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윤은 짜증 한번 내질 않았다. 주우빈이 하라는 대로 했고 주우빈에게 새로운 놀이 방법도 가르쳐줬다. 하예정은 저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태윤 씨 나중에 아이가 있으면 엄청 책임감 있는 아빠일 것 같아.’“왜 그래?”하예정이 한곳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걸 발견한 심효진이 가까이 다가왔다. 하예정이 전태윤을 보고 있는 걸 확인하고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너희 남편이 엄청 멋있어 보이지?”“멋있어 보이는 게 아니라 원래 멋있는 사람이야.”“얼른 덮쳐버려. 우빈이한테 얼마나 인내심 있게 잘하는지 봐봐. 겉으로 보기에는 얼음장처럼 차갑지만 사실 마음은 엄청 다정하고 아이를 좋아하는 남자야. 태윤 씨를 덮쳐서 태윤 씨 닮은 아이를 낳으면 얼마나 좋아.”하예정이 실소를 터뜨렸다.“누가 보면 내가 애를 낳으려고 그러는 줄 알겠어.”그녀는 잠깐 멈칫하다가 나지막이 말했다.“저 사람 차가운 얼굴을 보면 덮쳐도 벗길 용기가 없어.”전태윤 같은 성격의 남자를 유혹한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괜히 섣불리 나섰다가 그냥 뽀뽀만 하다 끝날지도 모른다.심효진이 입을 가리고 웃으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태윤 씨 원래부터 차가운 얼굴이잖아. 아니면 술이나 잔뜩 먹일까?”그 뒤의 장면을 상상하던 하예정이 정신을 가다듬고 솔직하게 말했다.“태윤 씨 방은 나의 금지구역이야. 됐어, 그만 꿈 깨자. 하루하루 되는대로 살지, 뭐.”그러고는 전태윤과 주우빈에게 다가갔다.“이모.”신나게 놀던 주우빈이 고개를 들고 하예정을 불렀다. 하예정은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전태윤에게 말했다.“태윤 씨, 우빈이랑 조금만 더 같이 놀아줘요. 식사 준비하러 갈게요, 난.”전태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럼 아까 나한테 말하지. 나도 요리할 줄 알아.”“그 생각을 못 했네요. 다음에 왔을 때 바쁘면 그때 마음껏 부려 먹을게요.”그녀를 쳐다보는 전태윤의 눈빛이 그윽해졌다.‘마음껏 부려 먹겠다는 건 나한테 마음이 움직였다는 건가? 나랑 쭉
“갔다 왔다 하기도 불편하고 점심 쉬는 시간도 없어서 안 오겠대요. 회사에 구내식당이 있어서 회사에서 먹겠대요.”전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저녁에 처형이 퇴근해서 오면 적응할만한지, 괴롭히는 사람은 없는지 물어봐봐. 내가 노 대표한테 그 정도는 얘기할 수 있어. 만약 누가 처형을 괴롭히면 노 대표한테 얘기할게.”하예정이 고개를 돌려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이러니까 언니가 태윤 씨를 좋아하죠. 늘 태윤 씨한테 잘하라고 나한테 당부하거든요.”전태윤의 잘생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그녀의 언니 앞에서 늘 잘했다.시간이 넉넉하지 않아 하예정은 점심을 간단히 준비했다. 다행히 전태윤은 맛있게 잘 먹어줬다. 그 모습에 하예정이 속으로 생각했다.‘돼지 내장을 안 먹고 파와 마늘, 고수를 싫어하는 것 말고는 뭘 해줘도 다 잘 먹네.’점심 식사를 마친 후 전태윤은 바로 가지 않았다. 설거지를 마치고 주방에서 나온 하예정은 아직 가지 않은 그를 보더니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태윤 씨, 오후에 출근 안 해도 돼요? 벌써 1시가 넘었어요. 전에는 1시쯤이면 회사로 돌아갔잖아요.”심효진과 조카의 모습이 보이질 않자 하예정이 계속하여 물었다.“우빈이랑 효진이는요?”“효진 씨는 마트에 물건 사러 갔고 우빈이도 따라갔어.”전태윤은 심효진이 두 사람에게 단둘이 있을 시간을 주려고 일부러 피해준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래도 심효진이 김진우와 하예정을 붙여놓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그 생각에 전태윤은 심효진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겼다.“그래요.”하예정이 카운터 앞에 앉았다.“하예정.”전태윤이 머뭇거리다가 그녀를 불렀다. 하예정이 고개를 돌리자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이 입에서 나오질 않았다. 그가 입을 열기 전에 하예정이 걱정스럽게 물었다.“태윤 씨, 무슨 일 있어요?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얘기해요. 내가 도와줄 수도 있잖아요.”전태윤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사실 어려운 일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따지면 있었다. 아내에게 주려고 꽃을
