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빈이 이 아들을 거들떠보지 않는다고 해도 탁유미는 절대 방심할 수 없다. 만에 하나 윤이를 빼앗길 수 있으니까!“그 아이 첫인상이 좋아서 그런 것 같아요.”이경빈이 말했다. 늘 엄숙한 표정이던 그의 입가에 간만에 미소가 번졌다.“이번에 S 시로 와서 또 그 아이를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윤이를 만난다고? 임유진은 문득 코끝이 찡했다.이 남자는 애초에 탁유미를 그토록 처참하게 만들었고 그 탓에 윤이도 아빠 없는 자식으로 태어났다.사람들에게 우러러 보이며 사치한 삶을 누릴 때 탁유미는 감방에서 모진 고통에 시달렸다.그런데 지금 또 윤이를 볼 생각을 하고 있다니, 아들의 존재도 모르는 그가 윤이를 보고 싶어 하다니, 이 얼마나 황당하고 가소로운 일인가.“안돼요.”임유진이 단호하게 거절했다.그녀가 너무 단칼에 거절하니 이경빈은 흠칫 놀라며 의심이 일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짙은 눈동자에 의심이 살짝 스쳤다.“임유진 씨가 번거롭다면 제게 연락처를 남겨주세요. 제가 직접 찾아가면 됩니다. 장난감 좀 사주고 싶어요. 그 아이가 무척 귀여워 보이던데 가능하다면 더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후원해주고 싶어요.”이경빈이 말했다.그는 청력을 잃은 그 아이가 자꾸만 떠올랐다. 그렇게 예쁜 아이가 들을 수 없다니, 이경빈은 아이를 도와서 더 좋은 치료를 받게 해주고 싶었다.이런 마음은 전에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다.또 어쩌면 그의 친구 말대로 여태껏 아이가 없어서... 낯선 아이에게 이상하리만큼 호감을 느낀 게 아닐까.나중에 그에게도 아기가 생기면 당연히 모든 사랑을 제 자식에게 퍼줄 것이다.“괜찮습니다.”임유진이 차갑게 말했다.“저랑 지혁이가 윤이에게 충분히 좋은 의료 환경을 제공해주고 있고 윤이네 가족들도 딱히 방해받고 싶어 하지 않으니 경빈 씨 마음만 제가 대신 받을게요. 연락처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이경빈은 눈빛이 살짝 짙어졌다.임유진과 강지혁이 떠난 후 우효주는 협력 파트너인 이경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는 전에
빌어먹을!순간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경빈의 손에 쥐어있던 유리잔이 산산조각이 났고 파편이 그의 손에 찔렸다.오른손에서 선홍빛 핏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방금 너무 힘을 준 탓에 유리잔이 산산조각이 났다!옆에 있던 우효주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경빈 씨...”“괜찮아요. 뭐 좀 생각하다가 실례를 범했네요. 죄송해요.”이경빈이 담담하게 말했다.그의 오른손엔 피가 줄줄 흘렀지만 전혀 고통을 못 느끼는 듯싶었다....“오늘 원래 우효주 씨 만나서 누나를 즐겁게 해주고 싶었는데 되레 화만 잔뜩 나게 했어.”강지혁이 말했다.“아니야, 우효주 씨 만나서 너무 좋아. 고마워 혁아.”임유진이 대답했다.“이경빈 씨가 한 말 때문에 화난 게 아니었어?”그가 물었다.“그게 너 때문은 아니잖아. 난 그저 윤이랑 유미 언니가 불쌍해서 그랬어.”임유진이 답했다.“언니가 감옥에서 애 낳을 때 어디서 뭐 하다가 인제 와서 윤이의 치료를 후원해주겠대? 웃기지도 않아. 윤이는 이경빈 씨 아들이라고!”임유진은 말하다가 목이 살짝 멨다.“윤이는 태어날 때부터 청력에 문제가 있었어. 유미 언니는 아이에게 인공와우를 해주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까지 일하며 돈 벌었다고. 얼마나 고생했겠어! 4천만 원의 인공와우는 언니에게 엄청난 금액이지만 이경빈 씨에겐 밥 한 끼 가격일 수도 있어!”그녀의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강지혁은 속상한 표정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줬다.“알았어, 왜 말하다 말고 울어? 탁유미 씨와 윤이가 안쓰러우면 우리가 나중에 계속 도와주면 되잖아.”“맞아.”임유진은 머리를 끄덕이고 살짝 미안한 듯 그에게 말했다.“나 화장실 가서 화장 좀 수정할게. 여기서 기다려.”“같이 가.”강지혁이 말했다.“괜찮아. 넌 여기서 나 기다리면 돼. 금방 돌아올게.”강지혁이 진짜 화장실 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가 또 무슨 소란이 일지 모른다. 오늘 전시회에 그를 아는 대기업 인사들이 수두룩하니까.임유진은 화장실로 걸어가다가 복도를
