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윤은 주방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전부 다 들었다. 할머니가 하예정을 편애하는 건 이미 진작 익숙해졌다. 할머니는 손녀가 생기길 무척이나 바라셨지만 결국 손자가 아홉이나 생겼다.할머니는 하예정을 보자마자 첫눈에 마음에 들어 하예정을 손녀로 삼고 싶어 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손녀를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바로 생각을 바꾸었다. 할머니는 하예정을 자신의 손자며느리로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그러면 평생 전씨 가문의 사람이 될 테니까.전태윤은 설거지를 마친 후 싱크대 주변도 빛이 날 정도로 깨끗하게 닦았다. 그다음 세정제로 행주를 말끔하게 빨고는 손까지 씻고 주방에서 나왔다.하예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양복 외투와 넥타이를 가져다주었다. 비록 아직 넥타이를 맬 줄은 모르지만 그녀의 적극적인 모습에 전태윤도 흐뭇했다.설거지하면 미인의 사랑을 누릴 수 있으니 꽤 괜찮은 것 같다.할머니도 하예정의 모습이 만족스러웠다. 전태윤에게 적당한 보상을 주면 전태윤도 앞으로 그녀 말만 들을 것이다.부부라면 서로 아껴주고 희생해야만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헌신하고 다른 한쪽은 누리기만 한다면 헌신한 쪽이 언젠가는 마음이 식어가게 돼 있다.30분 후, 가게에 도착해보니 가게 문이 열려있었다. 심효진이 먼저 와서 가게 문을 열었는데 하씨 가문 사람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하 영감은 하지명에게 가게로 들어가서 의자 하나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렇게 하 영감만 의자에 앉아있었고 다른 이들은 문 앞에 서 있거나 쪼그리고 앉아서 기다렸다. 그들의 얼굴에 저마다 짜증이 잔뜩 섞여 있었다.하지문은 하예정을 기다리며 담배를 몇 대나 피웠는지 모른다.전씨 가문 도련님에게 익명의 편지를 보낸 후 그는 자신이 전씨 그룹에 입사할 줄 알고 자신만만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전씨 그룹은커녕 다른 작은 회사도 그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업자가 된 하지문 말고도 가족들이 하던 일도 전부 영향을 받
“하예정.”하지명과 하지문이 할아버지와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왔고 나머지 친척들은 밖에서 대기했다.“네 남편이야?”하 영감은 전태윤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왠지 하예정의 남편이 하예진의 남편보다 훨씬 더 나아 보였다. 그와 동시에 두 손녀를 시집보내면서 예물을 일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남 좋은 노릇만 했다는 생각에 불만도 생겼다. 만약 셋째 아들이 저승에서 알았더라면 아마 화가 나서 살아 돌아올지도 모른다.하예정의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직 생전이라 예물은 당연히 두 사람의 몫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하예진 자매는 일전 한 푼도 그들에게 주지 않았다.“할아버지 손자사위예요. 어때요? 잘생겼죠?”하예정은 전태윤 옆으로 다가가 한 손을 전태윤의 어깨에 걸치면서 일부러 할아버지에게 물었다.“우리 부부 참 잘 어울리죠?”