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형인이 갖은 말로 구슬려도 하예진을 설득할 수 없자 인내심을 잃은 그가 서늘하게 물었다.“어디 출근하는데? 그 회사 참 사람 보는 눈도 없지, 당신 같은 사람을 채용해?”하예진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노씨 그룹이야. 노 대표님께서 직접 날 채용하셨어.”주형인은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노씨 그룹은 그가 건드릴만한 회사가 아니었다. 만약 일반적인 작은 회사라면 직장의 인맥을 이용하여 하예진의 일을 방해하면서 다시 일자리를 잃게 하여 집에서 얌전히 아이만 돌보게 할 수 있었다.그런데 그녀에게 이런 재간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직장을 떠난 지 3년여 동안 살도 많이 쪘고 예전의 활기찬 모습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그녀가 노씨 그룹 같은 대기업에 출근하다니, 그것도 노 대표가 직접 채용했다는 게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노 대표님 사람 보는 눈이 어떻게 된 게 틀림없어.’주형인은 너무도 질투 나서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아직 그도 노씨 그룹에 들어가지 못했으니 말이다.“얘기 다 했어? 다 했으면 나가. 나 쉬어야 해.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출근해야 한단 말이야.”노동명이 그녀에게 매일 아침 회사 건물 앞의 정원을 다섯 바퀴 정도 뛴 후에 출근하라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조 비서에게 그녀가 다섯 바퀴 뛰는지 감시하게 하겠다고 했다. 만약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맑은 정신에 출근할 수 없고 첫날부터 실수가 잦으면 겨우 찾은 일자리를 잃을까 두려웠다.주형인은 별다른 말 없이 그냥 가버렸다. 진주 목걸이 하나를 괜히 낭비했다.주형인이 나가면서 방문을 쾅 하고 세게 닫은 바람에 거실에서 자고 있던 어머니가 깨어났다.외투를 걸치고 나온 김은희는 아들이 성을 내며 안방에서 나오는 걸 보고 다급히 아들에게 다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형인아, 왜 그래? 예진이랑 또 싸웠어? 예진이가 네 누나 아이들 등하교 안 해주겠대?”어머니의 앞이라 그런지 주형인의 표정이 조금은 온화해졌다.“어머니, 예진이가 오늘 일자리 찾아서 내일부터
김은희가 한참 고민하더니 말했다.“내일 내가 예진이한테 출근하지 말라고 얘기해볼게. 그리고 너도 앞으로 생활비 많이 주고 더치페이하지 마. 원래는 더치페이하면 좋을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까 아무런 쓸모가 없어. 봐봐, 네가 퇴근하고 와서도 전부 다 직접 하잖아. 나랑 네 누나가 예진이한테 밥을 차려달라고 하는 것도 돈을 줘야 하니... 딱히 돈을 아끼는 것도 모르겠으니까 그냥 더치페이 하지 마. 그러면 너도 덜 힘들잖아. 예진이한테 매달 40만 원씩 준다고 해도 괜찮아.”주형인이 잠깐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어머니, 더치페이하지 않는다고 해도 저랑 예진이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이젠 예진이한테... 정이 뚝 떨어질 지경이에요. 우빈이랑 누나 일만 아니었으면 예진이한테 굽신거리지도 않았어요.”그의 말에 김은희가 그의 뺨을 내리치더니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남자들은 다 이래. 결혼만 하면 바깥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니까! 현주인지 뭔지 그 여자가 정말 널 사랑하는 것 같아? 다 네 신분을 보고 그러는 거라고. 네가 한 달에 겨우 이백이나 버는 일반 직원이었다면 그 여자가 널 쳐다보기나 했겠어? 그래, 네가 잘생기긴 했어. 나도 네 얼굴을 보면 기분이 좋아. 그런데 잘생기면 밥이 나오냐? 지금 여자들 얼마나 현실적인데, 네가 돈이 없고 지위도 없었더라면 아무리 잘생겼어도 쳐다도 안 봐. 정말로 예진이랑 헤어지면 앞으로 꼭 후회할 날이 있을 거니까 명심해.”서현주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 주형인은 어머니의 말을 아예 귓등으로 들었다.“어머니, 늦었어요.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예진이한테 조카들 등하교해달라고 제가 잘 설득해볼게요.”만약 하예진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집을 누나의 명의로 변경하지 않아도 된다. 설마 집을 그의 누나에게 주지 않으려고 절대 도와주지 않겠다고 하는 건가?집에 아이들의 등하교를 해줄 사람이 없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주형인은 방으로 돌아가 하예진에게 캐묻고 싶었지만 또 말다툼할까 봐 결국 포기했다
