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초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예정 씨가 이렇게 믿으시니 그럼 제가 한번 예쁘게 만들어볼게요.”그녀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하예정을 위해 예쁜 꽃다발을 만들기 시작했다.하예정은 숙련된 그녀의 솜씨에 참지 못하고 물었다.“운초 씨, 꽃 종류마다 위치를 숙지하고 있죠?”여운초는 꽃꽂이를 하며 그녀에게 대답했다.“저는 앞이 안 보이다 보니 외울 수밖에 없어요. 점원에게 부탁해 매번 물건을 들여올 때마다 종류대로 꽃을 나누고 저에게 일일이 위치를 알려주고 있어요. 가게 연지도 몇 년이 돼서 위치를 거의 다 숙지하고 있으니 오차가 없을 거예요.”하예정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떠보듯이 물었다.“운초 씨 눈 치료 가능한가요?”여운초의 미소가 살짝 가라앉았다.“저는 큰 병을 앓아서 실명하게 됐어요. 그해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실명이 뭐가 대수겠어요, 살아있음에 감사해야죠.”갑작스러운 실명에 그녀는 하마터면 이성을 잃을 뻔했다.하지만 마음으로 이 세상을 들여다보니 인심이 더 잘 보였다. 가끔 보면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게 사람 마음이었다.하예정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지금은 의학이 발달해서 여건이 허락한다면 기회를 봐서 눈을 치료하세요. 시력을 되찾을 수도 있잖아요.”“저희 고모는 줄곧 제 눈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수년간 저를 데리고 많은 안과 의사를 찾아다녔지만... 여전히 이대로예요.”그녀에겐 다행히 걱정해 주는 고모가 있다.고모가 셋인데 막내 고모랑 아빠가 사이가 제일 좋아서 여운초도 예뻐해 주고 있다. 나머지 두 고모는 새아빠와 친하게 지낸다. 여씨 그룹의 실세라 돈도 있고 세력도 있어서 당연히 그에게 매달리는 거겠지.하예정은 미처 말을 잇지 못했다.“걱정 안 하셔도 돼요, 예정 씨. 저는 인제 실명한 지 십 년째라 어둠에 진작 적응됐어요. 익숙한 환경 속에선 지팡이 없이도 잘 살 수 있어요.”여운초가 되레 하예정을 위로했다.그녀는 하예정을 위해 꽃을 다 고른 후 숙련된 솜씨로 예쁘게 포장해서 하예정에게
하예정은 기어코 4만 원을 여운초의 손에 쥐여줬고 여운초는 지폐를 만지작거리더니 그중 두 장을 하예정에게 돌려줬다.“그럼 절반만 받을게요, 예정 씨.”둘은 아직 친해지지 않아 그다지 친분이 없어 하예정도 더는 고집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운초가 준 2만 원을 받으며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운초 씨, 고마워요. 가게 꽃들이 다 너무 이쁘네요. 나중에 필요할 때 운초 씨 가게로 와서 꽃을 사야겠어요.”여운초도 가볍게 웃었다.“언제든지 환영이에요. 앞으로 예정 씨 필요할 때 미리 전화 주시고 누구한테 선물할지 알려만 주시면 제가 예쁘게 만들어드릴게요. 예정 씨는 가게 와서 꽃만 받아가시면 돼요.”그녀는 카운터 앞으로 돌아가 책상을 짚으며 계산대의 서랍을 열고 명함 한 장 꺼내 하예정이 있는 방향으로 공손하게 건넸다.“예정 씨, 이건 제 명함이에요.”하예정이 다가와 명함을 받으며 말했다.“그럼 앞으로 필요할 때 운초 씨한테 전화할게요. 저 이만 가요.”“네, 조심히 들어가세요.”여운초는 다시 책상을 집고 카운터에서 나와 하예정을 문 앞까지 배웅했다. 그녀가 차에 오르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면서 묵묵히 손짓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하예정은 꽃다발을 조수석에 놓고 안전벨트를 맨 다음 여운초에게 말했다.“얼른 들어가세요, 운초 씨.”여운초가 활짝 미소 지었다.하예정의 차가 멀어져 가는 소리를 들은 후에야 그녀도 가게에 들어갔다.몇 분 후 하예정은 여운별이 ‘똥차’라고 맹비난했던 차를 몰고 전씨 그룹으로 향했다.전태윤의 차고에 고급 차가 매우 많다. 밸런타인데이에 그녀에게 선물한 새 차도 이 안에 있지만 하예정이 그때 안 받았고 부부가 화해한 후에도 그녀는 차를 바꾸지 않았다.이 차는 전태윤이 선물한 첫차라 그녀에게 의미가 남다르다.전태윤도 그녀에게 차를 바꾸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무슨 차를 타고 다니든 그녀는 영원히 전태윤의 부인이니까.전씨 그룹에서 구세주로 불리는 대표 사모님이 오시자 한길 막힘 없이 대표 사무실에 도착했다. 이제 막 문을
