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본 하지연은 놀라서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허가은은 침대에 천천히 앉아 하지연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목소리에는 말 못 할 아픔이 배어 있었다.“지연아, 넌 그 도박꾼의 딸이 아니야. 넌 허씨 가문의 아가씨야. 그때 오빠가 널 데리고 나갔다가 잃어버려서 네가 이렇게 비참한 인생을 살게 된 거야. 내 친아빠는 내 병을 치료할 돈이 없어서 나를 허씨 가문의 아가씨로 보낸 거였어.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엄마 아빠와 할아버지 그리고 오빠의 총애를 받으며 지냈어. 그들 모두 날 사랑해 줬어. 지연아, 미안해
눈이 천천히 감겼다.허연후가 차를 몰고 병원을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던 찰나 경호원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허 대표님, 하지연 아가씨가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지셨어요. 빨리 와봐야 할 것 같아요.”경호원의 말에 허연후는 운전대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허연후는 곧바로 핸들을 꺾어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허순철은 뭔가 이상해서 물었다.“왜 다시 돌아가는 게냐?”“지연이 상태가 갑자기 안 좋아져서 응급처치 중이래요.”허연후의 말을 들은 차 안의 사람들은 가슴이 덜컥했다.금사락은 바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상
한지혜의 말에 허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해졌다.만약 그 간호사가 정말 허가은 이였다면, 허가은이 하지연에게 무슨 말을 했을지 그들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안 그래도 몸이 허약한 하지연인데, 아주 작은 충격도 하지연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허가은이 만약 하지연한테 사실을 왜곡하여 말했다면, 하지연은 당연히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허재용도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맞은편에 있는 경호원을 노려보며 말했다.“지연이를 잘 보호하라고 했더니 이 꼴로 보호를 한 거야?”경호원은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죄송
허연후는 마스크를 사이에 두고 하지연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하지연의 손등에 눈물이 떨어졌다.손등에 떨어진 눈물과 허연후의 말을 듣던 하지연의 머릿속에는 어릴 때 화면들이 떠올랐다.하지연은 맨발로 허연후의 뒤를 쫓아다니며 학교에 가지 말고 자기랑 놀아달라고 울부짖었다.그리고 할아버지와 함께 오빠 학교 앞에 하교 마중을 나가기도 했다.그럴 때마다 허연후는 하지연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줬었다.길고양이를 구하려다 얼음 구멍에 빠졌을 때 허연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들어 하지연을 구하다 얼음에 긁혀 팔에 큰 상처를 입기도
허연후의 입술과 내뱉고 있는 숨이 깜짝 놀랄 만큼 뜨거웠다.이상함을 느낀 한지혜는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허연후 씨, 열나는 거 아니에요?”“아니야, 피곤해서 그래. 조금만 안고 있자. 충전 좀 시켜줘.”“그런데 몸이 왜 이렇게 뜨거운 거예요? 잠깐 만져볼게요.”허연후는 한지혜의 어깨에 기댄 채 낮게 웃으며 말했다.“어딜 만져본다고.? 거기?”“무슨 헛소리에요. 옆에 앉아봐요. 체온계를 가져다 체온 좀 재볼게요.”한지혜는 즉시 간호사를 불러 체온계를 달라고 하고 허연후의 겨드랑이에 넣었다.며칠 동안 잠도 못 자고 응
한지혜는 의사인 허연후가 열을 내리는 좋은 방법이라도 알고 있는 줄 알고 궁금해하며 물었다.“무슨 방법인데요?”허연후는 한지혜의 귓가에 엎드린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랑 격렬하게 무언가를 하면 돼. 땀 뻘뻘 흘리고 나면 열이 자연스럽게 내릴 거니까.”허연후의 말을 들은 한지혜는 차가운 눈으로 허연후를 흘겨보며 말했다.“다시 한번 헛소리하면 기회도 없어요.”한지혜의 말에 놀란 허연후는 얌전히 눕더니 말했다.“말 안 할게. 약이나 찾아줘.”약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허연후는 잠이 들었다.피곤했던 터라 오랜 시간
“허세는, 아주 허세가 하늘을 찌르겠다.”“너 그거 질투야, 내가 너랑 똑같이 굴면 안 되지.”허연후는 육문주 때문에 분통이 터져 한지혜를 끌어안으며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지금 시대에 내가 와이프와 자식이 없다고 이렇게 모욕을 당한다는 게 말이 돼? 지혜야, 우리 앞으로 여덟 쌍둥이를 낳자. 저 두 사람 울화통 터지게.”천우는 큰 눈을 몇 번 깜빡이며 말했다.“우리 이모 사람이지 돼지가 아니에요. 어떻게 한꺼번에 그렇게 많이 낳아요. 삼촌 바보예요?”또 한 번 타격을 받은 허연후는 천우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너는 어
하지연은 감격에 겨워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말했다.“저희 엄마도 같이 가면 안 돼요?”금사락은 웃으며 하지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당연히 같이 가야지, 앞으로 계속 네 옆에 있어 줄 거야. 널 이렇게 잘 키워주셨잖아. 우리 허씨 가문의 평생 은인이야.”“그럼 내 이름을 바꿔야 하나요? 나는 허가은라는 이름이 싫어요. 이 이름을 들으면 나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 생각나요.”“그 이름 말고 성씨만 허자로 바꿔서 앞으로는 허지연 이라고 부르는 건 어때?”하지연은 설레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듣기 좋네요. 마음에 들
