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아.”하예정이 그에게 반지를 끼워줄 때 전태윤이 매력적인 중저음으로 말했다.“앞으로 무슨 일이 있든 절대 헤어지지 말고 이혼 얘기 꺼내지도 말자, 응?”하예정은 두 반지가 그들에게 참 어울린다고 생각하여 그가 보는 눈이 있다고 속으로 칭찬하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고르지 않아도 그녀에게 어울리는 걸 골랐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그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이건 약속할 수 없어요. 만약 태윤 씨가 주형인처럼 인간쓰레기만도 못한 짓을 저질러도 이혼 얘기 못 꺼내요? 바람피운 남자는 한시라도 빨리 차버리는 게 나아요. 남겨둬봤자 역겹기만 하니까.”전태윤은 나중에 자신의 정체를 밝혔을 때 하예정이 떠나지 않게 하려고 그녀의 약속을 받아내려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 방법이 그녀에게 전혀 먹히지 않았다. 이렇게나 감동적인 상황에서도 그녀는 냉철한 판단을 했다. 역시 전태윤이 사랑한 여자는 달랐다.“그럼 내가 바람피우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무슨 일이 있든 절대 이혼 얘기 꺼내면 안 돼. 우리 평생 부부로 함께 지내자.”전태윤은 절대 바람을 피울 남자가 아니다. 그의 성격에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평생 그 여자만을 사랑할 것이다.바로 이것 때문에 그는 더욱 두려웠다. 나중에 그녀가 그의 정체를 알게 된 후 가차 없이 차버릴까 봐.“나한테 무슨 미안한 짓을 했어요?”하예정이 되물었다.“오늘 참 이상해요. 아침부터 꽃을 선물하지 않나, 결혼반지도 주지 않나... 비록 내가 다이아몬드를 감별할 줄은 몰라도 이 반지가 엄청 비싸다는 건 알아요. 평소랑 너무 다르니까 의심하게 되잖아요. 나한테 무슨 미안한 짓을 했죠? 그래서 지금 이런 이벤트로 날 감동하게 해서 대충 넘어갈 심산인 거죠?”전태윤은 입을 꾹 다문 채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참 상상력도 풍부하단 말이야. 큰마음 먹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더니 음모론이나 제기하고.”“내 예측이 틀렸어요?”그의 표정이 전혀 흔들림이 없자
“그건 아직 모르겠어. 일만 처리하면 바로 올 거야.”“그럼 출장 가는 날에 나한테 얘기해요. 내가 짐도 챙겨주고 공항까지 바래다줄게요.”그의 방에 그녀의 옷이 없어 하예정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씻고 옷을 갈아입으려 했다. 그녀가 방을 나서려 하자 전태윤은 손을 내밀어 잡더니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의 아리따운 얼굴을 바라보았다.“고작 그뿐이야?”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하예정은 눈만 깜빡였다.‘그러면 뭘 더 바라는데요? 출장 가는 도시까지 바래다줄 수는 없잖아요.’“가족이 함께 따라가도 돼요?”전태윤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공항까지 바래다주면 안 돼요?”전태윤은 그녀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하예정은 그의 손을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요즘 말 좀 잘하나 싶더니 또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거예요? 자꾸 나한테 맞춰보라고 하지 말아요. 나 머리가 나빠서 모른단 말이에요. 방에 가서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 아침은 이따가 나가서 먹을래요, 아니면 직접 해 먹을래요?”하예정이 밖으로 나가며 물었다.“네가 알아서 해.”삐진 듯한 그의 말투에 하예정은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의 눈치를 살핀 후에야 방문을 열고 나갔다.전씨 할머니와 마주친 하예정은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인사했다.“할머니, 굿모닝이에요.”“그래, 굿모닝.”할머니는 손자의 방에서 나오는 하예정을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해도 한 침대에서 자는 것만으로도 아주 큰 발전이었다.그들은 집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하예정은 할머니와 전태윤에게 간단하게 국수를 만들어주었다.“따르릉.”하예정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언니의 전화인 줄 알고 휴대 전화를 꺼내 보았는데 낯선 번호였다. 그녀의 낯빛이 순식간이 어두워졌다. 요즘 걸려오는 낯선 전화는 대부분 그녀 본가의 친척들이었다.지난번에 성소현이 나서서 한마디 한 후에 한동안은 잠잠했다. 그런데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전화한 것일까?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던 하예정이 전화를 끊어버리자 곧바로 또 울