전이진이 말했다.“나 지금 막 당신네 대표님과 업무를 상의하다가 마침 마주친 거잖아. 내 형수님이기도 한데 맛있는 음식을 해오시면 도련님으로서 많이 먹진 않아도 좀 맛볼 수는 있잖아.”조 비서가 더 크게 웃었다.“그러니까 대표님이 밀쳐버리신 거죠.”감히 호랑이 입에서 음식을 뺏어가려 하다니, 부대표가 하도 대표님 동생이라 사소한 일로 얼굴 붉히는 일이 없다.전이진이 입을 삐죽거렸다.“와이프 있는 게 뭐 그리 대단해? 누군 뭐 장가 못 가는 줄 아나 봐.”“부대표님도 장가가시면 매일 도시락 싸주시는 아내분이 생길 테니 그땐 우리 같은 솔로들을 실컷 따돌리세요.”전이진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할머니는 그에게 신붓감으로 장님을 골라주셨으니 도시락을 싸주기는커녕 되레 그가 와이프에게 밥을 지어줘야 할 듯싶다.“소 이사님은 요즘 얼굴이 화사하고 발걸음이 다 가벼워진 걸 보니 사랑의 힘이 대단하긴 한가 봐요.”전이진은 조 비서 앞에 다가가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여자친구부터 찾고 나서 내게 그런 말을 해.”조 비서도 아직은 솔로이다.“난 이사님이랑 안 비교해. 이사님은 가장 운 좋은 분이야.”소정남과 심효진은 어떠한 역경도 겪지 않고 바로 함께하게 되었고 양가 부모님들도 두 사람을 결혼시키지 못해 안달이니까.심씨 일가는 소씨 일가보다 조건이 달리지만 그렇다고 가난한 집안은 아닌지라 다 같은 재벌 가문에 속한다. 게다가 심효진의 고모는 김씨 일가의 사모님이니 심효진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준다.소정남과 심효진은 집안 조건이 대등하고 둘은 또 다 가십거리에 관심이 많다.전이진은 할머니가 장님 신붓감을 골라준 걸 안 이후로 소정남에게 부탁해 여운초의 조상 3대까지 낱낱이 파헤칠 심정이었지만 끝내 참았다. 소정남이 그의 일을 안줏거리로 삼을까 봐 꾹 집어삼켰다.하지만 전이진은 알까. 소정남이 작정하면 언제든지 그의 일을 파헤칠 수 있다는 것을...사무실에서 전태윤은 동생을 밖에 내쫓은 후 자연스럽게 하예정의 손에서 꽃다발을 건네받고 싸늘한 표정도
하예정은 정교한 봉투를 건네받으며 활짝 웃었다.“뭔데요?”전태윤이 소파에 앉으며 가볍게 웃었다.“보면 알아.”그는 도시락 뚜껑을 열고 와이프가 해준 사랑의 저녁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하예정은 힐긋 보더니 입꼬리를 씩 올렸다.“다 기초제품이네요. 소현 언니가 준 것도 아직 많이 남았는데.”전태윤은 질투에 눈이 멀어 아내가 성소현이 준 화장품을 쓰는 걸 원치 않았다. 하여 터프하게 기초제품을 한가득 샀지만 줄곧 선물하지 못했다.하예정도 그가 그냥 해본 말인 줄 알고 계속 성소현이 준 기초제품들을 써왔다. 전에 혼자 샀던 브랜드 제품들보다 피부에 훨씬 잘 맞았고 역시 돈의 힘이 크긴 컸다.“앞으론 내가 준 것만 써.”전태윤은 사실 여자들이 쓰는 기초제품 브랜드를 잘 모른다. 여자에게 기초제품을 선물한 적이 없으니까. 엄마한테 사적으로 물어보고 엄마의 추천으로 몇몇 브랜드 제품을 골랐다.그의 엄마는 평생 재벌가에서 지내다 보니 사용한 제품도 최상의 제품일 테니까.하예정은 그가 제일 사랑하는 여자이니 당연히 가장 좋은 제품을 써야 한다.하예정이 웃으며 말했다.“네, 앞으론 태윤 씨가 주는 것만 쓸게요.”“예정아, 함께 먹을래?”“아니요, 일 인분만 준비했어요. 아까 이진 도련님 봤을 때 함께 드시면 분명 모자랄 것 같았는데 다행히 눈치껏 나가주시더라고요.”‘형수님, 저는 형한테 쫓겨난 거잖아요.’전태윤이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걔가 눈이 멀지 않았다면 남아서 우리 둘 사이를 훼방하진 않겠지.”하예정은 실소를 터트렸다.그가 맛있게 먹어주자 하예정도 기분이 좋아져 여운초 꽃가게에 갔다가 여운별을 만난 일까지 얘기했다.“운초 씨는 진짜 앞이 안 보이는 것 같아요. 연기가 아니었어요. 큰 병을 앓고 나서 실명했대요.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라고 하더라고요. 막내 고모가 수년간 운초 씨를 데리고 갖은 안과 병원에 돌아다녔는데 결국 시력을 회복하지 못했대요. 여운별 씨는 악마가 따로 없어요. 자매지간에 저렇게까지 하는 사람은 처
“분명 우리한테 손 내밀 때가 있을 거야.”전태윤은 점사를 보듯 미래를 예지한 것처럼 말했다.하예정은 실소를 터트렸다.본인도 나무토막처럼 딱딱하면서 동생들이 도움을 청한다고 대체 뭘 도울 수 있을까? 죄다 불필요한 아이디어만 제공해 괜히 더 번거로워질 뿐이다.“여보 나 안 믿네?”“그럴 리가요.”전태윤이 그녀를 힐긋 쳐다봤다.“두고 봐. 힘들 땐 분명 이 큰형한테 구원의 손길을 내밀 거야. 내가 도움을 못 주더라도 나한테 고민은 하소연할 게 뻔해.”여덟 도련님은 전태윤을 아주 존경하고 믿는다. 그걸 봐서라도 하예정은 전태윤의 예언을 믿기로 했다.“여운별 씨는 당신이랑 안 다퉜지?”하예정은 여운별을 만났고 그 집 두 자매가 사이가 안 좋다고만 말했을 뿐 자신이 여운별과 다퉜다고는 하지 않았다.여운별이 아무리 기고만장해도 하예정을 건드려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전태윤은 하예정에게 몰래 경호원을 파견해 암암리에서 그녀를 지켜주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하예정은 결국 여운별이 버릇없게 군 사실을 전태윤에게 알렸다. 