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누나 아이들을 등하교시켜주고 밥을 해줘. 애들이 여기서 먹지 않아도 밥은 해야 하잖아. 그냥 밥그릇 두 개 더 놓는다고 생각하면 돼. 아직 애들이라 얼마 먹지도 않아. 날 도와준다고 생각하면 안 돼? 부부 사이에 이런 작은 부탁 정도는 들어줄 수 있잖아, 그렇지?”주형인의 말투는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얘기할 때 하예진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가여운 척했다.“그리고 누나가 공짜로 부탁하는 것도 아니고 매달 당신한테 20만 원씩 주겠대. 지난번에 나도 생활비를 매달 30만 원 더 주겠다고 했잖아. 누나가 준 20만 원까지 합하면 50만 원이야. 얼마나 좋아.”주형인과 형님의 꿍꿍이에 하예진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작 20만 원으로 두 아이를 등하교시켜주고 하루 세끼 차려주는 것도 모자라 숙제까지 봐줘야 한다고?“주형인, 지금 20만 원이 많다고 생각하는 거야?”“먹는 거랑 쓰는 건 당신 돈이 안 들잖아. 그러니까 누나가 주는 20만 원은 거저 생긴 돈이나 마찬가지인데 비상금으로 모아놓아도 되잖아, 그게 적어? 적다고 생각하면 내가 20만 더 줄게.”하예진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지난번에도 내가 똑똑히 얘기했었지? 내 아이가 아니라서 난 책임질 수 없다고. 그리고 당신한테도 할 얘기가 있어. 나 일자리 찾았어. 내일부터 출근해야 해. 지금 우빈이도 내 동생이 봐주고 있어. 내 아들도 동생한테 맡겼는데 남의 집 애를 봐줄 시간이 어디 있어?”그녀의 말에 주형인의 낯빛이 굳어졌다.“당신이 무슨 출근을 해? 우빈이 이제 몇 살이나 됐다고 아직 엄마가 옆에 있어 줘야지. 내가 당신한테 먹을 걱정, 입을 걱정 하게 했어? 왜 갑자기 출근하겠다고 하는 건데?”“출근하든 말든 그건 내 자유야. 그리고 우빈이는 내 동생이 잘 돌봐줄 거야. 나한테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안 하게 했다고? 주형인, 나 지금 사는 게 정말 지긋지긋해! 내가 정말 돈 벌 줄 몰라서 지금까지 가만히 있은 줄 알아? 당신이랑 당신 가족들은 늘 내가 먹을 줄만 알고 돈
주형인이 갖은 말로 구슬려도 하예진을 설득할 수 없자 인내심을 잃은 그가 서늘하게 물었다.“어디 출근하는데? 그 회사 참 사람 보는 눈도 없지, 당신 같은 사람을 채용해?”하예진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노씨 그룹이야. 노 대표님께서 직접 날 채용하셨어.”주형인은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노씨 그룹은 그가 건드릴만한 회사가 아니었다. 만약 일반적인 작은 회사라면 직장의 인맥을 이용하여 하예진의 일을 방해하면서 다시 일자리를 잃게 하여 집에서 얌전히 아이만 돌보게 할 수 있었다.그런데 그녀에게 이런 재간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직장을 떠난 지 3년여 동안 살도 많이 쪘고 예전의 활기찬 모습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그녀가 노씨 그룹 같은 대기업에 출근하다니, 그것도 노 대표가 직접 채용했다는 게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노 대표님 사람 보는 눈이 어떻게 된 게 틀림없어.’주형인은 너무도 질투 나서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아직 그도 노씨 그룹에 들어가지 못했으니 말이다.“얘기 다 했어? 다 했으면 나가. 나 쉬어야 해.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출근해야 한단 말이야.”노동명이 그녀에게 매일 아침 회사 건물 앞의 정원을 다섯 바퀴 정도 뛴 후에 출근하라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조 비서에게 그녀가 다섯 바퀴 뛰는지 감시하게 하겠다고 했다. 만약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맑은 정신에 출근할 수 없고 첫날부터 실수가 잦으면 겨우 찾은 일자리를 잃을까 두려웠다.주형인은 별다른 말 없이 그냥 가버렸다. 진주 목걸이 하나를 괜히 낭비했다.주형인이 나가면서 방문을 쾅 하고 세게 닫은 바람에 거실에서 자고 있던 어머니가 깨어났다.외투를 걸치고 나온 김은희는 아들이 성을 내며 안방에서 나오는 걸 보고 다급히 아들에게 다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형인아, 왜 그래? 예진이랑 또 싸웠어? 예진이가 네 누나 아이들 등하교 안 해주겠대?”어머니의 앞이라 그런지 주형인의 표정이 조금은 온화해졌다.“어머니, 예진이가 오늘 일자리 찾아서 내일부터