강현수가 그녀 앞에 멈춰 서자 임유진은 순간 넋을 잃었다.“왜 그런 눈빛으로 날 봐요?”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네?”그제야 임유진은 정신을 가다듬었다.“꼭 마치 나한테서 뭘 찾는 것만 같네요.”그는 불쑥 몸을 기울이고 그녀에게 얼굴을 들이댔다.“난 유진 씨가 지혁이한테만 호감 있는 줄 알았는데 나한테도 관심 있나 봐요?”그녀는 무심코 뒤로 물러서며 강현수를 피하려 했다.하지만 오늘 킬힐을 신어 뒤로 물러서다가 그대로 삐끗했고 드레스도 너무 길어서 그만 몸이 뒤로 기울었다. 임유진은 미처 반응할 새가 없이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 손을 내밀었다!덥석!그녀는 강현수의 손을 붙잡았다. 마치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일보 직전에 생존의 기회를 거머쥔 듯이 다섯 손가락으로 그 손을 꼭 붙잡았다.강현수는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잽싸게 허리를 감싸았다.“괜찮아요?”귓가에 강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놀라서 넋 놓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이 꼭 잡은 강현수의 손을 멍하니 바라봤다.그녀는 지금 강현수의 손을 그 어느 때보다 꽉 잡고 있었다!마치 꿈속에서 어린 소녀가 어린 소년의 손을 꼭 잡은 것처럼 말이다.머리가 또다시 깨질 듯이 아팠다!수천 개의 바늘로 콕콕 찌르듯 미칠 듯이 아팠고 기억의 파편들이 또다시 파도처럼 일렁였다.“치마가 다 찢어졌어. 이 치마 내가 엄청 좋아하는건데, 이거 비싼 거야. 외할머니가 아껴 입으라고 하셨어.”“내가 나중에 치마 이만큼 사줄게.”“그렇게 많이는 싫어. 난 지금 이 치마가 제일 좋아.”“그럼 나중에 보라색 치마를 사줄게. 난 보라색이 제일 예뻐.”“그럼 보라색 치마도 이 치마처럼 잔꽃 무늬가 많아? 난 이런 잔꽃 무늬가 마음에 드는데.”“좋아. 그럼 내가 잔꽃 무늬가 많은 보라색 치마로 사줄게.”앳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건 꿈에서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였다.“임유진 씨, 괜찮아요?”그렇다면... 이건 또 누구의 목소리일까
그 시각 강현수는 손에서 오는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의 신경은 온통 그녀에게 쏠렸다.“유진 씨, 일단 이 손 놓고 나랑 함께 병원 가요.”그가 말했다.‘손을 놓으라고? 안돼, 절대 놓아줄 수 없어. 왜냐하면...’“안 놔. 절대 안 놔. 내가 저 위로 데려다줄 테니 이 손 꼭 잡아.”극심한 두통을 느끼며 임유진은 무심코 이런 말을 내뱉었다.그녀의 말을 들은 강현수는 온몸이 돌처럼 굳고 피가 한순간 멈춘 것 같았다. 숨조차 안 쉬어질 지경이었다.이 말은... 이 말들은...강현수는 한없이 짙은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가 뭐라고 중얼거리는지 더 자세히 듣고 싶었다.왜 이런 말을 한 걸까? 이 말들은 그해 ‘그 소녀’만 알고 있을 텐데!바로 이때 강지혁이 달려왔다.“강현수, 너 지금 내 약혼녀한테 뭐 하는 짓이야?”그는 임유진을 품에 확 껴안더니 강현수의 손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는 걸 보자 표정이 한없이 일그러졌다. 그 손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통에 휩싸인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유진아, 왜 그래?”음침했던 얼굴이 걱정으로 가득 찼다.“또 머리 아파? 괜찮아, 금방이면 나을 거야. 금방 나아...”청량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강지혁은 두 팔을 벌려 그녀를 껴안고 머리를 가슴팍에 기대게 하고는 아이 달래듯 자상하게 달랬다.한없이 거만한 강지혁 도련님이 누군가를 이렇게 달래고 있다니?그를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임유진뿐이다!‘혁이다. 혁이가 날 부르고 있어!’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어지러워 미칠 지경이지만 그녀는 애써 두 눈을 뜨고 강지혁을 바라봤다. 비스듬히 눈을 뜨고 아름다운 눈동자로 강지혁을 빤히 쳐다봤다.강지혁은 걱정 가득한 눈길로 그녀에게 물었다.“머리 많이 아파?”“조금만 더 기대고 있을게...”임유진이 대답했다. 이렇게 그에게 기대고 있으면 두통이 조금 나아질 것 같았다.“혁아, 말 좀 해줘, 응?”그녀는 강지혁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그녀가 손을 놓자마자 강현수가 되레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너 대체 누구야?”뜨겁고 예리한 시선은 그녀를 훤히 꿰뚫어 볼 기세였다!임유진이 넋 놓고 있을 때 강지혁이 옆에서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이 손 놔!”