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혁은 그녀를 데리고 앞으로 걸어갔고 이경빈은 두 사람을 보더니 살짝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또 뵙네요. 강지혁 씨도 전시회에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어요.”“오늘은 우 변호사님 뵈려고 일부러 찾아왔어요.”강지혁이 말하며 고개 돌려 우효주에게 인사했다.“안녕하세요, 강지혁입니다. 이쪽은 제 약혼녀 임유진이에요. 줄곧 우효주 변호사님을 뵙고 싶어 했거든요.”“저를요?”우효주가 흠칫 놀랐다. 강지혁이 본인 이름을 불러줄 때 심장이 움찔거렸다.강지혁, 그는 S 시의 일인자라 이 도시에서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인물이다.그런 그가 생각보다 젊고 카리스마가 차 넘쳤다.우효주는 임유진에게 시선을 돌렸다.S 시로 오다 보니 그녀는 자연스럽게 이곳의 시사를 접하게 됐고 요 며칠 4년 전의 소송을 뒤집은 사건이 핫한 주제로 떠올랐다. 가십거리 기사이든 변호사 업계이든 전부 떠들썩하게 거론되고 있다.“알고 있어요.”우효주가 임유진에게 말했다.임유진은 흠칫 놀라더니 아마도 그녀가 4년 전 사건을 접했을 거로 예상했다!40대쯤 돼 보이는 우효주는 오늘 드레스가 아닌 네이비색 슈트를 입고 있었는데 우아한 기품과 카리스마를 내뿜었다.“우 변호사님, 안녕하세요. 변호사님은 제 학창시절 우상이었어요.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임유진이 대범하게 인사하고는 저 자신을 비웃듯 말을 이었다.“아마 제 사건을 접하고 저를 아시게 된 거겠죠?”“맞아요. 유진 씨 사건은 요즘 변호사 업계에서 자주 거론되고 있어요.”우효주가 말했다.“그런데 오늘 이렇게 유진 씨를 직접 뵐 줄은 몰랐네요. 게다가 제가 유진 씨 학창시절 우상이었다니, 제가 영광이에요.”“그때 저희 반에서 많은 여학생들이 나중에 크면 우 변호사님 같은 변호사가 되고 싶어 했어요.”변호사 업계에서 진짜 유명한 여변호사는 몇 안 되니까.임유진은 마음이 설렜지만 그 많은 일을 겪은 뒤로 풋풋한 젊은이처럼 우상을 열정적으로 맞이할 순 없었다.“가능하시다면 변호사님께 법률적인 자문을 받고 싶습니다
이경빈이 이 아들을 거들떠보지 않는다고 해도 탁유미는 절대 방심할 수 없다. 만에 하나 윤이를 빼앗길 수 있으니까!“그 아이 첫인상이 좋아서 그런 것 같아요.”이경빈이 말했다. 늘 엄숙한 표정이던 그의 입가에 간만에 미소가 번졌다.“이번에 S 시로 와서 또 그 아이를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윤이를 만난다고? 임유진은 문득 코끝이 찡했다.이 남자는 애초에 탁유미를 그토록 처참하게 만들었고 그 탓에 윤이도 아빠 없는 자식으로 태어났다.사람들에게 우러러 보이며 사치한 삶을 누릴 때 탁유미는 감방에서 모진 고통에 시달렸다.그런데 지금 또 윤이를 볼 생각을 하고 있다니, 아들의 존재도 모르는 그가 윤이를 보고 싶어 하다니, 이 얼마나 황당하고 가소로운 일인가.“안돼요.”임유진이 단호하게 거절했다.그녀가 너무 단칼에 거절하니 이경빈은 흠칫 놀라며 의심이 일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짙은 눈동자에 의심이 살짝 스쳤다.“임유진 씨가 번거롭다면 제게 연락처를 남겨주세요. 제가 직접 찾아가면 됩니다. 장난감 좀 사주고 싶어요. 그 아이가 무척 귀여워 보이던데 가능하다면 더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후원해주고 싶어요.”이경빈이 말했다.그는 청력을 잃은 그 아이가 자꾸만 떠올랐다. 그렇게 예쁜 아이가 들을 수 없다니, 이경빈은 아이를 도와서 더 좋은 치료를 받게 해주고 싶었다.이런 마음은 전에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다.또 어쩌면 그의 친구 말대로 여태껏 아이가 없어서... 낯선 아이에게 이상하리만큼 호감을 느낀 게 아닐까.나중에 그에게도 아기가 생기면 당연히 모든 사랑을 제 자식에게 퍼줄 것이다.“괜찮습니다.”임유진이 차갑게 말했다.“저랑 지혁이가 윤이에게 충분히 좋은 의료 환경을 제공해주고 있고 윤이네 가족들도 딱히 방해받고 싶어 하지 않으니 경빈 씨 마음만 제가 대신 받을게요. 연락처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이경빈은 눈빛이 살짝 짙어졌다.임유진과 강지혁이 떠난 후 우효주는 협력 파트너인 이경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는 전에