하예정이 배시시 웃으며 심효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심효진이 웃음을 터뜨렸다.“예정아, 너희 부부 드디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구나. 태윤 씨가 나한테 아침을 다 사주겠다고 하니 시름이 놓여. 난 또 태윤 씨가 나를 너한테 남자나 소개해주는 중매인으로 오해한 줄 알았어.”김진우는 그녀의 사촌 남동생이다. 하지만 그녀는 절친과 김진우가 커플이 되는 걸 바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김씨 가문은 하예정과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고모가 평소에는 하예정에게 다정하게 잘해주지만 자기 아들 김진우가 하예정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바로 안면을 바꿀 것이다. 고모 같은 시어머니가 있다면 하예정의 삶도 힘들어지기에 심효진은 사촌 남동생을 도와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그녀는 남매가 단둘이 있을 때 기회를 봐서 김진우에게 마음을 정리하고 가게도 자주 오지 말라고 얘기할 생각이었다. 혹시라도 전태윤이 오해하면 큰일이니 말이다.남자든 여자든 결혼했으면 인간관계를 처리할 때 배우자의 기분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설령 배우자에게 미안한 짓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다른 남자나 여자와 함께 있는 걸 배우자가 본다면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지금 바로 갈게.”전태윤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심효진은 가게 문마저 닫았다.“아 참, 어디 가서 먹어? 주소 보내줘, 난 스쿠터 타고 갈게.”하예정이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고 전태윤에게 물었다.“태윤 씨, 우리 어디 가서 먹어요?”“관성 호텔 1층 뷔페에서 먹자. 거기 아침 메뉴도 엄청 다양해. 어디에서 왔든 고향의 맛을 느낄 수가 있어.”하예정이 심효진에게 전했다.“관성 호텔 1층 뷔페 레스토랑이야.”“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절친과의 통화를 마치고 하예정은 바로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가 깬 걸 확인하고는 전태윤에게 말했다.“태윤 씨, 우리 언니 데리러 가요.”전태윤이 알겠다고 하자 하예정은 휴대전화를 바지 주머니에 넣고 거실로 가서 차 키
이따가 한 사람은 서점으로, 한 사람은 회사로 가야 해서 서로 다른 길이라 각자 차를 운전하기로 했다.부부는 먼저 하예진을 데리러 광명 아파트로 향했다. 아파트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하예진이 아들과 함께 나왔다.“언니.”하예정이 차를 길목에 세우고 언니에게 다가갔다.“이모.”주우빈이 두 손을 뻗으며 하예정에게 안겼다. 하예정은 허리를 굽혀 주우빈을 번쩍 안아 들어 볼에 뽀뽀했다. 그러자 주우빈이 행복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그 모습에 전태윤은 자신도 두 살짜리 애로 변했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면 하예정이 뽀뽀해줄 테니까.“우빈이 오늘 왜 이리 일찍 깼어?”“내가 깨웠어. 분유를 마시고서야 따라 나오더라고.”하예진이 전태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제부.”“처형, 타세요.”전태윤은 유모차를 하예정의 차에 실었다.“언니, 버스 타고 출근해?”하예정이 차에 시동을 걸며 언니에게 물었다.“왜 스쿠터 안 타? 스쿠터 태윤 씨 차에 실어도 되는데.”전태윤의 차가 커서 스쿠터 하나쯤 싣는 건 아무 문제 없었다.“시간이 별로 없어서 안 탔어. 내일부터 스쿠터 타고 출근하려고.”하예진은 오늘 특별히 예쁜 옷을 입고 나왔다. 평소 집에 있을 땐 주로 편한 옷만 입던 그녀였다.오랜만의 출근이라 그런지 하예진은 마음이 떨렸다.“그럼 이따가 언니를 회사까지 데려다준 다음에 가게에 가야겠다.”“그래도 되고.”하예진은 동생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하예정은 그녀에게 주씨 집안 모녀가 온 이유에 관해 물었다.“무슨 일이겠어. 지난번에 너한테 얘기했던 그 일이지. 나더러 주서인 애들을 등하교시키고 밥도 해주고 숙제도 봐달라는 걸 거절했어! 누가 낳았으면 누가 책임져야지, 내가 그 집 자식을 돌봐줄 시간이 어디 있다고. 게다가 그 집 애들도 엄마를 닮아서 내 말 잘 듣지도 않아.”그녀와 주형인의 사이가 좋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그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주우빈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다.“언니 시어머니 시아버지한테 등하교
