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준아, 나 잠깐 바람 좀 쐬고 싶어.""그래, 같이 나가자."진세령의 말에 소민준은 그녀를 데리고 베란다 쪽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가는 길에 둘만 들을 수 있게 작은 목소리고 그녀를 향해 말했다."넌 알고 있었지.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거라는 걸. 그래서 아까 내가 아무 말 못 하게 막았던 거고.""저들이 자초한 일인데 내가 굳이 귀띔해줄 필요는 없지."진세령이 옅게 웃었다."이렇게 되면 우리 두 가문을 제외한 다른 가문들도 강지혁의 눈 밖에 나게 될 거야. 아마 더 심할지도 모르지."소민준은 진세령의 얼굴을 보고는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실망감과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는 마치 뭔가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도 들었다.하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이제부터 그는 눈앞에 있는 여자와 딱 붙어서 서로의 가문을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다.한편, 멀지 않는 곳에서 모든 광경을 쳐다보는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다.강현수는 차가운 얼굴로 싸우고 있는 여자 세 명을 보더니 손에 들린 와인잔을 단번에 마셔버렸다.아까 세 명의 여자에 의해 임유진이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되어버린 걸 발견했을 때 강현수는 그녀를 위해 나서고 싶었다. 그래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어느샌가 강지혁이 그녀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그제야 그는 또 쓸데없는 짓을 하려고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임유진은 강지혁이 알아서 지켜줄 것이기에 그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또한, 임유진을 괴롭혔던 여자들도 강지혁이 어련히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강현수는 일전 강지혁에게서 임유진을 뺏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했었다.그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더니 멍청하게 굴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고 조소했다.임유라는 옆에서 그런 그를 바라보다 자기도 모르게 ‘현수 씨...’라고 불렀다. 그녀는 강현수가 점점 더 멀어져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애초에 가까웠던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이만 가죠."강현수는 임유라를 향해 한마디 내뱉더니 곧바로 몸을 돌려 연회장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아!
그녀의 말에 강지혁은 마치 심장이 뭔가에 찔린 듯 아파 나기 시작했다."하지만 이 드레스는 너무 아깝긴 하다. 이제 한 번밖에 안 입었는데."임유진은 아쉬운 표정으로 드레스를 바라봤다. 밑단이 거의 너덜너덜해진 상태로는 수선도 힘들 것이다."다음에 새 드레스로 다시 사줄게."강지혁이 말했다."난 누나가 아무 일 없으면 그걸로 됐어."임유진은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난 괜찮아, 그리고 난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약하지 않아."그녀의 웃음에 강지혁은 더욱더 마음이 안 좋았다. 확실히 겉모습은 유약해 보일지 몰라도 그녀의 마음만큼은 누구보다도 강했다.계속 옆에서 지켜봐 왔던 강지혁은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잘 알기에 더욱더 죄책감이 들었다.그만 아니었으면 임유진은 굳이 강인함으로 자신을 무장시키지 않아도 됐었다."미안해..."강지혁의 갑작스러운 사과에 임유진은 그에게 되물었다."뭐가 미안해?""내가 좀 더 빨리 움직여서 누나한테 결백을 찾아줘야 했어."강지혁이 나지막이 속삭였다."그 사건이 네 잘못도 아닌데 왜 자꾸 사과하는 거야! 나는 네가 내 결백을 찾아주겠다고 한 것만으로도 너무 기뻐!"그녀는 진심을 담아 그에게 말했고 그를 향해 믿음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정말이야?"강지혁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기 시작했다.그는 오직 키스할 때만이 자신의 모든 양심의 가책을 털어놓을 수 있었고 그녀에게 했던 일을 얼마나 후회하는지 전할 수 있었다. 그러고는 앞으로 그녀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도록 만들어주겠노라며 더 거세게 키스했다.임유진은 일방적으로 그의 키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지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고 그의 가슴팍을 두드리며 주위 사람들이 본다고 얘기하고 싶었다.하지만 매번 그녀가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강지혁의 입술은 또다시 그녀의 입술을 덮쳐버렸고 그녀는 그렇게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그의 키스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그때 강지혁이 갑자기 감고 있던 눈을 천