괜히 또 뭘 숨겼네, 가족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둥 갖은 원망을 퍼부을까 봐.전태윤은 그녀의 말을 듣더니 낯빛이 확 어두워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는 하예정 앞에 다가와 롤스로이스 차 키를 그녀 손에 쥐여주며 박력 있게 말했다.“예정아, 이 차는 앞으로 네가 타. 다음에 또 여운별 만나면 그때도 똥차라고 말할지 지켜봐 봐. 어딜 감히 겁도 없이 네 차를 짓부수겠다고 거만을 떨어!”여 대표는 직접 찾아와 아내와 딸 대신 정중하게 사과했는데 둘째 딸 여운별은 여전히 교훈을 섭취하지 못한 듯싶다. 되레 하예정이 이를 박박 갈게 하다니.죽고 싶어 환장한 게 틀림없다!“미친개가 사람 문다고 똑같이 물어버리게요?”하예정은 차 키를 그에게 돌려줬다.“난 내 똥차가 좋아요.”“예정아.”전태윤이 나지막이 그녀를 불렀다.“딴 사람들이 널 얕잡아보는 거 나 너무 싫어.”“한 사람을 얕잡아보는 기준이 그 사람이 타고 다니는 차가
전태윤이 아무리 아쉬워해도 하예정은 결국 전씨 그룹을 떠나 가게로 돌아왔다.그녀가 돌아왔을 때 학생들이 야간 자율 학습을 시작하지 않아 가게가 매우 바빴다.소정남도 아직 안 와서 하예정과 심효진이 한참 바삐 돌아쳤다. 소정남이 서점 문 앞에 도착했을 때 학생들도 곧 자율 학습 시간이 다 되어 가게에 손님이 확 줄어들었고 하예정이 홀로 가게를 돌볼 수 있었다.소정남은 올 때마다 심효진에게 꽃 한 다발 선물한다.심효진도 그에게 작은 선물을 건네며 두 사람 모두 섬세하게 서로를 잘 챙긴다.천생연분이란 바로 이 두 사람을 말하는 듯싶다.“예정아, 우리 밥 먹으러 갈게.”심효진은 가방을 챙기고 소정남이 선물한 꽃다발을 안은 채 활짝 웃으며 하예정에게 말했다. 하예정이 대답한 후 그녀도 안심하고 소정남과 함께 가게를 나섰다.하예정은 홀로 좀 더 바삐 돌아쳤다. 학생들이 자율 학습하러 학교로 돌아간 후에야 그녀는 주방에 들어가 음식을 덮여서 카운터에 앉아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예정아.”옆 가게 정씨 아저씨가 접시를 들고 음식을 먹으면서 안으로 들어왔다.“아저씨, 인제 저녁 드세요?”“그래, 너도네.”정씨 아저씨가 웃으며 물었다.“효진이는 나갔어? 꽃다발 들고 너희 가게로 자주 오는 잘생긴 남자분과 함께 가던데 남자친구야?”“네, 맞아요.”하예정은 정씨 아저씨에게 자리를 안내했지만 아저씨는 앉지 않았다.“그냥 한번 들러본 거야. 너랑 얘기도 나누고.”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담담하게 웃었다.“저번에 내기한 일 너랑 말했었잖아. 내 비상금을 전부 걸었는데 크게 벌었지 뭐야. 하하하, 네가 전씨 일가 사모님이 되어도 이 서점은 정상 운영할 테고 너도 늘 똑같이 출근한다고 했거든. 그런데 다들 안 믿는 거야. 네가 전씨 일가 사모님이 되면 집에서 사모님 노릇만 할 거라며 더는 얼굴을 내밀지 않을 거라고 하더니 내가 이겼어. 전부 다 졌다고, 하하하. 아쉽게도 내 비상금이 너무 적어서 더 많이 벌진 못했어.”하예정은 하마터면 사레 걸릴 뻔했다.그
정씨 아저씨가 말했다.“하긴... 마누라한테 말 안 하길 다행이지.”“아주머니가 매달 주시는 용돈이 적은 건 맞아요. 다만 아저씨도 평상시에 다른 지출이 있으면 아주머니가 거의 다 내주시잖아요. 양가 부모님들 생활비도 그렇고 경조사 비용에 아이 키우는 돈까지 모든 지출을 아저씨가 신경 쓸 필요 없으니 사실은 아저씨가 버신 거예요. 돈 관리하는 사람이야말로 제일 수고하죠.”정씨 아저씨는 밥을 먹으며 말했다.“맞아. 그래서 마누라도 돈 관리하는 걸 좋아하니 내가 그러라고 했어. 전에 내가 돈 관리할 땐 가게 장사가 아무리 잘 돼도 1년 동안 남는 돈이 400만도 안 됐거든. 마누라가 돈 관리한 이후로 1년에 무려 2000만 원이나 저축할 수 있어. 나도 편하고 집에 적금도 늘어나고 게다가 마누라까지 매우 공평한 사람이라 제 친정 식구들만 편애하진 않아. 양가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이 똑같아. 아주 칼 같다니까. 우리 부모님도 며느리를 엄청 마음에 들어 하셔. 예정아, 만약 우리 부부가 싸우면 그땐 온 집안이 모여들어 날 질책할 거야.”정씨 아저씨는 원망을 늘어놓는 것 같지만 실은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자랑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남들처럼 어마어마한 부잣집은 아니지만 아내가 현명하여 온 가족이 화목하게 지낸다.정씨 아주머니는 말만 날카롭게 하지 실은 누구보다 마음 여린 여자다.게다가 아주머니의 대인관계는 하예정도 따라 배우고 싶을 지경이다.“여보, 여보.”정씨 아주머니가 옆 가게에서 남편을 불렀다.정씨 아저씨는 재빨리 대답하곤 나지막이 하예정에게 말했다.“예정아, 꼭 비밀로 해야 해. 나 이만 간다.”하예정이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정씨 아저씨는 곧바로 가게에 돌아가며 아내에게 호응했다.아저씨가 나간 후 하예정도 곧장 배불리 저녁을 먹고는 주방에 들어가 설거지했다. 설거지를 마치고 나온 후 이웃 가게에 놀러 다니면서 다들 서로 몇 년 알고 지낸 사이라 가볍게 담소를 나눴다.이웃들은 하예정이 전씨 일가 사모님이 되면 그들과 멀리할 줄 알았는데 전
