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별이 아무리 어리고 경박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다.동씨 가문 연회에서 여운초를 해치려 했지만 오지랖 넓은 하예정 때문에 일을 그르쳤다. 그때 여운별은 하예정에게 붙잡혔고 성소현이 그녀에게 약을 탄 술을 강제로 들이부었다. 약효가 발작한 여운별은 연회장에서 바로 옷을 벗고 싶은 충동이 생겨났다.그녀의 엄마가 서둘러 그녀를 집에 데려와 얼음물에 반나절이나 몸을 담게 해서야 약발이 겨우 떨어지고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반나절이나 얼음물에 몸을 담근 이유로 고열이 났고 부모님은 속상해 미칠 지경이었다.그럼에도 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앞장서주지 않았다.왜냐하면 시골뜨기 뒤에 서 있는 사람은 전태윤 대표님이니까.부모님은 그녀에게 여씨 일가의 사업이 관성에 있는 건 아니지만 전씨 도련님은 절대 건드리면 안 된다고 했다. 전씨 그룹의 산업은 여러 도시에 널리 분포되어 있어 전씨 도련님의 심기를 건드리기만 하면 전씨 그룹에서 여씨 그룹의 장사를 가로챌 것이고 여씨 일가는 큰코다칠 게 뻔하다.부모님은 그녀가 그날 밤 너무 지나쳤다고 꾸짖기까지 했다. 여운초에게 약을 탄 건 치명적인 잘못이라면서, 아무리 여운초를 망신 주어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하게 하고 싶어도 많고 많은 방법 중에 왜 굳이 연회장에서 꼼수를 부리느냐고 가차 없이 질책했다.그렇게 하면 그녀 자신의 이미지도 망칠뿐더러 자리에 참석한 사모님들이 그녀가 심성이 악하다고 생각해 앞으로 좋은 시댁을 만나기도 힘들다.여운별은 그때 처음 전태윤의 강대함을 깨달았다. 자신을 제일 사랑하는 부모님조차 이토록 괴롭힘을 당했는데 대신 나서줄 수 없다니, 전태윤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사람이었다.하예정은 그녀를 차갑게 째려보며 더 기고만장하게 말을 내뱉었고 이에 여운별은 살짝 위축됐다.“야 이 촌년아, 너 딱 기다려!”여운별은 하예정에게 으름장을 놓고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는데 갈 때 일부러 꽃가게 문 앞에 놓인 화분 몇 개를 발로 차버렸다.하예정은 그녀의 두 다리를 확 분질러버리고 싶었다.전에
여운초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예정 씨가 이렇게 믿으시니 그럼 제가 한번 예쁘게 만들어볼게요.”그녀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하예정을 위해 예쁜 꽃다발을 만들기 시작했다.하예정은 숙련된 그녀의 솜씨에 참지 못하고 물었다.“운초 씨, 꽃 종류마다 위치를 숙지하고 있죠?”여운초는 꽃꽂이를 하며 그녀에게 대답했다.“저는 앞이 안 보이다 보니 외울 수밖에 없어요. 점원에게 부탁해 매번 물건을 들여올 때마다 종류대로 꽃을 나누고 저에게 일일이 위치를 알려주고 있어요. 가게 연지도 몇 년이 돼서 위치를 거의 다 숙지하고 있으니 오차가 없을 거예요.”하예정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떠보듯이 물었다.“운초 씨 눈 치료 가능한가요?”여운초의 미소가 살짝 가라앉았다.“저는 큰 병을 앓아서 실명하게 됐어요. 그해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실명이 뭐가 대수겠어요, 살아있음에 감사해야죠.”갑작스러운 실명에 그녀는 하마터면 이성을 잃을 뻔했다.하지만 마음으로 이 세상을 들여다보니 인심이 더 잘 보였다. 가끔 보면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게 사람 마음이었다.하예정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지금은 의학이 발달해서 여건이 허락한다면 기회를 봐서 눈을 치료하세요. 시력을 되찾을 수도 있잖아요.”“저희 고모는 줄곧 제 눈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수년간 저를 데리고 많은 안과 의사를 찾아다녔지만... 여전히 이대로예요.”그녀에겐 다행히 걱정해 주는 고모가 있다.고모가 셋인데 막내 고모랑 아빠가 사이가 제일 좋아서 여운초도 예뻐해 주고 있다. 나머지 두 고모는 새아빠와 친하게 지낸다. 여씨 그룹의 실세라 돈도 있고 세력도 있어서 당연히 그에게 매달리는 거겠지.하예정은 미처 말을 잇지 못했다.“걱정 안 하셔도 돼요, 예정 씨. 저는 인제 실명한 지 십 년째라 어둠에 진작 적응됐어요. 익숙한 환경 속에선 지팡이 없이도 잘 살 수 있어요.”여운초가 되레 하예정을 위로했다.그녀는 하예정을 위해 꽃을 다 고른 후 숙련된 솜씨로 예쁘게 포장해서 하예정에게
