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기태는 자세를 한껏 낮추었다.“그럴 필욘 없어요. 유진이도 당신들 안 보고 싶을 거예요.”강지혁이 담담하게 말했다.진세령과 윤수경은 한시름 놨다는 표정을 지었다. 임유진을 마주 보며 사과하지 않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적어도 굴욕감을 덜 수 있으니까.한낱 개미 취급했던 사람에게 사과하라니, 두 모녀에게 굴욕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두 여자는 임유진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고 진세령에겐 한때 연적이었다.한편 진기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번 일이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쉽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그래, 그럼 우린 이만 갈게. 방해해서 미안해.”윤수경은 남편에게 빨리 나가자고 곁눈질했다.그녀가 막 자리에서 일어날 때 강지혁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아 참, 빚진 건 갚고 가셔야죠.”“빚진 거라니?”윤수경은 뭘 빚졌다는지 몰라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오늘 유진의 뺨을 때린 횟수만큼 스스로 때려서 갚아야죠.”강지혁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윤수경은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지금 나보고 내 뺨을 치라는 거야? 고작 전에 유진의 뺨 좀 때렸다고?’“내가 뭘 빚졌어? 그 여잔 뺨 맞아도 싸! 고작 뺨 좀 맞았다고 이 난리야!”윤수경이 막말을 내뱉었다.강지혁은 안색이 확 어두워지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윤수경 앞으로 다가가 그녀에게 싸대기를 날렸고 정통으로 맞은 윤수경은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강지혁이 갑자기 손을 댈 거라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모든 게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다.윤수경은 얼얼한 뺨을 감싸고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강지혁은 거만하게 그녀를 내려다봤다.“당신이 유진이 때릴 자격 있어? 당신네 집안은 유진이 털끝도 못 건드려. 앞으로 두 번 다시 유진이 건드리면 그땐 집안 전체를 아작낼 줄 알아.”강한 압박이 느껴지는 그의 말에 옆에 있던 진기태와 진세령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두 사람이 뭐라 말하려 했으나 강지혁이 그들을 싹 다 내쫓았다.진기태는 한숨
평상시 상류층에서 남들에게 대접만 받던 그녀가 이런 일을 당했으니 화날 만도 했다.“안돼, 임유진 그년 반드시 따끔하게 혼낼 거야. 그년이 강지혁 찾아가서 이간질한 게 틀림없어. 지혁이가 예전엔 나 이렇게 대하지 않았다고.”윤수경은 또다시 모든 책임을 임유진에게 뒤집어씌우려 했다.“그만해!”진기태가 입을 열었다.“앞으로 두 번 다시 임유진 찾아가지 마. 이번 일은 이쯤에서 끝내.”윤수경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남편을 쳐다봤다.“뭐라고요? 임유진 그년은 우리 딸 죽인 범인이에요!”진기태의 눈가에 복잡한 기운이 스쳤지만 곧바로 머리를 홱 돌리며 아내의 시선을 피하려 했다.“우리 집안 전체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거든 어서 내 말 들어!”윤수경이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진세령이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엄마, 이번엔 아빠 말 들어요. 적어도 지금은... 임유진 상대하지 말아요.”강지혁이 그녀에게 감정이 식을 때, 그때 다시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면 된다.윤수경은 썩 내키지 않았다. 뺨까지 얻어맞았는데 이쯤에서 끝내야 한다니 그녀는 달가울 리가 없다!‘임유진, 이 빌어먹을 년!’...강씨 저택 거실에서 임유진이 계단을 내려왔다. 그녀는 좀 전에 줄곧 계단 뒤에 숨어 있었다.거실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지켜보았고 몇몇 사람들의 대화도 들었다.강지혁이 자신을 위해 화풀이해주니 오늘 오전에 당했던 그 수모가 조금씩 가셨다. 그가 앞장 서주며 했던 말들과 함께 그녀의 응어리도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임유진의 발걸음 소리를 들은 강지혁은 계단 쪽으로 고개 돌리더니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그의 제스처는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러웠다. 마치 언제 어디서나 손 내밀어 그녀를 도와줄 것처럼 말이다.임유진은 자신을 향해 내민 손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의 손바닥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강지혁은 큰 손으로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왜 내려왔어?”강지혁이 물었다.“실은... 아까 계단 입구에서 다 보고 있었어. 고마워...”임유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