200만 원이 넘는 양복을 사면서 하예정은 특별히 그 브랜드를 기억했기에 절대 잘못 볼 리가 없었다.하예정은 혼자 몰래 웃음을 터뜨렸다. 전태윤이 새 옷을 입고 싶어서 그런 게 틀림없었다.그러니 할머니가 전태윤이 겉모습은 까칠하지만 속은 여리다고 말씀하셨지. 그녀가 사준 옷을 그는 버리지 않았다. 역시 친할머니가 손자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관성 호텔에 도착했을 때 심효진은 이미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호텔 매니저가 전태윤을 알아보고 미소 띤 얼굴로 ‘도련님’ 이라고 부르려던 그때 전태윤이 그를 서늘하게 째려보았다. 호텔 매니저는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내가 뭘 잘못했나?’호텔 매니저는 그를 부르지도 못하고 다가가지도 못한 채 제자리에 서서 전태윤 일행이 멀어지는 걸 빤히 보기만 했다. 잠시 후,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려서야 정신을 차렸다.“둘째 도련님?”전이진을 보자마자 호텔 매니저는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그를 붙잡고 나지막이 말했다.“둘째 도련님, 저 방금 큰 도련님이랑 엄청 닮은 분을 봤는데 잘못 봤을까 봐 부르진 못했어요. 진짜 너무너무 닮았어요! 딱 하나 다른 건 옆에 경호원이 없더라고요.”‘그래, 사람 잘못 본 게 틀림없어. 큰 도련님은 외출할 때 항상 경호원이 옆에 있었어. 아까 그 사람은 큰 도련님이랑 엄청 비슷하고 째려보는 눈빛도 똑같았지만 큰 도련님은 아니야.’전이진이 다급히 물었다.“큰 도련님이라고 부르진 않았죠?”“부르고 싶었는데 절 째려보는 바람에 부르지 못했어요. 부르지 않길 천만다행이죠, 하마터면 민망할 뻔했어요.”대표의 얼굴도 모르는 직원이라면 해고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다행이네요. 앞으로 큰 도련님을 봤을 때 옆에 경호원이 없으면 모른 척하면 돼요.”호텔 매니저는 더욱 어리둥절했다.“둘째 도련님 말씀은 아까 그 남자가 큰 도련님이란 말이에요? 큰 도련님이 맞는데 왜 모른 척해야 한다는 거죠?”그러자 전이진이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그냥
심효진이 떠난 후, 전태윤은 경호원에게 전화를 걸어 데리러 오라고 했다.사실 경호원들은 모습만 드러내지 않았을 뿐 줄곧 그의 뒤에 숨어있었다. 그의 전화를 받고 나서 그들은 재빨리 그를 데리러 호텔로 왔다.“먼저 쥬얼리 가게로 가.”전태윤이 차에 올라타자마자 운전기사에게 분부했다. 그러자 운전기사가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알겠습니다.”관성은 번화한 대도시라 쥬얼리 가게가 많았다. 마침 호텔에서 회사로 가는 길에 쥬얼리 가게가 하나 있었다. 쥬얼리 가게 문 앞에 도착하자 운전기사가 차를 세웠다.“따라올 필요 없어.”전태윤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분부한 후 홀로 차에서 내려 쥬얼리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빠르게 커플링 금반지를 고른 후 값을 지불했다. 점원이 커플링이 담긴 빨간색 반지 케이스를 쇼핑백에 담아 가져오자 전태윤이 쇼핑백을 들고 바로 나갔다.점원의 시선이 그에게서 떠나질 않았다. 그가 차에 올라타서야 점원이 시선을 거두고 속으로 감탄했다.‘현실 속에 진짜로 저런 훈남이 있다니. 점잖고 잘생긴 데다가 카리스마까지 있어. 정말 너무 멋있단 말이야! 커플링을 산 걸 보면 여자친구한테 주는 거겠지?’전태윤은 차에 올라탄 후 운전기사에게 가자고 했다. 강일구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너 주려고 산 거 아니야.”전태윤의 싸늘한 말투에 강일구가 황급히 말했다.“큰 도련님, 전 그저 궁금해서 본 거예요. 다른 뜻은 없었어요.”그에게 주는 선물이라도 해도 감히 받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안에 든 건 반지니까!전태윤이 반지 케이스를 하나 꺼내더니 반지를 왼쪽 약지에 꼈다.강일구는 전태윤이 유부남이라는 걸 대외적으로 알리는 뜻이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큰 사모님한테 고백하려는 건가?’“큰 도련님, 앞으로 큰 사모님을 보면 큰 사모님이라고 불러도 되나요?”전태윤이 그를 힐끗 보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예전처럼 불러.”강일구가 입을 꾹 다물었다.‘내 착각이었구나. 큰 도련님은 큰 사모님한테 고백하려는 게 아니었어.
