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은 깊어 보이지만 감정은 잘 드러내지 않고 있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지금처럼 허연후가 방금 한 말이 농담인지 아니면 어떠한 감정을 실어서 한 말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기 힘든것처럼 말이다.한지혜는 그를 힐끔 쳐다보고는 덤덤하게 답했다.“그렇게 깨끗이 잊은거면 허연후 씨한테는 제가 그리 중요하지 않았나 보죠. 제 말이 맞죠?”그녀의 물음에 허연후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한지혜의 눈빛만 보아도 그녀가 지금 얼마나 슬픈지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비록 외관상으로는 애써 괜찮은 척하고 있지만
육문주의 말에 허연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그럴리가 없어. 그리고 너희들이 그랬잖아. 이 일이 터지기 전에 우리 두 사람이 다시 합치기로 했다고. 근데 어떻게 사귄 적이 없을 수 있어?”“예전에 둘이 썸을 탄 건 맞는데 단지 섹파였거든. 그리고 서로 좋아하면서도 인정하지 않다가 나중에 네가 진심으로 지혜 씨를 좋아하게 되었어. 근데 이미 여러 번 지혜 씨한테 상처도 주고 일부러 다른 여자랑 썸타면서 약 올리기까지 했어. 여기서 중요한 건 지혜 씨는 네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찜해두셨던 손주며느리라는 사실이야. 근데
천우는 한껏 의기양양한 얼굴로 육문주에게 말했다.“아빠, 들었죠? 계속 저를 쫓아냈다가는 오히려 아빠가 쫓겨날지도 몰라요.”천우의 기분이 갑자기 바뀐 모습에 육문주는 미간을 찌푸리고 조수아에게 물었다.“여보, 계속 이렇게 봐주면 버릇 나빠져. 방금 천우가 연기한 거라고.”조수아는 천우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에게 답했다.“근데 천우의 말도 틀린 건 아니잖아. 우리가 허비했던 그 2년이라는 시간은 천우한테 빚진 거나 마찬가지야. 그 일만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파.”“이제 천우가 더 이상 억울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곧 두 아기
한지혜는 한창 촬영장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뜨거운 햇빛 때문인지 목이 계속 말라왔지만 촬영 일정에 영향 주기 싫었던 한지혜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묵직한 사극 의상을 입고 촬영을 강행했다.아까부터 한 장면만 지금 여러 번 찍고 있던 와중에 감독이 드디어 오케이 사인을 건넸다.“컷! 오케이!”순간 현장에서 커다란 환호가 터져 나왔다.이때, 신영이 급히 뛰어오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지혜에게 말했다.“언니, 물 좀 마셔요. 날씨도 더워죽겠는데 감독은 이 장면만 스무 번도 넘게 찍은 것 같아요.”한지혜는 건네준 물을 벌컥벌
허연후는 냉큼 그녀의 손에서 텀블러를 가져가 열어주더니 한잔 따라서 다시 그녀에게 건넸다.“마셔요.”한지혜가 커피를 마시려는 순간 뒤에서 웬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지혜 씨, 다음 씬에서 비를 맞는다고 하는데 아직 지혜 씨 다리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잖아요. 아니면 제가 감독님한테 말씀드려서 촬영을 며칠 미룰까요?”“아니요. 상처는 이미 다 나아서 괜찮아요.”이때, 배우진이 한지혜에게 다가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시 물었다.“제가 어제까지만 해도 매니저분이 지혜 씨한테 약 발라주는 걸 봤는데 벌써 다 나았다고요? 혹시나
한지혜는 온몸에 힘이 빠지더니, 다리에 있던 상처도 슬슬 아프기 시작했다.더군다나 스물일곱 번의 촬영 때문에 목소리까지 쉬어버린 한지혜는 힘없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허연후 씨, 아파요.”한지혜의 ‘아프다’라는 말에 더욱 신경이 쓰인 허연후는 안심하라는 듯 낮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옷 갈아입고 나와요. 집에 데려다줄게요.”말을 마친 허연후는 한지혜를 안고 휴게실에서 나오며 천우를 불렀다.“천우야, 따라와.”천우는 짧은 다리로 곧장 달려와 한지혜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이모, 많이 힘들어요?”한지
천우의 따뜻한 말에 한지혜의 통증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한지혜는 웃으며 천우의 볼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우리 천우 참 마음이 따뜻한 남자구나. 이모 딸, 복 받았어.”천우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이모. 앞으로 정말 잘할 거예요. 기억을 잊는다고 해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 잊지 않을 거예요.”천우의 말을 듣던 허연후는 약을 바르던 손을 잠시 멈칫하더니 차가운 눈으로 천우를 노려보며 말했다.“말속에 말이 있네? 누구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천우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말속에
한지혜는 조수아가 감정이 격해지자 웃으며 달래듯이 말했다.“너한테서 배운 건데? 너 육문주랑 헤어진 2년 동안 몸 챙기면서 일했어? 몇 번이나 쓰러졌으면서.”한지혜의 말을 들은 육문주는 마음이 아파 조수아를 품에 안더니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처음 듣는 소리네? 왜 말 안 했어?”“다 지난 일인데 꺼내서 뭐해.”육문주는 머리를 숙여 조수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나 마음 아파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랬어?”두 사람의 달달한 모습을 보고 있던 허연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만 좀 하지? 애
곽서연은 놀라서 순간적으로 그 자리에 굳어버린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박서준을 쳐다봤다.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지금 박서준한테 마음을 들킨다면 그녀의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바로 그때 박서준은 곽서연의 얼굴을 가볍게 몇 번 두드리며 말했다.“서연아, 악몽이라도 꾼 거야?”곽서연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그대로 다시 박서준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그런 곽서연의 모습에 박서준은 그녀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으며 말했다.“혹시 몽유병인가? 곽명원도 이러더니 몽유병도 유전인 거야
