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갔다 왔다 하기도 불편하고 점심 쉬는 시간도 없어서 안 오겠대요. 회사에 구내식당이 있어서 회사에서 먹겠대요.”전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저녁에 처형이 퇴근해서 오면 적응할만한지, 괴롭히는 사람은 없는지 물어봐봐. 내가 노 대표한테 그 정도는 얘기할 수 있어. 만약 누가 처형을 괴롭히면 노 대표한테 얘기할게.”하예정이 고개를 돌려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이러니까 언니가 태윤 씨를 좋아하죠. 늘 태윤 씨한테 잘하라고 나한테 당부하거든요.”전태윤의 잘생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그녀의 언니 앞에서 늘 잘했다.시간이 넉넉하지 않아 하예정은 점심을 간단히 준비했다. 다행히 전태윤은 맛있게 잘 먹어줬다. 그 모습에 하예정이 속으로 생각했다.‘돼지 내장을 안 먹고 파와 마늘, 고수를 싫어하는 것 말고는 뭘 해줘도 다 잘 먹네.’점심 식사를 마친 후 전태윤은 바로 가지 않았다. 설거지를 마치고 주방에서 나온 하예정은 아직 가지 않은 그를 보더니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태윤 씨, 오후에 출근 안 해도 돼요? 벌써 1시가 넘었어요. 전에는 1시쯤이면 회사로 돌아갔잖아요.”심효진과 조카의 모습이 보이질 않자 하예정이 계속하여 물었다.“우빈이랑 효진이는요?”“효진 씨는 마트에 물건 사러 갔고 우빈이도 따라갔어.”전태윤은 심효진이 두 사람에게 단둘이 있을 시간을 주려고 일부러 피해준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래도 심효진이 김진우와 하예정을 붙여놓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그 생각에 전태윤은 심효진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겼다.“그래요.”하예정이 카운터 앞에 앉았다.“하예정.”전태윤이 머뭇거리다가 그녀를 불렀다. 하예정이 고개를 돌리자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이 입에서 나오질 않았다. 그가 입을 열기 전에 하예정이 걱정스럽게 물었다.“태윤 씨, 무슨 일 있어요?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얘기해요. 내가 도와줄 수도 있잖아요.”전태윤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사실 어려운 일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따지면 있었다. 아내에게 주려고 꽃을
전태윤은 한참 동안 하예정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정말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나가버렸다. 하예정은 그를 부르려다가 포기했다. 얘기하기 싫은 건 아무리 뭐라 해봤자 절대 얘기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얘기하려다가 마는 게 제일 싫어. 시원시원하게 얘기하면 얼마나 좋아?”답답한 전태윤 때문에 하예정은 분통이 터졌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 앞에서 얘기하려다가 마니 머릿속에 온통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을까 그 생각뿐이었다.그런데 2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남자가 꽃다발을 안고 들어왔다.하예정은 넋을 놓고 그를 쳐다보았다. 전태윤이 꽃다발을 안고 들어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눈까지 비비며 다시 한번 확인했다.‘태윤 씨 맞는데? 지금 나한테 꽃을 선물한 거야?’하예정은 가슴이 쿵쾅거렸고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것만 같았다.‘젠장, 왜 이렇게 떨려!’그는 꽃다발을 그녀에게 건넨 게 아니라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그때 좀처럼 들을 수 없었던 전태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꽃가게를 지나가다가 꽃이 예뻐서 샀어. 다른 뜻은 없어.”말을 마친 그는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가게를 나갔다. 그 동작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마치 그 자리에 조금이라도 더 있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말이다.“태윤 씨.”정신을 차린 하예정이 본능적으로 뛰쳐나가 그를 불렀다. 그런데 전태윤이 마치 귀신에게 쫓기듯 황급히 차에 올라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눈앞에서 사라졌다.하예정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가 감탄했다.“뭔 동작이 그렇게나 빨라.”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저도 모르게 지어졌다. 미소가 점점 커지더니 웃음을 터뜨렸다.‘태윤 씨 가끔 참 귀엽단 말이지.’하예정은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와 카운터 앞에 앉았다. 장미꽃을 한참 내려다보던 그녀는 꽃을 들고 중얼거렸다.“가게에 꽃병이 없네.”가게 안을 둘러보던 그녀는 꽃다발을 다시 상 위에 내려놓았다.“예정 누나.”그때 김진우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김진우가 블
