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이 기억을 찾는 일 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강지혁은 그녀의 마음속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날이 어두워지고 임유진은 욕조에서 그만 잠이 들어 버렸다강지혁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 그녀를 기다리다 결국 욕실로 들어갔고 욕조에서 잠든 그녀를 보고 피식 웃더니 이내 그녀를 깨끗하게 씻겨주었다.임유진은 기절한 듯 잠에 빠졌고 물기가 어린 단아한 얼굴은 강지혁을 미치게 했다.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상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던지 다 예쁘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듯싶다.그녀의 하얀 피부 위에는 오래된 흉터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건 전부 감옥에서 얻는 것이다.강지혁은 매번 그녀의 흉터를 볼 때마다 죄책감이 일었고 마음이 무거웠다. 그녀를 향한 죄책감은 아마 평생 뿌리치지 못할 것이고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한 마음은 계속 무거울 것이다.물론 상처들만 있는 건 아니었고 군데군데 그가 새긴 붉은색 키스 마크도 있었다. 이건 마치 임유진이 그의 것이라는 일종의 표식과도 같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을 다 씻긴 다음 잠옷으로 갈아입히고 조심스럽게 침에서 눕혔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씻겨주는 동안 한 번도 깨지 않았고 오히려 기분 좋게 자고 있었다.강지혁은 자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잃어버린 기억은 그저 잃어버린 대로 놔두면 안 돼? 왜 자꾸 찾으려고 하는 거야?"그의 말투에는 약간의 원망도 섞여 있었다."유진아, 그냥 이대로 영원히 기억을 못 한 채로 살아. 제발 그렇게 살아주라."그의 손길은 다정했고 목소리는 마음을 설레게 했다. 한편, 임유진은 그저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다음 날 아침 비즈니스 전시회에 가기 위해, 임유진은 강지혁이 골라준 은백색 드레스와 루비 장신구를 달고 헤어 스타일리스트의 손에 의해 아름답게 변신했다.임유진 자신도 거울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오늘 그녀에게 연한 화장을 해줬는데 평소와 같은 느낌을 풍기면
"누가 감히 누나한테 창피를 줄 수 있는지 한번 기대해 볼까?"강지혁은 피식 웃더니 다정한 눈빛으로 임유진을 바라봤다."그리고 내 모든 게 다 네 건에 내 체면 따위가 뭐가 중요해.""하지만..."임유진이 입술을 깨물었다."그렇게 걱정되면 내가 그 사람들에게 너보다 더한 창피를 줄게. 이러면 좀 괜찮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두 사람이 탄 차량은 전시회 앞에 도착했다. 임유진은 이곳에 오기 전 전시회에 대해 검색을 해봤다. 오늘 열리는 전시회는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사업가들이 참석하고 S 시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의 사업가들도 참석하게 된다.이번 전시회를 통해 곧 협력의 장이 열릴 것이고 사업가들은 인맥을 넓힐 수 있게 될 것이다.물론 해당 전시회는 유명한 사람들만 참석할 수 있고 중소기업들은 초대장을 받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암암리에 큰돈을 지급하고 초대장을 사들이기도 했다. 인맥은 사업을 하면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이니까.이쯤 되니 임유진은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강지혁은 이곳에서 인맥을 만들 필요도 없고 그는 이런 모임을 즐기지도 않았다."오늘 여기는 왜 온 거야?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라도 있어?"아무리 고민해봐도 이유는 이것밖에 없었다."우효주도 참석한대. 다년간 해외에 있다가 얼마 전 S 시에 로펌을 세우기로 했다나 봐."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강지혁은 오늘 임유진에게 우효주를 만날 기회를 주기 위해 이곳에 참석한 것이다.우효주는 임유진이 줄곧 동경해왔던 여성 변호사로 그녀는 주로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까지 그녀의 실물은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그런데 오늘 이곳에서 드디어 만날 수 있게 되니 임유진은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그런데 너 어떻게 알았어? 내가 우효주 씨 만나고 싶어 하는 거."임유진은 우효주의 판례는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정독했고 그녀를 우상으로 숭배했다."며칠 전에 너 우효주 판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잖아. 그