김은희가 한참 고민하더니 말했다.“내일 내가 예진이한테 출근하지 말라고 얘기해볼게. 그리고 너도 앞으로 생활비 많이 주고 더치페이하지 마. 원래는 더치페이하면 좋을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까 아무런 쓸모가 없어. 봐봐, 네가 퇴근하고 와서도 전부 다 직접 하잖아. 나랑 네 누나가 예진이한테 밥을 차려달라고 하는 것도 돈을 줘야 하니... 딱히 돈을 아끼는 것도 모르겠으니까 그냥 더치페이 하지 마. 그러면 너도 덜 힘들잖아. 예진이한테 매달 40만 원씩 준다고 해도 괜찮아.”주형인이 잠깐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어머니, 더치페이하지 않는다고 해도 저랑 예진이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이젠 예진이한테... 정이 뚝 떨어질 지경이에요. 우빈이랑 누나 일만 아니었으면 예진이한테 굽신거리지도 않았어요.”그의 말에 김은희가 그의 뺨을 내리치더니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남자들은 다 이래. 결혼만 하면 바깥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니까! 현주인지 뭔지 그 여자가 정말 널 사랑하는 것 같아? 다 네 신분을 보고 그러는 거라고. 네가 한 달에 겨우 이백이나 버는 일반 직원이었다면 그 여자가 널 쳐다보기나 했겠어? 그래, 네가 잘생기긴 했어. 나도 네 얼굴을 보면 기분이 좋아. 그런데 잘생기면 밥이 나오냐? 지금 여자들 얼마나 현실적인데, 네가 돈이 없고 지위도 없었더라면 아무리 잘생겼어도 쳐다도 안 봐. 정말로 예진이랑 헤어지면 앞으로 꼭 후회할 날이 있을 거니까 명심해.”서현주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 주형인은 어머니의 말을 아예 귓등으로 들었다.“어머니, 늦었어요.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예진이한테 조카들 등하교해달라고 제가 잘 설득해볼게요.”만약 하예진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집을 누나의 명의로 변경하지 않아도 된다. 설마 집을 그의 누나에게 주지 않으려고 절대 도와주지 않겠다고 하는 건가?집에 아이들의 등하교를 해줄 사람이 없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주형인은 방으로 돌아가 하예진에게 캐묻고 싶었지만 또 말다툼할까 봐 결국 포기했다
하예정이 배시시 웃으며 심효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심효진이 웃음을 터뜨렸다.“예정아, 너희 부부 드디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구나. 태윤 씨가 나한테 아침을 다 사주겠다고 하니 시름이 놓여. 난 또 태윤 씨가 나를 너한테 남자나 소개해주는 중매인으로 오해한 줄 알았어.”김진우는 그녀의 사촌 남동생이다. 하지만 그녀는 절친과 김진우가 커플이 되는 걸 바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김씨 가문은 하예정과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고모가 평소에는 하예정에게 다정하게 잘해주지만 자기 아들 김진우가 하예정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바로 안면을 바꿀 것이다. 고모 같은 시어머니가 있다면 하예정의 삶도 힘들어지기에 심효진은 사촌 남동생을 도와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그녀는 남매가 단둘이 있을 때 기회를 봐서 김진우에게 마음을 정리하고 가게도 자주 오지 말라고 얘기할 생각이었다. 혹시라도 전태윤이 오해하면 큰일이니 말이다.남자든 여자든 결혼했으면 인간관계를 처리할 때 배우자의 기분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설령 배우자에게 미안한 짓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다른 남자나 여자와 함께 있는 걸 배우자가 본다면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지금 바로 갈게.”전태윤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심효진은 가게 문마저 닫았다.“아 참, 어디 가서 먹어? 주소 보내줘, 난 스쿠터 타고 갈게.”하예정이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고 전태윤에게 물었다.“태윤 씨, 우리 어디 가서 먹어요?”“관성 호텔 1층 뷔페에서 먹자. 거기 아침 메뉴도 엄청 다양해. 어디에서 왔든 고향의 맛을 느낄 수가 있어.”하예정이 심효진에게 전했다.“관성 호텔 1층 뷔페 레스토랑이야.”“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절친과의 통화를 마치고 하예정은 바로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가 깬 걸 확인하고는 전태윤에게 말했다.“태윤 씨, 우리 언니 데리러 가요.”전태윤이 알겠다고 하자 하예정은 휴대전화를 바지 주머니에 넣고 거실로 가서 차 키
이따가 한 사람은 서점으로, 한 사람은 회사로 가야 해서 서로 다른 길이라 각자 차를 운전하기로 했다.부부는 먼저 하예진을 데리러 광명 아파트로 향했다. 아파트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하예진이 아들과 함께 나왔다.“언니.”하예정이 차를 길목에 세우고 언니에게 다가갔다.“이모.”주우빈이 두 손을 뻗으며 하예정에게 안겼다. 하예정은 허리를 굽혀 주우빈을 번쩍 안아 들어 볼에 뽀뽀했다. 그러자 주우빈이 행복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그 모습에 전태윤은 자신도 두 살짜리 애로 변했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면 하예정이 뽀뽀해줄 테니까.“우빈이 오늘 왜 이리 일찍 깼어?”“내가 깨웠어. 분유를 마시고서야 따라 나오더라고.”하예진이 전태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제부.”“처형, 타세요.”전태윤은 유모차를 하예정의 차에 실었다.“언니, 버스 타고 출근해?”하예정이 차에 시동을 걸며 언니에게 물었다.“왜 스쿠터 안 타? 스쿠터 태윤 씨 차에 실어도 되는데.”전태윤의 차가 커서 스쿠터 하나쯤 싣는 건 아무 문제 없었다.“시간이 별로 없어서 안 탔어. 내일부터 스쿠터 타고 출근하려고.”