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타던 롤스로이스는 출장 기간에 기사더러 본가로 몰고 가서 그의 통지를 기다리라고 했다.“태윤 씨 회사 주차장은 자동차 전시회장 같네요. 웬만한 차종은 다 있잖아요.”하예정이 차 쪽으로 걸어가며 온갖 고급 차를 구경하며 말했다.“회사에 임원 층이 많고 연봉이 높다 보니 다들 좋은 차로 바꾸더라고. 알잖아, 남자들 차에 관심 많은 거. 난 집이 더 좋아. 집 사는 게 차 사는 것보다 훨씬 값지지.”그의 집 차고에도 전시회장처럼 차가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걸 하예정이 알았더라면 지금 그가 한 말을 전혀 믿지 않았을 텐데.“남자는 차를 좋아하고 여자는 집을 좋아하죠. 집이 있어야 안정감이 있거든요.”하예정이 전에 열심히 돈을 모았던 것도 우선 집을 사기 위해서였다. 지금 그녀가 타고 다니는 차는 전태윤이 선물해준 것이다.평소에 그녀는 거의 스쿠터를 타고 출퇴근을 한다.“처형한테는 도착했다고 얘기했지?”“문자 보냈는데 답장이 없네요. 바쁜가 봐요. 효진이가 말하길 우리 언니가 요즘 엄청 바삐 돌아쳐서 홀쭉해졌대요. 일주일에 5킬로나 빠졌다지 뭐예요. 다이어트 광고 찍어도 될 것 같아요 울 언니.”일주일에 5킬로라니, 실로 대단할 따름이었다.하예정은 언니가 하루빨리 다이어트에 성공해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랐다. 그렇게 되면 인간쓰레기 주형인이 땅을 치며 후회할 테니까.“처형은 의지가 대단한 분이야. 다이어트 하겠다고 마음 먹었으니 무조건 성공할 거야.”하예정도 머리를 끄덕였다.로얄 팰리스, 그녀가 단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곳, 심지어 전에는 부자들 동네라고 단정 지으며 이 별장 구역에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별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하예정은 줄곧 머리를 갸웃거리고 차창 밖의 풍경만 바라봤다.전태윤의 별장은 산 정상에 있는데 정상이라기엔 매우 낮은 산이었다.산꼭대기에 별장이 네댓 채 있는데 면적이 매우 크다 보니 이 구역에서 가장 큰 별장에 속한다.“어디가 태윤 씨 별장이에요?”하예정이 옆에 있는 전태윤에게 물었다.“가장 외진
전태윤은 대문을 열고 다시 차에 돌아와 시동을 걸었다. 이어서 별장 안으로 몰고 들어가 정문 앞의 공터에 주차했다.하예정이 묻지 않아도 그가 알아서 설명해주었다.“우리 부모님과 할머니는 본가에서 지내는 걸 더 좋아하셔. 거긴 떠들썩하지도 않고 다들 수십 년을 살아온 곳이라 이미 적응해서 우리 세대랑 함께 있는 걸 원치 않아. 할머니도 저번에 우리 집에 오셔서 며칠만 지내다가 금세 본가로 돌아가셨잖아.”하예정이 대답했다.“어르신들은 원래 다 그래요.”차에서 내린 후 그녀는 먼저 마당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마당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앞뒤 마당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앞마당은 주로 수영장과 나무, 그리고 작은 정자와 정자 옆의 그네가 배치되어 있었다. 한가할 때 그곳에 앉아 책을 보거나 풍경을 감상해도 괜찮을 듯싶었다.뒷마당엔 꽃과 나무들 위주였는데 그중에는 관성 사람들이 자주 심는 과일나무, 예를 들어 포도, 감귤, 사과나무 등이 줄지어 있었다.그리고 또 넓은 공터가 하나 있었는데 하예정은 그곳에서 야채와 딸기 등 과일을 심어도 좋을 것 같다고 얘기했다.그녀의 말을 들은 전태윤이 웃으며 답했다.“난 텃밭을 가꿀 시간이 없어. 앞으로 이 집의 여주인은 너야. 꽃이든 채소든 네가 심고 싶은 걸 마음껏 심어봐. 난 뭐든 다 오케이야.”사실 이 공터는 원예사가 장미를 심으려고 일부러 비워둔 곳이다.전태윤은 이 별장을 하예정에게 공유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녀가 없는 틈을 타 집사에게 얼른 통보했다. 다들 그의 다른 별장으로 이사 가고 이 별장을 비워두라고 말이다. 그 바람에 원예사가 비워놓은 공터도 하예정이 마음껏 가꿀 텃밭으로 거듭났다.정자 옆의 그네도 임시로 마련해 놓은 것이다.하예정이 그네에 앉아 꽃과 풍경을 감상하는 걸 아주 좋아하니까.“여기서 출근하려면 우리 둘 다 너무 멀어요. 당분간은 발렌시아 아파트에서 지내요.”하예정은 발렌시아 아파트가 더 편했다.이 별장은 가끔 휴가를 보내는 셈 치고 와서 지내면 된다.“우리 둘