“남편이 준 거야. 예쁘지? 정말 너무 예쁜 것 같아.”하예정은 꽃 사진을 여러 장 찍은 후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시 꽃다발을 부둥켜안으며 냄새를 맡았다.“향긋해!”김진우는 그 모습이 너무 신경 쓰였다.“매형이 주신 거구나. 오늘 무슨 날이야? 전에는 누나한테 꽃 선물하는 거 거의 본 적 없는데.”김진우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속에 야유가 가득 차 있었다.하예정은 고개 들고 그에게 대답했다.“부부 사이에 꼭 무슨 날이어야만 꽃 선물 해? 내가 좋다면 남편은 매일 꽃을 보낼 거야. 전에는 내가 돈 아까워서 말렸어. 꽃 한 송이도 그다지 싼 가격은 아니잖아.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꽃 선물할 바엔 맛있는 음식으로 사 오라고 했거든. 그래서 줄곧 안 준 거야.”김진우가 말했다.“그랬구나...”“진우야, 효진이 찾으러 온 거 아니야? 전화 한 번 해봐. 이젠 돌아올 때도 됐어.”“아니, 그냥 지나가다가 한번 들렀어. 누나, 나 그럼 이만 회사 갈게.”“그래.”하예정은 대답을 마친 후 다시 전태윤이 준 꽃다발을 감상했다.김진우는 그녀가 온통 꽃다발에 신경이 쏠리자 기분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더 말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지난번 하예정에게 비즈니스 파티에 함께 가자고 말했다가 거절당한 이후로 하예정은 김진우에게 쌀쌀맞게 대했다. 본인이 유부녀라는 사실을 그에게 거듭 강조하는 듯한 느낌이었다.하지만 하예정과 그녀의 남편은 초고속 결혼이 아니었던가?심효진이 말하길 하예정은 하예진을 안심시키기 위해 초고속 결혼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두 사람은 6개월 기간의 계약서까지 썼고 계약이 끝나면 곧 이혼한다고 했다.설마 하예정이 초고속 결혼한 남편을 사랑하게 된 걸까?김진우는 멍하니 넋을 놓았다.“진우야, 네가 여긴 웬일이야? 출근 안 해?”심효진이 우빈이를 데리고 돌아오는 길에 마침 그와 마주쳤다. 사촌 남동생의 넋 나간 모습에 심효진은 금세 알아챘다.“누나.”김진우는 누나의 부름에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고 애써 실망한 표정을 숨
“정말 별 뜻 없을까? 두 사람 잘해봐. 타이밍 놓치지 말고. 이번엔 제대로 된 결혼식을 치러야 하지 않겠어? 나 엄청 기대하고 있어.”심효진이 장난치듯 말했다.“너 너무 멀리 갔다.”“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하하. 예정아, 나 진우랑 커피 마시러 가기로 했어. 너 뭐 마실래? 이따가 포장해올게.”하예정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그럼 밀크티 한 잔 부탁할게.”“알았어.”심효진이 흔쾌히 대답했다.“가게 보고 있어. 나 커피 마시러 간다.”“그래, 가봐.”어차피 요즘 서점도 한가하여 평소 이 시간에 그녀는 카운터에 엎드려 낮잠을 자거나 공예품을 만들기가 일쑤였다.심효진이 서점을 나갔고 김진우가 밖에서 그녀를 기다렸다.심효진은 웃음기를 싹 거두고 밖으로 나왔다.“가자.”그녀는 곧게 김진우의 차에 올라탔다.김진우는 사촌 누나의 정색한 얼굴에 가슴이 움찔거렸다.그 시각, 전씨 그룹.전태윤이 기분 좋게 엘리베이터에서 나올 때 조 비서가 편지 한 통을 건넸다.“대표님, 소 이사님께서 이 편지를 친히 대표님께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모님에 관련된 내용이라고 합니다.”이 회사에서 대표님이 결혼한 소식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는데 행운스럽게도 조 비서가 그중 한 명이었다.전태윤은 편지를 받고 아무 말 없이 그의 대표 사무실로 걸어갔다.그는 검은색 회전의자에 앉아 편지봉투를 열고 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냈다. 익명의 편지였고 내용도 매우 간단했다. 성소현이 그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하예정이 그녀의 배후에서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라고 했다.전태윤은 곧바로 소정남에게 전화했다.가십거리에 유난히 관심을 보이는 소정남은 상사가 전화 오기만을 기다렸다.“이 편지 누가 썼어?”소정남은 하예정과 관련된 일이라면 누가 편지를 썼는지 바로 알 수 있다고 했다.“예정 씨 오빠잖아.”“장모님은 우리 와이프 말고 딸 한 명 더 낳으셨지, 언제 아들 한 명 더 낳았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소정남이 싱글벙글 웃었다.“명의상 하씨 집안
