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차에서 내리자 성소현은 무척이나 기뻤다. 그동안의 고생이 헛되지 않은 듯싶었다. 어쨌거나 그녀를 완전히 무시하던 전태윤이 차에서 내려 그녀를 만났으니 말이다.“태윤 씨, 제가 아침 준비해왔어요.”성소현은 재빨리 정성껏 준비한 아침을 전태윤에게 건넸다. 그와 동시에 꽃다발도 함께 건네면서 활짝 웃었다.“이 꽃은 제가 우리 집 정원에서 직접 따서 가지를 손질한 다음 한데 묶은 거예요. 태윤 씨한테 선물할게요.”전태윤은 아무런 표정 없이 성소현을 쳐다보았다.‘남자에게 꽃을 선물한다고? 하예정은 대체 소현 씨에게 어떻게 대시하라고 가르친 거야? 날 여자로 여긴 건가?’전태윤은 일단 오른손으로 꽃다발을 받은 후 왼손으로 도시락통을 받았다. 그 순간 성소현은 날뛰듯이 기뻤다.‘태윤 씨가 날 받아주려나?’그런데 그녀는 곧바로 전태윤의 왼쪽 약지에 낀 금반지를 발견했다. 꽤 큰 금반지라 흐린 날씨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게 무시하려 해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태윤 씨!”성소현이 조심스럽게 그를 떠보았다.“그 반지는 뭐예요? 왜 약지에 끼고 있어요?”그녀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통 결혼반지를 약지에 끼는데.”전태윤은 반지를 힐끗 내려다보고는 그냥 돌아섰다. 경비실 문 앞에 다다른 그가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경비실 쓰레기통이 어디 있어요?”경비원이 쓰레기통을 가져오자 그는 꽃다발과 도시락통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러고는 곧장 다시 차에 올라탔다. 왜 반지를 약지에 꼈냐는 성소현의 질문에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성소현이 결혼반지는 약지에 낀다고 대놓고 얘기했으니 바보가 아닌 이상 그의 뜻을 모를 리가 없었다.“가자!”전태윤의 서늘한 목소리에 운전기사는 재빨리 차에 시동을 걸고 성소현을 지나 회사로 들어갔다.성소현은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고 안색도 점점 창백해졌다. 전태윤이 그녀를 받아준 게 아니라 그녀가 보는 앞에서 꽃다발과 직접 만든 아침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엔 결혼반지가 끼어있었다.전태윤은 그녀가 수
성기현은 성소현이 왔다는 보고를 진작 받았다. 여동생이 사무실에 함부로 쳐들어와도 그는 절대 나무라지 않았다.“뭘 그렇게 급히 뛰어와? 귀신이라도 쫓아오고 있어?”성기현이 사인펜을 내려놓았다. 여동생이 왔으니 잠시는 업무를 볼 수 없었다.“오늘은 전씨 그룹 앞에서 안 기다려? 오빠가 얘기했었잖아, 전태윤은 너랑 어울리지 않는다고. 널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얘기했었는데 믿지 않고 계속 고집을 부리더니, 상처받았지?”성기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동생에게 다가갔다. 여동생의 창백한 얼굴을 보니 마음이 찢어지듯 아팠다.“전태윤이 너한테 무슨 짓을 했어?”그는 여동생이 전태윤을 쫓아다니는 걸 동의하지 않았고 전태윤이 여동생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참을 수 없었다.“오빠.”성소현이 성기현의 팔을 잡고 다급하게 물었다.“오빠, 태윤 씨 싱글이야, 유부남이야? 얼른 말해줘.”성기현이 잠깐 멈칫하다가 대답했다.“왜 그런 질문을 해? 관성 전체에 전태윤이 여자친구도 없는 싱글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어? 걔 성격에 가족 외에 그 어떤 젊은 여자도 접근하지 못 하게 하는데 이렇게 공개적으로 대시하는 여자는 아마 너밖에 없을 거야. 내가 오죽하면 이런 말을 했겠어? 우리 동생이 아니었더라면 걔는 누군가가 대시하는 기분이 어떤지도 모를 거야. 그냥 평생 사랑도 받지 못하고 혼자 살라고 해.”“오빠, 오늘 보니까 태윤 씨가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고 있더라고. 진짜 싱글이 확실해? 이미 결혼했는데 우리가 모르는 건 아니고?”“전태윤이 결혼반지를 꼈다고? 결혼 안 한 거 확실한데.”두 그룹의 경쟁이 치열하여 그는 늘 전태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하여 만약 전태윤이 결혼했다면 그가 가장 먼저 알게 될 것이다. 게다가 전태윤의 신분에 결혼했는데 아무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의 결혼은 관성 전체를 뒤흔들만한 빅뉴스인데.“그럼 왜 결혼반지를 끼고 있지?”성기현이 피식 웃었다.“그거야 나도 모르지. 갑자기 즉흥으로 꼈을 수도 있잖아. 그러는 사람 많아. 미혼