강지혁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만 강현수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임유진만 빤히 쳐다봤다.“너 대체 누구냐고?!”강지혁의 눈가에 사악한 빛이 감돌더니 손에 힘을 꽉 주었다.일반인이라면 진작 손을 놓았겠지만 강현수는 끝까지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마치 인생에서 제일 소중한 무언가를 붙잡고 있듯이 꽉 잡았다.공기 속에 질식할 것만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세 사람의 이상한 행동에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고 다들 곧바로 강지혁과 강현수의 신분을 알아챘다.둘은 S 시를 휘젓는 어마어마한 남자들인데 지금 한 여자를 두고 싸우고 있다니.놀랍고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배여진이 화장실에서 나와 강현수를 찾을 때 마침 이 광경을 목격했다.강현수가 임유진에게 대체 누구냐고 묻는 순간 배여진은 심장이 멎을 것 같았고 발밑에서부터 한기가 엄습해왔다!왜... 강현수가 왜 임유진에게 이렇게 묻지?!한편 강현수는 임유진을 잡은 손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강지혁이 아무리 떼어내려 해도 놓아줄 기미가 없었다!대체 왜?배여진의 머릿속에 수천 개의 물음표가 달렸다.그녀는 재빨리 앞으로 달려갔다.“현수 씨, 무슨 일이에요? 왜 유진의 손을 잡고 있어요?”다만 아무도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현장에 있는 세 사람은 서로를 마주 봤고 배여진은 아웃사이더가 되어 축에 끼지 못했다.그녀는 몹시 난감했다.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도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으니까.“저는 임유진이에요.”그녀가 청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강현수 씨, 이젠 이 손 좀 놓죠!”강현수는 끝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왜 그런 말을 했어? 대체 왜?”“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임유진이 미간을 구겼다.“절대 이 손 안 놓을 거라고 했어. 반드시 나 데리고 올라갈 테니 이
강현수는 그제야 배여진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그의 눈빛이 쓱 어두워졌다.대체 왜 이런 걸까? 배여진이 옆에 있는데 지금 뭘 의심하는 걸까?혹은... 또 다른 무언가를 바라고 있는 걸까?강현수는 끝내 조금씩 손힘을 풀었고 임유진은 재빨리 손을 거두어들였다.강지혁은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혁아, 나 혼자 걸을 수 있어.”임유진이 재빨리 말했다.“아까 머리 아팠잖아. 차까지 안고 갈게. 그럼 좀 나을 거야.”말을 마친 강지혁은 성큼성큼 전시회 출구로 걸어갔다.강현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시선을 거두고 손목에 난 몇 가닥의 붉은 자국을 내려다봤다.방금 임유진과 강지혁이 힘껏 잡아당긴 부위였다. 그제야 강현수는 손목에서 밀려오는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현수 씨 괜찮아요? 괜찮은 거 맞죠?”배여진이 속상한 표정으로 그의 손목에 난 상처를 바라보다가 씩씩거리며 말했다.“강지혁 씨 진짜 너무해요. 현수 씨 손을 정말 부러뜨린다면 내가 목숨을 내걸고라도 현수 씨 대신 이 원한을 갚을 거예요.”용감하게 강현수를 위해 헌신할 수 있다는 그 말, 정작 강현수가 듣기엔 마냥 우스운 말이었다.방금 강지혁 앞에서 배여진은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이런 여자가 진짜 어릴 때 목숨을 내걸고 그를 구해줬단 말인가?강현수는 고개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여진아, 어릴 때 너랑 나 산속에 있을 때 어느 한번 내가 벼랑 끝으로 떨어졌잖아. 그때 네가 내 손을 꼭 붙잡고 했던 말 아직도 생각나?”배여진은 바짝 긴장했다.생각날 리가 있을까. 아예 그녀가 아닌데! 게다가 어릴 때 임유진도 그렇게까지 자세히 말하진 않았다. 그저 둘 사이에 나눴던 대화를 전부 배여진에게 알려줬을 뿐이다.그리고 아무리 임유진이 다 말했다 해도 배여진은 그 당시 흘려넘길 뿐 제대로 기억할 리가 없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데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할 수 있을까!그녀는 강현수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난처한 듯 미소 지었다.