그가 차에서 내리자 성소현은 무척이나 기뻤다. 그동안의 고생이 헛되지 않은 듯싶었다. 어쨌거나 그녀를 완전히 무시하던 전태윤이 차에서 내려 그녀를 만났으니 말이다.“태윤 씨, 제가 아침 준비해왔어요.”성소현은 재빨리 정성껏 준비한 아침을 전태윤에게 건넸다. 그와 동시에 꽃다발도 함께 건네면서 활짝 웃었다.“이 꽃은 제가 우리 집 정원에서 직접 따서 가지를 손질한 다음 한데 묶은 거예요. 태윤 씨한테 선물할게요.”전태윤은 아무런 표정 없이 성소현을 쳐다보았다.‘남자에게 꽃을 선물한다고? 하예정은 대체 소현 씨에게 어떻게 대시하라고 가르친 거야? 날 여자로 여긴 건가?’전태윤은 일단 오른손으로 꽃다발을 받은 후 왼손으로 도시락통을 받았다. 그 순간 성소현은 날뛰듯이 기뻤다.‘태윤 씨가 날 받아주려나?’그런데 그녀는 곧바로 전태윤의 왼쪽 약지에 낀 금반지를 발견했다. 꽤 큰 금반지라 흐린 날씨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게 무시하려 해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태윤 씨!”성소현이 조심스럽게 그를 떠보았다.“그 반지는 뭐예요? 왜 약지에 끼고 있어요?”그녀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통 결혼반지를 약지에 끼는데.”전태윤은 반지를 힐끗 내려다보고는 그냥 돌아섰다. 경비실 문 앞에 다다른 그가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경비실 쓰레기통이 어디 있어요?”경비원이 쓰레기통을 가져오자 그는 꽃다발과 도시락통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러고는 곧장 다시 차에 올라탔다. 왜 반지를 약지에 꼈냐는 성소현의 질문에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성소현이 결혼반지는 약지에 낀다고 대놓고 얘기했으니 바보가 아닌 이상 그의 뜻을 모를 리가 없었다.“가자!”전태윤의 서늘한 목소리에 운전기사는 재빨리 차에 시동을 걸고 성소현을 지나 회사로 들어갔다.성소현은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고 안색도 점점 창백해졌다. 전태윤이 그녀를 받아준 게 아니라 그녀가 보는 앞에서 꽃다발과 직접 만든 아침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엔 결혼반지가 끼어있었다.전태윤은 그녀가 수
성기현은 성소현이 왔다는 보고를 진작 받았다. 여동생이 사무실에 함부로 쳐들어와도 그는 절대 나무라지 않았다.“뭘 그렇게 급히 뛰어와? 귀신이라도 쫓아오고 있어?”성기현이 사인펜을 내려놓았다. 여동생이 왔으니 잠시는 업무를 볼 수 없었다.“오늘은 전씨 그룹 앞에서 안 기다려? 오빠가 얘기했었잖아, 전태윤은 너랑 어울리지 않는다고. 널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얘기했었는데 믿지 않고 계속 고집을 부리더니, 상처받았지?”성기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동생에게 다가갔다. 여동생의 창백한 얼굴을 보니 마음이 찢어지듯 아팠다.“전태윤이 너한테 무슨 짓을 했어?”그는 여동생이 전태윤을 쫓아다니는 걸 동의하지 않았고 전태윤이 여동생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참을 수 없었다.“오빠.”성소현이 성기현의 팔을 잡고 다급하게 물었다.“오빠, 태윤 씨 싱글이야, 유부남이야? 얼른 말해줘.”성기현이 잠깐 멈칫하다가 대답했다.“왜 그런 질문을 해? 관성 전체에 전태윤이 여자친구도 없는 싱글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어? 걔 성격에 가족 외에 그 어떤 젊은 여자도 접근하지 못 하게 하는데 이렇게 공개적으로 대시하는 여자는 아마 너밖에 없을 거야. 내가 오죽하면 이런 말을 했겠어? 우리 동생이 아니었더라면 걔는 누군가가 대시하는 기분이 어떤지도 모를 거야. 그냥 평생 사랑도 받지 못하고 혼자 살라고 해.”“오빠, 오늘 보니까 태윤 씨가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고 있더라고. 진짜 싱글이 확실해? 이미 결혼했는데 우리가 모르는 건 아니고?”“전태윤이 결혼반지를 꼈다고? 결혼 안 한 거 확실한데.”두 그룹의 경쟁이 치열하여 그는 늘 전태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하여 만약 전태윤이 결혼했다면 그가 가장 먼저 알게 될 것이다. 게다가 전태윤의 신분에 결혼했는데 아무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의 결혼은 관성 전체를 뒤흔들만한 빅뉴스인데.“그럼 왜 결혼반지를 끼고 있지?”성기현이 피식 웃었다.“그거야 나도 모르지. 갑자기 즉흥으로 꼈을 수도 있잖아. 그러는 사람 많아. 미혼