하예진은 오늘 특별히 예쁜 옷을 입고 나왔다. 평소 집에 있을 땐 주로 편한 옷만 입던 그녀였다.오랜만의 출근이라 그런지 하예진은 마음이 떨렸다.“그럼 이따가 언니를 회사까지 데려다준 다음에 가게에 가야겠다.”“그래도 되고.”하예진은 동생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하예정은 그녀에게 주씨 집안 모녀가 온 이유에 관해 물었다.“무슨 일이겠어. 지난번에 너한테 얘기했던 그 일이지. 나더러 주서인 애들을 등하교시키고 밥도 해주고 숙제도 봐달라는 걸 거절했어! 누가 낳았으면 누가 책임져야지, 내가 그 집 자식을 돌봐줄 시간이 어디 있다고. 게다가 그 집 애들도 엄마를 닮아서 내 말 잘 듣지도 않아.”그녀와 주형인의 사이가 좋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그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주우빈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다.“언니 시어머니 시아버지한테 등하교
200만 원이 넘는 양복을 사면서 하예정은 특별히 그 브랜드를 기억했기에 절대 잘못 볼 리가 없었다.하예정은 혼자 몰래 웃음을 터뜨렸다. 전태윤이 새 옷을 입고 싶어서 그런 게 틀림없었다.그러니 할머니가 전태윤이 겉모습은 까칠하지만 속은 여리다고 말씀하셨지. 그녀가 사준 옷을 그는 버리지 않았다. 역시 친할머니가 손자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관성 호텔에 도착했을 때 심효진은 이미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호텔 매니저가 전태윤을 알아보고 미소 띤 얼굴로 ‘도련님’ 이라고 부르려던 그때 전태윤이 그를 서늘하게 째려보았다. 호텔 매니저는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내가 뭘 잘못했나?’호텔 매니저는 그를 부르지도 못하고 다가가지도 못한 채 제자리에 서서 전태윤 일행이 멀어지는 걸 빤히 보기만 했다. 잠시 후,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려서야 정신을 차렸다.“둘째 도련님?”전이진을 보자마자 호텔 매니저는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그를 붙잡고 나지막이 말했다.“둘째 도련님, 저 방금 큰 도련님이랑 엄청 닮은 분을 봤는데 잘못 봤을까 봐 부르진 못했어요. 진짜 너무너무 닮았어요! 딱 하나 다른 건 옆에 경호원이 없더라고요.”‘그래, 사람 잘못 본 게 틀림없어. 큰 도련님은 외출할 때 항상 경호원이 옆에 있었어. 아까 그 사람은 큰 도련님이랑 엄청 비슷하고 째려보는 눈빛도 똑같았지만 큰 도련님은 아니야.’전이진이 다급히 물었다.“큰 도련님이라고 부르진 않았죠?”“부르고 싶었는데 절 째려보는 바람에 부르지 못했어요. 부르지 않길 천만다행이죠, 하마터면 민망할 뻔했어요.”대표의 얼굴도 모르는 직원이라면 해고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다행이네요. 앞으로 큰 도련님을 봤을 때 옆에 경호원이 없으면 모른 척하면 돼요.”호텔 매니저는 더욱 어리둥절했다.“둘째 도련님 말씀은 아까 그 남자가 큰 도련님이란 말이에요? 큰 도련님이 맞는데 왜 모른 척해야 한다는 거죠?”그러자 전이진이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그냥
심효진이 떠난 후, 전태윤은 경호원에게 전화를 걸어 데리러 오라고 했다.사실 경호원들은 모습만 드러내지 않았을 뿐 줄곧 그의 뒤에 숨어있었다. 그의 전화를 받고 나서 그들은 재빨리 그를 데리러 호텔로 왔다.“먼저 쥬얼리 가게로 가.”전태윤이 차에 올라타자마자 운전기사에게 분부했다. 그러자 운전기사가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알겠습니다.”관성은 번화한 대도시라 쥬얼리 가게가 많았다. 마침 호텔에서 회사로 가는 길에 쥬얼리 가게가 하나 있었다. 쥬얼리 가게 문 앞에 도착하자 운전기사가 차를 세웠다.“따라올 필요 없어.”전태윤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분부한 후 홀로 차에서 내려 쥬얼리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빠르게 커플링 금반지를 고른 후 값을 지불했다. 점원이 커플링이 담긴 빨간색 반지 케이스를 쇼핑백에 담아 가져오자 전태윤이 쇼핑백을 들고 바로 나갔다.점원의 시선이 그에게서 떠나질 않았다. 그가 차에 올라타서야 점원이 시선을 거두고 속으로 감탄했다.‘현실 속에 진짜로 저런 훈남이 있다니. 점잖고 잘생긴 데다가 카리스마까지 있어. 정말 너무 멋있단 말이야! 커플링을 산 걸 보면 여자친구한테 주는 거겠지?’전태윤은 차에 올라탄 후 운전기사에게 가자고 했다. 강일구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너 주려고 산 거 아니야.”전태윤의 싸늘한 말투에 강일구가 황급히 말했다.“큰 도련님, 전 그저 궁금해서 본 거예요. 다른 뜻은 없었어요.”그에게 주는 선물이라도 해도 감히 받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안에 든 건 반지니까!전태윤이 반지 케이스를 하나 꺼내더니 반지를 왼쪽 약지에 꼈다.강일구는 전태윤이 유부남이라는 걸 대외적으로 알리는 뜻이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큰 사모님한테 고백하려는 건가?’“큰 도련님, 앞으로 큰 사모님을 보면 큰 사모님이라고 불러도 되나요?”전태윤이 그를 힐끗 보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예전처럼 불러.”강일구가 입을 꾹 다물었다.‘내 착각이었구나. 큰 도련님은 큰 사모님한테 고백하려는 게 아니었어.
