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윤이 잠시 입을 꾹 다물다가 대답했다.“별장이랑 발렌시아 아파트를 사니까 적금이 얼마 남지 않았더라고. 차는 어차피 그저 교통수단이니까 잘 굴러가기만 하면 돼. 비싼 자동차 같은 건 필요 없어.”전태윤은 식은땀이 삐질삐질 났다. 아직도 수많은 거짓말로 예전의 거짓말을 수습하고 있었다.하예정이 다시 한번 그를 밀어냈다.“일단 이 손 놔요.”“도망가는 건 아니지?”“내가 어딜 도망가겠어요? 도망갈 생각이었더라면 말도 없이 짐 챙겨서 나갔죠. 큰소리를 내면서 떠나는 건 그건 태윤 씨한테 겁주려고 일부러 그런 거예요. 진짜로 떠나는 건 소리 없이, 망설임 없이 떠나는 거죠.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게.”그녀의 말에 전태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아 조심스럽게 물었다.“예정아, 넌 어떤 상황에서 날 떠날 거야?”“나한테 미안한 짓을 하고 제 발 저려서 이렇게 묻는 거죠?”전태윤이 부정했다.“그게 아니라 확실하게 물어서 앞으로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네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그러는 거지. 절대 내 곁을 떠나지 않게 할 거야.”담담한 표정의 그를 보며 하예정은 그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의 두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지만 뭔가 켕기는 게 있는 것 같진 않았다.그가 지금 솔직하게 얘기하는 건지, 아니면 떠보는 건지 도통 가늠이 가질 않았다.“내가 가장 못 참는 건 바람피우는 거랑 가정 폭력, 그리고 끝없는 거짓말이에요.”“난 바람피울 리도 없고 가정 폭력은 더더욱 없어.”전태윤이 바로 약속하자 하예정이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약속 꼭 지켜요.”“시간으로 증명할게.”전태윤은 제 발 저린 듯 끝없는 거짓말은 자연스럽게 무시했다. 그녀를 속인 일은 하나였지만 그 거짓말을 덮으려고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했는지 모른다. 결국에는 무수한 거짓말이 돼버렸다.그는 원래는 그저 하예정의 반응만 살필 생각이었다. 그녀가 잠깐 화를 내다가 다시 풀리면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을 생각이었지만 그녀의 마지노선을 알게 된 지금 전태윤
“마음에도 없는 소리.”전태윤은 짐을 싸러 갔고 하예정은 자리에 앉아 계속 돈을 셌다.관성의 최고 대그룹인 전씨 그룹은 역시 달랐다. 자금이 어찌나 탄탄했으면 지사에도 통쾌하게 돈을 썼다. 그녀가 전태윤을 고작 며칠 동안 보살폈을 뿐인데 백만 원 넘게 받았다.사실 동권배는 더 많이 주고 싶었지만 하예정이 의심할까 봐 너무 많이 주진 않았다.돈을 다 센 하예정은 평소 외출할 때 자주 갖고 다니는 돈지갑을 가지러 갔다. 천으로 된 돈지갑이라 가격도 엄청 쌌다. 인터넷에서 몇천 원에 산 거지만 아주 실용적이고 한꺼번에 꽤 많은 돈을 넣을 수 있었다.그녀는 돈을 지갑 안에 넣은 후 짐을 싸고 있는 전태윤을 쳐다보았다. 짐은 전부 그가 출장 가기 전에 하예정이 챙겨준 것이라 그리 많진 않았다.하예정은 이곳에 올 때 급히 오는 바람에 갈아입을 옷을 두 벌밖에 챙기지 못했고 생활용품도 여기에 와서 전부 새로 샀다.잠시 후, 짐을 다 싼 전태윤은 캐리어를 끌고 하예정에게 다가가며 말했다.“소정남 씨가 전용기 보내줬어. 이미 비행 팀원한테 연락했으니까 이만 가자.”전태윤은 한 손에는 캐리어를, 다른 한 손에는 하예정의 손을 잡았다.“태윤 씨, 정남 씨는 참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요. 