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라는 정말 억울한 사람처럼 열변을 토했다. 하지만 그의 눈과 마주칠 때면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눈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그렇지. 내 여자친구지."강현수는 혼자 중얼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임유라 쪽으로 다가갔다.그에 임유라는 또다시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믿어주는 건가? 역시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게 아니었어!강현수는 손을 들어 천천히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임유라는 그의 손짓에 순종하는 모습을 하며 눈물을 잔뜩 머금은 채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삼류 여배우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연기력이 완전히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억울한 척 가녀린 척하는 건 그녀가 제일 잘하는 연기였다."만약 현수 씨도 정말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나 당장 언니한테 사과할게요. 인터넷에서 이보다 더한 비난을 받아도 상관없어요."임유라는 한 떨기 가녀린 꽃 같은 얼굴로 말했다.그러자 강현수는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그녀의 입술을 매만지며 물었다."내가 왜 당신을 내 여자친구로 허락했는지 알아요?"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임유라는 흠칫 놀랐다. 이 질문은 그녀 역시 궁금했었으니까. 연예계에는 임유라보다 예쁜 사람이 널리고 널렸는데 왜 하필 임유라였던 거지?"이유가 뭐가 됐든 난 현수 씨 여자친구가 될 수 있어서 기뻐요."임유라는 완벽한 대답이었다며 스스로 뿌듯해했다.그러자 강현수가 코웃음을 지었다."내가 이것저것 서포트 해주니까?""아, 아니에요!"임유라가 다급하게 부인했다."현수 씨가 밀어주지 않아도 나는 상관없어요. 난 현수 씨를 사랑해요.""난 아니에요."강현수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매정하게 말했다.그러자 임유라의 얼굴에 슬픔이 돌았다. 물론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직접 그의 입에서 그 말을 들으니 꿈꿔왔던 아름다운 미래가 한순간에 확 깨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이 입술, ‘그 사람’ 입술과 닮았어요. 그래서 여자친구 자리를 준거고. 하지만 이제는 필요 없어졌네? 입술이 닮은 것 빼고는 비슷한
그건 절대 임유라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다."나 정말 현수 씨 사랑해요. 내, 내 입술이 그 사람과 닮았다고 했죠? 난 대체품이라도 상관없어요. 현수 씨 옆에 있게만 해주면 난 그걸로 족해요. 그러니까 제발 헤어지자고 하지 말아요!"임유라는 거의 애원하듯 그에게 매달렸다. 그와 헤어지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하지만 강현수는 미련 없다는 듯 손가락을 떼어내더니 유유하게 소파에 가서 앉았다."안타깝지만 그쪽은 대체품이 될 자격도 없어요."임유라가 어떻게 감히 그 아이의 대체품이 될 수 있겠는가?강현수는 지금까지 몇 번이고 그 아이의 대체품을 찾아 헤맸지만, 매번 실망밖에 하지 않았다. 그의 여자친구들을 보면 어딘가 한구석은 그 여자아이를 닮아 있었다. 하지만 막상 옆에 두고 보면 전혀 그 아이와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임유라가 그의 바짓가랑이에라도 매달릴 심정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곧 두 명의 경호원에 의해 제지당했다."현수 씨!"그녀는 그의 이름을 간절하게 외쳐보았지만, 강현수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임유라가 저택에서 끌려나간 후 거실에는 다시 정적이 흘렀다. 강현수는 모니터에 띄워진 영상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임유진의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임유진이라면 다를까? 아니, 아마 이런 대체품 따위 하려고 하지도 않겠지.강현수는 임유라가 자신을 장기의 말로 사용하려고 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진정 그를 화나게 한 건 임유진을 사회적으로 매장하려고 했다는 사실 때문이다....임유진도 여론이 바뀌는 걸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다.저녁 무렵까지 임유진의 욕으로 가득했던 것이 지금은 임유라를 비난하는 댓글로 바뀌어 있었다. 급변하는 네티즌들의 태도에 임유진은 조금 소름이 끼쳤다."이 전문가들은 네가 섭외한 거야?"임유진이 강지혁에게 물었다. 이딴 가십거리에 정말 정의감 하나로 영상까지 만들 만큼 전문가들이 한가롭다는 생각은 안 했으니까."응."강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오후에 그런