전태윤은 하씨 가문의 추악한 인간들을 길바닥에 나앉게 할 작정이었다.소정남이 웃으며 말했다.“단번에 목을 확 졸라매면 너무 재미없잖아.”전태윤의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이런 인간들을 상대할 땐 조급할 거 없어. 천천히 궁지로 몰아넣어야 해. 본인들이 가졌던 모든 걸 하나둘씩 잃게 하는 거야. 아등바등 지키고 싶지만 눈 뜨고 잃어가는 느낌이야말로 가장 잔인하지.”소정남도 이번에 조금 느슨해진 걸 인정했다.그는 단숨에 하씨 집안 인간쓰레기들을 처리하고 싶지 않았다.“그래도 걱정 마, 태윤아. 최종 결과는 분명 만족할 테니까. 하지문 씨는 이미 회사에서 해고됐어. 그 당시 실검이 워낙 핫해서 하지문 씨 직장 평판도 나빠졌을 거야. 다시 취직하긴 힘들 것 같아.”하지문이 완전히 직업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자 전태윤의 안색이 그제야 조금 밝아졌다.“이번 일은 성소현 씨한테도 고마워해야 해. 성소현 씨가 본인 오빠를 시켜서 하지문 씨를 해고했대. 성소현 씨는 예진 씨한테 참 잘해줘. 안 그래?”전태윤이 코웃음 쳤다.하예정이 세상 물정 모르고 갖은 방법으로 성소현이 전태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도와줬으니 그녀도 하예정을 잘해줄 수밖에 없다.하예정은 정작 성소현이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전태윤이란 걸 알고 있을까?여기까지 생각한 전태윤은 문득 말문이 막혔다.성소현이 만약 그가 하예정의 남편이란 걸 알면서도 여전히 하예정에게 잘해주고 그녀를 지켜준다면 그땐 전태윤도 더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성소현은 진심으로 하예정을 친구로 여긴다고 믿을 것이다.전태윤은 또다시 금반지를 꺼내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꼈다.하예정의 가게로 갔을 때 그는 금반지를 뺐다.“아 참, 하지문 씨가 우리 전씨 그룹에 들어오고 싶어서 인사팀에 연락했대. 본인이 아란 전자회사에서 수년간 근무했고 밑바닥부터 갈고 닦아 임원 층까지 올라온 덕에 업무 경력도 풍부할뿐더러 성씨 그룹의 일부 동향도 알고 있대.”하지문은 자신이 전씨 그룹을 위해 성씨 그룹과 맞서 싸우겠다고 말할
커피숍.심효진은 구석진 자리를 골라 앉았다.김진우도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뭐 마실래, 진우야?”“아무거나. 누나 뭐 마실래? 난 누나랑 같은 거로 할게.”심효진이 종업원에게 말했다.“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주세요.”“누나, 아메리카노 맛없어.”심효진이 힐긋 노려보자 김진우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아메리카노 좋지.”두 사람이 주문한 커피가 올라온 후 심효진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진우야, 너 예정이 좋아하지?”김진우가 흠칫 놀라더니 심효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누나...”“솔직하게 대답해!”심효진이 명령 조로 쏘아붙였다.이에 김진우의 두 볼이 점점 더 빨개졌다.그는 속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누나, 그게 말이야... 맞아. 나 예정 누나 좋아해.”“언제부터였어?”김진우가 나지막이 대답했다.“나도 잘 모르겠어. 아마 14살쯤 사랑에 눈뜨기 시작했을 때였을 수도 있고, 17, 18살 때였을 수도 있어.”심효진의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그렇게나 오랫동안 짝사랑해왔단 말이야?”‘녀석, 꽤 오래 숨겼네.’심효진과 하예정은 아예 모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줄곧 김진우를 동생으로만 여겼다. 김진우는 그들보다 세 살 어렸으니까.김진우의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진우야, 그 마음 접는 게 좋을 거야. 예정이는 널 좋아할 리 없어. 줄곧 너를 동생으로만 여겨왔어. 전에는 솔로라서 괜찮았지만 이젠 결혼까지 했어...”“누나, 예정 누나랑 남편분 계약 결혼이라고 하지 않았어? 6개월 뒤에 이혼하기로 했잖아.”심효진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그 두 사람 무슨 이유로 결혼했든 예정이는 이젠 유부녀야, 누군가의 아내라고. 너 허튼 생각 하지 마. 내연남이라도 될 셈이야 뭐야?”김진우는 썩 달갑지 않았다.“내가 먼저 예정이 누나 알았어.”“사랑은 선착순이 아니야. 지난번에 예정이가 너 밥 사줄 때, 네가 좋아하는 음식이 예정이 앞에 있어서 걔가 너한테 딱 한 번 집어줬잖아. 예정이 남편이 그걸 보고 오해해서 두 사람