점점 기대면 서서히 습관으로 돼버리겠지...강지혁은 몸을 기울이고 그녀의 부은 얼굴에 가볍게 키스했다. 깃털이 스치듯 가벼운 키스였다.“그럼 기대면 되지. 난 누나가 기대기만을 바라고 있어.”그녀가 기댈 수 있는 건 강지혁이 오매불망 그리던 일이다. 그를 떠나지 못할 정도로 기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30분 남짓 지난 후 의사가 도착해 임유진의 붉게 멍든 얼굴을 진찰하고는 붓기 내리는 약을 처방했다.의사가 떠나고 임유진이 약을 바르려 할 때 강지혁이 선뜻 약을 채갔다.“내가 발라줄게.”“그래.”그녀도 순순히 대답했다.강지혁은 긴 손가락으로 약을 발라 그녀의 얼굴에 가볍게 문질러주었는데 부드러운 그의 제스처와 살짝 차가운 약까지 더하니 얼굴에 따끔거리는 느낌도 많이 줄어들었다.“진짜 사람 걱정시킨다니까. 왜 자꾸 다쳐.”강지혁은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문지르며 나지막이 말했다.임유진은 문득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진짜 그의 말처럼 둘이 알고 지낸 이후로 그녀는 줄곧 여러가지 작은 상처를 입었으니까.“누나를 집에 숨겨뒀으면 좋겠어. 그럼 아무도 다치게 못 할 거잖아. 누나도 더는 상처를 입지 않을 테고.”강지혁은 매번 그녀의 몸에 난 상처를 보면 심장을 쿡쿡 찌르듯이 아팠다.“어떻게 집에만 숨어 있어?”임유진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그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강지혁은 손에 묻은 잔여물을 티슈로 닦은 후 몸을 기울이고 그녀에게 바짝 다가갔다.“만약 계속 더 상처 입는다면 그땐 정말 누나를 집에 가둘지도 몰라. 누나는 괜찮을지 몰라도 내가 싫어. 누나 몸에 흉터 생기는 일 보고 싶지 않아.”강지혁의 짙은 눈동자에 진지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임유진은 눈앞의 남자를 멍하니 바라봤다.‘농담이 아니었어. 진지하게 말하고 있잖아!’“먼저 방에 가서 쉬어. 그리고 피곤할 테니까 일찍 자.”강지혁이 말하면서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임유진은 숨을 깊게 몰아쉬곤 본능적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말했다.“나 혼자 걸을 수 있어.”
“아니야... 아무것도. 내일 외할머니 보러 가야 하는데 아무것도 못 샀잖아. 갑자기 그게 생각나서 그랬어.”실은 다 샀는데 진씨 일가 사람들이 그 다과 세트를 휴지통에 버렸다.“내가 이미 다 사놨어. 탁자에 있어.”강지혁이 말했다.임유진은 방안의 탁자를 보았는데 익숙한 쇼핑백이 놓여 있었다. 이건... 그녀가 낮에 백화점에서 샀던 디저트 쇼핑백인데... 강지혁이 설마 똑같은 거로 산 걸까?“오늘 내가 산 거잖아?”그녀가 나지막이 물었다.“맞아, 거기에 내가 좀 더 보탰어.”“하지만 내가 뭘 샀는지 네가 어떻게 알고...”임유진이 의아한 듯 물었다. 영상을 봤다 해도 쇼핑백만 나왔을 뿐이니까.“백화점 영수증만 살짝 조회해봐도 누나가 뭘 샀는지 다 알아.”강지혁이 대답했다.임유진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에겐 어려운 일일지 몰라도 강지혁에겐 너무 쉬운 일이었다.“내가 갑자기 소리 질러서 너 방해한 건 아니지?”임유진이 물었다.“방해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강지혁은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 무릎 꿇고 앉았다.“언제 어디서든 누난 항상 내게 1순위야.”임유진은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지금 이 순간 강지혁은 거만한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심지어 자세를 낮추며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마치 그녀가 제 머리 위에 있는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강지혁은 그녀를 데리고 아래층에 내려와 저녁을 먹었다. 저녁 식사라고 준비했던 음식이 야식으로 돼버렸다. 강지혁은 두 눈이 서서히 짙어지더니 방금 그녀가 잠들었을 때 진기태한테 걸려온 전화가 생각났다.진기태는 그가 임유진을 얼마나 신경 쓰는지 여전히 떠보고 싶었는지 말끝마다 그해 교통사고를 언급했다.그해... 만약 그해의 교통사고가 없었다면 강지혁도 지금처럼 임유진 앞에서 불안할 리 없다! 그는 그녀가 그해의 진실을 알게 될까 봐 늘 전전긍긍하고 있다.진씨 일가에서 임유진에게 준 상처는 강지혁이 반드시 돌려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결백도 증명해줄 것이다. 왜냐하