많은 여자들이 임유라의 추락을 바라고 있다. 물론 임유진은 동정할 생각이 없다. 자신을 해하려는 사람을 감싸줄 만큼 미련하지 않으니까."왜 내 여자친구라고 얘기 못 하게 하는 거야?"강지혁이 물었다. 그는 원래 이번 기회에 대외적으로 임유진이 자기 여자친구라고 확실하게 얘기할 예정이었다. 이대로 강현수와 그녀 사이에 뭔가가 있다고 오해하게 놔두고 싶지 않았으니까.하지만 임유진이 거절했다."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도 않고 화제의 인물이 되고 싶지도 않아."사귀는 사실을 일부러 감추려는 의도는 없었다.그리고 연회장에 같이 간 일도 있었기에 아마 알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을 것이다.하지만 만약 공식적으로 선언해 버리면 그녀는 기자들의 먹이가 될 것이고 그녀의 신상을 캔 사람들은 가게에 몰려들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것이다.또한, 감옥살이했던 사실과 강지혁의 전 약혼녀인 진애령의 사건까지 들춰지게 되면 더 많은 유언비어가 퍼지게 될 것이 뻔했다.물론 그녀는 자신을 향한 뜬소문들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강지혁에 대해 멋대로 얘기하는 건 참을 수가 없다.사건을 제대로 되돌려 결백을 찾기 전에 만약 두 사람이 사귄다는 기사가 나게 되면 모두 이상한 쪽으로 오해할 것이다.강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내가 지켜줄게. 이름이 거론되는 게 싫으면 S 시에 있는 매체 관계자들에게 쓸데없는 기사는 쓰지 않도록 내가 말해둘게.""혁아, 난 겁나는 게 아니야. 우리가 함께하기로 한 이상 언젠가는 대중들이 우리 사연을 알게 될 거라는 거 잘 알고 있어."S 시에서 제일 유명한 강지혁의 사생활을 대중들이 가만둘 리가 없었다."내 사건을 만약 사람들이 알게 되면 우리 둘뿐만 아니라 강씨 일가도 큰 타격을 입게 될 거야. 판결서에는 아직 내가 진애령 씨를 차로 치어 죽인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난 상관없어."강지혁은 여론이 두렵지 않았다. 여론 자체를 통제해버리면 그만이니까."하지만 난 신경이 쓰여."임유진이 말했다.전에 사건
다음날, 임유라와 강현수가 헤어졌다는 소식은 빠르게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이따금 보이는 임유진 때문에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댓글은 빠르게 삭제되었다.임유진을 이 사건에서 완전히 제외하겠다는 강지혁의 판단이었다.강현수가 여자친구와 헤어지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어떤 사람들은 조만간 헤어질 줄 알았다는 식의 글을 적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임유라보다 훨씬 예쁘고 실력도 좋은 연예인들도 차인 마당에 임유라라고 안 차일까?전 여자친구들에 비해 임유라는 확실히 여러면에서 떨어졌다.또한, 많은 사람이 연예계에서 임유라의 지위는 오늘부로 바닥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측했다. 사람들이 그녀를 떠받들었던 건 임유라가 강현수의 여자였기 때문이고 이제 그녀는 그저 전 여자친구일 뿐이니까.임유라의 집.임정호와 방미령은 지금 걱정 가득한 얼굴로 임유라를 보고 있다. 강현수와 자신들의 딸이 헤어졌다는 소식을 그들은 아까 이웃집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 들었다.그 이웃은 웃음을 참으며 그들을 비웃듯 말했다."너무 속상해하지 말아요. 강현수가 여자친구와 헤어진 게 어디 이번이 처음인가요? 유라가 여자친구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대단한 거예요. 계속 단역만 맡았던 유라가 언제 또 여자 주인공을 해보고 광고를 받아보겠어요!"두 사람은 그 말에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하지만 그들이 단지에서 나올 때 다른 주민들도 똑같은 소리를 해댔다.이것도 물론 평소 자기 집 딸이 강현수 여자친구라고 괜히 으스대며 동네 사람들과 자신들을 계급 나누듯 무시했던 그들의 업보였다.그들은 임유진이 감옥에 갔다 온 일로 한동안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둘째 딸까지 별 볼 일 없게 되니 또다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유라야, 너 정말 강현수와 헤어진 거니? 어떻게 다시 만날 수는 없는 거야?"방미령이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래그래. 어떻게 일방적으로 그렇게 헤어지자고 할 수가 있어. 너희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잘 사귀고 있었잖아."임정호도 옆에서 거들었다
‘그래, 모든 게 다 임유진 때문이야! 내가 간신히 얻은 것을 그 년이 싹 다 망쳐놓은 거야!’하지만 임유라가 간과한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그녀가 얻었다고 표현한 그 모든 것들이 임유진 덕에 잠시라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막 배달을 끝낸 임유진이 가게로 들어오자 갑자기 그녀 옆으로 두 명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그중 한 사람이 있는 힘껏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얼마나 세게 쳤는지 임유진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나게 되었고 입에서는 비릿한 피 냄새까지 났다."이런 빌어먹을 년이, 동생이 잘 되는 게 그렇게도 배가 아프던? 그래서 동생 남자까지 뺏으려 했어? 임씨 가문에서 어떻게 너 같은 게 나왔을까!"뺨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다짜고짜 욕을 해대며 손까지 올린 방미령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방미령이 또 한 번 손을 올리려고 하자 임유진은 이번에 팔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고 그에 방미령이 두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왜, 엄마로서 자식 교육도 못 하니?""