“전 그런 얘기 한 적 없어요. 할아버지가 하신 거예요.”하 영감은 잠깐 말문이 막혔다.“너 지금 어디야? 시간이 몇 시인데 아직도 가게 문 안 열었어? 다른 사람은 진작 돈 벌었겠다.”“태윤 씨, 할아버지가 가게 문 언제 여냐고 내 걱정하세요. 해가 서쪽에서 뜬 건 아니죠? 얼른 발코니 가서 봐봐요, 해가 서쪽에서 뜨나. 서쪽에서 뜨면 기이한 광경을 찍어서 남겨야죠.”하 영감이 굳은 얼굴로 욕설을 퍼부었다.“하예정, 말 돌리지 마, 할아버지가 얘기하고 있잖아. 나 지금 네 삼촌, 외숙모들이랑 가게 문 앞에 있어. 당장 와서 문 열어! 우리 아직 아침도 못 먹었으니까 올 때 아침도 사 와.”“근처에 조식 식당이 많아요. 식당 가서 드시기 싫으면 그냥 굶으세요.”그녀는 그들에게 아침까지 사다 바칠 마음이 없었다. 아침을 배불리 먹고 힘이 남아돌아서 더 욕하려고?하 영감은 하예정의 태도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계속 욕하려는데 하지문이 휴대 전화를 낚아채고 다정하게 말했다.“예정아, 나 둘째 사촌오빠야. 우리 지금 가게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얼른 와. 너한테 할 얘기 있어.”“아침 다 먹고 갈게.”“그래. 기다릴게.”하지문은 용건만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친정집 친척들이 또 찾아왔어?”전태윤은 하예정이 휴대 전화를 내려놓는 걸 보고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 전태윤이 뒤에서 몰래 복수한 탓에 일도 뜻대로 풀리지 않을 텐데 감히 또 찾아온다고?소정남의 말대로 빈털터리가 된 그들이 더는 두려울 게 없어서 하예정에게 뻔뻔스럽게 돈을 요구하는 건가?“네, 아무래도 온 가족이 총출동해서 가게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요. 대체 왜 저러는 건지... 나한테 할머니 병원비를 감당하라고 하는데 그건 절대 불가능해요. 저들이 머릿수로 밀어붙여도 난 두렵지 않아요.”할머니에게 효심이 가득한 손자가 그렇게나 많은데 할머니의 예쁨도 받지 못한 손녀가 병원비를 낸다는 게 말이 되는가?그녀의 사촌오빠들은 하예정 자매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을 보내
하예정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하늘이 무섭지도 않아요? 그러다 벌 받아요.’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곧 그 죄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그 사람들이 널 찾아온 목적이 뭐든 같이 가. 싸움이 일어나면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잖아.”전씨 할머니는 하예정과 함께 가겠다고 고집했다. 하예정은 자신이 싸움을 꽤 잘한다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만만치 않은 친척들과 가게 앞에서 정말 싸우기라도 한다면 혼자서는 당해내기 힘들 거로 생각하여 더는 할머니를 말리지 않았다.언니에게서 할머니가 엄청 대단하고 만만한 분이 아니라는 얘기를 들었었다.셋이 국수를 뚝딱 비우고 하예정이 설거지하려 하자 할머니가 손자에게 눈치를 주었다. 전태윤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하예정의 손에서 그릇을 받고는 설거지하러 주방으로 들어갔다.“예정아, 태윤이한테 뭐든지 다 해주지 마.”할머니가 하예정에게 가르쳤다.“쟤한테 집안일도 좀 시켜. 이 집은 너희 두 사람 것이고 부부가 함께 꾸려나가야지. 쟤가 밖에서 일하느라 힘들겠지만 너도 출근하잖아. 넌 안 힘들어? 집에서 손가락 까딱 안 하게 하지 말고 집안일도 시키면서 부려 먹어. 그래야 네가 덜 힘들지.”“할머니, 태윤 씨 지금도 잘하고 있어요. 가끔 집안일도 도와줘요.”퇴근하고 집에 와서 손가락 까딱 안 하는 건 그녀의 쓰레기 같은 형부였다. 무슨 일이든 다 언니에게 맡겼고 손발이 멀쩡하면서 왜 아무것도 하지 않냐고 한마디 하면 종일 출근하느라 힘들다면서 집에서는 쉬고 싶다고 당당하게 얘기했었다.그리고 맨날 집에서 애만 보는 게 얼마나 쉬운데 집안일까지 도와달라고 한다고 언니를 게으른 여자라고 욕하기도 했다...인간쓰레기만도 못한 남자를 이젠 욕하기도 귀찮을 지경이었다. 그녀의 언니는 이젠 그에게서 벗어나 서현주에게 그대로 넘겨주기만 하면 된다.서현주 같은 여자를 만난 주형인이 과연 집안일에 손을 대지 않아도 될까?“쟤네 몇몇 형제들한테 내가 어릴 적부터 자립 능력을 가르쳐서 뭐든지 다 잘해. 쟤가 밖에서 힘들게 일한다고 네가