“여긴 우리 집이야. 앞으로 쭉 여기서 살 테니까 집구경은 나중에 해.”전태윤은 집안에 들어선 후 곧장 그녀를 둘러업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나 배불리 먹거든 다시 내려와서 맛있는 저녁 차려줄게.”하예정은 말문이 막혔다.둘은 안방으로 들어간 후 하예정은 방 구경을 할 겨를도 없이 달아오른 전태윤에게 이끌려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그의 건장한 체구가 위에서 짓누르니 숨이 턱턱 막혀 재빨리 팔을 뻗어 밀쳐냈다.“태윤 씨 너무 무거워요!”전태윤은 손으로 몸을 지탱하고 불타오르는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며 나지막이 물었다.“예정아, 진짜 해도 돼? 후회되면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나 또 가서 찬물에 샤워하면 그만이야.”하예정이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태윤 씨는 부모님의 장점만 쏙 빼닮아서 너무 잘생겼어요. 매일 이렇게 잘생긴 남자를 마주해야 하는데 내가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겠어요? 다시는 찬물에 샤워하지 않기로 약속해서 퇴원한 거잖아요.”전태윤이 몸을 기울이고 그녀의 입에 살포시 입맞춤했다.“거짓말도 참 자연스럽게 하네. 우리가 각방 쓸 때 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걸 다 봤어. 말로만 날 잡아먹겠다면서 유혹해대지만 정작 분위기가 달아오르면 너부터 가장 빨리 도망치잖아.”인제 둘 사이의 감정도 생겼고 또 전태윤이 계약서를 파기했기에 그녀도 시름 놓고 과감히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녀는 드디어 그와 진짜 부부가 되리라 다짐했다.그렇지 않으면 두 사람은 계속 쇼윈도 부부로 지내야 한다.“샤워부터 해요.”“그래.”전태윤은 그녀의 입술에 키스한 후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챙기며 말했다.“난 거실 쪽 욕실에서 씻을 테니 네가 여기서 씻어.”하예정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얼른 가요.”전태윤은 참지 못하고 되돌아와 그녀의 볼에 두 번 뽀뽀하고 나서야 싱글벙글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그는 가장 빠른 속도로 샤워를 마치고 방에 돌아왔다. 하예정은 이미 침대에 누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남편을 본 그녀는 볼이 살짝 빨개졌고 무심코 몸에 덮은 이불을 위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남편에게 들키자 하예정의 얼굴이 무르익은 사과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그녀는 벌떡 일어나 앉으며 휴대폰을 뺏어와 화면을 잠그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말했다.“심심해서 그냥 아무거나 검색해본 거예요. 술은 어디 있어요?”전태윤이 술을 두 잔 가져와 한 잔을 그녀에게 건넸다.“우리 아직 밥을 안 먹었으니 너무 많이 마시진 마. 반 잔만 마시면 돼.”“이 정도 양이면 서너 모금에 다 마셔버리겠네요. 간에 기별도 안 가겠어요.”하예정이 구시렁대며 술잔을 받아와 한 모금 맛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전혀 진하지 않았다. 전태윤은 그녀가 바로 취할까 봐 내심 걱정한 듯싶었다.하예정은 물 마시듯 반 잔의 술을 곧장 들이켰다.전태윤은 한 모금만 마시고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그는 수줍을 게 없으니 술을 빌려 용기 낼 필요가 없다.“안 마셔요? 안 마시면 나 줘요.”하예정이 손을 뻗어 그의 잔을 가져오려 했다. 그의 잔은 그녀 것보다 크고 술도 더 많이 담겨있었다.전태윤은 긴 팔로 재빨리 잔을 치우고 그녀의 손을 밀쳐냈다. 그는 술잔을 침대 머리맡에 내려놓고 양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다잡으며 가까이 다가가 가볍게 키스했다. 이어서 그녀를 살포시 침대에 눕혔다.“태윤 씨... 나 조금 두려워요...”“괜찮아, 나한테 맡겨.”전태윤이 부드럽게 키스하며 그녀의 긴장한 마음을 녹였다.다정한 그의 제스처에 하예정도 서서히 긴장을 풀고 그에게 템포를 맞춰갔다.“띠리링...”이때 전태윤의 휴대폰이 울렸다.“전화 왔어요.”“신경 쓰지 마.”그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하여 전화를 받을 겨를이 없다.“띠리링...”휴대폰 벨 소리가 계속 울렸고 전태윤은 끝까지 받지 않았다. 결국 상대도 세 번 전화를 건 뒤 포기했다.알고 보니 성기현한테서 온 전화였는데 그는 전태윤이 출장을 다녀왔다는 소식을 듣고 얼른 그를 불러내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다만 전태윤은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고 성기현은 휴대폰을 식탁에 내려놓았다.그의 국을 따르고 주방에서