나한테 엄마는 한 분뿐이에요. 당연하게도 그게 당신은 아니고요."임유진이 단호하게 말했다."너는 대체 나를 뭐로 아는 거니? 역시 뻔뻔한 것도 유전이라더니만, 엄마가 뻔뻔하니 그 딸도 뻔뻔하기 짝이 없네. 허구한 날 남의 남자를 뺏을 줄이나 알았..."방미령은 갑자기 날아든 뺨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너... 너 지금 나 때렸니?"방미령은 임유진이 손을 올릴 줄은 몰랐는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왜요, 나는 못 때릴 줄 알았어요?"임유진이 차갑게 읊조렸다."게다가 뻔뻔한 거로 따지면 당신이 최고 아닌가? 우리 엄마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엉덩이에 불붙은 똥강아지처럼 급하게 엄마 자리 꿰차고 들어온 게 누구였죠? 참, 그때 이미 배 속에 아이까지 배고 있었죠?"이제까지 임유진은 그래도 상대가 어른이기에 아무리 모욕적인 말을 들어도 전부 참아줬었다. 하지만 저번에 엄마의 무덤을 핑계로 돈을 뜯어내려고 한 사건을 기점으로 더
임정호는 얼른 방미령을 부축하더니 임유진을 향해 호통쳤다."아무리 계모라도 상대는 어른이야. 버릇없게 굴지 말고 당장 사과해!"임유진은 냉랭한 표정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예전에는 그의 인정을 받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임유라에게 주는 애정 반만이라도 받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고 그걸 깨닫는 순간 임유진은 마음을 닫아버렸다."내가 사과를 왜 하죠? 거의 죽일 듯이 달려드는 사람에게 가만히 얼굴을 대줘야 맞는 걸까요? 나뿐만 아니라 저 여자는 지금 내 어머니까지 모욕했어요. 그런데도 나한테 참으라고요? 엄마한테 미안한 짓을 한 장본인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요?"임정호의 얼굴에 잠시 난감한 기색이 스쳤지만 방미령이 난리를 피우자 금방 표정을 바꿨다."이 사람이 널 좀 때리면 또 어떠니? 그리고 유라한테 네가 어떤 짓을 했는지는 왜 말 안 해? 너만 아니었으면 네 동생 헤어지지도 않았어."그러자 임유진이 차갑게 웃었다."그렇게 싸고도는 임유라가 먼저 어떤 짓을 했는지 한번 제대로 물어보고 오세요.""무슨 헛소리야? 네 동생이 무슨 짓을 저질렀을 리가 없잖아!"임정호가 무서운 얼굴을 하며 말했다."쓸데없는 말 필요 없고 지금 당장 이 사람한테 사과해!"방미령은 옆에서 동네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나 경찰 부를 거야. 너 이건 살인 미수야 알아?!"임유진은 두 사람이 신경도 안 쓰인다는 듯 몸을 돌려 탁유미를 향해 말했다."미안해요, 언니. 저 때문에 장사에 영향이 가게 생겼네요.""아니야."탁유미는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손님들께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비켜 달라고 부탁했다.임정호는 자신들을 완전히 무시하는 임유진을 보면서 자존심이 상했는지 바로 달려들어 손찌검하려고 했다.그걸 알아챈 임유진이 재빨리 피하려고 할 때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를 뒤로 끌어당기더니 임정호를 그대로 발로 차 멀리 날려버렸다.꼴사납게 날아간 임정호가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이번에는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가볍게 그를 제압했다
임유진은 확실히 그녀보다 운이 좋았다.탁유미는 과거를 떠올리면서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전에 그녀는 자신을 위해 세상을 적으로 돌릴 수 있는 남자를 만났다고 생각했었지만 알고 보니 그 남자가 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안타깝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그녀의 사랑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났고 그녀는 지금 윤이를 건강하게 키우는 데만 몰두하고 있다.강지혁은 고개를 숙여 임유진의 터진 입가와 부어오른 뺨을 확인하더니 눈살을 찌푸렸다.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상처를 살살 어루만지며 물었다."누가 이랬어?""여긴 어쩐 일이야?"임유진이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되물었다."일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마침 근처라서 들렀어."들렀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임유진은 또다시 모욕적인 말을 들으며 그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을 것이다."누가 이런 거야?"강지혁이 다시 한번 되물었다. 말해줄 때까지 계속 물어볼 것 같은 느낌에 임유진은 방미령을 가리켰다."저 아줌마. 하지만 나도 때렸어."강지혁의 시선이 방미령을 향했고 차가운 그의 시선에 방미령은 소름이 돋았다."뭐, 뭐요. 내가 엄마라서 좀 때렸는데 뭐 문제 있어요? 그깟 치료비 내가 대주면 될 거 아니에요..."강지혁은 천천히 그녀 앞으로 다가가더니 망설임 없이 바로 그녀의 뺨을 때려버렸다.방미령은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어 졌고 거센 충격으로 피와 함께 이빨도 부러졌다."때렸어... 때렸어... 어떻게 나를!"강지혁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좀 때렸는데 뭐 문제 있어요? 그깟 치료비 내가 대줄게요."그는 방미령이 했던 말을 그대로 그녀에게 다시 돌려주었다.문제는 강지혁에게 치료비를 청구할 수 있는 배짱이 과연 그녀에게 있을까?얼마 안 가, 경찰이 도착했고 모든 사람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변호사를 붙여뒀기에 바로 나올 수 있었다. 물론 변호사도 그냥 변호사가 아니라 요즘 제일 잘 나가는 대형 로펌 변호사였다.임정호와 방미령은 가게에서 행패를 부리고 손찌검을