“너 왜 이렇게 고집불통이야?”“나 원래 고집불통이야.”성기현은 분통이 터졌다.“전태윤은 절대 널 좋아하지 않아. 그리고 전씨 가문에서도 널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성기현이 그녀에게 분석했다.“전씨 가문의 할머니도 만만치 않은 분이야. 손자가 아홉이 있는데 제일 어린 두 손자 말고 나머지 일곱은 전부 결혼할 나이가 됐어. 그 어르신 지금 손자들이 결혼하기만을 기다리셔. 그런데 네가 전태윤을 공개적으로 쫓아다닌지도 한참이 됐는데 어르신이 무슨 움직임이라도 있었어? 네가 전태윤을 좋아한다는 걸 모르는 것처럼 전혀 미동도 없어. 그 이유가 뭐겠어? 어르신이 네가 큰 손자며느리가 되는 걸 탐탁지 않아 한다는 말이야.”“마음에 들었다면 어르신 성격에 더욱 부추기는 건 당연한 거고 어쩌면 더한 일도 했을 수 있어. 전태윤을 너의 침대에 데려다 눕혀서라도 밤을 함께 보내게 했겠지. 어르신은 하루빨리 증손주를 원하니까. 만약 두 사람이 밤을 같이 보냈다면 전씨 가문이든 우리 가문이든 전태윤한테 널 책임지라고 했을 거야. 너랑 결혼하기 싫어도 결혼하게끔 말이야.”전태윤은 책임감 있는 남자이다. 아마 이런 이유로 인하여 전태윤이 외출할 때마다 경호원과 동행하는 듯싶다. 그의 반경 3m 이내에 가족을 제외한 그 어떤 젊은 여성도 다가갈 수 없었다. 혹시라도 꿍꿍이가 있는 여자가 접근하면 큰일이니 말이다.그의 얘기를 듣던 성소현이 말했다.“할머니는 아직 내가 태윤 씨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모르실 수도 있잖아.”“계속 그렇게 스스로를 기만할 거야? 어르신이 젊었을 때 어떤 분인지 알아? 어르신이 알고 싶지 않은 것 말고는 모르는 정보가 없었어. 네가 공개적으로 전태윤한테 고백한 게 실시간 검색에까지 올랐는데 어르신이 그걸 모를 리가 있겠어? 어르신이 지금까지 아무 움직임이 없다는 건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뜻이야. 비록 전씨 가문의 가풍이 바르고 어른들도 꽉 막힌 분들이 아니라서 애들이 좋다면 반대하진 않겠지만 결혼 후에 널 탐탁지 않아 하는 어른들한테 잘 보
성기현은 여동생의 창백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지금 이런 말을 내뱉는 그녀가 얼마나 속상할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그도 연애해보았고 지금의 결혼생활이 아주 행복하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속상한 적도 많았고 절망한 적도 있었는데 감정이 사람의 마음을 가장 다치게 했다. 하지만 그는 전태윤이 절대로 여동생을 좋아할 리가 없다는 걸 확신했다. 여동생이 계속 이대로 그에게 매달려도 나중에 상처받을 게 뻔하므로 차라리 지금 포기하게 하는 게 나았다.성기현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소현아, 오빠가 너의 부탁을 들어주기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전태윤의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 소정남이야. 소씨 집안이 어떤 집안이야? 내가 전태윤을 조사한다면 바로 알게 될 텐데 그냥 조사하게 내버려 둘 것 같아? 게다가 오빠 쪽 사람은 전부 이모를 찾는데 보냈어.”성소현은 더는 아무 말이 없었다. 오빠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소정남은 소씨 집안 사람인데 소씨 집안이 얼마나 대단한지 관성 전체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소현아, 이 세상에 좋은 남자는 많아. 그러니까 그만 전태윤을 잊어.”성소현은 고개만 푹 숙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곧이어 그녀의 눈물이 두 볼을 타고 떨어졌다.지금 그녀는 너무도 속상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겠다는 게 왜 이리도 어렵단 말인가?성기현은 묵묵히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오빠.”성소현이 오빠의 어깨에 기댄 채 훌쩍였다.“태윤 씨는 왜 날 좋아하지 않을까? 내가 그렇게도 부족해? 설마 내가 제멋대로 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라 생각하진 않겠지? 나의 어디가 싫은지 얘기만 해주면 고칠 수 있는데... 그런데 그 사람은 나한테 기회도 주질 않았어. 내가 그렇게 싫나?”그녀의 말에 성기현은 너무도 마음이 아팠다.“소현아, 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없어. 싫은 건 그냥 싫은 거야, 네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린 사람이라서 모든 사람이 좋아해 줄 순 없어. 너는 너고 성격도 이미 다 형성되
그런데 꽃가게 문 앞에서 족히 10분 동안 망설이고 나서야 차에서 내려 꽃가게로 들어갔다.“안녕하세요. 꽃 사러 오셨나요? 여자친구한테 선물하시게요?”전태윤이 꽃가게를 둘러보고는 사장에게 물었다.“와이프한테 선물하려고요.”꽃가게 사장이 웃으며 말했다.“생일이신가요? 아니면 두 분 결혼기념일인가요?”“다 아니에요. 그냥 선물해주고 싶어서요.”그러자 사장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그럼 장미꽃 사이에 안개꽃으로 데코하는 건 어떨까요?”여자에게 꽃이라곤 사준 적이 없는 전태윤은 사장의 추천대로 사면 문제없을 거로 생각하여 고개를 끄덕였다.“사장님 말씀대로 해주세요.”“잠시만 기다려주세요.”사장은 그가 아내에게 처음으로 꽃을 선물한다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잠시 후, 꽃가게 사장은 장미꽃다발을 전태윤에게 건넸다. 전태윤은 꽃다발을 안고 돈을 지불한 후 꽃가게를 나섰다.