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이 바로 진애령을 죽인 범인이었다니!절대 이루어 질 수 없는 두 사람이 이어졌는데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털썩!이한의 뒤로 뭔가 무거운 물건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황인아가 다리에 힘이 빠졌는지 또다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그녀를 바라보는 이한의 눈에는 약간의 동정이 서려 있었다. 조만간 그녀의 집안에는 재앙이 닥쳐올 것이고 황인아는 더 이상 이곳에 속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강지혁은 애초에 마음이 넓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한편, 육지혜와 조유나는 두려움에 몸을 덜덜 떨었다. 특히 육지혜는 강지혁에게 대접받는 임유진을 보며 질투심이 피어오르기는 했지만, 강지혁을 향한 두려움이 더 컸다.아까 강지혁의 행동으로 볼 때 그는 임유진이 감방을 갔다 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니 아까 황인아가 한 행동은 말 그대로 죽음을 자초한 것이다.또한, 그녀는 머릿속에서 아까 강지혁이 무릎을 꿇은 채 임유진을 올려다보는 장면이 떠올랐다.강지혁에게 그런 대접을 받아본 여자가 또 있을까? 그는 전 약혼녀였던 진애령에게도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아까의 장면들이 자꾸 떠오르자 육지혜는 질투 나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오늘 눈치 없이 나댄 사람이 자기가 아니라 황인아였다는 사실에 안심하기도 했다.그때, 드디어 정신을 차린 황인아가 절박한 표정으로 육지혜와 조유나를 바라봤다."지혜야, 유나야, 나 좀 도와줘. 이게 다 너희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말은 똑바로 해야지. 우리가 너한테 그런 짓을 부탁한 적 없어."조유나는 바로 꼬리 자르듯 그녀를 외면했고 이에 황인아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서는 다급하게 말했다."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임유진이 감방 갔다 왔다는 일도 네가 말해서 알게 된 거잖아!""난 그냥 떠오른 걸 말했을 뿐이야. 사람들 앞에서 멋대로 떠벌린 건 너고."조유나의 말에 황인아는 잔뜩 화가 나서 그녀를 힘껏 째려보았다. 그러다 이번에는 육지혜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민준아, 나 잠깐 바람 좀 쐬고 싶어.""그래, 같이 나가자."진세령의 말에 소민준은 그녀를 데리고 베란다 쪽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가는 길에 둘만 들을 수 있게 작은 목소리고 그녀를 향해 말했다."넌 알고 있었지.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거라는 걸. 그래서 아까 내가 아무 말 못 하게 막았던 거고.""저들이 자초한 일인데 내가 굳이 귀띔해줄 필요는 없지."진세령이 옅게 웃었다."이렇게 되면 우리 두 가문을 제외한 다른 가문들도 강지혁의 눈 밖에 나게 될 거야. 아마 더 심할지도 모르지."소민준은 진세령의 얼굴을 보고는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실망감과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는 마치 뭔가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도 들었다.하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이제부터 그는 눈앞에 있는 여자와 딱 붙어서 서로의 가문을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다.한편, 멀지 않는 곳에서 모든 광경을 쳐다보는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다.강현수는 차가운 얼굴로 싸우고 있는 여자 세 명을 보더니 손에 들린 와인잔을 단번에 마셔버렸다.아까 세 명의 여자에 의해 임유진이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되어버린 걸 발견했을 때 강현수는 그녀를 위해 나서고 싶었다. 그래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어느샌가 강지혁이 그녀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그제야 그는 또 쓸데없는 짓을 하려고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임유진은 강지혁이 알아서 지켜줄 것이기에 그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또한, 임유진을 괴롭혔던 여자들도 강지혁이 어련히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강현수는 일전 강지혁에게서 임유진을 뺏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했었다.그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더니 멍청하게 굴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고 조소했다.임유라는 옆에서 그런 그를 바라보다 자기도 모르게 ‘현수 씨...’라고 불렀다. 그녀는 강현수가 점점 더 멀어져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애초에 가까웠던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이만 가죠."강현수는 임유라를 향해 한마디 내뱉더니 곧바로 몸을 돌려 연회장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아!