임유진은 조금 뜸을 들인 후 대답했다."나 식당 일 좋아. 그리고..."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혁아, 난 내 힘으로 돈이 벌고 싶은 거야. 만약 너희 회사에 들어가게 되면 내가 네 여자친구라는 소문은 금방 퍼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는 아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매달 출근 도장만 찍고 월급만 타는 그런 생활을 보내게 될 거야.""뭐가 문제야?"강지혁이 되물었다."나는 내 힘으로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 그리고 이대로 쭉 배달 일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야. 나 지금 미래에 도움이 될 수 있게 자격증 시험 같은 것도 알아보고 있어."임유진은 단지 배달 일만 하는 것이 아닌 착실히 미래를 계획하고 있었다.그 말에 강지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손을 들어 부드럽게 그녀의 볼을 쓸어내렸다.그러자 임유진이 조금 아픈 듯 얼굴을 찡그렸다."집에 가자마자 약부터 발라야겠어. 그리고 내가 전에도 말했지.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전화부터 하라고. 왜 안 했어?"그러자 임유진이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게... 까먹었어..."너무나도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강지혁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무슨 일이 생기면 기대고 싶은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생각에 강지혁은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다음부터는 까먹지 마. 무슨 일 생기면 나부터 찾아. 알겠어?"강지혁이 당부했다."응, 알겠어."임유진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참, 아까 굳이 뺨을 때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그 여자가 너 고소하기라고 하면 일이 더 복잡해 질 거야.""그러라고 해."강지혁은 상관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 방미령을 때린 건 임유진을 건드리면 그게 누구라도 가만두지 않겠다는 일종의 경고였다."그 두 사람은 널 왜 찾아온 거야?"강지혁이 물었다."임유라가 강현수 씨와 헤어진 게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나 봐."임유진은 실소를 터트렸다."그게 아니면 그저 분풀이할 상대가 필요했을지도 모르지. 임
강지혁은 조금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허리를 다시 바로 세웠다.“별로.”그는 이 말을 남긴 후 강선율의 손을 잡고 밖으로 향했다.임유진은 두 사람이 떠난 후 멍한 얼굴로 강지혁의 말을 곱씹어보았다.‘별로... 싫은 건 아니라는 뜻인가? 정말 싫었다면 혁이 성격상 바로 얘기했을 테니까. 그렇다는 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쓰다듬어도 된다는 말인가?’임유진은 강지혁이 생각보다는 그녀를 잘 받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자신을 다시 사랑하게 만드는 게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네가 여기까지는 웬일이야?”이한이 웃으며 강현수에게 물었다.“시간이 조금 비어서 왔어.”강현수가 답했다.“그리고 며칠 뒤에 또다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서 그 전에 얼굴 한번 보려고.”“또 해외로 간다고? 돌아온 지 일주일도 채 안 됐잖아.”“해외에서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있는데 주관할 사람이 필요해.”강현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아저씨도 너 가는 거 동의하셨어?”“아버지가 동의 안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내가 가겠다고 한 거니까.”이한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현수야, 너 자꾸 해외로 나가는 거 임유진 씨 때문이지?”강현수는 그 말에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 여전히 그는 임유진이라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가슴에 통증이 밀려왔다.“임유진 씨가 죽은 것 때문에 괴로워서 해외로 나가는 거라면 이제 그러지 않아도 돼.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까.”이한이 강현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유진 씨 죽지 않았어. 다시 돌아왔어. 지혁이 곁으로.”어차피 임유진이 살아있단 얘기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강현수도 며칠 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다.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사실은 죽은 게 아니라는 것과 다시 살아서 강지혁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걸 알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강현수는 그간 줄곧 해외사업에만 몰두하고 있어 국내 소식은 조금 늦게 접하는 편이었다. 만약 그