고진호도 고현이 여자였기 때문에 며느리가 아닌 사위가 필요했고 따라서 재벌가 딸들에게 희망을 품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전호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꼭대기 층에 올라가서 엘리베이터를 막 빠져나오자마자 고현이 고객을 배웅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 뒤에는 단정하게 양복을 입은 젊은 여성 몇 명이 따르고 있었는데 아마도 고객의 비서일 것이다.전호영과 고객들은 서로를 잘 몰랐다.고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전호영은 말없이 한쪽으로 비켜섰다.고현은 직접 고객을 아래층으로 배웅했다.남 비서가 전호영을 쳐다보자 전호영은 눈빛으로 고현을 따라가라고 신호를 보냈다.전호영은 이미 고현의 사무실에 대해 매우 익숙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 비서가 그에게 예의를 갖출 필요 없었다.고현의 사무실과 휴게실에 관해 전호영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고현 일행이 엘리베이터에 들어간 후, 전호영은 스스로 고현의 사무실로 갔고 바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사무실에 들어선 전호영은 먼저 커피 한 잔을 타고 소파에 앉았다. 그때 고현이 돌아왔다.“어젯밤 일은 어떻게 됐어요?”고현은 그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물었다.“예진 누나를 대신해서 죽은 경호원 가족들이 와서 뒷일을 처리했어요. 이씨 가문도 가족에게 보상을 해주고 보험회사에서도 가족들에게 보상해 줄 거예요. 이씨 가문의 모든 경호원은 거액 보험에 가입했거든요. 저도 이따가 예진 누나에게 전화해서 오늘 오후에 그 경호원의 가족들을 보러 가자고 해야겠어요. 그 경호원은 비록 이씨 가문의 희생 품이지만 그래도 예의는 갖추어야 하는걸요.”현재, 그 차 사고는 잠시 의외 사고로 단정 지어졌다.이씨 가문의 음모라는 증거가 없어서 이씨 가문은 충분한 연기를 해야 만이 사람들의 비난을 받지 않았다.죽은 그 이씨 가문의 경호원은 스스로 재수 없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이은화의 마음이 그토록 모질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하예진을 이씨 가문의 가족 연회에 처음 초대한 당일에 그녀를 죽이려고 했으니 말이다.하예진이 경계
다행히도 이 모든 악몽은 이미 끝났다.하예진은 이미 다시 일어서서 사업을 일으켰다.“호영 씨, 이만 가볼게요. 저도 나가서 일해야 하거든요. 회사를 설립하는 일을 아직 다 마치지 못해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회사가 강성에 있어야 다른 회사와 협력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동명 형이 오시는 길일 텐데 더 기다리지 않으려고요?”전호영은 장난치고 싶었다.하예진도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제가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야 도착할 거에요. 동명 씨가 먼저 오면 저 대신 먼저 대접해 주세요. 호영 씨와 동명 씨가 더 친하잖아요.”“저도 좀 이따가 고씨 그룹에 갈 거예요.”“알겠어요. 그럼, 제가 빨리 돌아오죠. 미래의 아내가 더 중요한 법이죠. 호영 씨 둘째 형도 혼인신고 했다면서요. 호영 씨가 설을 쇠러 갈 때면 운초 씨는 아마 임신했을걸요. 힘내셔야겠는데요.”전호영은 그의 잘생긴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누나, 저도 필사적으로 힘을 내는 중이거든요. 우리 현이 씨는 둘째 형수님보다 따르기가 훨씬 어렵거든요.”여운초는 겉으로 보기에는 작고 하얀 꽃처럼 부드럽고 연약해 보였다.여운초가 여씨 그룹을 단단히 장악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전호영도 여운초가 계략과 수단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전혀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끈질긴 열정을 이기는 사람이 없다고 하잖아요.”하예진은 말을 마치고 일어나 전호영의 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작별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전호영의 사무실에서 나왔을 때, 하예진은 마침 이경혜의 전화를 받았다.이경혜와 하예진은 전화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하예진이 떠난 지 30분 만에 전호영은 일을 끝내고 호텔을 떠나 고씨 그룹으로 향했다.전호영은 이씨 가문의 뒷일을 고현에게도 알려주려고 했다.이번에 전호영은 꽃도, 보석도 사지 않았다. 고현은 비록 여자이지만, 어려서부터 남장을 하고 성격도 남성적이라 여자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전호영은 그녀에게 손목시계를 하나 사줬다.고씨 그룹의 사람들은
“이 대표님께서도 크게 노하셨을 거예요. 정군호 씨는 잘 모르지만, 이윤정 씨는 그날 밤 쫓겨났어요. 한밤중에 정군호 씨가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실려 갔다고 들었는데, 이 대표님은 아무도 병원에 따라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고 정군호 씨의 상처에 관해 묻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대요.”전호영은 여기까지 말하다가 문득 말을 멈추었다.하예진은 아직 다 마시지 못한 물잔을 들고 두 모금 더 마시더니 다시 잔을 내려놓고는 조용히 전호영을 바라보며 그가 말을 이어나갈 때까지 기다렸다.전호영이 말을 이었다.“사람을 보내 병원에 가서 알아보게 했어요.”“이모할아버지의 부상 상황은 어떻게 되셨대요? 이모할머니가 벌인 일이래요?”그러자 전호영이 대답했다.“이 대표님께서 저지른 일이 아니라 정군호 씨가 스스로 그 부위를 자른 거래요.”전호영은 정군호가 벌인 일이 이은화의 핍박이라고 추측했다.