전태윤은 주방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전부 다 들었다. 할머니가 하예정을 편애하는 건 이미 진작 익숙해졌다. 할머니는 손녀가 생기길 무척이나 바라셨지만 결국 손자가 아홉이나 생겼다.할머니는 하예정을 보자마자 첫눈에 마음에 들어 하예정을 손녀로 삼고 싶어 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손녀를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바로 생각을 바꾸었다. 할머니는 하예정을 자신의 손자며느리로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그러면 평생 전씨 가문의 사람이 될 테니까.전태윤은 설거지를 마친 후 싱크대 주변도 빛이 날 정도로 깨끗하게 닦았다. 그다음 세정제로 행주를 말끔하게 빨고는 손까지 씻고 주방에서 나왔다.하예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양복 외투와 넥타이를 가져다주었다. 비록 아직 넥타이를 맬 줄은 모르지만 그녀의 적극적인 모습에 전태윤도 흐뭇했다.설거지하면 미인의 사랑을 누릴 수 있으니 꽤 괜찮은 것 같다.할머니도 하예정의 모습이 만족스러웠다. 전태윤에게 적당한 보상을 주면 전태윤도 앞으로 그녀 말만 들을 것이다.부부라면 서로 아껴주고 희생해야만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헌신하고 다른 한쪽은 누리기만 한다면 헌신한 쪽이 언젠가는 마음이 식어가게 돼 있다.30분 후, 가게에 도착해보니 가게 문이 열려있었다. 심효진이 먼저 와서 가게 문을 열었는데 하씨 가문 사람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하 영감은 하지명에게 가게로 들어가서 의자 하나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렇게 하 영감만 의자에 앉아있었고 다른 이들은 문 앞에 서 있거나 쪼그리고 앉아서 기다렸다. 그들의 얼굴에 저마다 짜증이 잔뜩 섞여 있었다.하지문은 하예정을 기다리며 담배를 몇 대나 피웠는지 모른다.전씨 가문 도련님에게 익명의 편지를 보낸 후 그는 자신이 전씨 그룹에 입사할 줄 알고 자신만만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전씨 그룹은커녕 다른 작은 회사도 그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업자가 된 하지문 말고도 가족들이 하던 일도 전부 영향을 받
“하예정.”하지명과 하지문이 할아버지와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왔고 나머지 친척들은 밖에서 대기했다.“네 남편이야?”하 영감은 전태윤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왠지 하예정의 남편이 하예진의 남편보다 훨씬 더 나아 보였다. 그와 동시에 두 손녀를 시집보내면서 예물을 일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남 좋은 노릇만 했다는 생각에 불만도 생겼다. 만약 셋째 아들이 저승에서 알았더라면 아마 화가 나서 살아 돌아올지도 모른다.하예정의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직 생전이라 예물은 당연히 두 사람의 몫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하예진 자매는 일전 한 푼도 그들에게 주지 않았다.“할아버지 손자사위예요. 어때요? 잘생겼죠?”하예정은 전태윤 옆으로 다가가 한 손을 전태윤의 어깨에 걸치면서 일부러 할아버지에게 물었다.“우리 부부 참 잘 어울리죠?”하 영감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한참 후에 전씨 할머니에게 물었다.“그쪽은 누구시죠?”“사돈.”‘남자 쪽 가족이구나.’하 영감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두어 모금 피운 뒤 말을 이었다.“예정이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우리한테 얘기하지 않아서 사돈의 존재도 모르고 있었어요. 오늘 처음 뵙네요.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면서요? 그럼 사돈댁에서 우리 예정이한테 예물을 얼마 정도 줄 계획인가요? 집이랑 자동차는 이미 다 준비했겠죠? 예정이 부모가 일찍 돌아가긴 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직 살아있어요. 예전에 서로 얼굴을 붉힌 일이 있어도 내가 쟤 할아비란 사실은 변함이 없어요. 그러니까 예정이한테 주는 예물은 우리한테 주는 게 당연해요.”대부분의 재벌 집 할머니라면 하 영감처럼 만나자마자 돈 얘기부터 꺼내면 당장 얼굴을 붉히고 자리를 박차고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사돈댁, 예물은 당연히 드려야지요. 하지만 예물은 예정이한테 줄 겁니다. 예정이가 예물을 어떻게 쓰는지는 예정이가 알아서 할 일이니 우린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좋겠어요.”그 말인즉슨 예물을