하 영감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한참 후에 전씨 할머니에게 물었다.“그쪽은 누구시죠?”“사돈.”‘남자 쪽 가족이구나.’하 영감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두어 모금 피운 뒤 말을 이었다.“예정이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우리한테 얘기하지 않아서 사돈의 존재도 모르고 있었어요. 오늘 처음 뵙네요.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면서요? 그럼 사돈댁에서 우리 예정이한테 예물을 얼마 정도 줄 계획인가요? 집이랑 자동차는 이미 다 준비했겠죠? 예정이 부모가 일찍 돌아가긴 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직 살아있어요. 예전에 서로 얼굴을 붉힌 일이 있어도 내가 쟤 할아비란 사실은 변함이 없어요. 그러니까 예정이한테 주는 예물은 우리한테 주는 게 당연해요.”대부분의 재벌 집 할머니라면 하 영감처럼 만나자마자 돈 얘기부터 꺼내면 당장 얼굴을 붉히고 자리를 박차고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사돈댁, 예물은 당연히 드려야지요. 하지만 예물은 예정이한테 줄 겁니다. 예정이가 예물을 어떻게 쓰는지는 예정이가 알아서 할 일이니 우린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좋겠어요.”그 말인즉슨 예물을
하예정은 바로 문을 가리키며 차갑게 쏘아붙였다.“할아버지, 저희 가게 문 바로 저기 있어요. 일어나서 당장 나가주세요! 우리 언니 일은 당신들이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그리고 주형인네 가족들이 여러 번 찾아왔을 때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당사자들이 다 알 거예요. 진심으로 사과하기는커녕 종일 나더러 당신들과 화해하라고요? 잘못한 게 대체 누구인데요?”하 영감은 그녀가 전혀 말을 들으려 하지 않자 씩씩거리며 전태윤에게 말했다.“이보게, 젊은이, 그쪽도 보다시피 예정이는 친정 식구들이 뒷받침해주는 걸 원치 않아. 그러니까 마음껏 괴롭혀. 우린 절대 그쪽을 찾아와서 따져 묻지 않을 테니까.”전태윤은 하 영감을 밖에 내던지고 싶었다.이런 할아버지는 그도 처음 겪었다.아무리 제 손녀가 싫어도 어떻게 이런 식으로 말을 내뱉을 수가 있을까?전태윤이 싸늘하게 말했다.“난 아내를 예뻐하고 사랑해주기 위해 결혼했지, 절대 괴롭히려고 집에 데려온 건 아니에요. 아내를 괴롭히는 남자는 인간도 아니죠! 본인들이 직접 알아서 나가실래요 아니면 내가 빗자루를 들고 문밖에 내쫓을까요?”하예정도 할아버지의 말에 울화가 치밀었다.이 인간들은 늘 그녀와 화해한다면서 정작 하는 짓과 내뱉는 말투는 일말의 뉘우침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직도 모든 게 그녀의 잘못이라고 여길 뿐이다. 다만 그녀의 뒤를 봐주는 버팀목이 있다고 여기면서 요즘 본인들이 당한 재수 없는 일들을 전부 그녀 배후의 지시자가 벌인 거라고 죄를 뒤집어씌우려 한다.하여 이렇게 번마다 뻔뻔스럽게 찾아오고 있다.하예정이 말했다시피 그들 사이의 모순은 인스타에서 시작했으니 인스타로 끝내야 한다. 그들이 인스타로 공개 사과를 하고 하예진 자매에게 뒤집어씌운 누명을 깨끗이 씻어준다면 그녀도 달갑게 화해할 것이다.이렇게 쉬운 요구도 못 들어주는데 하예정이 대체 왜 한 걸음 물러서야 하는 걸까?하지문이 재빨리 말했다.“예정아, 할아버지가 연세가 있어 제정신이 아니다 보니 듣기 거북한 말을 내뱉은 거야. 절대 마음에 담아