“네 누나니까 이렇게 불러내서 말하는 거잖아. 설사 예정이가 널 좋아한다고 해도 너희 두 사람 내가 허락 못 해.”“왜?”“네 가족 때문이지. 고모가 어떤 사람인지 나 누구보다 잘 알아. 네가 예정이 좋아하는 거 너희 엄마가 알면 계속 친절하게 예정이를 대할 것 같아? 갖은 수단으로 너희 두 사람 갈라놓을 거야. 예정이한테 더 한 짓도 꾸밀 수 있어. 고모는 상류층에서 20여 년간 지내면서 일찌감치 안하무인 격이 되었어. 넌 고모의 유일한 아들이라 고모의 희망이자 김씨 집안에서 내정된 후계자야. 너한테 기대가 엄청 클 거라고, 틀림없이 재벌 가문과 정략결혼을 맺어줄 거야. 예정이도 엄청 훌륭하지. 하지만 출신이 가장 큰 약점이야. 고모는 날 봐서 예정이를 조카처럼 예뻐하셔. 일단 네가 연루되는 날엔 누구보다 매정하게 변할 거야. 예정인 절대 고모가 바라는 신붓감이 아니야.”심효진의 말은 예리한 칼날처럼 김진우의 정곡을 찔렀다.“진우야, 네가 예정이를 좋아하는 건 걔한테 아무런 도움이 못 돼. 재앙만 안겨줄 뿐이야. 난 너의 사촌 누나야, 네가 사랑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걸 못 보겠어. 예정이도 내 단짝이야. 소중한 친구가 내 가족에게 상처받는 것도 싫어. 그러니까 네가 내려놔. 예정이는 너랑 안 어울려. 널 사랑할 리도 없고. 두 사람 알고 지낸 지 십몇 년째야. 걔는 나랑 함께 네가 커가는 걸 지켜봤단 말이야. 널 동생으로만 생각해. 누나가 어떻게 동생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느끼겠어? 너 마음 안 접으면 이대로 가다가 결국 상처받는 건 너 자신뿐이야.”김진우의 낯빛이 더욱 창백해졌다.그의 생각은 아주 단순했다. 하예정을 무척 사랑하고 엄마도 그녀를 엄청 좋아하는 것 같아 보였을 뿐 더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예정이는 예진 언니 집에서 나오기 위해 결혼을 서둘렀어. 예진 언니가 줄곧 예정이를 걱정했거든. 그래서 예정이도 언니를 안심시키느라고 전태윤 씨랑 초고속 결혼을 한 거야. 예진 언니는 아마 두 사람이 정말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줄로 알 거
심효진은 굳은 표정으로 진지하게 물었다.“너 그럼 예정이랑 태윤 씨 갈라놓을 작정이야? 김진우, 누나는 너 얕보고 싶지 않아!”김진우는 괴로운 얼굴로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그는 좀처럼 이 감정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다만 하예정에게 상처 주는 일도 차마 할 수 없었다.심효진은 사촌 동생을 바라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진우야, 누난 이미 충분히 얘기한 것 같아. 일단 마음 좀 가라앉히고 누나 가게에 가지 않도록 잘 단속해.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져. 시간이 다 해결해줄 거야.”말을 마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커피는 내가 살게. 이젠 가게로 돌아가야 해. 너도 얼른 회사 가. 지금 한창 배우는 단계라 누구보다 열심히 해야지. 너희 김씨 집안에 너만 있는 게 아니야. 방심하다가 네 몫까지 다 뺏기는 수가 있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심효진은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김진우는 자리에 앉은 채로 멍하니 넋을 놓아버렸다.애초에 하예정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는 고백할 용기가 없어 딴 사람에게 기회를 빼앗겨버렸다. 심효진이 가게로 돌아오자 우빈이가 잠에서 깼다.하예정은 공예품을 만들고 있었고 우빈은 옆에 앉아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효진은 묵묵히 친구를 바라봤다.예정은 얼굴도 예쁘장한 데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전념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진우가 좋아할 만했네.’“효진아, 왜 그렇게 보고 있어? 나한테 푹 빠진 거야?”심효진이 웃으며 대답했다.“내가 남자면 무조건 널 좋아했을 거야. 예정이 너 엄청 매력적인 거 모르지?”“매력은 무슨, 결혼 전엔 제대로 된 남자친구도 못 사귀어봤어.”“그건 네가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잖아.”심효진이 의자를 빼내고 카운터 앞에 앉았다.“요즘 온라인 스토어 장사 잘 되나 봐. 매일 한가할 때마다 공예품 만드는 걸 보니.”“태윤 씨랑 태윤 씨 남동생이 홍보해줬거든. 회사 직원이 많다 보니 주문량도 엄청 많더라고. 그리고 소현 씨도 홍보해줬어. 그쪽 업계에는 전부 돈