뜻밖에도 강지혁이 기사더러 6천만 원짜리 차를 끌고 오게 했다.임유진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평범한 차였으면 좋겠다면서?”그가 말했다.“그건 그렇지. 괜히 비싼 차 타고 갔다가 마을 사람들이 쉬쉬거리면 외할머니가 심란해 하실까 봐 그런 건데, 너 진짜 이 차 타고 가려고?”임유진이 물었다.“왜? 뭐 문제 돼?”강지혁은 히죽 웃었다.“타, 누나.”그녀는 차에 올라탄 후에야 기사 없이 강지혁이 직접 운전한다는 걸 알아챘다.“네가 운전하게?”그녀가 물었다.“응, 어차피 멀지도 않잖아. 누나 졸리면 좀 자. 가는 길 내가 잘 알아.”강지혁은 말하면서 시동을 걸었다.임유진은 그런 그의 모습에 입술을 앙다물었다. 직접 운전해 가려면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리는데 지칠 강지혁을 위해 그녀가 운전을 바꿔줄 수도 없다. 운전면허증이 취소되어 앞으로 영원히 차를 못 만지니까.그녀는 평생 운전 금지였다!하지만 언젠가 사건을 뒤집고 결백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녀가 잃었던 것들도 전부 돌려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운전면허증, 변호사 자격증, 기타 등등...뭐 물론 어떤 것들은 영원히 되찾을 수 없다. 예를 들자면 그녀의 열정과 천진난만함, 한때 매사에 포부 넘치고 이 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기대가 가득한 나날들, 제딴에는 훈훈할 것만 같은 가족애, 그리고 젊은 날의 모든 추억까지...임유진은 인제 28살이다. 아직 서른이 안 됐지만 마음이 늙어가고 있다는 걸 느낄 때가 많다.만약 강지혁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어쩌면 진짜 다 늙어가는 노인처럼 색바랜 마음을 안고 그렇게 늙어가고 죽었을 것이다.하지만 강지혁을 본 순간 닳았던 마음이 새로운 활기라도 얻은 것처럼 삶에 대한 어떠한 희망이라는 게 생겨났다.한때 그녀는 출소 후 가장 불행한 일이 강지혁을 만나고 그에게 속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이 또한 그녀의 행운이었다.강지혁만이 그녀에게 삶의 아름다움을 선사해줬으니까.그의 사랑을 받는 건 그녀에게 너무나도 좋은 일인 듯싶다.임유진은 이
임유진이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왜?”“이따가 나 뭐라고 소개할지 생각 다 했어?”강지혁이 물었다.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당연히 남자친구라고 해야지.”강지혁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그래, 들어가자.”차에서 내린 임유진은 문 앞에 다가가 노크했고 잠시 후 셋째 이모가 문 열어주러 나왔다.임유진을 본 이모는 음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유진이네, 이게 얼마 만이야! 어머, 이번엔 친구까지 데려왔어!”셋째 이모는 말하면서 밖을 힐긋 내다봤는데 문 앞에 세운 평범한 세단을 확인하곤 야유 섞인 눈빛으로 돌변했다.전에 다들 외조카 딸이 부자에게 들러붙었다고 떠들어댔다. 어쨌거나 그날 한 남자가 기세등등하게 나타나 임유진을 박성호의 집에서 구해냈으니까!하지만 지금 저기 세운 차를 보니 고급 차는 아닌 듯싶었다. 고급 차의 로고는 그녀도 적잖게 알고 있으니 강지혁이 타고 온 차는 그저 평범한 차인 것 같았다.그래도 얼굴은 그럭저럭 잘생겼는데 남자가 잘생겨서 무슨 소용일까? 자칫하면 기생오라비일지도 모른다!또한 이 남자는 조카딸이 감방을 다녀온 것도 아직 모를 수 있다!“네.”임유진이 대답했다.“외할머니 보러 왔어요. 잘 계시죠 외할머니?”큰 외삼촌과 둘째 외삼촌, 셋째 이모가 돌아가면서 외할머니를 돌보고 있고 오늘 마침 셋째 이모 차례가 됐다.“그럼, 아주 잘 지내. 지금 방에서 쉬고 계셔.”셋째 이모가 말하는 동안 세 사람은 나란히 집 안 거실로 들어갔다.셋째 이모네 딸 배여진이 한창 거실에서 군것질하며 TV를 보다가 임유진이 들어오자 잔소리를 퍼부으려고 몸을 기울였는데 그녀 뒤에 서 있는 강지혁을 본 순간 흠칫 놀라며 시선을 떼지 못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말했다.“여기 잠시 앉아있을래? 나 방에 가서 외할머니 뵙고 올게.”“그래.”강지혁이 대답하곤 흔쾌히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의 행동은 전혀 어색하거나 무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임유진이 외할머니 방으로 들어가자 배여진은 대놓고 강지혁을 아래위로
“할머니 다 뵈었어?”강지혁이 물었다.“쉬고 계셔서 먼저 나왔어.”임유진이 대답했다.이때 배여진이 차 두 잔을 두 사람 앞에 내려놓았다.“유진아, 차 마셔.”임유진의 눈가에 의아한 기색이 역력했다. 전에 올 땐 단 한 번도 차를 내준 적이 없으니까.“유진아, 함께 오신 분 우리한테 소개해줘야지.”셋째 이모가 입을 열었는데 말투가 살짝 비아냥거리는 말투였다.“이쪽은 ‘지혁’이고요, 내 남자친구예요.”임유진은 일부러 강지혁의 성을 공개하지 않았다. 괜히 친척들이 그의 신분을 알고 무슨 소란이라도 피울까 봐.그녀는 단지 외할머니가 노후를 잘 보내시길 바랄 뿐이다.“남자친구?”배여진이 비명을 질렀다.“말도 안 돼!”그녀는 마치 임유진이 가당치도 않은 농담이라도 한 것처럼 혀를 내둘렀다.강지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배여진을 싸늘하게 쳐다봤다.순간 배여진은 살얼음장이라도 들어간 듯 온몸에 한기가 일고 심지어 내뱉는 숨조차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뭐 문제 되나요?”강지혁이 느긋하게 물었다.배여진은 가식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답했다.“아... 아니요. 저는 단지 유진이가 감방에 갔었고 이제 막 출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하니 너무 빨라서 그런 거예요...”