하예정은 바로 문을 가리키며 차갑게 쏘아붙였다.“할아버지, 저희 가게 문 바로 저기 있어요. 일어나서 당장 나가주세요! 우리 언니 일은 당신들이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그리고 주형인네 가족들이 여러 번 찾아왔을 때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당사자들이 다 알 거예요. 진심으로 사과하기는커녕 종일 나더러 당신들과 화해하라고요? 잘못한 게 대체 누구인데요?”하 영감은 그녀가 전혀 말을 들으려 하지 않자 씩씩거리며 전태윤에게 말했다.“이보게, 젊은이, 그쪽도 보다시피 예정이는 친정 식구들이 뒷받침해주는 걸 원치 않아. 그러니까 마음껏 괴롭혀. 우린 절대 그쪽을 찾아와서 따져 묻지 않을 테니까.”전태윤은 하 영감을 밖에 내던지고 싶었다.이런 할아버지는 그도 처음 겪었다.아무리 제 손녀가 싫어도 어떻게 이런 식으로 말을 내뱉을 수가 있을까?전태윤이 싸늘하게 말했다.“난 아내를 예뻐하고 사랑해주기 위해 결혼했지, 절대 괴롭히려고 집에 데려온 건 아니에요. 아내를 괴롭히는 남자는 인간도 아니죠! 본인들이 직접 알아서 나가실래요 아니면 내가 빗자루를 들고 문밖에 내쫓을까요?”하예정도 할아버지의 말에 울화가 치밀었다.이 인간들은 늘 그녀와 화해한다면서 정작 하는 짓과 내뱉는 말투는 일말의 뉘우침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직도 모든 게 그녀의 잘못이라고 여길 뿐이다. 다만 그녀의 뒤를 봐주는 버팀목이 있다고 여기면서 요즘 본인들이 당한 재수 없는 일들을 전부 그녀 배후의 지시자가 벌인 거라고 죄를 뒤집어씌우려 한다.하여 이렇게 번마다 뻔뻔스럽게 찾아오고 있다.하예정이 말했다시피 그들 사이의 모순은 인스타에서 시작했으니 인스타로 끝내야 한다. 그들이 인스타로 공개 사과를 하고 하예진 자매에게 뒤집어씌운 누명을 깨끗이 씻어준다면 그녀도 달갑게 화해할 것이다.이렇게 쉬운 요구도 못 들어주는데 하예정이 대체 왜 한 걸음 물러서야 하는 걸까?하지문이 재빨리 말했다.“예정아, 할아버지가 연세가 있어 제정신이 아니다 보니 듣기 거북한 말을 내뱉은 거야. 절대 마음에 담아
“저 사람들이 왜 주형인을 편들어주지?”심효진이 의아한 듯 물었다.“주씨 집안에서 저들에게 무슨 혜택을 주었나?”하예정이 쓴웃음을 지었다.“우리 언니랑 주형인이 이혼 합의서를 새로 썼는데 합의 이혼하면 주형인이 언니에게 2억 원 좌우 줘야 하거든. 그 집 어르신들이 돈 아까워서 우리 할아버지를 찾아가 사정한 것 같아.”어찌 됐든 좀 전에 온 한 무리 사람들은 명의상에서 하예진 자매의 친척이니까.“주형인 부모가 할아버지한테 돈을 얼마나 줬을까? 넙죽 받기만 할 뿐 절대 지시대로 할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평소에 우리 언니를 괴롭힐 땐 누구보다 교활했어.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니 정말 돈이 급했나 봐.”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그러지나 말 것이지!“태윤 씨, 괜찮아요. 그만 출근해요.”친척들이 떠난 후 하예정은 남편더러 얼른 출근하라고 다그쳤다.그녀를 따라왔지만 딱히 도와준 게 없었다. 아내가 워낙 전투력이 강하다 보니 일반적인 상황에선 그의 도움이 필요 없다.전태윤은 아내의 다그침 속에 답답한 마음을 끌어안고 자리를 떠났다.회사로 돌아간 그는 강일구에게 전화했다.강일구가 전화를 받자 전태윤은 목소리를 내리깔고 분부했다.“일구야, 오후에 애들 불러서 철거 도구를 챙기고 광명 아파트로 보내. 예진 씨 이사하는 거 도와주고 그 집 모조리 허물어버려.”강일구가 깍듯하게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넌, 가지 마. 와이프가 네 얼굴 알아.”강일구가 말했다.“대표님, 저는 대리기사라서... 다른 일당도 뛸 수 있어요. 집 허무는 건 제가 또 아주 잘합니다.”그렇게 시끌벅적한 일을 하지 말라고 하니 강일구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전태윤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와이프가 의심하지 않도록 거짓말을 둘러댈 수 있다면 같이 가.”강일구가 바로 대답했다.“걱정 마세요, 도련님. 저도 이젠 핑계를 두어 번 둘러댔더니 나름 경험이 생겼어요. 사모님이 의심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전태윤은 침묵하다가 음침하게 말했다.“핑계를 여러 번
하예정은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용정을 예준하 곁으로 먼저 보냈다. 예준성 부부는 관성에 온 뒤로 줄곧 예준하의 별장에 머물렀다.예준하의 집에 도착하여 용정을 모연정 부부의 손에 넘겨주고 나서야 하예정의 긴장했던 신경이 풀리기 시작했다.“아줌마, 저 여기서 좀 더 놀 수 있을까요?”친구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우빈은 아쉬워하며 용정과 한 시간이라도 더 놀고 싶어 했다.우빈이가 입을 열었다.“용정이가 이번에 떠나게 되면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저랑 놀 수 있거든요.”하예정은 모연정을 쳐다보았고 모연정이 말을 건넸다.“저희도 짐을 정리해야 해서 30분 정도 있다가 집으로 갈 거예요. 두 아이를 30분만 더 놀게 해요. 용정도 우빈이와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하지만 이렇게 계속 놀게 할 수는 없잖아요. 너무 신나게 놀면 마음을 거두어들이기 어려워져요.”“그러게요. 