전태윤은 한참 동안 하예정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정말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나가버렸다. 하예정은 그를 부르려다가 포기했다. 얘기하기 싫은 건 아무리 뭐라 해봤자 절대 얘기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얘기하려다가 마는 게 제일 싫어. 시원시원하게 얘기하면 얼마나 좋아?”답답한 전태윤 때문에 하예정은 분통이 터졌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 앞에서 얘기하려다가 마니 머릿속에 온통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을까 그 생각뿐이었다.그런데 2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남자가 꽃다발을 안고 들어왔다.하예정은 넋을 놓고 그를 쳐다보았다. 전태윤이 꽃다발을 안고 들어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눈까지 비비며 다시 한번 확인했다.‘태윤 씨 맞는데? 지금 나한테 꽃을 선물한 거야?’하예정은 가슴이 쿵쾅거렸고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것만 같았다.‘젠장, 왜 이렇게 떨려!’그는 꽃다발을 그녀에게 건넨 게 아니라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그때 좀처럼 들을 수 없었던 전태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꽃가게를 지나가다가 꽃이 예뻐서 샀어. 다른 뜻은 없어.”말을 마친 그는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가게를 나갔다. 그 동작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마치 그 자리에 조금이라도 더 있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말이다.“태윤 씨.”정신을 차린 하예정이 본능적으로 뛰쳐나가 그를 불렀다. 그런데 전태윤이 마치 귀신에게 쫓기듯 황급히 차에 올라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눈앞에서 사라졌다.하예정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가 감탄했다.“뭔 동작이 그렇게나 빨라.”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저도 모르게 지어졌다. 미소가 점점 커지더니 웃음을 터뜨렸다.‘태윤 씨 가끔 참 귀엽단 말이지.’하예정은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와 카운터 앞에 앉았다. 장미꽃을 한참 내려다보던 그녀는 꽃을 들고 중얼거렸다.“가게에 꽃병이 없네.”가게 안을 둘러보던 그녀는 꽃다발을 다시 상 위에 내려놓았다.“예정 누나.”그때 김진우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김진우가 블
“남편이 준 거야. 예쁘지? 정말 너무 예쁜 것 같아.”하예정은 꽃 사진을 여러 장 찍은 후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시 꽃다발을 부둥켜안으며 냄새를 맡았다.“향긋해!”김진우는 그 모습이 너무 신경 쓰였다.“매형이 주신 거구나. 오늘 무슨 날이야? 전에는 누나한테 꽃 선물하는 거 거의 본 적 없는데.”김진우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속에 야유가 가득 차 있었다.하예정은 고개 들고 그에게 대답했다.“부부 사이에 꼭 무슨 날이어야만 꽃 선물 해? 내가 좋다면 남편은 매일 꽃을 보낼 거야. 전에는 내가 돈 아까워서 말렸어. 꽃 한 송이도 그다지 싼 가격은 아니잖아.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꽃 선물할 바엔 맛있는 음식으로 사 오라고 했거든. 그래서 줄곧 안 준 거야.”김진우가 말했다.“그랬구나...”“진우야, 효진이 찾으러 온 거 아니야? 전화 한 번 해봐. 이젠 돌아올 때도 됐어.”“아니, 그냥 지나가다가 한번 들렀어. 누나, 나 그럼 이만 회사 갈게.”“그래.”하예정은 대답을 마친 후 다시 전태윤이 준 꽃다발을 감상했다.김진우는 그녀가 온통 꽃다발에 신경이 쏠리자 기분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더 말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지난번 하예정에게 비즈니스 파티에 함께 가자고 말했다가 거절당한 이후로 하예정은 김진우에게 쌀쌀맞게 대했다. 본인이 유부녀라는 사실을 그에게 거듭 강조하는 듯한 느낌이었다.하지만 하예정과 그녀의 남편은 초고속 결혼이 아니었던가?심효진이 말하길 하예정은 하예진을 안심시키기 위해 초고속 결혼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두 사람은 6개월 기간의 계약서까지 썼고 계약이 끝나면 곧 이혼한다고 했다.설마 하예정이 초고속 결혼한 남편을 사랑하게 된 걸까?김진우는 멍하니 넋을 놓았다.“진우야, 네가 여긴 웬일이야? 출근 안 해?”심효진이 우빈이를 데리고 돌아오는 길에 마침 그와 마주쳤다. 사촌 남동생의 넋 나간 모습에 심효진은 금세 알아챘다.“누나.”김진우는 누나의 부름에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고 애써 실망한 표정을 숨
