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허연후는 3일 내내 혼수상태에 빠져있었다.그리고 4일째 되는 날 아침, 드디어 그가 눈을 떴다.눈을 뜨자마자 한지혜의 모습이 보였는데 그녀는 한창 따뜻한 물수건으로 그의 몸을 닦아주고 있었다.그 모습에 허연후는 단번에 한지혜를 밀치더니 다 갈라진 목소리로 차갑게 물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그의 목소리에 한지혜가 냉큼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허연후는 한껏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는데 그의 말투와 행동만 보아도 자신을 못 알아본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바로 이때, 밖에서 하지연이 병실 안으로
오랜만에 다시 보니 얼굴은 익숙하지만 그의 차가운 눈빛 때문에 한지혜는 순간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그가 낯설게만 느껴졌다.하지연은 재빨리 한지혜한테 달려와 그녀의 목을 끌어안고 반갑게 인사했다.“지혜 언니, 너무 보고 싶었어요.”한지혜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넌 잘 지냈나 보네? 얼굴에 살이 좀 올랐어.”“맞아요. 제가 돌아가서부터 두 어머니께서 매일 맛있는 요리만 해준 덕분에 살이 엄청 쪘어요.”“살이 좀 오르니까 더 보기 좋네. 학교 쪽 일은 어떻게 됐어?”“오빠가 어제 입학 수속 밟아줘서
그의 말 한마디에 하지연은 울음을 뚝 그쳤다.그녀도 지금의 허연후가 예전의 그 다정다감한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다.하여 그의 앞에서 너무 버릇없게 굴면 안 된다.하지연은 재빨리 눈물을 닦은 뒤 허연후의 팔짱을 끼고 파티장 안으로 들어갔다.들어가자마자 그녀는 한지혜와 고인우가 한창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두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화기애애해 보였는데 한지혜가 활짝 웃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하지연은 허연후를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오빠, 저 사람이 바로 고인우인데 지혜 언니를 좋아하고 있거든요
그의 물음에 한지혜는 자기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다시 차가운 눈빛으로 그에게 말했다.“저에 대한 기억이 아예 없는 사람한테 굳이 지나간 일을 말해줘야 하나요? 걱정하지 마요. 저를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매달릴 만큼 속 넓은 사람이 아니니까요.”말을 마친 뒤 그녀는 다시 허연후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허 대표님의 요구대로 술도 이미 권해드렸는데 저는 이제 다른 손님들을 맞이해야 해서요. 먼저 가보겠습니다.”말을 마친 뒤 급히 자리를 떴다.하지만 돌아선 그녀의 눈가는 어느새 빨개져 있었다.눈앞의 남자는
“지혜 언니, 고마워요.”한지혜는 신영에게 긴 셔츠와 생강차 한 잔을 부탁했다.하지만 하지연은 생강차를 마셔도 여전히 배가 아픈지 핼쑥해진 얼굴로 한지혜를 끌어안고 다시 말했다.“지혜 언니, 아무리 생강차를 마셔도 저한테는 효과가 없는 것 같은데 집에 가서 진통제나 먹어야겠어요. 예전에도 자주 생리통이 있었는데 심할 때마다 엄마랑 같이 병원에 가곤 했어요.”한지혜는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그 정도로 심각했었어? 그럼 빨리 집에 가봐. 여긴 에어컨 바람이 너무 세서 안 되겠다. 집에 가서 전기장판 켜놓고 핫팩도 꼭 붙이고
한지혜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다가 또다시 허연후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쳤다.다정했던 그의 눈빛에는 더 이상의 따뜻함은 사라진 채 오직 차가운 한기만 돌았다.그 냉정함 때문에 한지혜는 그가 한없이 낯설게 느껴졌다.하지만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그럴 리가요. 단지 연후 씨랑 단둘이 있기 싫어서요.”허연후는 그녀의 까맣고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 쳤다.“제가 지혜 씨에 대한 기억을 잃은게 엄청 원망스러운가 봐요?”한지혜가 그를 힐끔 쳐다보며 답했다.“또 다시 허연후 씨랑 얽히는게 싫었을 뿐이에
따뜻한 숨결이 전류가 흐르듯 허연후의 배를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것 같았다.찌릿찌릿한 느낌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한지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은 소리로 위로했다.“괜찮아요. 누가 무단 횡단을 하는 바람에.”갑자기 들려오는 익숙한 말투에 한지혜는 잠시 멍해졌다.순간 허연후가 기억을 잃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았기 때문이다.매번 위험에 처할 때마다 그는 한지혜를 이토록 다정하게 위로해 줬다.한지혜는 익숙한 그의 체향을 맡다보니 또다시 예전에 두 사람이 같이 보냈던 시간들이 머리속에 떠오르면서 점점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
한지혜는 방에 들어간 뒤 약상자를 꺼내 신하준의 팔을 붕대로 감아줬다.“오늘 큰 도움 주셨는데 나중에 밥 한 끼라도 살게요.”신하준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그녀에게 말했다.“근데 내가 아무리 이렇게 도와줘도 그때 그 일에 대해서는 아직 용서해 줄 마음이 없잖아.”“그 일은 하준 씨 잘못도 아닌데요. 하준 씨 탓한 적 없어요.”“근데 우리 어머니한테 맞았잖아. 그 후로부터 계속 너한테 미안한 마음은 큰데 뭐라고 사과해야 할지 모르겠어.”한지혜가 털털하게 웃더니 그에게 다시 말했다.“하준 씨 덕분에 우리 지연이가 심장 수술
윌리엄 청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말도 안 돼. 육연희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리고 배우진이 육연희를 끔찍하게 아낀다는 것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고. 그런데 이렇게 위험한 일에 육연희를 끌어들였다고? 아이와 아내를 잃을까 봐 두렵지도 않았단 말이야?”“그러니까 이 일은 애당초 육연희와 배우진이 함께 꾸민 일이예요. 우린 다 속은 거고요. 아버지, 생각해 보세요. 배우진이 육연희를 그렇게 아끼는데 위병도 없이 외출하게 한 것 자체가 이상하잖아요. 제 생각에는 그들이 고의로 우리에게 납치하게끔 기회를