윌리엄 청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말도 안 돼. 육연희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리고 배우진이 육연희를 끔찍하게 아낀다는 것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고. 그런데 이렇게 위험한 일에 육연희를 끌어들였다고? 아이와 아내를 잃을까 봐 두렵지도 않았단 말이야?”“그러니까 이 일은 애당초 육연희와 배우진이 함께 꾸민 일이예요. 우린 다 속은 거고요. 아버지, 생각해 보세요. 배우진이 육연희를 그렇게 아끼는데 위병도 없이 외출하게 한 것 자체가 이상하잖아요. 제 생각에는 그들이 고의로 우리에게 납치하게끔 기회를
배우진의 말에 윌리엄 요한은 고개를 쳐들고 웃으며 말했다.“하하하, 아이고 무서워라. 날 어떻게 죽일지 궁금하네?”말을 마친 윌리엄 요한이 칼을 들고 육연희의 얼굴을 그으려는 찰나 배우진은 순식간에 윌리엄 요한에게 달려들어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윌리엄 요한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바로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던 비수를 배우진의 가슴에 꽂았다.눈치를 채고 몸을 피하려 했지만 이미 한발 늦었던 배우진의 가슴에는 순식간에 새빨간 피가 흘러나와 하얀 셔츠를 붉게 물들였다.이를 본 육연희는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안돼! 죽이지
배우진의 말에 육연희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윌리엄 청은 이상한 움직임이 없었어?”“내가 B 시로 출장 가는 것을 알고 길에 사람을 매복해 둔 것 같아. 다행히 임시로 취소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십중팔구 무슨 일이 났을 거야.”“윌리엄 청은 네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윌리엄 가문에 이익을 주기는커녕 그의 자리까지 빼앗으려 하니 널 죽이고 싶은 거야.”배우진은 웃으며 육연희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임신하면 어리바리해진다고 하던데, 우리 여보는 여전히 총명하네?”“배우진, 지금이 어느
밥을 먹던 아림은 송학진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지며 까맣고 반짝이는 눈으로 송학진을 빤히 바라봤다.아림은 당장이라도 송학진의 품에 안기고 싶었고 진심으로 그가 자신의 아빠가 되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자상하고 아이도 이뻐하는 아저씨가 나는 너무 좋은데, 왜 내 아빠가 아닌 거야?’이런 생각에 서러워진 아림은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가련하면서도 불쌍한 아림의 모습에 놀란 송학진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아림아, 왜 그래? 얘기가 듣기 싫었던 거야?”아림은 고개를 연신 저으며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
말을 마친 송학진이 기름이 번지르르한 손으로 천우를 만지려 하자 깜짝 놀란 천우는 도망치며 말했다.“도와주세요. 노총각이 화났다고 나한테 복수한대요.”두 사람이 즐겁게 장난치는 것을 보고 있는 아림의 까맣고 큰 눈에는 부러움이 어려 있었다.아림은 송학진과 이렇게 장난치며 놀 수 있는 천우가 부러웠고 자기도 그렇게 놀고 싶었지만, 송학진은 손님이니까 예의를 차려야 한다는 차서윤의 말이 떠올라 조용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아림은 송학진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들어 송학진을 바라보고 말했다.“
마지막 한 입을 남겨두고 있을 때 갑자기 문 앞에서 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외삼촌, 지금 간접 키스를 하는 거예요?”천우의 말에 포크를 쥔 손을 멈칫하던 차서윤은 그제야 송학진과 같은 포크를 사용했음을 알아차리고 마음속으로 자신을 호되게 꾸짖었다.‘네 것 내 것 없이 물건을 같이 쓰는 이 습관 언제면 고칠 거야.’대학 다닐 때도 차서윤은 친구들과 라면 하나를 같이 나눠 먹거나 음료 하나를 같이 나눠 마시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늘 그렇게 지내왔다.차서윤은 바로 손을 움츠리고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미안해요. 아림
차서윤은 지금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고 있었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사람의 뇌는 언제나 둔해지는 법이다. 그녀는 볼을 부풀리며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화난 듯한 표정으로 송학진의 목에 앞치마를 묶으며 말했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건 대표님이 때려서 그래요.” 그녀의 말에 송학진은 갑자기 몇 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차서윤은 대학을 갓 졸업했을 때 성격이 활발하고 일 처리는 빨랐지만 입이 자주 앞서서 늘 그와 반대로 하려 했었다. 그가 커피에 설탕을 넣지 말라고 하면
그가 사람을 무시하는 듯한 모습에 송학진은 화가 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그는 천우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 “이렇게 큰 소리로 말하기야? 네 삼촌이 아직도 싱글이라는 걸 다들 알아야겠냐?” “뭐가 겁나요. 저는 삼촌의 아내를 찾아주는 중이에요.” 두 사람이 말싸움하는 모습을 보며 차서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녀는 천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가자. 오늘은 아줌마가 프랑스 요리 사줄게.” 그러고는 천우의 손을 잡고 밖으로 가려고 했지만 천우가 갑자기 말했다. “근데 저는 프랑스 요리 별
그 메시지를 받은 송학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리고 간단히 답장을 보냈다. [언제든지 괜찮아. 차 비서가 정해.] [오늘 저녁 괜찮을까요? 제가 아림이랑 천우 데리고 대표님이 좋아하는 그 레스토랑에 갈게요.] [그래. 좀 이따 보자.] 간단한 문자를 보며 ‘차 비서'라는 익숙한 말에 차서윤은 마음속에 물결이 일렁였다. 몇 년 전의 몇 장면이 떠올랐다. “차 비서, 커피에 왜 설탕을 넣은 거야?” “인생이 이미 너무 쓰니까요. 그걸 더 쓰게 만들 이유가 없잖아요.” 송학진은 커피를 한입에 다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