그 순간 그녀는 마음이 재가 되었다.요즘 손가락 관절은 약물과 물리치료를 병행하면서 많이 좋아졌고 오랫동안 아프지 않았다.다만 지금 소민준과 진세령이 함께 있는 장면을 보니 그녀의 머릿속에 또다시 전에 손톱이 빠지던 광경이 떠올랐고 이어서 두 손에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이때 갑자기 커다란 손이 그녀의 아프고 떨리는 두 손을 덥석 잡았고 청아한 남자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손이 매우 차갑네.”“괜... 괜찮아. 갑자기 손이 아파서 그래. 금방 나아.”임유진이 답했다. 그녀는 손에서 나는 통증은 생리적이라기보단 심리적 요소가 더 크다는 걸 너무 잘 안다.강지혁은 미간을 살짝 구기고 두 손으로 더 다정하게 그녀의 손을 감싸고 고개 숙여 따뜻하게 입김을 불었다.지금은 7월이라 한창 무더운 날씨였고 실내에 에어컨을 다 켜놨는데 그의 이 행동은 실로 이상할 따름이었다.그는 평소에 언론매체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지만 전시회에 온 적잖은 사람들이 그를 알아봤다.눈에 띄는 외모에 지금 이런 행동까지 더하니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다.이 행동은 이상하다기보단 오히려 너무 아름다운 광경이었다.정장 차림에 훤칠한 체구를 드러낸 잘생긴 남자가 조심스럽게 여자의 손을 잡고 그윽한 눈빛에 걱정이 가득 휩싸여있으니 누가 봐도 이 여자가 남자의 마음속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걸 알 수 있다.한편 그녀는 은백색 드레스를 입고 단아하면서도 달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청초한 얼굴에 살짝 고통스러운 표정이 스쳤는데 순간 남자는 더 안쓰러운 얼굴로 변했다.사람들은 몰래 이 둘의 정체를 알아보기 시작했고 옆에서 지켜보던 일부 여자들은 그 남자의 보살핌을 받는 게 자신이길 간절히 바랐다.한편 가까운 곳에 있던 소민준과 진세령도 마침 이 장면을 목격했다.강지혁이 입김으로 임유진의 손을 녹여주자 소민준은 마치 딴 세상 같은 느낌이 들었다.한때 그가 쓰레기 버리듯 내다 버린 전 여친이 S 시 빅 보스 강지혁에게 이토록 사랑받고 있다니.게다가 전보다 훨씬 아름답게
이게 진짜 임유진이라고?한때 그녀의 발아래에 깔렸던 그 여자라고?!“좀 나아졌어?”강지혁이 관심 조로 물었다. 그의 눈엔 오직 임유진으로 가득 찼다.그가 입김을 불어줄 때마다 손의 한기가 점점 녹아들고 손가락 관절도 서서히 고통이 사라졌다.“응, 훨씬 나아졌어.”임유진이 대답했다.혈색을 보니 확실히 아까보다 나은 모습이었다.“나중에 의사 선생님께 누나 손을 제대로 한 번 더 검사시켜야겠어. 아직 치료되지 않았잖아.”“사실 많이 나아진 거야.”임유진이 답했다.“아까는 심리적인 반응 때문에 손이 떨리고 아팠어.”“소민준과 진세령 때문이겠지.”강지혁이 말했다.“그 두 사람이 한때 누나 손을 하마터면 망가뜨릴 뻔했잖아!”임유진은 화들짝 놀라더니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하긴, 강지혁이 그녀에게 가까이할 때 미리 조사를 마쳤을 테니 두 손을 잃을 뻔한 사실도 전부 알고 있겠지.“내가 대신 죗값 물게 해줄까?”강지혁이 나지막이 말했다.임유진은 멍하니 넋 놓고 있었다. 죗값을 그가 어떻게 물게 하려는 거지?강지혁이 얇은 입술을 가볍게 움직였다.“그거야 당연히 누나가 받은 고통의 두 배로 겪게 해주는 거지. 손톱을 뽑고 힘줄도 뽑고 온몸의 뼈를 부러뜨리는 거야. 어때?”살벌한 단어가 그의 입에서 나오니 이렇게 평범할 수가 없었다. 마치 이 모든 건 그에게 큰일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복수할까?! 저들도 똑같은 고통을 겪게 해줄까?임유진은 저도 몰래 가까운 곳에 서 있는 소민준과 진세령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침 그 두 사람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세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서로 마주쳤다.“유진아, 저 사람들 고통스럽게 해줄까?”강지혁의 목소리가 또다시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임유진은 고개 돌려 눈앞의 남자를 지그시 바라봤다.지금 이 순간 그녀가 머리를 끄덕인다면 강지혁은 바로 실시할 것이다.그렇게 되면 소민준과 진세령의 결말은 한때 그녀가 겪은 고통보다 훨씬 비참해지겠지!“아니, 난 이런 식으로 복수하고 싶지 않아.”임유진이