“저 사람들이 왜 주형인을 편들어주지?”심효진이 의아한 듯 물었다.“주씨 집안에서 저들에게 무슨 혜택을 주었나?”하예정이 쓴웃음을 지었다.“우리 언니랑 주형인이 이혼 합의서를 새로 썼는데 합의 이혼하면 주형인이 언니에게 2억 원 좌우 줘야 하거든. 그 집 어르신들이 돈 아까워서 우리 할아버지를 찾아가 사정한 것 같아.”어찌 됐든 좀 전에 온 한 무리 사람들은 명의상에서 하예진 자매의 친척이니까.“주형인 부모가 할아버지한테 돈을 얼마나 줬을까? 넙죽 받기만 할 뿐 절대 지시대로 할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평소에 우리 언니를 괴롭힐 땐 누구보다 교활했어.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니 정말 돈이 급했나 봐.”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그러지나 말 것이지!“태윤 씨, 괜찮아요. 그만 출근해요.”친척들이 떠난 후 하예정은 남편더러 얼른 출근하라고 다그쳤다.그녀를 따라왔지만 딱히 도와준 게 없었다. 아내가 워낙 전투력이 강하다 보니 일반적인 상황에선 그의 도움이 필요 없다.전태윤은 아내의 다그침 속에 답답한 마음을 끌어안고 자리를 떠났다.회사로 돌아간 그는 강일구에게 전화했다.강일구가 전화를 받자 전태윤은 목소리를 내리깔고 분부했다.“일구야, 오후에 애들 불러서 철거 도구를 챙기고 광명 아파트로 보내. 예진 씨 이사하는 거 도와주고 그 집 모조리 허물어버려.”강일구가 깍듯하게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넌, 가지 마. 와이프가 네 얼굴 알아.”강일구가 말했다.“대표님, 저는 대리기사라서... 다른 일당도 뛸 수 있어요. 집 허무는 건 제가 또 아주 잘합니다.”그렇게 시끌벅적한 일을 하지 말라고 하니 강일구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전태윤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와이프가 의심하지 않도록 거짓말을 둘러댈 수 있다면 같이 가.”강일구가 바로 대답했다.“걱정 마세요, 도련님. 저도 이젠 핑계를 두어 번 둘러댔더니 나름 경험이 생겼어요. 사모님이 의심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전태윤은 침묵하다가 음침하게 말했다.“핑계를 여러 번
하예정은 잠든 조카를 안으며 언니에게 물었다.“언니, 밥은 먹었어?”“아직이야. 우빈이 밥 먹이고 바로 왔어. 내 물건들도 거의 다 정리했어. 이혼 절차만 마무리되면 예정이 네가 차를 몰고 와서 짐 옮기는 거 도와줘야 할 것 같아. 오전에 집도 다 찾아놨어. 너희 집이랑 가깝고 교통도 엄청 편리해. 아직 위생 청결이 덜 된 상태라 내가 이혼 절차 밟고 천천히 정리하려고.”지금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이혼이다.또 다른 문제가 생기지 말게끔 얼른 마무리해야 한다.“언니 그럼 우리 가게에서 밥 먹고 좀 쉬다가 나랑 같이 은행 가서 주형인 기다리자. 내가 운전해서 데려다줄게. 주형인이 언니 계좌로 돈을 보내면 나 그때 다시 돌아올게.”하예진이 거절하려 하자 어르신이 말했다.“예진아, 그냥 예정이 말대로 해. 너 혼자 보내면 우리 모두 마음이 안 놓여. 그 집 인간들 파렴치하기 짝이 없어 또 무슨 수작을 부릴지 누가 알아?”어르신이 말을 이었다.“예정아, 네 언니가 재산분할을 마치거든 직접 운전해서 가정법원으로 가. 주형인 그 인간은 끝까지 경계심을 놓지 말아야 해. 어떤 사람들은 악랄하기 그지없어 이혼 지경에 다다르면 또 무슨 극단적인 일을 꾸밀지 몰라. 네가 몸 좀 쓰잖니. 함께 가면 너도 마음 놓이고 우리도 한시름 놓을 것 같아.”“알겠어요, 할머니.”하예정도 줄곧 언니와 함께하려 했지만 언니가 거절하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이때 마침 할머니가 입을 여시니 하예진은 어르신을 공경하며 더는 거부하지 않고 할머니의 뜻을 따랐다.하예정은 우선 조카를 접이식 의자에 앉혔다. 