전태윤은 흐뭇한 얼굴로 위층에서 내려왔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것까지 들을 수 있다.혼인신고하고 지금까지 긴 시간 동안 그는 드디어 하예정의 진짜 남편으로 거듭났다.전태윤은 주방에 들어가 옷걸이에 걸린 앞치마를 내려서 허리에 두르고 냉장고를 열어서 식자재를 꺼냈다. 이제 곧 만들 몇 가지 요리의 식자재들이다.우선 아내가 몸보신용으로 마실 국을 끓여야 한다.국에 필요한 식자재를 다 손질한 후 끓는 물에 투하하고는 밥을 지었다.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박 집사에게 전화했다. 박 집사가 전화를 받자 전태윤이 낮은 목소리로 분부했다.“집사님, 사람 시켜서 신선한 새우를 보내오세요. 냉장고에 신선한 해산물이 별로 없네요.”다른 채소는 있든 없든 상관없지만 하예정이 제일 좋아하는 새우는 무조건 있어야 한다.“도련님, 사모님이랑 아직 식사 안 하셨어요?”박 집사가 살짝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숙희 아주머니더러 먼저 돌아와서 저녁 준비를 하게 했어야죠.”“늦게 먹어도 괜찮아요, 나 아직 배 안 고파요. 예정이도 회사에서 디저트 몇 개 먹었어요.”“그럼 다행이네요. 지금 바로 신선한 새우를 보내드릴게요. 30분쯤 걸릴 겁니다.”전태윤이 알겠다며 대답했다. 새우는 금방 익어 나중에 투하해도 되니 일단 다른 요리부터 만들면 된다.오랜만에 요리하는 전 대표께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각종 식자재를 손질했다. 그는 가장 잘하는 요리를 몇 가지 만들어 사랑하는 아내에게 먹일 예정이다.전태윤은 지금 이 순간 할머니께 더없이 감사했다.그의 할머니는 다른 재벌가와 다르게 아홉 손주에게 전부 음식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셨다.훌륭한 셰프로 거듭나 장차 아내의 위를 사로잡고 누구보다 입을 까다롭게 만들어 남편이 해주는 음식만 먹도록 할 큰 그림인 듯싶었다. 그렇게 되면 남편을 떠나려야 떠날 수 없을 테니까. 전태윤은 뒤늦게 할머니의 의도가 의심됐다.그는 주방에서 아내가 먹을 저녁을 정성껏 만들었다. 하예정은 안방의 화장실 욕조에 누워 편하
두 자매가 통화를 마친 후 하예정은 몸이 훨씬 편안해져 욕조에서 일어나 밖에 걸어 나왔다.그녀의 사랑스러운 남편께서 샤워하러 들어가기 전부터 자상하게 그녀가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놓았다.10분 후.하예정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래층은 아주 고요했다.발렌시아 아파트에서 지낼 때 그녀는 집이 너무 조용하게 느껴졌다. 전태윤은 평소 밤늦게 들어오기가 일쑤라 그녀는 집에 돌아오면 함께 대화할 사람도 없었다.하여 반려동물을 키우기로 했다.후에 숙희 아주머니까지 모셔오니 그제야 집안에 생기가 돌았다.다만 전태윤이 산 별장은 발렌시아 아파트보다 훨씬 크고 그들 부부만 지내고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조용했다.1층에 내려와서야 주방의 인기척 소리가 들렸다.하예정은 가까이 다가가 열심히 요리하는 전태윤을 바라보더니 그를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주방 문 앞에 기대서 물끄러미 지켜봤다.‘무언가에 열중하는 모습이 너무 멋있잖아! 아니야, 태윤 씨는 항상 멋있어.’그녀는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전태윤이 요리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고는 카카오스토리에 올렸다.「날 위해 저녁 만들어주는 남자는 뒷모습도 너무 멋져.」그녀는 영상을 올린 후 다시 클릭해서 보았다. 인기척 소리에 전태윤이 고개 돌려 눈썹을 들썩거리며 그녀를 쳐다봤다.“왜 더 누워있지 않고? 나 아직 다 준비하지 못했어.”“배고파요.”하예정은 그에게 들키자 바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가까이 다가가 남편이 만드는 음식을 지켜보며 말했다.“너무 배고파서 누워있을 수가 없어요. 음식 너무 많이 할 필요 없어요. 우리 두 사람이라 요리 세 개에 국 한 그릇이면 돼요.”“요리를 네 개 만들려던 참이야. 너무 배고프면 과일이라도 먼저 먹고 있을래?”하예정은 그가 준비한 식자재를 훑어보며 요리를 네 개 할 거란 짐작이 갔다.“이걸 다 만드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으니 그냥 기다리고 있을게요.”이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누가 온거죠?”하예정이 본능적으로 물었다.