그가 차에서 내리자 성소현은 무척이나 기뻤다. 그동안의 고생이 헛되지 않은 듯싶었다. 어쨌거나 그녀를 완전히 무시하던 전태윤이 차에서 내려 그녀를 만났으니 말이다.“태윤 씨, 제가 아침 준비해왔어요.”성소현은 재빨리 정성껏 준비한 아침을 전태윤에게 건넸다. 그와 동시에 꽃다발도 함께 건네면서 활짝 웃었다.“이 꽃은 제가 우리 집 정원에서 직접 따서 가지를 손질한 다음 한데 묶은 거예요. 태윤 씨한테 선물할게요.”전태윤은 아무런 표정 없이 성소현을 쳐다보았다.‘남자에게 꽃을 선물한다고? 하예정은 대체 소현 씨에게 어떻게 대시하라고 가르친 거야? 날 여자로 여긴 건가?’전태윤은 일단 오른손으로 꽃다발을 받은 후 왼손으로 도시락통을 받았다. 그 순간 성소현은 날뛰듯이 기뻤다.‘태윤 씨가 날 받아주려나?’그런데 그녀는 곧바로 전태윤의 왼쪽 약지에 낀 금반지를 발견했다. 꽤 큰 금반지라 흐린 날씨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게 무시하려 해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태윤 씨!”성소현이 조심스럽게 그를 떠보았다.“그 반지는 뭐예요? 왜 약지에 끼고 있어요?”그녀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통 결혼반지를 약지에 끼는데.”전태윤은 반지를 힐끗 내려다보고는 그냥 돌아섰다. 경비실 문 앞에 다다른 그가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경비실 쓰레기통이 어디 있어요?”경비원이 쓰레기통을 가져오자 그는 꽃다발과 도시락통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러고는 곧장 다시 차에 올라탔다. 왜 반지를 약지에 꼈냐는 성소현의 질문에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성소현이 결혼반지는 약지에 낀다고 대놓고 얘기했으니 바보가 아닌 이상 그의 뜻을 모를 리가 없었다.“가자!”전태윤의 서늘한 목소리에 운전기사는 재빨리 차에 시동을 걸고 성소현을 지나 회사로 들어갔다.성소현은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고 안색도 점점 창백해졌다. 전태윤이 그녀를 받아준 게 아니라 그녀가 보는 앞에서 꽃다발과 직접 만든 아침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엔 결혼반지가 끼어있었다.전태윤은 그녀가 수
전현민도 벙글벙글 웃으면서 말했다.“그래, 이건 세상에 둘도 없는 경사야. 우리는 기뻐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다. 이진아, 이미 이르지 않으니 어서 운초랑 들어가 절차부터 밟아. 직원들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간다.”부모님의 재촉을 받은 전이진은 여운초의 손을 잡고 어머니 손으로부터 가족관계등록부와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아서 구청 안으로 걸어갔다.명해은 부부는 돌아가지 않고 밖에 서서 두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전현민은 아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이러고 있으니 32년 전에 우리 둘이 이곳에 와서 결혼 증명서를 받던 날이 생각나네. 마치 어제 발생한 일과 같은데, 벌써 우리 큰아들이 이곳에 오다니... 세월이 참 빠르긴 빨라. 우리도 늙을 때가 되긴 됐나 보네.”그는 아내의 손을 잡으면서 말을 이었다.“난 당신과 백년해로하겠다고 약속했었지.”명해은도 감격해서 말했다.“그러게요,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이 딱 맞아요. 난 아직도 자신이 18살인가 하는데 우리 큰아들이 벌써 서른이네요. 우린 정말 늙었나 봐요.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가 없네요.”“당신은 조금도 안 늙었어. 내 눈에는 당신이 관음보살과 같이 해마다 18살이야.”명해은은 몸 관리를 잘해서 전이진과 함께 나가면 모르는 사람들이 두 사람을 남매로 착각할 정도였다.전현민도 몸 관리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젊은 시절에 전씨 가문의 사업에 몰두했기에 심신이 많이 상해서 귀밑머리가 희끗희끗 해졌다.은퇴한 후,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몇 번 염색은 했었지만, 그래도 아내와 같이 서면 아내보다 10살은 더 많아 보였다. 사실, 두 내외는 불과 한 살 차였다. 명해은은 남편의 칭찬에 웃음보를 터뜨렸다.“나도 해마다 18살이 되고 싶지만 그렇게 안 되네요. 내가 아무리 몸 관리를 잘한다 해도 늙기 마련인걸요.”“내가 당신과 함께 늙어 갈 테니 두려워하지 마. 내가 당신보다 훨씬 늙어 보여.”명해은은 웃으면서 말했다.“전 두려울 것 없어요. 당신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하늘이 무너