“우연히 마주쳤어. 그리고 내가 발을 삐끗하여 넘어질 뻔했는데 무심코 현수 씨 손을 잡고 나중엔 두통이 발작했어...”임유진은 사건 경과를 최대한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가 또 오해하면 안 되니까.“그럼 현수한테 했던 말도 전부 헛소리야?”그가 되물었다.임유진은 숨이 멎을 것 같고 목소리가 목구멍에 꽉 막혀 나오질 않았다.헛소리? 그건 절대 헛소리가 아니다. 그녀의 꿈속에서 소녀가 소년에게 했던 말이다.하지만 지금 이 문제를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속이고 싶진 않지만 진실을 찾기 전까지 말을 많이 하면 강지혁의 오해를 사기 십상이다.“왜? 대답하기 어려워?”그녀의 침묵에 강지혁이 미간을 살짝 구기며 짙은 눈길로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난 그때 이미 머리가 너무 아파 정신이 흐리멍덩해졌어. 무슨 말을 했던지 기억도 안 나.”이 말은 진심이다.다른 말은 그녀가 진실을 알아낸 후에 다시 강지혁에게 정확한 해답을 줄 수 있다.“그래?”강지혁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는 계속 임유진의 손목에 난 붉은 자국을 어루만졌다.“하지만 방금 왜 그렇게 현수 손을 꽉 잡은 거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면서도 손을 놓지 않았어.”“무심코 잡았을 뿐이야. 그때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거든. 내 마지막 동아줄이라고 생각하고 꽉 붙잡고 있었어...”그녀가 황급히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해명하면 할수록 강지혁의 낯빛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강현수가 언제 너의 마지막 동아줄이 되었지?”‘동아줄’이란 세 글자에 강지혁은 불안감에 휩싸였다.그리고 또다시 그녀가 강현수의 손을 꽉 잡고 있던 장면이 눈앞에 떠올랐다.순간 그는 저 자신이 소외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애초에 그녀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강현수의 옆에서 잘 지내고 있었을 텐데.전에 강현수와 있었던 일을 다 잊었지만, 어릴 때 그에게 한 맹세도 다 잊었지만 몸이 기억하고 본능적으로 강현수를 꽉 붙잡았다!“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내 말은...”임유진은 횡설수설하며 자신의 단어 사용이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임유진은 줄곧 머리를 강지혁의 품에 파묻었다.강지혁은 그녀를 안고 침실에 도착해 조심스럽게 침대에 내려주었다.임유진이 몸부림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혁아, 내 말 좀 들어봐.”“그래, 말해. 들어줄게.”그는 넌지시 대답하며 넥타이를 풀고 그녀를 뚫어지라 쳐다봤다.임유진은 입술을 꼭 깨물고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졌다.‘안 돼, 정신 차려!’속으로 끊임없이 되뇌며 반드시 이 일을 똑바로 설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아까 날 구해준 마지막 동아줄이라고 한 건 단어 사용이 잘못됐어. 난 사실 그때 상황이 매우 긴박했고 그래서 그만... 그만 손을 잡은 거야...”그녀는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한편 강지혁은 이미 웃옷을 다 벗고 튼실한 가슴 근육을 드러냈다...그는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가 몸을 기울이고 그녀를 침대에 눕힌 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단어 사용이 잘못됐든 상황이 긴급했든 이 세상에서 네 목숨을 구해줄 마지막 동아줄은 오직 나야!”임유진은 멍하니 넋 놓았다. 그는 마치 뜨거운 눈빛으로 그녀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알았어?”그가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밀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볼에 닿았다.“응... 알았어.”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그에게 대답했다.강지혁은 옅은 미소를 지었는데 그토록 요염할 수가 없다. 그는 이어서 임유진의 빨간 손목을 들어 올렸다.“앞으론 이 손으로 두 번 다시 강현수 잡지 마. 알았지?”그녀는 멍하니 넋 놓은 채 강지혁의 말을 들었다.“유진아, 넌 내 여자야. 네가 딴 남자의 손을 그렇게 꽉 잡고 있는 거 나 진짜 감당하기 힘들어.”손가락의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꽉 잡고 있던 그녀였다.“지금 이거... 질투야?”임유진이 나지막이 물었다.강지혁은 입꼬리를 씩 올리고 그녀의 손을 제 입술에 갖다 댔다. 그는 붉은 흉터 자국에 부드럽게 입맞춤하며 대답했다.“맞아, 나 질투 났어.”그는 지금 미친 듯이 질투하고 있다.두려움 속에서 이 질투가 점점 더 거세지고