그녀의 말에 강지혁은 마치 심장이 뭔가에 찔린 듯 아파 나기 시작했다."하지만 이 드레스는 너무 아깝긴 하다. 이제 한 번밖에 안 입었는데."임유진은 아쉬운 표정으로 드레스를 바라봤다. 밑단이 거의 너덜너덜해진 상태로는 수선도 힘들 것이다."다음에 새 드레스로 다시 사줄게."강지혁이 말했다."난 누나가 아무 일 없으면 그걸로 됐어."임유진은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난 괜찮아, 그리고 난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약하지 않아."그녀의 웃음에 강지혁은 더욱더 마음이 안 좋았다. 확실히 겉모습은 유약해 보일지 몰라도 그녀의 마음만큼은 누구보다도 강했다.계속 옆에서 지켜봐 왔던 강지혁은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잘 알기에 더욱더 죄책감이 들었다.그만 아니었으면 임유진은 굳이 강인함으로 자신을 무장시키지 않아도 됐었다."미안해..."강지혁의 갑작스러운 사과에 임유진은 그에게 되물었다."뭐가 미안해?""내가 좀 더 빨리 움직여서 누나한테 결백을 찾아줘야 했어."강지혁이 나지막이 속삭였다."그 사건이 네 잘못도 아닌데 왜 자꾸 사과하는 거야! 나는 네가 내 결백을 찾아주겠다고 한 것만으로도 너무 기뻐!"그녀는 진심을 담아 그에게 말했고 그를 향해 믿음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정말이야?"강지혁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기 시작했다.그는 오직 키스할 때만이 자신의 모든 양심의 가책을 털어놓을 수 있었고 그녀에게 했던 일을 얼마나 후회하는지 전할 수 있었다. 그러고는 앞으로 그녀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도록 만들어주겠노라며 더 거세게 키스했다.임유진은 일방적으로 그의 키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지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고 그의 가슴팍을 두드리며 주위 사람들이 본다고 얘기하고 싶었다.하지만 매번 그녀가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강지혁의 입술은 또다시 그녀의 입술을 덮쳐버렸고 그녀는 그렇게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그의 키스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그때 강지혁이 갑자기 감고 있던 눈을 천
"곧 차가 도착하니까 이대로 나한테 안겨있어."강지혁은 꿀 떨어지는 목소리로 품에 안긴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멀지 않은 곳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강현수를 쳐다봤다.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재차 부딪혔다.얼마 안 가 검은색 세단이 강지혁 쪽으로 다가왔고 그는 강현수에게서 시선을 거둔 후 임유진을 차에 태웠다. 임유진은 계속 입구 쪽을 등지고 있었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강현수와 임유라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임유라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검은 승용차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강현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현..."그녀는 강현수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지만 부르지 못하고 그대로 다시 말을 삼켜버렸다. 눈앞에 있는 잘생긴 남자는 평소 거의 표정 변화가 없고 줄곧 냉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마치 뭔가를 필사적으로 참는 사람처럼 잘생긴 얼굴이 점점 일그러져갔다.마치... 죽을힘을 다해 질투의 감정을 억제하고 있는 남자처럼 말이다....강씨 저택.집으로 돌아온 후 강지혁은 재차 임유진의 몸을 이곳저곳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상처가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안심한 듯 웃었다."일찍 자.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강지혁이 그녀를 향해 말했다."응."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가게가 정상 오픈하기에 그녀는 일찍 자야만 했다."너는?""난 회사 일 좀 처리하고 올게. 먼저 자, 금방 끝나."그의 말에 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씻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한편 강지혁은 서재로 들어와서는 고이준에게 전화를 걸었다."abc 편의점 대표, 황씨 가문을 좀 조사해봐."강지혁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황씨 가문이요?"고이준은 잠깐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곧장 알겠다고 했다.‘황씨 일가는 또 어쩌나 우리 빅 보스 심기를 건드렸을까.’...한편, 황인아는 집으로 돌아가서는 바로 오늘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빠짐없이 털어놨다. 그러자 그녀의 부모는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녀의 오빠인 황성훈은 그녀에게 미친