여운초도 더는 사양하지 않았다.그녀는 다만 전이진을 대신하여 은행카드만 보관할 뿐일 것이었다. 그가 돈 쓰는 것을 제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녀도 그의 돈을 쓸 일이 없을 테였다.전이진은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고 나서 다시 그녀를 보면서 벙글벙글 웃었다.보면 볼수록 사랑스럽기만 했다.“왜 계속 날 보면서 웃어요?”“좋으니까. 운초 씨, 나 지금 너무 좋아. 그냥 웃고 싶은 걸 어떻게 참아?”이렇게 대답하면서도 그는 또 웃었다.그러는 전이진을 지켜보는 여운초도 참지 못해 웃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둘이서 한참 동안 알콩달콩한 후 전이진이 시계를 보니 어머니가 도착할 시간이 다 되었다. 그는 약혼녀를 보면서 말했다.“운초 씨, 엄마가 곧 도착할 것 같으니 우리 지금 출발해. 우리가 구청에 도착하면 아마 엄마도 도착하실 거야.”그는 꽃집에 가서 장미꽃 한 다발을 사야 했다.여운초가 불시에 결혼 신고하자는 바람에 그가 아직 준비는 못 했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서둘러야 했다.꽃다발, 다이아몬드 반지 둘 중 하나도 빠뜨리지 않을 것이었다.그녀는 자신이 한평생 소중히 여길 여자임으로 절대로 서운하게 할 수 없었다.“그래요.”그가 일어나면서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자, 여운초도 편안하게 자신의 손을 그의 커다란 손바닥에 올려놓은 채 그에게 이끌려 일어섰다.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자고로‘그대의 손만 잡고 이생의 끝까지 살아간다.’라고 했다.그녀는 전이진과 백년해로하고 평생 금실이 좋기를 원했다. 시부모님처럼 애들이 부러울 정도로 몇십 년 동안의 결혼생활을 첫 사람처럼 달콤하게 지내길 원했다.여운초는 저의 집에 있는 차를 안 타고 전이진이 운전하는 차를 타기로 했다.그녀에게는 운전면허증이 없었다. 그녀가 16살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기에 운전면허를 딸수 없었던 것이었다.집에 있는 운전기사는 전이진이 그녀에게 보낸 경호원인데 그녀를 보호할 수 있을 뿐만아니라 운전도 해줄 수 있었다.20분 뒤.구청 입구명해
“운초씨, 잠깐만 기다려. 내가 엄마한테 당장 전화할게.”전이진은 약혼녀의 볼에 입을 맞춘 후, 바로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명해은은 전화벨이 한참 울린 뒤에야 전화를 받았다.“엄마, 오늘 시간 돼요?”“이제 방금 일어났어. 오늘은 별일 없어서 시간이 남아돌아. 왜? 아들, 엄마 도움이 필요해?”명해은이 잠기가 채 가셔지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아들이 다 크니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점점 적어졌다.애들한테 더는 필요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명해은은 너무 일찍 맛봤다.“저와 운초 씨가 점심 전에 혼인신고를 마치려 하는데 제가 가족관계등록부를 안 가져왔어요. 엄마 혹은 아버지가 지금 저한테 가져다줄 수 있어요? 혹은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보내줘도 되고요. 제가 돌아가서 가져오면 시간이 지체되어 아마도 오후나 돼야 절차를 밟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오후까지 못 기다리겠어요.”가족관계등록부만 손에 가지고 있다면, 전이진은 지금이라도 여운초를 데리고 혼인 신고하러 갔을 테였다.진정으로 여운초가 좋아진 그 시각부터 그는 그녀와 결혼하기를 원했다.하지만 그때의 여운초는 앞을 보지 못했기에 훌륭한 전이진을 앞두고 자비감에 모대기었다. 전이진의 사랑마저 그녀는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받아들인 것이었다.그녀는 전이진이 자신의 눈을 고쳐주기 위해 정 선생을 찾으러 여러 번 예진 리조트를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남은 인생을 그와 함께하기로 하고 약혼을 한 것이었다.그래도 그녀는 진정으로 그를 볼 수 있을 때 가서 결혼하기를 원했다.그녀는 자기와 결혼할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알고 싶다고 했다.전이진이 곧 시어머니로 될 사람에게 하는 말을 들은 여운초의 얼굴은 또다시 붉게 물들었다.‘이 사람 뭐가 그리 급해...’이 반가운 소식을 들은 명해은은 순식간에 잠기가 싹 사라진 듯했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시간이 있고말고, 엄마 시간은 남아돌고 있으니 금방 가져다줄게. 넌 지금 여씨 저택에 있니? 아니면 회사에 있니?” “저는 지금