강지혁의 오른쪽 옆에 앉은 강선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안 먹어? 엄마가 만든 김밥 엄청 맛있어! 현이가 장담해!”아이는 말을 마친 후 다시 고개를 돌려 왼쪽 옆에 앉은 강선율을 바라보았다.“오빠도 엄청 맛있다고 했어. 그치?”강선율은 그 말에 입에 김밥을 넣은 채로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엄청 맛있는 건 아니었지만 엄마가 만든 거라 계속 입에 넣었다. 유치원에서 또래 친구들은 항상 엄마가 준비해준 음식을 먹었으니까.임유진의 김밥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예쁜 모양을 하고 있었다.맛이 없지는 않다만 과연 아빠가 이 김밥을 먹을까?강선율은 강지혁이 이런 귀여운 김밥을 먹는다는 게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았다.두 아이는 들고 있던 포크도 내려놓고 강지혁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임유진은 미소를 지은 채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한번 먹어봐. 분명히 맛있을 거야.”그녀가 이렇게 자신감을 가지고 말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처음에는 단지 김밥을 마는 것뿐인데도 모양이 제대로 나지 않았고 맛도 짜거나 이상했으니까.강지혁이 선뜻 손을 대지 않자 옆에 있던 집사가 한마디 거들었다.“사모님께서 1시간이나 넘게 부엌에서 만드신 거예요. 저도 맛을 봤는데 아주 맛있더라고요.”그 말에 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바라보았다. 변형되어있는 손가락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 심장에 통증이 이는 것 같았다.강지혁은 몇 초 고민하다 결국 젓가락을 들어 김밥을 입에 넣었다.그리고 강선율은 그 모습에 깜짝 놀라 입을 떡하고 벌렸다.아빠가 아이들이나 먹을 것 같은 김밥을 먹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전에 셰프가 귀여운 동물 모양의 음식을 내왔을 때도 한 번쯤은 먹을 만한데 끝까지 손을 대지 않았던 그였으니까.반면 강선현은 묵묵히 김밥을 먹는 강지혁을 바라보며 역시 엄마의 김밥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밥이라며 뿌듯해하고 있었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강지혁은 회사에 가기 위해, 그리고 강선율을 유치원에 가
“그래, 그렇게 해.”임유진은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나는 네 손을 놓을 생각이 없으니까 뭐가 됐든 상관없어. 두 손이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네 손을 놓지 않을 거야. 그런데 혁아, 언젠가는 나만 네 손을 놓지 않는 게 아니라 너도 내 손을 꽉 잡고 놓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지금처럼...”그녀의 시선이 서로를 꽉 잡고 있는 두 사람의 손 쪽으로 내려갔다.“한사람이 잡는 것보다 역시 둘이 함께 잡는 게 훨씬 더 단단하잖아. 안 그래?”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강지혁은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더 꽉 잡고 싶다는 미친 생각이 들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끈질긴 말에 결국 그녀가 가져온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다만 그녀가 두 손을 턱에 받친 채 생글생글 웃으며 지켜보는 바람에 그는 식사하는 내내 조금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여자의 시선 같은 건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는데 이상하게도 이 여자가 바라보면 심장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쿵쿵거리며 피가 얼굴에 몰리는 느낌이었다.고작 여자의 시선 하나에 이런 식의 반응이 온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그날 저녁, 임유진은 씻은 후 전처럼 강지혁과 이어져 있는 침실에서 잠을 청하기로 했다.침실로 들어온 후 그녀가 조금 의외라고 느꼈던 건 방이 그녀가 5년 전에 썼던 그대로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옷가지들까지 똑같이 그대로 옷장 안에 걸려 있었다.지속해서 도우미들이 방을 깨끗이 청소해준 게 틀림없었다.임유진은 오늘 하루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어 조금 피곤했던 건지 딸까지 마저 씻긴 후 금방 잠자리에 들었다.깊은 밤.누군가가 침대 바로 옆으로 다가와 창문으로 쏟아진 달빛을 빌어 새근새근 자고 있는 여자와 아이를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정말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리고 이 두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와 딸이다.어제까지만 해도 죽은 아내가 다시 살아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바로 오늘, 이미 사망한 것으로 밝혀진 아내가 그와