그녀의 말 속에 담긴 뜻은 너무 명확했다. 임유진이 감방에 다녀온 일을 작정하고 끄집어내려는 것이다.임유진이 남자친구를 사귀었다는 건 상대가 절대 감방에 다녀왔다는 그녀의 과거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배여진은 굳게 믿었다.이런 꼼수를 임유진이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감방 다녀온 일을 지적당하고도 전혀 난처하지 않은 적은 그녀도 이번이 처음이었다.아마 옆에 앉아있는 사람이 강지혁이라 그런 듯싶다. 그는 임유진에 대한 모든 일을 알고 있으니까.강지혁은 배여진을 바라보는 눈빛이 더 짙어졌고 얼굴에 분노가 살짝 스쳤지만 곧장 입꼬리를 씩 올렸다.“그게 왜요? 난 유진이가 내 여자친구가 되어주길 간절히 바랐어요. 내 마음을 받아줘서 며칠이나 기뻐
이 남자는 다른 사람들이 임유진의 험담을 한 글자도 못 말하게 할 기세였다.배여진은 질투가 활활 타올랐다. 왜 임유진은 이렇게 잘생긴 남자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 게다가 감옥 다녀온 일도 마다하지 않는데 정작 본인은 일찌감치 결혼했지만 상대가 고작 대장장이였다.그해 시집가면서 적어도 남편이 손재주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예물도 그럴싸하게 줬지만 해가 갈수록 불만이 점점 커졌다.전에 배여진과 함께 어울리던 여자들은 죄다 큰 도시에서 잘 지내고 있고 판검사에게 시집가서 듣기만 해도 신분 상승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지만 그녀의 남편은 고작 대장장이다.몇 년 동안 그녀는 이런 생각에 빠져있었다. 애초에 너무 일찍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도시 남자에게 시집가진 않았을까? 적어도 대기업 다니는 회사원쯤은 만날 수 있을 텐데!“어머, 이분이 바로 유진의 남자친구분이셨어.”옆에 있던 셋째 이모가 덥석 끼어들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너 이번엔 소중히 여겨야 해. 지난번에 뭐랬더라, 돈 많고 능력 좋은 남자를 만났다고 했나? 그런 사람이 왜 너 같은 여자를 만나겠어. 그거 다 한순간의 신선감 때문이지. 이봐, 그새 차였잖아.”강지혁이 미간을 구기며 임유진을 바라봤다.“돈 많고 능력 좋은 남자라니? 누굴 말하는 거야?”“...”임유진은 이모가 강지혁을 말하는 거라고 대충 짐작이 갔다. 저번에 그가 위풍당당하게 마을로 찾아와 그녀를 구했으니까.다만 그땐 큰 외삼촌, 둘째 외삼촌, 셋째 이모까지 전부 박성호의 집에서 나오지 않아 강지혁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아니나 다를까 셋째 이모가 친절한 척하며 설명하기 시작했다.“다름이 아니라 예전에 유진이가 여기서 지낼 때 돈 많고 능력 좋은 남자가 한 무리 사람들을 거느리고 우리 집에 찾아와 얘를 데려간 거예요. 타고 온 차들도 전부 고급 차였어요. 그때 유진이가 얼마나 걱정되던지, 돈 많고 능력 좋은 남자가 유진이를 갖고 노는 걸 수도 있는데 얘가 무작정 빠져버리면 어떡하나 엄청 걱정했어요. 다행히 지금은
임유진이 강지혁을 떠난 건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오히려 그를 너무나도 많이 사랑해서, 그를 대신해 죽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해서, 그렇게도 지키고 싶었던 세 아이의 목숨을 잃을 각오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해서였다.그녀는 세 사이의 엄마면서 이기적이게도 아이들의 목숨으로 그의 목숨을 바꾸려고 했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말에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어머니를 너무 많이 사랑하고 또 철석같이 믿은 바람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아버지의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봤었기에 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원래 믿음이라는 건 배신당할 리스크를 어느 정도 쥐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믿지 않으면 배신당하는 기분 같은 걸 느낄 일이 없다.“그럼 5년 전에 네가 날 떠난 이유가 뭔지 네 입으로 한번 말해봐.”강지혁이 말했다.“그건...”임유진은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건 나도 아직 기억을 못 하고 있어.”그녀의 기억은 강지혁이 과거에 했던 행동을 용서해주기로 한 거기가 끝이고 그 뒤는 고이준에게서 오늘 막 들었으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하지만 그녀의 자신 없는 말에 강지혁의 빈정거림은 더더욱 짙어졌다.“그래? 그럼 기억을 다 되찾고 나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던가 해. 아무것도 기억 못 하면서 날 사랑한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지 말고.”임유진은 그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강지혁은 분명히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진 것을 알고 하마터면 정신을 완전히 놓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아무리 모든 걸 다 잊었다고 해도 그녀를 사랑했던 마음의 아주 조그마한 조각 정도는 남아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정말 이제는 그녀를 향한 마음 같은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건가?임유진은 그의 눈빛에 선명히 어려있는 빈정거림도 싫었고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태도도 싫었다.그래서 그녀는 욱하는 마음에 몸을 강지혁 쪽으로 확 기댔다.이에 강지혁은 어찌할 새도 없이 임유진의 아래에 꼼짝없이 갇혀버렸