황주엽의 낯빛이 확 어두워졌고 황인아도 살짝 화난 듯한 말투로 쏘아붙였다.“이거 분명 임유진이 허세 부리려고 일부러 그런 거예요. 강지혁이 관심 가져주니까 틀 차리는 거잖아요...”순간 황주엽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왠지 이번 일이 생각처럼 쉽게 끝날 것만 같지 않았다.“아빠, 그 사람들 시간 없다고 했으니 우리도 이만 돌아가요.”황인아가 입을 비죽거렸다.이때 황주엽의 휴대폰이 울렸고 전화를 받은 그는 낯빛이 창백해지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황인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빠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여 통화를 마치자 그녀는 재빨리 질문을 건넸다.“왜 그래요 아빠?”순간 황주엽이 손을 번쩍 들어 딸에게 가차 없이 싸대기를 날렸다.“얼어 죽을 년! 너 때문에 우리 집안이 다 망하게 생겼잖아!”세무 비리는 더이상 감출 수가 없게 됐다. 방금 그가 어렵게 인맥을 동원해 도움을 구했지만 이번 일은 끝까지 조사할 거라며 아무리 사정해도 방법이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이는 단순히 세금 추징과 과징금으로 그칠 일이 아니다. 과징금 부과에 따라 세금을 납부하게 되면 회사 자금줄이 끊기고 자금줄에 문제가 생기면 회사 전체에 차질이 생긴다.그때 가서 은행 대출로 잠시나마 회사를 안정시킬 수는 있지만... 어느 은행에서 그들에게 대출해줄까? 황주엽은 문득 좀 전에 강씨 일가의 집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강지혁은 황씨 가문이 이 위기에 처할 것을 알고 있었을까? 혹은 또 강지혁이 바로 배후의 조력자인 건 아닐까? 좀 전에 도움을 청한 사람은 세무에 관련된 일은 보름 정도 시간을 줄 수 있다면서 보름 안에 사람을 찾아 일을 해결하면 모든 걸 만회할 여지가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런 여지도 없다고 한다.황주엽은 딸 황인아를 목 졸라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계집애가 생각 없이 설쳐대더니 집안 전체를 죽음으로 몰아간 셈이다!그 시각 강씨 저택에서 임유진은 밖에서 일어난 일들을 전혀 모른 채 거실 소파에 쪼그리고 앉아 새로 방영된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강씨
실은 그녀도 생각했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유미 언니가 결혼도 하기 전에 아이부터 낳게 되었는지.한 여자가 결혼도 안 한 상태에서 아이를 선뜻 낳는다는 것은 그 여자의 마음속에서 이 남자의 비중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아이를 지우면 그만이니까.“네가 어떻게 알아?”임유진이 의아한 듯 물었다.강지혁은 가볍게 손을 들어 양옆에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설마 내가 누나 출근하는 곳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여기는 건 아니지? 누나가 거기 출근하겠다고 한 이상 나도 당연히 제대로 조사해야지 않겠어?”임유진은 저도 몰래 침을 꼴깍 삼키고는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강지혁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그녀가 침묵하자 강지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어두운 눈빛으로 물었다.“내가 이러는 거 싫어? 감시받는 느낌이야?”임유진은 고개를 내저었다.“아니, 나한테 무슨 일 생길까 봐 그런 거잖아.”그는 임유진을 지그시 쳐다봤다. 그녀가 다 알고 있다니! 어두웠던 그의 눈빛이 서서히 밝아지더니 곧 희열이 감돌았다.“아 참, 그래서 윤이 아빠는 어떤 분이야?”임유진이 다시 물었다.“이경빈이야.”강지혁이 대답했다.그녀는 또다시 입이 쩍 벌어졌다. 이경빈이라고 들어는 봤지만...강지혁이 지금 말하는 이경빈이 그녀가 알고 있는 이경빈이 맞을까?“이경빈 아나 봐?”강지혁이 물었다.“정말 이강 그룹 이경빈이야?”“맞아. 바로 그 사람이야.”그녀는 침묵했다. 애초에 변호사로 지낼 때 로펌 선배로부터 사례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경빈은 원고가 아니지만 중요한 증인 중 한 명이었고 그의 지목으로 결국 피고를 감옥에 넣었다.그 피고가 바로... 임유진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피고 성씨가 어렴풋이 기억났는데 ‘탁’씨인 듯싶었다.설마 유미 언니? 정말 우연일까?그렇다면 이경빈이 증인으로 출석해 지목한 사람이 바로 유미 언니라고? 여기까지 생각한 임유진은 심장이 마구 쿵쾅댔다.그녀는 입술을 꼭
