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혼약이 아니었다면 아마 한지혜는 집을 나가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과 같은 상황도 일어나지 않았겠지.어쩌면 한평생을 부모님 밑에서 공주처럼 살았을 수도 있었다.그랬다면 조수아라는 좋은 친구를 사귈 수도, 그렇게 많은 대단한 사람들을 만날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지난 시간을 떠올리던 한지혜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돌았다.자기 인생은 자기가 사는 거지.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삶이야말로 멋도 있고 보람도 있지 않을까.한창 추억에 잠겼을 즈음 하지연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지혜 언니, 연이 옆집에 떨어졌어요. 같이 가서 찾아줘요.
집안은 한지혜가 가장 좋아하는 심플하고 모던한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가구들은 전부 한지혜가 좋아하는 아이보리 색상이었고 실내 인테리어에 쓰인 색상은 흰색 아니면 연분홍색이었다.다 큰 남자가, 이유 없이 이런 색으로 집을 꾸몄을 리가 없었다.그걸 생각하지 않은 이상...어쩌면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한지혜는 가슴이 아파져 왔다.이 별장은 허연후가 기억을 잃기 전에 산 것이었다.하지만 며칠 있어 보지도 못하고 사고가 났다.허연후는 한지혜한테 한 번도 이 별장에 관해 얘기한 적이 없었다.만약 정원에 있는
허연후는 한지혜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한지혜의 눈에는 슬픔이 비쳤다.허연후의 기억상실은 한지혜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사진 속의 한지혜는 허연후를 좋아하고 있었다.한지혜는 사랑이 가득한 눈빛으로 허연후를 바라보고 있었다.하지만 지금의 한지혜가 허연후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냉담함과 불쾌함 뿐이었다.사랑하던 두 사람이 허연후의 기억상실 때문에 헤어졌다.이런 생각이 들자 허연후는 미간을 찌푸린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한지혜 씨, 미안해요.”허연후의 사과에 한지혜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미안해할 거 없어요. 감정이 그렇
허연후가 한지혜에게 다가와 그녀 손에 들린 짐을 받아 들고는 여유롭게 말했다.“차를 두 대만 가져와서 자리가 모자라길래, 내가 널 데리러 왔어.”한지혜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리 없었지만, 대강 상황은 짐작이 갔다.‘아마도 수아와 육문주가 계획한 일이겠지...’한지혜는 고집부리지 않고 연후의 차에 올라탔다.허연후는 뒷좌석에서 담요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덮고 잠깐 눈 붙여. 지금 출발해도 도착하기까지 세 시간 정도 걸릴 거야.”열이 내린 지 얼마 안 됐던 한지혜는 아직 기운이 없었던 터라, 담요를 덮자마자
“좋아. 이모가 내년에는 꼭 천우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좋아요! 그러려면 연후 삼촌이랑 화해부터 해야겠죠? 두 분이 빨리 화해해야 제가 하루라도 더 빨리 미래의 아내를 만날 수 있잖아요.”“응? 연후 삼촌이 아니어도 이모는 아이를 가질 수 있어. 걱정하지 마. 이모가 예쁘고 귀여운 꼬마 신부가 태어날 수 있게 노력해 볼게.”그들이 신나서 이야기하던 중, 텐트가 열리더니 허연후의 큰 그림자가 들어왔다.그는 한지혜 옆에 앉아 천우를 품에 안으며 그의 엉덩이를 톡톡 치고 웃으며 말했다.“천우야, 꼬마 신부를
허연후의 말에 정곡을 찔린 한지혜는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는 서둘러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한지혜는 고개를 돌리며 상처가 아픈 척 말했다.“연후 씨 때문에 더 아파졌잖아요...”허연후는 그녀가 왜 우는지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손을 멈추고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지혜야, 미안해.”그가 사과하지 않았다면 몰랐겠지만, 미안하다는 한마디에 한지혜는 애써 참아왔던 감정이 무너져 버렸다. 그녀는 얼굴을 두 무릎에 묻고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좋아요!”“꽉 잡아. 속도를 올릴 거야.”허연후가 그렇게 말하며 가속 페달을 밟자, 요트는 마치 슈퍼히어로처럼 바다의 큰 파도들을 넘어갔다. 두 사람은 깊은 바다를 향해 질주했다.한지혜는 온몸이 흥분으로 가득 찼다.“연후 씨, 큰 파도 밀려와요! 빨리 넘어봐요!”“우와! 진짜 날아갈 것 같아요!”“연후 씨, 우리 이러다 길 잃어버리는 거 아니죠?”그녀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즐거운 표정을 보이자, 허연후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는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지혜야, 저기 봐.”한지혜는 허연후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
한지혜는 허연후의 말을 듣고 눈빛이 흔들렸다.“뭐라도 기억난 건가요?”“그런 게 아니라면 믿어줄 수 있어?”허연후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실 그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한지혜에게 강하게 이끌릴 뿐이었다.다른 남자와 대화하는 그녀를 보면 마음이 불편해졌고, 그녀가 다치면 그 역시 아팠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면 꼭 안아주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이 그가 한지혜를 좋아한다는 증거였다. 과거의 약속이나 어떤 관계의 얽매임 없이, 그저 그녀에게 끌리고 좋아하는 감정이었다.허연후의 말에 한지혜는 믿기지 않는