“혁아,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이 말을 중얼거렸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이대로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기다란 속눈썹이 움찔 떨리더니 이내 강지혁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그리고 다 떠진 눈동자에 임유진의 얼굴이 그대로 비쳤다.임유진은 순간 그의 눈에 사로잡힌 포로라도 되는 양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고 마치 홀린 것처럼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그럼 말해봐. 네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그때 조금 잠긴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임유진은 그제야 번쩍 정신을 차렸다.“나는...”강지혁을 얼마나 사랑하냐고?그녀는 그를 위해 3년간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그의 행동을 다 알고도 과거의 원망을 다 내려놓겠다고 할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이 세상에서 자신을 이렇게도 사랑해주는 남자가 또 없을 거라는 확신과 이렇게도 마음을 다해 사랑할 만한 남자가 또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게다가 고이준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강지혁이 죽는 게 싫어 자신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선택을 했다고도 했다. 물론 기억을 잃은 강지혁은 이 사실을 전부 다 잊어버렸지만 말이다.“왜 말을 못 하지?”강지혁이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하긴 정말 날 사랑했으면 애초에 내 곁을 떠나지 않았겠지. 안 그래?”‘떠났다라... 혁이한테는 내가 내 두 발로 떠난 것으로 되어있으니까...’임유진은 꼭 심장이 뭔가에 의해 눌린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만약 네가 정말 나를 사랑했으면 그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했다고 해도 내 곁에 있었어야지. 아무리 내가 잘못했다고 해도 내 곁에 있었어야지. 안 그래?”강지혁의 목소리에 점점 빈정거림이 섞여들기 시작했다.“즉 너는 날 진심으로 사랑한 게 아닌 거야. 그러니까 날 대단히 많이 사랑한다느니 하는 말은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하지 마.”임유진은 그의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사모님, 회장님은 사모님과의 기억이 떠오를 때면 늘 저
그때 현이가 옆에서 큰소리로 외쳤다.“나도 좋은 동생이 될 거야. 그리고 오빠는 내가 지켜줄 거야!”부풀린 볼이 꺼진 걸 보니 이제는 자신이 동생이 된 걸 인정한 모양이다.강선율은 현이의 말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 떨렸다.‘동생이면서 나를 지켜주겠다고...?’아이는 오늘 온통 처음 겪는 것들투성이였다. 누군가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처음이었고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이게 바로 여동생이 생기면 느끼게 되는 진짜 기분인 건가? 소안나는 진짜 동생이 아니라 그간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던 건가?“사모님,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집사의 말에 임유진은 2층을 쳐다보았다.“혁이는요?”박건태는 1시간 전에 이미 저택을 떠났고 가기 전 임유진에게 강지혁은 그저 기억이 자극된 바람에 두통이 온 거라고 얘기해주었다.“방금 도우미가 물어보고 왔는데 입맛이 없으시다고 사모님과 아이들 먼저 식사하라고 하셨답니다.”‘혹시 두통 때문인가?’임유진은 속으로 생각하며 아이 둘을 데리고 식탁으로 향했다.하지만 저녁 식사를 다 마쳤는데도 여전히 강지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래서 임유진은 식사를 들고 직접 2층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계단을 막 오르려는 찰나 작은 손이 그녀의 옷을 살짝 잡아당겼다.이에 임유진이 고개를 돌리자 강선율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또다시 나랑 아빠 곁을 떠날 거예요?”