임유진은 머리를 끄덕이고 줄곧 침묵했다. 전에는 유미 언니가 홀로 아이를 키우는 모습에 분명 순탄치 못한 일을 겪었을 거로 여겼는데 이렇게까지 험난할 줄은 몰랐다.한 여자가 제 아이 아빠로부터 지목을 받고 감옥에 갇히다니, 대체 누가 이런 타격을 감당할 수 있을까?탁유미가 지금 식당을 운영하고 윤이를 키울 수 있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왜? 탁유미 씨 때문에 속상해하는 거야?”강지혁이 물었다.“응, 유미 언니가 고생을 참 많이 했네.”임유진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강지혁은 안쓰러워하는 그녀의 눈빛을 빤히 쳐다봤다. 그녀는 정말 탁유미를 안쓰러워하는 걸까?한때 외할머니 때문에, 한지영 때문에 걱정하더니 지금 또 한 명 늘어났다. 강지혁의 마음속에 질투의 불씨가 활활 차올랐다.그녀의 걱정이 사랑과 별개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참지 못하고 질투가 났다.그녀의 감정을 너무 신경 써서 그런 거겠지. 너무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강지혁은 그녀가 온 신경을 자신에게 쏟아붓길 바랐다.“그럼 누나는 날 위해서도 슬퍼해 줄 수 있어?”강지혁이 불쑥 물었다.임유진은 실소가 새어 나왔다.“갑자기 뭘 이런 걸 다 물어?”강지혁은 두 눈을 반짝였다.“그냥 알고 싶어서. 해줄 수 있어, 없어?”그는 한사코 그녀 입에서 대답을 듣고 싶었다.“네게 만약 진짜 무슨 일 생겼다면 당연히 너 대신 속상하겠지. 몰라서 물어? 그러니까 넌 영원히 아무 일 없이 잔잔하게, 평온하게 살아.”임유진은 이젠 그에게 무슨 일 생기면 어떻게 될지 감히 상상할 엄두가 안 났다.한 사람을 사랑할수록 그 사람의 안위가 더 걱정되고 그래서 점점 겁쟁이가 되나 보다.강지혁은 입꼬리를 씩 올리곤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머리를 살짝 숙인 채 손등에 가볍게 키스했다.“그럼 누나 소원대로 나 절대 아무 일 없을게.”영롱하게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지그시 쳐다봤다. 임유진은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댔고 그의 눈빛 속에 빠져들어 갈 것만 같았다.“
“내 이름을 불러, 유진아. 내 이름 불러줘...”강지혁이 살짝 잠긴 목소리로 애교 부리듯 달콤하게 속삭였다.“혁아...”그녀가 이름을 부르기 바쁘게 강지혁이 곧바로 그녀의 입술을 탐했고 정열적인 키스를 나눴다.혁이라는 두 글자가 이 세상에서 가장 설레는 두 글자이고 강지혁이 평생 간직할 목소리였다....최근 며칠 동안 황씨 일가의 탈세 사건이 언론 매체에 의해 하나하나 까발려졌다. 전에는 뭐라도 가릴 뉘앙스였다면 지금은 가렸던 모든 걸 발가벗긴 느낌이다.동시에 국세청에서도 황씨 일가의 탈세 증거를 충분히 수집하여 소송 준비에 한창이다.그밖에 황씨 일가는 세금 추징과 과징금 납부로 유동 자금이 빠듯해졌고 그들에게 대출을 해주려는 은행도 거의 없었다.한때 거대한 편의점 체인점을 거느렸던 황씨 일가가 휘청거리기 시작했고 언제든지 자산 재편성으로 인수 합병될 위기에 처했다.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에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졌다. 황씨 일가가 어떻게 이토록 빨리 무너진 건지 회의심을 갖는 사람들도 있었다.한편 이 바닥 사람들, 특히 그날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이 모든 것이 그날 황인아가 강지혁을 건드린 대가라는 것을. 그녀의 행동으로 황씨 일가는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그날 황인아와 함께했던 육지혜와 조유나도 가족들에게 한바탕 훈계를 들었다. 다행히 그녀들 가문의 기업은 살짝 타격만 입었을 뿐 황씨 일가처럼 처참한 지경에 이르진 않았다.육지혜와 조유나도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다. 그날 황인아가 주로 나서서 임유진을 겨냥했고 그녀들은 옆에서 불을 지피긴 했으나 정면으로 임유진을 맞서진 못했다.황씨 일가는 처참한 광경을 이루었다. 황인아의 오빠는 그녀에게 삿대질하며 제 앞으로 차려질 재산이 그녀 때문에 수포가 되었다고 원망했다.황주엽 부부는 이 바닥 친구들을 전부 찾아 헤맸지만 도와주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황인아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임유진을 몇 마디 조롱했다고 집안 전체가 망할 줄은 진짜 예상치 못한
처음부터 강지혁은 그녀가 억울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진씨 가문과 얽혀있는 각종 이해관계 때문에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고 그녀가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그녀가 억울하게 당하는 것을 지켜만 봤다.임유진은 온몸에 한기가 돌고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왔다.1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1층까지는 고작 5초도 안 돼 내려갈 수 있는 거리인데 임유진은 마치 눈앞에 있는 이 길이 멀고 아득하게만 느껴졌다.아무리 걸어도 도통 1층에는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네가 정말 진심으로 유진이를 위하고 있다면 진세령을 경찰서에 넘겨. 그리고 진씨 가문은 물론이고 너도 상응한 대가를 치러!”