정남 씨랑은 어떻게 친해지게 된 거예요? 효진이랑 잘 됐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훌륭한 남자는 계속 솔로로 지내긴 아까워요.”하예정은 심효진과 소정남이 잘 되길 진심으로 바랐다.전태윤이 웃으며 말했다.“나랑 정남 씨는 오랜 시간 같이 일해서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됐어. 일부러 친해지려고 한 게 아니라. 그리고 두 사람 사귀진 않더라도 친구는 될 수 있을 거야.”하예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절친의 연애 문제에 관해 고민하지 않았다.사람마다 감정을 대하는 태도가 다 다르다.그녀와 전태윤은 서로 소개해주는 것만 해주면 된다. 될지 안 될지는 두 사람에게 달려있다.몇 시간 후, 관성으로 돌아온 부부는 먼저 전씨 그룹으로 향했다. 전태윤은 올라가 상사에게 일을 보고해야 한다면서
심효진은 학교에서 방학한 뒤로 종일 집에서 먹고 자고 휴대폰으로 웹 소설을 본다.가끔 소정남이 심서준에게 전화 걸어 함께 저녁을 먹자고 하면 그녀는 혹여나 동생이 자기를 배신할까 봐 뻔뻔함도 무릅쓰고 밥 먹으러 같이 나간다. 그 외엔 거의 집밖에 나서지 않는다.그러던 중 절친 하예정이 돌아왔다는 문자를 받게 되니 그녀는 곧바로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그럼 저녁에 함께 훠궈 먹을래? 저번에 정남 씨가 서준이를 사줬던 훠궈 꽤 맛있던데. 네가 오면 꼭 함께 가서 먹고 싶었어. 넌 모를 거야. 나 서준이 따라 밥 먹으러 나가면 잘 먹지도 못해. 내가 작정하고 먹으면 웬만한 남자들보다 많이 먹잖니.”하예정이 웃으며 대답했다.“오늘 밤은 안 돼. 나랑 태윤 씨 방금 돌아와서 일단 푹 쉬려고. 내일 저녁에 봐. 예진 언니랑 소현 언니도 불러서 다 함께 만나.”“소현 씨는 음식을 너무 점잖게 먹어서 그냥 부르지 말자. 식탐이 많은 편이 아니라서 같이 먹으면 공통점도 못 찾겠어. 예진 언니는 지금 열심히 다이어트 중이라 하루에 달리기를 3번 하면서 식단조절까지 병행해. 함께 밥 먹으면 우리가 먹는 모습만 멀뚱멀뚱 지켜볼 텐데 밥이 넘어가겠니? 예진 언니 곧 다이어트 성공할 것 같아. 너 아직 돌아와서 언니 못 만났지? 일주일에 5킬로나 빠졌다니까. 진짜 엄청 노력하고 끝까지 버텨. 나라면 진작 포기하고 폭식했을걸.”식탐이 많은 사람은 입단속 하기가 가장 힘들다.“예진 언니는 이혼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무려 10킬로를 뺐어. 조금만 더 노력하면 곧 다이어트 성공할 거야.”언니가 일주일에 5킬로를 뺐다는 말에 하예정이 걱정스레 물었다.“우리 언니 단식하는 거 아니지?”관성에 없는 동안 언니의 일상생활도 지켜보지 못했다.매번 전화할 때마다 자기는 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면서 전태윤만 잘 보살피라고 했었다.심효진이 그녀에게 대답했다.“그런 건 아니고 언니가 운동량이 엄청 커. 하루에 달리기 3번 하고 육류랑 디저트를 안 먹어. 게다가 가게 인테리어까지
평소 타던 롤스로이스는 출장 기간에 기사더러 본가로 몰고 가서 그의 통지를 기다리라고 했다.“태윤 씨 회사 주차장은 자동차 전시회장 같네요. 웬만한 차종은 다 있잖아요.”하예정이 차 쪽으로 걸어가며 온갖 고급 차를 구경하며 말했다.“회사에 임원 층이 많고 연봉이 높다 보니 다들 좋은 차로 바꾸더라고. 알잖아, 남자들 차에 관심 많은 거. 난 집이 더 좋아. 집 사는 게 차 사는 것보다 훨씬 값지지.”그의 집 차고에도 전시회장처럼 차가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걸 하예정이 알았더라면 지금 그가 한 말을 전혀 믿지 않았을 텐데.“남자는 차를 좋아하고 여자는 집을 좋아하죠. 