전현민도 벙글벙글 웃으면서 말했다.“그래, 이건 세상에 둘도 없는 경사야. 우리는 기뻐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다. 이진아, 이미 이르지 않으니 어서 운초랑 들어가 절차부터 밟아. 직원들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간다.”부모님의 재촉을 받은 전이진은 여운초의 손을 잡고 어머니 손으로부터 가족관계등록부와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아서 구청 안으로 걸어갔다.명해은 부부는 돌아가지 않고 밖에 서서 두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전현민은 아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이러고 있으니 32년 전에 우리 둘이 이곳에 와서 결혼 증명서를 받던 날이 생각나네. 마치 어제 발생한 일과 같은데, 벌써 우리 큰아들이 이곳에 오다니... 세월이 참 빠르긴 빨라. 우리도 늙을 때가 되긴 됐나 보네.”그는 아내의 손을 잡으면서 말을 이었다.“난 당신과 백년해로하겠다고 약속했었지.”명해은도 감격해서 말했다.“그러게요,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이 딱 맞아요. 난 아직도 자신이 18살인가 하는데 우리 큰아들이 벌써 서른이네요. 우린 정말 늙었나 봐요.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가 없네요.”“당신은 조금도 안 늙었어. 내 눈에는 당신이 관음보살과 같이 해마다 18살이야.”명해은은 몸 관리를 잘해서 전이진과 함께 나가면 모르는 사람들이 두 사람을 남매로 착각할 정도였다.전현민도 몸 관리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젊은 시절에 전씨 가문의 사업에 몰두했기에 심신이 많이 상해서 귀밑머리가 희끗희끗 해졌다.은퇴한 후,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몇 번 염색은 했었지만, 그래도 아내와 같이 서면 아내보다 10살은 더 많아 보였다. 사실, 두 내외는 불과 한 살 차였다. 명해은은 남편의 칭찬에 웃음보를 터뜨렸다.“나도 해마다 18살이 되고 싶지만 그렇게 안 되네요. 내가 아무리 몸 관리를 잘한다 해도 늙기 마련인걸요.”“내가 당신과 함께 늙어 갈 테니 두려워하지 마. 내가 당신보다 훨씬 늙어 보여.”명해은은 웃으면서 말했다.“전 두려울 것 없어요. 당신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하늘이 무너
여운초도 더는 사양하지 않았다.그녀는 다만 전이진을 대신하여 은행카드만 보관할 뿐일 것이었다. 그가 돈 쓰는 것을 제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녀도 그의 돈을 쓸 일이 없을 테였다.전이진은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고 나서 다시 그녀를 보면서 벙글벙글 웃었다.보면 볼수록 사랑스럽기만 했다.“왜 계속 날 보면서 웃어요?”“좋으니까. 운초 씨, 나 지금 너무 좋아. 그냥 웃고 싶은 걸 어떻게 참아?”이렇게 대답하면서도 그는 또 웃었다.그러는 전이진을 지켜보는 여운초도 참지 못해 웃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둘이서 한참 동안 알콩달콩한 후 전이진이 시계를 보니 어머니가 도착할 시간이 다 되었다. 그는 약혼녀를 보면서 말했다.“운초 씨, 엄마가 곧 도착할 것 같으니 우리 지금 출발해. 우리가 구청에 도착하면 아마 엄마도 도착하실 거야.”그는 꽃집에 가서 장미꽃 한 다발을 사야 했다.여운초가 불시에 결혼 신고하자는 바람에 그가 아직 준비는 못 했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서둘러야 했다.꽃다발, 다이아몬드 반지 둘 중 하나도 빠뜨리지 않을 것이었다.그녀는 자신이 한평생 소중히 여길 여자임으로 절대로 서운하게 할 수 없었다.“그래요.”그가 일어나면서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자, 여운초도 편안하게 자신의 손을 그의 커다란 손바닥에 올려놓은 채 그에게 이끌려 일어섰다.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자고로‘그대의 손만 잡고 이생의 끝까지 살아간다.’라고 했다.그녀는 전이진과 백년해로하고 평생 금실이 좋기를 원했다. 시부모님처럼 애들이 부러울 정도로 몇십 년 동안의 결혼생활을 첫 사람처럼 달콤하게 지내길 원했다.여운초는 저의 집에 있는 차를 안 타고 전이진이 운전하는 차를 타기로 했다.그녀에게는 운전면허증이 없었다. 그녀가 16살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기에 운전면허를 딸수 없었던 것이었다.집에 있는 운전기사는 전이진이 그녀에게 보낸 경호원인데 그녀를 보호할 수 있을 뿐만아니라 운전도 해줄 수 있었다.20분 뒤.구청 입구명해