그는 꽃다발을 조수석에 내려놓았다. 운전하다가 가끔 쳐다보면서 무슨 말을 하며 하예정에게 선물해야 할지 고민하곤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관성중학교 문 앞에 도착했다. 일찍 퇴근한 바람에 수업이 끝난 학생들이 우르르 나오고 있었다.하예정의 가게 안에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학생들은 가게에서 자신에게 맞는 학습 자료를 고르거나 좋아하는 문구를 골랐다.꽃다발을 안고 차에서 내린 전태윤은 하예정의 가게 안에 손님이 많은 걸 보고 꽃다발을 다시 차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서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학생들은 그를 보자마자 마치 엄격한 학생 주임을 본 것처럼 말투도 저도 모르게 고분고분해졌다. 심지어 어떤 학생은 어느 자료를 고를까 고민하다가 전태윤이 들어오는 걸 보고 바로 자료를 고른 후 황급히 계산하고 나가버렸다.전태윤이 이 시간에 서점에 나타난 적이 아주 드물었다. 하지만 지난번에 도와줄 때 학생들에게 남긴 인상이 하도 강렬하여 다 도망치고 싶어 했다.“이모부.”학생들은 전태윤을 두려워했지만 주우빈은 달랐다. 원래는 이모 뒤만 졸졸 따라다니다가 전태윤을
전태윤은 짜증 한번 내질 않았다. 주우빈이 하라는 대로 했고 주우빈에게 새로운 놀이 방법도 가르쳐줬다. 하예정은 저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태윤 씨 나중에 아이가 있으면 엄청 책임감 있는 아빠일 것 같아.’“왜 그래?”하예정이 한곳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걸 발견한 심효진이 가까이 다가왔다. 하예정이 전태윤을 보고 있는 걸 확인하고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너희 남편이 엄청 멋있어 보이지?”“멋있어 보이는 게 아니라 원래 멋있는 사람이야.”“얼른 덮쳐버려. 우빈이한테 얼마나 인내심 있게 잘하는지 봐봐. 겉으로 보기에는 얼음장처럼 차갑지만 사실 마음은 엄청 다정하고 아이를 좋아하는 남자야. 태윤 씨를 덮쳐서 태윤 씨 닮은 아이를 낳으면 얼마나 좋아.”하예정이 실소를 터뜨렸다.“누가 보면 내가 애를 낳으려고 그러는 줄 알겠어.”그녀는 잠깐 멈칫하다가 나지막이 말했다.“저 사람 차가운 얼굴을 보면 덮쳐도 벗길 용기가 없어.”전태윤 같은 성격의 남자를 유혹한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괜히 섣불리 나섰다가 그냥 뽀뽀만 하다 끝날지도 모른다.심효진이 입을 가리고 웃으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태윤 씨 원래부터 차가운 얼굴이잖아. 아니면 술이나 잔뜩 먹일까?”그 뒤의 장면을 상상하던 하예정이 정신을 가다듬고 솔직하게 말했다.“태윤 씨 방은 나의 금지구역이야. 됐어, 그만 꿈 깨자. 하루하루 되는대로 살지, 뭐.”그러고는 전태윤과 주우빈에게 다가갔다.“이모.”신나게 놀던 주우빈이 고개를 들고 하예정을 불렀다. 하예정은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전태윤에게 말했다.“태윤 씨, 우빈이랑 조금만 더 같이 놀아줘요. 식사 준비하러 갈게요, 난.”전태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럼 아까 나한테 말하지. 나도 요리할 줄 알아.”“그 생각을 못 했네요. 다음에 왔을 때 바쁘면 그때 마음껏 부려 먹을게요.”그녀를 쳐다보는 전태윤의 눈빛이 그윽해졌다.‘마음껏 부려 먹겠다는 건 나한테 마음이 움직였다는 건가? 나랑 쭉
“갔다 왔다 하기도 불편하고 점심 쉬는 시간도 없어서 안 오겠대요. 회사에 구내식당이 있어서 회사에서 먹겠대요.”전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저녁에 처형이 퇴근해서 오면 적응할만한지, 괴롭히는 사람은 없는지 물어봐봐. 내가 노 대표한테 그 정도는 얘기할 수 있어. 만약 누가 처형을 괴롭히면 노 대표한테 얘기할게.”하예정이 고개를 돌려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이러니까 언니가 태윤 씨를 좋아하죠. 늘 태윤 씨한테 잘하라고 나한테 당부하거든요.”전태윤의 잘생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그녀의 언니 앞에서 늘 잘했다.시간이 넉넉하지 않아 하예정은 점심을 간단히 준비했다. 다행히 전태윤은 맛있게 잘 먹어줬다. 그 모습에 하예정이 속으로 생각했다.‘돼지 내장을 안 먹고 파와 마늘, 고수를 싫어하는 것 말고는 뭘 해줘도 다 잘 먹네.’점심 식사를 마친 후 전태윤은 바로 가지 않았다. 설거지를 마치고 주방에서 나온 하예정은 아직 가지 않은 그를 보더니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태윤 씨, 오후에 출근 안 해도 돼요? 벌써 1시가 넘었어요. 전에는 1시쯤이면 회사로 돌아갔잖아요.”심효진과 조카의 모습이 보이질 않자 하예정이 계속하여 물었다.“우빈이랑 효진이는요?”“효진 씨는 마트에 물건 사러 갔고 우빈이도 따라갔어.”전태윤은 심효진이 두 사람에게 단둘이 있을 시간을 주려고 일부러 피해준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래도 심효진이 김진우와 하예정을 붙여놓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그 생각에 전태윤은 심효진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겼다.