빌어먹을!순간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경빈의 손에 쥐어있던 유리잔이 산산조각이 났고 파편이 그의 손에 찔렸다.오른손에서 선홍빛 핏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방금 너무 힘을 준 탓에 유리잔이 산산조각이 났다!옆에 있던 우효주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경빈 씨...”“괜찮아요. 뭐 좀 생각하다가 실례를 범했네요. 죄송해요.”이경빈이 담담하게 말했다.그의 오른손엔 피가 줄줄 흘렀지만 전혀 고통을 못 느끼는 듯싶었다....“오늘 원래 우효주 씨 만나서 누나를 즐겁게 해주고 싶었는데 되레 화만 잔뜩 나게 했어.”강지혁이 말했다.“아니야, 우효주 씨 만나서 너무 좋아. 고마워 혁아.”임유진이 대답했다.“이경빈 씨가 한 말 때문에 화난 게 아니었어?”그가 물었다.“그게 너 때문은 아니잖아. 난 그저 윤이랑 유미 언니가 불쌍해서 그랬어.”임유진이 답했다.“언니가 감옥에서 애 낳을 때 어디서 뭐 하다가 인제 와서 윤이의 치료를 후원해주겠대? 웃기지도 않아. 윤이는 이경빈 씨 아들이라고!”임유진은 말하다가 목이 살짝 멨다.“윤이는 태어날 때부터 청력에 문제가 있었어. 유미 언니는 아이에게 인공와우를 해주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까지 일하며 돈 벌었다고. 얼마나 고생했겠어! 4천만 원의 인공와우는 언니에게 엄청난 금액이지만 이경빈 씨에겐 밥 한 끼 가격일 수도 있어!”그녀의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강지혁은 속상한 표정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줬다.“알았어, 왜 말하다 말고 울어? 탁유미 씨와 윤이가 안쓰러우면 우리가 나중에 계속 도와주면 되잖아.”“맞아.”임유진은 머리를 끄덕이고 살짝 미안한 듯 그에게 말했다.“나 화장실 가서 화장 좀 수정할게. 여기서 기다려.”“같이 가.”강지혁이 말했다.“괜찮아. 넌 여기서 나 기다리면 돼. 금방 돌아올게.”강지혁이 진짜 화장실 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가 또 무슨 소란이 일지 모른다. 오늘 전시회에 그를 아는 대기업 인사들이 수두룩하니까.임유진은 화장실로 걸어가다가 복도를
강현수가 그녀 앞에 멈춰 서자 임유진은 순간 넋을 잃었다.“왜 그런 눈빛으로 날 봐요?”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네?”그제야 임유진은 정신을 가다듬었다.“꼭 마치 나한테서 뭘 찾는 것만 같네요.”그는 불쑥 몸을 기울이고 그녀에게 얼굴을 들이댔다.“난 유진 씨가 지혁이한테만 호감 있는 줄 알았는데 나한테도 관심 있나 봐요?”그녀는 무심코 뒤로 물러서며 강현수를 피하려 했다.하지만 오늘 킬힐을 신어 뒤로 물러서다가 그대로 삐끗했고 드레스도 너무 길어서 그만 몸이 뒤로 기울었다. 임유진은 미처 반응할 새가 없이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 손을 내밀었다!덥석!그녀는 강현수의 손을 붙잡았다. 마치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일보 직전에 생존의 기회를 거머쥔 듯이 다섯 손가락으로 그 손을 꼭 붙잡았다.강현수는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잽싸게 허리를 감싸았다.“괜찮아요?”귓가에 강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놀라서 넋 놓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이 꼭 잡은 강현수의 손을 멍하니 바라봤다.그녀는 지금 강현수의 손을 그 어느 때보다 꽉 잡고 있었다!마치 꿈속에서 어린 소녀가 어린 소년의 손을 꼭 잡은 것처럼 말이다.머리가 또다시 깨질 듯이 아팠다!수천 개의 바늘로 콕콕 찌르듯 미칠 듯이 아팠고 기억의 파편들이 또다시 파도처럼 일렁였다.“치마가 다 찢어졌어. 이 치마 내가 엄청 좋아하는건데, 이거 비싼 거야. 외할머니가 아껴 입으라고 하셨어.”“내가 나중에 치마 이만큼 사줄게.”“그렇게 많이는 싫어. 난 지금 이 치마가 제일 좋아.”“그럼 나중에 보라색 치마를 사줄게. 난 보라색이 제일 예뻐.”“그럼 보라색 치마도 이 치마처럼 잔꽃 무늬가 많아? 난 이런 잔꽃 무늬가 마음에 드는데.”“좋아. 그럼 내가 잔꽃 무늬가 많은 보라색 치마로 사줄게.”앳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건 꿈에서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였다.“임유진 씨, 괜찮아요?”그렇다면... 이건 또 누구의 목소리일까