이 의자는 펼치면 침대로 간주되고 접으면 의자가 된다.심효진과 숙희 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다 만든 음식을 들고 나왔다.“실례합니다.”이때 불쑥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이제 막 식사를 하려던 사람들은 문 앞에 시선이 쏠렸는데 상대는 다름 아닌 관성 호텔 매니저였다.권 매니저는 포장된 음식 몇 개를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하예정에게 가볍게 미소 지었다.“예정 씨, 이렇
어르신은 하마터면 사레들릴 뻔했다.‘효진이 이 계집애가 지금 성씨 가문의 사납기로 소문난 소현이를 불러오려고 해?’성소현이 가면 전씨 할머니는 함께 따라가서 재미난 구경을 못 한다.게다가 전태윤이 보낸 사람이라면 그의 경호팀일 게 뻔한데 한때 그의 꽁무니만 쫓아다니던 성소현이 경호원들을 못 알아볼 리가 없다. 그녀는 하예정과 달리 전에 봤던 사람들은 바로 알아본다.그때가 되면 굉장히 수습하기 어려워질 것이다.다행히 하예정이 할머니를 안심시켜드렸다.“이런 난폭한 일엔 소현 씨 부를 필요 없어. 소현 씨는 부잣집 딸이라 이런 광경을 본 적 없을 거야. 괜히 사람 놀라게 하지 말자.”성소현이 들었으면 기가 차서 뒷목을 잡을 게 뻔하다.‘나 성소현이 못 겪어본 게 뭔데? 난 생각보다 엄청 용감하단 말이야!’다만 아쉽게도 사촌 여동생이 한사코 그녀를 이 구경거리에서 배제했다.“열댓 명이면 충분할 거야.”하예정은 절친의 사촌들까지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신속하게 움직여야 해. 너무 느리면 오늘 밤사이로 모든 걸 허물 수 없어. 예정아,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너 아직도 나랑 틀을 차려? 지금 바로 사촌 오빠한테 전화할게. 그 오빠가 공사 현장 일을 도맡아 하고 있어 밑에 있는 일꾼들이 꽤 프로패셔널할 거야.”하예정도 나름 일리 있어 보여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그녀들의 대화를 들은 하예진은 감개무량할 따름이었다.그녀는 남편을 잘못 만나 제때 이 관계를 마무리하고 쓰레기 같은 그 집안에서 나왔지만 주변에는 가족과 친구들이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었다.이 또한 행운스러운 일이었다.“효진아, 고마워.”하예진이 감사의 뜻을 표했다.심효진은 웃으며 말했다.“예진 언니, 언니의 일은 제 일이나 다름없어요. 저랑 예정이는 쓰레기 같은 그 집안 사람들을 오랫동안 참아왔어요.”전에는 하예진이 주형인과 계속 살아가려 했기에 하예정도 꾹 참았지만 이젠 이혼이 코앞이니 더이상 참을 필요가 없었다.“밥 먹자, 다들 일단 밥부터 먹어. 태윤이가 음식도 보
하예진은 동생이 왜 웃는지 바로 알아챘다.“잘 지내거나 말거나, 이혼하면 난 주형인과 남남이야.”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갔다.“그 집안 아마 바람 잘 날 없을걸.”“그럼 완전 퍼펙트지. 벌을 받아도 싸!”하예정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못됐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주형인이 재혼한 후 온 가족이 괴롭게 살길 바랐다.서현주가 분발해서 주씨 일가를 발칵 뒤집어놓고 주서인을 찍소리도 못하게 다스리길 바랐다.하예진이 전화를 안 받자 주서인은 문자를 보냈다. 하예진은 그들 온 가족의 카톡을 차단하고 주형인 것만 남겨두었다. 그와는 아직 이혼 상의가 남아있었으니까.이혼 절차만 마무리하면 주형인의 카톡도 전부 차단할 예정이었다.하예진은 주서인의 문자를 받더니 읽지도 않은 채 바로 삭제했다.그리고 주서인의 전화번호까지 차단했다. 