정신없이 놀다 보면 자꾸 놀 생각만 하고 유치원은 가기 싫어질 거예요. 용정과 비교되지 않았다면 우빈은 아마 그의 사촌 이모처럼 강제적으로 차에 태워야 했을걸요.”성소현이 어렸을 때 유치원에 다니는 것을 꺼린 사실이 언급되자 모연정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성소현은 예준성 부부를 배웅하러 왔는데 하예정이 그녀의 과거 이야기를 꺼내자 바로 얼굴을 붉히며 하예정을 가볍게 때렸다.“예정아, 너 정말 못된 것만 배운 거 아니야? 누가 어릴 때 유치원에 가고 싶었겠어?”하예정은 히죽히죽 웃었다.“저는 아마 가기 싫어한 적 없을걸요. 어쨌든 우리 부모님께서 내가 어렸을 때 유치원에 가기 싫어했다는 말씀하신 적 없었어요. 우리 언니도 말 한 적 없는걸요.”하예정은 유치원에 간 기억이 없지만, 하예진이 5살 연상이라 하예정이 유치원에 가기 싫어한 경험이 있으면 그녀에게 말했을 것이다.“우빈아, 얼른 놀아. 시간이 30분밖에 없어. 우리 모 아줌마를 배웅해 드려야 해. 그리고 이모부 회사로 가서 이모부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집에 가서 밥 먹자. 오늘 실컷 놀고 내일부터 유치원에 가
윤미라는 노동명이 우빈의 계부가 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적어도 노동명의 가정에는 아이가 있다.어쩌면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되면 하예진이 또 아이를 낳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우빈은 늘 여동생을 원했다.하예정의 배 속에 있는 아기도 다들 아들이라고 여겼다.우빈이가 여동생을 갖고 싶어 하면 아마도 하예진에게 여동생을 낳아달라고 조를 것이고 노동명에게도 친자식이 생기게 될지도 모른다.그 자식이 딸일지라도 노동명의 핏줄이기만 하면 윤미라는 엄청나게 기뻐할 것이다.물론, 윤미라는 이런 생각들을 감히 드러내지 못했다.노동명의 교통사고는 윤미라 부부의 전통관념을 약화시켰던 것이다.“이만 가볼게요. 시간이 나면 또 올게요. 우빈이는 아마 자주 오게 될걸요.”하예정이 여전히 두 아이를 데리고 집에 돌아가겠다고 고집하자 윤미라도 어쩔 수 없이 영양제를 억지로 하예정에게 쑤셔 넣어주었다.“아주머니, 저의 허리를 보세요. 더 몸보신했다가 허리가 더 굵어질 것 같아요.”하예정이 지금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보양식이다.그녀의 집에는 보양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윤미라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예정 씨가 뚱뚱한 게 아니라 임신하니까 허리둘레가 변한 거예요. 정상인걸요. 임신 말기로 되면 배가 뽈처럼 통통해져 허리가 더 굵어질 거예요. 아기가 나오면 서서히 살이 빠질 테니까 얼른 가져가세요. 이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것은 보양식 외, 우빈이가 좋아하는 간식도 들어있어요. 예정 씨와 우빈을 우리 집에서 밥 먹고 가라고 하고 싶은데 급히 떠나려고 하시길래 이렇게 포장해 드렸어요.”윤미라는 또 돈 봉투 두 개를 꺼내 용정과 우빈에게 건네주었다.두 아이 모두 그 봉투를 받을 엄두를 못 냈다.윤미라는 웃으며 용정에게 돈 봉투를 쥐여주면서 말을 건넸다.“용정아, 네가 우리 집에 놀러 와서 돈 봉투를 주는 거야. 얼른 받아.”용정이가 하예정을 바라보자 하예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받으라고 했다. 용정은 그제야 감히 받아들이며 윤미라에게 고맙다고 인
우빈은 무척 실망했다.우빈은 용정이가 벌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용정의 말을 들은 하예정은 궁금해하며 물었다.“책을 베껴 쓸 줄 알아? 힘들지 않아?”용정과 우빈은 나이가 비슷했다. 우빈은 지금도 간단한 숫자 몇 개와 시 몇 수밖에 외우지 못했다.하예진 자매는 우빈이가 어릴 적엔 주로 잘 먹고 잘 놀아야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우빈에게 너무 많은 학업적인 스트레스를 주지 않았다.하여 우빈은 유치원에 가는 것이 너무 쉽고 너무 즐거웠다.우빈도 한동안 유치원에 가기 싫어 맨날 입만 삐죽삐죽 내밀면서 유치원 생활이 너무 재미없다고 느꼈다.“이해하지는 못해요. 사부님께서 의학책을 외우라고 가르쳐 주셔서 외우고는 있지만 무슨 의미인지 몰라요. 베끼지 못해도 베껴야 하거든요. 아니면 사부님께서 맛있는 음식도 주지 않으세요. 그리고 저에게 책을 베끼어 쓰라고 벌할 때면 저는 한 페이지를 아주 오랫동안 베껴야 겨우 완성할 수 있어요.”비록 용정은 총명하고 아는 글자가 우빈보다 훨씬 많으며 쓸 줄도 알지만 어쨌든 겨우 서너 살 된 아이였다. 그런 아이에게 수많은 글씨가 박힌 책 한 페이지를 베끼라고 하니, 용정에게는 아주 무거운 임무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한 번 벌을 받아 본 용정은 겁에 질렸다.사부님은 용정이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의학책을 베끼어 쓰게 하겠다는 말을 꺼내곤 했다. 그러면 용정은 감히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하예정은 용정의 머리를 가여운 표정으로 쓰다듬으며 위로했다.“수고했어.”우빈은 아직 근심 걱정 없이 살고 있는데 용정은 지옥의 훈련을 받아야 했다.다행히 신의 일행은 “도”를 잘 장악하고 있어서 용정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지는 않는다.그들은 시간이 한참 지나게 되면 용정에게 며칠 휴가를 주었다. 그리고 그를 A시로 돌려보내 예진 리조트에서 며칠 묵게 하면서 긴장을 풀게 했다.너무 심하게 몰아붙이면 역효과를 볼 것이다.윤미라는 용정을 처음 보았다. 용정의 말을 듣던 윤미라는 하예정에게