하예정은 기어코 4만 원을 여운초의 손에 쥐여줬고 여운초는 지폐를 만지작거리더니 그중 두 장을 하예정에게 돌려줬다.“그럼 절반만 받을게요, 예정 씨.”둘은 아직 친해지지 않아 그다지 친분이 없어 하예정도 더는 고집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운초가 준 2만 원을 받으며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운초 씨, 고마워요. 가게 꽃들이 다 너무 이쁘네요. 나중에 필요할 때 운초 씨 가게로 와서 꽃을 사야겠어요.”여운초도 가볍게 웃었다.“언제든지 환영이에요. 앞으로 예정 씨 필요할 때 미리 전화 주시고 누구한테 선물할지 알려만 주시면 제가 예쁘게 만들어드릴게요. 예정 씨는 가게 와서 꽃만 받아가시면 돼요.”그녀는 카운터 앞으로 돌아가 책상을 짚으며 계산대의 서랍을 열고 명함 한 장 꺼내 하예정이 있는 방향으로 공손하게 건넸다.“예정 씨, 이건 제 명함이에요.”하예정이 다가와 명함을 받으며 말했다.“그럼 앞으로 필요할 때 운초 씨한테 전화할게요. 저 이만 가요.”“네, 조심히 들어가세요.”여운초는 다시 책상을 집고 카운터에서 나와 하예정을 문 앞까지 배웅했다. 그녀가 차에 오르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면서 묵묵히 손짓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하예정은 꽃다발을 조수석에 놓고 안전벨트를 맨 다음 여운초에게 말했다.“얼른 들어가세요, 운초 씨.”여운초가 활짝 미소 지었다.하예정의 차가 멀어져 가는 소리를 들은 후에야 그녀도 가게에 들어갔다.몇 분 후 하예정은 여운별이 ‘똥차’라고 맹비난했던 차를 몰고 전씨 그룹으로 향했다.전태윤의 차고에 고급 차가 매우 많다. 밸런타인데이에 그녀에게 선물한 새 차도 이 안에 있지만 하예정이 그때 안 받았고 부부가 화해한 후에도 그녀는 차를 바꾸지 않았다.이 차는 전태윤이 선물한 첫차라 그녀에게 의미가 남다르다.전태윤도 그녀에게 차를 바꾸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무슨 차를 타고 다니든 그녀는 영원히 전태윤의 부인이니까.전씨 그룹에서 구세주로 불리는 대표 사모님이 오시자 한길 막힘 없이 대표 사무실에 도착했다. 이제 막 문을
전이진이 말했다.“나 지금 막 당신네 대표님과 업무를 상의하다가 마침 마주친 거잖아. 내 형수님이기도 한데 맛있는 음식을 해오시면 도련님으로서 많이 먹진 않아도 좀 맛볼 수는 있잖아.”조 비서가 더 크게 웃었다.“그러니까 대표님이 밀쳐버리신 거죠.”감히 호랑이 입에서 음식을 뺏어가려 하다니, 부대표가 하도 대표님 동생이라 사소한 일로 얼굴 붉히는 일이 없다.전이진이 입을 삐죽거렸다.“와이프 있는 게 뭐 그리 대단해? 누군 뭐 장가 못 가는 줄 아나 봐.”“부대표님도 장가가시면 매일 도시락 싸주시는 아내분이 생길 테니 그땐 우리 같은 솔로들을 실컷 따돌리세요.”전이진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할머니는 그에게 신붓감으로 장님을 골라주셨으니 도시락을 싸주기는커녕 되레 그가 와이프에게 밥을 지어줘야 할 듯싶다.“소 이사님은 요즘 얼굴이 화사하고 발걸음이 다 가벼워진 걸 보니 사랑의 힘이 대단하긴 한가 봐요.”전이진은 조 비서 앞에 다가가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여자친구부터 찾고 나서 내게 그런 말을 해.”조 비서도 아직은 솔로이다.“난 이사님이랑 안 비교해. 이사님은 가장 운 좋은 분이야.”소정남과 심효진은 어떠한 역경도 겪지 않고 바로 함께하게 되었고 양가 부모님들도 두 사람을 결혼시키지 못해 안달이니까.심씨 일가는 소씨 일가보다 조건이 달리지만 그렇다고 가난한 집안은 아닌지라 다 같은 재벌 가문에 속한다. 게다가 심효진의 고모는 김씨 일가의 사모님이니 심효진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준다.소정남과 심효진은 집안 조건이 대등하고 둘은 또 다 가십거리에 관심이 많다.전이진은 할머니가 장님 신붓감을 골라준 걸 안 이후로 소정남에게 부탁해 여운초의 조상 3대까지 낱낱이 파헤칠 심정이었지만 끝내 참았다. 소정남이 그의 일을 안줏거리로 삼을까 봐 꾹 집어삼켰다.하지만 전이진은 알까. 소정남이 작정하면 언제든지 그의 일을 파헤칠 수 있다는 것을...사무실에서 전태윤은 동생을 밖에 내쫓은 후 자연스럽게 하예정의 손에서 꽃다발을 건네받고 싸늘한 표정도