“정말 별 뜻 없을까? 두 사람 잘해봐. 타이밍 놓치지 말고. 이번엔 제대로 된 결혼식을 치러야 하지 않겠어? 나 엄청 기대하고 있어.”심효진이 장난치듯 말했다.“너 너무 멀리 갔다.”“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하하. 예정아, 나 진우랑 커피 마시러 가기로 했어. 너 뭐 마실래? 이따가 포장해올게.”하예정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그럼 밀크티 한 잔 부탁할게.”“알았어.”심효진이 흔쾌히 대답했다.“가게 보고 있어. 나 커피 마시러 간다.”“그래, 가봐.”어차피 요즘 서점도 한가하여 평소 이 시간에 그녀는 카운터에 엎드려 낮잠을 자거나 공예품을 만들기가 일쑤였다.심효진이 서점을 나갔고 김진우가 밖에서 그녀를 기다렸다.심효진은 웃음기를 싹 거두고 밖으로 나왔다.“가자.”그녀는 곧게 김진우의 차에 올라탔다.김진우는 사촌 누나의 정색한 얼굴에 가슴이 움찔거렸다.그 시각, 전씨 그룹.전태윤이 기분 좋게 엘리베이터에서 나올 때 조 비서가 편지 한 통을 건넸다.“대표님, 소 이사님께서 이 편지를 친히 대표님께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모님에 관련된 내용이라고 합니다.”이 회사에서 대표님이 결혼한 소식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는데 행운스럽게도 조 비서가 그중 한 명이었다.전태윤은 편지를 받고 아무 말 없이 그의 대표 사무실로 걸어갔다.그는 검은색 회전의자에 앉아 편지봉투를 열고 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냈다. 익명의 편지였고 내용도 매우 간단했다. 성소현이 그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하예정이 그녀의 배후에서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라고 했다.전태윤은 곧바로 소정남에게 전화했다.가십거리에 유난히 관심을 보이는 소정남은 상사가 전화 오기만을 기다렸다.“이 편지 누가 썼어?”소정남은 하예정과 관련된 일이라면 누가 편지를 썼는지 바로 알 수 있다고 했다.“예정 씨 오빠잖아.”“장모님은 우리 와이프 말고 딸 한 명 더 낳으셨지, 언제 아들 한 명 더 낳았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소정남이 싱글벙글 웃었다.“명의상 하씨 집안
전태윤은 하씨 가문의 추악한 인간들을 길바닥에 나앉게 할 작정이었다.소정남이 웃으며 말했다.“단번에 목을 확 졸라매면 너무 재미없잖아.”전태윤의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이런 인간들을 상대할 땐 조급할 거 없어. 천천히 궁지로 몰아넣어야 해. 본인들이 가졌던 모든 걸 하나둘씩 잃게 하는 거야. 아등바등 지키고 싶지만 눈 뜨고 잃어가는 느낌이야말로 가장 잔인하지.”소정남도 이번에 조금 느슨해진 걸 인정했다.그는 단숨에 하씨 집안 인간쓰레기들을 처리하고 싶지 않았다.“그래도 걱정 마, 태윤아. 최종 결과는 분명 만족할 테니까. 하지문 씨는 이미 회사에서 해고됐어. 그 당시 실검이 워낙 핫해서 하지문 씨 직장 평판도 나빠졌을 거야. 다시 취직하긴 힘들 것 같아.”하지문이 완전히 직업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자 전태윤의 안색이 그제야 조금 밝아졌다.“이번 일은 성소현 씨한테도 고마워해야 해. 성소현 씨가 본인 오빠를 시켜서 하지문 씨를 해고했대. 성소현 씨는 예진 씨한테 참 잘해줘. 안 그래?”전태윤이 코웃음 쳤다.하예정이 세상 물정 모르고 갖은 방법으로 성소현이 전태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도와줬으니 그녀도 하예정을 잘해줄 수밖에 없다.하예정은 정작 성소현이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전태윤이란 걸 알고 있을까?여기까지 생각한 전태윤은 문득 말문이 막혔다.성소현이 만약 그가 하예정의 남편이란 걸 알면서도 여전히 하예정에게 잘해주고 그녀를 지켜준다면 그땐 전태윤도 더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성소현은 진심으로 하예정을 친구로 여긴다고 믿을 것이다.전태윤은 또다시 금반지를 꺼내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꼈다.하예정의 가게로 갔을 때 그는 금반지를 뺐다.“아 참, 하지문 씨가 우리 전씨 그룹에 들어오고 싶어서 인사팀에 연락했대. 본인이 아란 전자회사에서 수년간 근무했고 밑바닥부터 갈고 닦아 임원 층까지 올라온 덕에 업무 경력도 풍부할뿐더러 성씨 그룹의 일부 동향도 알고 있대.”하지문은 자신이 전씨 그룹을 위해 성씨 그룹과 맞서 싸우겠다고 말할