“이번 주 금요일에 네가 유치원에서 나오자마자 아저씨가 널 데리고 강성으로 올게. 그리고 일요일 오후에 돌아갈 거야, 알았지?”노동명은 우빈에게 약속했다.이렇게 되면 금요일에 노동명은 우빈과 함께 떳떳하게 강성으로 올 이유가 생기게 된 셈이다.“정말? 아저씨, 거짓말 아니죠?”“난 어린이를 속이지 않거든. 아저씨가 성실하다는 생각 안 들어?”우빈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노동명이 정말 성실하다고 느꼈고 이내 대답했다.“그럼 아저씨 믿을게요. 우리가 엄마를 찾아가는 것을 엄마가 허락하셨어요? 우리가 가면 엄마의 일을 방해하지 않을까요?”하예정은 우빈에게 하예진이 요즘 바쁘다고 말했다.우빈은 하예진이 이렇게 바쁜 이유가 바로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을, 돈을 많이 벌어 자신을 잘살게 하고 싶다는 도리를 잘 알고 있었다.우빈은 자신의 현재 생활이 매우 좋다고 생각했다.녀석은 자신의 엄마가 고생하지 않았으면 했다.그런데 하예진이 직장을 다니면서 돈 벌어야 한다고 했기에 철이 든 우빈은 늘 하예진을 지지했다.“괜찮아. 주말에 오면 네 엄마도 쉴 거야. 마침 우리가 네 엄마를 모시고 산책하면서 기분 전환도 해줄 수 있잖아. 그러면 다음 주에 출근할 때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고.”우빈은 여전히 걱정하며 말했다.“아저씨, 어머니께서 정말 동의하시는지 잘 물어봐 주세요.”노동명은 웃으며 휴대전화를 하예진에게 돌려주었다. 그렇게 하예진 모자가 전화로 의논하다가 결국 하예진은 아들 우빈의 고집에 못 이겨 그가 금요일에 찾아오는 것에 동의했다.사실 하예진도 우빈이가 보고 싶었다.그녀는 노동명이 곁에 있으면 아무 일도 없을 거로 생각했다.하예진의 허락을 받은 우빈은 무척 즐거워하며 얼마 안 가서 통화를 끝냈다.우빈은 핸드폰을 하예정에게 돌려주었다.하예정은 웃으며 물었다.“이제 괜찮아졌지? 서럽지 않지?”우빈은 기뻐하며 대답했다.“금요일에 엄마를 찾아갈 수 있어요. 이모, 오늘이 무슨 요일이에요?”“월요일이야.”우빈은 또 물었다.“월요일부터 금
노동명은 하예진이 가슴 아파할까 봐, 또 격려의 말들을 늘어놓을까 봐 자신이 폐인이라는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하예진은 호텔에 비치된 주전자를 씻고 주전자로 물을 끓였다. 그리고 컵을 씻어 녹차 한 봉지를 집어 들고 녹차 한 잔을 타서 가져다주었다.하예진은 찻잔을 침대 머리맡 카운터에 놓고 노동명에게 말했다.“지금은 물이 뜨거워서 좀 이따가 마셔요.”따르릉...하예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휴대전화를 꺼내 확인하더니 노동명에게 말했다.“예정이에요.”그녀는 하예정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하며 서둘러 받았다.“예정아, 뭔 일 있어?”“엄마.”전화기 건너편에서 앳된 어린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빈아, 우빈이가 드디어 엄마가 생각났나 보네. 엄마한테 전화할 줄 다 알고.”하예진은 웃으며 우빈을 조롱했다.우빈이 입을 삐죽 내밀며 억울하다는 듯 다시 엄마를 불렀다.아들의 억울한 어조를 알아챈 하예진이 물어보았다.“왜? 기분이 안 좋아? 친구랑 싸웠어?”“아니요. 동명 아저씨는 나쁜 사람이에요. 정말 나빠요. 저 몰래 아무 말도 없이 엄마 보러 갔어요. 제가 제 친구를 아저씨한테 소개해 주려고 이모한테 부탁해 아저씨 찾으러 왔는데 글쎄 노 할머니께서 아저씨가 엄마 찾으러 가셨다고 한 거 있죠?”우빈 녀석은 너무 서러서 계속해서 말했다.“아저씨는 말도 없이... 제가 엄마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저하고 말 좀 하시지. 그럼 저도 아저씨 따라서 엄마한테 갔을 텐데. 아저씨는 약속을 어기는 나쁜 사람이에요.”하예진이 출장을 간 후 노동명은 분명히 우빈에게 나중에 하예진이 보고 싶으면 노동명의 개인 비행기를 타고 강성으로 하예진을 보러 가자고 약속했었다.우빈은 그 당시 노동명이 그의 친아버지보다도 더 잘해준다고 생각했다.주형인은 매번 우빈을 볼 때마다 잘 대해주지만, 우빈 앞에서 노동명의 험담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우빈은 주형인이 그리 좋은 아버지가 아니라고 여겼다.노동명 아저씨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주형인과 주경진 부부 그리고