하예정은 정교한 봉투를 건네받으며 활짝 웃었다.“뭔데요?”전태윤이 소파에 앉으며 가볍게 웃었다.“보면 알아.”그는 도시락 뚜껑을 열고 와이프가 해준 사랑의 저녁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하예정은 힐긋 보더니 입꼬리를 씩 올렸다.“다 기초제품이네요. 소현 언니가 준 것도 아직 많이 남았는데.”전태윤은 질투에 눈이 멀어 아내가 성소현이 준 화장품을 쓰는 걸 원치 않았다. 하여 터프하게 기초제품을 한가득 샀지만 줄곧 선물하지 못했다.하예정도 그가 그냥 해본 말인 줄 알고 계속 성소현이 준 기초제품들을 써왔다. 전에 혼자 샀던 브랜드 제품들보다 피부에 훨씬 잘 맞았고 역시 돈의 힘이 크긴 컸다.“앞으론 내가 준 것만 써.”전태윤은 사실 여자들이 쓰는 기초제품 브랜드를 잘 모른다. 여자에게 기초제품을 선물한 적이 없으니까. 엄마한테 사적으로 물어보고 엄마의 추천으로 몇몇 브랜드 제품을 골랐다.그의 엄마는 평생 재벌가에서 지내다 보니 사용한 제품도 최상의 제품일 테니까.하예정은 그가 제일 사랑하는 여자이니 당연히 가장 좋은 제품을 써야 한다.하예정이 웃으며 말했다.“네, 앞으론 태윤 씨가 주는 것만 쓸게요.”“예정아, 함께 먹을래?”“아니요, 일 인분만 준비했어요. 아까 이진 도련님 봤을 때 함께 드시면 분명 모자랄 것 같았는데 다행히 눈치껏 나가주시더라고요.”‘형수님, 저는 형한테 쫓겨난 거잖아요.’전태윤이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걔가 눈이 멀지 않았다면 남아서 우리 둘 사이를 훼방하진 않겠지.”하예정은 실소를 터트렸다.그가 맛있게 먹어주자 하예정도 기분이 좋아져 여운초 꽃가게에 갔다가 여운별을 만난 일까지 얘기했다.“운초 씨는 진짜 앞이 안 보이는 것 같아요. 연기가 아니었어요. 큰 병을 앓고 나서 실명했대요.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라고 하더라고요. 막내 고모가 수년간 운초 씨를 데리고 갖은 안과 병원에 돌아다녔는데 결국 시력을 회복하지 못했대요. 여운별 씨는 악마가 따로 없어요. 자매지간에 저렇게까지 하는 사람은 처
“분명 우리한테 손 내밀 때가 있을 거야.”전태윤은 점사를 보듯 미래를 예지한 것처럼 말했다.하예정은 실소를 터트렸다.본인도 나무토막처럼 딱딱하면서 동생들이 도움을 청한다고 대체 뭘 도울 수 있을까? 죄다 불필요한 아이디어만 제공해 괜히 더 번거로워질 뿐이다.“여보 나 안 믿네?”“그럴 리가요.”전태윤이 그녀를 힐긋 쳐다봤다.“두고 봐. 힘들 땐 분명 이 큰형한테 구원의 손길을 내밀 거야. 내가 도움을 못 주더라도 나한테 고민은 하소연할 게 뻔해.”여덟 도련님은 전태윤을 아주 존경하고 믿는다. 그걸 봐서라도 하예정은 전태윤의 예언을 믿기로 했다.“여운별 씨는 당신이랑 안 다퉜지?”하예정은 여운별을 만났고 그 집 두 자매가 사이가 안 좋다고만 말했을 뿐 자신이 여운별과 다퉜다고는 하지 않았다.여운별이 아무리 기고만장해도 하예정을 건드려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전태윤은 하예정에게 몰래 경호원을 파견해 암암리에서 그녀를 지켜주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하예정은 결국 여운별이 버릇없게 군 사실을 전태윤에게 알렸다. 괜히 또 뭘 숨겼네, 가족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둥 갖은 원망을 퍼부을까 봐.전태윤은 그녀의 말을 듣더니 낯빛이 확 어두워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는 하예정 앞에 다가와 롤스로이스 차 키를 그녀 손에 쥐여주며 박력 있게 말했다.“예정아, 이 차는 앞으로 네가 타. 다음에 또 여운별 만나면 그때도 똥차라고 말할지 지켜봐 봐. 어딜 감히 겁도 없이 네 차를 짓부수겠다고 거만을 떨어!”여 대표는 직접 찾아와 아내와 딸 대신 정중하게 사과했는데 둘째 딸 여운별은 여전히 교훈을 섭취하지 못한 듯싶다. 되레 하예정이 이를 박박 갈게 하다니.죽고 싶어 환장한 게 틀림없다!“미친개가 사람 문다고 똑같이 물어버리게요?”하예정은 차 키를 그에게 돌려줬다.“난 내 똥차가 좋아요.”“예정아.”전태윤이 나지막이 그녀를 불렀다.“딴 사람들이 널 얕잡아보는 거 나 너무 싫어.”“한 사람을 얕잡아보는 기준이 그 사람이 타고 다니는 차가