그 시각 강현수는 손에서 오는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의 신경은 온통 그녀에게 쏠렸다.“유진 씨, 일단 이 손 놓고 나랑 함께 병원 가요.”그가 말했다.‘손을 놓으라고? 안돼, 절대 놓아줄 수 없어. 왜냐하면...’“안 놔. 절대 안 놔. 내가 저 위로 데려다줄 테니 이 손 꼭 잡아.”극심한 두통을 느끼며 임유진은 무심코 이런 말을 내뱉었다.그녀의 말을 들은 강현수는 온몸이 돌처럼 굳고 피가 한순간 멈춘 것 같았다. 숨조차 안 쉬어질 지경이었다.이 말은... 이 말들은...강현수는 한없이 짙은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가 뭐라고 중얼거리는지 더 자세히 듣고 싶었다.왜 이런 말을 한 걸까? 이 말들은 그해 ‘그 소녀’만 알고 있을 텐데!바로 이때 강지혁이 달려왔다.“강현수, 너 지금 내 약혼녀한테 뭐 하는 짓이야?”그는 임유진을 품에 확 껴안더니 강현수의 손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는 걸 보자 표정이 한없이 일그러졌다. 그 손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통에 휩싸인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유진아, 왜 그래?”음침했던 얼굴이 걱정으로 가득 찼다.“또 머리 아파? 괜찮아, 금방이면 나을 거야. 금방 나아...”청량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강지혁은 두 팔을 벌려 그녀를 껴안고 머리를 가슴팍에 기대게 하고는 아이 달래듯 자상하게 달랬다.한없이 거만한 강지혁 도련님이 누군가를 이렇게 달래고 있다니?그를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임유진뿐이다!‘혁이다. 혁이가 날 부르고 있어!’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어지러워 미칠 지경이지만 그녀는 애써 두 눈을 뜨고 강지혁을 바라봤다. 비스듬히 눈을 뜨고 아름다운 눈동자로 강지혁을 빤히 쳐다봤다.강지혁은 걱정 가득한 눈길로 그녀에게 물었다.“머리 많이 아파?”“조금만 더 기대고 있을게...”임유진이 대답했다. 이렇게 그에게 기대고 있으면 두통이 조금 나아질 것 같았다.“혁아, 말 좀 해줘, 응?”그녀는 강지혁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그녀가 손을 놓자마자 강현수가 되레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너 대체 누구야?”뜨겁고 예리한 시선은 그녀를 훤히 꿰뚫어 볼 기세였다!임유진이 넋 놓고 있을 때 강지혁이 옆에서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이 손 놔!”강지혁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만 강현수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임유진만 빤히 쳐다봤다.“너 대체 누구냐고?!”강지혁의 눈가에 사악한 빛이 감돌더니 손에 힘을 꽉 주었다.일반인이라면 진작 손을 놓았겠지만 강현수는 끝까지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마치 인생에서 제일 소중한 무언가를 붙잡고 있듯이 꽉 잡았다.공기 속에 질식할 것만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세 사람의 이상한 행동에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고 다들 곧바로 강지혁과 강현수의 신분을 알아챘다.둘은 S 시를 휘젓는 어마어마한 남자들인데 지금 한 여자를 두고 싸우고 있다니.놀랍고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배여진이 화장실에서 나와 강현수를 찾을 때 마침 이 광경을 목격했다.강현수가 임유진에게 대체 누구냐고 묻는 순간 배여진은 심장이 멎을 것 같았고 발밑에서부터 한기가 엄습해왔다!왜... 강현수가 왜 임유진에게 이렇게 묻지?!한편 강현수는 임유진을 잡은 손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강지혁이 아무리 떼어내려 해도 놓아줄 기미가 없었다!대체 왜?배여진의 머릿속에 수천 개의 물음표가 달렸다.그녀는 재빨리 앞으로 달려갔다.“현수 씨, 무슨 일이에요? 왜 유진의 손을 잡고 있어요?”다만 아무도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현장에 있는 세 사람은 서로를 마주 봤고 배여진은 아웃사이더가 되어 축에 끼지 못했다.그녀는 몹시 난감했다.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도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으니까.“저는 임유진이에요.”그녀가 청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강현수 씨, 이젠 이 손 좀 놓죠!”강현수는 끝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왜 그런 말을 했어? 대체 왜?”“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임유진이 미간을 구겼다.“절대 이 손 안 놓을 거라고 했어. 반드시 나 데리고 올라갈 테니 이