강현수가 분노에 차서 외쳤다.그는 임유진이 억울하게 옥살이한 게 진세령과 강지혁 때문이라는 것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고 가슴이 찌릿하며 아파 났다.만약 그가 조금만 더 빨리 그녀를 찾았더라면, 조금만 더 빨리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더라면 절대 그런 험한 꼴은 당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강지혁은 눈으로 살기를 내뿜더니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그대로 강현수의 멱살을 확 잡아챘다.“네가 뭘 알아!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그런 말을 해! 만약 내가 조금 더 일찍 유진이를 알게 됐으면, 조금 더 일찍 유진이를 사랑했으면 유진이가 그런 일을 겪게 내버려 두지 않았어!”그 말에 강현수가 냉랭하게 웃었다.“그래, 그랬겠지. 하지만 넌 그때 유진이와 아무런 접점도 없었고 유진에게 일말의 호감도 없었어. 그래서 너와 진씨 가문의 더러운 작당에 유진이가 휘말린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너한테 유진이는 인간도 아니었어! 내 말이 틀려?”“나한테 이딴 말 하는 이유가 뭐야? 왜, 유진이한테 모든 걸 다 얘기해버리게? 내가 그때 수수방관하고 있었다고, 사실은 진세령이 바로 진범이었다고 얘기라도 하게? 강현수, 만약 네가 유진이한테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면 그때는 내 손으로 직접 널 죽여버릴 거야!”강지혁의 말에는 아주 조금의 농담도 들어가 있지
임유진이 방에서 나와 계단 쪽으로 향했을 때 마침 아래층에 있는 강지혁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곧바로 그의 곁에 있는 또 다른 누군가의 모습도 보였다.‘강현수? 강현수가 왜 여기 있지?’임유진이 계단 아래로 내려오려고 발을 옮기려던 그때 강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설마 유진이 사건에 네가 관련돼 있었을 줄은 몰랐어.”순간 임유진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뭐? 강현수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내 사건에 혁이가 관련되어 있다고? 그때 그 사건은 진범이 밝혀지면서 끝이 났잖아? 혁이가 나를 위해서 판결을 뒤집어 줬잖아? 그런데 왜...’“할 말은 그게 끝이야?”강지혁의 아무런 감정도 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허재명이라는 사람은 그저 네가 심어 놓은 장기 말에 불과했어. 너는 유진이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된 진범이 누군지 알면서 줄곧 모른 척 외면했어. 왜 그랬니? 진씨 가문과 얽혀 있는 이익 때문에? 그래서 유진이 인생을 아주 손쉽게 박살 낸 거야?”강지혁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노인네가 가는 길에 폭탄을 심어두고 갔네. 할아버지가 얘기해주든?”“익명으로 나한테 메일이 한 통 왔어. 거기에는 유진이 사건의 진실과 그 사건 뒤로 너희 집안과 진씨 가문 사이에 오간 모든 이익 관계 자료들이 다 첨부되어 있었어. 당시 너희 집안과 진씨 가문은 공동으로 진가원이라는 프로젝트를 추진해 왔어. 만약 당시 진애령 사건의 진상이 밖으로 드러나면 진씨 가문은 희대의 스캔들로 큰 타격을 입었을 거고 너희 집안 역시 어마어마한 손실을 보게 됐겠지.”강현수의 말은 계속되었다.“공동으로 추진한 프로젝트인 만큼 각자 50%가 되는 지분을 가지고 있었을 거야. 그런데 유진이가 감옥에 들어가게 된 후 진씨 가문은 그중 20%를 GH 그룹에 양도했어. 왜 그랬을까?”전부 다 조사하고 온 것 같은 강현수의 확신 어린 말투에 여유로웠던 강지혁의 표정도 이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대신 흉흉한 눈빛만이 남아있었다.“그걸 나한테 얘기해주는 목적이 뭐야?”“한
강현수는 강지혁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임유진만 바라보았다.“만약 그 어느 날 강지혁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더 이상 강지혁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때는... 내 곁으로 와줄래? 내가 널 돌 볼 수 있게 해줄래?”강현수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려 있었다.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까지 상당히 많은 고민을 하고 또 용기를 낸 듯했다.어쩌면 지금이 그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강현수는 말을 마친 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아래로 내린 두 손도 덜덜 떨고 있었다.그의 얼굴에 어린 긴장감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임유진은 그 얼굴에 잠깐 넋을 잃었다가 이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강지혁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또 불안해하는 건가?