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간호사에게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더 말해준 뒤 한지혜의 손을 잡고 자기 사무실로 들어왔다.허연후는 의사 가운을 벗고 한껏 피곤한 얼굴로 한지혜를 품에 안더니 그녀의 어깨에 턱을 대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지혜 씨, 저 너무 피곤해요.”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한 상황인데 방금 장시간의 수술까지 했으니 아무리 철인이라도 견디기 힘들 것이다.한지혜는 그런 허연후가 안쓰러워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줬다.“물 한 잔 따라줄게요. 마시고 조금 쉬어요.”“아니요. 이렇게 지혜 씨가 안아주면 괜찮을 것 같아요. 지혜 씨가
전화가 끊어지자마자 다시 울렸다.발신인을 확인한 허연후는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고 수화기 너머에서는 허재용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연후야, 지금 네 여동생의 심장병이 또 재발한 것 같아. 이번엔 좀 심각해 보여. 내가 이미 응급 실에 전화는 해놨는데 지금 빨리 수술하게 준비해.”그의 다급함에도 허연후는 덤덤하게 답했다.“사람이 그리 쉽게 죽나요? 걱정하지 마세요.”분명 이건 허가은이 짠 음모인 게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하지연을 납치한 뒤 자기 병이 재발했다고 거짓말해서 그 심장 수술을 자신이 받으려는 것이다.전
허가영은 직접 그 심장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만약 했다가는 단번에 허연후의 의심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하지연이 죽으면 자기 오빠가 분명 그 심장을 자신에게 넘겨줄 거라고 생각했다.생각만 해도 허가은은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바로 이때, 간호사가 갑자기 달려와 그에게 보고했다.“허 선생님, 지연 씨가 방금 깨났는데 지금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그녀의 말에 허가은은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하지연이 깨어났다고요? 지금 납치되었을 텐데요?”그러자 허연후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누가
“허연후 씨, 방금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지연이가 연후 씨 친동생이 맞아요!”그녀의 말은 마치 바늘처럼 허연후의 가슴을 찔렀다.분명 하지연이 진짜 그의 친동생이라 했다.어렸을 적 그 착하고 예뻤던 내 여동생.허연후의 눈시울은 어느새 빨개진 채 그는 잠긴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그 보고서 저한테도 보내줘요. 그리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요.”“네. 바로 보내드릴게요.”한지혜와의 전화를 끊은 허연후는 여전히 빨간 두 눈으로 하지연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리고 당장에라도 그녀를 안고 자신이 친오빠라고 말해주고 싶
하지연은 자꾸만 허가은의 인생을 자신이 빼앗는 느낌이 들었다.본인도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잘 알지만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허연후는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잠깐이 아니라 이제부터 쭉 그래도 되니까 눈 감아 봐. 오빠가 이야기 들려줄게.”“진짜요? 그럼 어린 왕자 듣고 싶어요.”“그래. 영문 버전으로 들려줄게.”“네네. 영문 버전이 더 재미있어요.”허연후는 핸드폰을 꺼내 영문 버전의 어린 왕자를 찾아서 그녀에게 들려줬고 방안에는 금세 그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순간 하지연은 지금 마치
허연후의 물음에 허가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그의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에 얼어버렸기 때문이다.순간 예전의 그 허연후가 아니라는 느낌에 혹시나 그가 이미 뭔가 알아챈건 아닌지 걱정되었다.하여 허가은은 버벅거리며 변명하기 시작했다.“오빠, 왜 그런 눈빛으로 봐? 난 그저 간호사들이 한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야. 뭐가 이상해?”허연후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아니, 원래부터 남의 일에 관심이 없던 사람이 갑자기 오지랍을 부리기에 놀라서.”“나랑 지연 씨가 동갑이잖아. 그리고 같은 심장병을 앓고 있으니까 왠지 모르게 동병
거실 광경을 보더니 다급히 물었다.“연후야, 우리를 왜 급히 오라고 한 거야? 그리고 아픈 가은이는 왜 데리고 왔어? 병원에 며칠 더 입원시키지 않고?”허연후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이번 사건의 주인공인데, 주인공이 빠지면 되겠어요?”말을 마친 허연후는 민태구의 곁으로 가서 몸을 웅크리고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입가에 머금은 냉소는 마치 비수처럼 민태구의 가슴을 파고들었다.민태구는 부들부들 떨며 뒤로 물러서더니 말을 더듬었다.“도련님, 이건 모두 아가씨를 위해서 벌인 일이에요. 도련님은 아가씨의 생사에 관심이 없으시겠
허가은은 친자 보고서를 낚아채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말도 안 돼. 내가 왜 아저씨의 딸이야? 난 허씨 가문의 큰딸이고 엄마 아빠의 딸이잖아.”허연후는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정말 몰라? 그날 너, 내가 하지연의 엄마와 하는 대화를 듣고 하지연이 어릴 적 여동생과 많이 닮았다는 걸 알았잖아. 바로 그날 저녁에 하정국이 하지연을 찾아가서 난동을 부렸어. 너는 그 핑계로 하지연을 보러 병원에 찾아가서는 지연이의 지갑 속 어릴 때 사진을 보고 내 책상 위에 있는 사진이랑 똑같다는 걸 알았겠지. 그
곽서연은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고 윤상후한테 죄책감을 느꼈다.그녀는 단지 그와 만나는 것을 동의했을 뿐 아직 그를 좋아하기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윤상후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물건을 그녀한테 남겨주었다.그것은 그가 수년에 걸쳐 공들여 작곡한 곡들이며 그도 아직 무대에서 연주한 적 없는데 그녀한테 전부 남겨주었다.그가 남긴 것은 곡이 아니라 그녀에 대한 깊은 사랑이었다.하지만 그녀가 그런 사람한테 상처를 주었다.박서준만 아니었다면 윤상후는 밝은 미래를 포기하고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곽