정군호는 절대로 스스로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이은화가 아마도 정군호에게 두 가지 길을 준 것 같았다.정군호 배후의 정씨 집안은 여전히 이씨 가문에 의지하여 살아가야 했기에 정군호는 절대로 이혼하지 않을 것이다. 이혼하지 않으면 정군호는 이은화를 안심시킬 수 없기에 칼을 휘둘러 스스로 그런 짓을 해야만 이은화를 안심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하예진이가 깜빡이며 의아했다. 그녀는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다.전호영도 정군호의 부상에 대해 계속해서 말하지 않았고 그냥 말 한마디만 내뱉었다.“정군호 씨는 죽지 않았어요. 정군호 씨의 부상은 알아보기 어려울 거예요. 이 대표님께서 엄밀하게 숨기고 있거든요. 남자들에게는 특히 데릴사위인 정군호 씨에게는 존엄 없는 짓이나 다름없으니까요.”하예진은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데릴사위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바로 재벌 가문으로 시집가는 여자들이 당하고 있는 일 아닌가요? 성별이 바뀌었을 뿐이죠.”전호영은 순간 말문이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잠시 후, 전호영이 말했다.“누나, 우리 동명 형은 좋은 사람이에요. 과거의 일은 지나
하예진이 위험에 처해 사고가 일어나야만 경호원들이 주동적으로 노동명에게 보고했다.“괜찮으면 됐어. 그럼 됐어. 너무 놀랐잖아. 예진아, 내가 이따가 강성으로 갈 건데 아마 오후 2시 전에 도착할 것 같아.”하예진이 대답했다.“전 괜찮아요. 여기까지 올 필요 없어요.”노동명이 외출하는 것이 너무 불편했기 때문에 하예진은 늘 그를 걱정했다.“내 두 눈으로 네가 멀쩡한 모습을 보고야 말겠어. 네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해야 내가 시름 놓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저는 정말 괜찮아요. 경호원들에게 물어보면 되잖아요. 우린 다 괜찮아요. 동명 씨가 외출하기 불편하실 텐데 너무 멀리 오면 안 돼요.”노동명은 기어코 가겠다고 고집했다.“네가 보고 싶어서 그래. 너무너무 보고 싶어. 네가 괜찮은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그래.”하예진은 반박하지 못했다.“그럼 조심히 오세요. 만약 몸이 불편하면 고집하지 마시고. 동명 씨, 우리는 각자가 서로를 위해서 자신의 건강을 잘 챙겨야 해요. 아시겠죠?”노동명은 부드러운 어조로 나지막이 대답했다.“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몸이 불편하면 외출하지도 않아. 걱정하지 마. 난 괜찮아. 오후에 봐.”“네, 오후에 봐요.”하예진은 전화를 끊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생각해보면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큰 행복이다.노동명이 하예진에게 주고 있는 것은 전남편이 줄 수 없는 것들이었다.어쩌면, 노동명이 그녀에 대한 사랑이 진정한 사랑일지도 모른다. 주형인도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적 있었겠지만, 나중에 복잡한 일들이 많이 끼는 바람에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하예진이 지금 묵고 있는 호텔은 강성에 있는 전씨 가문의 사업 중 하나이며 전호영이 맡은 부분이다.하예진은 쉽게 전호영을 만날 수 있었다.그녀는 잠을 더 자려고 해도 더는 잠이 오지 않았다.약을 몇 알 먹은 하예진은 이내 두통이 사라지게 되었고 휴대전화를 들고 일어나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호텔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더니 전호영의 사무
게다가 노동명은 하예진 모자한테 진심으로 잘해줬고 그는 우빈이를 자기 자식처럼 여겼다.그녀가 노동명을 거부하고 재혼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단지 재혼하면 다시 불 구덩이에 빠질까 봐 걱정됐고 또한 우빈이가 괴롭힘을 당할까 봐 두려웠다.하지만 노동명은 그녀를 도와 모든 장애물을 제거했다. 노씨 가문은 그녀를 받아들였고 그녀가 노동명과 결혼하는 것을 고대하고 있었다. 우빈이가 괴롭힘을 당하는 것에 대한 걱정은 더더욱 필요가 없었다. 노동명은 친아빠인 주형인보다 우빈이를 더 아끼고 사랑해 주었다.만약 그녀가 다시 결혼한다면 노동명이 가장 적합한 후보일 것이다.“동명 오빠도 언니한테 피해 줄까 봐 두려워서 그러는 거야. 언니한테 피해보다 행복을 주고 싶은 거지. 그러니까 언니가 좀 더 기다려줘. 동명 오빠가 곧 일어설 거라고 난 믿어.”“알아. 그래서 몇 년이 걸리더라도 그 사람을 기다릴 거야. 기다리는 동안 내 사업도 열심히 발전시키는 중이야.”지금의 그녀는 관성의 3대 재벌 가문의 투자, 후원 및 지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이익보다도 그 속에서 얻은 경험은 돈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언니 화이팅! 우리 언니가 최고야. 난 항상 언니가 자랑스러워.”하예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언니가 많이 힘낼게.”“언니, 수다 그만 떨고 얼른 잠 좀 자.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으면 나한테 꼭 알려줘야 해. 안 알려주면 걱정만 할 테지만 알려 주면 적어도 우리가 해결 방법을 같이 생각하고 모두가 같이 부담하면 훨씬 더 편해지잖아.”“그래 알았어.”자매가 통화를 마친 후 하예진은 계속 자려고 했으나 잠이 오질 않았다.그녀는 일어나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뭐 좀 먹으러 나갈 준비를 했다.이 시간에 호텔 1층 뷔페 레스토랑에서 아침 식사를 제공하지 않아 그녀는 밖으로 나가 아침 식사를 하기로 했다.아침을 먹고 호텔로 돌아온 하예진은 여전히 머리가 아파서 캐리어에서 진통제를 꺼냈다. 그녀는