“그래요.”하예정이 카운터 앞에 앉았다.“하예정.”전태윤이 머뭇거리다가 그녀를 불렀다. 하예정이 고개를 돌리자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이 입에서 나오질 않았다. 그가 입을 열기 전에 하예정이 걱정스럽게 물었다.“태윤 씨, 무슨 일 있어요?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얘기해요. 내가 도와줄 수도 있잖아요.”전태윤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사실 어려운 일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따지면 있었다. 아내에게 주려고 꽃을
전태윤은 한참 동안 하예정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정말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나가버렸다. 하예정은 그를 부르려다가 포기했다. 얘기하기 싫은 건 아무리 뭐라 해봤자 절대 얘기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얘기하려다가 마는 게 제일 싫어. 시원시원하게 얘기하면 얼마나 좋아?”답답한 전태윤 때문에 하예정은 분통이 터졌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 앞에서 얘기하려다가 마니 머릿속에 온통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을까 그 생각뿐이었다.그런데 2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남자가 꽃다발을 안고 들어왔다.하예정은 넋을 놓고 그를 쳐다보았다. 전태윤이 꽃다발을 안고 들어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눈까지 비비며 다시 한번 확인했다.‘태윤 씨 맞는데? 지금 나한테 꽃을 선물한 거야?’하예정은 가슴이 쿵쾅거렸고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것만 같았다.‘젠장, 왜 이렇게 떨려!’그는 꽃다발을 그녀에게 건넨 게 아니라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그때 좀처럼 들을 수 없었던 전태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꽃가게를 지나가다가 꽃이 예뻐서 샀어. 다른 뜻은 없어.”말을 마친 그는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가게를 나갔다. 그 동작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마치 그 자리에 조금이라도 더 있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말이다.“태윤 씨.”정신을 차린 하예정이 본능적으로 뛰쳐나가 그를 불렀다. 그런데 전태윤이 마치 귀신에게 쫓기듯 황급히 차에 올라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눈앞에서 사라졌다.하예정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가 감탄했다.“뭔 동작이 그렇게나 빨라.”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저도 모르게 지어졌다. 미소가 점점 커지더니 웃음을 터뜨렸다.‘태윤 씨 가끔 참 귀엽단 말이지.’하예정은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와 카운터 앞에 앉았다. 장미꽃을 한참 내려다보던 그녀는 꽃을 들고 중얼거렸다.“가게에 꽃병이 없네.”가게 안을 둘러보던 그녀는 꽃다발을 다시 상 위에 내려놓았다.“예정 누나.”그때 김진우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김진우가 블
“엄마, 저는 밖에서 낳은 딸이 없어요. 만약 밖에서 낳은 딸이 있다면 그 딸을 이씨 가문에서 인정하나요?”“네가 낳은 친자식이라면 당연히 인정하지. 네가 임신하고 아기를 낳을 때 가족 모두가 동행한다면, 그 아이가 태어나면 가문의 사람들도 인정할 거야.”이윤미가 대답했다.“그러면 제가 왜 시집을 가야죠? 시집가지 않으면 그 쓰레기들이 재산을 가져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이은화는 말문이 막혔다.이은화는 정신이 나갔는지 갑자기 딸의 이상한 질문에 대답까지 해주었다.정군호의 배신 때문인지, 기분이 나쁜 탓인지 모른다.이윤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완벽한 대책을 세워도 빈틈이 생길 것 같으면 가장 좋은 방법은 제 딸이 아빠를 두지 않으면 좋잖아요. 제가 결혼도, 혼인신고도 하지 않으면 합법적인 부부로 되지 못하니 당연히 부부의 공동 재산이 될 리가 없을 테고 그 남자도 재산을 분할 받고 싶어도 못 받을 거고요.”이은화는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다시 이윤미를 설득했다.“윤미야, 내가 아무 말도 안 한 거로 생각해. 엄마는 네가 외롭지 않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면 좋겠어.”