"곧 차가 도착하니까 이대로 나한테 안겨있어."강지혁은 꿀 떨어지는 목소리로 품에 안긴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멀지 않은 곳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강현수를 쳐다봤다.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재차 부딪혔다.얼마 안 가 검은색 세단이 강지혁 쪽으로 다가왔고 그는 강현수에게서 시선을 거둔 후 임유진을 차에 태웠다. 임유진은 계속 입구 쪽을 등지고 있었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강현수와 임유라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임유라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검은 승용차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강현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현..."그녀는 강현수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지만 부르지 못하고 그대로 다시 말을 삼켜버렸다. 눈앞에 있는 잘생긴 남자는 평소 거의 표정 변화가 없고 줄곧 냉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마치 뭔가를 필사적으로 참는 사람처럼 잘생긴 얼굴이 점점 일그러져갔다.마치... 죽을힘을 다해 질투의 감정을 억제하고 있는 남자처럼 말이다....강씨 저택.집으로 돌아온 후 강지혁은 재차 임유진의 몸을 이곳저곳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상처가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안심한 듯 웃었다."일찍 자.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강지혁이 그녀를 향해 말했다."응."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가게가 정상 오픈하기에 그녀는 일찍 자야만 했다."너는?""난 회사 일 좀 처리하고 올게. 먼저 자, 금방 끝나."그의 말에 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씻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한편 강지혁은 서재로 들어와서는 고이준에게 전화를 걸었다."abc 편의점 대표, 황씨 가문을 좀 조사해봐."강지혁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황씨 가문이요?"고이준은 잠깐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곧장 알겠다고 했다.‘황씨 일가는 또 어쩌나 우리 빅 보스 심기를 건드렸을까.’...한편, 황인아는 집으로 돌아가서는 바로 오늘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빠짐없이 털어놨다. 그러자 그녀의 부모는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녀의 오빠인 황성훈은 그녀에게 미친
황주엽의 낯빛이 확 어두워졌고 황인아도 살짝 화난 듯한 말투로 쏘아붙였다.“이거 분명 임유진이 허세 부리려고 일부러 그런 거예요. 강지혁이 관심 가져주니까 틀 차리는 거잖아요...”순간 황주엽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왠지 이번 일이 생각처럼 쉽게 끝날 것만 같지 않았다.“아빠, 그 사람들 시간 없다고 했으니 우리도 이만 돌아가요.”황인아가 입을 비죽거렸다.이때 황주엽의 휴대폰이 울렸고 전화를 받은 그는 낯빛이 창백해지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황인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빠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여 통화를 마치자 그녀는 재빨리 질문을 건넸다.“왜 그래요 아빠?”순간 황주엽이 손을 번쩍 들어 딸에게 가차 없이 싸대기를 날렸다.“얼어 죽을 년! 너 때문에 우리 집안이 다 망하게 생겼잖아!”세무 비리는 더이상 감출 수가 없게 됐다. 방금 그가 어렵게 인맥을 동원해 도움을 구했지만 이번 일은 끝까지 조사할 거라며 아무리 사정해도 방법이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이는 단순히 세금 추징과 과징금으로 그칠 일이 아니다. 