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가은은 친자 보고서를 낚아채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말도 안 돼. 내가 왜 아저씨의 딸이야? 난 허씨 가문의 큰딸이고 엄마 아빠의 딸이잖아.”허연후는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정말 몰라? 그날 너, 내가 하지연의 엄마와 하는 대화를 듣고 하지연이 어릴 적 여동생과 많이 닮았다는 걸 알았잖아. 바로 그날 저녁에 하정국이 하지연을 찾아가서 난동을 부렸어. 너는 그 핑계로 하지연을 보러 병원에 찾아가서는 지연이의 지갑 속 어릴 때 사진을 보고 내 책상 위에 있는 사진이랑 똑같다는 걸 알았겠지. 그
“그래도 다행히 양어머니가 지연이를 잘 키워주셨어요. 어려운 형편에서도 지연이 그림도 그리게 해주셨고. 그래서 이화여대 미술학부에 일 등으로 합격했는데 심장병 때문에 휴학 중이에요. 할아버지, 지연이 어릴 때와 똑같아요. 마음씨도 착하고 항상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고 양보하고. 이번에 심장이식 수술을 했는데 아직 진실을 말할 엄두가 안 나서 이 사실은 알리지 못했어요.”허연후의 말을 들은 허씨 가문 사람들은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몇 년 동안 줬던 사랑이 허가은 이라는 가짜를 향한 거였다니.그들의 핏줄은 밖에서 온갖 고초를
허가은은 허연후를 떠나면 죽을 정도로 그를 아주 많이 좋아하지만 이미 진실이 밝혀진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허가은은 일단 한발 물러서서 앞으로의 일은 차츰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다.허가은이 짐을 챙겨 위층에서 내려오자 가족들 모두 허연후의 휴대전화에 있는 하지연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허순철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너무 비슷하구나. 어릴 적 가은이와 똑같아. 정말 너무 어리석게도 우리가 사람을 잘못 데려왔구나.”금사락은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채 말했다.“불쌍한 우리 딸. 고생을, 그렇게 많은 고생을 하면서도 바르게 잘
허연후는 웃으며 말했다.“우리 지연이 정말 멋지네. 앞으로 무조건 우수한 미녀 화가가 될 거야.”허연후가 ‘우리 지연'이라고 말하자 하지연은 기분이 좋은 듯 눈썹을 치켜들며 말했다.“허 선생님, 만약 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제가 가장 먼저 감사해야 할 사람은 허 선생님과 지혜 언니예요. 두 분이 없었다면 저는 이미 죽었을 거예요.”“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넌 앞으로도 계속 행복할 거야, 날 믿어. ”“네, 허 선생님을 믿어요. 그런데 허 선생님, 아까 여동생을 데리고 집에 간 거 아니었어요? 왜 또 왔어요?”허연
얼굴을 본 하지연은 놀라서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허가은은 침대에 천천히 앉아 하지연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목소리에는 말 못 할 아픔이 배어 있었다.“지연아, 넌 그 도박꾼의 딸이 아니야. 넌 허씨 가문의 아가씨야. 그때 오빠가 널 데리고 나갔다가 잃어버려서 네가 이렇게 비참한 인생을 살게 된 거야. 내 친아빠는 내 병을 치료할 돈이 없어서 나를 허씨 가문의 아가씨로 보낸 거였어.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엄마 아빠와 할아버지 그리고 오빠의 총애를 받으며 지냈어. 그들 모두 날 사랑해 줬어. 지연아, 미안해
눈이 천천히 감겼다.허연후가 차를 몰고 병원을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던 찰나 경호원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허 대표님, 하지연 아가씨가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지셨어요. 빨리 와봐야 할 것 같아요.”경호원의 말에 허연후는 운전대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허연후는 곧바로 핸들을 꺾어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허순철은 뭔가 이상해서 물었다.“왜 다시 돌아가는 게냐?”“지연이 상태가 갑자기 안 좋아져서 응급처치 중이래요.”허연후의 말을 들은 차 안의 사람들은 가슴이 덜컥했다.금사락은 바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상
한지혜의 말에 허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해졌다.만약 그 간호사가 정말 허가은 이였다면, 허가은이 하지연에게 무슨 말을 했을지 그들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안 그래도 몸이 허약한 하지연인데, 아주 작은 충격도 하지연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허가은이 만약 하지연한테 사실을 왜곡하여 말했다면, 하지연은 당연히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허재용도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맞은편에 있는 경호원을 노려보며 말했다.“지연이를 잘 보호하라고 했더니 이 꼴로 보호를 한 거야?”경호원은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죄송
허연후는 마스크를 사이에 두고 하지연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하지연의 손등에 눈물이 떨어졌다.손등에 떨어진 눈물과 허연후의 말을 듣던 하지연의 머릿속에는 어릴 때 화면들이 떠올랐다.하지연은 맨발로 허연후의 뒤를 쫓아다니며 학교에 가지 말고 자기랑 놀아달라고 울부짖었다.그리고 할아버지와 함께 오빠 학교 앞에 하교 마중을 나가기도 했다.그럴 때마다 허연후는 하지연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줬었다.길고양이를 구하려다 얼음 구멍에 빠졌을 때 허연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들어 하지연을 구하다 얼음에 긁혀 팔에 큰 상처를 입기도