임유진은 강지혁의 손을 꽉 맞잡고 강현수에게 말했다.“아니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지금이든 앞으로든 내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은 혁이일 테니까요.”그녀의 단호한 말에 강현수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어쩌면 흔들릴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아주 손쉽게 저 먼 곳으로 내던져졌다.대체 뭘 기대한 걸까?강현수가 쓰게 웃었다.“혁아, 이만 가자.”이번에는 임유진이 강지혁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그리고 곁에 있던 경호원들도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강현수는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미동도 없었다. 임유진을 태운 차량이 서서히 멀어져 가는데도 그는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한편 임유진은 강지혁과 차에 올라탄 다음 곧바로 그의 볼을 매만졌다.“혁아, 너 얼굴이 왜 그래?”강지혁은 그녀의 손길에 움찔하더니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내 얼굴이 왜?”“안색이 안 좋아 보여. 꼭 무슨 일 있는 것처럼. 혹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때문에 회사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조금 얼이 빠진 듯하고 아까보다 확 어두워진 얼굴을 한 강지혁의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기에 임유진은 무척이나 걱정스러웠다.“아무것도 아니야
소민영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고작 그때 손톱 좀 뜯기고 3년밖에 안 되는 감옥 생활한 거 가지고 우리 집안이 무너져야 해? 네가 뭔데? 네가 뭔데!”그녀는 줄곧 임유진을 무시했었다. 임유진이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된 지금도 역시 그녀는 임유진을 당시 함부로 자신의 집안 며느리 자리를 탐냈던 주제넘은 여자로 보고 있다.소민영의 말에 임유진이 뭐라 하려는데 둔탁한 마찰음 소리와 함께 소민영의 머리가 힘껏 옆으로 돌아갔다.“임유진이 뭐냐고 했지. 임유진은 감히 너희 같은 인간들이 함부로 쳐다볼 수 없는 내 아내야.”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지혁은 모든 걸 다 얼려버릴 것 같은 눈으로 소씨 가문의 두 남매를 쳐다보았다.소민영은 그 눈빛에 손바닥으로 볼을 감싼 채로 그만 굳어버리고 말았다.그녀는 자신이 꼭 한낱 개미 같은 존재가 된 듯했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영원히 입을 열지 못하게 될 것만 같았다.소민영은 강지혁이라는 남자를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다. 아무리 사람을 홀릴 정도의 잘생긴 남자라고 해도 그녀에게는 그런 것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그래서 그녀는 입을 꾹 닫은 채 곧바로 소민준의 뒤로 숨었다.그리고 소민준은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말은 해보려고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 씨, 우리 집안은 늘 GH 그룹과 강씨 가문에 우호적이었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제발 봐주세요.”강지혁은 그런 그를 그저 담담하게 쳐다볼 뿐이었다.“진씨 가문과 소씨 가문 모두 그때 내 아내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가며 놓아주지 않았는데 나는 왜 당신들을 용서해야 하지?”그 말에 소민준의 얼굴이 당황으로 빨갛게 달아올랐다.“그... 그건 진씨 가문의 뜻이었어요. 저, 저희 집안은 그 일에 그 어떤 의견도 내지 않았어요.”“의견을 냈든 안 냈든 결과적으로 진씨 가문을 도와준 덕에 재미 좀 봤을 텐데?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은 그저 시키는 대로만 했다?”강지혁의 빈정거림에 소민준은 이를 꽉 깨물
임유진은 갑작스러운 소민준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오늘 장례식 참석 목록에 소씨 가문은 없었다. 그런데도 소민준이 이렇게 들어와 있다는 건 이곳 직원을 매수했던가 참석 인원에게 간절히 부탁한 게 틀림없다.소민준의 뒤로 소민영도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가왔다.“그런데 솔직히 우리 오빠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알죠? 오빠가 헤어져 주지 않았으면 강지혁 씨랑 결혼하지도 못했을 거 아니에요. 안 그래...”“소민영!”소민준은 소민영이 쓸데없는 소리로 임유진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크게 호통쳤다.“빨리 유진이한테 사과해!”그러고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미안해. 