전태윤이 아무리 아쉬워해도 하예정은 결국 전씨 그룹을 떠나 가게로 돌아왔다.그녀가 돌아왔을 때 학생들이 야간 자율 학습을 시작하지 않아 가게가 매우 바빴다.소정남도 아직 안 와서 하예정과 심효진이 한참 바삐 돌아쳤다. 소정남이 서점 문 앞에 도착했을 때 학생들도 곧 자율 학습 시간이 다 되어 가게에 손님이 확 줄어들었고 하예정이 홀로 가게를 돌볼 수 있었다.소정남은 올 때마다 심효진에게 꽃 한 다발 선물한다.심효진도 그에게 작은 선물을 건네며 두 사람 모두 섬세하게 서로를 잘 챙긴다.천생연분이란 바로 이 두 사람을 말하는 듯싶다.“예정아, 우리 밥 먹으러 갈게.”심효진은 가방을 챙기고 소정남이 선물한 꽃다발을 안은 채 활짝 웃으며 하예정에게 말했다. 하예정이 대답한 후 그녀도 안심하고 소정남과 함께 가게를 나섰다.하예정은 홀로 좀 더 바삐 돌아쳤다. 학생들이 자율 학습하러 학교로 돌아간 후에야 그녀는 주방에 들어가 음식을 덮여서 카운터에 앉아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예정아.”옆 가게 정씨 아저씨가 접시를 들고 음식을 먹으면서 안으로 들어왔다.“아저씨, 인제 저녁 드세요?”“그래, 너도네.”정씨 아저씨가 웃으며 물었다.“효진이는 나갔어? 꽃다발 들고 너희 가게로 자주 오는 잘생긴 남자분과 함께 가던데 남자친구야?”“네, 맞아요.”하예정은 정씨 아저씨에게 자리를 안내했지만 아저씨는 앉지 않았다.“그냥 한번 들러본 거야. 너랑 얘기도 나누고.”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담담하게 웃었다.“저번에 내기한 일 너랑 말했었잖아. 내 비상금을 전부 걸었는데 크게 벌었지 뭐야. 하하하, 네가 전씨 일가 사모님이 되어도 이 서점은 정상 운영할 테고 너도 늘 똑같이 출근한다고 했거든. 그런데 다들 안 믿는 거야. 네가 전씨 일가 사모님이 되면 집에서 사모님 노릇만 할 거라며 더는 얼굴을 내밀지 않을 거라고 하더니 내가 이겼어. 전부 다 졌다고, 하하하. 아쉽게도 내 비상금이 너무 적어서 더 많이 벌진 못했어.”하예정은 하마터면 사레 걸릴 뻔했다.그
정씨 아저씨가 말했다.“하긴... 마누라한테 말 안 하길 다행이지.”“아주머니가 매달 주시는 용돈이 적은 건 맞아요. 다만 아저씨도 평상시에 다른 지출이 있으면 아주머니가 거의 다 내주시잖아요. 양가 부모님들 생활비도 그렇고 경조사 비용에 아이 키우는 돈까지 모든 지출을 아저씨가 신경 쓸 필요 없으니 사실은 아저씨가 버신 거예요. 돈 관리하는 사람이야말로 제일 수고하죠.”정씨 아저씨는 밥을 먹으며 말했다.“맞아. 그래서 마누라도 돈 관리하는 걸 좋아하니 내가 그러라고 했어. 전에 내가 돈 관리할 땐 가게 장사가 아무리 잘 돼도 1년 동안 남는 돈이 400만도 안 됐거든. 마누라가 돈 관리한 이후로 1년에 무려 2000만 원이나 저축할 수 있어. 나도 편하고 집에 적금도 늘어나고 게다가 마누라까지 매우 공평한 사람이라 제 친정 식구들만 편애하진 않아. 양가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이 똑같아. 아주 칼 같다니까. 우리 부모님도 며느리를 엄청 마음에 들어 하셔. 예정아, 만약 우리 부부가 싸우면 그땐 온 집안이 모여들어 날 질책할 거야.”정씨 아저씨는 원망을 늘어놓는 것 같지만 실은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자랑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남들처럼 어마어마한 부잣집은 아니지만 아내가 현명하여 온 가족이 화목하게 지낸다.정씨 아주머니는 말만 날카롭게 하지 실은 누구보다 마음 여린 여자다.게다가 아주머니의 대인관계는 하예정도 따라 배우고 싶을 지경이다.“여보, 여보.”정씨 아주머니가 옆 가게에서 남편을 불렀다.정씨 아저씨는 재빨리 대답하곤 나지막이 하예정에게 말했다.“예정아, 꼭 비밀로 해야 해. 나 이만 간다.”하예정이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정씨 아저씨는 곧바로 가게에 돌아가며 아내에게 호응했다.아저씨가 나간 후 하예정도 곧장 배불리 저녁을 먹고는 주방에 들어가 설거지했다. 설거지를 마치고 나온 후 이웃 가게에 놀러 다니면서 다들 서로 몇 년 알고 지낸 사이라 가볍게 담소를 나눴다.이웃들은 하예정이 전씨 일가 사모님이 되면 그들과 멀리할 줄 알았는데 전