“네, 그럴게요.”건달들은 하예정의 신분을 모른다. 여운별이 바보가 아닌 이상 건달들에게 하예정이 전씨 일가 사모님이란 사실을 말할 리가 있겠는가. 그땐 돈을 얼마나 주던 이 일을 받을 자가 없다.“그때 가서 잔금까지 다 받으면 내 번호 삭제해. 내 말대로만 하면 너희들 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만에 하나 밖에 나가서 헛소리를 지껄인다면 그땐 나도 어떻게 나올지 몰라.”“가영 씨, 걱정 마세요. 저희 무조건 입단속 잘해요. 저희는 돈 받고 가영 씨 고민을 해결할 뿐이니 다 한배 탄 사람들이에요.”여운별은 제 본명도 건달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건달들과 연락한 전화번호도 일을 마치면 카드 채로 버릴 것이다. 이 전화 카드도 그녀 명의로 된 번호가 아니다.여운별은 전화를 끊고 하예정이 곧 큰코다칠 걸 생각하며 웃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그러게 누가 오지랖 넓게 남 일에 간섭하랬어? 여운초를 도운 대가가 무엇인지 톡톡히 보여줄게.’“똑똑.”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여운별은 웃음기를 거두고 물었다.“누구세요?”“운별아, 엄마야.”여운별은 그제야 문을 열고 엄마를 안으로 들였다.“운별아, 엄마 방금 침실로 돌아가려는데 네가 박장대소하는 소리가 들려서 한번 와봤어. 뭐가 그렇게 기뻐? 말해봐, 엄마도 함께 웃자.”여씨 사모님이 웃으며 물었다.동씨 가문 연회에서 돌아온 이후로 공주 같은 따님은 크게 망신당해 요 이틀 줄곧 저기압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여씨 사모님도 너무 속상했다.“엄마, 내가 방금 큰일 하나 성사했어요.”여운별은 먼저 엄마한테 물었다.“그 병신은 돌아왔어요?”“아직이야. 왜? 또 무슨 수작으로 운초 괴롭히려고? 그게 아니면 이렇게까지 박장대소할 리 없잖아. 엄마가 문밖에서도 네 웃음소리를 다 들었다니까.”여운초가 아직 안 돌아왔다는 말에 여운별도 경계심을 내려놨다. 여씨 별장에서는 그녀의 엄마가 주도권을 차지하니 모두가 엄마의 심복이라 여운초를 몰래 도와줄 사람이 없다.여운별은 저녁 무렵 여운초의 가게로 찾아가
고빈은 친누나 고현을 바라보았다.고현은 그녀의 커피 한 잔을 들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더니 우아하게 커피를 음미했다.“누나, 호영 씨가 누나 사무실에 있는데도 왜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어?.”고빈은 작은 소리로 고현에게 속삭였다.고현은 억울한 어조로 대답했다.“네가 들어오자마자 쉴 새 없이 말했잖아. 나에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은 건 너야. 호영 씨가 나와서 내가 계속 눈을 깜빡이는데도 넌 눈치 없이 내 눈에 문제 있는 줄 알고 깨닫지 못하다니. 너에게 귀띔해 주는데도 모르는데 누굴 탓할 수 있겠어?”“내 비위를 맞춰주지 않는다는 말은 글쎄 걱정은 안 되지만 내가 누나에게 호영 씨를 버리라고 한 말을 마음에 담아둘까 봐 그러지. 그 자식 평소에는 빙그레 웃으며 마냥 부드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척 음흉하잖아. 우리 부모님께 그 말을 일러바치면 난 집에 갈 엄두도 내지 못한단 말이야.”고빈은 자신의 수다스러운 입을 원망했다. 고현의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그녀에게 헛소리를 그토록 많이 하다니!이때 고현이 제안했다.“네가 요즘 출장 좀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아. 방금 호영 씨가 휴대전화까지 꺼내서 녹음했어. 네가 한 말 다 녹음한 것 같던데. 분명 우리 부모님께 들려드릴 거야. 그때 가서 엄마 아빠가 너에게 결혼 재촉하지 않으면 내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어.”고빈도 말을 이었다.“호영 씨가 음흉한 사람이라 우리 엄마 아빠를 잘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야. 누나, 내가 내일 비행기 표를 예약해서 가장 먼 도시로 출장을 갈게. 반달이나 한 달 뒤에 돌아올게.”그러자 고현은 문득 의문을 품었다.“갑자기 생각난 건데, 우리 지사에는 본사 직원이 가서 처리해야 할 큰일이 없어. 네가 출장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데 가서 뭐 하게? 게다가 강성이 바로 너의 집인데 너도 조만간 집으로 돌아와야 할 거 아니야. 난 언젠가 호영 씨에게 시집갈 텐데, 그도 너의 형부로 될 테고. 네가 나랑 혈연관계를 끊지 않는 이상 호영 씨와 연락을 해야 할걸.”“