강지혁은 강현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임유진이 사랑하는 사람은 나야. 네가 아무리 나보다 더 빨리 만났다고 해도 바뀌는 건 없어. 내가 임유진을 사랑하지 않아도 임유진은 날 사랑할 수밖에 없고 날 사랑해야만 하며 내 곁에 있어야만 해.”그는 말을 마친 후 갑자기 임유진의 턱을 덥석 잡았다. 그러고는 임유진이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곧바로 얼굴을 가까이하며 그녀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임유진은 바로 코앞에서 보이는 그의 얼굴과 입술이 맞닿는 감촉에 깜짝 놀라 순간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강지혁이 먼저 입을 맞춰왔다. 그것도 강현수와 경호원들 앞에서 말이다.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스킨십하는 걸 그녀는 좋아하지도 않고 굳이 말하자면 불편해하는 편이었는데 강지혁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강지혁이 지금 무슨 이유로 그녀에게 키스한 건지는 몰라도 5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에게 먼저 다가와 키스하는 거라 그녀는 그의 입술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임유진은 어느새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강지혁과의 키스에 심취해 있었다.강지혁은 아마 모를 것이다. 그녀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아까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을 때 그녀의 심장이 얼마나 아팠는지.강지혁이 그런 말을 하는 게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아팠다.그에게 냉랭한 말을 들었다는 이유 때문도 있고 당시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눈앞에 선해 그것 또한 마음이 아팠다.그녀는 적어도 절벽에서 떨어진 후 병원에서 깨어난 순간 모든 걸 다 잊어버린 상태라 아예 고통의 감정 같은 게 없었지만 강지혁은 최면을 받기 전까지 계속 고통에 시달렸어야만 했을 테니까.죽음은 늘 그렇다. 항상 살아있는 사람이 더 괴로운 게 바로 죽음이었다.강지혁은 그녀를 너무나도 많이 사랑했기에 지금 이렇게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내뱉게 된 것이다.강현수는 주먹을 꽉 말아쥔 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임유진은 강지혁이 혹시 오해라도 할까 봐 괜히 심장이 철렁했다.“마침 잘 왔네. 네가 한번 말해봐. 너 그때 분명히 나한테 유진이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 안 그래, 강지혁?”강현수가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리고 강지혁은 그의 시선을 받으며 입을 꾹 닫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갑작스러운 대치상황에 임유진은 서둘러 팔을 빼기 위해 버둥거렸다. 하지만 강현수가 너무나도 꽉 잡고 있는 바람에 도저히 팔을 뺄 수가 없었다.현이는 무서운 분위기에 많이 놀란 건지 창백한 얼굴로 임유진의 손을 꼭 잡은 채 그녀의 옆에 딱 붙어 있었다.그때 강지혁이 한쪽 입꼬리를 위로 올리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맞아, 그랬지. 그런데 그게 뭐?”그는 발걸음을 옮기며 말을 하더니 이내 임유진을 잡고 있던 강현수의 손목을 억세게 잡았다.“내가 네 앞에서 뭐라고 했던 임유진이 내 아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아. 내가 놓지 않는 한 임유진은 어디도 못 가.”“만약 유진이가 떠나겠다고 하면 그게 아무리 너라도 막을 권리는 없어!”강현수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만약 임유진이 떠나겠다고 하면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도울 것이다.소중한 이를 강지혁에게 보냈던 건 강지혁이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강지혁은 지난번에 봤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여전히 임유진을 사랑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만약 강지혁이 정말 임유진을 마음속에서 지운 거라면 더 이상 임유진을 그의 옆에 둘 수 없다.“내가 막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직접 시험해보면 되겠네.”강지혁은 강현수를 향해 차가운 말을 내뱉고는 이내 뒤에 있는 기사에게 지시를 내렸다.“애를 집 안으로 데려가.”기사는 그 말에 강선현을 안으려는 듯 앞으로 다가갔다.“아가씨, 이리로 오세요.”하지만 현이는 떠날 생각이 없는 듯 임유진의 손을 꽉 잡은 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이에 임유진이 아이를 설득했다.“우리 현이 착하지. 현수 삼촌이랑 할 얘기가 있
강현수는 아이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고는 천천히 몸을 바로 세우고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살아있었는데 왜 5년간 아무런 소식도 주지 않은 거야? 난 정말 네가 죽은 줄 알았어. 네 장례식에 참가했을 때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아?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아냐고.”강현수는 당시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나머지 차라리 그녀가 떨어졌던 절벽에서 투신할까도 생각했었다.“미안해요. 의도치 않게 걱정을 끼쳤네요.”임유진이 말했다.그녀를 바라보는 강현수의 두 눈은 이미 잔뜩 빨개져 있었다.“아니야.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정말... 