장소민은 하예정과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기분이 훨씬 좋아졌다.그녀는 며느리의 말을 잘 들었다.하예정은 그녀에게 아들이 다 컸는데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설득했다.전창빈 또한 진지하게 일하러 가려고 했다.게다가 전창빈의 사업도 안정적이어서 다른 사람의 가정 요리사로 되어도 그의 사업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전창빈이 미래의 아내에게 요리해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니 장소민도 막을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예정아, 나 이제 기분이 풀렸어. 가자, 우리 내려가서 우빈이 보러 가자.”장소민이 몸을 일으켰다.하예정은 웃으며 장소민과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박 집사는 우빈과 함께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는데 녀석은 아주 몰입해서 보고 있었다.발소리를 들은 박 집사가 바로 일어섰다.“이모!”우빈은 하예정이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자 TV를 뒤로 한 체 하예정과 장소민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장소민에 다시 다정하게 할머니라고 불렀다.장소민은 우빈을 안아주며 유치원에서 즐겁게 지냈는지 물어보았다.우빈은 하나하나 대답하며 장소민에 유치원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어 장소민의 웃음을 자아냈다.한 시간 후, 전현림과 전창빈이 도착했다.시아버지와 시동생이 왔다는 박 집사의 말을 들은 하예정은 직접 집 밖으로 마중 나갔다.장소민은 우빈을 끌어안고 움직이지 않고 입으로 중얼거렸다.“황제도 아니고 왜 사람 마중 나가게 만들어...”하지만 하예정의 행동에 장소민은 매우 만족했다.하예정은 별장을 나서자마자 전현림과 전창빈이 차에서 내려 서둘러 걸어오는 것을 바라보았다.“아버님.”하예정이 인사했다.전현림은 마음이 초조했지만, 여전히 하예정에게 상냥한 얼굴로 인사했다.전창빈도 하예정에게 안부를 물었다전현림이 조용히 하예정에게 물었다.“예정아, 네 엄마가 안에 계시지?”하예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집에 계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 이제 기분이 많이 풀렸어요.”“여기로 도망 온 것도 모르고 난 방에 있는 줄로만 알았어. 강제로
이제 장소민은 하예정을 완전히 받아들였다.앞으로 그녀는 천천히 하예정을 이끌어 전씨 가문의 집안일을 조금씩 가르쳐주어 전부 하예정에게 넘겨주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장소민도 은퇴할 수 있었다.하예정도 배우고 싶어 하고 또 열심히 배울 것이다. 그녀도 진취심이 있고 야망이 커서 전태윤에게 매우 적합했다.전태윤도 야망이 큰 남자였다.물론, 장소민은 전태윤이 이미 하예정의 손에 꽉 잡혀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아들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하예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아들이 행복하기만 하다면 며느리 출신이 후져도 상관없다.게다가 이제 하예정이 강성의 이씨 가문의 후손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으니 나쁘지도 않은 것 같았다.옛날에 이씨 가문이 전성기에 이르렀을 때 심지어 전씨 가문과 대등한 사이로 되기까지 했다.하예정의 친이모가 성씨 가문의 사모님이기도 했고 하예진도 지금 열심히 분발하고 강해져 하예정의 후원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장소민은 하예정 자매의 삶에 대한 태도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상류사회라는 바닥에서 다른 사람들이 사적으로 뭐라고 말하는지 장소민도 알고 있었으나 그 사람들이 그녀 앞에서 말하지 않으면 그뿐이었다.만약 그녀가 듣게 되면 하예정 대신 그 사람과 싸울지도 모른다.지금 장소민이 며느리를 보호하는 좋은 시어머니라는 걸 누가 모르겠는가?“예정아, 네 둘째 숙모가 이틀 후에 운초를 데리고 연회에 참석한다고 하는데 나도 참석할 거야. 너도 갈래?”장소민은 말을 마치더니 다시 말을 꺼냈다.“됐어. 집에서 너 자신을 잘 돌보는 게 낫겠네. 연회 장소가 붐비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실수로 널 넘어뜨릴까 봐 더 걱정이야. 혹시라도 네 배에 부딪혀 너와 아이를 다치게 하면 안 되니까.”장소민은 평생 후회할 것이다.하예정은 웃으며 대답했다.“그런 걱정을 하지 않지만, 태윤 씨가 저를 보내지 않을 거예요. 지금 매우 긴장하고 있거든요. 제가 아기를 낳는 당일에 태윤 씨는 아마 긴장해서 쓰러질 수도 있어요.”장소민이 말을 이었다.“아닐걸.