집이 있어야 안정감이 있거든요.”하예정이 전에 열심히 돈을 모았던 것도 우선 집을 사기 위해서였다. 지금 그녀가 타고 다니는 차는 전태윤이 선물해준 것이다.평소에 그녀는 거의 스쿠터를 타고 출퇴근을 한다.“처형한테는 도착했다고 얘기했지?”“문자 보냈는데 답장이 없네요. 바쁜가 봐요. 효진이가 말하길 우리 언니가 요즘 엄청 바삐 돌아쳐서 홀쭉해졌대요. 일주일에 5킬로나 빠졌다지 뭐예요. 다이어트 광고 찍어도 될 것 같아요 울 언니.”일주일에 5킬로라니, 실로 대단할 따름이었다.하예정은 언니가 하루빨리 다이어트에 성공해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랐다. 그렇게 되면 인간쓰레기 주형인이 땅을 치며 후회할 테니까.“처형은 의지가 대단한 분이야. 다이어트 하겠다고 마음 먹었으니 무조건 성공할 거야.”하예정도 머리를 끄덕였다.로얄 팰리스, 그녀가 단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곳, 심지어 전에는 부자들 동네라고 단정 지으며 이 별장 구역에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별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하예정은 줄곧 머리를 갸웃거리고 차창 밖의 풍경만 바라봤다.전태윤의 별장은 산 정상에 있는데 정상이라기엔 매우 낮은 산이었다.산꼭대기에 별장이 네댓 채 있는데 면적이 매우 크다 보니 이 구역에서 가장 큰 별장에 속한다.“어디가 태윤 씨 별장이에요?”하예정이 옆에 있는 전태윤에게 물었다.“가장 외진
전태윤은 대문을 열고 다시 차에 돌아와 시동을 걸었다. 이어서 별장 안으로 몰고 들어가 정문 앞의 공터에 주차했다.하예정이 묻지 않아도 그가 알아서 설명해주었다.“우리 부모님과 할머니는 본가에서 지내는 걸 더 좋아하셔. 거긴 떠들썩하지도 않고 다들 수십 년을 살아온 곳이라 이미 적응해서 우리 세대랑 함께 있는 걸 원치 않아. 할머니도 저번에 우리 집에 오셔서 며칠만 지내다가 금세 본가로 돌아가셨잖아.”하예정이 대답했다.“어르신들은 원래 다 그래요.”차에서 내린 후 그녀는 먼저 마당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마당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앞뒤 마당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앞마당은 주로 수영장과 나무, 그리고 작은 정자와 정자 옆의 그네가 배치되어 있었다. 한가할 때 그곳에 앉아 책을 보거나 풍경을 감상해도 괜찮을 듯싶었다.뒷마당엔 꽃과 나무들 위주였는데 그중에는 관성 사람들이 자주 심는 과일나무, 예를 들어 포도, 감귤, 사과나무 등이 줄지어 있었다.그리고 또 넓은 공터가 하나 있었는데 하예정은 그곳에서 야채와 딸기 등 과일을 심어도 좋을 것 같다고 얘기했다.그녀의 말을 들은 전태윤이 웃으며 답했다.“난 텃밭을 가꿀 시간이 없어. 앞으로 이 집의 여주인은 너야. 꽃이든 채소든 네가 심고 싶은 걸 마음껏 심어봐. 난 뭐든 다 오케이야.”사실 이 공터는 원예사가 장미를 심으려고 일부러 비워둔 곳이다.전태윤은 이 별장을 하예정에게 공유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녀가 없는 틈을 타 집사에게 얼른 통보했다. 다들 그의 다른 별장으로 이사 가고 이 별장을 비워두라고 말이다. 그 바람에 원예사가 비워놓은 공터도 하예정이 마음껏 가꿀 텃밭으로 거듭났다.정자 옆의 그네도 임시로 마련해 놓은 것이다.하예정이 그네에 앉아 꽃과 풍경을 감상하는 걸 아주 좋아하니까.“여기서 출근하려면 우리 둘 다 너무 멀어요. 당분간은 발렌시아 아파트에서 지내요.”하예정은 발렌시아 아파트가 더 편했다.이 별장은 가끔 휴가를 보내는 셈 치고 와서 지내면 된다.“우리 둘