“호영 씨가 나쁘다는 건 아닌데, 난 왠지 그 자식을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려.”고현은 친누나로서 고빈에게 치마를 입어 보인 적 없지만, 전호영에게 입어 보였고 또 전호영을 위해 모두에게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리기도 했다.고빈은 질투가 났다. 비록 고현이 여자 신분을 회복하고 좋은 시댁에 시집가기를 바라고 있지만, 막상 그녀가 시집갈 준비를 하니 고빈은 또 너무 아쉬웠다.“누나, 호영 씨에게 데릴사위가 될 수 있는지 물어보는 건 어때? 난 누나가 멀리 시집가는 것이 정말 아쉬워. 난 누나 한 명뿐이고 우리 부모님도 딸 하나뿐인데 정말 우리를 버리고 멀리 떠나려고? 호영 씨가 데릴사위로 장가오고 싶지 않아 하면 바로 차버려. 누나 같은 조건이라면 달려드는 남자들이 아주 많을걸. 누나, 눈이 왜 그래? 왜 자꾸 눈을 깜빡깜빡해? 눈에 뭐 들어간 거 아니야?”고현이 자신에게 계속 윙크를 하는 것을 본 고빈은 걱정스레 물었다.고현은 고빈을 노려보았다.이 녀석은 평소에는 매우 약삭빠르지만, 오늘은 유난히 둔했다.고현은 아예 일어나 책상을 에둘러 고빈의 팔뚝을 툭툭치고는 전호영의 손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받아 들으며 전호영에게 말했다.“호영 씨, 빈이가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마세요. 저도 빈이 말을 듣지 않을 테니까요.”고현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려 전호영의 어두워진 눈과 마주쳤다.전호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전호영을 등지고 그의 험담을 하며 고현에게 그를 차버리라고 한 사실을 본인에게 들켜버리다니,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전호영이 다 들은 건 아니겠지?혹시 조금만 들은 건 아닐까?고현도 그에게 귀띔해주지 않았다.맞다! 고현이 주의를 시키었지만, 고빈이 너무 둔해 눈치채지 못했다.고현이 계속 윙크를 보냈지만, 고빈은 그녀의 눈에 병이 난 줄로만 알았다.고빈은 속으로 몇 번이고 울부짖었다.‘난 오늘따라 왜 이리 멍청하지? 으악!’“고빈 씨는 저한테 불만이 많으신가 봐요. 제가 고빈 씨 비위를 맞추지 않았다고 제가 눈에 거슬린
그는 휴게실로 들어갔다.“호영 씨, 따뜻한 물 한 잔 주세요.”고현은 목이 말랐다.그러자 전호영이 대답했다.“알았어요.”곧 전호영은 그녀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가져다주면서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고현은 궁금한 듯 물었다.“왜 이렇게 쳐다봐요? 제가 낯설어 보여요?”“저는 현이 씨가 너무 멋있다고 생각해요. 정말 너무 멋있어요.”고현은 어이없다는 듯 그를 노려보고는 다시 앉았다.그리고 우아하게 물을 마셔 목을 축인 후 물잔을 내려놓고 컴퓨터를 켜면서 말했다.“제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저의 일이지, 그들의 상관할 바는 아니잖아요. 제가 그들의 물음에 대답하기만 하면 수많은 질문이 또 끊임없이 쏟아질걸요.”“그렇죠. 1년 후에 답을 얻게 된다고 했는데 제가 생각하는 그것이 맞나요?”전호영이 웃음을 머금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가 생각한 1년 후의 답은 바로 두 사람이 합법적인 부부로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이 노력하여 고현의 뱃속에 작은 전호영이 들어있기만 하면 그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모든 오해가 풀릴 것이다.고현은 그의 물음에 직접 대답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마음대로 생각하세요.”“헤헤, 제가 생각했던 게 맞는 모양이네요. 그렇게 되면 해명할 필요도 없겠네요. 그럼 가서 커피 내려줄게요.”전호영은 흐뭇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그의 사랑스러운 여인에게 커피 내려주러 들어갔다.고현이 중얼거렸다.“매일 바르지 못하기는...”생각해 보니 이 일은 고현 본인이 먼저 전호영에게 귀띔해 준 거나 다름없었기에 그를 원망할 수는 없다.전호영은 평소에 말로만 까불었지만, 여전히 그녀를 존중하고 그녀의 마지노선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고현이 먼저 신체접촉을 원한다면 전호영은 절대로 사양하지 않고 그녀의 모든 것을 독차지할 것이다.똑똑.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문밖의 사람은 고현이 대답하기도 전에 문을 밀고 들어왔다.고빈이었다.고빈은 고현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형,너무한 거 아니야?