“운초씨, 잠깐만 기다려. 내가 엄마한테 당장 전화할게.”전이진은 약혼녀의 볼에 입을 맞춘 후, 바로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명해은은 전화벨이 한참 울린 뒤에야 전화를 받았다.“엄마, 오늘 시간 돼요?”“이제 방금 일어났어. 오늘은 별일 없어서 시간이 남아돌아. 왜? 아들, 엄마 도움이 필요해?”명해은이 잠기가 채 가셔지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아들이 다 크니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점점 적어졌다.애들한테 더는 필요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명해은은 너무 일찍 맛봤다.“저와 운초 씨가 점심 전에 혼인신고를 마치려 하는데 제가 가족관계등록부를 안 가져왔어요. 엄마 혹은 아버지가 지금 저한테 가져다줄 수 있어요? 혹은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보내줘도 되고요. 제가 돌아가서 가져오면 시간이 지체되어 아마도 오후나 돼야 절차를 밟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오후까지 못 기다리겠어요.”가족관계등록부만 손에 가지고 있다면, 전이진은 지금이라도 여운초를 데리고 혼인 신고하러 갔을 테였다.진정으로 여운초가 좋아진 그 시각부터 그는 그녀와 결혼하기를 원했다.하지만 그때의 여운초는 앞을 보지 못했기에 훌륭한 전이진을 앞두고 자비감에 모대기었다. 전이진의 사랑마저 그녀는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받아들인 것이었다.그녀는 전이진이 자신의 눈을 고쳐주기 위해 정 선생을 찾으러 여러 번 예진 리조트를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남은 인생을 그와 함께하기로 하고 약혼을 한 것이었다.그래도 그녀는 진정으로 그를 볼 수 있을 때 가서 결혼하기를 원했다.그녀는 자기와 결혼할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알고 싶다고 했다.전이진이 곧 시어머니로 될 사람에게 하는 말을 들은 여운초의 얼굴은 또다시 붉게 물들었다.‘이 사람 뭐가 그리 급해...’이 반가운 소식을 들은 명해은은 순식간에 잠기가 싹 사라진 듯했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시간이 있고말고, 엄마 시간은 남아돌고 있으니 금방 가져다줄게. 넌 지금 여씨 저택에 있니? 아니면 회사에 있니?” “저는 지금
그는 자신의 사람 보는 안목을 믿을 뿐만 아니라, 할머니도 믿었다. 그는 그녀와 긴 시간을 함께하면서 그녀의 인품, 일하는 스타일 등을 천천히 알게 되었다.“혼인신고를 하고 나면 한평생 같이 살아야 해요. 나는 이혼 따위는 할 마음이 없으니 잘 생각해서 결정해요. 당신처럼 훌륭한 남자는 앞으로도 나보다 더 좋고, 당신한테 더 잘 어울리는 여자를 만날 수도 있어요. 그때 가서 이 결혼은 할머니가 강요하셔서 한 거라고 하면서 그 여자야말로 당신의 진정한 사랑이니 어쩌니 해도 난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 거예요.”전이진은 손가락으로 가볍게 그녀의 코끝을 살짝 건드리면서 말했다.“넌 아직도 바깥사람들이 우리 전씨 집안 남자들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몰라? 전씨 집안 남자들은 모두 아내한테 일편단심이야. 전씨 집안의 가훈에는 결혼 후 한평생 가정에 충실해야 하고 혼인에 충실해야 하며 바람을 피워선 안 되고 이혼도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되어 있어.”“누구든 가훈을 어기는 즉시, 전씨 가문에서 쫓겨나서 더는 전씨 일가와 상관없는 사람으로 돼버려.”“그리고 내가 당신과 결혼하는 것은 할머니가 당신을 선택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야. 그렇지 않다면 할머니가 강요하셔도 소용없어.”전이진은 핸드폰을 꺼내 들고 전화를 걸었다.“누구한테 전화하려고요?”여운초는 그가 할머니에게 전화 드리려나 싶어서 한마디 물었다.“내가 가족관계등록부를 몸에 지니고 다니진 않아. 우리가 혼인신고를 하려면 내 가족관계등록부도 필요할 거 아니야. 내가 엄마한테 전화해서 급히 가져다 달라 하면 우리가 점심 전에 혼인신고 절차를 다 끝낼 수 있을 거 같아.”결혼 증명서를 받고 나면 그들은 합법적인 부부가 될 것이었다.전이진은 여태 자기가 한시 급히 여운초랑 결혼하여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싶어 한다는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애초에 여운초는 시력이 회복되어 그를 볼 수 있어야만 결혼할 수 있다고 말했다.그래서 그는 이날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왔다. 끝내 그녀의 눈
게다가 그의 아버지는 또 법을 어기는 일까지 했다.비록 모든 불법적인 장사는 이미 압류당했고 관련된 금액도 그다지 큰 편은 아니었지만, 이로 인해 여씨 그룹의 이미지가 크게 훼손되어 주가가 폭락하고 매출액이 바닥을 쳤으며 여씨 그룹의 재산도 많이 수축했다.큰누나가 여씨 그룹을 이어받은 후, 한동호 형님과 힘을 합쳐 천신만고 끝에 여씨 그룹을 이끌고 이 힘든 고비를 넘긴 셈이었다.이런 얘기를 큰누나는 그한테 한 적 없었지만, 그는 한동호 형님과 매형을 통해서 알게되었다.비로소 그는 큰누나의 홀가분해 보이는 말투 속에 얼마나 많은 쓰라림이 숨겨져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비록 큰누나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감방으로 보내긴 했지만, 그것은 그의 부모님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비록 큰누나의 대의멸친을 받아들이긴 힘들었지만, 이해만은 할 수 있었다.