과징금 부과에 따라 세금을 납부하게 되면 회사 자금줄이 끊기고 자금줄에 문제가 생기면 회사 전체에 차질이 생긴다.그때 가서 은행 대출로 잠시나마 회사를 안정시킬 수는 있지만... 어느 은행에서 그들에게 대출해줄까? 황주엽은 문득 좀 전에 강씨 일가의 집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강지혁은 황씨 가문이 이 위기에 처할 것을 알고 있었을까? 혹은 또 강지혁이 바로 배후의 조력자인 건 아닐까? 좀 전에 도움을 청한 사람은 세무에 관련된 일은 보름 정도 시간을 줄 수 있다면서 보름 안에 사람을 찾아 일을 해결하면 모든 걸 만회할 여지가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런 여지도 없다고 한다.황주엽은 딸 황인아를 목 졸라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계집애가 생각 없이 설쳐대더니 집안 전체를 죽음으로 몰아간 셈이다!그 시각 강씨 저택에서 임유진은 밖에서 일어난 일들을 전혀 모른 채 거실 소파에 쪼그리고 앉아 새로 방영된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강씨
실은 그녀도 생각했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유미 언니가 결혼도 하기 전에 아이부터 낳게 되었는지.한 여자가 결혼도 안 한 상태에서 아이를 선뜻 낳는다는 것은 그 여자의 마음속에서 이 남자의 비중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아이를 지우면 그만이니까.“네가 어떻게 알아?”임유진이 의아한 듯 물었다.강지혁은 가볍게 손을 들어 양옆에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설마 내가 누나 출근하는 곳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여기는 건 아니지? 누나가 거기 출근하겠다고 한 이상 나도 당연히 제대로 조사해야지 않겠어?”임유진은 저도 몰래 침을 꼴깍 삼키고는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강지혁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그녀가 침묵하자 강지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어두운 눈빛으로 물었다.“내가 이러는 거 싫어? 감시받는 느낌이야?”임유진은 고개를 내저었다.“아니, 나한테 무슨 일 생길까 봐 그런 거잖아.”그는 임유진을 지그시 쳐다봤다. 그녀가 다 알고 있다니! 어두웠던 그의 눈빛이 서서히 밝아지더니 곧 희열이 감돌았다.“아 참, 그래서 윤이 아빠는 어떤 분이야?”임유진이 다시 물었다.“이경빈이야.”강지혁이 대답했다.그녀는 또다시 입이 쩍 벌어졌다. 이경빈이라고 들어는 봤지만...강지혁이 지금 말하는 이경빈이 그녀가 알고 있는 이경빈이 맞을까?“이경빈 아나 봐?”강지혁이 물었다.“정말 이강 그룹 이경빈이야?”“맞아. 바로 그 사람이야.”그녀는 침묵했다. 애초에 변호사로 지낼 때 로펌 선배로부터 사례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경빈은 원고가 아니지만 중요한 증인 중 한 명이었고 그의 지목으로 결국 피고를 감옥에 넣었다.그 피고가 바로... 임유진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피고 성씨가 어렴풋이 기억났는데 ‘탁’씨인 듯싶었다.설마 유미 언니? 정말 우연일까?그렇다면 이경빈이 증인으로 출석해 지목한 사람이 바로 유미 언니라고? 여기까지 생각한 임유진은 심장이 마구 쿵쾅댔다.그녀는 입술을 꼭
임유진은 머리를 끄덕이고 줄곧 침묵했다. 전에는 유미 언니가 홀로 아이를 키우는 모습에 분명 순탄치 못한 일을 겪었을 거로 여겼는데 이렇게까지 험난할 줄은 몰랐다.한 여자가 제 아이 아빠로부터 지목을 받고 감옥에 갇히다니, 대체 누가 이런 타격을 감당할 수 있을까?탁유미가 지금 식당을 운영하고 윤이를 키울 수 있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왜? 탁유미 씨 때문에 속상해하는 거야?”강지혁이 물었다.“응, 유미 언니가 고생을 참 많이 했네.”임유진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강지혁은 안쓰러워하는 그녀의 눈빛을 빤히 쳐다봤다. 그녀는 정말 탁유미를 안쓰러워하는 걸까?한때 외할머니 때문에, 한지영 때문에 걱정하더니 지금 또 한 명 늘어났다. 강지혁의 마음속에 질투의 불씨가 활활 차올랐다.그녀의 걱정이 사랑과 별개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참지 못하고 질투가 났다.그녀의 감정을 너무 신경 써서 그런 거겠지. 너무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강지혁은 그녀가 온 신경을 자신에게 쏟아붓길 바랐다.“그럼 누나는 날 위해서도 슬퍼해 줄 수 있어?”강지혁이 불쑥 물었다.임유진은 실소가 새어 나왔다.“갑자기 뭘 이런 걸 다 물어?”강지혁은 두 눈을 반짝였다.“그냥 알고 싶어서. 해줄 수 있어, 없어?”그는 한사코 그녀 입에서 대답을 듣고 싶었다.“네게 만약 진짜 무슨 일 생겼다면 당연히 너 대신 속상하겠지. 몰라서 물어? 그러니까 넌 영원히 아무 일 없이 잔잔하게, 평온하게 살아.”임유진은 이젠 그에게 무슨 일 생기면 어떻게 될지 감히 상상할 엄두가 안 났다.한 사람을 사랑할수록 그 사람의 안위가 더 걱정되고 그래서 점점 겁쟁이가 되나 보다.강지혁은 입꼬리를 씩 올리곤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머리를 살짝 숙인 채 손등에 가볍게 키스했다.“그럼 누나 소원대로 나 절대 아무 일 없을게.”영롱하게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지그시 쳐다봤다. 임유진은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댔고 그의 눈빛 속에 빠져들어 갈 것만 같았다.“