곽서연의 말을 들은 박서준은 웃기기도 하면서 그녀가 대견하기도 했다.요즘같이 복잡한 사회에 특히 M 국 같은 나라에서 곽서연처럼 가족의 가르침대로 바르게 산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박서준은 흐뭇해하며 곽서연의 머리를 쓰다듬고 말했다.“그래. 아주 대견해. 여자라면 당연히 자기 몸을 아끼고 조심해야지. 그래야 이후에 사랑받을 수 있어. 가정교육 잘 받았네. 앞으로 계속 유지하도록 해.”박서준의 칭찬에 곽서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말했다.“삼촌, 나 이쁘죠?”박서준은 곽서연의 말을 깊게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애처로운 곽서연의 모습에 박서준은 차마 단칼에 거절하지 못하고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말했다.“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너를 평생 지켜줘야 할 사람은 너의 미래의 남편이 되어야지. 삼촌은 지금 잠시 너를 지켜주는 것뿐이야. 네가 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너를 평생 지켜줄 사람이 생기는 거야.”속마음을 알아차렸을 리가 만무한 박서준의 대답에 곽서연도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곽서연은 계속 말하다 보면 자신의 속마음을 들킬 것 같았고 그러면 박서준한테 다가갈 기회조차 사라질까 두려웠다.‘괜찮아. 열 번 찍
곽서연은 토끼가 그려져 있는 잠옷을 입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 작은 이불을 품에 안고 쭈뼛쭈뼛 말했다.“삼촌.”박서준은 즉시 불을 켜고 눈을 반쯤 뜬 채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래? 지금까지 잘 자다가 인제 와서 잠자리 투정이라도 하는 거야?”곽서연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난처한 표정으로 박서준을 빤히 쳐다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밖에 번개 쳐요. 천둥소리가 무서워요.”박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천둥소리를 무서워해?”곽서연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눈시울을 붉히고 말했다.“부모님
곽서연이 속으로 기뻐하고 있는데 귓가에 박서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언제까지 자는척할 거야?”그 소리에 곽서연은 즉시 눈을 뜨고 큰 눈을 몇 번 깜박거리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자는 척하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박서준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너도 천우랑 똑같거든. 자는 척할 때 속눈썹이 떨리고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것까지 다 보여. 내가 그런 것도 눈치 못 챌 정도로 바본 줄 알아?”“그런데 왜 안아준 거예요?”“종일 힘들고 놀라서 옷이 흠뻑 젖어 있었잖아. 혹시 감기라도 걸리면 너희 삼촌이 나
“여섯 살이랑 열 살이랑 같아? 내가 대학을 다 졸업했는데 아내가 아직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생각해봐. 그게 어울려?”“어울려요. 마침 공부도 가르쳐줄 수 있고 좋잖아요. 나름 어울리는 커플일 것 같은데.”박서준은 화가 치밀어 곽서연의 머리를 한 대 때리고 말했다.“그런 말도 안 되는 소설 좀 그만 봐. 머릿속에 도대체 뭐가 든 거야.”곽서연은 입술을 깨물고 속으로 넌지시 욕을 했다.‘뭐가 들었긴. 세상 물정 모르는 나이만 많은 당신이 들었지.’육연희는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서준아, 나도 이젠 널 모
박서준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곽서연은 더욱 화가 치밀어 박서준의 손을 덥석 잡아 꽉 물더니 노기등등하게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삼촌이 먼저 놀린 거니까 아파도 뭐라 하지 마세요.”박서준은 아파서 숨을 들이마시더니 웃으며 곽서연의 머리를 쓰다듬고 말했다.“너랑 농담도 못 하겠네. 앞으로 키 작다고 안 놀릴게. 됐지?”배우진과 육연희는 인기척에 키스를 멈추었고, 입구에서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육연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서연아, 이리 와봐. 고모가 삼촌 혼내줄게.”곽서연은 즉시 달려가 육연희의 손을 잡고 일러바쳤
“앞으로는 ‘진’이라고 불러. 배우진이라는 이름을 누가 듣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잖아.”육연희는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았어. 몸은 어때? 많이 아파?”배우진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말했다.“예전에 겪었던 고통에 비하면 이깟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야.”배우진은 육연희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큰 손으로 육연희의 얼굴에 있는 눈물 자국을 살며시 닦아주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연희야, 앞으로 우리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내가 우리 아이와 널 꼭 잘 보살펴줄 거야.”배우진의 말에 감정이 북받친 육연희는 눈물이 왈칵
윌리엄 청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말도 안 돼. 육연희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리고 배우진이 육연희를 끔찍하게 아낀다는 것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고. 그런데 이렇게 위험한 일에 육연희를 끌어들였다고? 아이와 아내를 잃을까 봐 두렵지도 않았단 말이야?”“그러니까 이 일은 애당초 육연희와 배우진이 함께 꾸민 일이예요. 우린 다 속은 거고요. 아버지, 생각해 보세요. 배우진이 육연희를 그렇게 아끼는데 위병도 없이 외출하게 한 것 자체가 이상하잖아요. 제 생각에는 그들이 고의로 우리에게 납치하게끔 기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