“제가 딸을 낳고 서로 의지하면서 살 텐데 어떻게 외롭다니요? 가주 자리에 앉으면 스트레스가 심하고 일이 바빠서 매일 발이 땅에 닿지 못할 정도로 바쁠 텐데 외로움을 느낄 여유가 어디 있겠어요? 저는 좋아하는 남자가 없어요. 그런데 또 딸을 낳아 가주 자리를 물려주려면 예진 리조트의 넷째 사모님을 따라 배우면 되잖아요.”“이윤정은 어떻게 됐어?”이윤미의 생각에 놀란 이은화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그녀는 나이가 들었지만 그래도 사상은 여전히 비교적 보수적이었다.“우리 별장 앞에서 밤새 울부짖었어요. 오늘 아침에 윤정이가 형수님 몇 분한테 괴롭힘을 당했는데 또 괴롭힐까 봐 도망쳤어요.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요. 우리 오빠들이 윤정에게 준 돈과 카드도 전부 형수님들이 빼앗아 갔어요. 엄마가 옷 외에 다른 물건은 전부 가져갈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형수님들도 엄마의 말씀을
이윤미는 더는 정군호를 쳐다보지 않고 이은화를 따라 거실로 나갔다.이윤미는 보온 도시락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도시락 뚜껑을 열어주면서 말했다.“만두 두 개도 포장해 가져왔어요.”이은화는 앉아서 이윤미가 가져온 흰죽과 반찬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너니까 나에게 진짜로 흰죽과 반찬을 가져오는구나.”정일범 형제와 이윤정이라면 흰죽과 반찬들이 이은화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이은화의 요구대로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엄마, 따뜻할 때 얼른 드세요.”이윤미는 양부모 집에서 자라면서 학대받았을 때 흰죽 한 그릇도 먹지 못했다.어렸을 때, 흰 죽 한 그릇도 그녀에게 사치였다.삶의 고달픔을 일찍 알아버린 이윤미는 커서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벌어도 함부로 쓰지 않고 여전히 절약하며 살았다.이는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성격으로 지갑이 두꺼워졌다고 해서 바뀌지는 않았다.이은화는 묵묵히 죽을 먹으며 수십 년 전 그날 새벽의 이은숙 가족과 함께 아침을 먹던 기억을 떠올렸다.이은화는 자신의 맏언니와 여동생을 죽이고 가주 자리에 앉았지만, 결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엄마, 아버지께서...”이윤미가 조용히 물었다.그녀는 정군호가 얻어맞은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고 아마 이은화에게 칼에 찔렸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어젯밤 정군호가 병원으로 이송된 후 이은화는 자식들이 자신에게 정군호의 상처에 관해 묻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윤미 또한 정말로 묻지 않았다.어쨌든 이은화는 정군호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이은화의 수단으로 분석해 보면 그녀는 정군호를 단번에 죽이지 않고 천천히 괴롭힐 것이다.이은화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죽지는 않아. 단지 내시가 되었을 뿐이야. 감염되지 않고 상처가 다 나으면 퇴원할 수 있대. 네 아버지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은 없을 거야. 앞으로 미녀를 보게 되면 눈으로만 볼 수밖에 없을걸.”이윤미는 잠시 어떻게 말을 이어나가야 할지 몰랐다.“윤미야.”이윤미는 이은화를 바라보았다.이은화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엄마
정군호는 잠깐 고통과 절망한 표정으로 이은화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그는 정말 아팠다.정군호가 이은화를 보지 않아도 이은화는 화를 내지 않았다.그리고 일어나 다시 창가로 걸어가더니 창밖을 바라보았다.이은화의 생각은 이미 멀리 떠났다.만약 그 사람이 이은화와 함께 있었더라면, 그녀를 돕고 그녀와 결혼했다면, 그녀의 인생은 분명 아름답고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영원히 이은숙에게 충성했다.이은숙이 시집가서 딸을 낳고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그 사람은 여전히 이은화와 함께하지 않고 오히려 자취를 감췄다.이미 몇십 년이 흘러 이은화가 70세의 노인으로 되었는데, 그 사람은 아마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은화는 여전히 걱정하고 있다.따르릉...이은화의 핸드폰이 울렸다.휴대전화를 꺼내 보니 이윤미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이은화는 잠시 휴대전화를 쳐다보다가 전화를 받았다.“엄마.”이윤미는 전화기 너머로 말을 건넸다.“엄마, 괜찮으세요?”그녀는 아버지의 부상이 어떤지 직접 묻지 않고 어머니의 안부부터 물었다.이은화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이미 최악인데 뭐가 괜찮겠어? 