민영이가 철이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나나 우리 집안이나 너한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한 번만 봐주라... 제발...”임유진은 그 말에 문득 일전 강지혁이 진씨 가문을 상대하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소민준이 장례식까지 찾아와 이렇게 비는 걸 보면 아마 진씨 가문을 건드리는 동시에 소씨 가문도 건드린 것 같다.“사실 나도 그때 너 그렇게 보내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 특히 네가 억울했다는 게 밝혀진 뒤로는 더더욱. 만약 내가 그때 널 위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했으면 네가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을 거야. 정말... 너를 볼 면목이 없어.”소민준의 얼굴에는 후회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게다가 눈시울까지 붉어진 것이 아마 다른 여성들이 봤으면 그가 잘못한 게 무엇이든 바로 용서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임유진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열연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녀는 당시 진세령의 옆에 딱 붙어 서서 그녀의 손톱이 하나하나 뽑히는 걸 그저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피가 흥건한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소민준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심지어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제일 후회되는 일이 바로 그녀와 함께했었던 일이라고까지 했다.그렇게도 차갑고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남자인데 임유진이 지금 그의 아련한 얼굴을 좀
강현수의 시선이 너무 지독하게 한곳에 꽂혀있던 탓인지 조문객들이 하나둘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강현수, 뭐 할 말 있어?”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잡으며 강현수를 노려보았다. 꼭 이 여자는 내 것이니 이만 꺼지라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잘 포개져 있는 두 사람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떼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한은정은 그 광경에 그제야 안도한 듯 표정이 풀어졌다.물론 안도한 건 한은정뿐만이 아니었다. 임유진 역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지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임유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강지혁이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오늘은 할아버지 장례식이라 강현수도 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 일을 벌이면 그건 집안 간의 대립으로 이어질 테니까.”강지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임유진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강현수도 알 거야. 자기한테는 이제 그 어떤 기회도 없다는 걸.”그 뒤로 장례식은 순탄하게 진행됐다.임유진은 큰 배를 손으로 지탱하며 계속해서 강지혁의 곁을 지키다 조문객들이 조금 빠지고 나서야 밖에 있는 휴식 구역으로 가 휴식을 취했다.배 속의 아이들도 오늘은 분위기가 무거운 날인 걸 아는지 작은 태동만 있을 뿐 크게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임유진은 의자에 앉아 습관적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그때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몇몇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강현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경호원은 그가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를 제지했다.“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임유진이 먼저 물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며 방금 그녀가 배 속의 아이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다.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지만 그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