별장 문 앞에 은색 세단 한 대가 세워졌고 누군가가 문 앞에 떡하니 서 있었다.하예정은 문틈 사이로 그 사람을 바라봤는데 어딘가 낯익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새우를 보내온 사람인 게 아니라 몇 번 뵈었던 그녀의 시어머니였다.“어머님.”하예정은 당황해하며 얼른 가서 문을 열어주려고 했지만 키가 없으면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녀는 미안한 표정으로 시어머니께 말했다.“어머님, 제가 아직 키로 문을 여는 걸 몰라서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태윤 씨한테 가서 키 받아올게요.”장소민은 알겠다며 차분하게 대답한 후 더는 초인종을 누르지 않았다.하예정은 집안에 들어간 후 종종걸음으로 주방에 달려가 전태윤에게 말했다.“태윤 씨 어머님이 오셨어요. 문을 열어야겠는데 키가 없으니 안 열리네요. 얼른 키 좀 주세요. 어머님 문 열어드려야 해요. 어머님 이틀에 한 번씩 집에 오신다고 했잖아요. 왜 키가 없으세요?”전태윤이 대답했다.“내 키는 거실 탁자 위에 올려놨어. 엄마가 까먹고 챙기지 못하셨나 봐.”“아 참, 밥을 얼마나 지었어요? 어머님 드실 것까지 되는지 모르겠네요.”하예정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시어머니가 매우 신경 쓰였다.“이 시간이면 식사 다하셨을 거야.”하예정이 알겠다며 대답한 후 탁자 위에 놓인 키를 챙기고 밖으로 달려갔다. 문 앞까지 달려가던 그녀는 또다시 주방으로 돌아가며 전태윤에게 말했다.“그냥 태윤 씨가 마중 나갈래요? 내가 요리할게요.”남편은 주방에서 바삐 돌아치는데 정작 본인은 한가롭게 있으니 시어머니가 이 모습을 보고 아들을 안쓰러워할까 봐 걱정됐다. 아내가 돼서 남편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한다고 나무랄 것 같았다.어떤 시어머니들은 제 아들이 집안일을 하는 걸 용납하지 못한다. 며느리가 전적으로 해야 하고 아들은 손끝 하나 움직여도 아까워서 죽을 지경이다. 며느리는 출근해서 돈도 벌어야 하고 퇴근해서 집에 오면 육아에 집안일까지 병행해야 한다.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시어머니가 부지기수이다.또 한편 제 사위가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전태윤의 그 한마디에 하예정은 안심하며 활짝 웃었다.“그럼 내가 가서 어머님 문 열어드릴게요. 만약 어머님께서 내가 집안일을 안 한다고 나무라시면 나도 할 말은 할 거예요. 그때 가서 내 탓 하지 말아요.”하예정은 여자가 결혼했다고 모든 집안일을 책임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만약 장소민도 정말 김은희가 하예진을 질책하듯이 하예정을 나무라면 그녀 성격상 무조건 시어머니와 논쟁할 것이다.전태윤이 웃으며 답했다.“그래, 네 탓 안 할게. 우리 엄마도 네 말처럼 모질게 굴지는 않을 거야.”설사 장소민이 며느리가 아니꼬워도 기껏해야 아들 앞에서 몇 마디 얘기할 뿐 대놓고 며느리를 박대하진 않을 것이다. 하예정이 도가 지나치지 않는 한 말이다.하예정은 어머님께 문 열어드리러 나갔다.장소민은 너무 오래 기다려서 살짝 짜증이 났지만 내색하진 않았다.하예정은 어머님께 문을 열어주며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오래 기다리셨죠, 어머님.”장소민이 친절하게 되물었다.“태윤이랑 아직 밥 안 먹었지?”“네, 아직이에요. 태윤 씨가 지금 한창 음식 만들고 있어요.”하예정이 마당 문을 열자 장소민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어머님께 물었다.“차는 밖에 두려고요?”장소민이 걸음을 멈추고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잠깐 너희 보러 왔어. 금방 갈 테니 차는 밖에 세워두지 뭐.”아들이 출장 중에 독감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장소민은 몹시 걱정됐다. 이틀에 한 번씩 아들에게 문자를 보내며 며느리가 정성껏 보살피고 있다는 걸 알았다. 며느리가 제 아들을 단속하며 매일 한약 한 컵씩 먹인다는 말에 장소민은 마음이 복잡해졌다.그녀는 하예정이 큰며느리가 되는 게 탐탁지 않았다. 전태윤은 할머니께 은혜를 갚기 위해 마지못해 하예정과 결혼했으니 절대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거로 여겼다.다만 3개월 사이에 그의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하예정에게 이경혜라는 이모가 뒷배가 되어주지만 성씨 일가가 아무리 부자여도 하예정과는 전혀 연관이 없다.장소민은 이경혜가 있