그때가 되면 임유진은 합리하고 합법적인 수단으로 저 자신을 위해 정의를 되찾을 것이다.그렇게 해야만 한때 변호사 유니폼을 입었던 자신에게 떳떳하고 수년간 법학을 공부한 저 자신에게 떳떳해질 수 있다!강지혁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그는 문득 임유진한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어느샌가 그녀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고 새롭게 태어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전보다 훨씬 아름다워지고 있다!‘유진아, 넌 왜 나한테 더 기대지 않아? 다만 현재 네 모습도 어쩌면 진정한 네 모습이겠지.’“그래도 이렇게 두 사람을 놓아주는 건 둘에게 너무 관대한 것 같아.”강지혁이 말했다.“지금 바로 가서 저 둘이 누나에게 저지른 일로 후회하게 해주는 건 어때?”임유진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강지혁은 그녀의 손을 잡고 소민준과 진세령의 곁으로 다가갔다.주변 사람들도 대부분 소민준과 진세령을 알고 있다. 그녀는 대스타라 인지도가 높고 소민준은 그녀의 약혼자인 관계로 언론매체 앞에 얼굴을 자주 드러내다 보니 일반 기업가들보단 인지도가 높다.두 사람은 강지혁과 임유진이 이리로 걸어오자 몸이 확 굳고 억지 미소를 지었다.“강지혁 씨, 임... 유진 씨.”소민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여기서 두 분을 뵐 줄은 몰랐네요.”강지혁은 이런 종류의 전시회에 거의 참석하지 않아 당연히 이번에도 안 올 줄 알았다.그는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유진이랑 두 분은 구면이겠네요. 요즘 진세령 씨가 인터넷에 올린 사과문이 정말 핫하더라고요. 진세령 씨의 일부 팬들이 대신 불만을 표출하고 있던데요.”진세령은 순간 사색이 되었다. 그녀의 사과문에 달린 댓글 중 임유진을 저격하는 댓글도 꽤 많았다.그녀는 일부러 방관하며 이로써 한을 풀려고 했다. 강지혁 때문에 임유진에게 직접 공격할 순 없지만 팬들이 대신 욕해주는 것도 속이 통쾌했다.다만 강지혁이 이 포인트를 쏙 집어낼 줄이야.“앞으론 인터넷에서 팬들 댓글 관리를 잘 단속하겠습니다.”그
가해자가 뻔뻔스럽게 피해자에게 지나간 일은 너그럽게 용서하라고 말하다니? 진세령이 대체 무슨 자격으로 이런 말을 내뱉을 수 있지?그녀의 표정도 대뜸 일그러졌다.“임유진, 난 우리가 화목하게 잘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야.”“우리는 화목하게 지낼 수 없어, 영원히.”임유진이 대답했다.진세령이 계속 말을 이으려 할 때 강지혁이 가로챘다.“유진이가 용서 안 하겠다고 하니 그럼 그런 거로 해.”순간 진세령은 몸이 휘청거리고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소민준은 재빨리 약혼녀를 부축했다.임유진은 고개 돌려 강지혁에게 말했다.“혁아, 나 다른 데 가서 돌아다니고 싶어.”두 가해자 앞에 서 있으니 기분이 매우 불쾌했다.“그래.”강지혁은 그녀와 함께 자리를 뜨려 했다.두 사람이 몸을 돌리던 찰나 소민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유진아, 미안해.”임유진은 걸음을 멈췄지만 끝내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 애초에 진세령이 그녀의 손을 망가뜨리려 할 때 소민준은 냉큼 동의했고 그때부터 어떠한 사과의 말도 무의미해졌다.옆에 있던 강지혁이 고개 돌려 한없이 짙은 눈동자로 소민준을 차갑게 노려봤다.소민준은 발밑에서부터 싸늘한 한기가 올라와 온몸이 얼어붙었다.방금 그 눈빛은 경고장에 가까웠다. 더는 선 넘지 말라는 경고, 임유진에게 한 발짝이라도 다가간다면 소민준은 곧 만신창이가 될 것이다.그는 사색이 된 얼굴로 진세령을 쳐다봤는데 그녀도 얼음처럼 굳어버렸다.“됐어, 강지혁 씨는 이번에 임유진을 위해 나서줬을 뿐이야. 우리가 방금 그토록 자세를 낮췄으니 아무 일 없을 거야.”정말 아무 일도 없을까? 진세령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강지혁이 마지막에 남긴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유진이가 용서하지 않겠다면 그렇게 해야지.’이건 절대 단순히 흘려넘길 말이 아니다.강지혁은 반드시 무언가를 해낼 것이다!다만 그가 진정 무엇을 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진세령은 거대한 불안감에 휩싸였다!“민준아, 방금 왜 유진이한테 미안하다고 한 거야?”한참