현재 여씨 그룹은 큰누나가 통제하고 있지만, 큰누나가 그에게 한 말이 있었다. 자기가 가져야 할 재산은 한 푼도 양보하지 않지만, 자기가 가지지 말아야 할 재산은 한 푼도 탐하지 않는다고. 그가 물려받아야 할 재산은 언젠가는 돌려줄 것이었다.설사 둘째 누나가 소송을 일으킨다 해도 그와 둘째 누나 단둘의 소송일 것이었다.큰누나는 단지 여천우 부모님에게 속하는 재산만 그에게 돌려줄 것이었다. 그의 부모님에게 자식이라곤 그와 둘째 누나밖에 없으니 설사 둘째 누나가 소송을 일으킨다 해도 상대는 그일 수밖에 없었다.“누나, 나 먼저 수업 들으러 들게. 수업이 끝나는 대로 휴가 내서 돌아갈 테니 그때 천천히 얘기해.”“알았어, 얼른 가서 수업 봐.”동생과의 통화를 마친 여운초는 동생의 말대로 그의 부모님의 물건들을 그의 방으로 옮겨 놓았다.여운별 방의 물건은 여운초가 기분을 봐서 언제든 연락하여 가져가라고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앞으로 그와 여운별은 남남일 것이었다.“아가씨, 진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 오셨습니다.”여운초는 알았다고 하면서 핸드폰을 손에
“어쨌든 우리 여씨 가문의 재산은 운별 누나가 망치게 해서는 안 돼요. 그리고 우리 두 큰고모도 틀림없이 운별 누나를 달래서 모든 재산을 빼앗으려 할거에요. 운별 누나는 사람 말을 너무 잘 믿어서 조금만 달래면 뭐든지 나누어 줄 거에요.”여천우가 이렇게 한 이유는 단지 여씨 가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일 뿐이다.추미자 부부가 그들의 명의로 된 재산을 여천우에게 물려주게 하고 또 여천우는 그 재산들을 모두 여운초에 돌려줄 셈이다. 여천우는 여운초의 사람 됨됨이를 믿었다.여천우는 여운초가 그녀의 재산이 아니면 탐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지금의 여운초도 그의 재산을 탐낼 필요가 없었다. 약혼자 전이진의 집에 재산이 엄청 많아서 전씨 가문의 둘째 사모님인 여운초는 여천우의 그깟 재산을 손에 넣지 않을 것이다.“누나, 우리 부모님 명의로 된 합법적 재산이 얼마나 남았어?”여천우는 부모님이 이전에 하신 부분적인 사업들이 법에 어긋난 사업들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불법적인 사업들은 이미 차압되었고 따라서 그 수입도 이미 몰수되었다. 그가 물려받을 수 있는 것은 단지 부모님의 합법적인 소득뿐이었다.여운초가 대답했다.“불법적인 사업과 모든 수익은 차압되거나 몰수됐어. 여씨 가문 기업은 법에 어긋난 사업을 하지 않았어. 다행히 네 아버지께서 여씨 그룹을 불법적인 사업에 손을 대지 않게 했지. 지금 여씨 그룹이 하는 사업은 모두 합법적인 사업이야.”“여씨 그룹의 주식은 우리 아버지가 대부분을 차지하셨어.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우리 아버지께 대부분 주식을 나눠주셨지. 게다가 아버지 본인도 주식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아버지는 주식의 절반을 차지하고 계셨거든. 그리고 나머지는 너의 아버지와 다른 소액주주들의 것으로 되었지. 현재 여씨 가문 주식 가격에 네 부모님 명의로 된 부동산 몇 채를 합치면 마침 200억 원 조금 넘을 거야.”여천우 친아버지 여태웅은 20여 년 전 추미자와 함께 친동생을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 범죄 때문에 중형
틀림없이 누군가가 여운초를 건드려 자극했을 것이다.여운초는 오랜 한을 억누르고 있었는데 누군가에 의해 폭발한 게 틀림없었다. 하여 추미자 부부의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을 비우려고 했을 것이다.또 하나, 여운초는 추미자 부부방의 비밀번호를 몰랐다. 심지어 여천우조차도 몰랐다.추미자는 여천우가 여운초의 편을 든다고 많은 일을 여천우에게 알려주지 않았다.여운초도 사실대로 여운별이 일찍 감옥에서 나와 오늘 아침에 여씨 가문의 별장에 쳐들어온 사실을 여천우에게 알려주었다.여천우가 그 사실을 듣더니 한숨을 쉬었다. 알고 보니 사고뭉치였던 여운별이 나와서 사고를 친 것이다.여씨 가문은 또 시끄러워질 것이 뻔했다.여천우는 여운초에 말했다.“우리 부모님 방에 있던 물건들을 전부 내 방에 가져다줘. 그리고 운별 누나 물건은 운별 누나가 가져가게 해. 그리고 운별 누나 방도 깨끗이 치워.”여천우는 그 별장이 여운초의 별장이었기에 여운초가 여운별이 그 별장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으면 여운초를 존중해 주고 싶었다.여천우는 여운별이 예전에 어떻게 여운초를 괴롭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여운별을 도와 여운초에게 사정하지 못했다.여운별이 감옥 안에서 일찍 나온 것도 아마 감옥에서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의 실제 성격을 잘 감추고 있었을 것이다.“그리고 누나, 운별 누나가 소송을 걸어 재산을 나누려고 하면 나에게 알려줘. 재산을 너무 많이 주면 다 써버릴 거야. 아무리 많은 재산일지라도 운별 누나는 분명 다 탕진 할걸. 아무것도 모르면서 성질만 부리면서 돈만 쓰잖아.”여천우는 여씨 그룹을 여운초에게 맡기면 마음 편히 공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말이지 밤새 뛰어와서 여운별을 막고 싶었다.여천우는 두 누나의 인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여운별은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응석받이로 키웠기에 패가망신할 사람이었다.“절대로 운별 누나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면 안 돼. 내가 지금 휴가를 내고 돌아갈게. 감옥으로 가서 우리 부모님을 만나 그들의 명의 아래에 있는 재산을