“여긴 우리 집이야. 앞으로 쭉 여기서 살 테니까 집구경은 나중에 해.”전태윤은 집안에 들어선 후 곧장 그녀를 둘러업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나 배불리 먹거든 다시 내려와서 맛있는 저녁 차려줄게.”하예정은 말문이 막혔다.둘은 안방으로 들어간 후 하예정은 방 구경을 할 겨를도 없이 달아오른 전태윤에게 이끌려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그의 건장한 체구가 위에서 짓누르니 숨이 턱턱 막혀 재빨리 팔을 뻗어 밀쳐냈다.“태윤 씨 너무 무거워요!”전태윤은 손으로 몸을 지탱하고 불타오르는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며 나지막이 물었다.“예정아, 진짜 해도 돼? 후회되면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나 또 가서 찬물에 샤워하면 그만이야.”하예정이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태윤 씨는 부모님의 장점만 쏙 빼닮아서 너무 잘생겼어요. 매일 이렇게 잘생긴 남자를 마주해야 하는데 내가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겠어요? 다시는 찬물에 샤워하지 않기로 약속해서 퇴원한 거잖아요.”전태윤이 몸을 기울이고 그녀의 입에 살포시 입맞춤했다.“거짓말도 참 자연스럽게 하네. 우리가 각방 쓸 때 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걸 다 봤어. 말로만 날 잡아먹겠다면서 유혹해대지만 정작 분위기가 달아오르면 너부터 가장 빨리 도망치잖아.”인제 둘 사이의 감정도 생겼고 또 전태윤이 계약서를 파기했기에 그녀도 시름 놓고 과감히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녀는 드디어 그와 진짜 부부가 되리라 다짐했다.그렇지 않으면 두 사람은 계속 쇼윈도 부부로 지내야 한다.“샤워부터 해요.”“그래.”전태윤은 그녀의 입술에 키스한 후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챙기며 말했다.“난 거실 쪽 욕실에서 씻을 테니 네가 여기서 씻어.”하예정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얼른 가요.”전태윤은 참지 못하고 되돌아와 그녀의 볼에 두 번 뽀뽀하고 나서야 싱글벙글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그는 가장 빠른 속도로 샤워를 마치고 방에 돌아왔다. 하예정은 이미 침대에 누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남편을 본 그녀는 볼이 살짝 빨개졌고 무심코 몸에 덮은 이불을 위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남편에게 들키자 하예정의 얼굴이 무르익은 사과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그녀는 벌떡 일어나 앉으며 휴대폰을 뺏어와 화면을 잠그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말했다.“심심해서 그냥 아무거나 검색해본 거예요. 술은 어디 있어요?”전태윤이 술을 두 잔 가져와 한 잔을 그녀에게 건넸다.“우리 아직 밥을 안 먹었으니 너무 많이 마시진 마. 반 잔만 마시면 돼.”“이 정도 양이면 서너 모금에 다 마셔버리겠네요. 간에 기별도 안 가겠어요.”하예정이 구시렁대며 술잔을 받아와 한 모금 맛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전혀 진하지 않았다. 전태윤은 그녀가 바로 취할까 봐 내심 걱정한 듯싶었다.하예정은 물 마시듯 반 잔의 술을 곧장 들이켰다.