“온갖 수단을 써서 그 사람을 떠나게 만드니까 속이 시원해? 박서준, 당신이 정말 미워!”곽서연이 계속 그를 ‘박서준’이라고 부르자 그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그는 그녀가 자신을 미워할 거라는 걸 알았지만 그녀의 행복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나쁜 사람이 되어야 했다.박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곽서연이 자신을 욕하는 걸 조용히 듣고 있었다.욕하다 지친 곽서연의 목소리가 잠잠해지자 그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서연아, 우리 한번 볼 수 있을까? 너한테 할 말이 있어.”곽서연은 흐느끼며 울었다.“왜? 날 비웃으려고
곽서연의 눈은 눈물로 가득 차 있었다.“선배, 지금 거짓말하는 거죠? 박서준이 선배한테 날 포기하라고 뭐라고 한 거 맞죠? 내가 직접 찾아가서 물어볼게요.”“서연아, 이건 내 결정이고 다른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 어차피 우리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제때 멈추는 것도 우리 둘한테 좋은 거야. 넌 곽씨 가문의 공주니까 나랑 같이 있으면서 고생하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야지. 서연아, 나 이제 탑승해야 해. 네가 항상 행복하길 바라고 우리 이제 연락하지 말자.”그는 그렇게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통화가 종료된 것을 본
윤상후는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서연아, 고마워. 우리 내일 봐.”통화를 마친 곽서연은 생각할수록 어딘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윤상후가 그녀의 고백을 듣고 전혀 기뻐하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고통스러워하는 느낌이었다.그의 반응이 너무 이상했고 안 좋은 예감이 그녀를 휩쓸었다.드디어 애타게 기다렸던 다음날이 다가오고 곽서연은 서둘러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그녀는 윤상후를 보자 곧바로 달려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선배,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윤상후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너 롤러코스터 타고
윤상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박서준을 바라보았다.“그게 무슨 뜻이에요?”박서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난 서연이를 좋아하고 그 아이가 다시는 부모님의 죽음으로 인해 상처받지 않게 잘 보호할 거야.”“둘째 삼촌이 그렇게 하면 두 가문의 관계가 끊어지는 걸 알고 있어서 항상 두려워해 왔잖아요.”“서연이의 행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전에는 내가 너무 우유부단했고 너무 가족들 생각만 했어. 지금에서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서연이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모든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용감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흥분한 윤상후를 본 박서준은 화가 났다. “서연이한테 접근한 목적이 도대체 뭐야? 처음부터 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서연이한테 접근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거야? 넌 오래전부터 서연이를 알고 있었고 서연이랑 동문이 된 것도 모두 네가 계획한 거지? 내가 알기로는 넌 전에 이 학교에 다니지 않았고 서연이가 여기로 온 후에야 전학 왔어. 사실 하나하나가 네가 서연이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라고 가리키는데 어떻게 이런 우연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어?” 윤상후는 마침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머리를 움켜쥐고 울며 입을 열었다.
휠체어에 앉은 박서준의 귓가에는 이지훈이란 이름이 울려 퍼졌다.박서준은 그 당시 이씨 가문의 권력자인 이지훈이 프로젝트 때문에 곽서연의 아버지랑 원한을 쌓았던 것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그래서 사람을 매수해 일가족을 납치하였다.즉 곽서연의 부모님이 죽음은 모두 이지훈이 초래 한것이었다.그로 인해 처벌을 받았던 이지훈도 감옥에서 죽었다.윤상후는 이지훈의 혼외자이기에 비록 직접적 관련은 없지만 그와 혈연관계가 있었다.만약 자신이 부모를 죽인 원수 가문에 시집가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곽서연은 철저히 무너지고 말 것이다.박
이 말을 듣고 곽서연은 어리둥절했다.미래의 시어머니를 만나는 자리에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동행하는 것은 또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곽서연이 거절하려고 하는 순간 빈혜경이 말했다.“걱정하고 있었는데 너의 삼촌과 함께라면 할머니도 마음이 편안할 거 같아.”곽서연은 바로 말리고 나섰다.“할머니, 제 생각은 아니라고 봐요. 선배 어머니는 혼자 계실 텐데 저희 가문에서 여러 명이 간다면 놀라실 수도 있어요.”빈혜경은 웃으면서 말했다.“원래 너희 육 할머니랑 함께 가려고 했는데 너의 삼촌이랑 함께 가는 것도 좋아. 서준이는 마음이
그들의 다정한 모습을 본 박서준의 가슴은 찢어질 듯이 아팠고 따라서 안색도 어두워졌다.“상후를 그렇게 믿는 거야?”곽서연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니면 누구를 믿을 수 있어요? 삼촌을요?”곽서연의 질문에 말문이 막혀버린 박서준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말을 이었다.“결혼은 인생의 중요한 일인데 이렇게 무모하게 결정하면 안 돼. 게다가 열아홉 살밖에 안 된 네가 아직 사람 볼 줄도 모르는데 속으면 어쩌려고 그래.”그 말에 곽서연은 씁쓸하게 웃었다.“저는 삼촌처럼 계획적이고 생각이 깊은 것은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