모연정네 다섯 식구는 저녁에 전용기를 타고 A시로 돌아갈 계획이었다.예준성도 거대한 예진 그룹을 관리하느라 매우 바빴다.“언니가 어젯밤에 늦게 잠들어서 아직도 엄청나게 졸려. 언니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나 조금만 더 잘게.”하예진은 정신이 몽롱했고 머리도 약간 아팠다. 그녀는 동생한테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한 뒤 계속 잠을 청하기로 했다.“언니, 앞으로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꼭 나한테 먼저 말해줘. 알았지?”“난 잘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넌 집에서 몸조리 잘하고 맘 편히 일하면서 우리 우빈이를 잘 돌봐주면 돼. 언니 걱정은 하지 마. 얼른 일 봐.”하예정은 잠시 침묵한 뒤 말했다.“언니, 나랑 우빈이는 언니가 돌아오기를 항상 기다리고 있어.”하예진은 웃으면서 말했다.“이모가 맡기신 일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너희 보러 돌아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 조카가 태어나면 꼭 보러 돌아갈 거야.”그녀의 유일한 여동생이 아이를 낳으면 그녀는 반드시 돌아가 지킬 것이다.그녀는 동생의 가족이니까.“내년에야 출산할 수 있을 거야. 아직 배도 안 나왔어.”하예진은 웃으면서 말했다.“2개월이 지나면 배가 나오기 시작할 거야. 다시 출근하더라도 조심해야 해. 중요한 일이 없으면 집에서 태교하면서 쉬어. 어차피 세 사람이 공동으로 출자한 회사니까 소현이가 주요하게 관리할 거고 너랑 효진 씨는 태교에 집중하면 돼.”“나 아직 움직일 수 없는 단계는 아니야. 뭔가 하긴 해야 해. 매일 집에만 있으면 지루하고 짜증만 나서 태교에 더 안 좋아.”전태윤은 그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 태교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임신 후기에 집에서 태교해도 너무 늦지 않았고 임신 8개월까지 회사에 나가겠다고 요구하는 사람들도 많았다.“알았어. 네가 좋을 대로 해. 아무튼 몸조심하고 절대 무리하지 마. 무리하면 언니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나 임산부인데 자꾸 뭐라고 할 거야?”“당연히 해야지. 넌 분명히 나 때와 달리 집에서 편안하게 태교할 수 있단 말
“오빠, 난 이제 빈털터리인데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정일범은 그래도 이윤정을 많이 아꼈다. 그는 지갑을 꺼내서 연 후 안에 있는 모든 현금을 꺼내 이윤정의 손에 쥐여주고 또 카드 한 장을 꺼내 이윤정에게 쥐여주면서 말했다.“오빠가 줄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어. 비밀번호는 내 생일이야. 비록 돈은 많지 않지만 당장 눈앞의 어려움을 해결하기에는 충분할 거야.”“일단 호텔을 찾아서 머물고 몸조리를 해. 며칠 후에 엄마 화가 풀리면 내가 네 상황을 엄마한테 설명해 볼게.”이윤정은 현금과 카드를 받고 울면서 말했다.“오빠 정말 고마워. 역시 오빠밖에 없어.”정일범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얼른 가봐. 그 사람들이 내가 너한테 돈을 준 걸 알면 다시 뺏어올 거야. 그때 가서 넌 진짜 빈털터리 되는 거야.”이윤정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녀가 여기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세 형수로부터 온갖 수모와 모욕을 당할 거란 걸 알고 있다.그뿐만 아니라 하인들이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과 이윤미의 고고한 자태만으로도 그녀의 가슴을 찌르기에는 충분했다.“정일범!”큰 사모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곧바로 이윤정한테 달려들어 현금과 카드를 뺏어갔다.정일범이 아내를 끌어당기려고 손을 뻗자 그녀는 돌아서서 그의 뺨을 내리쳤다.“정일범, 나랑 애들이 집에서 쫓겨나게 하고 싶어? 어젯밤에 어머님이 이 년을 쫓아내라고 할 때 뭐라고 했는지 당신도 들었잖아! 근데 감히 어머님의 말씀을 어기고 이년한테 돈과 카드를 주다니! 죽고 싶은 거면 당신 혼자 죽어. 나랑 애들을 끌어내리지 마!”아내한테 화를 내려고 했던 정일범은 욕을 얻어먹은 후 찍소리 못했다.큰 사모님은 남편이 더 이상 이윤정을 돕지 못하도록 끌고 갔다.오늘과 같은 결과는 그녀가 열심히 판을 짜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얻은 속 시원한 결과였다. 그래서 이대로 남편이 이윤정을 도와 어려움을 헤쳐나가게 할 수는 없었다.“꺼져. 당장 안 꺼지면 사람 불러서 쫓아낼 거야!”큰 사모님은 남편을 끌고