“여자라는 사실을 확인하면 또 뭐해요? 여자 분장한 걸 알면 또 뭐할건데요? 예전에 제가 치마를 입고 고현 씨를 기분 좋게 하려는 것처럼 고 대표님도 단지 저를 행복하게 하고 싶은 마음뿐이에요.”기자들은 전호영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이대로 흩어지는 것도 너무 언짢았다.그들은 단지 답을 원했을 뿐이다.고현이 왜 남자 행세를 하고 다녔는지, 혹은 여자 분장을 한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흩어지지 않으실 생각이라면 얼른 길을 비켜주세요. 제가 들어가고 나서 다시 이곳에서 계속 기다리세요.”“고 대표님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습니다. 호영 도련님께서 들어가신다 해도 고 대표님을 볼 수 없으실 겁니다.”“고 대표님 차가 저의 바로 뒤에 있는데 못 보셨어요? 기자님들은 저의 차를 막을 수는 있어도 고 대표님의 차들을 감히 막을 용기가 있기나 하세요?”고개를 돌려보니 고현의 차들이 정말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기자들은 방금 전호영의 차를 포위한 것처럼 한꺼번에 고현의 차에 몰려들고 싶었다.그러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전호영은 강성의 사람이 아니다.설령 그가 전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이라 할지라도 조만간 관성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이고 또 친근감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기자들은 전호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그러나 고현은 강성의 사람이고 또 강성에서도 냉담한 성격으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녀를 건드리게 된다면 아마 강성에서도 무사하게 지내지는 못할 것이다.기자들은 여전히 답을 얻고 싶은 마음에 한꺼번에 몰려들어 고현의 차를 에워싸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차를 막아 보았다.차창을 내린 고현은 나지막하게 말을 내뱉었다.“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1년 후에 여러분들도 답을 얻을 수 있을 거란 말뿐입니다.”말을 마친 고현은 바로 차창을 올렸다.1년 후, 고현은 분명 전호영의 아내로 될 것이고 임신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의 배가 많이 나온 모습을 보면 모두에게 답을 준거나 마찬가지였다.고현은 자신의 사적인 일에 대해 기자들에게 자
전태윤은 또 반 시간 동안 하예정의 사무실에 붙어있다가 아내의 독촉으로 사무실을 떠났다.강성.고씨 그룹, 고씨 가문의 저택, 하루 호텔, 그리고 고성 호텔에는 많은 연예 기자들이 지키고 있었다.그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바로 고현 도련님이 진짜 여자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이다.고씨 가문의 저택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연예 기자들이 초인종을 눌렀지만 누군가가 나와서 확인만 했을 뿐 여전히 기자들을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기자들이 확인하러 나오는 사람한테 물어보았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대답만 들었다.고진호 부부의 휴대전화는 여전히 꺼진 상태였고 고빈의 전화는 연결되지만, 그는 똑똑하게도 모르는 전화가 걸려오면 아예 받지 않았다.지금 고현은 회사로 돌아가는 길이다.물론 전호영도 그녀와 함께 있다.차가 고씨 그룹에 거의 도착했을 때, 전호영의 차가 먼저 앞쪽으로 달려갔다.회사 입구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연예 기자들은 익숙한 마이바흐를 보더니 우르르 몰려갔고 전호영은 결국 급정거할 수밖에 없었다.그들은 전호영의 차를 막은 뒤에야 비로소 그 차가 고현의 차가 아님을 깨달았다. 눈앞의 차는 고현 도련님의 차가 아니었다.고현의 차 번호판도 맞지 않거니와 뒤에 고현의 경호원 차들도 따라오지 않았다.이것은 전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의 차였다.이때 전호영이 천천히 차창을 눌렀다.“호영 도련님, 고 대표님이 여자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호영 도련님, 혹시 고현 도련님이 여자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어젯밤 송씨 가문의 연회에 함께 참석하셨을 때 호영 도련님은 고 대표님께서 치마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보고 기분이 어떠셨습니까?”아직 당사자를 잡지 못했지만, 전호영을 잡은 기자들은 전부 모여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전호영은 고현과 동성연애를 하고 있다.두 사람은 친밀한 일을 했을지도 모르는데 전호영은 고현이 여자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전호영이 대답했다.“저는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 대표님이 여자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지
