로 돌아오라고 재촉하는 전화가 걸려 왔다.하예정은 시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