그는 자신의 사람 보는 안목을 믿을 뿐만 아니라, 할머니도 믿었다. 그는 그녀와 긴 시간을 함께하면서 그녀의 인품, 일하는 스타일 등을 천천히 알게 되었다.“혼인신고를 하고 나면 한평생 같이 살아야 해요. 나는 이혼 따위는 할 마음이 없으니 잘 생각해서 결정해요. 당신처럼 훌륭한 남자는 앞으로도 나보다 더 좋고, 당신한테 더 잘 어울리는 여자를 만날 수도 있어요. 그때 가서 이 결혼은 할머니가 강요하셔서 한 거라고 하면서 그 여자야말로 당신의 진정한 사랑이니 어쩌니 해도 난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 거예요.”전이진은 손가락으로 가볍게 그녀의 코끝을 살짝 건드리면서 말했다.“넌 아직도 바깥사람들이 우리 전씨 집안 남자들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몰라? 전씨 집안 남자들은 모두 아내한테 일편단심이야. 전씨 집안의 가훈에는 결혼 후 한평생 가정에 충실해야 하고 혼인에 충실해야 하며 바람을 피워선 안 되고 이혼도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되어 있어.”“누구든 가훈을 어기는 즉시, 전씨 가문에서 쫓겨나서 더는 전씨 일가와 상관없는 사람으로 돼버려.”“그리고 내가 당신과 결혼하는 것은 할머니가 당신을 선택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야. 그렇지 않다면 할머니가 강요하셔도 소용없어.”전이진은 핸드폰을 꺼내 들고 전화를 걸었다.“누구한테 전화하려고요?”여운초는 그가 할머니에게 전화 드리려나 싶어서 한마디 물었다.“내가 가족관계등록부를 몸에 지니고 다니진 않아. 우리가 혼인신고를 하려면 내 가족관계등록부도 필요할 거 아니야. 내가 엄마한테 전화해서 급히 가져다 달라 하면 우리가 점심 전에 혼인신고 절차를 다 끝낼 수 있을 거 같아.”결혼 증명서를 받고 나면 그들은 합법적인 부부가 될 것이었다.전이진은 여태 자기가 한시 급히 여운초랑 결혼하여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싶어 한다는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애초에 여운초는 시력이 회복되어 그를 볼 수 있어야만 결혼할 수 있다고 말했다.그래서 그는 이날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왔다. 끝내 그녀의 눈
게다가 그의 아버지는 또 법을 어기는 일까지 했다.비록 모든 불법적인 장사는 이미 압류당했고 관련된 금액도 그다지 큰 편은 아니었지만, 이로 인해 여씨 그룹의 이미지가 크게 훼손되어 주가가 폭락하고 매출액이 바닥을 쳤으며 여씨 그룹의 재산도 많이 수축했다.큰누나가 여씨 그룹을 이어받은 후, 한동호 형님과 힘을 합쳐 천신만고 끝에 여씨 그룹을 이끌고 이 힘든 고비를 넘긴 셈이었다.이런 얘기를 큰누나는 그한테 한 적 없었지만, 그는 한동호 형님과 매형을 통해서 알게되었다.비로소 그는 큰누나의 홀가분해 보이는 말투 속에 얼마나 많은 쓰라림이 숨겨져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비록 큰누나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감방으로 보내긴 했지만, 그것은 그의 부모님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비록 큰누나의 대의멸친을 받아들이긴 힘들었지만, 이해만은 할 수 있었다.현재 여씨 그룹은 큰누나가 통제하고 있지만, 큰누나가 그에게 한 말이 있었다. 자기가 가져야 할 재산은 한 푼도 양보하지 않지만, 자기가 가지지 말아야 할 재산은 한 푼도 탐하지 않는다고. 그가 물려받아야 할 재산은 언젠가는 돌려줄 것이었다.설사 둘째 누나가 소송을 일으킨다 해도 그와 둘째 누나 단둘의 소송일 것이었다.큰누나는 단지 여천우 부모님에게 속하는 재산만 그에게 돌려줄 것이었다. 그의 부모님에게 자식이라곤 그와 둘째 누나밖에 없으니 설사 둘째 누나가 소송을 일으킨다 해도 상대는 그일 수밖에 없었다.“누나, 나 먼저 수업 들으러 들게. 수업이 끝나는 대로 휴가 내서 돌아갈 테니 그때 천천히 얘기해.”“알았어, 얼른 가서 수업 봐.”동생과의 통화를 마친 여운초는 동생의 말대로 그의 부모님의 물건들을 그의 방으로 옮겨 놓았다.여운별 방의 물건은 여운초가 기분을 봐서 언제든 연락하여 가져가라고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앞으로 그와 여운별은 남남일 것이었다.“아가씨, 진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 오셨습니다.”여운초는 알았다고 하면서 핸드폰을 손에