하예정은 웃으면서 해명했다.“동서들과 어울리지 못할까 봐 물어본 거 아니에요. 단지 할머니께서 어떤 며느릿감을 고르실지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에요.”그녀는 이런 가십거리를 매우 좋아했다.동서끼리 사이가 안 좋을까 봐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씨 할머니의 안목은 무척 좋기 때문에 전씨 할머니께서 고르신 아내감은 분명 인성 좋은 사람일 것이다.설령 인성이 나쁘더라도 하예정과 마음이 맞지 않아도 괜찮았다.그들은 모두 서원 리조트에 살고 있지만, 모두가 서로 다른 별장에 살고 있었다. 함께 살지 않으니 마음이 맞으면 서로 좀 더 잘 만나고 마음이 맞지 않으면 관계만 잘 유지하면 그뿐이었다.전태윤이 말을 이었다.“나도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몰라. 아마 비주얼은 좋을 것 같아. 어쨌든 우리 사촌 동생들은 전부 다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할머니께서도 못생긴 여자는 고르시지 않을 거야. 이혁이도 오랫동안 날 찾아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됐는지 몰라.”전태윤은 심지어 전이혁의 미래 아내의 성씨도 몰랐다. 그의 여자도 아니었기에 너무 많은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언젠가 동생들도 그들의 여자들을 데리고 부모님을 뵈러 올 것이다.“그런데 할머니께서 저를 마음에 들어 하시는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저는 못생기지 않게 생겼지만, 우리 집안은 부유하지도 않고 전씨 가문의 재력과는 너무 차이 나는 데다 태윤 씨는 전씨 가문의 장남이잖아요, 왜 태윤 씨와 저를 맞세우려고 하셨는지, 또 왜 우리 두 사람을 결혼시키려고 하셨는지... 태윤 씨도 무척 난처했겠네요.”전태윤은 잠자코 있다가 대답했다.“우리는 아마도 그 점쟁이가 점을 쳐 주신 덕분일 거야.”전씨 할머니는 그 점쟁이를 가장 신임하셨다. 점쟁이는 전태윤과 하예정이 부부 인연이 있다면서 만약 그가 하예정을 놓치게 되면 평생 홀아비로 살 것이라고 귀띔해주셨다.전씨 할머니는 장남 전태윤을 가장 아끼시는데 어떻게 그가 홀아비로 살게 할 수 있겠는가!하여 전씨 할머니는 몰래 하예정의 인성을 관찰하다가 인품이
사람들에게 하예정의 친정집의 실력도 강하다는 것을 알게 해야 했다.하예진은 이경혜의 지시에 따라 강성에 와서 이은숙 가족 교통사고의 진실을 추적하는 것 외에도, 이씨 가문의 주인 자리를 되찾아 하예정의 친정집에도 재력이 막강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강성 이씨 가문은 점점 몰락하고 있지만, 어쨌든 재벌 가문이기 때문에 지금의 하씨 집안보다는 훨씬 나았다.하씨 집안에도 가족들이 많지만, 고향의 그 “일품” 친척들은 하예정의 발목만 잡는 사람들이라 연계를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다.통화를 끝내자 하예정은 휴대전화를 들고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전태윤은 부드럽게 물었다.“무슨 생각해?”하예정은 빙그레 웃으며 전태윤의 어깨에 기대며 말을 이었다.“당신 그래요? 운명이란 게 참 이상해요. 저는 지금 같은 날은 꿈도 꾸지 못했거든요. 우리 엄마가 원래 부잣집 딸일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게다가 제가 태윤 씨와 결혼하게 되다니, 사람 사이 인연이란 게 참 신기해요. 내일 일어나게 될 일을 누구도 모르잖아요.”전태윤은 하예정의 얼굴에 뽀뽀하고 난 뒤 말을 건넸다.“처형이랑 일상적인 통화를 하는 것 같더니 왜 이렇게 감회가 새로워졌어? 먼저 회사로 갈 거야? 아니면 서점으로 가려고? 내가 너 데려다주고 다시 회사로 갈게.”“일단 회사로 돌아가야죠. 지금 이 시간이면 학생들도 다 수업하고 있을텐데 가게도 별일 없을 거예요. 서점으로 간다 해도 한가해서 파리만 잡을 텐데. 지금은 날씨가 추워서 파리도 없겠네요.”“그래.”“참, 저의 언니가 말씀하시는데 어제 고 대표님이 연회에 드레스를 입고 참석하셨다면서요? 호영 도련님께서 드디어 소원을 이루셨네요.”전태윤이 웃으면서 말했다.“호영이가 어젯밤에 기뻐하며 나에게 이 좋은 소식을 알려주더라고. 이진이와 호영이가 결실을 보았으니 이제 이혁이와 전우만 남았네.”지난번에 어떤 여자가 전씨 그룹에 가서 전이혁을 찾으러 갔었다. 전이진은 그에게 전화를 걸어 물건을 훔친 거 아니냐면서 캐물었