“내 이름을 불러, 유진아. 내 이름 불러줘...”강지혁이 살짝 잠긴 목소리로 애교 부리듯 달콤하게 속삭였다.“혁아...”그녀가 이름을 부르기 바쁘게 강지혁이 곧바로 그녀의 입술을 탐했고 정열적인 키스를 나눴다.혁이라는 두 글자가 이 세상에서 가장 설레는 두 글자이고 강지혁이 평생 간직할 목소리였다....최근 며칠 동안 황씨 일가의 탈세 사건이 언론 매체에 의해 하나하나 까발려졌다. 전에는 뭐라도 가릴 뉘앙스였다면 지금은 가렸던 모든 걸 발가벗긴 느낌이다.동시에 국세청에서도 황씨 일가의 탈세 증거를 충분히 수집하여 소송 준비에 한창이다.그밖에 황씨 일가는 세금 추징과 과징금 납부로 유동 자금이 빠듯해졌고 그들에게 대출을 해주려는 은행도 거의 없었다.한때 거대한 편의점 체인점을 거느렸던 황씨 일가가 휘청거리기 시작했고 언제든지 자산 재편성으로 인수 합병될 위기에 처했다.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에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졌다. 황씨 일가가 어떻게 이토록 빨리 무너진 건지 회의심을 갖는 사람들도 있었다.한편 이 바닥 사람들, 특히 그날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이 모든 것이 그날 황인아가 강지혁을 건드린 대가라는 것을. 그녀의 행동으로 황씨 일가는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그날 황인아와 함께했던 육지혜와 조유나도 가족들에게 한바탕 훈계를 들었다. 다행히 그녀들 가문의 기업은 살짝 타격만 입었을 뿐 황씨 일가처럼 처참한 지경에 이르진 않았다.육지혜와 조유나도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다. 그날 황인아가 주로 나서서 임유진을 겨냥했고 그녀들은 옆에서 불을 지피긴 했으나 정면으로 임유진을 맞서진 못했다.황씨 일가는 처참한 광경을 이루었다. 황인아의 오빠는 그녀에게 삿대질하며 제 앞으로 차려질 재산이 그녀 때문에 수포가 되었다고 원망했다.황주엽 부부는 이 바닥 친구들을 전부 찾아 헤맸지만 도와주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황인아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임유진을 몇 마디 조롱했다고 집안 전체가 망할 줄은 진짜 예상치 못한
황인아는 천둥이라도 맞은 것만 같았다. 그날 밤 그녀의 행동은 광대나 다름없었다. 임유진을 실컷 꼽준다고만 여겼는데 정작 망신당한 건 그녀 본인이었다. 그날 밤 연회에서 황인아는 모두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다!...임유라는 강현수의 개인 별장 밖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다. 사용인이 그녀에게 말했다.“임유라 씨, 돌아가세요. 도련님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 하십니다.”“나라고 얘기 안 했죠?”임유라가 초조하게 물었다. 그날 연회 이후로 그녀는 줄곧 강현수를 만나지 못했다. 매번 찾아올 때마다 그에게 거절당했으니까.어느덧 집 앞까지 찾아왔는데 또다시 문전박대를 당하고 말았다.“도련님께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 하시니 임유라 씨도 그 속에 포함됐을 겁니다. 정 그러면 도련님께 전화해보세요. 도련님만 허락하시면 바로 안으로 모시겠습니다.”사용인이 공손하게 말했지만 눈가에는 하찮은 기색이 스쳤다.그는 임유라 같은 여자를 수없이 봐왔다. 전에 도련님과 만났던 여자친구들은 어느 하나 도련님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해 안달이었지만 결국 단 한 명도 성공하지 못했다.지금 앞에 있는 임유라 씨도 야심만 있을 뿐 도련님의 전 여친들과 다를 게 없다. 도련님의 진심을 얻지 못했고 곧 있으면 X로 전락할 것이다.임유라는 이를 악물고 사용인만 빤히 쳐다봤다. 만약 전화로 허락받을 일이었다면 굳이 대문 앞에서 사용인에게 사정할 필요가 있을까?별장 안.강현수는 한창 화실에서 펜을 들고 초상화를 그렸다. 그는 기억 속에 남은 그 소녀의 모습으로 성인이 된 후의 모습을 애써 상상해 보았다.그림을 다 그리고 쭉 훑어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임유진의 모습이었다.강현수는 멍하니 그림을 바라보다가 수중의 펜을 내려놓았다.‘내가 미쳤지! 어떻게 임유진 씨를 그려? 머릿속엔 오직 어릴 때 그 소녀의 모습이잖아!’임유진은 그해 그 소녀와 닮은 점이 너무 많아서 강현수도 자꾸만 이런 착각이 든다.그리고 이런 착각 때문에 임유진이 더 신경 쓰인다.며칠 동안 그는 눈만 감으면 머릿속에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