노동명은 하예진의 손을 잡고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하예진의 활기차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면 볼수록 좋아했다.“예진아.”노동명은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가까이 가면서 떠보았다.“나... 뽀뽀해도 돼?”하예진은 얼굴이 갑자기 노을처럼 붉어지더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처녀가 아닌 결혼도, 이혼도 해본 아이가 있는 여자였지만, 이런 물음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결국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다.그 모습을 본 노동명의 마음은 더욱 설레었다.노동명은 하예진을 사랑한 지 오래되었지만, 그녀의 손밖에 잡아보지 못했다.더 깊은 접촉을 해보지 못했다.“예진아, 뽀뽀 해도 돼?”노동명은 그녀의 얼굴을 살며시 잡으면서 자신의 얼굴과 마주하도록 했고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았다.노동명이 다가가니 그의 숨결이 하예진의 얼굴에 닿았다.하예진의 대답을 들을 수 없게 되자 그도 그녀의 붉은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대었고 그녀가 눈을 감은 것을 본 뒤에야 비로소 그녀를 껴안으며 키스했다.그들은 부드러운 입맞춤으로부터 거친 키스까지 이르렀다.하예진은 문득 눈을 뜨면서 노동명을 밀치고 일어나 말했다.“물이 끓었어요. 따뜻한 물을 드시겠어요? 아니면 차 한잔하실래요?”하예진은 애써 숨을 골랐다.노동명은 그녀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녹차 한 잔 줘. 비행기에서 잠시 쉬었으니 더는 쉴 필요 없어. 녹차 한 잔 마시면서 기운 내야겠어. 네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얼른 해. 내가 따라갈게.”“제가 할 일은 오전에 다 처리했어요. 이따가 이씨 가문에 가서 저 대신 돌아가신 경호원의 유가족을 보러 가려고 해요. 어쨌든 저 대신 차를 몰지 않았더라면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 테니까요.”설령 이은화의 계략이 맞는다고 해도 증거가 없는 한 당분간은 사고라고 할 수밖에 없다.이씨 가문 경호원의 죽음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가 하예진을 도와 차를 몰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였다.하예진이 가족을 찾아뵙고 고인을 방문해야
노동명은 고개를 돌려 하예진을 쳐다보면서 말했다.“날 뭐로 보는 거야? 나도 예전에 공원 벤치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거든. 비록 사춘기 때 저지른 일이지만...”하예진은 노동명이 10대 때 반항하여 마음이 맞는 사람들을 따라 사회에 뛰쳐 든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다가 그의 할머니가 중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되자 잘못을 뉘우치고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와 다시 열심히 창업하여 노씨 그룹을 설립했다.이미 십여 년이 지난 일이다.그는 할머니가 그리울까 봐 하예진 앞에서 할머니에 관한 얘기를 언급하지 않으려 했다.듣자니 노동명은 형제중 막내라 할머니는 그를 가장 아꼈다.우빈은 노동명의 얼굴에 난 칼자국을 처음에 무척 무서워했다. 그는 당시 수술을 받을까 고민했지만 결국 받지 않았다.칼자국을 남겨놓은 이유는 그의 반항 때문에 할머니가 중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사실을 명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노동명은 할머니에게 미안했다.“난 안 가려. 이런 룸도 얼마나 좋아.”노동명은 자신의 평소 출장할 때 로얄 스위트룸에 묵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그는 싱글이고 재산도 많기에 마땅히 즐겨야 한다고 생각했다.아니면 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이제 쉬시려고요?”“나 소파에 앉으면 돼.”노동명은 창가에 있는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하예진이 그를 밀고 소파 앞으로 다가가서 멈추었다.그녀는 노동명을 부축하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혼자서도 일어설 수 있어. 이제 두 걸음은 걸을 수 있거든.”매일 재활을 하고 몇 걸음 걷다 보니 그의 다리는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그러나 더 멀리 가려고 하면 두 다리가 견딜 수 없이 지끈지끈 아파 났고 고통스러워 똑바로 서지 못하고 땅으로 넘어지게 된다.노동명의 두 다리는 넘어지고 부딪혀 멍이 들었다.그는 주위 사람들이 가슴 아파할까 봐 상처를 가리려고 매일 긴 바지를 입고 있고 다녔다.노동명은 누구의 동정심도 필요하지 않았다!하예진은 결국 부축하는 것을 포기했다.노동명은 스스로 일어서서 한 발짝 앞