커피숍.심효진은 구석진 자리를 골라 앉았다.김진우도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뭐 마실래, 진우야?”“아무거나. 누나 뭐 마실래? 난 누나랑 같은 거로 할게.”심효진이 종업원에게 말했다.“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주세요.”“누나, 아메리카노 맛없어.”심효진이 힐긋 노려보자 김진우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아메리카노 좋지.”두 사람이 주문한 커피가 올라온 후 심효진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진우야, 너 예정이 좋아하지?”김진우가 흠칫 놀라더니 심효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누나...”“솔직하게 대답해!”심효진이 명령 조로 쏘아붙였다.이에 김진우의 두 볼이 점점 더 빨개졌다.그는 속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누나, 그게 말이야... 맞아. 나 예정 누나 좋아해.”“언제부터였어?”김진우가 나지막이 대답했다.“나도 잘 모르겠어. 아마 14살쯤 사랑에 눈뜨기 시작했을 때였을 수도 있고, 17, 18살 때였을 수도 있어.”심효진의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그렇게나 오랫동안 짝사랑해왔단 말이야?”‘녀석, 꽤 오래 숨겼네.’심효진과 하예정은 아예 모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줄곧 김진우를 동생으로만 여겼다. 김진우는 그들보다 세 살 어렸으니까.김진우의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진우야, 그 마음 접는 게 좋을 거야. 예정이는 널 좋아할 리 없어. 줄곧 너를 동생으로만 여겨왔어. 전에는 솔로라서 괜찮았지만 이젠 결혼까지 했어...”“누나, 예정 누나랑 남편분 계약 결혼이라고 하지 않았어? 6개월 뒤에 이혼하기로 했잖아.”심효진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그 두 사람 무슨 이유로 결혼했든 예정이는 이젠 유부녀야, 누군가의 아내라고. 너 허튼 생각 하지 마. 내연남이라도 될 셈이야 뭐야?”김진우는 썩 달갑지 않았다.“내가 먼저 예정이 누나 알았어.”“사랑은 선착순이 아니야. 지난번에 예정이가 너 밥 사줄 때, 네가 좋아하는 음식이 예정이 앞에 있어서 걔가 너한테 딱 한 번 집어줬잖아. 예정이 남편이 그걸 보고 오해해서 두 사람
“네 누나니까 이렇게 불러내서 말하는 거잖아. 설사 예정이가 널 좋아한다고 해도 너희 두 사람 내가 허락 못 해.”“왜?”“네 가족 때문이지. 고모가 어떤 사람인지 나 누구보다 잘 알아. 네가 예정이 좋아하는 거 너희 엄마가 알면 계속 친절하게 예정이를 대할 것 같아? 갖은 수단으로 너희 두 사람 갈라놓을 거야. 예정이한테 더 한 짓도 꾸밀 수 있어. 고모는 상류층에서 20여 년간 지내면서 일찌감치 안하무인 격이 되었어. 넌 고모의 유일한 아들이라 고모의 희망이자 김씨 집안에서 내정된 후계자야. 너한테 기대가 엄청 클 거라고, 틀림없이 재벌 가문과 정략결혼을 맺어줄 거야. 예정이도 엄청 훌륭하지. 하지만 출신이 가장 큰 약점이야. 고모는 날 봐서 예정이를 조카처럼 예뻐하셔. 일단 네가 연루되는 날엔 누구보다 매정하게 변할 거야. 예정인 절대 고모가 바라는 신붓감이 아니야.”심효진의 말은 예리한 칼날처럼 김진우의 정곡을 찔렀다.“진우야, 네가 예정이를 좋아하는 건 걔한테 아무런 도움이 못 돼. 재앙만 안겨줄 뿐이야. 난 너의 사촌 누나야, 네가 사랑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걸 못 보겠어. 예정이도 내 단짝이야. 소중한 친구가 내 가족에게 상처받는 것도 싫어. 그러니까 네가 내려놔. 예정이는 너랑 안 어울려. 널 사랑할 리도 없고. 두 사람 알고 지낸 지 십몇 년째야. 걔는 나랑 함께 네가 커가는 걸 지켜봤단 말이야. 널 동생으로만 생각해. 누나가 어떻게 동생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느끼겠어? 너 마음 안 접으면 이대로 가다가 결국 상처받는 건 너 자신뿐이야.”김진우의 낯빛이 더욱 창백해졌다.그의 생각은 아주 단순했다. 하예정을 무척 사랑하고 엄마도 그녀를 엄청 좋아하는 것 같아 보였을 뿐 더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예정이는 예진 언니 집에서 나오기 위해 결혼을 서둘렀어. 예진 언니가 줄곧 예정이를 걱정했거든. 그래서 예정이도 언니를 안심시키느라고 전태윤 씨랑 초고속 결혼을 한 거야. 예진 언니는 아마 두 사람이 정말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줄로 알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