입맞춤이 끝났을 때 임유진은 조금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은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두 눈동자에는 모순의 감정이 가득 엉켜있었다.그리고 임유진은 그 눈동자를 보며 또다시 그와 입술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네가 얼마나 예쁜지 알아? 네가 얼마나 내 혼을 쏙 빼놓는지 알아? 나는 오히려 너한테 묻고 싶어. 왜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왜 내가 몸과 마음을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너한테 빠져있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이런 예쁜 얼굴을 하고서 그러한 자신감도 없어?”임유진은 말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부드럽게 매만졌다.“너...!”강지혁은 이에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녀의 행동은 마치 그를 유혹하고 있는듯했다.강지혁은 그녀에게 뭐라고 얘기하려다가 문득 손에 잡힌 그녀의 손가락이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제야 그녀의 손가락이 다른 사람과 달리 삐뚤빼뚤 변형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너 손가락이 왜...”그의 눈동자에 순간 고통의 감정이 스쳐 갔다.“아무것도 아니야. 감옥에 있을 때 조금 다쳤는데 그때 이렇게 됐어.”임유진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가볍게 말해주었다.강지혁은 그 말에 침묵했고 임유진은 이에 고개를 숙인 채 강지혁의 손을 세게 맞잡았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혁아, 나는 널 사랑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내가 널 떠난 건 분명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야. 그리고 뭐가 됐든 결국에는 다시 널 찾아왔잖아. 이렇게 다시 네 곁으로 왔잖아. 앞으로는 절대 네 곁을 떠나지 않을게. 이렇게 네 손을 꽉 잡고 절대 놓지 않을게. 약속해.”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또 그만큼 무척이나 단호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눈동자는 한 치의 거짓말도 담겨있지 않은 것처럼 매우 깨끗하고 맑았다.강지혁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절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또 손도 놓지 않을 거라고?그녀의 눈빛과 그녀의 목
임유진이 강지혁을 떠난 건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오히려 그를 너무나도 많이 사랑해서, 그를 대신해 죽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해서, 그렇게도 지키고 싶었던 세 아이의 목숨을 잃을 각오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해서였다.그녀는 세 사이의 엄마면서 이기적이게도 아이들의 목숨으로 그의 목숨을 바꾸려고 했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말에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어머니를 너무 많이 사랑하고 또 철석같이 믿은 바람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아버지의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봤었기에 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원래 믿음이라는 건 배신당할 리스크를 어느 정도 쥐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믿지 않으면 배신당하는 기분 같은 걸 느낄 일이 없다.“그럼 5년 전에 네가 날 떠난 이유가 뭔지 네 입으로 한번 말해봐.”강지혁이 말했다.“그건...”임유진은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건 나도 아직 기억을 못 하고 있어.”그녀의 기억은 강지혁이 과거에 했던 행동을 용서해주기로 한 거기가 끝이고 그 뒤는 고이준에게서 오늘 막 들었으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하지만 그녀의 자신 없는 말에 강지혁의 빈정거림은 더더욱 짙어졌다.“그래? 그럼 기억을 다 되찾고 나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던가 해. 아무것도 기억 못 하면서 날 사랑한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지 말고.”임유진은 그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강지혁은 분명히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진 것을 알고 하마터면 정신을 완전히 놓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아무리 모든 걸 다 잊었다고 해도 그녀를 사랑했던 마음의 아주 조그마한 조각 정도는 남아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정말 이제는 그녀를 향한 마음 같은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건가?임유진은 그의 눈빛에 선명히 어려있는 빈정거림도 싫었고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태도도 싫었다.그래서 그녀는 욱하는 마음에 몸을 강지혁 쪽으로 확 기댔다.이에 강지혁은 어찌할 새도 없이 임유진의 아래에 꼼짝없이 갇혀버렸