아이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아니, 안 떠나. 율이랑 아빠 곁을 떠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야.”임유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켜 주었다.“율아, 엄마라고 불러줄래?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주면 엄청 기쁠 것 같아.”강선율은 그 말에 잠깐 흠칫하더니 그녀와 시선을 맞추는 게 부끄러운 듯 점점 볼을 붉히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엄마...”아직 마음의 문을 다 연 것은 아닌 듯했지만 임유진은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준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아들과는 5년이라는
“네, 자극을 차단하면 기억을 회복하는 데 지장이 생기게 됩니다.”박건태가 말했다.사실 그는 당시 처음으로 그에게 약을 처방해 주려 했을 때도 오늘과 똑같은 말을 했었다.다만 그에 대한 대답이 오늘은 조금 달랐다.“그럼 약 처방은 받지 않는 것으로 하지.”“네?”박건태가 조금 벙찐 얼굴로 되물었다.‘약 처방을 받지 않겠다고? 그렇다는 건...’“기억을 되찾으실 생각이십니까?”“그래. 오래 잊어버리고 살았으니 이제 찾을 때도 됐지.”강지혁이 가벼운 말투로 대답했다.“하지만 그렇게 되면 매번 더 심한 통증이 일 테고 그 통증으로 인해 회장님 몸이...”박건태는 침을 한번 삼키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회장님, 사람의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고통의 한계는 정해져 있습니다. 만약 그 한계선을 벗어나게 되면 어떤 상태가 될지 그 누구도 모릅니다.”강지혁의 기억은 일반 기억상실 환자들과 달리 기억을 되찾을 때 극심한 고통이 따른다. 그래서 만약 기억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사고라도 생기면 그때는 상상도 못 할 참담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강지혁이 입꼬리를 살짝 위로 올리며 웃는 듯 마는듯한 눈빛을 보냈다.“어디 한번 보고 싶네. 기억을 회복할 때의 통증이 더 강한지 내 몸이 더 단단한지 말이야.”박건태는 그 말에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를 몰랐다.눈앞에 있는 남자는 S 시 전체를 손아귀에 쥐고 있다고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하고 또 대단한 남자다. 즉 이 남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S 시 전체가 하루아침에 모습을 달리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그런데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누구보다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텐데 이 남자는 자기 목숨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기억을 회복하려고 하고 있다.분명히 4년 전에는 ‘그런 기억은 떠올리지 않아도 상관없으니까 약 처방해.’라고 했으면서 말이다.‘갑자기 왜 이런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거지? 혹시... 아까 봤던 살아 돌아온 사모님 때문인가? 하지만 정말...?
“내가 누나야. 아까도 봐. 아빠가 엄마한테 누나라고 했잖아!”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했던 누나라는 소리를 자신들의 관계에도 적용하려는 아이의 말에 진땀이 다 났다.1층에서 누가 더 큰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 때, 2층 서재에서는 강지혁의 검사가 진행되고 있었다.박건태는 강지혁에게서 두통이 시작된 계기와 통증의 정도를 확인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무래도 사모님의 말로 과거의 기억들이 자극을 받아 멋대로 머릿속에 떠오르게 된 것 같습니다.”사실 박건태는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머릿속의 혼란을 지울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에 강지혁에게서 거실에 있던 여자가 바로 그의 사망한 아내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으니까.만약 강지혁의 아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매스컴은 물론이고 S 시 전체가 들썩일지도 모른다.그리고 그렇게 되면 임유진은 S 시에 제일 꼭대기에 있는 여성이 될 테고 강지혁의 옆자리를 노리던 여자들은 닭 쫓던 개처럼 허망한 표정을 짓게 되겠지.“그럼 만약 앞으로도 그 여자가 예전을 떠올리게 할 만한 얘기를 하게 되면 또다시 오늘처럼 기억이 자극을 받아 두통이 일 거라는 소린가?”강지혁이 물었다.“그렇다고 봐야죠. 애초에 회장님의 두통이 시작된 계기도 사모님과의 짤막한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셨잖습니까. 그러니 사모님께서 돌아온 지금, 더더욱 그 기억이 자극을 받게 될 겁니다.”“그럼 내 기억이 완전히 다 회복될 수도 있다는 말인가?”강지혁이 또 한 번 물었다.“그럴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다만...”박건태가 말을 흐렸다.“다만 뭐지?”“다만 이런 식으로 기억이 회복되면 회장님은 매번 고통스러울 겁니다. 오늘도 고작 한 장면이 눈앞에 떠오른 것만으로 머리가 찢어질 듯 아프셨다고 하셨잖습니까. 앞으로는 사모님과 점점 더 자주 얼굴을 마주할 텐데 그렇게 되면 두통의 빈도도 커질 테고 통증도 점점 더 심해질 겁니다.”박건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사람마다 체질