“엄마, 사실 나도 좀 망설여져요.”고현의 말을 들은 진미리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망설일 필요 없어. 너 원래 여자이고 원래 치마 입어도 되는 신분이야. 네가 20년 이상 남자 옷을 입었으니 진작 여자 옷을 입었어야 했어. 호영이도 네가 드레스를 입고 연회에 함께 참석하는 것을 알면 얼마나 기뻐하겠어. 그때 가서 다들 네가 여자라는 걸 알게 될 거고 너희 둘이 게이라고 수군대지도 않을 테고. 사실 사람들이 나한테 네가 그토록 훌륭한데 호영 때문에 삐뚤어진다는 말을 했거든. 네가 정상인데 호영 때문에 게이로 되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난 사실을 그들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어. 그런데 넌 여자 신분을 되찾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는 늘 참고 있었지. 그리고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어.”진미리 부부도 사실 큰 스트레스를 이겨내고 있었다.다른 사람의 말들은 고진호 부부가 무시하고 멀리하면 그뿐이지만 친척과 친구들이 와서 설득할 때면 그들은 정말 어쩔 수 없었다.진미리는 결국 고현이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딸이 행복하면 그뿐이라면서 딸의 의사를 존중해 주겠다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이 때문에 그 친척들은 몇 년 지나면 고현이 후회할 것이라고 화를 내면서 진미리가 고현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고빈도 따라서 게이로 될 것이고 따라서 손주를 안고 싶어 해도 기회가 없을 거라는 심한 말을 내뱉기도 했다.이는 진미리를 화나게 했지만 그렇다고 또 어쩔 수도 없었다.“엄마가 좀 이따가 드레스 몇 벌 골라줄게. 네 취향대로 골라봐. 액세서리는 새것으로 살래? 엄마가 몇 벌 골라줄까? 하이힐도 몇 켤게 사줄게. 다 신어 봐.”고현이 대답했다.“엄마가 결정해 주시면 돼요. 제가 내일 오후에 쉬니 집으로 돌아가서 드레스와 하이힐을 신어 볼게요. 하이힐을 신어 본 경험이 없으니 걷는 연습도 해야겠어요. 아니면 추태를 보일지도 모르니까요.”진미리가 웃으며 대답했다.“하긴, 걷는 연습을 좀 해야겠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하이힐을 신고 몇 걸음도
전호영은 눈치채지 못했다. 고현도 일부러 그에게 명백하게 알려주지 않았다.내일 저녁에 그를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강성 전체 사람들도 분명 충격받을 것이다.고현은 이미 전호영에 대한 감정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변이 없다면 2년 안에 전호영에게 시집갈 것이다.그녀는 전호영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는 그가 동성애라자라는 누명을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전호영은 게이가 아니라 정상적인 남자였다.고현이 모든 사람을 속인 것이다.고현은 전호영을 위해 정정당당하게 여자로 되고 싶어 했다.그 또한 기뻐할 것이다.고현의 형상이 너무 남자다웠기 때문에 그녀가 아무리 여성 옷을 입고 연회에 참석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녀가 전호영의 마음을 사기 위해 여자 행세를 하는 것으로 여길 것이라는 점을 고현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전호영도 그녀를 기쁘게 하려고 여자로 분장한 적 있다.당시 고씨 그룹 직원들은 여자 분장을 한 전호영이 매우 눈에 익다고 생각했다.전호영의 자매인 줄 알았지만 전씨 가문에는 딸이 없고 전호영에게도 자매가 없었다는 것을 반응한 사람들은 그제야 전호영이 분장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날 그 사실은 고씨 그룹에서 아주 큰 가십거리로 소문이 자자했다.전호영과 통화를 마친 고현은 진미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진미리가 전화를 받았지만 고현은 주저하며 말을 하지 않았다.“현아, 왜 그래?”고현이 여전히 말을 하지 않자 진미리는 놀라워하며 고현에게 무슨 사고라도 난 줄 알았다.고현은 어려서부터 철이 들어서 어떤 일이 있어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했다.“엄마, 시간 있어요? ”“있지. 난 언제나 시간 있지. 왜? 내가 뭐 도울 거라도 있어? 말해봐. 내가 다 해줄게.”고현이 먼저 도움을 청하는 일이라면 분명 큰일일 것이다.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낸 진미리는 관심 있게 물었다.“생리 왔어? 배 아파?”고현은 때때로 생리통을 앓곤 한다.진미리는 한동안 몰래 고현에게 한약을 지어주면서 그녀를 돌보았다.“아니요. 엄마. 저 내일 저녁 연회
“호영 씨.”고현이 기분이 좋은 듯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휴대폰 너머에 있던 전호영도 덩달아 신이 나서 웃었다.“현이 씨, 뭐 좋은 일이 있나요? 제 이름을 부르면서까지 웃음기가 묻어나네요. 현이 씨를 오랫동안 알고 지냈지만, 이런 경우가 흔치 않은데.”고현이 전호영에게 감정이 있다고는 하나 성격이 워낙 무뚝뚝하다 보니 전호영을 대하는 태도는 항상 차가웠다.“제가 기분이 나빴으면 좋겠어요?”“그럴 리가요. 당연히 현이 씨가 날마다 즐겁고 행복하면 좋죠. 그렇지만 현이 씨는 짊어진 짐이 너무 무겁다 보니 하루 종일 웃지도 않잖아요. 시시덕거리는 고빈을 볼 때마다 테이프로 그의 주둥이를 틀어막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그가 사랑했던 여자는 고씨 그룹을 위해 매일 쉬지 않고 일하지만, 고빈은 틈만 나면 여자들을 만나느라 바빴다.그렇다고 해서 고빈이 결혼할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현이 웃으며 말했다.“얼른 가서 그 입 틀어막지 않고 뭐 해요? 솔직히 말해서 아무 근심 걱정 없는 그의 모습을 볼 때면 가끔 부럽기는 해요.”