“혁아,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이 말을 중얼거렸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이대로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기다란 속눈썹이 움찔 떨리더니 이내 강지혁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그리고 다 떠진 눈동자에 임유진의 얼굴이 그대로 비쳤다.임유진은 순간 그의 눈에 사로잡힌 포로라도 되는 양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고 마치 홀린 것처럼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그럼 말해봐. 네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그때 조금 잠긴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임유진은 그제야 번쩍 정신을 차렸다.“나는...”강지혁을 얼마나 사랑하냐고?그녀는 그를 위해 3년간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그의 행동을 다 알고도 과거의 원망을 다 내려놓겠다고 할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이 세상에서 자신을 이렇게도 사랑해주는 남자가 또 없을 거라는 확신과 이렇게도 마음을 다해 사랑할 만한 남자가 또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게다가 고이준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강지혁이 죽는 게 싫어 자신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선택을 했다고도 했다. 물론 기억을 잃은 강지혁은 이 사실을 전부 다 잊어버렸지만 말이다.“왜 말을 못 하지?”강지혁이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하긴 정말 날 사랑했으면 애초에 내 곁을 떠나지 않았겠지. 안 그래?”‘떠났다라... 혁이한테는 내가 내 두 발로 떠난 것으로 되어있으니까...’임유진은 꼭 심장이 뭔가에 의해 눌린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만약 네가 정말 나를 사랑했으면 그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했다고 해도 내 곁에 있었어야지. 아무리 내가 잘못했다고 해도 내 곁에 있었어야지. 안 그래?”강지혁의 목소리에 점점 빈정거림이 섞여들기 시작했다.“즉 너는 날 진심으로 사랑한 게 아닌 거야. 그러니까 날 대단히 많이 사랑한다느니 하는 말은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하지 마.”임유진은 그의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사모님, 회장님은 사모님과의 기억이 떠오를 때면 늘 저
그때 현이가 옆에서 큰소리로 외쳤다.“나도 좋은 동생이 될 거야. 그리고 오빠는 내가 지켜줄 거야!”부풀린 볼이 꺼진 걸 보니 이제는 자신이 동생이 된 걸 인정한 모양이다.강선율은 현이의 말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 떨렸다.‘동생이면서 나를 지켜주겠다고...?’아이는 오늘 온통 처음 겪는 것들투성이였다. 누군가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처음이었고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이게 바로 여동생이 생기면 느끼게 되는 진짜 기분인 건가? 소안나는 진짜 동생이 아니라 그간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던 건가?“사모님,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집사의 말에 임유진은 2층을 쳐다보았다.“혁이는요?”박건태는 1시간 전에 이미 저택을 떠났고 가기 전 임유진에게 강지혁은 그저 기억이 자극된 바람에 두통이 온 거라고 얘기해주었다.“방금 도우미가 물어보고 왔는데 입맛이 없으시다고 사모님과 아이들 먼저 식사하라고 하셨답니다.”‘혹시 두통 때문인가?’임유진은 속으로 생각하며 아이 둘을 데리고 식탁으로 향했다.하지만 저녁 식사를 다 마쳤는데도 여전히 강지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래서 임유진은 식사를 들고 직접 2층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계단을 막 오르려는 찰나 작은 손이 그녀의 옷을 살짝 잡아당겼다.이에 임유진이 고개를 돌리자 강선율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또다시 나랑 아빠 곁을 떠날 거예요?”아이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아니, 안 떠나. 율이랑 아빠 곁을 떠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야.”임유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켜 주었다.“율아, 엄마라고 불러줄래?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주면 엄청 기쁠 것 같아.”강선율은 그 말에 잠깐 흠칫하더니 그녀와 시선을 맞추는 게 부끄러운 듯 점점 볼을 붉히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엄마...”아직 마음의 문을 다 연 것은 아닌 듯했지만 임유진은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준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아들과는 5년이라는