너희도 어른이 되고 나도 할머니로 되었는데 네 아빠가 내연녀가 있다고 해도 난 이제 여의치 않아.”앞으로 정군호는 다시는 여자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걱정할 것 하나도 없다.“엄마, 오늘 밥 안 드셨을 텐데 드실 것 좀 갖다 드릴까요?”“필요 없어.”이은화는 거절하다가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그래, 너무 많이 가져오지는 말고. 흰죽에 반찬 조금만 갖다 줘.”이윤미가 대답했다.“엄마가 병원에서 아버지를 돌보느라 힘드실 텐데 그렇게 간단하게 드시면 쉽게 배고파요. 쉽게 체력도 떨어져서 안 돼요.”이은화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말을 건넸다.“네 큰이모가 세상을 떠나신 날 아침, 큰이모가 이렇게 드셨거든. 산해진미를 많이 먹었다면서 가끔 흰죽에 반찬을 곁들이면 특별한 맛이 난다고 하셨어.”“알았어요. 제가 가져다드릴게요.”이윤미는 더는 아무
“괜찮아요. 누나는 일 보러 나갔어요. 우리 예진 누나를 너무 과소평가하면 안 돼요. 누나는 이미 온갖 피바람을 겪은 사람이거든요. 15살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사람 잡아먹을 정도의 친척들을 상대하면서 열 살짜리 여동생을 잘 가르치면서 살아오셨어요. 삶의 고초를 겪은 사람의 의지는 엄청나게 강한 법이죠.”전호영은 이경혜가 왜 하예진을 선택하고 강성으로 보내 이윤미와 경쟁하게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놀라지 않았다니, 안심이 되네요.”전호영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제 퇴근해도 될까요? 참, 현이 씨에게 선물을 준비했어요.”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 고현에게 건넸다.고현은 케이스를 받아 열어 보지도 않고 일어나서 그녀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더니 서랍을 열어 서랍 안에 넣었다.“열어 보지 않을래요?”“볼 필요 없어요. 호영 씨가 준 물건은 모두 최고이기 때문에 제가 한가할 때 천천히 열어보면서 호영 씨의 사랑을 느껴볼게요.”전호영은 고현을 보면서 오늘의 그녀가 좀 부드러워진 것 같다고 느꼈다. 고현은 전호영의 감정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전호영의 이 고된 사랑의 길에서 드디어 또 한 걸음 더 나아간 셈이다.전호영은 너무 뿌듯했다.병원.어느 고급 병실에서 이은화가 창가에 서서 창밖의 고층 빌딩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정군호였다. 정군호는 얼굴이 창백해 보였고 표정도 고통스러웠다.그는 눈을 감고 있다가 가끔 눈을 뜨고 그러다가 창가에 서 있는 이은화를 보더니 또 재빨리 눈을 감았다.아무도 정군호를 방문하러 오지 않았다.그가 칼을 휘둘러 그런 일을 저지른 소식을 이은화가 억눌러 소문이 퍼지지 않게 했다.그의 체면을 살려준 셈이다.이은화는 정군호가 아들딸 앞에서 그의 유일한 존엄을 잃지는 않도록 했다.시간이 한참 흘러 이은화가 돌아앉아 자는 척하는 정군호를 보며 말을 건넸다.“당신이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나도 알아.”그녀는 정군호가 아파서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진통제
고진호도 고현이 여자였기 때문에 며느리가 아닌 사위가 필요했고 따라서 재벌가 딸들에게 희망을 품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전호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꼭대기 층에 올라가서 엘리베이터를 막 빠져나오자마자 고현이 고객을 배웅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 뒤에는 단정하게 양복을 입은 젊은 여성 몇 명이 따르고 있었는데 아마도 고객의 비서일 것이다.전호영과 고객들은 서로를 잘 몰랐다.고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전호영은 말없이 한쪽으로 비켜섰다.고현은 직접 고객을 아래층으로 배웅했다.남 비서가 전호영을 쳐다보자 전호영은 눈빛으로 고현을 따라가라고 신호를 보냈다.전호영은 이미 고현의 사무실에 대해 매우 익숙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 비서가 그에게 예의를 갖출 필요 없었다.고현의 사무실과 휴게실에 관해 전호영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고현 일행이 엘리베이터에 들어간 후, 전호영은 스스로 고현의 사무실로 갔고 바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사무실에 들어선 전호영은 먼저 커피 한 잔을 타고 소파에 앉았다. 그때 고현이 돌아왔다.“어젯밤 일은 어떻게 됐어요?”고현은 그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물었다.“예진 누나를 대신해서 죽은 경호원 가족들이 와서 뒷일을 처리했어요. 이씨 가문도 가족에게 보상을 해주고 보험회사에서도 가족들에게 보상해 줄 거예요. 이씨 가문의 모든 경호원은 거액 보험에 가입했거든요. 저도 이따가 예진 누나에게 전화해서 오늘 오후에 그 경호원의 가족들을 보러 가자고 해야겠어요. 그 경호원은 비록 이씨 가문의 희생 품이지만 그래도 예의는 갖추어야 하는걸요.”현재, 그 차 사고는 잠시 의외 사고로 단정 지어졌다.이씨 가문의 음모라는 증거가 없어서 이씨 가문은 충분한 연기를 해야 만이 사람들의 비난을 받지 않았다.죽은 그 이씨 가문의 경호원은 스스로 재수 없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이은화의 마음이 그토록 모질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하예진을 이씨 가문의 가족 연회에 처음 초대한 당일에 그녀를 죽이려고 했으니 말이다.하예진이 경계