송학진은 바로 일어나 송군휘를 부축하며 말했다.“아빠, 급해 마시고 제가 부축할 테니 함께 마중 나가요.”“그래. 빨리 가자.”두 사람이 별장에서 나오자 조수아와 육문주는 이미 아이를 안고 차에서 내린 뒤였다.송군휘와 송학진이 다가오는 것을 본 조수아는 순간 눈빛이 어두워지며 송학진을 불렀다.“오빠.”그리고 이내 시선을 다시 송군휘 쪽으로 돌렸다.초점 없는 눈으로 조수아와 육문주의 방향을 보고 있는 송군휘는 많이 늙은 것 같았다.송군휘는 어색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웃고 있었다.조수아는 겨우 입을 떼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천우는 조수아가 깨어나자 즉시 그녀의 품에 안기며 얼굴에 뽀뽀하고 말했다.“조금 있으면 유치원에 가야 하잖아요. 그러면 엄마를 온종일 볼 수 없으니까 지금 많이 봐두는 거예요.”조수아는 천우를 껴안고 뽀뽀를 하며 말했다.“그럼 엄마도 우리 천우 온 하루 뽀뽀 못 해주니까 많이 해줘야지.”조수아의 사랑에 천우는 행복한 얼굴로 그녀의 목을 껴안고 ‘깔깔’ 웃어댔다.마침 방문을 열고 이 화면을 본 육문주는 천천히 걸어 들어와 천우의 엉덩이를 툭툭 치고 웃으며 말했다.“뭐 하는 거야? 나 없는 사이에 내 와이프한테 몰래 뽀뽀하는
육문주의 말에 조수아는 놀라며 물었다.“언제 찾았어? 왜 말을 안 한 거야?”육문주는 예쁘장한 조수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몇 초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진작에 찾았었는데, 너한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말 못 했어.”워낙 민첩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던 조수아는 금방 눈치를 채고 물었다.“왜?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이야?”조수아는 육문주가 알고 있었음에도 말하지 않았다는 건, 기증자가 무조건 조수아와 관계가 있을 거로 생각했다.‘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면 육문주가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겠지.’머릿속에서
천우의 진지한 모습이 웃긴 육문주는 천우의 볼을 꼬집고 웃으며 말했다.“남아일언 중천금이 맞아. 그래서 나도 지켜야 해. 네 외삼촌한테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나도 말 못 해. 빨리 자.”육문주는 천우를 눕혀놓게 이불을 잘 덮어준 뒤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조용히 말했다.“감정적인 일은 강요할 수 없어. 네 외삼촌이 만약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면 이미 만났을 거야. 그런데 만나지 않고 혼자 지낸다는 건 아직 그 사람을 잊지 못했다는 거겠지? 우리는 방관자로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권리가 없어.
아림은 알 듯 말 듯 큰 눈을 몇 번 깜박이며 작은 두 손은 서로 손가락을 마주 대고 실망한 듯 말했다.“아쉽다. 아저씨처럼 좋은 남자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은데.”아림은 차서윤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은 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위로했다.“엄마, 걱정하지 마요. 내가 꼭 더 좋은 남편을 찾아줄래요.”차서윤은 웃으며 말했다.“됐어. 얼른 씻고 자. 엄마는 해야 할 일이 있어.”침대에 혼자 누워 있던 아림은 생각할수록 이해가 되지 않아 곧바로 일어나 천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천우는 전화를 받자
10여 분 뒤, 송학진이 방문을 밀어젖히자 차서윤이 거울을 보며 피가 흐르는 머리를 수건으로 닦고 있었다.방안은 한바탕 싸움이 일어난 듯 물건들은 여기저기 널려있었고 아림은 차서윤의 곁에 서서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두 모녀의 안쓰러운 모습에 송학진은 가슴이 아파 곧바로 다가가 아림을 품에 안은 채 차서윤을 보며 물었다.“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누가 널 이렇게 때렸어?”차서윤은 놀라며 물었다.“송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에요?”“대답부터 해. 누가 이런 거냐고?”차서윤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저의
송학진은 두 아이 때문에 어이없어 웃음이 나왔다.결혼을 빨리하라고 아버지한테 결혼 재촉을 받고, 친구들한테는 솔로라고 비웃음당하고, 이제는 두 아이가 대신해서 결혼 상대를 찾아주기까지 하다니.거기다 원 플러스 원?송학진은 육문주한테 눈길을 돌리며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이거 다 네가 가르쳐 준 거지? ”육문주는 가볍게 코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내가 가르쳤으면 내가 가르친 거라고 말을 하겠지. 네 조카야, 아직도 몰라? 천우는 말로 죽은 사람도 살려.”“내가 죽은 사람이라는 뜻이야?”“아니, 넌 사람 축에도 못 가지.
천우는 웃으며 말했다.“아림이가 삼촌을 무서워할까 봐 그런 거잖아요. 외삼촌, 이쪽은 제 친구 아림이라고 해요. 우리 아림이 데리고 백화점에 가서 치마를 사주고 같이 피자 먹어요.”송학진은 그제야 어린 소녀 쪽을 바라보았다.이목구비가 정교하게 생긴 여자아이는 살결이 희고 검고 반짝이는 큰 눈에는 어떤 아픔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여자아이가 좀 낯이 익다고 느껴진 송학진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송학진은 허리를 굽혀 아림을 똑바로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왜 그렇게 날 보고 있었어? 날 알아?”아림은 눈
육문주가 선생님 곁에 서 있던 아림이를 바라보자 어린 소녀는 바지가 흠뻑 젖어있었고 상의도 우유 때문에 얼룩이 져 있었다.등교 첫날부터 이런 문제를 일으키는 천우 때문에 육문주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그는 허리를 굽혀 아림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가 집에 가서 천우 혼내줄게. 그리고 새 옷 한 벌 사줘도 될까?”아림은 검고 반짝이는 큰 눈을 몇 번 깜박거리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 천우 탓하지 마세요. 제가 동의해서 한 거예요.”육문주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