너무 다행이야.”강현수는 말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녀와 닿으려고 했다. 임유진이 정말 살아있는 게 맞다는 것을, 그의 환각이나 상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녀에게 닿기도 전에 임유진이 몸을 살짝 옆으로 틀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이에 강현수의 손이 허공에서 움찔하고 멈췄다.그녀의 눈동자에 어린 명백한 거절이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강현수는 조금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강지혁 때문이야?”“네.”임유진이 답했다.“계속해서 나한테 말 편히 하지 않는 것도 강지혁 때문이고?”“나는 이미 결혼한 사람이고 나는 여전히 혁이를 사랑하고 있어요.”강현수는 그 말에 허탈하고도 조금 슬픈 웃음을 터트렸다.“5년이야. 5년 동안 아무런 소식도 주지 않았으면서, 강지혁 보러 찾아오지도 않았으면서 여전히 강지혁을 사랑한다고? 정말 사랑했으면 더 빨리 돌아와야 하는 거 아니야?”임유진은 강현수를 빤히 바라보다 이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돌아오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어요. 그리고 몇 년이 지났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혁이고 내가 다시 돌아와야 한다면 그것 또한 혁이 옆이에요. 현수 씨 말대로 5년이나 지났어요. 그러니까 이제는 날 잊어버리고 나한테 시간이든 뭐든 쓰지 말아줘요. 그럴 가치고 그럴 필요도 없으니까.”강현수의 눈에 고통의 감정이 스쳐 갔다.“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는 내
임유진은 기억이 돌아온 후 한지영과의 통화에서 그녀가 죽은 후 강현수가 한동안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술을 진탕 마시고 또 허구한 날 그녀의 무덤 앞으로 가 무릎을 꿇은 채 통곡했다던 기사가 났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그리고 그 뒤로 한동안 S 시가 아닌 해외로만 계속 돌고 있었다는 얘기도 말이다.강현수는 목석처럼 차에 기댄 채 계속해서 기다리다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5년간 줄곧 꿈속에서만 또는 정신없이 취해있어야만 간신히 보이던 이의 모습이 이렇게 현실감 없이 눈앞에 나타났다.강현수는 순간 하마터면 다리의 힘이 다 풀릴 뻔했다.그녀다. 그녀가 살아있었다. 이한의 말대로 임유진은 정말 살아있었다.“유진아...”잔뜩 매인 목소리가 강현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강현수가 임유진 쪽으로 뛰어갔다.강현수의 마음은 임유진을 사랑했던 만큼 요동쳤고 또 몸은 그녀를 그리워했던 만큼 흥분이 일었다.임유진의 바로 앞까지 당도했을 때 갑자기 아래쪽에서 웬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이 아저씨 누구야?”강현수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숙이다 그제야 임유진의 곁에 서 있는 현이를 발견했다. 눈빛이 똘망하고 예쁜 것이 임유진과 무척이나 닮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이 뭐라 설명하기도 전에 이 아이가 임유진의 아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당시 뱄던 세쌍둥이 중의 한 명이 틀림없었다.‘선율이만 살아남은 게 아니었구나.’“나는...”강현수는 무릎을 구부리고 현이와 눈높이를 맞춘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는 강현수 삼촌이야. 너는 이름이 뭐야?”“강선현이에요. 원래는 임현이었고요. 현이라고 불러주세요.”아이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강현수를 바라보았다.강현수는 현이를 보면서 문득 어린 시절의 임유진이 떠올랐다. 그날 우거진 풀숲에서 그를 구해주고 또 산 아래까지 그를 업어줬던 용감한 어린 여자아이의 얼굴이 말이다.그때의 기억은 강현수가 한평생 놓
이경빈은 탁유미 사건이 뒤집히면 회사가 타격을 입을 거라는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탁유미를 위해 당시의 사건을 뒤집어주었다.“이경빈 씨 나름의 속죄네요. 그 뒤로 언니 찾아온 적은 있어요?”“네. 그런데 내가 보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걸 아니까 직접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횟수는 그렇게 많지 않아요.”탁유미는 시선을 돌려 현이와 함께 놀고 있는 윤이를 바라보았다.“오히려 이경빈보다 더 많이 찾아온 건 이경빈의 부모님이죠. 윤이를 집에 들이고 싶다고 몇 번이나 찾아왔었어요.”“그걸 언니가 거절했고요?”만약 윤이를 보냈다면 지금쯤 탁윤이 아니라 이윤으로 살고 있었을 테니 거절한 건 분명해 보였다.“윤이가 원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때 이경빈이 하면 안 되는 말을 한 뒤로 윤이는 이경빈에게 줄곧 마음을 닫고 있는 상태예요. 이경빈은 어차피 어린애라 몇 번 달래주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게 어디 그렇게 쉽게 용서가 될 문제인가요? 아이들도 어른들 못지않게 분위기 파악을 잘하고 또 섬세하다는 걸 몰랐던 거죠.”“그럼 언니는 어때요? 언니는 이경빈을 용서할 수 있어요?”임유진이 물었다.사실 그녀는 이곳으로 오기 전에 인터넷으로 이경빈에 관한 소식을 검색해 보았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경빈은 결혼은 물론이고 그 어떤 스캔들도 없었다.아무래도 탁유미의 마음이 돌아서길 기다리는 듯해 보였다.“이경빈이 한 짓은 이미 용서했어요. 계속해서 과거의 일을 붙잡아두고 있어봤자 감정 낭비하는 건 나일 테니까요. 그런데 다시 합치는 건 불가능해요. 우리 사이는 이미 5년 전에 모든 게 다 끝이 났어요.”탁유미가 담담한 어조로 얘기했다. 마치 그로 인해 겪었던 다양한 감정들을 이미 말끔히 지운 사람처럼 말이다.임유진은 탁유미가 이런 식으로 모든 걸 내려놓은 것이 정말 잘된 일인지 몰라 생각이 복잡했다.한때는 그렇게도 사랑하던 두 사람이었는데 공수진의 개입으로 한평생 함께할 수 없는 두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임유진은 딸을 데리