정일범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이윤정은 그의 품에 안겨 펑펑 울기 시작했다.자신도 피해자인데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런 일까지 당해야 하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정일범은 그녀를 안아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울지 마. 저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서 너한테 무슨 짓 할지 모르니까 일단 여기서 나가야 해. 지금 저 사람들이 너에 대한 불만이 가득해서 기회만 잡으면 널 계속해서 괴롭히려고 할 거야.”이윤정은 오빠들의 편에 섰단 이유로 그의 아내의 미움을 샀다.그녀가 아무리 같은 여자라고 해도 그들의 여동생으로서 그녀는 당연히 오빠들 편이었다. 시누이로서 형수 편에 서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이윤미가 세 형수의 편에 선 것은 그녀의 정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오빠들에 대한 정이 없어서였다.“오빠, 나 안가.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서 다 설명해 드릴 거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난 정말 모르겠어. 난 피해자고 누군가 날 해치려고 하는 게 분명해. 어젯밤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왜 하필이면 나일까?”“누군가가 나를 망가뜨리려고 꾸민 짓인 게 틀림없어.”그녀를 해친 사람은 그녀보다 훨씬 더 악랄했다.어젯밤에 일어난 일이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게 분명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분석해 보면 누가 그랬는지 짐작이 가긴 했다. 하지만 정일범은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이윤정이 마신 반병의 술은 그가 자신의 방에서 다 마시지 못하고 술장에 넣어뒀던 거였다.그날 아버지는 기분이 좋지 않아서 그에게 술 한 병을 달라고 하셨다.그는 아버지가 취하실까 봐 걱정되어 한 병 통째로 드리지 않고 그가 마셨던 걸로 드렸다.그 술에 누군가가 약을 타서 아버지와 이윤정을 해치려고 한 거였다.누구일까?그가 아니라면 그의 아내일 것이다.그의 아내가 왜 약을 탔을까?그날 밤 정일범은 술 한 병을 따서 잔을 채우고 두 모금 마신 후 소변이 급해서 화장실에 갔다. 그가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아내가 섹시한 잠옷을 입고 바에 앉아
“처음부터 네 것 아니었잖아. 20 년 넘게 남의 인생 훔치고 부유하게 살아온 넌 이제부터 짐승보다 못한 가난한 삶을 살게 될 거야. 지금 당장 시골로 꺼져.”“감히 네가 우리 윤미를 촌년이라고 불러? 진짜 촌년은 너잖아! 아퉤!”모든 것을 잃게 된 이윤정에 대한 사모님들의 분노가 치밀어올랐고, 그들은 온갖 비꼬는 말을 퍼붓기 시작했다.이윤정은 앉으면서 말했다.“절대 못 나가요.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서 내가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고, 누군가가 나를 해치려는 거라고 엄마한테 다 설명할 거예요. 누가 나를 해치려고 했는지 알아내면 그 사람 가만히 안 둘 거예요! ”그녀가 갑자기 세 사모님을 노려보며 물었다.“날 해치려고 한 사람이 설마 당신들이에요?”이씨 집안 큰 사모님은 이윤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으로 나아가 그녀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너 같은 짝퉁이 내 손을 더럽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싸구려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남 탓으로 돌리는 뻔뻔함까지 갖춘 거니? 이년아, 잘 들어. 네가 아무리 변명해도 어젯밤에 일어난 일은 어머님 머릿속에 새겨져서 절대 잊지 못할 거야. 넌 이제 끝났어.”이씨 집안 셋째 사모님은 몸을 돌려 별장을 향해 걸어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찬물 한 바가지를 들고 다시 나왔다.그녀는 모든 사람이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이윤정의 머리에 찬물을 끼얹었다.“악!”이윤정은 비명과 함께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튕겨 일어났다.가뜩이나 날씨가 추운데 찬물까지 끼얹었으니, 이윤정은 너무 추워서 몸을 벌벌 떨었다.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은 흠뻑 젖었고 심지어 바닥에 있는 옷들도 꽤 많이 젖어버렸다.“셋째 동서, 가서 물 한 바가지 더 가져와요. 저년이 덮을 수 있는 옷들을 싹 다 적셔버리고 얼어 죽게 내버려둬요. 언제까지 버티는지 한번 보자고요.”큰 사모님은 셋째 사모님에게 물 한 바가지를 더 가져오라고 분부했다.“나도 같이 가요.”둘째 사모님도 뒤를 따랐다.곧 두 사모님은 각각 찬물 한 바가지를 들고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