자신이 맏이기 때문에 동생을 대신해 모든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그녀의 머릿속에 꽉 박혀있었다.줄곧 남장하고 있었지만, 여자로 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무거운 책임감을 안고 있다고는 하지만 동생을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만으로 그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전호영이 나타난 후부터 고현은 점차 동생이 부러워지기 시작했다.물론 동생에게 말했던 것처럼 고씨 그룹이 언젠가는 동생의 손에 넘어갈 것을 생각하고 가끔 동생에게 일을 맡기곤 했었지만.평생을 이렇게 버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란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기대하고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전호영이 딱 그런 존재였다.“나중 가면 현이 씨 동생이 현이 씨를 부러워할 것이니 동생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어요. 현이 씨가 회사 일을 조금씩 그에게 맡긴다면 우리도 언젠가는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거예요. 아니면 저처럼 호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이윤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고현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온 후, 이윤미가 자신의 비서에게 말했다.“먼저 회사에 가 있어요. 요즘 가주가 시간 없다고 하니 제가 집안일 처리하러 집에 가야겠어요.”그녀의 어머니는 여전히 병원에서 아버지를 돌보고 있었다.이씨 가문에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그녀의 비서 외에 회사 사람들은 다 모르고 있었다.이윤미만 회사에 나오고 가주와 그녀의 오빠들은 회사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만 회사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이 대표가 비록 능력이 부족한 이 부대표를 못마땅하게 여긴다고 해도 어찌 됐든 자기 친딸이니 무슨 일을 저지른다 해도 이 대표가 뒷수습을 다 할 것으로 회사 사람들은 뒤에서 수군거렸다.이윤미가 이 대표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을 막으려는 사람들은 온갖 망발을 늘어놓으며 그녀를 헐뜯기에 바빴다.그렇지만 이윤미는 가만있지 않았다.중요한 직위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 설치고 다니는 사람들을 그녀는 직접 해고하여 이씨 그룹에서 쫓아냈다.그리고 직위가 높은 사람들은 강등시키거나 급여를 깎았다.게다가 해고된 사람들이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블랙리스트에 올린 탓에 그들은 복지와 소득 면에서 이씨 그룹에 한참 미치지도 못하는 작은 회사만 전전해야 했다.조금의 손해를 볼지언정 이윤미는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이씨 그룹에서 쫓겨난 직원들을 보며 다른 직원들은 공포감을 느꼈다.모두가 부를 추구하고 부양해야 할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일자리를 잃을 수 없었다.누가 대표직에 오르든지 간에 모두 이씨 가문의 출신일 것이니 승급을 못 할 바에는 이씨 가문의 암투에 직원들은 끼어들 필요가 없었다.어차피 대우는 변하지 않으니 오히려 정직하게 일하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몰랐다.그렇게 한다면 해고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사에게 더 주목받을 수도 있었다.“알았어요.”택시비를 보상해 주겠다며 말한 뒤 이윤미는 비서를 택시에 앉혀 보내고 자신은 차를 몰고 집으로 돌
그들은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고 대표님, 저는 회사의 프로젝트 협력에 대해 논의하러 왔어요. 방안을 가져왔으니 한번 보도록 하세요.”이윤미는 말하면서 자신 비서의 손에서 서류를 건네받은 뒤 두 손으로 고현에게 건넸다.고현은 서류를 받아 들고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한참 후에 다 훑어본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그녀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꺼냈다.“윤미 씨의 방안이 괜찮아 보이지만 이씨 그룹의 실력이 부족해서 별로 협력하고 싶지 않네요.”고현은 직설적으로 말했다.협력업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윤미의 개인 회사와 협력하려 했던 것은 그냥 단순히 이윤미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했던 것이었다.하예진의 회사도 설립되고 나면 고씨 그룹과 협력할 예정이었다.이윤미가 호탕하게 웃었다.