말을 마친 송학진이 기름이 번지르르한 손으로 천우를 만지려 하자 깜짝 놀란 천우는 도망치며 말했다.“도와주세요. 노총각이 화났다고 나한테 복수한대요.”두 사람이 즐겁게 장난치는 것을 보고 있는 아림의 까맣고 큰 눈에는 부러움이 어려 있었다.아림은 송학진과 이렇게 장난치며 놀 수 있는 천우가 부러웠고 자기도 그렇게 놀고 싶었지만, 송학진은 손님이니까 예의를 차려야 한다는 차서윤의 말이 떠올라 조용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아림은 송학진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들어 송학진을 바라보고 말했다.“
마지막 한 입을 남겨두고 있을 때 갑자기 문 앞에서 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외삼촌, 지금 간접 키스를 하는 거예요?”천우의 말에 포크를 쥔 손을 멈칫하던 차서윤은 그제야 송학진과 같은 포크를 사용했음을 알아차리고 마음속으로 자신을 호되게 꾸짖었다.‘네 것 내 것 없이 물건을 같이 쓰는 이 습관 언제면 고칠 거야.’대학 다닐 때도 차서윤은 친구들과 라면 하나를 같이 나눠 먹거나 음료 하나를 같이 나눠 마시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늘 그렇게 지내왔다.차서윤은 바로 손을 움츠리고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미안해요. 아림
차서윤은 지금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고 있었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사람의 뇌는 언제나 둔해지는 법이다. 그녀는 볼을 부풀리며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화난 듯한 표정으로 송학진의 목에 앞치마를 묶으며 말했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건 대표님이 때려서 그래요.” 그녀의 말에 송학진은 갑자기 몇 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차서윤은 대학을 갓 졸업했을 때 성격이 활발하고 일 처리는 빨랐지만 입이 자주 앞서서 늘 그와 반대로 하려 했었다. 그가 커피에 설탕을 넣지 말라고 하면
그가 사람을 무시하는 듯한 모습에 송학진은 화가 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그는 천우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 “이렇게 큰 소리로 말하기야? 네 삼촌이 아직도 싱글이라는 걸 다들 알아야겠냐?” “뭐가 겁나요. 저는 삼촌의 아내를 찾아주는 중이에요.” 두 사람이 말싸움하는 모습을 보며 차서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녀는 천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가자. 오늘은 아줌마가 프랑스 요리 사줄게.” 그러고는 천우의 손을 잡고 밖으로 가려고 했지만 천우가 갑자기 말했다. “근데 저는 프랑스 요리 별
그 메시지를 받은 송학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리고 간단히 답장을 보냈다. [언제든지 괜찮아. 차 비서가 정해.] [오늘 저녁 괜찮을까요? 제가 아림이랑 천우 데리고 대표님이 좋아하는 그 레스토랑에 갈게요.] [그래. 좀 이따 보자.] 간단한 문자를 보며 ‘차 비서'라는 익숙한 말에 차서윤은 마음속에 물결이 일렁였다. 몇 년 전의 몇 장면이 떠올랐다. “차 비서, 커피에 왜 설탕을 넣은 거야?” “인생이 이미 너무 쓰니까요. 그걸 더 쓰게 만들 이유가 없잖아요.” 송학진은 커피를 한입에 다 마
차서윤은 싸늘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한마디만 더 욕해봐. 출발하기 전에 이미 예약 전송 설정을 해뒀어. 지금이라도 바로 메일 보낼 수 있어. 누가 이 업계에서 사라지게 될지 한 번 볼까.” 그 말을 들은 이장우는 조금 겁이 났다. 그는 줄곧 차서윤이 그저 만만한 상대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자신도 모르게 증거를 남겨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를 악물며 거부하려던 순간 그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 “송 대표님, 죄송합니다. 이 여자가 좀 말을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러면 아림이 아버지시군요. 어쩐지 가족분들 모두가 그렇게 잘생기셨더라고요.” 천우는 고개를 들어 송학진을 향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외삼촌, 이건 제가 한 말이 아니에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거예요!” 송학진은 웃으며 천우의 머리를 가볍게 톡 치고는 별다른 설명 없이 말했다. “자, 이제 동생 손잡고 얼른 들어가.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말썽부리지 말고. 알았지?” 천우는 바로 아림의 손을 꼭 잡고 의젓하게 오빠다운 말투로 말했다. “동생아, 이제부터 오빠가 널 지켜줄게
차서윤은 이 제안을 거절하고 싶었다. 송학진에게 아무런 부담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송학진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송 대표님, 좋은 제안 감사하지만 저는 가지 않겠어요. 이장우 쪽에서 일하는 건 그만두고 제 능력으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일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단지 송 대표님께 부담드리고 싶지 않아요.”송학진은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차서윤, 정상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너의 전 직장 상사였고 지금 더 좋은 기회를 제시하는 건데 왜 거절하는 거야?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일이
그 말을 들은 송학진은 눈이 촉촉해졌다. 그는 이 작은 아이가 그런 장면을 목격하고 그로 인해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지난 3년 동안 차서윤과 그녀의 딸이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는 아림을 꼭 끌어안고 큰 손으로 아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오늘 밤은 아저씨가 같이 있어 줄게.” 그는 아림을 다른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며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눈 감고 자. 아저씨는 계속 여기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