“어쨌든 우리 여씨 가문의 재산은 운별 누나가 망치게 해서는 안 돼요. 그리고 우리 두 큰고모도 틀림없이 운별 누나를 달래서 모든 재산을 빼앗으려 할거에요. 운별 누나는 사람 말을 너무 잘 믿어서 조금만 달래면 뭐든지 나누어 줄 거에요.”여천우가 이렇게 한 이유는 단지 여씨 가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일 뿐이다.추미자 부부가 그들의 명의로 된 재산을 여천우에게 물려주게 하고 또 여천우는 그 재산들을 모두 여운초에 돌려줄 셈이다. 여천우는 여운초의 사람 됨됨이를 믿었다.여천우는 여운초가 그녀의 재산이 아니면 탐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지금의 여운초도 그의 재산을 탐낼 필요가 없었다. 약혼자 전이진의 집에 재산이 엄청 많아서 전씨 가문의 둘째 사모님인 여운초는 여천우의 그깟 재산을 손에 넣지 않을 것이다.“누나, 우리 부모님 명의로 된 합법적 재산이 얼마나 남았어?”여천우는 부모님이 이전에 하신 부분적인 사업들이 법에 어긋난 사업들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불법적인 사업들은 이미 차압되었고 따라서 그 수입도 이미 몰수되었다. 그가 물려받을 수 있는 것은 단지 부모님의 합법적인 소득뿐이었다.여운초가 대답했다.“불법적인 사업과 모든 수익은 차압되거나 몰수됐어. 여씨 가문 기업은 법에 어긋난 사업을 하지 않았어. 다행히 네 아버지께서 여씨 그룹을 불법적인 사업에 손을 대지 않게 했지. 지금 여씨 그룹이 하는 사업은 모두 합법적인 사업이야.”“여씨 그룹의 주식은 우리 아버지가 대부분을 차지하셨어.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우리 아버지께 대부분 주식을 나눠주셨지. 게다가 아버지 본인도 주식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아버지는 주식의 절반을 차지하고 계셨거든. 그리고 나머지는 너의 아버지와 다른 소액주주들의 것으로 되었지. 현재 여씨 가문 주식 가격에 네 부모님 명의로 된 부동산 몇 채를 합치면 마침 200억 원 조금 넘을 거야.”여천우 친아버지 여태웅은 20여 년 전 추미자와 함께 친동생을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 범죄 때문에 중형
틀림없이 누군가가 여운초를 건드려 자극했을 것이다.여운초는 오랜 한을 억누르고 있었는데 누군가에 의해 폭발한 게 틀림없었다. 하여 추미자 부부의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을 비우려고 했을 것이다.또 하나, 여운초는 추미자 부부방의 비밀번호를 몰랐다. 심지어 여천우조차도 몰랐다.추미자는 여천우가 여운초의 편을 든다고 많은 일을 여천우에게 알려주지 않았다.여운초도 사실대로 여운별이 일찍 감옥에서 나와 오늘 아침에 여씨 가문의 별장에 쳐들어온 사실을 여천우에게 알려주었다.여천우가 그 사실을 듣더니 한숨을 쉬었다. 알고 보니 사고뭉치였던 여운별이 나와서 사고를 친 것이다.여씨 가문은 또 시끄러워질 것이 뻔했다.여천우는 여운초에 말했다.“우리 부모님 방에 있던 물건들을 전부 내 방에 가져다줘. 그리고 운별 누나 물건은 운별 누나가 가져가게 해. 그리고 운별 누나 방도 깨끗이 치워.”여천우는 그 별장이 여운초의 별장이었기에 여운초가 여운별이 그 별장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으면 여운초를 존중해 주고 싶었다.여천우는 여운별이 예전에 어떻게 여운초를 괴롭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여운별을 도와 여운초에게 사정하지 못했다.여운별이 감옥 안에서 일찍 나온 것도 아마 감옥에서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의 실제 성격을 잘 감추고 있었을 것이다.“그리고 누나, 운별 누나가 소송을 걸어 재산을 나누려고 하면 나에게 알려줘. 재산을 너무 많이 주면 다 써버릴 거야. 아무리 많은 재산일지라도 운별 누나는 분명 다 탕진 할걸. 아무것도 모르면서 성질만 부리면서 돈만 쓰잖아.”여천우는 여씨 그룹을 여운초에게 맡기면 마음 편히 공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말이지 밤새 뛰어와서 여운별을 막고 싶었다.여천우는 두 누나의 인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여운별은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응석받이로 키웠기에 패가망신할 사람이었다.“절대로 운별 누나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면 안 돼. 내가 지금 휴가를 내고 돌아갈게. 감옥으로 가서 우리 부모님을 만나 그들의 명의 아래에 있는 재산을