장소민은 급히 말했다.“예정아, 넌 정말 행복해야 해. 태윤이가 감히 너를 화나게 하면 나한테 말해. 엄마가 너 대신 태윤이를 혼내줄게. 너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기분이야.”장소민에게는 임신한 며느리가 아들보다 더 중요했다.하예정의 뱃속 아이는 그녀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손자가 들어있다. 손자든 손녀든 첫 손자뻘이기 때문에 장소민 부부의 마음속에는 모두 특별한 존재이다.이제 장소민도 전씨 할머니가 전태윤에 대한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첫 번째 손자이기 때문에 전씨 할머니가 전태윤을 가장 아끼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어머님, 저와 태윤 씨는 오랫동안 싸우지도 않았어요. 태윤 씨는 잘 삐지지도 않고요. 걱정하지 마세요.”금방 결혼했을 때 감정적인 기초가 없는 데다 전태윤이 그녀에 대해 오해까지 품고 있었다. 그 당시 전태윤은 하예정이 악의적인 의도로 전씨 할머니에게 접근해 그와 결혼하도록 강요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는 쉽게 갈등이 생겼다.정든 커플이 부부로 되어 같이 산다고 해도 적응 기간이 필요했을 것이다.초고속 결혼한 전태윤과 하예정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장소민은 아들이 아내를 무척 사랑하는 모습을 떠올리더니 웃으며 말을 꺼냈다.“하긴, 내가 뭘 걱정하겠어. 태윤이는 널 많이 사랑하고 있는데. 예정아, 창빈이가 요리사 하고 싶어 하는 게 정말 아내를 쫓기 위한 것일까? 내가 창빈에게 누구 집에 가서 가정 요리사가 될 것인지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더라고. 그토록 비밀유지하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아내를 쫓기 위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싶어.”하예정의 설득을 들은 장소민은 전창빈이 미래 아내의 마음을 훔치러 가정 요리사로 되는 것으로 추측했다.하지만 전창빈이 어느 집안의 요리사가 될지 알기 전에 장소민은 아마 마음을 놓지 못할 것이다.“창빈 도련님이 말하지 않으려 하는 이유가 두 가지예요. 첫째는 어머님께서 방해할까 봐 출근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하는 것이고 둘째는 정말로 아내에게 구애하기 위함일 거예요
전창빈은 이제 다 큰 어른이라 심사숙고 끝에 한 결정일 것이다.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절대로 충동적으로 행동한 적이 없다.장소민은 전창빈이 요리사로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이유가 아마도 창피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어쩼든 지위가 높은 전씨 가문의 여섯째 도련님인데...“어머님, 창빈 도련님께서 어디로 출근하고 싶어 해요?”하예정은 장소민을 설득하고 나서 궁금한 듯이 물었다.전창빈이 어느 레스토랑이나 호텔에서 출근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싶었다.장소민이 대답했다.“호텔에 출근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가정 요리사가 되고 싶어 해. 그것도 관성이 아닌 외지에서.”하예정은 아름다운 눈을 반짝이며 장소민에 물어보았다.“어머님, 혹시 할머니께서 창빈 도련님한테 정해주신 아내의 가문에서 가정 요리사가 필요하신 건 아닐까요? 그래서 도련님도 이 틈을 타서 접근하려는 게 아닌가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가 누구인지 아세요?”장소민은 어리둥절해하며 대답했다.“그건 정말 몰라. 나는 단지 어르신이 이혁이와 전우에게 아내를 정해주셨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 창빈과 유하는 아직 고려하지 않은 줄 알았지.”전유하는 갓 사회에 나온 사람이다.이렇게 빨리 아내를 정해주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전창빈은 이미 상업계에서 몇 년을 뒹굴면서 지냈다. 다만 조용히 지내고 있을 뿐이다.그 이유는 그가 전태윤의 친동생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가 전태윤의 친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를 높이 보곤 했다. 가끔은 그가 큰 성과를 이루어도 전태윤의 도움으로 이루어낸 것이라고 오해받기도 했다.하여 전창빈은 전태윤의 덕을 보고 싶지 않아 사업할 때에도 자신이 전태윤의 친동생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이 전씨 그룹과 전혀 연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그의 사업은 확실히 전씨 그룹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심지어 사업상에서 겹치는 부분도 없다.너무 뛰어난 형을 둔 전창빈은 둘째 아들로서 압박감이 너무 컸다. 늘 전태윤과 비교하는 것도 너무 힘들었을 것이다.