전태윤은 한 모금만 마시고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그는 수줍을 게 없으니 술을 빌려 용기 낼 필요가 없다.“안 마셔요? 안 마시면 나 줘요.”하예정이 손을 뻗어 그의 잔을 가져오려 했다. 그의 잔은 그녀 것보다 크고 술도 더 많이 담겨있었다.전태윤은 긴 팔로 재빨리 잔을 치우고 그녀의 손을 밀쳐냈다. 그는 술잔을 침대 머리맡에 내려놓고 양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다잡으며 가까이 다가가 가볍게 키스했다. 이어서 그녀를 살포시 침대에 눕혔다.“태윤 씨... 나 조금 두려워요...”“괜찮아, 나한테 맡겨.”전태윤이 부드럽게 키스하며 그녀의 긴장한 마음을 녹였다.다정한 그의 제스처에 하예정도 서서히 긴장을 풀고 그에게 템포를 맞춰갔다.“띠리링...”이때 전태윤의 휴대폰이 울렸다.“전화 왔어요.”“신경 쓰지 마.”그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하여 전화를 받을 겨를이 없다.“띠리링...”휴대폰 벨 소리가 계속 울렸고 전태윤은 끝까지 받지 않았다. 결국 상대도 세 번 전화를 건 뒤 포기했다.알고 보니 성기현한테서 온 전화였는데 그는 전태윤이 출장을 다녀왔다는 소식을 듣고 얼른 그를 불러내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다만 전태윤은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고 성기현은 휴대폰을 식탁에 내려놓았다.그의 국을 따르고 주방에서
전태윤은 흐뭇한 얼굴로 위층에서 내려왔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것까지 들을 수 있다.혼인신고하고 지금까지 긴 시간 동안 그는 드디어 하예정의 진짜 남편으로 거듭났다.전태윤은 주방에 들어가 옷걸이에 걸린 앞치마를 내려서 허리에 두르고 냉장고를 열어서 식자재를 꺼냈다. 이제 곧 만들 몇 가지 요리의 식자재들이다.우선 아내가 몸보신용으로 마실 국을 끓여야 한다.국에 필요한 식자재를 다 손질한 후 끓는 물에 투하하고는 밥을 지었다.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박 집사에게 전화했다. 박 집사가 전화를 받자 전태윤이 낮은 목소리로 분부했다.“집사님, 사람 시켜서 신선한 새우를 보내오세요. 냉장고에 신선한 해산물이 별로 없네요.”다른 채소는 있든 없든 상관없지만 하예정이 제일 좋아하는 새우는 무조건 있어야 한다.“도련님, 사모님이랑 아직 식사 안 하셨어요?”박 집사가 살짝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숙희 아주머니더러 먼저 돌아와서 저녁 준비를 하게 했어야죠.”“늦게 먹어도 괜찮아요, 나 아직 배 안 고파요. 예정이도 회사에서 디저트 몇 개 먹었어요.”“그럼 다행이네요. 지금 바로 신선한 새우를 보내드릴게요. 30분쯤 걸릴 겁니다.”전태윤이 알겠다며 대답했다. 새우는 금방 익어 나중에 투하해도 되니 일단 다른 요리부터 만들면 된다.오랜만에 요리하는 전 대표께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각종 식자재를 손질했다. 그는 가장 잘하는 요리를 몇 가지 만들어 사랑하는 아내에게 먹일 예정이다.전태윤은 지금 이 순간 할머니께 더없이 감사했다.그의 할머니는 다른 재벌가와 다르게 아홉 손주에게 전부 음식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셨다.훌륭한 셰프로 거듭나 장차 아내의 위를 사로잡고 누구보다 입을 까다롭게 만들어 남편이 해주는 음식만 먹도록 할 큰 그림인 듯싶었다. 그렇게 되면 남편을 떠나려야 떠날 수 없을 테니까. 전태윤은 뒤늦게 할머니의 의도가 의심됐다.그는 주방에서 아내가 먹을 저녁을 정성껏 만들었다. 하예정은 안방의 화장실 욕조에 누워 편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