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광경을 보더니 다급히 물었다.“연후야, 우리를 왜 급히 오라고 한 거야? 그리고 아픈 가은이는 왜 데리고 왔어? 병원에 며칠 더 입원시키지 않고?”허연후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이번 사건의 주인공인데, 주인공이 빠지면 되겠어요?”말을 마친 허연후는 민태구의 곁으로 가서 몸을 웅크리고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입가에 머금은 냉소는 마치 비수처럼 민태구의 가슴을 파고들었다.민태구는 부들부들 떨며 뒤로 물러서더니 말을 더듬었다.“도련님, 이건 모두 아가씨를 위해서 벌인 일이에요. 도련님은 아가씨의 생사에 관심이 없으시겠
허가은은 친자 보고서를 낚아채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말도 안 돼. 내가 왜 아저씨의 딸이야? 난 허씨 가문의 큰딸이고 엄마 아빠의 딸이잖아.”허연후는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정말 몰라? 그날 너, 내가 하지연의 엄마와 하는 대화를 듣고 하지연이 어릴 적 여동생과 많이 닮았다는 걸 알았잖아. 바로 그날 저녁에 하정국이 하지연을 찾아가서 난동을 부렸어. 너는 그 핑계로 하지연을 보러 병원에 찾아가서는 지연이의 지갑 속 어릴 때 사진을 보고 내 책상 위에 있는 사진이랑 똑같다는 걸 알았겠지. 그
“그래도 다행히 양어머니가 지연이를 잘 키워주셨어요. 어려운 형편에서도 지연이 그림도 그리게 해주셨고. 그래서 이화여대 미술학부에 일 등으로 합격했는데 심장병 때문에 휴학 중이에요. 할아버지, 지연이 어릴 때와 똑같아요. 마음씨도 착하고 항상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고 양보하고. 이번에 심장이식 수술을 했는데 아직 진실을 말할 엄두가 안 나서 이 사실은 알리지 못했어요.”허연후의 말을 들은 허씨 가문 사람들은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몇 년 동안 줬던 사랑이 허가은 이라는 가짜를 향한 거였다니.그들의 핏줄은 밖에서 온갖 고초를
허가은은 허연후를 떠나면 죽을 정도로 그를 아주 많이 좋아하지만 이미 진실이 밝혀진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허가은은 일단 한발 물러서서 앞으로의 일은 차츰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다.허가은이 짐을 챙겨 위층에서 내려오자 가족들 모두 허연후의 휴대전화에 있는 하지연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허순철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너무 비슷하구나. 어릴 적 가은이와 똑같아. 정말 너무 어리석게도 우리가 사람을 잘못 데려왔구나.”금사락은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채 말했다.“불쌍한 우리 딸. 고생을, 그렇게 많은 고생을 하면서도 바르게 잘
허연후는 웃으며 말했다.“우리 지연이 정말 멋지네. 앞으로 무조건 우수한 미녀 화가가 될 거야.”허연후가 ‘우리 지연'이라고 말하자 하지연은 기분이 좋은 듯 눈썹을 치켜들며 말했다.“허 선생님, 만약 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제가 가장 먼저 감사해야 할 사람은 허 선생님과 지혜 언니예요. 두 분이 없었다면 저는 이미 죽었을 거예요.”“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넌 앞으로도 계속 행복할 거야, 날 믿어. ”“네, 허 선생님을 믿어요. 그런데 허 선생님, 아까 여동생을 데리고 집에 간 거 아니었어요? 왜 또 왔어요?”허연
얼굴을 본 하지연은 놀라서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허가은은 침대에 천천히 앉아 하지연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목소리에는 말 못 할 아픔이 배어 있었다.“지연아, 넌 그 도박꾼의 딸이 아니야. 넌 허씨 가문의 아가씨야. 그때 오빠가 널 데리고 나갔다가 잃어버려서 네가 이렇게 비참한 인생을 살게 된 거야. 내 친아빠는 내 병을 치료할 돈이 없어서 나를 허씨 가문의 아가씨로 보낸 거였어.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엄마 아빠와 할아버지 그리고 오빠의 총애를 받으며 지냈어. 그들 모두 날 사랑해 줬어. 지연아, 미안해
눈이 천천히 감겼다.허연후가 차를 몰고 병원을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던 찰나 경호원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허 대표님, 하지연 아가씨가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지셨어요. 빨리 와봐야 할 것 같아요.”경호원의 말에 허연후는 운전대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허연후는 곧바로 핸들을 꺾어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허순철은 뭔가 이상해서 물었다.“왜 다시 돌아가는 게냐?”“지연이 상태가 갑자기 안 좋아져서 응급처치 중이래요.”허연후의 말을 들은 차 안의 사람들은 가슴이 덜컥했다.금사락은 바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상
한지혜의 말에 허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해졌다.만약 그 간호사가 정말 허가은 이였다면, 허가은이 하지연에게 무슨 말을 했을지 그들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안 그래도 몸이 허약한 하지연인데, 아주 작은 충격도 하지연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허가은이 만약 하지연한테 사실을 왜곡하여 말했다면, 하지연은 당연히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허재용도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맞은편에 있는 경호원을 노려보며 말했다.“지연이를 잘 보호하라고 했더니 이 꼴로 보호를 한 거야?”경호원은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죄송
박서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변했다.그가 짐작했던 대로 심은하는 처음부터 곽서연을 노리고 있었다.그녀는 사진으로 곽서연한테 상처를 줬을 뿐만 아니라 임혜나의 손을 빌려 곽서연을 구설수에 오르게 했고 심지어 그와 약혼해서 곽서연의 숙모가 되려고 했다.그 여자가 겉으로는 온화하고 고결해 보이는 데 마음이 그렇게 독할 줄은 몰랐다.박서준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찾아낸 증거 나한테 보내.”그는 곽서연이 무고하게 상처를 받는 것을 내버려 둘 수 없었고 그녀한테 모든 걸 설명하기로 했다.전화를 끊은 후 그는 죄책감에 사로잡