그녀는 두 번 다시 형님한테서 전화나 문자를 받고 싶지 않았다.주서인은 이제 곧 하예진과 남남이 될 테니까.이때 하예정의 휴대폰도 울렸다. 그녀는 인간쓰레기 같은 주서인이 언니한테 까여 타깃을 본인으로 갈아탄 줄 알았는데 발신자는 정작 태윤 씨였다.하예정은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여보.”하예정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아침에 깨어났을 때도 여보라고 부른 것 같았는데 그땐 온 신경이 꽃다발에 꽂혀있어 별다른 반응을 못 했다.다만 지금은 맑은 정신으로 남편에게 여보 소리를 들으니 재빨리 언니부터 쳐다봤다. 언니가 아무 반응이 없자 그녀는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아마 다른 부부들도 여보, 자기라고 부르겠지?’“예정아?”사실 전태윤도 여보라는 호칭이 썩 적응되지 않았다. 다만 한번 부르고 나니 두 번째는 한결 자연스러워졌다.그는 아내가 이런 닭살스러운 호칭이 싫어서 아무 반응이 없는 줄 알고 곧장 원래대로 이름을 불렀다.“듣고 있어?”“운전 중이에요. 말해요, 듣고 있어요.”“사람들 열댓 명 불렀어. 광명 아파트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했으니 이따가 바로 가면 돼.”“알았어요. 효진이도 사촌 오빠한테 얘기
전태윤은 어릴 때부터 자립하며 커왔지만 청소부가 돼본 적은 없다.아내의 지시를 받은 전태윤은 화내지 않을뿐더러 흔쾌히 동의했다.“그래, 퇴근하고 바로 갈게. 그때 가서 처형네 집 주소 보내줘. 내 밥도 차려놓고.”“네.”“고마워요, 제부.”하예진이 제부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여동생네 부부가 늘 뒤에서 응원해주지 않았더라면 하예진도 가장 짧은 시간 내에 주형인과 합의 이혼을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언니, 우리 다 한 가족이야. 새삼스럽게 왜 그래?”하예진은 여전히 감격에 겨워 있었다.통화를 마친 후 그녀는 늘 그랬듯이 했던 말을 또 반복했다.“예정아, 태윤 씨는 참 좋은 남자야. 너 꼭 잘해야 한다.”“언니, 귀에 굳은살이 박이겠어. 제발 나 좀 놔줘.”하예정은 매번 똑같은 말을 들어야 했다.하예진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그녀도 습관처럼 말이 튀어나왔을 뿐이었다.십여 분 후 주형인이 은행 입구에 도착했다.그의 부모님들도 함께했고 주서인은 휴가를 내지 못한 탓인지 자리에 없었다.하예진을 보자 김은희는 새아가를 반기듯 눈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다가왔다. 하예진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김은희는 다정하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예진아, 이혼 안 하면 안 될까? 전에는 나랑 네 새언니가 잘못했어. 항상 너한테만 지적을 했잖니. 맹세할게, 앞으론 우리 집에서 네가 여왕이야. 형인이가 감히 또 너한테 상처 주면 내가 저 녀석 다리를 분지를 거야! 예진아, 너랑 형인이 안 지도 어언간 12년이야. 긴 시간 동안 서로 부부로 지내오면서 맞춰주고 보살펴줬잖아. 형인이가 너한테 어떻게 해줬는지 누구보다 네가 잘 알 거야. 꼭 심사숙고하고 결정해야 해. 저 녀석은 지금 단지 여우 같은 서현주에게 홀려서 그래. 내가 두 사람 그만 만나라고 훈계했으니 화 풀어. 또 어떻게 해야 마음이 풀리겠어? 나한테 얘기해. 이 어미가 대신 나서줄 테니까 어서 화 풀렴. 우빈이를 봐서라도 형인이 한 번만 용서해줘. 이혼하지 말자, 응?”하예진은 담담한 눈빛으로 이제 곧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