“네, 자극을 차단하면 기억을 회복하는 데 지장이 생기게 됩니다.”박건태가 말했다.사실 그는 당시 처음으로 그에게 약을 처방해 주려 했을 때도 오늘과 똑같은 말을 했었다.다만 그에 대한 대답이 오늘은 조금 달랐다.“그럼 약 처방은 받지 않는 것으로 하지.”“네?”박건태가 조금 벙찐 얼굴로 되물었다.‘약 처방을 받지 않겠다고? 그렇다는 건...’“기억을 되찾으실 생각이십니까?”“그래. 오래 잊어버리고 살았으니 이제 찾을 때도 됐지.”강지혁이 가벼운 말투로 대답했다.“하지만 그렇게 되면 매번 더 심한 통증이 일 테고 그 통증으로 인해 회장님 몸이...”박건태는 침을 한번 삼키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회장님, 사람의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고통의 한계는 정해져 있습니다. 만약 그 한계선을 벗어나게 되면 어떤 상태가 될지 그 누구도 모릅니다.”강지혁의 기억은 일반 기억상실 환자들과 달리 기억을 되찾을 때 극심한 고통이 따른다. 그래서 만약 기억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사고라도 생기면 그때는 상상도 못 할 참담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강지혁이 입꼬리를 살짝 위로 올리며 웃는 듯 마는듯한 눈빛을 보냈다.“어디 한번 보고 싶네. 기억을 회복할 때의 통증이 더 강한지 내 몸이 더 단단한지 말이야.”박건태는 그 말에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를 몰랐다.눈앞에 있는 남자는 S 시 전체를 손아귀에 쥐고 있다고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하고 또 대단한 남자다. 즉 이 남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S 시 전체가 하루아침에 모습을 달리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그런데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누구보다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텐데 이 남자는 자기 목숨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기억을 회복하려고 하고 있다.분명히 4년 전에는 ‘그런 기억은 떠올리지 않아도 상관없으니까 약 처방해.’라고 했으면서 말이다.‘갑자기 왜 이런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거지? 혹시... 아까 봤던 살아 돌아온 사모님 때문인가? 하지만 정말...?
“내가 누나야. 아까도 봐. 아빠가 엄마한테 누나라고 했잖아!”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했던 누나라는 소리를 자신들의 관계에도 적용하려는 아이의 말에 진땀이 다 났다.1층에서 누가 더 큰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 때, 2층 서재에서는 강지혁의 검사가 진행되고 있었다.박건태는 강지혁에게서 두통이 시작된 계기와 통증의 정도를 확인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무래도 사모님의 말로 과거의 기억들이 자극을 받아 멋대로 머릿속에 떠오르게 된 것 같습니다.”사실 박건태는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머릿속의 혼란을 지울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에 강지혁에게서 거실에 있던 여자가 바로 그의 사망한 아내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으니까.만약 강지혁의 아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매스컴은 물론이고 S 시 전체가 들썩일지도 모른다.그리고 그렇게 되면 임유진은 S 시에 제일 꼭대기에 있는 여성이 될 테고 강지혁의 옆자리를 노리던 여자들은 닭 쫓던 개처럼 허망한 표정을 짓게 되겠지.“그럼 만약 앞으로도 그 여자가 예전을 떠올리게 할 만한 얘기를 하게 되면 또다시 오늘처럼 기억이 자극을 받아 두통이 일 거라는 소린가?”강지혁이 물었다.“그렇다고 봐야죠. 애초에 회장님의 두통이 시작된 계기도 사모님과의 짤막한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셨잖습니까. 그러니 사모님께서 돌아온 지금, 더더욱 그 기억이 자극을 받게 될 겁니다.”“그럼 내 기억이 완전히 다 회복될 수도 있다는 말인가?”강지혁이 또 한 번 물었다.“그럴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다만...”박건태가 말을 흐렸다.“다만 뭐지?”“다만 이런 식으로 기억이 회복되면 회장님은 매번 고통스러울 겁니다. 오늘도 고작 한 장면이 눈앞에 떠오른 것만으로 머리가 찢어질 듯 아프셨다고 하셨잖습니까. 앞으로는 사모님과 점점 더 자주 얼굴을 마주할 텐데 그렇게 되면 두통의 빈도도 커질 테고 통증도 점점 더 심해질 겁니다.”박건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사람마다 체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