여미란은 추미자가 살아서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여미란은 마음속 깊이 추미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여씨 가문의 사모님 추미자는 먼저 여미란의 남동생에게 시집간 뒤로 그 남동생을 죽이고 또 여미란의 오빠에게 시집갔지만 지금 그 오빠마저도 감옥으로 들어갔다.여미란의 동생이 죽었다고 해도 그녀의 오빠와 관계가 없을 수 없었다. 물론 그 화근은 역시 추미자였다.여미란의 오빠가 추미자와 정정당당하게 함께 있기 위해 동생을 죽인 것이다.여운초에게 복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여운초는 지금 전씨 가문의 둘째 사모님이었고 전씨 가문이 그녀의 배후에 서 있었기에 여미란 일행은 감히 여운초를 찾아 복수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여미란은 마음속으로 여운초를 수천 번, 수만 번 욕하면서 자신을 달래곤 했다.여운초는 여운별이 여씨 가문을 떠나 어디로 갈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최씨 집안과 김씨 집안이 여운별의 피를 빨아들이도록 내버려 두기로 했다.예전에 여미란 자매의 집에 재산이 많았지만 늘 친정집에서 이득을 보려고 애썼다.이제 최씨와 김씨 집안은 부귀한 생활에 익숙해져 꿈에서라도 부자들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하던 찰나에 여운별이 스스로 찾아와 도움을 청하게 되었기에 그녀의 피를 빨아먹을 수 있는 희망이 생겼다.그때가 되면 여운별은 그녀의 손에 쥐어진 적디적은 재산을 가지고 두 집안에 의해 피를 빨리게 될 것이 뻔했기에 여운초는 곁에서 재미있는 광경을 지켜만 보면 되었다.여운초가 여천우와 말했듯이 여운초는 자신의 재산을 일전 한 푼도 그들에게 주지 않을 것이지만 자신의 재산이 아닌 것은 전부 그들에게 돌려줄 것이다.추미자는 예전에 화려하고 웅장하게 꾸며진 큰 방에서 살았지만 정작 별장 주인인 자신이 가정부와 함께 방을 쓰게 된 기억을 떠올린 여운초는 집사에게 지시했다.“이 방을 깨끗이 청소하세요. 이 방을 다시 새로 꾸밀 거예요.”이 큰 방이 바로 주인의 방이다.여운초는 먼저 금고를 그녀가 지금 사는 방으로 옮기라
정현숙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자 여운별은 자신의 큰고모 여미란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미란이 전화를 받지 여운별이 입을 열었다.“큰고모, 제 물건을 돌려받았어요. 제가 지금 돈이 있으니 고모께서 저에게 아파트 한 채를 찾아 세 들어주시면 좋겠어요. 제가 그곳에 잠시 머물다가 운초에게 소송을 걸어 재산을 많이 분배받으면 그때 큰 별장을 구매할 거예요.”여운별이 그녀의 물건을 가져갔다는 말에 여미란은 바로 물었다.“들어갔어? 들어갔으면 왜 그 집에서 살지 않고. 별장에 살면 얼마나 좋아. 세 들어 살면 돈도 따로 나가야 하는데.”여운별은 한참을 말이 없다가 그제야 말을 이었다.“우리 일단 만나요. 생각처럼 쉽지 않더군요. 제가 지금 차에 기름 넣으러 가야 해요. 그리고 고모 찾으러 갈게요. 둘째 고모와 사촌 오빠들에게 점심에 제가 밥을 사드린다고 전해주세요. 요 이틀 동안 사촌 오빠들 덕분에 잘 지낼 수 있었어요. 제가 성격이 나쁘고 제멋대로지만 배은망덕한 사람은 아니에요. 저는 저에게 잘해주신 사람들을 모두 마음에 담아두거든요.”“지금 제가 좀 초라하긴 하지만 제가 우리 재산을 되찾으면 절대로 고모들께 푸대접하지 않을 거예요. 제가 반드시 고모들을 도와 지난날처럼 부자 생활을 할 수 있게끔 도울 거에요.”그림의 떡은 누구나 다 그릴 수 있었다.여운별도 그림의 떡으로 두 고모를 달래려고 했다.그리고 그녀가 정말 소송에서 이겨 자신의 재산을 가질 수만 있다면 적어도 수백억의 재산을 가질 수 있다고 믿었기에 두 고모의 집안에 돈을 조금 주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두 사촌 오빠들을 도와 일자리를 하나 더 마련해주겠다고 생각했다.여운별은 회사에 관한 일을 잘 몰랐기 때문에 여씨 그룹으로 돌아가면 지인에게 회사 일을 도와달라고 해야 했다.두 고모 댁의 사촌 남매는 항상 그녀에게 잘 대해주었다. 심지어 사촌 남매들이 그녀에게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그녀에게 잘해줄지라도 여씨 그룹을 그들에게 맡기고 싶었다. 누가 뭐라 해도 사촌 형제들은 여씨 그룹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