강지혁이 방금 한 경고는 그더러 임유진 곁에 한 걸음도 다가가지 말라는 뜻이다.안 그러면 강지혁이 그를 짓밟아버릴 수도 있다.다만... 임유진이 그해 누명을 뒤집어썼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소민준은 가끔 저도 몰래 이런 생각이 든다. 그해 그 사고가 없었고 그 소송이 없었더라면 그와 임유진은 어떤 결말을 맺었을까?하지만 인제 와서 아무리 고민해봤자 이제는 그녀에게 다가갈 자격조차 없으니...나중엔 임유진을 반드시 우러러봐야 할 지도 모른다....다른 한편 강지혁은 임유진을 지그시 바라봤다.“아직도 진세령의 말 때문에 화내는 거야?”그녀가 머리를 끄덕였다.“조금. 사실 나도 알아. 걔는 너 때문에 나한테 사과한 거야. 하지만 그토록 위선적인 사과에 어떻게 나더러 용서하라는 말이 나올 수 있지. 웃겨 정말.”한때 그 비참한 고통을 안겨주고 인제 와서 가볍게 사과 한마디로 메꿀 수 있을까?강지혁은 두 눈을 반짝이다가 다시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살짝 변형된 손 관절을 쳐다보았다.그녀는 그해 감방에서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다. 강지혁은 다 알고 있다.“한때 누나에게 상처 줬던 사람들 진짜 전부 용서 안 할 거야?”그는 힘겹게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응.”임유진이 대답했다.강지혁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누나를 해친 사람이 고의적이 아니라 해도?”“고의가 아니면 날 그렇게 해치지 말았어야지!”임유진이 되물었다.“혁아, 만약 너라면 한때 너한테 상처 준 사람들 용서할 수 있어?”절대 못 한다!그는 이미 마음속으로 해답을 얻었다.강지혁은 이제까지 감히 그를 해하려는 자는 단 한 명도 놓아주지 않았다.다만 그게 만약 그녀라면... 강지혁은 미처 해답을 얻지 못했다...“혁아, 난 성인군자가 아니야. 내게 잘해주는 사람은 똑같이 잘해줄 수 있지만 날 해치는 사람은 절대 용서 못 해.”임유진이 말했다.강지혁은 가볍게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이젠 아무도 널 해치지 못하게 할게.”임유진이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그래, 이
강지혁은 그녀를 데리고 앞으로 걸어갔고 이경빈은 두 사람을 보더니 살짝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또 뵙네요. 강지혁 씨도 전시회에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어요.”“오늘은 우 변호사님 뵈려고 일부러 찾아왔어요.”강지혁이 말하며 고개 돌려 우효주에게 인사했다.“안녕하세요, 강지혁입니다. 이쪽은 제 약혼녀 임유진이에요. 줄곧 우효주 변호사님을 뵙고 싶어 했거든요.”“저를요?”우효주가 흠칫 놀랐다. 강지혁이 본인 이름을 불러줄 때 심장이 움찔거렸다.강지혁, 그는 S 시의 일인자라 이 도시에서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인물이다.그런 그가 생각보다 젊고 카리스마가 차 넘쳤다.우효주는 임유진에게 시선을 돌렸다.S 시로 오다 보니 그녀는 자연스럽게 이곳의 시사를 접하게 됐고 요 며칠 4년 전의 소송을 뒤집은 사건이 핫한 주제로 떠올랐다. 가십거리 기사이든 변호사 업계이든 전부 떠들썩하게 거론되고 있다.“알고 있어요.”우효주가 임유진에게 말했다.임유진은 흠칫 놀라더니 아마도 그녀가 4년 전 사건을 접했을 거로 예상했다!40대쯤 돼 보이는 우효주는 오늘 드레스가 아닌 네이비색 슈트를 입고 있었는데 우아한 기품과 카리스마를 내뿜었다.“우 변호사님, 안녕하세요. 변호사님은 제 학창시절 우상이었어요.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임유진이 대범하게 인사하고는 저 자신을 비웃듯 말을 이었다.“아마 제 사건을 접하고 저를 아시게 된 거겠죠?”“맞아요. 유진 씨 사건은 요즘 변호사 업계에서 자주 거론되고 있어요.”우효주가 말했다.“그런데 오늘 이렇게 유진 씨를 직접 뵐 줄은 몰랐네요. 게다가 제가 유진 씨 학창시절 우상이었다니, 제가 영광이에요.”“그때 저희 반에서 많은 여학생들이 나중에 크면 우 변호사님 같은 변호사가 되고 싶어 했어요.”변호사 업계에서 진짜 유명한 여변호사는 몇 안 되니까.임유진은 마음이 설렜지만 그 많은 일을 겪은 뒤로 풋풋한 젊은이처럼 우상을 열정적으로 맞이할 순 없었다.“가능하시다면 변호사님께 법률적인 자문을 받고 싶습니다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