하예정이 웃으면서 대답했다.“우빈은 말할 것도 없고 나조차도 아침에 이불 속에서 겨우 일어났어. 언니, 강성은 더 춥지? 인스타에서 보니 사람들이 눈 내리는 영상을 찍어 올렸던데. 우리 관성은 눈은 오지 않지만, 강성 쪽에 눈이 오면 우리 여기도 따라서 추워져.”관성 기온은 낮에는 10도가 넘지만, 밤에는 가장 낮아서 8~9도까지 떨어지곤 한다.이런 기온은 강성 사람들에게는 춥지 않지만, 더위에 길들여진 관성 사람들에게는 매우 추운 날씨다.“옷 좀 더 입혀줘. 유치원에서 나누어준 겨울옷은 너무 두껍지 않으니까.”우빈은 겨우 세 살 남짓 된 어린이였기에 하예진이 걱정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건 분명 거짓말일 것이다.“입혔어. 그런 걱정하지 마. 언니도 강성에서 감기 조심하고. 많이 입고 다녀.”“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걱정하지 마. 넌 오늘 회사로 출근했어? 요즘 관성도 추울 텐데, 먼저 집에서 쉬는 건 어때? 제부가 돈 잘 벌잖아. 네가 회사로 뛰어다니면서 돈 벌 필요 없어.”하예진은 너무 바빠서 땅에 발을 내디딜 틈이 없으면서도 여동생에게는 집에서 배 속의 아기를 잘 돌보라고 설득했다.“괜찮아. 우리 회사에도 일이 별로 없어서 그냥 와 본 거야. 좀 이따가 서점에 들러야 해. 정남 씨가 이틀을 휴가 내서 나도 효진에게 쉬라고 했어. 두 사람이 함께 편히 쉬라고 가게에 나오지 말라고 했어. 나 혼자서도 충분히 볼 수 있으니까.”소정남은 늘 전태윤에게 그의 아내가 샤브샤브를 먹고 싶어 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먹지 못한다고 투덜댔다.하예진도 그냥 잔소리 한 번 해봤을 뿐 하예정이 말을 듣지 않을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더는 말을 설득하지 않았다.하예진은 과거 임신하여 집에서 쉬면서 사회와 단절되었고 출산한 뒤로도 모든 정력을 우빈에게만 쏟아부어 자기 관리에 소홀해 몸매가 많이 무너졌었다.그러나 전태윤은 주형인처럼 어리석게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하예진의 실패한 결혼은 하예정에게 경적을 울릴 것이고 하예정도 최대한 친언니의 과거 생활을 피해 가려
전호영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내뱉었다.“당연히 습관 되지 않을 거예요. 현이 씨는 평소 너무 엄숙해요. 너무 부끄러우면 방에 혼자 있을 때 연습해도 되는데. 누구도 듣지 못하면 누가 현이 씨를 비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잖아요.”고현은 전호영이 계속 말하는 모습을 보더니 스테이크를 한 조각 잘라 포크로 그의 입에 쑤셔 넣었다.따르릉...전호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하예정이 걸어온 전화였다.전호영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예진 누나, 무슨 일 있어요?”“없어요. 그냥 호텔 문 앞에 기자들이 많다고 알려주려고요. 혹시 고현 씨가 혹시 외부에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인정하셨어요? 기자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왔는데 아마도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싶어서 찾아온 것 같아요. 하루 호텔에 와서 모여있는 거로 보면 아마 맞은편의 고성 호텔에서도 지키고 있을 거예요. 아까 일구 씨가 가봤는데 확실히 기자들이 몰려들어 있대요. 오늘 호텔에 모여있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호영 씨, 어제 호영 씨와 고현 씨가 무슨 일을 벌인 거 맞죠? 소문이 어찌나 빠른지 아침에 식사하러 내려왔는데 저도 벌써 그 소문을 듣게 됐다니까요.”전호영은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마치 저와 현이 씨가 어젯밤에 바람을 피우다가 잡힌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하하! 어젯밤에 저와 현이 씨가 송씨 가문 연회에 참석하러 갔거든요. 현이 씨가 드레스를 입고 참석했을 뿐이에요. 다른 건 아무 일도 없었어요.”하예진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웃으며 말을 건넸다.“그렇군요. 축하드려요. 고현 씨가 호영 씨를 위해 치마를 입다니, 그녀가 드디어 호영 씨를 사랑하게 됐네요. 저는 두 사람의 결혼 축하주를 마시기만을 기다리면 되겠네요.”고현은 전호영에 대한 감정이 매우 더딘 편이었다.전호영이 고현을 쫓아다닌 지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는데, 그녀는 이제야 사람들이 전호영을 오해하는 것이 가슴 아팠고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하여 고현은 자발적으로 치마를 입고 세상 사람들에게 그녀가 원래 여자이고 전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