여미란은 추미자가 살아서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여미란은 마음속 깊이 추미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여씨 가문의 사모님 추미자는 먼저 여미란의 남동생에게 시집간 뒤로 그 남동생을 죽이고 또 여미란의 오빠에게 시집갔지만 지금 그 오빠마저도 감옥으로 들어갔다.여미란의 동생이 죽었다고 해도 그녀의 오빠와 관계가 없을 수 없었다. 물론 그 화근은 역시 추미자였다.여미란의 오빠가 추미자와 정정당당하게 함께 있기 위해 동생을 죽인 것이다.여운초에게 복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여운초는 지금 전씨 가문의 둘째 사모님이었고 전씨 가문이 그녀의 배후에 서 있었기에 여미란 일행은 감히 여운초를 찾아 복수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여미란은 마음속으로 여운초를 수천 번, 수만 번 욕하면서 자신을 달래곤 했다.여운초는 여운별이 여씨 가문을 떠나 어디로 갈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최씨 집안과 김씨 집안이 여운별의 피를 빨아들이도록 내버려 두기로 했다.예전에 여미란 자매의 집에 재산이 많았지만 늘 친정집에서 이득을 보려고 애썼다.이제 최씨와 김씨 집안은 부귀한 생활에 익숙해져 꿈에서라도 부자들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하던 찰나에 여운별이 스스로 찾아와 도움을 청하게 되었기에 그녀의 피를 빨아먹을 수 있는 희망이 생겼다.그때가 되면 여운별은 그녀의 손에 쥐어진 적디적은 재산을 가지고 두 집안에 의해 피를 빨리게 될 것이 뻔했기에 여운초는 곁에서 재미있는 광경을 지켜만 보면 되었다.여운초가 여천우와 말했듯이 여운초는 자신의 재산을 일전 한 푼도 그들에게 주지 않을 것이지만 자신의 재산이 아닌 것은 전부 그들에게 돌려줄 것이다.추미자는 예전에 화려하고 웅장하게 꾸며진 큰 방에서 살았지만 정작 별장 주인인 자신이 가정부와 함께 방을 쓰게 된 기억을 떠올린 여운초는 집사에게 지시했다.“이 방을 깨끗이 청소하세요. 이 방을 다시 새로 꾸밀 거예요.”이 큰 방이 바로 주인의 방이다.여운초는 먼저 금고를 그녀가 지금 사는 방으로 옮기라
정현숙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자 여운별은 자신의 큰고모 여미란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미란이 전화를 받지 여운별이 입을 열었다.“큰고모, 제 물건을 돌려받았어요. 제가 지금 돈이 있으니 고모께서 저에게 아파트 한 채를 찾아 세 들어주시면 좋겠어요. 제가 그곳에 잠시 머물다가 운초에게 소송을 걸어 재산을 많이 분배받으면 그때 큰 별장을 구매할 거예요.”여운별이 그녀의 물건을 가져갔다는 말에 여미란은 바로 물었다.“들어갔어? 들어갔으면 왜 그 집에서 살지 않고. 별장에 살면 얼마나 좋아. 세 들어 살면 돈도 따로 나가야 하는데.”여운별은 한참을 말이 없다가 그제야 말을 이었다.“우리 일단 만나요. 생각처럼 쉽지 않더군요. 제가 지금 차에 기름 넣으러 가야 해요. 그리고 고모 찾으러 갈게요. 둘째 고모와 사촌 오빠들에게 점심에 제가 밥을 사드린다고 전해주세요. 요 이틀 동안 사촌 오빠들 덕분에 잘 지낼 수 있었어요. 제가 성격이 나쁘고 제멋대로지만 배은망덕한 사람은 아니에요. 저는 저에게 잘해주신 사람들을 모두 마음에 담아두거든요.”“지금 제가 좀 초라하긴 하지만 제가 우리 재산을 되찾으면 절대로 고모들께 푸대접하지 않을 거예요. 제가 반드시 고모들을 도와 지난날처럼 부자 생활을 할 수 있게끔 도울 거에요.”그림의 떡은 누구나 다 그릴 수 있었다.여운별도 그림의 떡으로 두 고모를 달래려고 했다.그리고 그녀가 정말 소송에서 이겨 자신의 재산을 가질 수만 있다면 적어도 수백억의 재산을 가질 수 있다고 믿었기에 두 고모의 집안에 돈을 조금 주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두 사촌 오빠들을 도와 일자리를 하나 더 마련해주겠다고 생각했다.여운별은 회사에 관한 일을 잘 몰랐기 때문에 여씨 그룹으로 돌아가면 지인에게 회사 일을 도와달라고 해야 했다.두 고모 댁의 사촌 남매는 항상 그녀에게 잘 대해주었다. 심지어 사촌 남매들이 그녀에게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그녀에게 잘해줄지라도 여씨 그룹을 그들에게 맡기고 싶었다. 누가 뭐라 해도 사촌 형제들은 여씨 그룹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