“그럼 상후 선배는? 누가 그 사람을 보상해 줘? 그 사람이 도대체 무슨 잘못을 한 거야?”다시 그의 얘기가 나오자 곽서연의 눈은 또다시 붉어졌고 윤상후에 대한 그녀의 죄책감은 극에 달했다.그녀가 사귀기로 동의하지 않았다면 박서준은 윤상후한테 손을 대지 않았을 거고 그도 밝은 미래를 포기하고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박서준은 그녀한테 다짐했다.“난 그 아이를 해치지 않았지만 그 아이에 대한 죄책감은 어떻게든 보상할게. 하지만 너랑 그 아이는 어울리지 않고 더 이상 만나면 안 돼. 두 집안의 차이가 너무 크고 그 아이 아버지의 배
박주영은 그 말을 듣고 약간 놀랐다.“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은하 아니었어?”“아니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곽서연은 그의 팔을 꼬집었다.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박서준을 바라보며 마치 ‘말하기만 해 봐. 죽여버릴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박서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당분간 비밀이에요. 어쨌든 은하랑 약혼하지 않을 거예요.”박주영은 약간 화가 났지만 박서준이 방금 수술을 마친 걸 생각하니 더 이상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신용을
박서준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서연아, 다리가 너무 아파.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평생 휠체어에 앉은 채 살아가야 할지도 몰라. 내가 다시는 걷지 못해도 괜찮아?”그 말을 듣자 몸부침치던 곽서연은 멈칫했다.박서준의 허벅지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다친 거고 정말 평생 걷지 못하게 된다면 그녀는 물론이고 곽씨 집안 사람들도 평생 그한테 빚지고 살아야 했다.그녀는 그걸 원치 않았다.곽서연은 일단 급한 불부터 끄기로 했다.그녀는 연신 코를 훌쩍이고 입을 열었다.“같이 병원에 가줄 테니까 날 놔줘.”그녀의 태도가 다소 누그러든
곽서연은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고 윤상후한테 죄책감을 느꼈다.그녀는 단지 그와 만나는 것을 동의했을 뿐 아직 그를 좋아하기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윤상후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물건을 그녀한테 남겨주었다.그것은 그가 수년에 걸쳐 공들여 작곡한 곡들이며 그도 아직 무대에서 연주한 적 없는데 그녀한테 전부 남겨주었다.그가 남긴 것은 곡이 아니라 그녀에 대한 깊은 사랑이었다.하지만 그녀가 그런 사람한테 상처를 주었다.박서준만 아니었다면 윤상후는 밝은 미래를 포기하고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곽
“온갖 수단을 써서 그 사람을 떠나게 만드니까 속이 시원해? 박서준, 당신이 정말 미워!”곽서연이 계속 그를 ‘박서준’이라고 부르자 그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그는 그녀가 자신을 미워할 거라는 걸 알았지만 그녀의 행복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나쁜 사람이 되어야 했다.박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곽서연이 자신을 욕하는 걸 조용히 듣고 있었다.욕하다 지친 곽서연의 목소리가 잠잠해지자 그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서연아, 우리 한번 볼 수 있을까? 너한테 할 말이 있어.”곽서연은 흐느끼며 울었다.“왜? 날 비웃으려고
곽서연의 눈은 눈물로 가득 차 있었다.“선배, 지금 거짓말하는 거죠? 박서준이 선배한테 날 포기하라고 뭐라고 한 거 맞죠? 내가 직접 찾아가서 물어볼게요.”“서연아, 이건 내 결정이고 다른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 어차피 우리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제때 멈추는 것도 우리 둘한테 좋은 거야. 넌 곽씨 가문의 공주니까 나랑 같이 있으면서 고생하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야지. 서연아, 나 이제 탑승해야 해. 네가 항상 행복하길 바라고 우리 이제 연락하지 말자.”그는 그렇게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통화가 종료된 것을 본
윤상후는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서연아, 고마워. 우리 내일 봐.”통화를 마친 곽서연은 생각할수록 어딘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윤상후가 그녀의 고백을 듣고 전혀 기뻐하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고통스러워하는 느낌이었다.그의 반응이 너무 이상했고 안 좋은 예감이 그녀를 휩쓸었다.드디어 애타게 기다렸던 다음날이 다가오고 곽서연은 서둘러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그녀는 윤상후를 보자 곧바로 달려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선배,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윤상후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너 롤러코스터 타고
윤상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박서준을 바라보았다.“그게 무슨 뜻이에요?”박서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난 서연이를 좋아하고 그 아이가 다시는 부모님의 죽음으로 인해 상처받지 않게 잘 보호할 거야.”“둘째 삼촌이 그렇게 하면 두 가문의 관계가 끊어지는 걸 알고 있어서 항상 두려워해 왔잖아요.”“서연이의 행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전에는 내가 너무 우유부단했고 너무 가족들 생각만 했어. 지금에서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서연이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모든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용감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