하예진이 관성을 떠나던 날, 노동명이 심술부린 탓으로 하예진을 공항까지 배웅조차 하지 않았다.심지어 하예진의 전화도 받지 않고 메시지에 답장도 하지 않아 그녀가 걱정을 안고 강성 비행기에 오르게 했다.강성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하예진은 여전히 노동명을 걱정했고 전태윤 부부에게 우빈을 데리고 노동명의 집에 가서 그를 위로해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그날 일을 생각하기만 해도 노동명은 얼굴이 붉어졌다.하예진은 그에게 차 한 잔을 따라주며 말했다.“저는 화도 안 났어요. 앞으로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제가 동명 씨를 싫어하고 저를 힘들게 할 것 같다면 저는 진작에 동명 씨를 멀리했을 거예요. 이렇게 가까이 지내지도 동명 씨를 믿지도 않을 거란 말이에요.”지난번 노동명이 하예진에게 고백했을 때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두 사람은 뜨겁게 사랑하지 않았지만, 물처럼 유유하게 감정을 교류했다. 그들은 일상적인 생활에서부터 서로를 지지하고 의지하면서 지내왔고 두 사람 마음도 점점 가까워졌다.지금 노동명은 하예진을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하지 않고 그녀도 노동명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하지 않지만 두 사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서로가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되였다.다른 사람은 이미 두 사람을 커플로 여기고 있다.요리가 나오자 하예진은 잘 먹지 않고 노동명에게 반찬을 집어주었다.미인 옆에서 자신을 잘 보살펴 주는 것을 본 노동명은 너무 행복했고 하마터면 배가 터질 뻔했다.노동명은 몇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왔기에 하예진은 그를 호텔에서 쉬게 한 다음 저녁에 그에게 호텔 근처를 구경시켜주려고 했다.강일구는 노동명 일행에게 룸 세 개를 예약해 주었고 노동명이 하예진의 룸과 가까운 곳에 있고 싶어 하자 강일구는 흔쾌히 노동명과 룸을 바꾸었다.어차피 노동명은 강성에서 하룻밤만 묵고 내일 오후 관성으로 돌아갈 계획이다.연말이 다가오면 노씨 그룹도 정신없이 바쁘기에 노동명은 회사 대표로서 어쩔 수 없이 회사에서 쌓인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하예진은 노씨
노동명이 대답했다.“내가 갑자기 강성에 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우빈은 아직 몰라. 우빈의 친구가 찾아오는 바람에 신나게 놀고 있거든. 내가 누구인지조차 잊을 정도인데 내가 어디로 갔는지 걱정할 겨를도 없어.”하예진이 웃었다.“동명 씨는커녕 엄마인 저조차도 생각하지 않나 봐요.”“우빈이 녀석이 예정 씨와 사이가 좋으면 예진이 네가 자유로워서 좋잖아.”“그건 그래요. 우빈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예정이가 늘 저를 도와 녀석을 봐줬거든요. 우빈이 아빠가 출근해야 해서 제가 산후조리 때부터 예정이가 늘 우리 모자를 돌봐줬죠. 제가 병원에서 아기를 낳을 때야 우빈 아빠가 휴가를 냈거든요. 전 시부모님은 병원에서 우빈을 한 눈만 보고는 행방이 묘연해지고요. 이혼 전에는 심지어 저보고 둘째를 낳으라고 했는데 다행히도 제가 이혼했네요. 아니면 제가 평생 그 집안에 얽매여서 살아야 할지도 몰라요.”하예진은 노동명을 밀고 엘리베이터에 들어갔다.3층으로 올라간 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갔고 하예진은 노동명을 부축해 앉힌 뒤 물어보았다.“뭐 드시고 싶어요?”“네가 주문해. 난 편식하지 않아. 아무거나 먹으면 돼.”하예진은 경호원들을 불러 앉힌 뒤 휴대전화를 꺼내 벽에 붙어 있는 주문 코드를 스캔하여 노동명이 좋아하는 요리 몇 가지를 시켰고 고개를 돌려 경호원들에게 물어보았다.“술 드실래요? 동명 씨는 제가 차로 모시면 되니까 다들 술 마시고 싶으면 한잔해도 돼요. 운전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의 경호원이 대답했다.“우리는 술 안 마셔요. 술을 주문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도 술 마시지 않았다.“그럼 술 주문하지 말아요.”하예진과 강일구 일행은 식사했지만 지금 또 노동명과 함께 식사하려고 한다.곧 하예진은 주문을 마쳤다.하예진 옆에 앉은 노동명은 그녀에게 가까이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예진아, 사실 난 형인 씨 무식함이 너무 감격스러워.”하예진은 바로 노동명을 노려봤고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가 안목이 뛰어났다면 내가 널 가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