“고 대표님, 우리 이씨 그룹이 귀사에 비해 조금 못하단 걸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 이씨 그룹도 강성에서 백 년을 이어온 명문가라서 뿌리가 깊어요. 저도 일부 프로젝트를 책임졌으니 어느 정도 발언권이 있어요. 고 대표님이 저와 협력한다면 서로 윈윈할 수 있을 거예요. 당연히 대표님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을 거고요.”이윤미와 그녀의 비서는 협상에 진전이 없을 거란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고현에게 잘 보이려고 최선을 다했다.이씨 그룹을 아무리 추켜세워도 고현이 마음을 바꾸지 않자, 이윤미가 말했다.“고 대표님, 협력하지 않더라도 저와의 인연은 끊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비록 우리 이씨 그룹이 대표님의 눈에 들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협력할 기회가 생길지도 몰라요.”고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게 될 거예요.”이씨 가문이 권력에서 물러난다면 가능성이 있었다.이씨 그룹의 권력을 쥐고 있는 이씨 가문이 고씨 그룹과의 협력을 이용해 힘을 키우는 것이 두려워 고현은 협력하기 싫었던 것이었다.만약 이씨 그룹의 세력이 커진다면 하예진의 앞날이 더욱 험난해질 것 같았다.이윤미가 웃으며 말했다.“우리 이씨 그룹이 열심히 노력해서 하루빨
고빈은 몇 걸음 걷다가 고개를 돌려 이윤미를 쳐다보았다.한동안 보지 못해서 그런지 몰라도 자신감 넘치는 아우라를 발산하는 이윤미가 전보다 훨씬 예뻐 보였다.조금 전에 멈칫했던 것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애초부터 이런 모습이었다면 누나가 내게 소개해 줬을 때 거절하지 않았을 텐데.”고빈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물론 그녀에게 대시한다 해도 너무 늦지는 않았지만 이씨 가문과 엮이는 것이 싫어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이씨 가문에 이윤미 같은 인재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이씨 가문에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녀는 어릴 때부터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강인한 성격을 만들 수 있었다.그뿐만 아니라 상대를 방심하게 하여 허를 찌르는 데 능숙했다.고빈이 좋아하는 스타일은 이윤미처럼 가식이 많고 거짓말을 잘하는 여자가 아니라 순수한 여자였다.‘이윤미 같은 여자는 형에게 적합해. 둘이 함께 사람들의 뒤통수를 치면 누구도 당해내지 못해. 형이 이윤미를 높게 평가한 것을 감안할 때 둘이 충분히 한 쌍의 커플로 발전할 수 있어. 만약 그렇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놀아나겠지. 아니구나. 난 형이 없잖아! 강성의 사람들은 내게 형이 없고 누나만 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겨야 해.’자신과 인사하는 것만으로 고빈이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할 줄을 이윤미는 당연히 알지 못했다.이윤미가 비서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서자, 고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의 체면을 세워주었다.“윤미 씨, 뭐 드실래요? 비서에게 준비하라고 말할게요.”“따뜻한 물 한 잔이면 됩니다. 밤에 잠 못 잘까 봐 커피는 감히 마시지 못하겠네요.”고현은 두 사람을 소파에 앉으라고 말한 뒤 따뜻한 물을 따라주라고 자기 비서에게 지시했다.자리에 도로 앉은 고현이 커피잔을 들며 말했다.“저는 아침과 오후에 한 잔씩 마셔요. 습관 돼서 그런지 밤에 잠을 자는 데 별 지장은 없어요.”그녀는 보통 카페인이 효력이 사라진 자정이 되어서야 자는지라 걱정거리가 없는 한 수면에 큰 영향
“그러면 지금 바로 할머니께 전화할게. 퇴근 후 집에서 샤부샤부 먹겠으니, 집사에게 말하라고 말이야. 사람 좀 있어야 분위기도 나니까 이진 부부도 부를게. ”그러자 하예정이 말했다.“제가 할머니께 전화할 테니 당신은 가서 일 보세요. 아니면 오늘 밤 관성에 있는 사람 중 시간 있는 사람들을 와서 밥 먹으라고 가족 단톡방에 말 보낼게요. 하긴 사람이 많으면 시끌벅적하고 좋긴 하죠.”전태윤이 웃었다.“다들 바쁘니까 오지 못할 거야. 이진 부부만 불러.”“당신 말한 대로 할 테니 얼른 가서 일 보라니까요. 수중의 일부터 빨리 처리해야 나중에 그나마 수월해질 건데.”오랜만에 회사로 출근한 전태윤은 야근하지 않고 퇴근 시간에 맞춰 아내와 함께 집으로 가려 했다.아내의 거듭된 재촉에 전태윤은 마지못해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일을 시작했다.하예정은 할머니에게 전화하여 저녁에 전이진 부부를 불러 샤부샤부를 먹겠다고 말하자, 떠들썩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할머니는 당연히 기뻐하며 바로 승낙했다.강성, 이윤미가 타고 있던 차량이 고씨 그룹으로 향하고 있었다.차가 멈추자, 먼저 차에서 내린 이윤미의 비서는 뒷좌석의 차 문을 열어 이윤미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왔다.