다행히도 이 모든 악몽은 이미 끝났다.하예진은 이미 다시 일어서서 사업을 일으켰다.“호영 씨, 이만 가볼게요. 저도 나가서 일해야 하거든요. 회사를 설립하는 일을 아직 다 마치지 못해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회사가 강성에 있어야 다른 회사와 협력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동명 형이 오시는 길일 텐데 더 기다리지 않으려고요?”전호영은 장난치고 싶었다.하예진도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제가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야 도착할 거에요. 동명 씨가 먼저 오면 저 대신 먼저 대접해 주세요. 호영 씨와 동명 씨가 더 친하잖아요.”“저도 좀 이따가 고씨 그룹에 갈 거예요.”“알겠어요. 그럼, 제가 빨리 돌아오죠. 미래의 아내가 더 중요한 법이죠. 호영 씨 둘째 형도 혼인신고 했다면서요. 호영 씨가 설을 쇠러 갈 때면 운초 씨는 아마 임신했을걸요. 힘내셔야겠는데요.”전호영은 그의 잘생긴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누나, 저도 필사적으로 힘을 내는 중이거든요. 우리 현이 씨는 둘째 형수님보다 따르기가 훨씬 어렵거든요.”여운초는 겉으로 보기에는 작고 하얀 꽃처럼 부드럽고 연약해 보였다.여운초가 여씨 그룹을 단단히 장악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전호영도 여운초가 계략과 수단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전혀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끈질긴 열정을 이기는 사람이 없다고 하잖아요.”하예진은 말을 마치고 일어나 전호영의 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작별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전호영의 사무실에서 나왔을 때, 하예진은 마침 이경혜의 전화를 받았다.이경혜와 하예진은 전화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하예진이 떠난 지 30분 만에 전호영은 일을 끝내고 호텔을 떠나 고씨 그룹으로 향했다.전호영은 이씨 가문의 뒷일을 고현에게도 알려주려고 했다.이번에 전호영은 꽃도, 보석도 사지 않았다. 고현은 비록 여자이지만, 어려서부터 남장을 하고 성격도 남성적이라 여자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전호영은 그녀에게 손목시계를 하나 사줬다.고씨 그룹의 사람들은
“이 대표님께서도 크게 노하셨을 거예요. 정군호 씨는 잘 모르지만, 이윤정 씨는 그날 밤 쫓겨났어요. 한밤중에 정군호 씨가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실려 갔다고 들었는데, 이 대표님은 아무도 병원에 따라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고 정군호 씨의 상처에 관해 묻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대요.”전호영은 여기까지 말하다가 문득 말을 멈추었다.하예진은 아직 다 마시지 못한 물잔을 들고 두 모금 더 마시더니 다시 잔을 내려놓고는 조용히 전호영을 바라보며 그가 말을 이어나갈 때까지 기다렸다.전호영이 말을 이었다.“사람을 보내 병원에 가서 알아보게 했어요.”“이모할아버지의 부상 상황은 어떻게 되셨대요? 이모할머니가 벌인 일이래요?”그러자 전호영이 대답했다.“이 대표님께서 저지른 일이 아니라 정군호 씨가 스스로 그 부위를 자른 거래요.”전호영은 정군호가 벌인 일이 이은화의 핍박이라고 추측했다.정군호는 절대로 스스로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이은화가 아마도 정군호에게 두 가지 길을 준 것 같았다.정군호 배후의 정씨 집안은 여전히 이씨 가문에 의지하여 살아가야 했기에 정군호는 절대로 이혼하지 않을 것이다. 이혼하지 않으면 정군호는 이은화를 안심시킬 수 없기에 칼을 휘둘러 스스로 그런 짓을 해야만 이은화를 안심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하예진이가 깜빡이며 의아했다. 그녀는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다.전호영도 정군호의 부상에 대해 계속해서 말하지 않았고 그냥 말 한마디만 내뱉었다.“정군호 씨는 죽지 않았어요. 정군호 씨의 부상은 알아보기 어려울 거예요. 이 대표님께서 엄밀하게 숨기고 있거든요. 남자들에게는 특히 데릴사위인 정군호 씨에게는 존엄 없는 짓이나 다름없으니까요.”하예진은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데릴사위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바로 재벌 가문으로 시집가는 여자들이 당하고 있는 일 아닌가요? 성별이 바뀌었을 뿐이죠.”전호영은 순간 말문이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잠시 후, 전호영이 말했다.“누나, 우리 동명 형은 좋은 사람이에요. 과거의 일은 지나