배우진의 말에 윌리엄 요한은 고개를 쳐들고 웃으며 말했다.“하하하, 아이고 무서워라. 날 어떻게 죽일지 궁금하네?”말을 마친 윌리엄 요한이 칼을 들고 육연희의 얼굴을 그으려는 찰나 배우진은 순식간에 윌리엄 요한에게 달려들어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윌리엄 요한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바로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던 비수를 배우진의 가슴에 꽂았다.눈치를 채고 몸을 피하려 했지만 이미 한발 늦었던 배우진의 가슴에는 순식간에 새빨간 피가 흘러나와 하얀 셔츠를 붉게 물들였다.이를 본 육연희는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안돼! 죽이지
배우진의 말에 육연희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윌리엄 청은 이상한 움직임이 없었어?”“내가 B 시로 출장 가는 것을 알고 길에 사람을 매복해 둔 것 같아. 다행히 임시로 취소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십중팔구 무슨 일이 났을 거야.”“윌리엄 청은 네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윌리엄 가문에 이익을 주기는커녕 그의 자리까지 빼앗으려 하니 널 죽이고 싶은 거야.”배우진은 웃으며 육연희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임신하면 어리바리해진다고 하던데, 우리 여보는 여전히 총명하네?”“배우진, 지금이 어느
밥을 먹던 아림은 송학진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지며 까맣고 반짝이는 눈으로 송학진을 빤히 바라봤다.아림은 당장이라도 송학진의 품에 안기고 싶었고 진심으로 그가 자신의 아빠가 되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자상하고 아이도 이뻐하는 아저씨가 나는 너무 좋은데, 왜 내 아빠가 아닌 거야?’이런 생각에 서러워진 아림은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가련하면서도 불쌍한 아림의 모습에 놀란 송학진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아림아, 왜 그래? 얘기가 듣기 싫었던 거야?”아림은 고개를 연신 저으며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
말을 마친 송학진이 기름이 번지르르한 손으로 천우를 만지려 하자 깜짝 놀란 천우는 도망치며 말했다.“도와주세요. 노총각이 화났다고 나한테 복수한대요.”두 사람이 즐겁게 장난치는 것을 보고 있는 아림의 까맣고 큰 눈에는 부러움이 어려 있었다.아림은 송학진과 이렇게 장난치며 놀 수 있는 천우가 부러웠고 자기도 그렇게 놀고 싶었지만, 송학진은 손님이니까 예의를 차려야 한다는 차서윤의 말이 떠올라 조용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아림은 송학진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들어 송학진을 바라보고 말했다.“
마지막 한 입을 남겨두고 있을 때 갑자기 문 앞에서 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외삼촌, 지금 간접 키스를 하는 거예요?”천우의 말에 포크를 쥔 손을 멈칫하던 차서윤은 그제야 송학진과 같은 포크를 사용했음을 알아차리고 마음속으로 자신을 호되게 꾸짖었다.‘네 것 내 것 없이 물건을 같이 쓰는 이 습관 언제면 고칠 거야.’대학 다닐 때도 차서윤은 친구들과 라면 하나를 같이 나눠 먹거나 음료 하나를 같이 나눠 마시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늘 그렇게 지내왔다.차서윤은 바로 손을 움츠리고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미안해요. 아림
차서윤은 지금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고 있었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사람의 뇌는 언제나 둔해지는 법이다. 그녀는 볼을 부풀리며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화난 듯한 표정으로 송학진의 목에 앞치마를 묶으며 말했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건 대표님이 때려서 그래요.” 그녀의 말에 송학진은 갑자기 몇 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차서윤은 대학을 갓 졸업했을 때 성격이 활발하고 일 처리는 빨랐지만 입이 자주 앞서서 늘 그와 반대로 하려 했었다. 그가 커피에 설탕을 넣지 말라고 하면
그가 사람을 무시하는 듯한 모습에 송학진은 화가 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그는 천우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 “이렇게 큰 소리로 말하기야? 네 삼촌이 아직도 싱글이라는 걸 다들 알아야겠냐?” “뭐가 겁나요. 저는 삼촌의 아내를 찾아주는 중이에요.” 두 사람이 말싸움하는 모습을 보며 차서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녀는 천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가자. 오늘은 아줌마가 프랑스 요리 사줄게.” 그러고는 천우의 손을 잡고 밖으로 가려고 했지만 천우가 갑자기 말했다. “근데 저는 프랑스 요리 별
그 메시지를 받은 송학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리고 간단히 답장을 보냈다. [언제든지 괜찮아. 차 비서가 정해.] [오늘 저녁 괜찮을까요? 제가 아림이랑 천우 데리고 대표님이 좋아하는 그 레스토랑에 갈게요.] [그래. 좀 이따 보자.] 간단한 문자를 보며 ‘차 비서'라는 익숙한 말에 차서윤은 마음속에 물결이 일렁였다. 몇 년 전의 몇 장면이 떠올랐다. “차 비서, 커피에 왜 설탕을 넣은 거야?” “인생이 이미 너무 쓰니까요. 그걸 더 쓰게 만들 이유가 없잖아요.” 송학진은 커피를 한입에 다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