장소민은 문을 닫지 않고 대답했다.“내가 기분은 안 좋았는데 지금은 많이 나아졌어.”“무슨 일이 생겼어요?”하예정이 관심 있게 물었다.장소민이 먼저 물었다.“물 마실래?”“안 마실래요. 고마워요.”장소민은 다가가서 하예정을 소파에 앉히며 말했다.“큰일은 아니고, 그냥 여섯째 창빈의 일로 네 아빠와 좀 다투었어.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집에서 나왔어.”하예정이 말을 건넸다.“그럼 아버님께서 어머님이 여기로 오신 것을 모르신다는 말씀이세요?”장소민은 쑥스러워하며 말했다.“아직 말하지 않았어. 박 집사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어. 나도 좀 진정하려고.”“아버님께서 걱정하실 텐데. 어머님, 창빈 도련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먼저 아버님께 우리 집에 있다고 메시지 보내세요. 걱정하시며 찾아다니실지도 몰라요.”장소민은 입을 오므리다가 대답했다.“내가 여기로 온 지도 벌써 몇 시간이나 지났는데도 찾아오지 않는데 내 걱정은 아예 안 할지도 몰라.”잠시 후 장소민은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내가 몰래 나왔거든. 내가 외출하는지도 모를걸. 아마 내가 여전히 방에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전현민의 성격으로 장소민을 찾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그러면서 장소민은 전현림에 메시지를 보내 전태윤 집에 왔다고 전했다.전현림이 장소민에 수많은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읽기만 했을 뿐 답장하지 않았다.장소민이 전현림에 메시지를 보낸 후에야 하예정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창빈 도련님이 왜요?”“예정아, 네가 예전에 창빈이가 요리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잖아. 창빈이가 지금 요리사가 되고 싶어 하지만 난 찬성하지 않았고 네 아빠가 허락했거든. 사람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지지해 주시거든.”전씨 가문의 형제들은 전부 요리할 줄 알았다.이것은 전씨 할머니께서 배양해 주신 결과였다. 어르신은 손자마다 전씨 가문의 보호 없이도 스스로 독립할 줄 알고 자신만의 세계를 꾸밀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형제들은 모두 다재다능하여 만약 어느
늙은이는 어린아이와 다름없다고 하더니만, 이럴 때 두고 하는 말인듯하다.전씨 할머니는 장난꾸러기였다.곧 차가 중심 별장 입구에 멈추었다.하예정은 우빈을 도와 작은 가방을 메고 싶었지만, 우빈은 스스로 메겠다고 고집했다.“선생님께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엄마와 이모도 그렇게 가르쳤어요.”하예정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그래, 그래. 내가 그렇게 가르쳤는데도 까먹었네. 맞아. 자기 일은 스스로 해야지.”수많은 사람이 우빈을 사랑해 주었다.하예진 자매는 우빈이가 버릇없이 자랄까 봐 늘 교육을 중시했다.우빈에게 올바른 인생관을 가르쳐 버릇없이 자라지 않도록 말이다.우빈은 자신의 작은 가방을 메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린 후 몸을 돌려 작은 손을 뻗어 하예정을 부축했다.하예정은 우빈의 작은 손을 잡았다. 우빈이가 그녀를 부축하여 차에서 내린 것처럼 시늉했다.“우리 우빈이 최고야.”“이모부께서 저와 이모부는 모두 같은 남자로서 앞으로 엄마와 이모를 보호하고 돌봐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하예정은 웃으며 말을 꺼냈다.“다 큰 어른 같네. 우리 우빈이.”하예정의 마음이 따듯해졌다.그녀가 우빈을 친자식처럼 아끼는 것이 헛된 고생이 아니었다.하예정은 전태윤에게 따뜻함을 느꼈다. 그는 우빈에게까지 그녀를 돌봐야 한다고 가르쳤다!우빈은 어릴 때부터 배려심이 많았는데 더 크면 분명 훈남이 될 것이다.장차 어느 집 딸이 복이 있을지 참 기대된다.“오셨어요.”박 집사가 집안에서 마중 나왔다.“집사님, 할머니께서 돌아오셨어요?”하예정이 박 집사에게 물었습니다.“사모님께서 오셨어요. 어르신은 아직 돌아오시지 않으셨거든요.”박 집사는 앞으로 나아가 우빈을 안아 왔다.하예정도 그가 우빈을을 안고 있도록 팔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우빈은 달콤하게 박 집사에게 인사를 건넸다.박 집사는 웃으며 우빈과 인사를 나누고는 녀석을 안고 하예정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박 집사는 걸으면서 목소리를 낮
예준하는 껄껄 웃었다.“그럼, 우리 우빈을 좋아하는 사람이 엄청 많지. 우빈이도 내가 널 좋아해 줄 자리를 남겨 둬야 해. 알았지?”우빈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당연히 남겨두어야죠.”모두가 한바탕 웃었다.막 집에 들어섰을 때, 전태윤의 전화가 걸려왔고 하예정이 이내 받았다.두 사람은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전태윤은 그의 아내가 성씨 가문으로 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예전에는 하예정이 성씨 가문에 올 때면 전태윤도 따라왔지만, 오늘 밤 너무 바빠서 따라오지 않았다.하예정은 친절하게 말했다.“지금 이모 집에서 밥 먹고 이야기 좀 하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에요. 저녁에 술 많이 드시지 말고 따듯하게 입고 나가세요. 오늘 기온이 또 내려간다고 하니까.”요즘 기온이 떨었지만, 비도 내린다고 했다.겨울에 비가 오면 더 춥게 느껴진다.“술은 마시지 않을 거야. 내가 밖에서 찬 바람을 쐴 필요도 없어서 밖에 아무리 추워도 나랑 상관없어.”