윤이는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이 여전히 임유진을 안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빨개진 채 서둘러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귀까지 빨개진 것이 무척이나 귀여워 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 웃었다.윤이는 여전히 예전의 그 귀여운 윤이었다.강선율은 유치원에 가야 했기에 임유진은 오늘 강선현만 데리고 나왔다. 현이와 윤이는 다행히도 죽이 잘 맞는 듯했다.그런데 둘이서 잘 얘기하며 놀던 중에 현이가 윤이의 귀에 꽂혀있는 보청기를 신기한 눈으로 보더니 곧장 보청기를 빼버렸고 그 탓에 하마터면 보청기가 물컵 안에 떨어질 뻔했다.임유진을 그걸 보고는 엄한 얼굴로 그러면 안 된다고 얘기해 주었다.그러자 현이가 눈을 깜빡이며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물었다.“왜? 이거 중요한 거야?”“응, 이거 없으면 소리를 못 들어. 그래서 이걸 꼭 착용하고 있어야 해.”탁윤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신 대답해주었다.윤이는 세상 사람들이 어떠한 시각으로 장애인을 보는지 이제는 굳이 누구에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보청기를 끼고 있는 이상 일반인과 다를 거 하나 없는데도 학교에서는 여전히 그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거나 키득키득하며 대놓고 조롱의 시선을 보내는 아이들이 존재했다.“우와! 이 보청기 대단하다. 이거 덕분에 오빠가 현이 목소리도 들을 수 있는 거잖아. 정말 잘 됐다! 오빠, 현이가 나중에 오빠를 위해서 피아노 연주해줄게. 현이 피아노 엄청 잘 쳐!”현이가 눈을 반짝이며 윤이에게 말했다.만약 이곳에 피아노가 있었으면 아마 이런 말 할 겨를도 없이 바로 자기 솜씨를 뽐내러 건반을 두드렸을 것이다.탁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하는 현이를 조금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현이는 진심으로 그가 들을 수 있는 것에 기뻐하고 있었다.이제껏 다른 사람에게 청력에 관한 얘기를 했을 때 이런 대답을 들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래서일까, 윤이는 현이의 말과 미소에 괜스레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 현이가 쳐주는 피아노 연주 꼭 들을게.”사실
지난 5년간 그는 매일같이 후회했다. 그때 임유진과 조금 더 가까워질 기회를 자기 스스로 놓쳐버렸던 그였으니까. 결과적으로 그는 자기 손으로 그녀를 강지혁에게 내어준 거나 다름이 없었다.그리고 그 때문에 임유진은 절벽에서 떨어지고 말았다.만약 그때 억지로라도 그녀를 곁에 두었으면 어쩌면 그딴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차량이 강씨 저택 앞에 도착했다.강현수가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경호원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유진이 보러 온 거니까 비켜.”강현수를 알아본 경호 실장이 예의를 갖추어 그에게 말을 건넸다.“사모님께서는 지금 외출 중이십니다. 사모님과 만나 뵙기를 원하시면 후일 따로 약속을 잡고 오시죠.”강현수는 그 말에 떠나는 것이 아닌 차에 기댄 채 임유진이 오기를 기다렸다.몇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5년이라는 시간에 비하면 몇 시간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었으니까.경호원들은 고집스러운 그의 행동에 별다른 얘기는 못 하고 그저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아무리 강지혁이 대단하다고 한들 강현수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으니까.그시각, 임유진은 현이와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 안에 있었다.사실 외출하겠다고 했을 때 집사가 차량을 준비해두겠다고 했지만 임유진은 오랜만에 돌아오기도 했고 또 딸에게 S 시를 제대로 보여주고 싶어 집사에게 지하철로 가겠다고 했다. 이곳은 그녀와 강지혁이 만나고 서로 알아가고 사랑했던 곳이니까.“엄마, 우리 다음에 또 윤이 오빠 보러 가자. 그때는 율이 오빠도 같이!”현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으로 보아 탁윤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그래, 다음에는 율이도 같이 가자. 유미 이모랑 윤이가 엄청 좋아할 거야.”두 사람이 오늘 외출한 이유는 탁유미 때문이었다.탁유미는 간이식 수술을 받은 뒤로 전과 같이 힘들게 일을 하는 건 무리라 윤이 초등학교 근처에 작은 분식점을 차렸다.그 덕에 윤이는 하교하고 나면 바로 분식집에 들