강현수는 그제야 배여진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그의 눈빛이 쓱 어두워졌다.대체 왜 이런 걸까? 배여진이 옆에 있는데 지금 뭘 의심하는 걸까?혹은... 또 다른 무언가를 바라고 있는 걸까?강현수는 끝내 조금씩 손힘을 풀었고 임유진은 재빨리 손을 거두어들였다.강지혁은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혁아, 나 혼자 걸을 수 있어.”임유진이 재빨리 말했다.“아까 머리 아팠잖아. 차까지 안고 갈게. 그럼 좀 나을 거야.”말을 마친 강지혁은 성큼성큼 전시회 출구로 걸어갔다.강현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시선을 거두고 손목에 난 몇 가닥의 붉은 자국을 내려다봤다.방금 임유진과 강지혁이 힘껏 잡아당긴 부위였다. 그제야 강현수는 손목에서 밀려오는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현수 씨 괜찮아요? 괜찮은 거 맞죠?”배여진이 속상한 표정으로 그의 손목에 난 상처를 바라보다가 씩씩거리며 말했다.“강지혁 씨 진짜 너무해요. 현수 씨 손을 정말 부러뜨린다면 내가 목숨을 내걸고라도 현수 씨 대신 이 원한을 갚을 거예요.”용감하게 강현수를 위해 헌신할 수 있다는 그 말, 정작 강현수가 듣기엔 마냥 우스운 말이었다.방금 강지혁 앞에서 배여진은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이런 여자가 진짜 어릴 때 목숨을 내걸고 그를 구해줬단 말인가?강현수는 고개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여진아, 어릴 때 너랑 나 산속에 있을 때 어느 한번 내가 벼랑 끝으로 떨어졌잖아. 그때 네가 내 손을 꼭 붙잡고 했던 말 아직도 생각나?”배여진은 바짝 긴장했다.생각날 리가 있을까. 아예 그녀가 아닌데! 게다가 어릴 때 임유진도 그렇게까지 자세히 말하진 않았다. 그저 둘 사이에 나눴던 대화를 전부 배여진에게 알려줬을 뿐이다.그리고 아무리 임유진이 다 말했다 해도 배여진은 그 당시 흘려넘길 뿐 제대로 기억할 리가 없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데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할 수 있을까!그녀는 강현수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난처한 듯 미소 지었다.
“우연히 마주쳤어. 그리고 내가 발을 삐끗하여 넘어질 뻔했는데 무심코 현수 씨 손을 잡고 나중엔 두통이 발작했어...”임유진은 사건 경과를 최대한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가 또 오해하면 안 되니까.“그럼 현수한테 했던 말도 전부 헛소리야?”그가 되물었다.임유진은 숨이 멎을 것 같고 목소리가 목구멍에 꽉 막혀 나오질 않았다.헛소리? 그건 절대 헛소리가 아니다. 그녀의 꿈속에서 소녀가 소년에게 했던 말이다.하지만 지금 이 문제를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속이고 싶진 않지만 진실을 찾기 전까지 말을 많이 하면 강지혁의 오해를 사기 십상이다.“왜? 대답하기 어려워?”그녀의 침묵에 강지혁이 미간을 살짝 구기며 짙은 눈길로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난 그때 이미 머리가 너무 아파 정신이 흐리멍덩해졌어. 무슨 말을 했던지 기억도 안 나.”이 말은 진심이다.다른 말은 그녀가 진실을 알아낸 후에 다시 강지혁에게 정확한 해답을 줄 수 있다.“그래?”강지혁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는 계속 임유진의 손목에 난 붉은 자국을 어루만졌다.“하지만 방금 왜 그렇게 현수 손을 꽉 잡은 거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면서도 손을 놓지 않았어.”“무심코 잡았을 뿐이야. 그때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거든. 내 마지막 동아줄이라고 생각하고 꽉 붙잡고 있었어...”그녀가 황급히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해명하면 할수록 강지혁의 낯빛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강현수가 언제 너의 마지막 동아줄이 되었지?”‘동아줄’이란 세 글자에 강지혁은 불안감에 휩싸였다.그리고 또다시 그녀가 강현수의 손을 꽉 잡고 있던 장면이 눈앞에 떠올랐다.순간 그는 저 자신이 소외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애초에 그녀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강현수의 옆에서 잘 지내고 있었을 텐데.전에 강현수와 있었던 일을 다 잊었지만, 어릴 때 그에게 한 맹세도 다 잊었지만 몸이 기억하고 본능적으로 강현수를 꽉 붙잡았다!“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내 말은...”임유진은 횡설수설하며 자신의 단어 사용이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