전태윤은 매일 난방이 있는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고 설령 외출하여 사업을 논의하더라도 따뜻한 관성 호텔에서 일을 보았다.기온이 아무리 내려가도 대표 전태윤에게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예정아, 너 매일 밖에서 뛰어다녀야 하는데 옷을 더 입고 다녀. 우빈에게도 두 벌 더 입히고. 오늘 저녁 접대 자리에 동명이와 함께 가거든.”노동명이 바삐 돌아치는 이유가 바로 이 일 때문이었다.하예정이 대답했다.“알았어요. 제가 세 살짜리 아이도 아니고, 우빈이도 추워지면 저에게 말할 거예요. 스스로 옷을 찾아서 입을 줄도 알아요.”하예정은 우빈을 위해 이미 따뜻한 옷 한 벌을 입혀주었다.“동명 오빠도 잘 돌봐주세요.”“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러려고. 그럼 먼저 밥 먹어. 이따가 내가 동명이 데리러 가야 하니까.”하예정은 그에게 다시 당부한 뒤 통화를 끝냈다.하예정은 휴대전화를 귓가에서 떼어낸 뒤에야 우빈이가 곁에 앉아 그녀가 통화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는 사실
예준하가 우빈에게 물었다.“아저씨는 시간이 없어서 이모가 저를 데리러 왔어요. 그리고 아기 보러 왔는데 아기가 잠들어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어요.”우빈은 말주변도 좋고 발음도 똑똑했다.예준하는 이 녀석이 용정과 너무 닮았다고 생각했다.모연정이 용정을 금방 입양했을 때 한 살 남짓했을 때였는데 옹알옹알 말도 잘하지 못했으나 지금은 3살이나 되었다. 녀석은 작은 어른처럼 또래 아이들보다 키가 크고 똑똑했다.용정의 기억력이 아주 좋은 점이 가장 의외였다.그러나 예준하가 우빈을 처음 만났을 때 우빈은 너무 어리고 말도 서툴렀다. 그러나 지금은 똑똑한 개구쟁이로 변했다.예준하는 그와 성소현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도 우빈과 용정처럼 똑똑하고 영리하기를 바랐다.“아기가 아직 어려서 잠을 많이 자거든. 좀 더 크면 우빈과 잘 놀 수 있을 거야.”우빈이 대답했다.“네, 이모도 그랬어요. 아저씨는 바쁘지 않죠? 제가 매번 이모를 보러 올 때마다 아저씨를 보는 것 같아요.”우빈의 눈에는 전태윤과 노동명 그리고 소정남이 가장 바빠 보였다.노동명은 다리가 여전히 불편해서 휠체어를 타서라도 회사로 일하러 갔다.하예정처럼 아주 바빴다.하지만 예준하는 바쁘지 않아 보였다. 만약 바쁘다면 매번 예준하를 볼 수 없었을 테니까.예준하는 웃으며 말했다.“나도 바쁘거든. 그런데 네 소현 이모가 여기로 혼자 오는 게 걱정돼서 일하던 중간에 여기로 데려다준 거야.”우빈은 작은 얼굴을 쳐들고 순진하게 말했다.“그럼 아저씨도 소현 이모에게 경호원을 보내주세요. 우리 예정 이모도 경호원들이 따라다니거든요. 태윤 이모부가 그렇게 해야만 안심하고 일할 수 했어요. 그리고 우리 이모가 나쁜 사람도 때려눕힐 수 있어요. 엄청 대단한걸요. 저는 우리 이모가 가장 좋아요.”예준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래. 네 이모는 정말 대단하구나. 소현 이모도 싸움할 줄 아는데 난 여전히 걱정되어서 여기까지 데려다줬어. 겸사겸사 여기에서 밥 먹을 겸.”그러자 우빈은 알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건넸
이경혜가 웃었다.“맛있지? 호호호...”말하는 사이에 성소현과 예준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가 돌아왔나 봐요.”하예정이 말했다.우빈은 성소현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안고 미친 듯이 뛰쳐나갔다.그가 넘어질까 봐 걱정된 하예정이 얼른 일어나 따라갔다.이경혜는 따라가지 않고 소파에 앉아 고개를 돌려 하예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이경혜의 얼굴의 웃음기는 이내 사라졌다. 그녀는 일찍 돌아간 여동생 이경희를 떠올렸다.그녀가 아직 살아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이경혜는 자신의 부모님 모두 살아계신다면 대가족이 함께 떠들썩하게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고 동생이 일찍 죽지도, 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여동생이 이 세상에 살아있다면 얼마나 좋을까!‘그 당시 어머니의 특별 비서님은 살아계실지...’이은숙의 특별 비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이경혜가 쓸 수 있는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찾았지만 결국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사람들이 그 노련한 특별 비서에 대해 기억은 없었지만, 이경혜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기억으로 그린 초상화가 맞을지도 모른다.이은화는 수십 년 동안 그 특별 비서를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으나 찾지 못했다.이은화가 그 비서에 대한 인상이 더 깊을 것이다.게다가 만약 살아있다고 해도 나이가 많아서 그 당시 일어난 일을 기억하고 있을지...이경혜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견고한 눈빛으로 속으로 돌아가신 엄마에게 말했다.‘엄마, 제가 반드시 엄마 대신 복수할 거예요. 우리 재산도 반드시 전부 되찾을 거에요! 엄마, 하늘나라에서 꼭 우리 예진이가 강성에서 무사히 우리의 모든 것을 되찾도록 도와주세요! 예진이는 엄마 외손녀예요. 그리고 여동생은... 제가 지켜주지 못했어요.’여동생만 생각하면 이경혜는 마음이 무거워진다.밖에 있던 성소현은 그녀를 향해 달려가는 우빈을 안아 들어 올려 두 바퀴 돌았다. 우빈은 기쁘게 웃으며 성소현에게 말했다.“이모! 더 높이 해줘요! 더요!”성소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