강지혁은 조금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허리를 다시 바로 세웠다.“별로.”그는 이 말을 남긴 후 강선율의 손을 잡고 밖으로 향했다.임유진은 두 사람이 떠난 후 멍한 얼굴로 강지혁의 말을 곱씹어보았다.‘별로... 싫은 건 아니라는 뜻인가? 정말 싫었다면 혁이 성격상 바로 얘기했을 테니까. 그렇다는 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쓰다듬어도 된다는 말인가?’임유진은 강지혁이 생각보다는 그녀를 잘 받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자신을 다시 사랑하게 만드는 게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네가 여기까지는 웬일이야?”이한이 웃으며 강현수에게 물었다.“시간이 조금 비어서 왔어.”강현수가 답했다.“그리고 며칠 뒤에 또다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서 그 전에 얼굴 한번 보려고.”“또 해외로 간다고? 돌아온 지 일주일도 채 안 됐잖아.”“해외에서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있는데 주관할 사람이 필요해.”강현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아저씨도 너 가는 거 동의하셨어?”“아버지가 동의 안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내가 가겠다고 한 거니까.”이한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현수야, 너 자꾸 해외로 나가는 거 임유진 씨 때문이지?”강현수는 그 말에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 여전히 그는 임유진이라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가슴에 통증이 밀려왔다.“임유진 씨가 죽은 것 때문에 괴로워서 해외로 나가는 거라면 이제 그러지 않아도 돼.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까.”이한이 강현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유진 씨 죽지 않았어. 다시 돌아왔어. 지혁이 곁으로.”어차피 임유진이 살아있단 얘기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강현수도 며칠 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다.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사실은 죽은 게 아니라는 것과 다시 살아서 강지혁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걸 알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강현수는 그간 줄곧 해외사업에만 몰두하고 있어 국내 소식은 조금 늦게 접하는 편이었다. 만약 그
강지혁의 오른쪽 옆에 앉은 강선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안 먹어? 엄마가 만든 김밥 엄청 맛있어! 현이가 장담해!”아이는 말을 마친 후 다시 고개를 돌려 왼쪽 옆에 앉은 강선율을 바라보았다.“오빠도 엄청 맛있다고 했어. 그치?”강선율은 그 말에 입에 김밥을 넣은 채로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엄청 맛있는 건 아니었지만 엄마가 만든 거라 계속 입에 넣었다. 유치원에서 또래 친구들은 항상 엄마가 준비해준 음식을 먹었으니까.임유진의 김밥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예쁜 모양을 하고 있었다.맛이 없지는 않다만 과연 아빠가 이 김밥을 먹을까?강선율은 강지혁이 이런 귀여운 김밥을 먹는다는 게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았다.두 아이는 들고 있던 포크도 내려놓고 강지혁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임유진은 미소를 지은 채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한번 먹어봐. 분명히 맛있을 거야.”그녀가 이렇게 자신감을 가지고 말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처음에는 단지 김밥을 마는 것뿐인데도 모양이 제대로 나지 않았고 맛도 짜거나 이상했으니까.강지혁이 선뜻 손을 대지 않자 옆에 있던 집사가 한마디 거들었다.“사모님께서 1시간이나 넘게 부엌에서 만드신 거예요. 저도 맛을 봤는데 아주 맛있더라고요.”그 말에 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바라보았다. 변형되어있는 손가락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 심장에 통증이 이는 것 같았다.강지혁은 몇 초 고민하다 결국 젓가락을 들어 김밥을 입에 넣었다.그리고 강선율은 그 모습에 깜짝 놀라 입을 떡하고 벌렸다.아빠가 아이들이나 먹을 것 같은 김밥을 먹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전에 셰프가 귀여운 동물 모양의 음식을 내왔을 때도 한 번쯤은 먹을 만한데 끝까지 손을 대지 않았던 그였으니까.반면 강선현은 묵묵히 김밥을 먹는 강지혁을 바라보며 역시 엄마의 김밥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밥이라며 뿌듯해하고 있었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강지혁은 회사에 가기 위해, 그리고 강선율을 유치원에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