이윤미는 자신의 비서와 함께 사무실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수십 층에 불과한 이씨 그룹의 청사와 달리 중심상업지역에 자리 잡은 고씨 그룹의 청사는 강성의 모든 대기업 중 가장 높은 층수를 자랑했다.이미 오기 전에 고현에게 전화하여 프로젝트 협력에 관해 이야기할 시간이 있는지 물어본 후, 이윤미가 자신의 비서를 데리고 찾아온 것이었다.고현이 자신의 계획을 꿰뚫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윤미는 그래도 이씨 가문 딸의 신분으로 협력에 대해 논의하려고 했다.만약 그것이 통하지 않을 때 다시 사적으로 회사 대표의 신분으로 얘기해 볼 속셈이었다.고현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윤미는 잘 알고 있었다.그녀와 척을 지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윤미의 앞날에 먹구름이 낄 것이 뻔했다.이윤미가 여러
전태윤의 뒷부분 말을 들은 소정남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말하지 않으면 내가 얼마나 바쁘고 피곤한지 넌 모를걸. 약속 지켜. 네가 회사로 돌아오면 날 며칠 쉬게 하겠다고 약속했잖아. 네가 잊을 수 있으니 내가 계속 일깨워 주었을 뿐이야. 그리고 내년에 우리 효진이가 아이를 낳을 때 나에게 출산 휴가를 두 달 주기로 약속한 것도 잊지 마.”전태윤은 그를 꾸지람했다.“네가 아기를 낳는 것도 아닌데. 출산 휴가는 한 달이면 돼. 네 아내의 산후조리만 잘 돌보다가 바로 출근해. 게다가 너의 집에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산후조리가 끝나면 굳이 네가 나서지 않아도 될걸. 내가 두 개월 휴가를 주는 것도 너무 길다고 생각하는데 적게 줬다고 생각하다니.”소정남은 바로 반박했다.“예정 씨가 아기를 낳을 때 네가 매일 회사에 돌아와서 평소처럼 일할 수 있고 예정 씨의 산후조리를 돌보지 않는다면 내가 출산 휴가를 한 달만 낼게. 내가 아기를 낳는 것은 아니지만 난 남편으로서 효진이가 날 가장 필요로 할 때 내가 반드시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상황을 보면서 회사가 바쁘지 않으면 내가 3개월 휴가 줄게, 됐지?”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면 전태윤도 하예정이 출산하면 그녀의 옆에서 도와주고 싶었을 것이다.산후조리 때 특별히 잘 보살펴야 한다.소정남은 재빨리 말했다.“예정 씨, 들으셨죠? 태윤이가 저에게 출산 휴가 3개월을 주겠다고 약속했어요.”하예정은 웃으며 대답했다.“들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증인으로 되어드릴게요. 태윤 씨가 반드시 약속 지킬 거예요.”심효진의 임신 기간이 하예정보다 길었기에 내년 5월쯤에 아기가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이제 새해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소정남도 그의 상사와 내년 출산 휴가를 미리 상의하고 있었다.소정남은 그제야 시름을 놓으며 일어나 전태윤에게 말했다.“그럼 난 먼저 돌아가서 일할게. 오늘 업무를 전부 처리해 놓아야 내일 휴가를 잘 보낼 수 있을 테니까.”이틀간의 휴가를 얻은 소정남은
“준하 씨와 소현 언니가 바래다주러 가셨어요.”소정남이 말했다.“온 지 이틀도 안 됐는데 벌써 가셨어요? 제가 음식 대접할 시간도 없었네요.”하예정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시간 있을 때 A시에 가서 식사 초대하면 되죠. 준하 씨가 이번에 관성으로 온 이유는 단지 용정이가 우빈이와 함께 놀게 하려는 것뿐이에요.”소정남은 전씨 가문의 대표 부인 앞에서 그의 고통을 호소했다.“제가 시간이 전혀 없었어요. 태윤이가 결혼 휴가를 내서 오늘에야 출근했는데... 제가 너무 바빠서 물 한 잔 마실 시간도 없었어요. 제가 태윤에게 말할 틈이 없었는데 내일 제가 휴가를 내야겠어요. 좀 이따가 태윤이가 동의하지 않으면 예정 씨가 저를 도와주셔야 해요. 제가 한 달 동안 푹 쉬지 못했거든요. 내일 휴가를 내는 것도 휴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효진이와 함께 임신 검사받으러 가기 위해서예요.”하예정이 흔쾌히 대답했다.“좋아요. 태윤 씨가 정남 씨의 휴가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제가 도와서 말씀드릴게요. 요즘 정말 수고 많으세요. 필요하시면 제가 태윤 씨에게 휴가 이틀 내주라고 설득할게요. 차라리 휴가 낼 필요 없이 내일 효진이와 함께 검사받으러 가세요.”전태윤 부부가 결혼식 후 편안한 신혼여행을 보내게 되었다. 비록 관성을 떠나지 않았지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소정남이 전태윤의 업무량을 분담한 덕이다.이제 전태윤이 회사로 돌아왔으니 적절한 시기에 가장 바삐 돌아쳤던 소정남을 쉬게 해야 했다.소정남이 대답했다.“이틀 쉴 수 있다면 더없이 좋죠. 날씨도 추워졌는데 효진이가 샤브샤브를 먹고 싶어 하더라고요. 제가 줄곧 데리고 나갈 시간이 없었어요. 집에서 먹을 수는 있지만, 저의 사촌 누나가 자꾸 잔소리를 늘어놓으셔서 먹는다고 해도 효진이가 불편해해서 늘 나가서 먹고 싶다고 했거든요. 내일 함께 검사를 받고 저녁에 샤브샤브 먹으러 가야겠어요. 효진이가 임신한 뒤로 뭐 먹고 싶을 때마다 즉시 입에 넣고 싶어 하던데 예정 씨도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