여동생에게 안기면 이런 느낌인 건가?눈앞에 있는 여동생은 양녀로 들어온 또 다른 여동생과 많이 달랐다. 소안나는 매번 그를 보면 잘 보이려는 눈빛을 보내면서도 멀리 떨어진 채 가까이 다가오는 걸 무서워했는데 눈앞에 있는 여동생은 그의 손을 덥석 잡는 것도 모자라 엄마처럼 그를 꼭 끌어안아 주기까지 했다.강선율은 아까 임유진도 밀쳐내지 못하더니 이번에는 여동생의 포옹도 밀쳐내지 못하고 있었다.한편 임유진은 아이들이 꼭 끌어안은 채 감정을 나누는 모습에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강선율이 워낙 과묵하고 애어른 같은 면이 있는 아이라 조금 걱정이 됐는데 수다쟁이에 애교쟁이인 딸이 먼저 가까이 다가가 주니 둘 사이에 밸런스가 맞는 것 같아 참으로 다행이었다.게다가 강선율의 반응을 보면 현이를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잠시 후, 의사인 박건태가 저택에 도착했다.서둘러 소파로 다가온 박건태는 임유진과 강지혁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정신을 차리고 강지혁의 몸 상태를 살폈다.그런데 그때 강지혁이 서서히 두 눈을 뜨며 말했다.“이제 괜찮아졌어. 아까처럼 아프지 않아.”박건태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게 전에는 한번 아프면 적어도 몇 시간은 아팠었으니까. 그런데 집사에게서 전화를 받고 저택에 도착하기까지 고작 20분밖에 안 됐는데 전과 달리 정말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전혀 아픈 얼굴이 아니었다.‘증상이 전보다 괜찮아진 건가...?’“그래도 검사는 한번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회장님.”박건태의 노파심에 강지혁은 잠깐 생각하더니 이내 2층으로 올라가 검사를 받았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올라간 뒤 집사를 향해 물었다.“혁이 저러는 거 자주 있는 일이에요?”“그게... 사모님께서 곁에 없으신 뒤로 자주 두통 때문에 고통을 호소하셨어요. 근 2년간은 그래도 전보다 아프다고 하신 빈도가 줄었는데 오늘 갑자기 또 두통이 도졌네요. 아마 사모님을 봬서 두통이 재발한 것 같아요.”집사가 자신의 추측을 얘기했다.그리고
‘누나’라는 두 글자가 나왔을 때 임유진과 강지혁의 몸이 동시에 움찔했다.임유진은 너무나도 오랜만에 듣는 ‘누나’라는 소리에 조금 벙찐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당시의 강지혁은 그녀와 연인이 되어서도 가끔 둘만 있을 때 그녀를 누나라고 불렀다.그에게는 그녀가 단지 ‘사랑하는 여자’뿐만이 아니라 하나의 가족이기도 했으니까. 어쩌면 강지혁은 그녀를 누나라고 부름으로써 자신은 외롭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각인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임유진은 그에게 잡히지 않은 나머지 한 손을 들어 가볍게 그의 앞머리를 위로 젖힌 후 그의 관자놀이를 주물러주었다.“혁아, 나 여기 있으니까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편히 누워있어.”강지혁은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 때문에 상당히 놀란 듯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적인 놀람으로 머리가 아픈 것까지 다 잊어버렸다.왜 그녀를 누나라고 부른 거지?또한 처음 부르는 호칭일 텐데 왜 이토록 몇백 번이나 불러봤던 것처럼 익숙하고 또 자연스럽게 입에서 뱉어지는 거지?“너...”강지혁이 뭔가 물으려는 듯 힘겹게 입을 열었다.“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 머리 아플 때 자꾸 말하려고 하면 더 아플 거야. 이따 괜찮아지면 뭐든 대답해 줄 테니까 지금은 가만히 있어.”임유진이 그의 말을 끊고 다정한 목소리로 얘기했다.“그리고 손 좀 풀어줘. 내가 마사지해줄게. 그러면 조금은 괜찮아질 거야.”강지혁은 까만 눈동자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서서히 눈을 감고 그녀의 손목을 풀어주었다.임유진의 손목은 빨갛게 손자국이 나서야 드디어 그에게서 해방되었다.임유진은 분명히 그에게 잡힌 손목이 아플 텐데도 마치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아무런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적절히 힘을 조절해 가며 그가 아플 것 같은 곳을 세심하게 마사지해주었다.임유진의 몸은 마사지를 해주면서 자연스럽게 강지혁의 몸 가까이 기울어졌고 이에 강지혁은 마치 그녀의 숨결에 몸이 포근히 감싸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녀의 손길 때문인지 아니