하예진이 위험에 처해 사고가 일어나야만 경호원들이 주동적으로 노동명에게 보고했다.“괜찮으면 됐어. 그럼 됐어. 너무 놀랐잖아. 예진아, 내가 이따가 강성으로 갈 건데 아마 오후 2시 전에 도착할 것 같아.”하예진이 대답했다.“전 괜찮아요. 여기까지 올 필요 없어요.”노동명이 외출하는 것이 너무 불편했기 때문에 하예진은 늘 그를 걱정했다.“내 두 눈으로 네가 멀쩡한 모습을 보고야 말겠어. 네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해야 내가 시름 놓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저는 정말 괜찮아요. 경호원들에게 물어보면 되잖아요. 우린 다 괜찮아요. 동명 씨가 외출하기 불편하실 텐데 너무 멀리 오면 안 돼요.”노동명은 기어코 가겠다고 고집했다.“네가 보고 싶어서 그래. 너무너무 보고 싶어. 네가 괜찮은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그래.”하예진은 반박하지 못했다.“그럼 조심히 오세요. 만약 몸이 불편하면 고집하지 마시고. 동명 씨, 우리는 각자가 서로를 위해서 자신의 건강을 잘 챙겨야 해요. 아시겠죠?”노동명은 부드러운 어조로 나지막이 대답했다.“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몸이 불편하면 외출하지도 않아. 걱정하지 마. 난 괜찮아. 오후에 봐.”“네, 오후에 봐요.”하예진은 전화를 끊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생각해보면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큰 행복이다.노동명이 하예진에게 주고 있는 것은 전남편이 줄 수 없는 것들이었다.어쩌면, 노동명이 그녀에 대한 사랑이 진정한 사랑일지도 모른다. 주형인도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적 있었겠지만, 나중에 복잡한 일들이 많이 끼는 바람에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하예진이 지금 묵고 있는 호텔은 강성에 있는 전씨 가문의 사업 중 하나이며 전호영이 맡은 부분이다.하예진은 쉽게 전호영을 만날 수 있었다.그녀는 잠을 더 자려고 해도 더는 잠이 오지 않았다.약을 몇 알 먹은 하예진은 이내 두통이 사라지게 되었고 휴대전화를 들고 일어나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호텔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더니 전호영의 사무
게다가 노동명은 하예진 모자한테 진심으로 잘해줬고 그는 우빈이를 자기 자식처럼 여겼다.그녀가 노동명을 거부하고 재혼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단지 재혼하면 다시 불 구덩이에 빠질까 봐 걱정됐고 또한 우빈이가 괴롭힘을 당할까 봐 두려웠다.하지만 노동명은 그녀를 도와 모든 장애물을 제거했다. 노씨 가문은 그녀를 받아들였고 그녀가 노동명과 결혼하는 것을 고대하고 있었다. 우빈이가 괴롭힘을 당하는 것에 대한 걱정은 더더욱 필요가 없었다. 노동명은 친아빠인 주형인보다 우빈이를 더 아끼고 사랑해 주었다.만약 그녀가 다시 결혼한다면 노동명이 가장 적합한 후보일 것이다.“동명 오빠도 언니한테 피해 줄까 봐 두려워서 그러는 거야. 언니한테 피해보다 행복을 주고 싶은 거지. 그러니까 언니가 좀 더 기다려줘. 동명 오빠가 곧 일어설 거라고 난 믿어.”“알아. 그래서 몇 년이 걸리더라도 그 사람을 기다릴 거야. 기다리는 동안 내 사업도 열심히 발전시키는 중이야.”지금의 그녀는 관성의 3대 재벌 가문의 투자, 후원 및 지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이익보다도 그 속에서 얻은 경험은 돈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언니 화이팅! 우리 언니가 최고야. 난 항상 언니가 자랑스러워.”하예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언니가 많이 힘낼게.”“언니, 수다 그만 떨고 얼른 잠 좀 자.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으면 나한테 꼭 알려줘야 해. 안 알려주면 걱정만 할 테지만 알려 주면 적어도 우리가 해결 방법을 같이 생각하고 모두가 같이 부담하면 훨씬 더 편해지잖아.”“그래 알았어.”자매가 통화를 마친 후 하예진은 계속 자려고 했으나 잠이 오질 않았다.그녀는 일어나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뭐 좀 먹으러 나갈 준비를 했다.이 시간에 호텔 1층 뷔페 레스토랑에서 아침 식사를 제공하지 않아 그녀는 밖으로 나가 아침 식사를 하기로 했다.아침을 먹고 호텔로 돌아온 하예진은 여전히 머리가 아파서 캐리어에서 진통제를 꺼냈다. 그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