“원해. 혁아, 나는 널 원해.”그리고 이건 임유진의 목소리였다.강지혁은 강선율을 꼭 끌어안고 있는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며 한 손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 눌었다. 그는 지금 마치 머리가 날카로운 바늘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팠다.“그럼 내 곁에서 떠나지 마. 평생 내 곁에만 있어.”“혁아, 난 널 떠나지 않아. 약속해.”“유진아... 유진아...”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임유진의 이름을 부르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꼭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게 그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하고 또 중요했던 일인 것처럼 말이다.대체 이 대화들은 뭐지? 5년 전에 그와 그녀가 나눴던 대화인 건가?“윽...”“혹시 또 머리가 아프세요?!”집사가 강지혁의 상태를 눈치채고 서둘러 다가왔다.강지혁은 그 질문에 뭐라고 대답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아팠다. 전에도 머리가 아픈 적이 간혹 있었지만 오늘은 특히 더 아픈 것 같았다.강선율을 안고 있던 임유진은 집사의 말에 아이를 놓아주고 서둘러 강지혁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혁아, 왜 그래? 어디 아파?!”강지혁의 얼굴은 어느새 하얗게 질려있었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으며 두 눈에는 고통이 가득 서려 있었다.“아무래도 또다시 두통이 도진 것 같아요. 지금 당장 박 선생님을 부를게요.”집사는 서둘러 휴대폰을 집어 들고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유진은 고통스러워하는 강지혁을 보다가 탁자 위에 있는 티슈를 뽑아 그의 땀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가까이 가져갔다.그런데 이마에 티슈가 닿기도 전에 강지혁의 손에 의해 막혀버리고 말았다.“뭐... 하는 거야...”강지혁의 입에서 힘겹게 말이 뱉어져 나왔다. 두통이 심한 탓인지 목소리까지 덜덜 떨려있었다.“너 땀 닦아주려고 그래.”임유진은 강지혁에게 잡힌 손목이 무척이나 아팠지만 아프다는 걸 티 내지는 않았다.“혁아, 많이 아프면 아무 말도 하지 마. 말을 하면 할 수록 점점 더 아파질 거야. 그리고 조금만 참아. 의사
혹시 집사나 고이준이 얘기해줬나?임유진은 그 생각에 고개를 돌려 집사와 고이준을 바라보았다. 이에 두 사람은 그녀에게 자신들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아빠랑 함께 엄마 성묘하러 갔을 때 묘비 옆에 놓인 엄마 사진을 봤어요.”강선율이 답했다.임유진은 아들의 말에 이번에는 정말 사레에 들리고야 말았다.그녀는 시선을 홱 돌려 태연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있는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율이를 데리고 내 성묘하러 까지 갔어? 아니 뭐... 혁이는 내가 죽었다고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왜 엄마 성묘하러 간 거야? 그리고 왜 묘비 옆에 엄마 사진이 있어?”그때 강선현이 궁금하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엄마가 돌아가셨으니까.”강선율이 대답했다.“엄마 살아 있는데?”“다들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했어.”“아니야. 엄마 안 죽었어.”아이들은 임유진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에 관해 열띤 토론을 펼쳤고 임유진은 이에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두 아이 사이에 끼어들었다.“그만! 엄마는 보다시피 이렇게 잘 살아 있고 죽었다는 건... 오해야! 율아, 엄마 돌아왔어. 그간 율이 곁에 있어 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앞으로는 절대 율이 곁에서 떠나지 않을게.”임유진의 눈가는 어느새 빨갛게 물들어있었고 목소리는 잔뜩 메어있었다.그녀는 세쌍둥이가 그녀의 뱃속에서 힘차게 발길질을 하던 순간을 지금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전에는 기억을 잃어 현이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이렇게 율이까지 만나게 되었다.다만 잔뜩 격앙된 임유진과 달리 강선율의 얼굴에는 그 어떤 표정 변화도 없었다. 마치 엄마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게 아이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닌 것처럼, 엄마라는 존재가 그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존재가 아닌 것처럼 강선율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떠나도 괜찮아요.”강선율이 입을 열었다. 아이는 얼굴만 닮은 것이 아니라 말하는 말투까지 강지혁과 똑 닮아 있었다.임유진은 아이의 말에 더더욱 눈시울이 빨개졌다.5년이라는 시간 동안